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때 캐나다는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춘기 시절엔 모험심이 강해져서 그런가 낯선 외국에서의 삶이 지금의 지루한 현실을 끝장낼 수 있는 커다란 기회라 여기게 된다. 내가 그랬다. 캐나다는 그런 곳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직장 관계로 몇 년간 거기에 계셔야 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데리고 가는 것도 허락되었다. 동경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졸랐다. 하지만 거부되었다. 교육이 원인이었다. 아버지는 대화가 거의 없는 나와 단 둘이 지내는 것을 거북해하셨고 어머니는 그런 상황에서 그렇지 않아도 자기 관리가 되지 않는 내가 더욱 나빠질 것이라 예상했다. 본디 못하게 하면 거기로 향한 열망은 더욱 거세어지는 법이다. 그것도 던지기만 하면 바로 넣을 수 있는 농구 골대와 같다면 더더욱 그렇다. 엄청 싸웠다. 하지만 사춘기의 저항이란 게 다 그렇듯이 대야의 가득한 물에 스포이트로 우유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도 같이 효과는 미미했다. 부모님은 내가 아무리 악을 쓰든 모르쇠와 침묵으로 응대했고 결국 내가 먼저 제 풀에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진 혼자 떠나셨다. 난 배웅하러 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그게 내 저항의 마지막 몸짓이었다. 입 안의 톱밥을 씹는 듯한 나날인데도 가정은 평온을 되찾아갔다. 상실로 인한 고통은 온전히 당한 자의 몫일 뿐이라는 걸 그 때 새록새록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로드킬'당한 사슴의 사진이었다. 편지엔 아버지가 운전 중에 도로에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그만 들이받고 말았다고 적혀있었다. 평생 벌점 하나 받지않을 정도로 모범운전자였던 아버지로서는 비록 동물이긴하나 자신의 운전으로 하나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사진은 얼마나 놀랐는지 알림과 동시에 가족의 위안을 구하기 위해 보내진 것이었다. 그러나 내겐 다르게 보였다. 그건 나 같았다. 차가운 눈 바닥에 쓰러진 좌절된 내 소망의 시체. 이루지못한 꿈이 파열된 주검이 되어 거기 버려져 있었다. 위로의 말을 기대하셨던 아버지에겐 죄송하지만 그것으로 밖에는 안보였다. 앞서도 말했듯 아픔은 오로지 혼자서 감내해야 한다. 사람은 가시에 찔린 조그만 아픔조차 대신해 줄 수 없다. 누구도 사슴 대신 죽어줄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그 사슴은 과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지 예측했을까? 어느 겨울 밤, 먹이 혹은 쉴 곳을 찾아 늘 건너가곤 했던 그 곳에서 뜻밗에 나타난 한 동양인의 차에 치어 죽게되리라고 과연 알 수 있었을까? 몰랐으리라. 내가 그냥 손만 뻗으면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캐나다로의 이주가 물거품이 될 줄 몰랐듯이, 아버지가 늘 다니던 퇴근 길에서 한 생명을, 그것도 머나 먼 이국의 땅에서 빼앗게 되리라는 걸 몰랐듯이. 삶이 무서운 것은 늘 이렇게 뜻밗의 곤경을 어딘가에 준비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가운데 치즈가 놓인 쥐덫과도 같이. 사슴의 죽음은 그것 때문에 내겐 더욱 모골이 송연한 장면이었다. 삶의 무자비한 손 끝에서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한 '리얼'로 보여주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탔다는 작가,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디어 라이프(Dear Life)'는 캐나다 작가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먼저 사슴의 삶을 뜻하는 'Deer Life'로 들렸다. 왕의 목덜미를 겨냥한 다모클레스의 칼과도 같이 언제 어디서 떨어질지 모르는 삶의 곤경 앞에서 무방비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하디 연약한 그 사슴과도 같은 우리네 삶을 연상시켰다. 비록 제목은 달랐지만 예측은 들어맞았다. 소설이 정말 그런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실린 14개의 단편들은 모두 어느 순간 닥쳐올지 모르는 '로드킬'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첫 시작을 여는 단편 '일본에 가 닿기를'의 여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안정된 삶을 붕괴시킬지도 모르는 모험을 요구하는 뜻밗의 유혹이거나 '자갈'의 주인공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 일어난 사고로 가족을 잃는 뜻밗의 비극이기도 했다. 아니면 '코리'에서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고이거나. 혹은 '돌리'에서처럼 갑자기 나타난 남편의 옛 애인이거나 '기차'에서처럼 문득 듣게 된 상상할 수 없었던 충격적 고백이기도 했다. 그렇게 '디어 라이프'는 살면서 갑자기 당하게 될 지도 모를 '로드킬'들을 하나의 슬프고 아련한 꿈이거나 잠시 이마에 주름을 만들고 신음을 내게 만드는 나쁜 꿈처럼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아문센'의 여주인공처럼 갑작스런 이별로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늘 그 장소과 시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거나 혹은 '기차'의 잭슨처럼 어디서도 머무를 수 없게 만드는 그리고 '메이벌리를 떠나며'의 리아처럼 쌓인 세월이 반창고가 되어준 듯 어느덧 그 아픔에 익숙해질 순 있지만 그래도 갑자기 어느 저녁무렵 문득 까닭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그렇게 우리를 '상실 전문가'로 만드는 것들을...

  지금 그에게 있는 것. 그가 지닌 것은 오직 결핍이었다. 산소 결핍이나 심폐 기능의 결핍 같은 그런 것. 그 증상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
  상실 전문가. 그녀를 그렇게 불러도 좋으리라. 그녀와 비교하면 그는 초보였다. 지금 그는 그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예전에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을 상실했다. 상실한다. 상실되었다.(p. 118)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고 '아문센'의 여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거기에 '상실'도 그렇다고 하고 싶다. 그 문장으로 인화된 '로드킬' 사진들을 죽 대하면서 똑똑히 깨달았다. 한 번 도려낸 상실은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그저 우리는 '자갈'에 나오는 닐의 조언대로 그 감각에 익숙해지면서 아픔을 조금씩 마모시켜 갈 뿐이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 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p. 142)

 내게 캐나다가 그랬듯이, 우리에겐 누구나 '아문센'이나 '호수가 보이는 풍경'에서 주인공이 찾고자 했던 병원 같은 곳이 있다. 아무리 원하지만 어떻게 해도 다다를 수 없는 곳. 늘 나와는 저만치의 간극으로만 남게 되는 어떤 사람이거나 것들이.

