낢이 사는 이야기 시즌3 2 - 간밤에 변사체가 되지 않았는지 체크해 줄 사람 낢이 사는 이야기
서나래 글.그림 / 씨네21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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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그래도, 앞으로의 길이 평탄할지, 울퉁불퉁할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같이 가 줄 친구를 구해서 다행이고

혹 바싹 마른 사막같이 험난한 길을 가게 되더라도 생각 없이 웃으며 꽃구경도 하며 희망도 좀 가져 보는 그런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pg 343)

 

 

아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만화인지라 나도 덕분에 접해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만화를 보고 서평을 남기기는 또 처음이라 신기한 느낌도 든다.

 

 

아내와 나는 취향이 상당히 다른 편이다.

하다못해 만화를 봐도 아내는 귀여운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면 잘 보지 않는다.

그에 반해 나는 만화 자체를 잘 즐겨보지 않을 뿐더러 보더라도 DC나 마블 히어로들을 좋아하고

'20세기 소년'이나 '기생수'처럼 정말 유명해서 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작품들만 몇 편 보았을 뿐이다.

 

 

이런 우리에게도 공통점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낢이 사는 이야기'이다.

웹툰으로 중간중간 가끔 보기는 했었는데 이렇게 두툼한 책으로 한번에 쭉 보기는 처음이었다.

웹툰이 아무리 대중화가 되었어도 역시 만화는 책으로 들고 침대에서 뒹굴며 보는 게 최고다.

요즘 날씨도 때마침 쌀쌀해져서 이불 푹 덮어쓰고 재미나게 봤다.

'생활툰'의 재미라 하면 역시 공감의 힘일텐데, 이번 편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번 2편에서는 낢이 결혼준비를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도 결혼한지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결혼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며 공감가는 것이 많았다.

 

 

 

특히 '간밤에 변사체가 되지 않았는지 체크해 줄 사람'이라는 부제도 공감이 갔다.

자취를 하면서 느꼈던 건데, 간밤에 술을 잔뜩먹고 아침에 죽음의 숙취를 맛볼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러다 죽으면 월세 받으러 오는 집주인이 내 시체를 발견하게 되겠지.'

지금은 아내가 있으니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결혼이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도 간소하게 한다고 했는데 어른의 시각은 또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우리 부모님은 안그러셔'라고 자신했던 부분도 막상 결혼하고 나면 달라지는 것도 많다.

30년간 혼자 살 때는 기대도 안하시던 양반들이 결혼하고 나면 별걸 다 기대하게 되는 모양이다.

 

 

뭐 아직 부부로 산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 부부는 상대방 때문에 싸울 일은 극히 없다.

연애를 오래 하고 결혼을 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서로가 뭘 싫어하는지 잘 알아서 서로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리는 짓은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서로의 가족들 때문에는 종종 충돌이 생길 때가 많다.

도무지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도 생긴다.

살아온 환경과 배경이 다르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내 상식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주제가 결혼이다보니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났다.

요즘 추세를 생각하면 너무 빨리 결혼했나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결혼하기를 잘했구나 싶을 때가 훨씬 많다.

물론 만화라서 각색된 부분도 분명 있겠지만 참 재미나게 산다 싶었다.

보고 나서야 이게 시즌3였다는 걸 알았다.

생활툰을 시즌3까지 그리고도 재미있을 수 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내가 웹툰작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다.

책 자체도 너무 재밌었지만 아내에게는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작은 선물이 된 것 같아서 마음도 뿌듯했다.

언젠가는 자신만의 웹툰을 그리게 되어 저자가 위기 의식을 느끼는 날이 오게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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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들지 않는다 - 젊음을 죽이는 적들에 대항하는 법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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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저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죽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있다면 거기에 가서 어떻게든 살아갈 생각을 하면 되고, 없다면 무가 되어 소멸되면 그뿐이다.
뭐가 어찌되었든 지금 이렇게 이 세상에 살아 존재하는 한,
당신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지닌 능력을 적극 활용해서 살아가야 하고, 또 그렇게 만들어졌음은 확실하다. (pg 207)

 

 

마루야마 겐지의 책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이후 두 번째로 접하게 되었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서평: http://blog.naver.com/qhrgkrtnsgud/10181610300 / 이하 '인생'으로 표기)

이전에 본 책의 강렬한 인상 덕분에 이번 책도 꽤 기대가 컸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이전 책에서도 그는 일관되게 온전한 '자립'의 삶을 추구할 것을 강렬한 어조로 주장하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어떠한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삶.

