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한 자기정체성을 만들려는 이 열정은 불안한 현재에 직면해 이미 아는 과거를 지키자는 쪽으로 움직인다. 역사적 전환이라는 사건이나 경험이 기존의 감정이나 자신의 공간 감각에 맞지않으면 그 진리의 가치는 줄어든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더 편안하고 쉬운 과거의 격언이 최종적인 참조 기준이 된다.(p. 38)

타인과 자신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순수화하려는 이런 욕망 속에는 보수적인 성향이 숨어있다. 이런 정체성의 기획에서는 알려진 것들이 너무나 끈덕지게 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 새로운 미지의 것들은 배제된다. 여기서 현실은 자신이 뚜렷하게 표명한 자아상과 자신의 세계상에 포함되는 것 말고 다른 게 될 수 없다. (p. 37)

리처드 세넷이 25세에 쓴 `무질서의 효용`(다시 봄 간행) 중에서.
세넷은 이 보수화를 이끄는 순수화의 욕망이 삶의 특정 순간에 만들어지는 감정이라 보고 있으며 주로 청소년기에 만들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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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대포' 헌법소원.

 제기했다기에 관심 있었다. 어제 헌재 판결이 나왔는데,

 엥, '각하' ?

 각하는 소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내리는 결정이다. 뭔가 충족되지 않았기에 이런 결정이 나왔나 보았더니

 이럴수가! 소의 이익이 없기 때문이란다.

 물대포 쏘는 행위가 이미 끝나 청구권자들의 기본권이 더이상 침해 당할 여지가 없으므로 소의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소의 이익을 다른 말로는 권리보호의 이익이라고 한다. 즉, 공권력의 행사로 기본권을 침해당한 당사자가 그 공권력의 취소를 통해 침해당한 권리를 구제받을 가능성이 있을 때 이 이익은 인정된다.  이러한 권리보호의 이익은 종국 결정시까지 있어야 하는데 판단 대로 물대포 쏘는 행위는 이미 끝났으므로 구제받을 이익은 더이상 없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외가 있다.


 즉 권리보호 이익이 소멸했다고 하더라도 예외적으로 심판의 이익을 인정하여 본안 판단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헌재는 개인의 기본권 구제도 해야하지만(주관적 기능) 위법한 침해로 부터 헌법 질서를 수호할 사명(객관적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개인의 권리 보호 이익이 소멸했다 하더라도 이 침해 행위가 차후 반복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 그건 곧 헌법 질서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므로 그 방지를 위해 본안 판단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대포 행위가 앞으로도 반복될 '위험' 곧 가능성이 있다면 예외로 본안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각하 판단한 6인은 물대포가 근거리에서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들었다.


 헐~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한 것일까?  심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앞으로 안 쏠까? 이대로 역사의 유물이 된다면야 대환영이다. 아니면 근거리에서만 쏘지 않으면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근거리일까? 정말 나의 상식으로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 없는 논리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엔 하도 그동안의 상식과 통념을 뛰어넘는 저들의 생각들을 많이 봐와서 조금은 내성이 생겼다.


 어쩌면 이리 무리하게 각하 판단을 내린 게 물대포가 기본권 침해가 최소일 것을 요구하는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되어(청구권자들이 근거리 물대포 사용으로 뇌진탕 등의 상해를 입어 헌법 소원을 청구한 것이기에) 위헌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기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소설 한 번 써 본다.(재판관 중 3인은 예외로 인정하고 본안 판단하여 이것을 이유로 위헌 판단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에 깔린 본심은 앞으로 물대포 계속 쏘겠다는 얘기. 곧 마음에 들지 않는 집회 시위에 대해서는 추호의 여지도 없이 강경 대응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려나~ 시위하려면 각오하고 나오라는... 

아무튼 전교죠 법외노조 통보 적법 판결도 그렇고 또 하나의 씁쓸한 케이스다.



 











 라고 썼는데 바로 다음날 전면 쌀 개방에 반대하는 시위대에게 물대포를 쏘았더라. 역시.

 정말 헌재의 낙관론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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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6-2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헐~, 거기다 한숨도 함께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쉬게 되네요.

ICE-9 2014-06-30 00:43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정말 내뿜는 한숨이 많아서 어디 산소호흡기라도 따로 마련해두고 싶어요 ㅠ ㅠ
 

 재활용 분리수거 날에...


 "아, 싫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왜 재활용 분리수거 일이 평일인건지?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직장인은 어쩌라는 거야?"

 2주일 동안 가득 쌓인 재활용 쓰레기를 양 팔로 힘겹게 받쳐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내려가는 도중에 타는 사람도 없었다.

 '오늘따라 사람 정말 없네.'

 몇 년 동안 여기 살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자정이라지만 늘 몇 사람은 타곤 했는데. 우연히 서로 마주보게 되면 같이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있다는 동병상련 때문인지 어색한 미소도 짓곤 했는데.

 상황이 낯설어서 그런 걸까? 왜 이리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사방이 기분 나쁘게 조용했었다. 너무나 고요하여 타면서 마치 커다란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얼핏 들었던 것도 생각났다.

 '나-원, 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바보 같기는.'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꾸만 스멀스멀 몰려드는 불쾌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는 듯이.

 '괜한 생각이다. 괜한 생각.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일 뿐이야.'


 그 때였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워낙 그런 기분에 절어있었기 때문인지 어쩐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누군가 타면 이런 불쾌한 기분도 더 이상 생기지 않겠지. 고맙다는 생각까지 드는 걸.'

그런 생각을 하며 문득 지금이 몇 층인가 올려다보았다.

전광판의 숫자는 '4'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왜 하필이면 4층인 건데? 기분 나쁘게'

기분 탓일까? '4'의 빨간 숫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새빨갛게 보였다. 마치 피처럼. 잔뜩 불길하게...

 '하하, 잘 한다. 네가 무슨 공포 영화 주인공이냐? 이 따위 생각이나 하고?'

 사는 게 심심했었나? 그래서 내가 오늘은 바보짓을 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일까?

자꾸만 그런 생각에 빠지는 내가 한심했다.

 어쨌든, 누가 타면 다 끝날 일이다.

나는 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누군가 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도 잠시.

그 고마운 사람은 섬뜩한 느낌만 더욱 안겨줄 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그를 보자마자 나는 절로 뒷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커다란 그림자가 서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검은 색 모자에 검은 색 군용 외투. 검은 색 바지에 검은 색 군화. 더구나 모자챙마저 깊숙이 내려와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바깥의 어둠이 뭉청 떨어져 나와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 들어온 듯했다.

 들어온 것은 몸만이 아니었다. 양 쪽으로 웬만한 성인 남자 하나는 홀랑 들어갈 커다란 비닐 부대도 질질 끌고 왔다. 모두 가득 들어 있는 듯 터질 듯이 팽팽했다.

 '뭐야, 이거? 꼭 시체가 들어있을 것 같은 분위긴데?'

 벽에 달라붙듯 뒷걸음질 친 나를 그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들어와서는 무심히 몸을 돌렸다. 나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투였다. 기껏 들어온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니.

 바로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검은색 등에서 어쩐지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난 그저 엘리베이터가 빨리 1층에 도착하기만 바랐다.


 '띵!'

 엘리베이터가 드디어 도착했다. 그런데 전광판엔 지하 1층으로 나와 있었다.

수년 간 살았지만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까지 내려간 적은 없었다. 여기까지 갈 수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 생긴 건가?'

 탈 때, 나는 무심히 맨 아래의 층 버튼을 눌렀을 뿐, 그것이 1층인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이 생긴 것이라면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납득 못할 바는 아니었다. 더구나 앞에 서 있는 불길한 남자는 자연스럽게 커다란 비닐 부대를 양 쪽으로 질질 끌며 내리고 있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하 1층이 생기고 재활용 수거 장소도 그 쪽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너무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장소야 어찌되었든 그저 얼른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남자는 태연하게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사방에 들리는 소리라곤 그의 군홧발 소리와 질질 끌리는 비닐 부대의 소리뿐이었다. 괴이하고 불길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모퉁이를 돌자 바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는가? 오늘도 가득하군."