 닐은 그 간극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닿고자 하는 마음을 오컴의 면도날처럼 잘라버리면 편해진다고. 행복은 의도된 착각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어쩌면 위안이기도 한 이 말에 그러나 난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상실된 것을 어떻게든 메우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뭔가 관점이 협소하다고 느꼈다. 사실 우리는 노력한다. '로드킬'을 막기위해 표지판을 세우듯, 덤불 속에 웅크린 보이지 않는 늑대를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뒤 미지의 보복이 두려워 도시를 만들었던 것처럼 프로이트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우리의 문명이라는 것 또한 사실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한 걸 가만히 들여다볼라치면 우리의 안정이란 게 오로지 불안이 잠재된 외부를 잘라내는 것으로만 얻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한 것은 닐의 조언 그대로였던 것이다. 간극이 놓여진 이유를 이해하기 보다는 무시해버림으로써 얻어진 테우리 속의 일시적 행복. 2001년의 9.11이나 2011년 일본 쓰나미에서 보듯 단지 세계가 거대한 힘으로 건드리지 않을 때에만 겨우 존재할 수 있는. 배가 아플 때 발라주는 '빨간 약'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소설 속 인물들도 그랬다. 비슷한 방법으로 '로드킬'을 피하려했다. '아문센'의 여주인공은 엘리스터와의 사랑을 위해 메리를 배반했고 '기차'의 잭슨은 다시 부머랭처럼 돌아온 옛사랑을 져버렸다. '코리'의 주인공이 뒤늦게 깨닫게 된 사건의 진실도 결국은 애인의 배신이었다. '디어 라이프'의 단편들은 자주 하나의 종교가 지배하는 공동체를 그리고 있는데 이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안식처'의 재스퍼 이모부가 속한 공동체가 잘보여 주듯이 종교란 것도 알고보면 외부를 잘라버림으로써 구가하는 내적 만족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엔 '자기 중심적'이란 게 자리잡고 있다. 내가 아버지가 보내온 사진에서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내 감정만 투사했듯이, 삶의 모든 경험을 혼자 짊어져야 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게 유용한 쪽으로만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태도가 드러난다.

 앨리스 먼로의 문장으로 인화된 '로드킬'의 사진들을 대하다보면 그녀가 천천히 흐르는 강물에 떠가는 배의 속도로 서서히 우리의 시야를 넓혀간다는 게 느껴진다. 그녀는 우리가 너무 우리만의 아픔에 골몰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도록 만든다. '로드킬'은 당한 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도 어쩌면 그 '로드킬'의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뒤로 갈수록 점점 쌓여져 가는 '로드킬'의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그런 걸 느끼게 된다. 사건의 중심은 천천히 '당한 나'에게서 '가한 나'로 옮겨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당했을 때는 보였던 아픔이 가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당한 사람은 사라지는데 그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너의 행복을 보존하기 위해 간극을 잘라버려라'라고 했던 닐의 조언에 충실했던 우리들은 피해자인 그들에게도 똑같이 대했던 것이다. 보지 않고 잊어버리면 그 뿐이었다. 없는 셈치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내 에로틱한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사이, 그들은 떠나버렸다. 그들 중 몇몇이. 대부분이. 영원히 떠나버렸다. (p. 389)

  언젠가 우연히 버스 안에서 중학교 동창생 하나를 만났다. 한동안 나를 정말 못살게 굴던 녀석이었다.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었던 나는 녀석에게 그 때 왜 그랬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한 짓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때는 그런 장난 으례 다 치는 것 아니냐, 뭘 그런 것까지 다 담아두고 있냐'며 날 타박했다. 황당했다.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지? 난 그 시간에 교실로 들어온 햇살의 밝기까지 다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데 살다보니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상처를 준 사람들은 그 일을 쉽게 잊었다. 늘 그럴 수도 있다는 말과 순진한 웃음으로 무마했다. 인간들은 자신에게 편한 것만 기억했다. '뇌과학' 책을 보니 아예 우리의 두뇌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자신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고 불확실한 자연에 스스로를 길들여가다 보니 그렇게 진화했다고. 그렇다면 나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 언젠가 가해자의 모습이 되어 누군가를 '로드킬'시켰을 지 모른다. 일부러 서둘러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자전적이라는 마지막 단편 '디어 라이프'에서 앨리스 먼로가 자신의 어머니가 한 일을 떠올릴 때 나 역시 이런 생각으로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내 뒤에 놓인 그 긴 망각의 그림자 속에 어떤 내가 가한 '로드킬'의 희생자들이 있을지 몰라서.

 결국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나와 만나게 하는 책이었다. 난 여지껏 삶에서 잃어버린 것과 치뤄야만 했던 대가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내가 빼앗은 것과 타인에게 입혀버린 손해는 없는지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캐나다에 보내달라고 악다구니 할 때의 부모님이 과연 어떠한 마음이셨을지 하는 것들을. '호수가 보이는 풍경'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문제는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것 처럼 그렇게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바뀌게 되었다. 더이상 나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자리로 옮겨 갔다. '시선'의 주인공은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세이디라는 여인의 죽음을 맞닥뜨린다. 세이디는 '로드킬'을 당했다.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충격과 처음으로 시신을 마주한다는 공포 앞에서 주인공은 세이디의 눈꺼풀이 조금 들썩이는 걸 본다. 엘리스 먼로는 그 눈의 크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당신이 그녀라면, 당신이 그녀의 몸 속에 들어갔다면 속눈썹 사이로 밖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만. 어디가 밝고 어디가 어두운 지 분간할 수 있을 만큼만. (p.350)

 이 단편집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더욱 눈에 들어오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적어도 이 정도는 우리가 타인에게 배려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조금만 더 내 내부를 허물어 타인을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것이 닐의 조언보다는 더 '로드킬'에 대한 불안과 아픔을 줄이는 길이 아닐까 싶어진다. '시선'의 주인공은 언제까지나 그 '들썩임'을 기억한다. 언제나 그 타자의 입장으로 들어서게 만드는 '들썩임'을. 앨리스 먼로의 이 소설도 내게 그러할 것 같다. 언제나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사슴의 사진처럼.
 