야생동물들은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거나 긴장을 늦추면 천적에게 잡아 먹히게 마련이다.

저자는 그러한 야생동물의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살아남으려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진정한 '젊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젊음'이란 단순히 나이가 어림을 뜻하지 않는다.

노인이어도 눈빛에 총기를 담고 자신의 삶을 자립적으로 사는 사람은 '젊음'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리 어려도 가축이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자는 '젊음'을 빼앗긴 산송장이라고 말한다.

'젊음을 죽이는 적들에 대항하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을만큼 저자는 자립의 삶이 곧 젊음임을 강조한다.

그 젊음을 죽이는 적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부모와 국가 등 이전 책에서도 지적했던 부분을 이번 책에서는 더욱 실랄하게 비판한다.

자신의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엄마, 아내 등쌀에 자식에게 큰 소리 한번 못치는 아빠를 맹비난한다.

국가라는 것도 결국은 권력을 가진 소수의 것일 뿐이니 놀아나지 말라며 호통친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주인의식'을 강조하지만 정작 주인은 따로 있으니 노예 생활따위 당장 집어치우라 말한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신이다. 의지할 수 있는 것도 자신뿐이다. 그것은 철칙이다. (pg 51)

 

사실 '인생'과 논조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인생'을 읽은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은 읽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다만 문장의 어조가 '인생'보다 훨씬 강하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다소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인생'을 보고난 뒤에는 두 번도 생각 안하고 바로 별 다섯개를 찍을 수 있었는데 이 책은 다소 망설여졌다.

특히 가족의 역할을 너무 일반화시켜 말하는 듯한 부분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 다소 불편함을 느끼게했다.

하긴 저자가 아래와 같이 일반 대중 전체를 염두해두고 쓴 책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기는 했다.

이런 나날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런 생활을 진정 바랐던 것은 아니다, 이런 나는 진짜 내가 아니다,

그런 후회가 가슴을 스칠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들면서 깊은 한숨이 나오고, 기분 전환 정도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아

오늘 저녁의 반주는 애타게 기다리면서도 내일을 적극적으로 맞이할 힘은 점차 쇠해 가는, 그런 당신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pg 88)

사실 내 자신은 누구보다도 윗 구절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내 자신을 호되게 나무라는 책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사는 삶이 내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은 여실히 느꼈다.

 

직장인이 되기 위해서 타인을 위해 죽어라 일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건 내 인생이다,

어느 누가 되었든 개입할 수 없다, 내 일은 내가 결정하겠다, 그것이야말로 자유의 증거이다, 제 아무리 직장에 충성하고 심혈을 쏟아 분투해 본들 반드시 필요한 인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들 정년이 되면 대형 쓰레기처럼 미련없이 내던져질 뿐이다. (pg73)

어릴 적 꿈이 직장인이었다는 한심한 인간이었으니 지금 한심한 것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 꿈을 이루고 나서야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분투, 혼란, 내일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일깨우고,

생각지도 못한 힘을 발휘하게 하며,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인간의 모습으로, 아 내게 이런 면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당신을 변모시킬 것이다. (pg 63)

 

 

난 저렇게 살 자신이 없다.

부럽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나는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나의 내일이 확실한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어중간하게 불안한 내일과 어중간하게 안정적인 내일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물론 결국 '안정적임'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부합하려면 확실하게 안정적이지 않으면 안될테니

결국 불안하게 살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만나서 술 한잔 기울이며 예전 이야기나 실실 하는게 낙이 되어 버렸다.

생각해보면 이제 서른이 예전 이야기랄만한게 어디 있겠는가.

직장에서도 나이 50도 안 된 사람들이 나이 먹었네 하며 옛날 이야기나 실실 해대는게 짜증인데 내 자신도 그러고 있다.

 

중장년층이라면 몰라도, 아직은 폭발적인 젊음을 누려야 하는 청년층까지 하나같이 과거로 눈을 돌리고 나약한 치유에 젖어들려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치유를 위한 치유, 감동을 위한 감동을 밤낮으로 추구하고, 돈을 내면서까지 거짓 치유와 엉터리 감동을

얻으려 애쓰는 자신에게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pg 161)

아직 과거를 회상할 때가 아니다.

아니, 평생 과거를 회상할 때는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살아갈 날이 하루라도 남아 있다면 살아갈 날을 생각해야지 과거따위 회상해서 무엇하겠는가.