 남자가 모퉁이를 돈 위치보다 좀 더 멀리서 들려왔기에 아무래도 딴 사람 같았다. 그리고 인사를 거두절미하고 냅다 말하는 것을 보면 둘은 잘 아는 사이인 게 분명했다.

 "늘 그렇지 뭐. 일정 조정 좀 안 돼? 늘 이렇게 가득 나오는데 하루에 한 번이라니. 적어도 네 다섯 번은 되어야지. 이쪽은 정말 곤란하단 말이야."

 앞서 간 남자의 목소리였다. 풍기는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일상적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너무나 평범했기에 '괜히 쫄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튼 걸음이 다소 가벼워졌다. 둘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나 같은 말단에게 말하면 뭐해? 윗대가리들에게 말해야지."

 "내가 몰라서 이러겠어? 그냥 푸념하는 거지 뭐. 하여간 책상물림들은 문제야. 현장의 어려움을 조금도 모르거든. 그러고는 맨 날 예산 타령, 효율 타령이지. 젠장!"

 그러고는 뭔가 가득 쏟아내는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분명 앞서 걸었던 남자가 비닐 부대에 든 것을 버리는 것이리라.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가 들려와서 난 더욱 안심하고 모퉁이를 돌았다. 멀리서 둘의 모습이 보였다. 다 버린 비닐 부대를 툭툭 털고 있는 남자 뒤에 또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예의 검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복장은 달랐다. 뒤늦게 나타난 남자는 꼭 아파트 경비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닐 부대를 든 남자 앞에 재활용 수거를 위한 자루들이 주루룩 나열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열 배 이상은 될 것 같은 아주 크고 넓은 자루들이었다. 요즘 재활용 쓰레기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나? 어쨌든 분위기가 좀 음산한 것을 빼면 늘 가던 재활용 수거장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에이, 괜히. 그냥 바뀐 거였네.'

 그동안의 내 모습을 잔뜩 한심스러워 하면서 난 태연하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 인기척이 났는지 두 남자가 날 돌아보았다. 비닐 부대를 든 남자와는 달리 경비원 복장의 남자는 얼굴이 보였는데 분명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뭐야! 당신. 어떻게 여길 왔지?"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소리쳤다.

상황의 갑작스런 돌변에 난 좀 당황했다. 그러다 내가 이 아파트 거주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러는 거구나 짐작했다. 하긴 나 역시 그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일을 맡은 경비원인 듯했다. 이참에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난 몇 호에 사는 누구라고 대답했다.

 '아, 그러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역시. 그랬군."

 하고 말한 것은 비닐 부대를 든 남자였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까만 얼굴 뿐.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 이 상황을 즐기는 목소리였다.

 "그런 건가? 드디어 받아들여진 건가?"

 뒤이어 들려온 경비원의 목소리도 그랬다. 뭔가 납득하고, 또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축하해. 이제 못 보게 되겠군." 비닐 부대를 든 남자가 경비원 복장의 남자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내가 없더라도 잘 지내라고."

 이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거지? 너무나 뜻밖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지라 난 그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실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우리끼리 축하해서 미안하군. 여기가 어딘지, 우리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겠지?"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날 돌아다보며 말했다.

 "재활용 수거하는 곳 아닌가요?"

 "그건 맞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재활용 쓰레기는 아닐 거야. 직접 보겠어?"

 "이 봐, 그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 사전 예고 없이 보여주면 미쳐버릴 수도 있어."

 이렇게 말한 것은 비닐 부대를 든 남자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말투엔 날 걱정하는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걸 즐기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건 내가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성큼 옆으로 물러난 태도에 있어서도 한껏 드러나고 있었다.

 난 재활용 수거 봉투에 눈길을 돌려 안에 수북이 쌓여진 것을 들여다보았다.


 "우욱!"

 손으로 입을 막고 구토할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가득 쌓인 사람 머리였다. 머리만이 레고 조각처럼 자루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욕지기가 한없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내 눈은 본능적으로 다른 자루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오른쪽 자루엔 사람 팔이 가득 들어 있었다. 왼쪽 자루에는 다리가 들어 있었다.

 두... 두려웠다.

 이놈들 혹시 전대미문의 연쇄 살인마들 아냐?


 "거 봐, 엄청 충격 먹었잖아?"

 비닐 부대를 든 남자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꽤나 담이 세군. 실신하지 않은 걸 보니."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감탄하듯 거들었다.

 "그래, 자네는 그대로 졸도 했지. 정말 간만에 좋은 구경이었어."

 "보통의 심장이라면 당연한 거야. 이 사람이 특이한 거지."

 "하긴, 이런 데서 편히 살려면 심장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킥킥."

 "아무튼, 당신. 첫 관문은 잘 통과했군."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내게 말했다.

 "도... 도대체 다... 당신들 뭐야? 나... 날 어... 어쩌려는 거야?"

 "안심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

 "거짓말! 여... 여기 이렇게 시체가..."

 "조용히 하고 내 말 잘 들어. 이제 설명해 줄 테니까. 당신은 여기가 어딘 줄 알아?"

 "어디긴 어디야? 재활용..."


 "아냐! 여긴 지옥이야."

 "뭐?"

 "정확히는 지옥 제7구역 블록 B지. 잘 외워두라고. 네가 일할 곳이니까. 킥킥."

 이렇게 말한 것은 비닐 부대를 든 남자였다.

 "대... 대체 이... 이게 무슨?"

 "그래, 믿기지 않겠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하지만 사실이야. 당신은 지금 지옥에 있는 거야. 정확히는 지옥의 재활용 분리수거장에."

 "지... 지옥의 재활용 분리수거장?"

 "절단된 시체들 봤지? 우리는 여기서 저걸 분리수거 하지. 흐흐."

 대답한 건 부대를 든 남자였다.

 "맞아. 여기서 우리가 하는 일은 그거야. 좀 더 자세히 말해주지. 당신도 들어봤겠지? 지옥엔 여러 가지 처형 장소들이 있다는 거. 열 지옥, 물 지옥. 기타 등등. 그거 다 사실이야. 생전에 저지른 죗값 있지? 여기서 다 치르게 되어 있어. 산사람들이야 없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 그래서?"

 "그런데 그 처형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단 말이지. 반복적으로 받아야 해. 그러면 타 버린 몸뚱아리, 잘려나간 몸뚱아리는 어떡하겠어? 다시 처형하려면 다시 붙여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이렇게 재활용이 필요한 거야. 이해하겠어?

 뭐, 어쨌든 그 중에서 우리가 맡은 구역은 말이야. 건물이나 배, 비행기나 자동차 같은 것들을 부실하게 만들거나 고의 혹은 중과실로 사고를 일으켜 대량 살상한 놈들을 다루고 있지. 걔네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 알아? 사지절단 형이야. 머리와 팔다리 몸통들이 톱날로 아주 천천히 해체되는 거지. 조선 시대의 가장 끔찍한 형벌이라던 거열형도 여기에 비하면 양반이야. 이제 알겠지? 저 자루에 든 것들이 바로 그거야. 우린 그걸 분리수거하는 거고. 다시 잘 붙이기 위해서 말이야."


 이해고 뭐고 난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지옥이 존재하고, 처형도 들었던 대로 틀림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충격적이고 어마어마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까 그 남자가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된다고 그러지 않았나? 뭐! 내가 여기서 일한단 말이야. 이런 끔찍한 것들과!


 "자... 잠깐! 아까 당신이 내가 여기서 일하게 되었다고 그랬지?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내가 여기서 일하는데?"

 난 비닐 부대를 든 남자에게 물었다.

"그야, 저 녀석이 전근을 요청했으니까. 우리끼리 말이지만 여기 사실 가장 힘든 곳이거든. 사지를 절단하니 분리수거해야 할 것들이 오죽 많아? 거기다 일일이 바코드까지 찍어야 한다고. DNA 식별 코드를 찍어놓지 않으면 공장에서 조립할 때 문제가 생기니까. 완전 3D 중의 3D지. 그래서 저 녀석이 좀 더 쉬운 곳으로 보내 달라 요청한 거야.