 언젠가 정말로 캐나다에 가게 된다면 그 장소를 찾아가보고 싶다. 거기서 아버지를 대신해 속죄하고 살면서 내 아픔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을 덜어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3-12-21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써야지 하고 읽어보면서 다른 일을...^^
캐나다 하면 빨강머리 앤이 생각나는군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 정말 있을까요 이 말 보니까 에드워드 왕자군요 앤이 살던 초록지붕집 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사람들이 아주 많이 찾아온다고...

캐나다에 가 보고 싶으셨군요

자신이 슬픈 일을 겪으면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를 수 있지만 자신한테 안 좋은 일은 남한테도 하지 않는 게 좋겠죠 그래야 나중에 그때 왜 그랬을까 하지 않죠


희선

ICE-9 2013-12-22 22:44   좋아요 0 | URL
와! 저도 빨강머리 앤 정말 좋아해요. 그 뒷 이야기까지 다 읽었을 정도록^ ^ 그린 게이블즈가 유명한 관광 명소라는 이야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저 역시 언젠가 그 곳에 꼭 한 번 가보고 싶네요^ ^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몸이 따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계를 긍정하면서 조금씩 바깥으로 넓혀가야겠죠. 책을 읽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 해요. 좀 더 타인과 공감하면서 배려의 폭을 넓혀 가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
 
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승우의 소설은 참 오랜만입니다. 나름 감명깊게 읽었던 그의 초기작들 '생의 이면'이나 '에리직톤의 초상'. 하지만 이제는 그 내용조차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이니 정말 오래되긴 오래되었나 봅니다. 사실 그 두 작품을 끝으로 내내 이승우의 소설과 인연이 없기도 했지요. 그런데 마침 좋은 인연이 닿아서 최근에 나온 신작 '지상의 노래'를 벗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도 나름 리뷰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얻게 되는 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살면서 늘 평행선처럼 지내오던 작가의 작품과 뜻하지 않는 조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해설을 쓴 평론가 정영훈에 따르면 이승우의 소설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고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지상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는데 이 말을 듣고 뭔가 힌트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에 토대를 둔 어쩌면 강박에도 가까운 반복. 이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과도 비슷한데요 저는 거기에 대한 어떤 죄의식 같은 것이 있어서 나타난 결과는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그래서 약력을 살펴봤습니다. 전라남도 장흥 출신. 그걸 보고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물론 너무 무리한 억측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한 때는 왕성했었으나 미스터리하게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천산 수도원'은 어쩌면 5. 18 광주의 은유는 아닐까 하고 말이죠. 

 사실 작품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천산 수도원'을 5. 18의 광주로 해석해도 별 무리는 없습니다. 일단 그 천산 수도원의 존재가 '천산 벽서'를 통해 알려진다는 게 그렇습니다. 여기서 '천산 벽서'란 천산 수도원의 폐허 지하에서 발견된 벽마다 빼곡히 누군가가 써 놓은 성경 글귀들을 말합니다. 

 어둡고 습한 그 지하 방에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글자들로 가득한 벽을 보았다. 글자들은 가로세로 줄을 따라 반듯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대부분 검은색이었지만 군데군데 빨강과 초록, 노랑이 섞여 있었다.  색을 입히거나 장식을 해서 도드라지게 보이는 글자들도 있었다. 처음에 강상호는 그것이 독특한 디자인의 벽지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벽지가 아니라 흙벽 위에 직접 글씨를 쓴 것이었다.(p. 19) 

 이것이 바로 '천산 벽서'라는 것입니다. 이 존재로 인해 천산 수도원이 관심을 얻게 되고 결국 그 수도원에 얽힌 비극적 비밀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5. 18의 광주를 알게 되는 과정과 너무도 똑같습니다. 5. 18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그들의 허약한 정당성을 굳건히 하기 위해 본보기로 희생양을 하나 고르는데 그것이 바로 광주였죠. 거의 학살이나 다를바 없는 그들의 만행을 숨기기 위해 당시 광주는 절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깥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 진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과 신문들은 광주가 빨갱이에게 점령당했다고만 떠들어대었구요. 오죽 하면 광주 시민들이 광주 MBC에 불을 질렀을까요. 아무튼 아무도 정말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진실이 나중에 기록이나 문학등의 형태로 글로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우리가 5. 18 그 날의 광주를 알 수 있었던 것도 '천산 벽서'와 같은 '글'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유사합니다. '천산 수도원'에 처참한 비극이 일어났던 때(작품에서 정확한 연도는 표기되지 않습니다만 정황상)와 5. 18 광주가 일어났던 때가 말이죠. 더구나 그 비극이 일어나게 된 이유조차 비슷합니다. 오로지 도래할 주님의 나라만 믿고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은둔자로 살아가던 그들이 새로 정권을 잡은 무리들에게 그런 일을 당해야 했던 것은 정권이 그들에 대해 가진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천산 수도원 소개를 명령한 장군의 입을 통해 직접 증명됩니다. 