국가가 있어 당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가 있어 당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직장이 있어 당신이, 가정이 있어 당신이, 친구가 있어 당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신은 바로 당신이 있어 있는 것이다. (pg 76)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을 보고난 후에는 '에라이 인생 뭐 있나 한번 해보는거지'싶은 뭔가 모를 패기가 생겼었는데

이 책을 보고나니 뭔가 모를 씁쓸함이 올라온다.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맥주 한잔이 너무도 생각난다.

하지만 아래 문구가 자꾸 떠올라서 한잔 하기도 뭣하다.

 

당신은 술을 퍼마시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싶어 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이성의 소유자인가. (pg 142)

저자의 주장에 100%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어주는 힘은 분명 있는 것 같다.

특히 사소하다면 사소한 술, 담배 등 정신을 나약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자립을 시작하라는 말은 호소력이 있었다.

지금 금연 1년째인데 술은 도무지 끊을수가 없다.

물론 사회생활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술이 너무도 좋다.

없으면 정말 하루하루를 못견딜 것 같다.

담배 없는 삶이 익숙해졌으니 이제 술 없이 사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할텐데 큰일이다.

오늘 밤에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남긴 인류에 대한 생각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간의 기괴함이 재미있고, 인간이 야생동물의 한 종류치고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

거기에서 쉴 새 없이 생명의 불꽃이 피어오른다는 점이다.

인간이 추악한 만큼 그 불꽃은 아름답니다. (pg 233)

 

언젠가는 나에게도 인간 세상이 재밌다고 느낄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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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가 능력이다 - 사람을 움직이는 설득의 힘
김영래.백경운 지음 / 리드리드출판(한국능률협회)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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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강연의 목적은 모든 것을 전달한다기보다는 동기를 일으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강연에 필요한 요소는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확고한 방향성이다. (pg 48)

 

다니는 직장에서 사내 강의를 맡아 하게 되었다.

이전 직장에서 몇 번의 강의 경험이 있어 자료는 충분하지만 역시 2년쯤 손을 놓았다가 다시 잡으려니 적지 않게 부담이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접하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산업체 강사로 수년간 일해왔다는 두 명의 저자가 공저로 쓴 구두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책이다.

제목이 그냥 '말하기'이므로 딱 '강의용'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이 책에서는 평소에 아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과 남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말 속에 자신의 진심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기억에 남는다.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를 쓰고 몸짓, 발짓까지 해가며 연설을 해도 말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그것을 믿고 있지 않다면

청중에게도 그 감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특히 정치인들이 선거 기간에 연설을 할 때 이러한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반대로 전달 스킬이 다소 어수룩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이 '내가 지금 얘기하는 게 정말 중요한거야! 모두들 알고 있어야 해!' 라는

마음을 가지고 전달하면 그 마음이 청중에게 전해진다.

스피치를 할 때에는 마치 교회의 목사라도 된 듯이 자신이 믿고 있는 바가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야 그 믿음이 청중에게도 전해진다.


물론 "내가 주장하는 바가 100% 옳다, 너희들은 틀렸다."라고 우기라는 뜻은 아니다.

내가 주장한 바에 대해 청중쪽에서 반박을 하거나 이견을 제시할 경우에는 부드럽게 수용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전달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저자들에 비하면 나의 강의 경력은 매우 일천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커뮤니케이션 관련 강의를 해 본 경험 상

커뮤니케이션이 단순히 글이나 강의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도 잘 안다.

다들 어떤 말하기가 '좋은' 말하기인지는 경험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

다만 내가 그렇게 되지 않을 뿐이다. 즉,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분야에 관한 책을 볼 때에도 크게 기대감을 많이 가지고 보지는 않는다.

특히 뭔가 새로운 방법을 발견할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좀 실망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일단 목차의 흐름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MECE 하지 않다고 할까?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앞에서 본듯한 내용의 반복이 이어진다.

물론 말하기가 이성적 활동이 아닌 감성적 활동이라 논리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면 크게 할 말은 없지만

이 책을 보는 내내 내 마음도 불편했으므로 그 또한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저자 둘이 모두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책이 전반적으로 번역체로 쓰여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책에서 등장하는 사례들이 전부 외국의 사례라 딱 와닿는 느낌이 적다.

아무래도 타국어로 한 스피치를 한글로 번역하여 옮겨 적다보니 스피치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질리 없다.