 이를테면 블록 C-138 같은 곳. 거기는 세치 혀로 거짓과 망언을 일삼아 재물을 탐하거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 자들을 처벌하고 있는데 주로 목사나 장관 같은 고위 공무원들이 많지. 혀를 집게로 잡아 뽑거나 자르는 게 그들의 처형 방식인데 고통은 여기와 다를 바 없지만 분리수거 일은 쉽지. 혀 하나만 수거하고 찍으면 되니까. 너, 거기 신청 한 거지?"

 "1순위로 지망하긴 했는데. 모르지 뭐."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옆으로 양 손을 위로 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사정은 대강 알겠지? 그럼 열심히 잘해 봐."

 "이참에 나도 인사하지.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지만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사이니까 잘 부탁해."


 시... 싫다. 이런 곳에서 왜 내가?

 나는 그제서야 내가 진짜 물어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 생각났다.

 "왜... 왜 나야? 어째서 내가 여기에 온 거냐고? 난 단지 재활용 분리를 하러 왔을 뿐인데. 도대체 왜 내가?"

 "나도 그랬어."

 경비원 복장의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처음엔 당신처럼 이렇게 왔다고. 있잖아, 당신과 나 사이엔 공통점이 있어. 그게 바로 우리가 여기에 와서 이런 일을 하게 된 이유야. 이곳의 규칙이지."

 "그... 그게 대체 무슨...."

 "나는 말이야. 재개발을 이유로 멀쩡히 잘 살던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지어진 아파트에 살았었어. 용역들이 동원되고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단란한 가정들이 마구 풍비박산 난 곳에 살면서도,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지. 그냥 내 능력, 내 권리라고 생각했어. 그러던 어느 날, 재활용 분리를 하려다 여기에 온 거야. 그게 이유였어.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이야기지. 당신도 그렇지 안 그래? 여기에 사는 당신이니까 바로 납득할 거야. 그렇지 않나?"

 "그... 그럴 수가..."

 난 다만 그렇게 말하며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유라면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살던 곳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곳에 세워진 아파트였으니까.

 그들의 비극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고 무심하게 나만 위하며 살아왔으니까.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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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5-17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일을 잘못한 사람들이 받는 벌 무섭군요
그리고 그런 잘못한 사람뿐 아니라 그 일을 잊은 사람도 같은 죄군요
우리나라에 일어난 일, 지금까지 잊지 않고 살았다고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가깝게 느끼지 못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이번에는 잊지 않아야 할 텐데요 우리 사회가 조금씩 바뀌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희선
 

 

 

 

 이런, 루 리드가 죽었다.

 봄에도 한 번 위기가 찾아왔었지만 다행히 간이식이 성공해서 더 생생해졌다고

 말하던 그였는데...

 갑자기 하늘나라로 부터 급한 공연 호출이라도 받은 것일까?

 어느 날 아침, 난 리드가 없는 세상에 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날엔 진짜 담배 하나 물어줘야 하는데...

 인연 끊은 지가 너무도 오래인지라...

 그냥 시늉만 해야겠네...

 SORRY, LOU...

 

 공교롭게도

 그가 죽었던 날은

 나역시 심한 목감기로 계속 쿨럭거리는 기침에다 고열까지

 콤보로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대니얼 카너먼이 그랬듯이,

 사람의 머리란, 별 거 아닌 우연의 겹침도 의미있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하는 법이라지만

 그래도 왠지 이렇게 생각되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그 때의 내 고통은 당신의 죽음을 나타내는 징후였다고...

 그 때의 내 고통이 나름 당신의 영면을 위한 내 애도였다고...

 

 신열처럼 타올랐던 사랑이 허망함만을 게워내고

 썰물처럼 흔적도 없이 빠져나가더라도

 봄이 와도 어딘가 남아있는 잔설(殘雪)처럼, 밭은 기침으로 남아

 마르셀에게 마들렌이 그랬듯이, 열병처럼 앓았던 시간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것도 아주 오래도록...

 

 그 시간 한가운데에 LOU,

 당신이 있었고,

 그래서 난 오래도록 당신을 잊어야 했다.

 정말 PERFECT 하게,

 그 VICIOUS 같은 나날을 무사히 견디고

 WALK ON THE WILD SIDE 할 수 있도록...

 

 한동안 내 삶엔 당신의 노래가 없었는데...

 이제는 당신조차 없구나...

 

 결국 우리의 삶이란

 다음 상실엔 좀 덜 상처받기 위해

 조금씩 더 자신을 마모시켜 가는 게 고작인 것 같아...

 

 LOU,

 평온하길...

 당신의 노래대로 'I'M SO FREE'할 수 있게 되길...

 

 GOODNIGHT LOU,

 GOODNIGHT...

 

 

- 루 리드가 죽었던 바로 다음 날에 쓴 글 -

 

 

  아무래도 루 리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앨범은, 1970년 그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떠나 솔로가 되고나서 1972년에 두 번째로 발표한 2집, 'TRANSFORMER'일 것이다. 

 

 물론 변신 로봇이 나오는 마이클 베이의 영화 '트랜스포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실은 이 제목은 유태인 가정에서 자라오면서 스스로 억압했던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트랜스포머'는 기존의 관습이 나눈 성 경계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나드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억압해왔던 루 리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제목대로 이 앨범은 그런 존재들을 위한, 거기에 바쳐진 음반이다.

'Walk on the Wild Side' 는 그런 것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다.

 

                 

          

 

Holly came from Miami, F.L.A.

Hitch-hiked her way across the U.S.A.

Plucked her eyebrows on the way

Shaved her legs and then he was a she

She says,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He said, 'Hey honey,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Candy came from out on the island

In the backroom she was everybody's darlin'

But she never lost her head

Even when she was giving head

She says,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He said,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And the colored girls go

Doo do doo, doo do doo, doo do doo

Little Joe never once gave it away

Everybody had to pay and pay

A hustle here and a hustle there

New York City's the place where they said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I said, 'Hey Jo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Sugar plum fairy came and hit the streets

Lookin' for soul food and a place to eat

Went to the Apollo, you should've seen 'em go go go

They said, 'Hey sugar,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I said,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Alright, huh

Jackie is just speeding away

Thought she was James Dean for a day

Then I guess she had to crash

Valium would have helped that bash

She said, 'Hey babe,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I said, 'Hey honey,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And the colored girls say

Doo do doo, doo do doo, doo do doo


 동시에 아마 가장 많이 알려진 루 리드의 노래이기도 할 것이다. 가사에 나오는 이름들은 모두 흔히 말하는 여장남자들이다. 물론 실존인물들이다. 듣기에 이름도 실명 그대로라고 한다. 노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열거하는 동시에 끝을 다른 방식도 받아들여보라는 것을 뜻하는 '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로 마무리 함으로써, 이들을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볼 것을 말하고 있다 맨 앞에 나오는 홀리의 이야기는 홀리에게 진짜 있었던 그대로라고 한다.


 그녀는 정말로 히치하이킹을 통해서 마이애미에서 뉴욕으로 왔으며 도중에 친구의 잘못으로 눈썹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게 오히려 자신을 나타내는 신분증 같은 것이 되었다고 한다. 홀리는 노래 뒷 부분에 나오는 캔디, 슈거, 재키와도 알게 되었는데 당시엔 모두들 앤디 워홀의 '팩토리 걸'이었다고 한다. 홀리도 그들처럼 앤디 워홀의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으나 슈퍼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거부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이 노래가 만들어질 때까지만 해도 루 리드는 홀리를 단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홀리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방송을 타서야 자신과 자신의 이야기가 이 노래에 나온 것을 알았다.

그래서 루 리드를 찾아가 어떻게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거기에 대해 루 리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홀리 너는 브루클린에서 가장 입이 싼 계집애야."

그리고 둘은 바로 친구가 되었다.


 이 노래엔 이런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모두 정말로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리얼한 그녀들(그녀들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모두 자신을 여자라 여기고 있으니까.)의 이야기를 담담한 어조로 전하면서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고정관념에 갇혀 있는지, 때로는그런 인생에 한번쯤 다른 것을 받아들여보는 것은 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느끼게 하는 노래다.