 시국이 그렇잖아요. 시국이. 상상력을 발휘해 봐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요. 어떤 요인에 의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어요. 변수가 너무 많은 세상이에요. 99퍼센트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하면 1퍼센트의 가능성이 일을 성사시키기도 하잖아요? 1퍼센트나 99퍼센트나 뭐가 달라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사람 속을 누가 알아요? 사람은 아무리 거룩해져도 어쩔 수 없이 속물이지. (...) 내 말의 요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섣부른 단정을 하지 말자. 그거예요.(P. 208) 

 아마 당시의 광주가 학살을 당했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겁니다. 어쩌면 신군부가 광주 학살을 저질렀던 진짜 이유가 이런 형태로 변형되어 작품 속으로 녹아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렇게 천산 수도원이 그 때의 광주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참 많은데요. 이렇게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왜 한결같이 죄의식이 존재하게 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의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입니다. 천산 수도원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강상호의 동생 강영호는 형이 그렇게 타국에서 비명횡사할 때까지 제대로 형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그 뒤에 나오는 소년 '후'는 사촌 누나 연희를 박 중위의 손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천산 수도원의 비밀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열쇠인 '장' 노인은 천산 수도원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구요. 이렇게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된 인물들 모두에게 각인되어 있는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사실 우리가 5. 18 광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죄의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강영호, 후 그리고 장 노인은 5. 18 광주라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현실의 바로 우리들 모습이라는 것이죠. 아마도 작가 이승우가 자신의 작품 속에 내내 우려내고 있는 그의 죄의식 역시 분명 거기와 맞닿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좀 무리를 해서 단순하게 이 '지상의 노래'를 정의하자면 한 마디로 다시금 불러내는 광주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네, 이 소설은 일종의 광주를 위한 '초혼(草魂)'입니다. 지금 우리 세대에서는 거의 희미할 정도로 지워져버린 그 아픈 역사를 다시금 망각의 늪에서 길어 올려 새로이 뇌리에 되새기려는 '소환'입니다. 천산 수도원의 희생자들이 얼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그야말로 죄로 부터 순결한 영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광주 시민들 또한 그랬습니다. 하지만 남들의 피를 밟고 가진 자들의 무분별한 두려움으로 아무 이유도 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건 정당하지 못한 권력이 힘을 가지게 되면, 그리고 그 힘이 어느 하나로 집중하게 되면 어떤 비극이 우리들에게 닥쳐올런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잊어서는 안될, 잊혀서는 안될 기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천산 수도원이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의 폐허가 되어버렸듯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직 그 때 희생된 자들의 한이 채 풀리지 못했는데도 말이죠. 이것은 소설 속에서 사라진 연희를 통해 표출됩니다. 아직 우리가 광주를 떠나보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박 중위로 부터 유린을 당하고 믿었던 삼촌(후의 아버지이기도 한)에게서 배신을 당한 연희가 겪는 고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죠. 후가 다시 찾은 연희는 여전히 폭력으로 인한 공포와 배신에 대한 상처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녀가 겪었던 그 폭력과 배신은 그대로 당시의 광주 시민들이 겪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진압군의 인정사정 없는 무자비한 폭력. 그리고 이렇게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도와주러 오지 않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그 때의 광주 시민들 역시 연희와 똑같은 것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희는 천산 수도원이 이렇게 폐허로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통 받고 있습니다. 광주의 기억은 과거 한 때의 일이 되고 말았을지 모르지만 희생당한 자들의 고통은 지금도 현재형인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잊혀서는 안되는 일인 것이죠. 늘 그 때 광주에 누구에 의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기억 속에 새겨두어야 하는 것이죠. 아직도 여전히 그 고통 속에 떨고 있는 무구한 희생자들이 있으니까요. 천산 수도원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그 시신들처럼 말이죠. 

 그럼, 그들의 넋은 언제 제대로 위로를 받게 되는 걸까요? 그건 아주 작은 자 하나라도 그의 처지를 고려하고 배려하게 될 때입니다. 우리 앞의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때입니다. 천산 수도원에서 내려와 후가 겪게 되는 일들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더우기 이것은 천산 수도원의 비극을 초래한 까닭으로 더욱 강조되기도 합니다. 그 때 천산 수도원이 고립되고 결국 학살되었던 것은 모두 타인을 믿지 못하는 두려움이 원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천산 수도원 사람들은 누가 오든지 그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줍니다. 박 중위를 찌르고 달아났던 후를 아무 이유없이 받아주었고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정권 안정을 위해 온갖 못할 짓을 도맡아하던 한정효가 아내의 죽음을 통해 그런 더러운 일에 환멸을 느끼고 물러나려 하자 정권이 그 입이 두려워 천산 수도원에 유폐시켰을 때에도 천산 수도원은 두말없이 받아주었습니다. 그 누가 어떤 일로 오든지 천산 수도원에선 모두 동등한 '형제'였습니다. 

 '지상의 노래'는 바로 이것이 그들의 원한을 제대로 씻겨줄 수 있는 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모두 우리의 형제로 대하는 것 말이죠. 두려움은 언제나 '나만' 생각하고 위할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가진 아픈 광주의 역사 또한 궁극적으로 그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그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를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할 '형제'로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내 두려움을 씻기 위해 유린해야 할 타인들이 아닌 배려와 존중이 마땅히 의무가 되어야 할 형제 말이죠. '천산 벽서'는 바로 그런 지상의 노래였습니다. 모두가 형제가 될 수 있는 세상을 향한 그리움과 염원이 담긴 노래였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후는 세상에서의 모든 여정을 끝내고 돌아와 한정효가 미처 끝내지 못한 벽서를 완성합니다.  그는 그 벽서를 쓰면서 이런 것을 느낍니다. 

  마지막 순간에 형제가 '형제'라고 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후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그를 부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만 부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형제가 아니라 형제들을 불렀다. 형제로서 그는 형제들과 같이 있었다. 형제로서 그는 형제들과 같이 있어야 했다. 형제들이 그 때문에 그를 그곳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P. 342)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 역시도 그러합니다. 다시는 5. 18의 광주와 같은 그런 비극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 모두가 동등한 그리고 하나된 형제가 되기 위한 그 '참여' 속으로 당신을 부르는 이야기 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세기 라디오 키드 -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유쾌한 빈혈토크
김훈종 외 지음, 이크종 그림 / 더난출판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읽으면서 배가 아팠다. 왜 이렇게 다들 재미지게 살고 있는거야!
 그래, 나 속좁다. 남들이 나보다 재미있게 삶을 즐기고 있는 거 붕어빵을 먹었는데 앙꼬 대신 소금이 가득 들어있는 것처럼 얼굴 찌푸린다. 특히 이재익 작가. 대학 시절부터 미녀들을 골라 차에 태우고 다니며 클럽을 전전하기만 했는데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하는데 그거 읽다가 그만 덮어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책에 이렇게 행복한 이야기만 있으면 어쩌라는거야? 다른 이들의 삶은 이토록 시궁창 같은데... 영락없이 우리는 땡볕에 사막을 횡단하고 있는데 이들은 오아시스 속에서 둥가둥가 우쿠렐레나 튕기고 있는 꼴이잖아!