 그래서 그런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외부의 감각'을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란 그저 빗방울이 우연히 부딪히듯, 그러한 우연의 소산인지 모르며, 그런 우연이 조합해 낸 존재인 우리들에게 있어 삶에 무언가 정해져있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넌센스인지도 모른다. 실은 무언가가 정해져 있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가장 답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고여 있는 물은 기필코 섞는 법이듯, 늘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삶도 분명 그러할 것이다.


'인생에 하루쯤 없어도 되는 날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하루키처럼 한 번은 슬쩍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황야로 과감히 발길을 이끄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삶의 정답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우리로서는 오히려 그 변화가 의미를 만들어낼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위에 삽입한 이 앨범 커버의 사진에 대해서도 잠깐 말해볼까 한다. 원래 저 커버는 계획한 대로가 아니었다. 커버 촬영을 맡았던 포토그래퍼 Mick Rock는 의도한 대로 여러 사진을 찍었는데 그 중의 한 장이 그만 인화 도중 실수로 이상하게 나오고 말았다. 그런데 그 사진이 오히려 정식으로 찍었던 사진 보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걸 제출했고 급기야는 이렇게 덜컥 제작진에 의해서 커버로 결정되고 말았다. 한낱 우연의 소산에 불과했는데 역사적으로 길이 기억될 앨범의 아주 인상적인 커버가 된 것이다. 과연 '트랜스포머'다운 커버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바로 여기에 우리가 귀기울여 할 인생의 비밀이 들어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 앨범에서는 'walk on the wild side'외에 'Perfect Day'나 'Satellite of Love', 'Vicious' 등이 알려졌는데, '퍼펙트 데이'는 워낙에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하니까 따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Satellite of Love', 'Vicious' 에서는 거기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어 이참에 같이 소개해 보기로 한다. 원래 Satellite of Love 는 밸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였다고 한다.


  사실은 그러니까 1970년, 원래 Loaded 앨범 홍보를 위한 연주 여행을 하는 도중 녹음을 했는데 어쩐 일인지 다음 앨범에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걸 루 리드가(원래 그의 노래였으니) 새롭게 녹음하여 이 앨범에 실은 것인데 재밌는 것은 이 앨범이 발표되고도 밸벳 언더그라운드의 맴버 그 누구도 그게 자신의 노래인 줄 몰랐으며 아니 아예 녹음했다는 사실 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의 미공개 트랙들을 실은 박셋 앨범이 1995년에 나오고나서였다. 삶에는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얼 그리 자신 혹은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트랜스포머는 데이빗 보위의 제안으로 만들어진만큼 그는 당연히 음반 제작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노래 후반에 들려오는 화음은 바로 데이빗 보위의 것으로 그는 즉석에서 이 화음을 만들어내었다고 한다. 루 리드는 그의 음악적 재능에 다시 한 번 놀랐다고 하고 있다.


Vicious 는 이 앨범의 가장 첫 곡이다. 이 노래의 탄생엔 바로 앤디 워홀이 관여하고 있다. 루 리드 스스로 고백하기를, 하루는 앤디 워홀이 와서 'Vicious'란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어보라고 했다고 한다. 루 리드가 어떤 종류의 'Vicious'를 말하는 거냐고 묻자 앤디 워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Vicious, you hit me with a flower 이런 것 말이지."

이 노래의 첫 소절은 앤디 워홀의 그 말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래도, 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Perfect Day'를 빼놓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아무튼, 어쨌거나, 한 때 나의 날들을 퍼펙트 데이로 만들어주던 루 리드는 이제 세상에 없다.

 '트랜스포머'처럼 살아가라는 그의 진심만이 이렇게 선율로 남아 오늘 밤을 적시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의 결말을 어떻게 맺어야 할 지 모르겠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애도의 일환으로 시작된 글이라 원래는 목적도 결론도 없었던 글이었던지라. 그래도 이 한 마디만은 남겨두고 싶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 '트랜스포머'와 같은 글을 끝내려 한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말한다.

 당신의 노래가 있어 행복했고, 그 노래와 그 기억을 난 또 오래도록 간직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도 저 위에서 영원히 행복하시길... 

 트랜스포머 앨범의 뒷 커버. 옆의 남자는 루 리드의 절친으로 바지 때문에 한동안 많은 남자들을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바지 안에 바나나를 넣은 것이라고. 하하,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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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달부터 망가진 몸에다 5월은 정말 여러모로 바쁜 일들이 겹쳐서 정말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6월은 어떻게든 재충전의 시간을 갖자고 마음먹고 있었죠. 마침 현충일과 주말 사이에 샌드위치 데이도 끼어있더군요. 그래서 요 시간을 무조건 활용하기로 했지요.

 

 그러다 비채 카페에서 나냥님이 올리신 이벤트 글을 봤습니다.

 이번에 나온 한승원 작가님의 신작 '겨울잠, 봄꿈'을 기념하여 마련된,

 

 '한승원 작가와 함께 하는 역사의 현장 걷기' 이벤트 !!

 

 

 


 

 

이번에 나온, '겨울잠, 봄꿈'

녹두장군 전봉준이 체포되고 처형되기까지의 마지막 나날들을 다룬 작품이죠. 

 

 

 

 오래전 부터 꼭 한 번 가봐야지 했었던,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 정읍이 답사의 대상이더군요.

 거기다, 날짜도 6월 7일!

 

 오호! 머릿속에서 왠지 저 위로부터 신탁이 내려오는 것 같았어요. '놓치지 말라'는.

 그대로 예스24로 '슝'하고 달려가 신청을 했고, 과연 의식 속에 둔중이 울렸던 그 울림은 역시나 신탁이었던지 덜커덕 당첨되고 말았습니다.

 해서, '룰루랄라~' 드디어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만 먹고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다녀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남역으로 아침 7시 30분까지 모이기로 되어 있는지라 저는 6시에 출발했습니다. 전날 새벽에 잠이 든 탓에 혹시 못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어서 알람까지 맞춰놓고 잤는데 왠걸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깨버리더군요. 어찌, 이런 일이! 이런 일은 여간해선 제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 역시 그것은 신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또 잠깐 했습니다.

 

 좀 일찍 갔는데도 오늘 스텝으로 오신 분이 벌써부터 나와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처음엔 스텝인지 몰랐습니다. 적어도 대학원생처럼 보이셔서 같이 답사가는 일행으로만 생각했죠. 하하^ ^ 그렇게 오늘 함께 가시는 분들이 하나 둘 모이고 버스는 8시 좀 넘어서 출발했던 것 같습니다.

 

 한 세 시간 정도 밖에 못 잔터라 버스에서는 휴게소 잠깐 갔다온 거 말고는 거의 졸았기 때문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정읍에 와 있더군요. 처음 온 정읍은 일요일의 학교 운동장처럼 조용하고 차분해 보였으며 어디로든 활짝 열려 있는 풍경 때문에 왠지 느릿한 거북이의 걸음이 연상될 정도로 넘치는 여유로움마저 물씬 느껴지더군요. 바로 이 곳에서 구한말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생명력으로 활활 타올랐던 동학농민혁명이 태어났다니! 어쩐지 새삼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 정읍에서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송참봉 조선 동네'라는 곳이었습니다.

 아, 동학농민혁명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것이었죠. '금강산도 식후경'은 황금률이니까요^ ^

 저는 몰랐지만 유명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1박 2일팀도 다녀가고 런닝맨도 거기서 촬영했다고. 송참봉이라는 분이(물론 실명은 아니에요.) 그의 조부모를 기리기 위해 당신들이 살았던 당시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대지 만여평 정도를 구입해 각지의 옛날 물건들을 모아 조성한 곳이라더군요. 그렇게 초가집 여러 채와 지금은 흔히 볼 수 없는 옛 물건들이 가득한 그 곳은 마치 옛날의 마을이 현재로 타임 슬립한 것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그 대략적인 모습이에요.

 

 


  이렇게 각 초가집마다 문패가 하나씩 붙어있더군요. 그래서 더욱 한 마을 같았습니다.

 



 우웃! 지게... 오랜만에 보네요^ ^

 


 

 


 이것 저것 많이 찍은 것은ㅠ ㅠ,

예정된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한동안 기다려야했기 때문이에요.

혼자 간 터라 별 다른 할일이 없는 저는 이렇게 사진 찍으며 돌아다니는 것으로 시간을 떼워야했죠. 하하하^ ^

 

 

  그렇게 한동안 싸돌아 다니다 보니 오늘의 주인공 한승원 선생님께서도 어느덧 도착하시고 드디어 비채가 통크게 쓴 점심도 먹게 되었죠. 전라도 하면 역시나 넘치는 반찬의 갯수가 떠오르는데 거기도 그랬습니다. 찬거리가 정말 많더군요. 나중에 운영하는 송참봉 주인도 오셨는데 옛날 우리 조상들은 한 번 밥을 먹을 때 반찬도 한 꺼번에 입에 많이 넣었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밥을 먹으며 말을 할 수 없었던 거라 농을 하시더군요. 입담이 좋은 재미있으신 분이었습니다.^ ^

 

  이제 배도 채웠으니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 답사를 할 차례...

 보다 내실있는 답사를 위해 정읍시청에서 담당자분께서도 오셨습니다. 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로써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그 발전과 계승을 위해 아예 따로이 전담 부서까지 마련해 두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오신분은 그 부서에 계신 분이었습니다.(성함과 직위는 제가 잘 못들어서 자세히는 말 못하겠네요. ㅠ ㅠ) 그 분이 오늘 저희들과 함께 다니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더 자세하고도 충실한 설명을 해 주신다고 하더군요. 오늘의 답사가 더욱 기대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 분이 그 담당자분입니다. 정말 하나하나를 아주 자세히 열의있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가장 처음 들른 곳은 바로 '동학혁명 모의탑'

 동학농민혁명을 처음 의논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한 곳으로 그야말로 동학농민혁명의 출발지라 할 수 있는 곳이었죠. 그 곳이 바로 '대뫼마을'이라는 곳인데 지금은 '주산마을'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답니다. 대뫼란 말 그대로 '대나무 산'이란 뜻으로 원래 이 마을에는 산처럼 많은 대나무가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지금은 다 사라져 그 정경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대뫼'란 예쁜 우리 말을 두고 '주산'이라는 이상한 명칭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일제시대 때 행정구역 명칭이 변경되면서부터였다고 합니다. 담당자 분께서 이 사실을 설명하시면서 참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아무튼 바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이 바로 '동학혁명모의탑' 입니다.

 

  바로 이 탑입니다.

 

 

 지금은 '동학농민혁명'이 정식 명칭인데 이 탑에는 '농민'이란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이 탑은 1968년에 사발통문의 후손들이 사비를 털어 세운 탑인데, 그 때는 '동학혁명'만이 정식 명칭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정식 명칭이 된 것은 2004년이었죠.

 

 

  나머지 탑의 삼면에 이렇게 사발통문이 새겨져 있더군요. 

 

 

  바로 이 곳이 1893년 1월, 동학농민혁명을 도모하고 사발통문을 작성한 역사적 현장입니다. 지금은 개인 소유의 집이 된 터라 옛 자취는 남아있지 않지만요...



  이 집이 사발통문을 작성한 곳임을 알려주는 그 집 앞에 있는 안내판.

사발통문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있어 담아봤습니다. 

 

 역사적 현장들이 동네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찾아가기 위해서는 동네를 가로질러 가야 했습니다. 가끔씩 컹컹 개 짓는 소리를 들으며 낮은 담장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대낮의 한적한 동네길을 삼삼오오 모여서 걸어가노라니 어쩐지 소풍 가는 듯한 기분도 들더군요.^ ^ 

 

 그렇게 다음으로 찾아 간 곳은 역시나 같은 대뫼 마을에 있는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입니다.

 


  여기가 바로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입니다.

 

 이름없이 산화한 무명의 동학 농민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시민단체가 3년 동안(94 ~ 97) 주관하여 세워진 탑입니다. 계획하고 세우는데 많은 시간이 걸린만큼 무명동학혁명농민군을 기리기 위한 그 뜻이 제대로 들어가 있습니다.(이런 표현을 하는 것은 나중에 보게 될 황토현 전적기 기념관의 차이 때문입니다.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은 당시 한 대통령에 뜻에 따라 급조 되었는데, 그로 인해 기념하려고 하는 것의 의미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탓에 잘못 형상화하여 지금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그 때 가서...)

 

 

 

 

 


  보시다시피 왼쪽(위)에서 오른쪽(아래)까지 무명 동학 농민군을 기리기 위한 탑들이 이렇게 조밀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보통의 위령탑 하면 높기 마련인데 여기의 위령탑들은 보시다시피 조금도 높지 않습니다. 담당자분의 설명에 따르면 '무명'이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하나의 평등한 개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대개 위령탑들은 그 영웅됨을 과시하기 위하여 웅장하게 세우는 법입니다만 여기의 탑들은 그 영웅됨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여기 이름없이 묻힌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와 같이 그저 즐거우면 웃고 슬프면 울고 한끼 밥을 위해 하루종일 노동을 해야했던 보통의 평범한 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니, 한승원 선생님의 '겨울잠, 봄꿈' 에서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던 것도 한 끼 밥을 위해서였죠. 왜 봉기를 일으켰느냐는 이토 겐지의 질문에 전봉준은 어릴 때 침묻은 강정 때문에 자신과 아버지가 겪었던 고초를 기억해 내고는 이렇게 속으로 부르짓습니다.

 '부잣집의 높은 문턱과 그 부잣집의 맵고 짠 밥 때문에 봉기를 한 것이다!(p. 88)'라고. 

 

 그렇게 이 한 그릇에 담긴 밥은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전봉준은 기꺼이 형장의 이슬이 되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그 한 끼 밥의 소중함을 우습게 알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빼앗으려 드는 위정자들에게 바로 이렇게 외치기 위함입니다.

 

 밥이 하늘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밥을 만들려고 산다. 밥을 쟁취하려고 싸운다.

더러운 밥이 있고, 깨끗한 밥이 있고, 떳떳한 밥이 있고, 부끄러운 밥이 있다. 내가 일어선 것, 고부 사람들이 관아로 몰려가 사또에게 대든 것, 아버지가 사람들의 소두로서 항거하다가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은 것, 호남 일대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 선 것이 다 이 밥 때문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에 들어온 것도 조선 사람의 밥을 빼앗아 가려고 온 것이다.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슬픈 밥에 대하여 모두 말하고 나서 죽어야 한다.(p. 216)

 

 어쩐지 저 한 그릇의 밥이 새겨진 위령탑을 보고 있으려니 그렇게 울부짖었던 전봉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담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위령탑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전봉준의 고택.

 태어난 집이 아니라 그가 어릴 때 부터 봉기할 때까지 내내 살았던 집입니다.

 

 

 

 사진은 그 고택으로 가는 초입에 있는 길입니다.

 왠지 소설 속 한 장면이 생각나서 담게 되었습니다. 바로 위에서 전봉준이 말했던 그 '밥'의 의미와 얽혀있는 일화입니다. 전봉준이 그토록 밥의 소중함을 깨달은 계기이기도 하죠.

 

 언젠가 전봉준은 굶는 가족들을 위해 어렵게 변통한 보릿자루를 가지고 돌아가다가 길에서 강도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 강도는 그냥 나쁜 강도가 아닌 너무나 굶어서 부황에 걸려있는 불쌍한 자식들을 위해 강도짓을 해서라도 먹이고 싶은 불쌍한 가장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전봉준은 그에게 가지고 있는 보릿쌀 반을 나누어 주고 가는데 또 한 명의 그와 비슷한 처지의 강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모두가 한 끼 밥이 없어서 처절한 삶을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된 그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한 끼 밥이야 말로 바로 하늘인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 일이 어쩌면 바로 이 길에서 일어난 일이지 않을까 싶어서 담아 봤습니다.


 전봉준의 고택으로 가고 있어서 그런지 이번 한승원 선생님의 '겨울잠, 봄꿈' 이 지금까지 나온 동학 소재의 소설과는 다르게 무엇보다 전봉준 개인의 내면에만 천착하여 혁명가로서가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나타내려 했다는 점이 더욱 떠오르더군요.