  뭐? 내 배를 식중독처럼 아프게 만든 책에 대한 소개가 정작 없다고? 구태여 궁금해할 것 까지는 없을 것 같지만, 그렇게 물으니 말해줄 수 밖에 없을 것 같네. 좋아. 그 책, '20세기 라디오 키드'라는 책이다. 실물이 궁금해? 실물은 이렇게 생겼다.


 속이 왠지 더부룩 답답할 때,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된다면 한 번 들춰보면 되겠네. 그러면 설사약을 먹은 듯이 화악 내려갈테니까. 무협에서 흔히 말하듯, 독은 독으로 치유한다는 말을 믿는다면 말이지. 복통을 복통으로 다스려보는 것도 새로울 것 같기는 하다. 그건 그렇고, 제목이 라디오 키드인데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세 명이 공저했는데 그 저자들이 모두 SBS 라디오 피디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의기투합하여 어제까지 살아온 이야기, 오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그걸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게 바로 이 책이다.

 놀만큼 놀았고 재미를 느낄만큼 느꼈고, 또 즐거움을 추구할대로 추구하면서 살아갈 이들의 이야기가 한 권에 담겨 있는 셈. 그러니 나처럼 어렸을 때 별 추억도 없고, 젊었을 때 화끈하게 놀지도 못한 사람은 읽으면서 어째 배가 살살 뒤틀리듯 다소간의 경련을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이야기들이 독자에게 마치 '메롱' 하듯이 실려 있는 것이다.  

 이 낼름거리는 혀와도 같은 책은 일종의 추억담 모음집이다. 재미지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 모습만 뚝 떼놓고 보면 우리가 살아온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을 이들의 추억이 여름방학 숙제로 흔히 했던 곤충채집처럼 핀으로 꽂혀있다고 보면 과녘 적중이다. 에잇! 단적으로 말해버리자! 그래, 이 책은 '키덜트'들을 위한 책이다. 키덜트인 그들이 키덜트들에게 배철수의 노래와도 같이 '모여라!' 하는 책. 그것이 바로 '20세기 라디오 키드'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껏 나와서 역시나 일본에서 키덜트 붐을 일으켰던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제목 '20세기 소년'을 패러디한 그대로 말이다. 그렇게 키덜트의, 키덜트에 의한, 키덜트들을 위한 책이다.

 사실 이 키덜트들은 요즘 마케팅의 주요 타겟이다. 일본이 그랬듯이 자신의 추억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소비를 하는 이들은 상품을 팔고자 하는 이들에게 군침이 도는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다. 요즘 '응답하라 1994' 가 대세다. 얼마전 신문 보도를 보니 요즘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3위가 바로 '응답하라'라고 한다. 이 '응답하라'가 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추억'이다. 어렸을 적, 혹은 젊었을 적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었던 것들.

 '응답하라'는 사라져 버려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과거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 시대의 물건, 그 시대의 스타, 그 시대의 감성 속으로.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의 나로 언제까지나 있고 싶은 키덜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인 것이다. 이 책도 그와 비슷하다. 그 시대의 추억과 감성 속으로 우리를 깊숙이 데려가려고 (애를) 쓴다. '솔직히 말해. 당신도 나와 비슷한 걸 겪었잖아?'하고 책이 말해오면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끄덕이게 된다. 비슷한 경험이 공감의 바탕을 형성하고, 그 공감의 파동 속에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과거 속의 나를 삽입하면서... 

 키덜트는 일종의 퇴행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퇴행은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무의식적 몸부림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단순하게 말해, 현재의 삶이 힘들면 힘들수록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다. 그 과거가 정말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오늘의 고통을 잊고 싶은 마음이 그것을 아름답게 채색할 뿐이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키덜트의 만개는 과거에도 있었다. 지금은 깡그리 잊혀졌지만 '아이러브스쿨' 말이다. 어린시절 동창생을 다시 만나게 해 주었던 그 '아이러브스쿨'이 성행했을 때 한국은 IM로 휘청이고 있었다. 갑자기 닥쳐온 엄청난 한파. 그 현실의 강추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덥혀줄 온기를 과거에서 찾았다. 아무 걱정없이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그 때에게서. 그렇게 그들은 과거로의 퇴행을 통해서 현실의 고통을 무마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 현실은 현실!
 과거는 그저 유희의 대상일 뿐, 거기서 현실의 치유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건 오늘의 모습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뭐, 다들 유희로만 즐기고 있는데 나만 괜히 진지해져서는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이면 좋겠지만. 다행히, 이 책엔 그리 깊은 이야기는 없다. 그저 '그땐 그랬지' 하는 정도의 낄낄거림만 있을 뿐. 문방구 앞에서 동전을 넣고 게임을 하듯, 그렇게 잠깐 과거에 젖어볼 수 있는 책이다. 우연히 학창시절 동창생을 만나 옛날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취하기 위한 술이라기 보다는 질겅질겅 씹으며 수다를 돕는 안주로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아픈 배를 쥐어가며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다. 나름 진지해져 버리는 바람에 머리도 아프다. 어쨌든 난 리뷰를 이렇게 남겼고 읽느냐 마느냐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다. 아무튼 내가 여기서 분명히 경고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마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 7일]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화의 '제7일'은 절망의 소설이다.

 달리 뭐라 말할 수 없다. 만일 위화에게 데스노트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는 거기다 '희망'을 적었을 것이 분명하다. 위화의 판도라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자를 다시는 열지 않았다. 세상은 광막한 어둠 속에 한 점의 불빛도 없이 사위어만가고 그 무게에 짓눌린 우리들은 압력으로 말려들어가는 몸처럼 침묵한다. 차마 신음마저 낼 수 없을만큼 말을 빼앗긴 우리들은...

 

 더욱 아파한다. 이건 중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서. 거기서 유령이 된 자들은, 아니 되어야 했던 자들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해서. 초등학생 소녀는 아침에 학교 갈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학교 갔다온 사이 철거 용역들에게 완전히 헐려 폐허가 된 그 곳에서 숙제를 하며 엄마와 아빠를 기다린다. 바로 자신의 발 밑 콘크리트 아래 그녀가 기다리는 부모님들이 깔려 죽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고향의 가산을 정리해서 낯선 도시로 일가족이 옮겨와 식당을 열었던 탄가네는 공무원들이 밥값을 내지않고 가는터라 늘 적자에 허덕인다. 장밋빛 꿈은 철면피 같은 정부의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다가 더 가혹한 보복을 받을까 두려워 끙끙 앓기만 하다가 화재가 일어난 날, 그 억울함과 분노가 사무친 나머지 정작 화마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밥값을 내지 않고 달아나는 사람들만 보여 그들을 막다가 그만 몰살당한다.

 

 희망은 없다.

 모든 희망을 가진 존재들은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의 꿈을 조금이나마 이루어주려고 없는 살림에 과외까지 하려고 했지만 정작 주인공이 과외 선생을 하러 온 첫날 죽음을 당한다. 탄가네와 똑같이. 뭐가 있으랴. 태어날 때 우연한 사고로 기차 바깥으로 버려진 주인공은 또한 어떠한가? 하지만 그는 근처 선로에서 작업하던 지금의 아버지에게 주워져서 보살핌을 받는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그였지만 아버지로서 최선을 다한다. 물론 단 한 번, 그도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가 생겨서 어린 주인공을 버리긴 했지만. 하지만 버린 당일 밤, 그는 그걸 뼈에 사무치게 후회했고 바로 달려가 주인공을 데려왔을뿐 만 아니라 다시는 주인공을 버리지 않기 위해 아예 여자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여자와 인연을 맺지 않는다. 그는 오직 아들인 주인공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다. 그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이었고 그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었다. 그만한 헌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답은 하나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그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그러던 아버지도 죽는다. 불치병에 걸려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홀로 사라진다. 대학을 나와 원했던 회사에 취직하여 어려움없이 살던 주인공은 한 여인을 알게되면서 급변한다.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듯이. 그녀의 연인 리칭은 남자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만큼 미인에다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이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로는 아예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을 것임을 짐작하고 거리를 두었지만 어느새 그녀와 가까워진 자신을 깨닫는다. 둘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3년의 결혼 생활 동안 주인공의 리칭에 대한 헌신은 변함없었지만 애초에 그녀는 그가 독차지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상대였다. 미모가, 능력이 그녀를 한 평범한 사내의 아내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능력에 걸맞는 훨씬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기 위해 주인공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사랑은 변함없으나 그 사랑이 높은 곳에 대한 욕망을 잠재워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내의 욕망을 이해하는 주인공은 순순히 거기에 응한다. 어차피 언젠가 닥쳐오리라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랑은 자본이라는 현실 앞에서 깨어진다. 그러던 아내도 죽는다. 한창 잘나가던 아내는 사업이 실패하고 그동안 저지른 비리 때문에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되자 자살한다. 주인공이 탄가네의 식당에서 우연히 그 기사를 본 날, 식당의 폭발로 인해 그 역시 생을 마감한다.

 

 모두 죽는다. 제7일은 유령들의 이야기다.

 선한 일을 했듯, 악한 일을 했듯 차이는 없다. 흔히들 죽음 후엔 평등하다고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꼭 죽어야 하는 것처럼. 하지만 위화의 저승은 그렇지 않다. 죽음 후도 여전히 살아있을 때만큼이나 불평등하다. 죽은 주인공은 빈의관이라는 곳에 간다. 죽은 자들이 스스로 화장하여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 서로 있게 되는 곳들이 다 다르다. 주인공처럼 뭐하나 없는 이들은 소파에 앉지 못하고 서서 기다린다. 소파에 앉아 편하게 기다릴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살아 생전에 한 재산을 가졌던 무리들 뿐이다. 그들은 없어서 서 있는 자들을 조소하며 자신의 재산을 자랑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또 한 곳이 있다. VIP 룸이다. 거기는 오로지 권세 있는 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 그 날, 그러니까 주인공이 도착한 날, VIP룸에 들어가는 유령이 하나 온다. 시장이다. 부동산 비리 때문에 시끄러웠던 시장. 소녀의 부모를 돌아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시장. 하지만 그는 죽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VIP 룸에서 홀로 차례를 기다린다.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죽어서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떤 선행도 보상받지 못한다. 설령 사랑하는 연인의 내세를 위해 무덤 자리를 마련해 주느라 자신의 신장을 파는 바람에 죽었어도 여전히 헐벗은 채 배회하는 것엔 차이가 없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그래도 그런 자들을 위한 장소가 있다. 주인공은 어떤 울음에 이끌려 그 곳을 찾게 된다. 신록은 푸르고 과실들은 풍성하며 살아있는 해골들로 가득한 땅. 거기서 그는 엄마가 없었던 그를 위해 자신의 아이들 보다 더 자주 젖을 물려 주었던 정말 자신의 엄마와도 같았던 이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병원에서 불법적으로 강물에 유기한 모두 27명의 태아들 시체를 발견하고 병원의 잔혹한 처사를 당국에 고발하고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려 했지만 그만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  27명의 태아들과 함께 영안실에 안치되었던 그녀의 사체는 미스터리한 힘에 의해 태아 27명의 사체와 함께 사라진다. 시민단체는 그 사라진 시체들을 두고 이는 모두 병원과 정부가 짜고 은폐시키려는 음모라 비난하고 늘어나는 시민단체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은 다른 이들의 사체를 화장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준다. 그래서 태아 27명과 주인공의 아줌마는 무덤 없는 자가 되어 그 땅에 온 것이다. 그 곳은 그러한 자들로 넘쳐나는 땅이다. 거기는 모두 평등하다. 그리고 자유롭다.