 

 사실, 한승원 선생님이 가는 도중의 버스에서 직접 밝히시기도 하셨죠. 당신은 이번 작품에서 최대한 전봉준의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내는데 중점을 두셨다고. 그래서 소피를 보지 못함으로 인한 안절부절, 참을 수 없는 가려움, 벼룩 같은 것의 물림에 대한 귀찮음 등등 혁명가의 모습에 초점을 두었다면 도려내 버렸을 그러한 하잘 것 없는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는 전봉준의 모습을 우리는 이 소설에서 참 많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겨울잠, 봄꿈'에 와서 비로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 작품이 한승원 선생님이 동학에 대해 처음으로 쓰신 것도 아니죠. 버스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만 이 전봉준에 관한 '겨울잠, 봄꿈'의 이야기는 일전에 나온 작품에서 전봉준 이야기만 빠뜨린 것에 어떤 부채감 비슷한 마음에서 쓰여진 것입니다.(이제부터는 존칭을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바로 그 전작이 1994년에 나온 '동학제'라는 소설입니다. 발간 연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갑오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것입니다. 고려원 출판사에서 모두 7권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또 다른 동학을 다룬 작품이 100주년을 맞이하여 발간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송기숙의 '녹두장군'입니다. 공교롭게도 송기숙과 한승원은 고향이 같습니다. 모두 장흥 출신입니다. 얼마전 타계한 이청준도 같은 장흥 출신이죠. 아마도 그래서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업었을 것입니다. 장흥은 전봉준과 같은 지도자들이 모두 체포된 후 다시금 동학 농민 3만명이 모여 항전을 계속하다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동학농민혁명전쟁사상 최대이자 최후의 격전지였으니까요. 그 '석대들' 벌판에 깊이 새겨진 역사적 상흔이 있는만큼 동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송기숙과 한승원이 보여주는 동학의 모습은 많이 달랐습니다. 송기숙은 동학농민혁명의 그 혁명적 모습에 더 중점을 두고 보여주려 한 반면, 한승원은 동학도 그저 보통 사람들의 삶이었음을 보여주려는 듯,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죠. 그건 제목에서 부터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한승원은 이미 제목에 제사를 나타내는 '제'를 써놓고 있으니까요. '제'는 그가 태어난 어촌에서 늘 행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엔 풍어와 무사귀한을 바라는 모든 인간적인 간구들이 집약되어 있지요. 그렇게 '동학제'는 인간들의 애욕, 욕망들을 한껏 보여주었습니다. 겁간이 나오고 불륜이 나오며 관능이 나옵니다. 그러한 모습은 전봉준이나 김개남 같은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렇게 한승원은 역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숨겨진 아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들이 삶에 대한 강한 집착, 애욕이야말로 그들의 생생한 생명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도 '음식남녀', 즉 성욕과 식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 말한 바 있죠. 제가 보기에 한승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충실한 것. 그것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인간다움, 그 생생히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입니다. '겨울잠, 봄꿈'에서 전봉준이 그토록 강조하는 '밥'은 아마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겨울잠, 봄꿈'은 사실 '동학제'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승원의 생각은 동학 사상에 비추어봐도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닙니다. 동학은 무엇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한울님'으로 저마다 모두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또한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 또한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답사 후기에 어울리지 않게 객쩍은 소리를 많이도 늘어놓았습니다만, 왠지 전봉준의 고택에 간다고 하니 새삼스레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전봉준의 고택에 도착했습니다.


 

 

 고택의 외관입니다. 제가 가지고 간 게 단렌즈라서 마당에서는 집을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바깥으로 나와 담았습니다. 저렇게 토담이 둘러싼 집에는 보는 방향에서 가장 오른 쪽에 부엌 하나가 있으며 그 왼쪽으로 방이 세 개 있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방에 전봉준의 사진이 걸려있고 책상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그 방이 전봉준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책을 읽는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그는 또한 날로 심해지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개탄했을 것이며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어떻게 하면 도탄에 빠진 농민들의 삶을 구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원래는 마당도 작은 그야말로 평범한 농민의 집인데 문화재로 지정되고 나서 옆의 대지를 사서 잔디밭을 조성해 놓아 첫인상은 꽤나 부유해 보입니다. 관람자가 많으니 그 편의를 위해서일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옛 모습 그대로 남겨두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더군요.

 

 

 사진은 바로 그 잔디밭에서 찍은 고택의 모습입니다. 맞은 편에는 마침 딸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계시는 한승원 선생님이 서 계셨습니다. 어쩌면 한 강 작가에게서 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 한 것 같습니다. 담당자 분이 초가 지붕을 때마다 갈아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몇 겹이나 쌓여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거기서 전봉준의 삶을 들었습니다. 원래 농촌은 배척 성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타관살이 하기가 사실은 매우 힘들다고 하는군요. 전봉준도 타관살이였습니다. 아버지 때 다른 고장에서 여기로 이사온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 가족은 전혀 그런 배척을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통 그런 경우는 타관 살이하는 사람의 인품이 훌륭하기 때문이라는군요. 그것으로 우리는 전봉준의 아버지와 전봉준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을 지녔는지 유추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고택의 뒷쪽 모습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전봉준이 사랑했던 아내가 아마도 가장 많이 이 뒷편을 걸었겠죠?

 

 고택의 바깥에는 전봉준이 생전에 길어다 마셨던 우물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택의 맞은편에도 역시 초가집이 있는데 이 고택보다 크고 깔끔해서 처음엔 그게 전봉준의 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니더군요. 그 초가집은 고택을 관리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고택의 답사를 마친 다음, 우리들은 다음 목적지 '만석보터'를 찾아 떠났습니다.
 


  여기가 바로 '만석보터'입니다.

 


   이것은 만석보를 기리는 비석입니다. '만석보 유지비'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비문은 강암 송성룡이 썼는데 왜 '지비'가 아니고 '유지비'를 썼을까 혹 의문이 들지 않나요? 그 해답은 바로 이 비석 옆에 있는 안내판에 나와 있습니다. 그 이름이 공개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한 것이라서 사진도 올리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만석보유지비'에서 '유'자와 '비'자를 빼고 읽으면 바로 그 안내판에 쓰여져 있는 이름이 됩니다. 그런 이유로 강암 송성룡은 특별히 '유'자를 넣은 것이죠. 그냥 '터'를 넣어도 될텐데 왜 굳이 '지'를 넣어 이렇게 공개적으로 발음하기 어렵게 만든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담당자 분께서도 그 안내판을 맡았던 직원에게 왜 그렇게 썼냐고 물어보셨다고 하는데 그냥 아무 이유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고 합니다. 행정편이주의가 드러나는 씁쓸한 사례죠.

 

 아무튼. 이 만석보가 동학농민혁명 답사 코스 중 하나가 된 것은 바로 이 만석보가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을 당기는데 일조를 했기 때문입니다.  만석보는 배들평야(현재 명칭은 이평)로 들어오는 두 개의 큰 하천, 그러니까 동진천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이 만석보를 만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원흉 조병갑인데 아시다시피 '보'를 만드려면 농민들에게 부역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처음에 그는 몇 년치 물세를 탕감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부역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기꺼이 부역에 나섰는데 '보'가 완성되자마자 조병갑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여전히 물세를 거두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될 부역은 부역대로 하고 물세 또한 저번 보다 더 많이 받으니 농민들이 가만있을리 없죠. 결국 이 만석보의 만행으로 인해 농민들은 봉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진은 만석보유지비 맞은 편에 있는 배들평야의 모습입니다. 보시는대로 정말 광활하죠. 이렇게 넓은 평야가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들바람이 참으로 시원했습니다. 사실 그 날은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이미 만석보터에 이를 때만 해도 저마다 지쳐있었죠. 하지만 만석보터의 시원한 들바람 덕분에 더위로 인해 몸에 달라붙은 피로를 단숨에 날려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는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모르실 것입니다. 담당자님도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여기에만 오면 피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겨울에는 정말 오기 싫은 곳 중에 하나라고. 별다른 뒷말이 없었어도 이내 그 이유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만한 바람이 겨울에 불면 그것은 그대로 재앙에 다름아니겠죠. 