 

 그런데 과연 평등과 자유가 다른 말일까?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평등은 자유를 해친다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아니다. 위화의 무덤없는 자들의 장소는 평등과 자유가 일치하는 곳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얼굴의 해골이 되었듯이 평등한만큼 자유롭다. 무덤있는 자들을 위한 빈의관과 달리 거기엔 살아 생전 어디에 있었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자신을 죽인 사람에게마저 관대해지고 우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원한은 사라지고 우정과 연대만이 남는다.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고 자신의 몸처럼 아껴준다. 파라다이스. 생각해보면 절대적으로 평등했던 마르크스 용어에 따르자면 원시공산사회는 유목민들이었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그들은 어떤 곳에도 정주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어떤 땅에도 얽매이지 않은 존재였다. 들뢰즈의 말마따나 탈영토화된 그들이었고 그만큼 자유로웠던 그들이었다. 어디서든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건 영원한 자유로움의 이미지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자유로웠던 그들은 평등했다. 같이 생산하고 아낌없이 나누었다. 계급이 없었다. 빈부의 격차로, 권세의 격차로 사람을 나누지 않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지금과 같은 계급과 사람에 대한 차별은 한 곳에 머무르는 것, 즉 정주하면서 부터 생겨났다. 그만큼 우리가 얽매이자 불평등이 들어온 것이다. 역사가 증명한다. 자유와 평등은 일치한다고. 진실이다. 완전한 평등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 준다. 진정한 삶 역시. 사람을 나눔은, 가름은 우리의 평등을 제한하는 것만큼이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다. 완전히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자유도 완전히 없다. 지금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도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그만큼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이토록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과 자유는 서로 다르지 않다. 평등을 추구하는 길은 기필코 자유를 추구하는 길이다. 이외에 모든 자유와 평등을 배척하도록 만드는 관념은 거짓이다. 그건 저항해야 하는 악의적 환영에 불과하다. 위화가 그려내는 헐벗은 유령들의 땅은 그것을 보여준다. 결코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그러므로 이토록 불평등한 사회라면 우리는 더이상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함을.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 중국은 사회주의 중국보다 얼마나 더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는가? 유령이 되어서야 이 땅에 들어갈 수 있다면 위화 스스로 거기에 대해 부정의 대답을 내어놓고 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도 할 수 있다. 과연 경제적 번영이 우리 자유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보다 지금의 시절이 더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 시절에 있었던 어떤 소중한 자유를 지금 우리는 잃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때보다 우리에게 얽매인 사슬들은 더욱 많아졌을 지 모른다. 초등학생들은 놀 자유를 잃었고 중,고등학생들은 청소년기의 낭만을 누릴 자유를 잃었다. 대학생은 좁은 취업의 문을 뚫기 위해, 높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학문과 삶의 자유를 잃는다. 나와서도 만연된 비정규직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누구나 인정하리라. 삶은 결코 더 쉬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불평등의 척도는 곧 자유의 척도다. 만연한 불평등은 사회가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음을,아니 오히려 퇴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나는 위화의 '제7일'이 바로 그러한 이야기라 여긴다. 허상에 속지말 것을! 본질을 직시할 것을 말하는 소설이라고. 헐벗은 유령들의 땅에서 모든 이들이 생전의 얼굴이 아니라 해골로 있다는 것이 그 단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이 절망의 소설이 되어야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 같다. 어쨌든 희망이란 아름다운 모습의 거짓말이고 가상이니까 말이다. 절망하고 절망해서 그 늪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비로소 밟은 단단한 바닥에서 본질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 위화의 '제7일'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주인공과 리칭은 가장 행복했던 3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었던 셋집으로 그토록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둠은 어둠으로... 섣부른 희망만큼 위험한 것도 없으니...

 

 그러니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는만큼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평등이야 말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위화의 '제7일'은 그를 위한 'PAINT IT BLACK'이다. 그 극심한 불평등 속에서 위화의 유령들이 양산되었듯이 결국은 그것이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구 오늘의 일본문학 12
아사이 료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최연소 나오키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작가, '아사이 료.'

 '누구'는 그에게 그런 타이틀을 가져다 준 장본인 격이 되는 작품이다.

 아사이 료는 이미 저번에 나온 그의 데뷔작,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로 만나 본 적이 있다. 약관의 나이에 발표한 그 소설은 마치 그의 고교 생활을 회상하기라도 하듯 각자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그 나이 대의 아이들을 통하여 어떤 삶이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 보다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뭔가 시도라도 하는 것의 중요성, 삶은 그렇게 어떤 것이든 열심히 도전하고 노력하면서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임을 말해주는 작품이었다.

 

 이번에 만나 본 그의 두 번째 소설 '누구'도 읽어보니 말하려는 주제가 크게 첫 작품의 노선과 틀리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특별히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이들을 소설의 주요 인물들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전작에서 동아리 활동에 열심인 아이들을 천착했던 이유와 이어지는 것 같다. 동아리 활동은 일단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에서 일률적으로 정해진 정규 교육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즉 동아리 활동, 거기에는 비로소 '나'라는 자신이 잔뜩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건 부모나 학교가 규정해주지 않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첫 작품의 아이들은 비로소 발견한 자신만의 트랙을 힘껏 달려가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취업 전쟁에 뛰어든 '누구'의 존재들도 다르지 않다.  이제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첫 관문인 '취업'은 그야말로 지금까지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시험당하거나 증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청춘들이 비로소 그것을 검증받거나 인정받게 되는 계기이다. 그러니까 전작에서 동아리 활동을 통해 참된 자아의 발견이라는 트랙의 출발선 앞에 섰던 이들은 이 소설에서 지금까지 달려온 나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성적표를 받게 되는 것과도 같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사실 첫 작품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시험, 혹은 관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듯 하다.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그 소설 중 한 에피소드에서 어떤 친구는 기리시마가 배구 동아리를 그만두는 바람에 그가 뛰었던 센터 자리에서 드디어 뛸 수 있게 되는데 그토록 되고 싶었던 자리였던만큼 기쁨도 잠시 느꼈지만 사실 그 보다는 과연 자신이 거기서 기리시마만큼 할 수 있을지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해서 그 아이는 갈등한다. 과연 이 자리를 맡아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에 실린 모든 에피소드들의 주인공들이 지금 막 자신에게 닥쳐온 어떤 계기들 앞에서 피하느냐 맞부딪히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로는 그냥 기로로만 그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또는 만족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거기서의 선택은 하나의 존재 증명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관념으로만 존재했던, 어쩌면 그렇게 관념으로만 존재할 수 있어저 진짜 자신의 가치보다 좀 더 과대포장이 가능할 수 있었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과연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진정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혹은 평가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사이 료가 이 소설 '누구'의 등장인물들에게 '취업 전선'이라는 일종의 시험을 가져온 것은 그런 의미다. 그동안 자기가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 한 번도 적나라한 테스트를 받아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과연 자신이 진짜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동화 백설공주에서 나왔던 늘 진실만 말한다는 거울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대학 생활 내내 학업 보다는 락밴드 활동에 열심이었던 고타로나 그와 한 방을 쓰면서 연극 활동에 열심이었던, 이 책의 화자이기도 한 다쿠토나 고타로와 같은 동아리면서 고타로와 사귀는 미즈키나 그녀와 우연히 같이 취업 활동을 하게 되는 고타로와 다쿠토가 사는 방 바로 윗 층에서 다카요시와 동거하고 있는 리카 모두. 