 

 

 그렇게 만석보터에서 시원한 바람을 마음껏 만끽한 다음 우리들은 다음 목적지로 떠났습니다.


'만석보터'를 지나 그 다음으로 간 곳은 바로 말목장터였습니다.

만석보터에서 말목장터까지는 그리 멀지 않더군요. 하지만 담당자 분이 없었다면 정말 찾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목장터에는 이렇게 사진으로 보시다시피...

 

 


 

 '말목장터'임을 알려주는 요 안내판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죠. 제가 듣기엔 여기에는 원래 두 가지가 더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동학혁명의 최초 시발점으로써 전봉준이 말목장터에서 일장 연설을 할 때 그 옆에 있었던 감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세웠던 '말목정'이라는 정자죠. 하지만 이제 그 두가지는 없었습니다. 감나무는 지난 태풍에 쓰러져 결국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옮겨졌고 '말목정'은 농민이 주축이 된 혁명에 양반 문화의 소산인 정자로 기념한다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라는 비판에 철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렿게 말목장터임을 알려주는 안내판만 남게 된 것이죠. 이 말목장터는 아시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집결지로 그 불길이 처음으로 타올랐던 곳입니다. 말목장터는 부안, 정읍 그리고 태인으로 모두 갈 수 있는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그야말로 사통팔달 지역으로 근방에선 가장 큰 장터중에 하나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기엔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죠. 여기서 1894년 혹한의 1월. 전봉준은 봉기를 촉발시키는 연설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역시나 조병갑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조병갑은 고부군수로써의 임기를 다하고 익산군수로 발령이 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민들도 드디어 학정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는데 배들평야와 같은 너른 평야가 있어 익산 보다는 빼앗아 먹을 것이 더 많다고 여긴 조병갑은 익산으로의 부임을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로비와 획책으로 고부로 부임한 신임군수마저 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다시 고부 군수 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제 겨우 빛이 보이는가 했는데 다시금 암흑을 마주하는 것만큼 분노하게 되는 일도 없죠. 더구나 그것이 오로지 불법 로비와 허용되지 않는 꼼수 때문이라면 더욱 분노하기 마련입니다. 동학 혁명의 불길은 그렇게 당겨졌던 것입니다. 먼저 바꾸기를 염원해서가 아닌, 상황자체가 혁명이 아니고서는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절박함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동학농민혁명은 말목장터의 도화선을 타고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해 갔습니다. 그리고 관군과 맞서 최초의 대승리를 이루어냅니다. 그 곳이 바로 '황토현'입니다. 한자로 하면 도대체 이 곳이 어떤 곳인지 감이 잘 안 오는데 순 우리말로 풀어보면 여기서 '현'이란 '재'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고개'를 이르는 말인 것이죠. 황토현이라 부르지 말고 황토재 혹은 황토고개라고 하면 더 의미가 확실히 전달될 것 같은데 왜 굳이 이렇게 한자말로 부르는지 모르겠어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사실 '배들평야'도 지금 공식 행정구역 명칭은 '이평'입니다. 뜻을 알고 보면 정말 웃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평'을 풀이하자면 배나무가 많은 평야란 뜻이 됩니다. 하지만 저번 사진에서도 보셨듯이 거기엔 배나무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배들평야'란 원래의 이름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배들평야란 배가 드나드는 평야란 뜻인데 일제 시대 당시 이 행정 구역 이름을 담당했던 사람은 그걸 단순히 배라는 과일이 나오는 평야로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배나무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평'이란 이름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더구나 지금까지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구요. 사정을 알고나면 코미디가 따로 없는 셈이죠. '만석보터'가 차마 이름을 공공연히 부를 수 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데 '배들평야'와 '이평'과의 관계는 사실 동학농민혁명운동을 기념하는 사업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의 의미를 되살려 기리는 작업이 아닌 그저 어떤 정권의 기호에 따라 급조되고 행정편의주의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오히려 그 본래적 의미를 흐리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바로 이 '황토현전적지'가 그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황토현 전적지에는 그 승리를 기리기 위하여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황토현 전적지 기념탑이고 또 하나는 거기서 두시 방향으로 내려가면 있는 황툐현전적지기념관입니다. 황토현 전적지 기념탑은 비교적 오래전에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963. 10월 3일에 건립되었죠. 동학혁명운동을 기리는 작업이 꽤나 오래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개막 행사엔 당시 대통령 후보로 한창 선거운동 중이던 박정희도 참석했다고 합니다. 웃기는 건, 그 때 전봉준 장군의 친 딸이라고 80 넘은 할머니 한 분이 나와서 꽃다발도 받고 기념 사진도 찍고 했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은 전봉준 사후 3년 뒤에 출생한 분이였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꼼수를 부린 것 같은데 이런 눈가리고 아웅하는 해프닝이 공식적으로 벌어졌다니 요즘에도 많이 보게 되는 모습이기도 해서 어쩐지 침울해 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황토현전적지기념탑은 그런 우여곡절을 안고 지금도 이렇게 서 있습니다.

 

 


 기념탑의 윗 부분 모습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의 기치였던 '제폭구민 보국안민'이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보'의 한자가 틀렸습니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보'자는 지키다의 '보(保))'가 아니라 '돕다'의 보(
輔) 자죠. 서체도 너무 유려해서 미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원래 기리고자 하는 동학농민혁명의 분위기와 맞지 않습니다. 탑을 건립할 때 원래 기리고자 하는 것을 그다지 잘 헤아리지 못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아닐까 합니다.

 



 탑의 아랫부분입니다. 단렌즈로는 전체가 다 안들어가서 할 수 없이 이렇게 나눠서 찍었습니다.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라는 이 탑의 정식 명칭이 저렇게 중앙에 새겨져 있습니다. 

 



  탑의 (보이는 방향으로) 오른쪽에 있었던 황토현 싸움을 나타낸 부조. 그 뒷 부분엔 사진으로는 안 찍었습니다만 '겨울잠, 봄꿈'에도 나오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들이 함께 불렀다는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라는 노래 가사와 전봉준을 기리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 가사를 볼 수 있습니다. 황토현은 높은 고개답게 내려다 보는 풍광이 정말 좋습니다. 날이 좋으면 동학농민혁명에서 첫 무장 봉기가 일어났던 장소인 '백산'도 보인다는군요. 그 때 얼마나 많은 농민들이 모였는지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겨울잠, 봄꿈'에도 나오는 말이죠. 말인즉슨 당시 농민들이 모두 죽창을(첫 글에 나온 '대뫼마을' 기억하시죠. 그렇게 대나무나 많은 고장이었으니 대나무로 만든 죽창도 많았을 것입니다.)들고 모였는데 그래서 앉으면 손에 들고 있는 대나무 밖에는 안 보인다 해서 '죽산', 서면 입고 있는 흰 무명옷 밖에는 안 보인다 해서 '백산'인 것이죠.

 


  그래도 전체적인 탑의 모습을 담아보자는 생각에 꽤나 멀리까지 가서 간신히 찍은 사진입니다. 마침 한승원 선생님이 걸어오시다 딱 찍히셨네요^ ^

 

 이렇게 기념탑을 둘러보고

2시 방향에 나 있는 길을 따라서 바로 가까이에 있는 '황토현전적지기념관'에 들렀습니다.

 


  그 길로 내려가는 이렇게 기념관의 전경이 나타납니다.

 

  기념탑과는 달리 기념관은 전두환 정권 때 세워졌습니다. 세워지게 된 까닭도 알고보면 좀 기가 막힙니다. 전봉준 장군이 전두환과 같은 천안 전씨라서 사실은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고 싶은 마음에 위의 주도로 만들게 된 것이라더군요. 그러니까 이 기념관은 전적으로 윗분의 기호에 부합하기 위한 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타나게 된 결과물도 원래 기리고자 하는 동학농민혁명 본래의 뜻과는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황토현전적지기념관'은 제대로 된 성찰없이 오로지 선전효과만 기대하면서 만들게 되면 얼마나 어이없는 결과물이 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문은 전봉준 동상으로 들어가기 위한 기념관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문입니다. 이렇게 안에 문 하나를 더 두는 것은 보러 오는 자들이 좀 더 엄숙한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보이는 현판은 이 문을 '보국문'이라 하고 있습니다. 현판의 한자를 보면 기념탑의 한자가 어떻게 틀렸는지 바로 알 수 있죠.