 

  그래서 이 소설이 옮긴이의 말대로 정말 호러 소설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호러 소설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범람한 상황에서 언제 어디서든 남들에게 보일 수 없는 비밀을 들킬 지 모른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라 완전히 적나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평가받게 되리라는 바로 거기서 공포가 온다는 말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그런 상황이란 공포이지 않을까?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존재로 포장되고 싶은 바람이 누구에게나 있듯이 적나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이 발가벗기듯 드러나게 되는 상황만큼 견디기 어려운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남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되는 자신의 참모습이라면 더더욱. 그러고보면 뉴질랜드의 원주민들이 번지점프를 진정한 성년이 될 수 있는 통과의례로 정했다는 것은 꽤나 적절한 것 같다. 까마득하게 높은 낭떠러지에서 달랑 줄 하나만을 발목에 매고 뛰어내리기 전에 아래를 내려다보는 공포는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이 남김없이 발가벗겨져 적나라하게 보여질 때이 공포와 비슷할 테니까.

 

  소설 '누구'의 취업 활동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 번지 점프대 위에 올라 선 사람들이 그렇듯이 당연하게도 두려움 속에서 회피하려는 자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뛰어드는 자로 나뉘어지기 마련이다. 사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들 그 사이의 스펙트럼 중 어느 한 곳에 위치한다. 아마도 이 소설을 읽으면 그 중 하나와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일본 대학생의 취업 활동은 우리나라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아서 취업 활동을 겪어본 이들에게는 더욱 생생한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때의 자신은 어떻게 치뤄냈는지,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느꼈는지 또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가지는 장점이 있는 듯 하다. 아사이 료는 이 소설에서 현재 일본 젊은이들이 하고 있는 구직 활동을 가감없이 그대로 재현하는데, 정말 소소한 것까지 재현해서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다., 바로 그 상세한 리얼리티가 그대로 비슷한 리얼리티 속에서 구직활동을 했었던 우리의 경험을 환기시켜 더욱 나 자신의 모습을 대입해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것을 위해서 아사이 료는 전작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감수성 넘치던 문장들까지 포기해가며 지극히 건조하고 담담한 필치로 그려갔던 것은 아닐까 싶다. 작가는 읽는 독자의 공감과 동일화를 원할수록 기교를 자제하기 마련이다. 기교는 문장 자체에 몰입하게 만들어 정작 읽는 자기 자신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만화에서 독자들을 캐릭터에게 더욱 동일화시키기 위해서 그 형태를 단순화시키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작품을 아사이 료의 일보 전진이라고 여긴다. 분명 그는 현실 속으로 더 깊이 들어왔고 주제는 비록 전작과 비슷하지만 그 선명성에 있어서는 독자 자신의 경험을 환기시킴으로써 더욱 높였기 때문이다. 과연 이 작품은 전작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마음을 울린다. 특히 후반에 가서 밝혀지는 비밀들은 정말 나도 모르게 어떻게 살고 있나 진지하게 되새기게 만든다. 표면은 비할데 없이 건조하지만 그 아래에는 어떤 뜨거운 용암 같은 것이 흐르고 있는 소설이다. 이렇게 느껴지는 건 마지막에 쏟아내는 말들이 참으로 호되게 신랄해서인데 때문에 그것을 읽노라면 아사이 료가 동시대의 젊은이들에 대해 얼마나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지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뜨겁다. 안타까움 속에 벼리된 절절한 호소를 담은 가슴이야말로 마라톤을 완주한 심장처럼 뜨거운 법이니까.

 

 열기만큼 쉽게 전염되는 것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 역시 어느 순간 당신을 감응시킬지도 모르겠다. 회피하기만 하는 당신, 도전 보다는 늘 순응만을 택했던 당신이라면 더더욱. 이 소설엔 현대 젊은이들의 소통 필수품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얼른 현 세태의 충실한 반영으로 보이지만 짐작 되기에는 그 속내는 다른 곳에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아사이 료는 일종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주기 위해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실시간 업데이트할 정도로 요즘 세대는 자기 표현에 충실하지만 정작 자신을 현실 속에서 정말로 드러내야 할 때는 꼬리를 말고 움츠러드는 것을 빗대어.

 

 말하자면 이 소설은 현실에 대해 방관자로만 있는 것을 스스로 쿨하다고 착각하며 현실로 뛰어들어 깨어지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얄팍한 껍질 속에서만 고집스럽게 머무르는 모든 입만 살은 관찰자 청춘들과 수동적인 청춘들에게 보내는 따끔한 질책이다. 한 마디로 눈가리고 아웅하지 말라는 거다. 자기를 미화시키는 환영의 안대는 벗고 직시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백마디 말보나 한 번의 행동으로 자신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그런 소설이다. 그래서 뜨겁다. 당신에게도 이 열기가 전염되기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