 

 

 

 

  안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동상입니다. 담당자분의 말씀에 따르면 이 동상도 사실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장군의 위엄을 나타내는 동상임에도 불구하고 맨상투를 함으로써 그 위엄을 스스로 깎아버리고 있다는 것이죠. 아무래도 전봉준 장군이 압송되는 그 사진을 모델로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 장군의 위엄을 기리기 위한 것이 본래의 뜻이었다면 좀 더 숙고해서 격에 맞게끔 형상화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셨습니다.

 

 

  사진은 동상의 뒤에 양쪽으로 서 있는 부조 중 하나를 찍은 것인데 이 부조는 더욱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형상화된 농민들의 모습이 원래 동학농민혁명에 나섰던 농민들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말목장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절박함 끝에 나온 혁명운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조엔 그런 농민들의 고통, 절박함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라인드로 매끄럽게 갈아버린 탓에 농민들이 표정과 모습은 한없이 부드럽기까지 합니다. 유홍준 선생님은 혁명운동이 아니라 '소풍 가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는군요. 너무나 그 본래적 의미와는 동떨어진 상태로 형상화된 탓에 '20세기 최대의 문제작'이라고도 하셨답니다.


 


   대뫼마을에 있었던 무명동학농민위령탑에 새겨진 농민들의 얼굴과 비교해 보면 왜 그 부조가 문제인지 제대로 드러납니다. 이 위령탑은 무려 4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세워졌죠. 하지만 이 기념관의 동상과 부조는 한 정권자의 지시로 빠른 기간에 세워졌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차이가 그와 같은 문제점을 낳게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동상과 부조는 그 외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무엇보다 제작자 때문입니다. 김경승이란 사람으로 일제 시대 때 친일 미술인들이 주축이 된 관변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의 일원으로서 일본의 입맛에 맞는 미술품을 만들어 온 친일 행적 때문이었습니다. 최근 국회에 있는 이순신 동상이 일본도를 차고 있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이 동상 역시 김경승의 것이었죠. 동학농민혁명은 무엇보다 항일 운동이었기 때문에  친일 인사가 전봉준 장군의 동상을 만들고 동학농민혁명의 부조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 동학농민혁명의 고귀한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김경승은 해방 이후 이승만 동상이나 맥아더 동상을 만드는 등 언제나 정권과 친화적 태도를 보여왔는데 이 전봉준 동상도 그간의 그런 이력 때문에 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가가 친일 인사인지라 그가 제작한 것은 모두 철거되는 게 옳은 일이지만 이미 한 번 세우는 것을 허물고 다시 세우는 것은 그만큼 재정이 드는 일이어서 이 또한 쉽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러한 재정적 한계를 극복하려면 아무래도 보다 많은 이들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나서주는 수 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이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일에 보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동상에서 (보이는 쪽으로) 왼 편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사당입니다. 늘 개방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날은 문이 잠겨져 있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동상에서 물러나 다음으로 들어간 곳은 기념관이었습니다. 기념관을 들어가면 정면에 이렇게 전봉준 장군의 초상화가 있습니다만 이 또한 꽤나 문제가 많은 '문제작'이었습니다. 일단 농민혁명의 주축이었던 사람에게 양반의 모습, 그것도 대감의 모습을 입힌다는 것이 모순이고 표정 또한 너무나 표독스럽게 그려져 있어 과연 이 초상화가 전봉준 장군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미움받도록 하려는 것인지 애매모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저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이 초상화에서는 흠모의 마음 보다는 다가가려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이래저래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은 씁슬한 느낌만 가득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런 느낌을 안고 기념관 정문을 나오니 바로 그 정면에 저렇게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 보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기 위해 특별히 설립된 재단에서 만든 것인데 거리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정면입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동학농민혁명에 관련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기념관입니다. 좀 오래 둘러봤는데 정말 내실이 있더군요. 그래서 안내자 없이 정읍에 와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돌아다녀 볼 생각이라면 먼저 이 기념관부터 들르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되더군요. 여기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얻고 유적지를 답사한다면 더욱 내실있는 답사가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1층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할 당시 조선 백성의 실생활을 보여주는 전시장이 있는데, 거기서 망태를 발견했습니다. '겨울잠, 봄꿈'에서 우금치 전투에선 농민들이 불타는 망태를 굴러서 일본군들에게 대항했다길래 도대체 어떻게 생긴 물건일까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을 여기서 풀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1층에 있던 당시 동학농민혁명을 외세는 어떻게 보았는지 그 자료들을 모아놓은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일본 신문들은 동학농민혁명들은 조선을 깨끗이 하려는데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들 혹은 배를 뒤집으려고 달려드는 악어들 이렇게 아주 부정적으로만 묘사했더군요.

 


    동학농민혁명기념관 2층에 올라가면 중앙에 둥글게 커다란 그림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데 동학농민혁명의 전과정을 그려놓은 것입니다. 그 중에서 동학농민혁명과정과 관련있는 것들만 발췌해(그러니까 그 큰 그림 중 관련있는 일부분만 찍었다는 이야기죠.) 찍어봤습니다. 지금까지의 답사 과정이기도 해서 함께 하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올려봅니다. (그림이라서 혹시 저작권이 문제될지도 모르는데 만일 문제가 있다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1.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이 되었던 탐관오리들의 학정.

 


 


  2. 엎친데 덮친 격, 고부 군수로 부임해 오는 조병갑... 

 

 

 3. 동학농민혁명의 시작, 사발통문...



 
 4. 말목장터에서의 연설...

 


  5. 백산에서의 봉기



 

 6. 황토현에서의 승리... 


 
 7. 전주성 함락...

 

 

 8. 손병희가 이끌던 '북접'과 전봉준이 이끌던 '남접'이 하나되는 순간...

 

 

 9.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배.

 

     이 때 동학농민군과 대치했던 일본군은 모두 200명, 관군은 2,500명.

    동학군은 남접이 1만명, 북접이 1만명, 김개남이 이끌던 8천명까지 해서 도합 2만 8천명이었는데 이 전투에서 거의 수만에 가까운 동학농민군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대부분은 기관총에 의한 학살이었다고 합니다.

        

 

 

 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답사 일정은 공식적으로 모두 끝났습니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말이죠. 기념촬영까지 끝내고서 마지막이 늘 그렇듯이 왠지 모르는 아쉬움을 입가에 조금은 쓸쓸히 머금고 있을 무렵 뜻밗의 낭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비채에서 저녁을 쏘겠다는! 마침 출출할 무렵이라 그 소식은 더욱 반가웠고 벌써 예약까지 되어있다는 식당으로 우리는 '슝~'하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육회 비빔밥을 먹었는데 비빔밥만 나오지 않고 여럿이서 같이 떠먹을 수 있도록 세수대야 같은 커다란 그릇에 미역국까지 같이 나오더군요.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

 


 

 나중에 들었는데 오늘 갓 잡은 소로 만들었다는 육회비빔밥도 맛있었지만 미역국이 정말로 환상이었습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숟가락이 자꾸만 미역국을 향하더군요. 알고보니 오늘 답사를 담당하셨던 분이 소개해주신 식당이라더군요. 과연, 그래서 맛이 좋을 수 밖에 없었던 걸까요. 아무튼 모두 정말 맛있었습니다. 저녁 식사는 이번 답사의 화룡정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그런데 그 식당 이름을 미처 뇌리에 새겨두지 못했습니다. 흑 ㅠ ㅠ)

 

  이렇게 유월의 초입을 뜻깊은 시간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던 동학농민혁명 답사를 마쳤습니다. 더러 사정없이 내리쬐는 땡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쯤은 답사를 통해서 얻게 된 것들에 비하면 주저없이 감수할 작은 희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예정에 없었던 저녁까지 마련하면서 끝까지 보다 내실있는 답사를 위하여 모든 수고를 감내해 주신 비채에게 아낌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언제고 한 번 꼭 돌아보고 싶었던 답사를 더욱 풍성하게 맛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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