안그래도 본래 발언 자체의 영향력이 100이라 할 때 발언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것의 7% 정도라 하는데,

그 7% 마저도 제대로 와닿지 않으니 책을 보는 내내 불편했다.

책의 후반부 부터는 문장에 비문도 많아져서 원서 여기 저기에서 내용을 따다 이어 붙인 것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들 정도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저자들이 썼다는 부분은 여는 글 1, 2가 전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저자들의 강의 경력이 상당히 화려한데, 그러면 그들이 직접 체험한 강의 참가자들의 사례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책에 담겨 있지 않아서 매우 아쉬웠다.

('직접 체험한 외국인의 사례'라고 생각하기엔 링컨이나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사례가 너무 많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책의 내용은 정작 "자신의 스토리를 이야기하라"라고 하고 있으니 저자들 스스로도 책대로 하고 있지 않은 모양새다.



글을 매우 잘 쓰는 사람이 말은 잘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저자들의 강의를 들었다면 느끼는 감동이 달랐을 수 있겠다.

하지만 단연코 책 자체는 훌륭하다는 판단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배운 점들을 굳이 좀 찾자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청중 자신이 스스로의 성장을 상상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라.

듣는 사람이 당신한테서 어떤 화제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인 결과 어떻게 각자의 문제를 해결하는지,

강연이 청중 각자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자문자답 시켜 보는 것이다. (pg 83)

만약 상대를 자기의 의견에 찬성시키고 싶으면, 우선 자신이 그의 편이라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pg 124)

아쉬운 부분이 상당히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수준은 아니다.

뭐랄까...저자들의 경력 대비 많은 것들을 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느껴졌을 뿐이다.

어찌되었든 '말하기'는 일종의 스킬이기 때문에 결코 책으로는 배울 수 없다.

스스로를 항상 돌아보며 연습하는 길 밖에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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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동물 - 파국적 결말을 예측하면서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인간의 심리
더글러스 T. 켄릭 외 지음, 조성숙 옮김 / 미디어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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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숲을 뒤지거나 무서운 포식동물을 걱정하는 대신에
차분히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뇌가 정교하게 발달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pg 31)

'왜 우리는 미친 짓을 멈출 수 없는가?'

이 책의 부제로 달려 있는 문구이다.

 

미친 짓이라고 하면 다소 어감이 거칠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누구나 살다보면 자신도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미련한 실수들을 하게 마련이다.

 

보험설계사 말만 믿고 필요도 없는 보험 상품에 덜컥 가입해버리는가 하면
좀 더 기다리면 싸게 구입할 수 있었던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해 버리거나
고심해서 산 옷을 입지도 않고 옷장에 쳐박아두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런 실수들을 하는걸까?
이 책은 두 저자가 이런 인간의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을 연구한 책이다.
나 자신도 누구보다 이성적이라 생각하며 살지만 사실은 말도 안되는 실수들을 너무도 많이 하는 터라,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컸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저자는 우선 인간의 행동의 근원이 되는 동기를 파악하는 이론적 배경 두 가지를 먼저 비교하고 있다.

 

 

전통경제학자로 불리는 학자들은 대체로 인간을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존재로 본다.
이 때 합리성의 근거가 되는 것은 단연코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이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물건을 산다면 10원이라도 저렴하게 사고 싶어한다. (물론 사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도 고려한다.)
하지만 이 이론적 배경으로는 인간이 행동 중 경제적 이익의 극대화와는 상관없이 결정되는 수많은 행동들을 설명해줄 수 없다.

 

책에 나오는 예시를 들면, A와 B라는 두 명의 사람에게 만원을 준다.
A에게는 돈을 나눌 수 있는 권한을 주고, B는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다고 해보자.
만일 B가 받아들이면 서로는 그 돈을 갖고 끝나지만, 만약 B가 거절할 경우 A와 B는 둘 다 돈을 받지 못한다.
이 경우 서로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하려면 B는 A가 1원을 제시하더라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이익이다.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A가 불공평하게 돈을 제시할 경우 B는 차라리 둘 다 돈을 받지 않는걸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험들을 바탕으로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이 상황에 따라 경제적 이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합리적'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으며 인간의 의사결정에는 다양한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행동경제학자들의 다양한 실험들로 인간이 특정한 상황 하에서 보이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의사결정들이 많이 연구되어 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두 사람은 이러한 행동경제학자들의 시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스스로를 진화심리학자라 부르는 연구자들은 아래와 같은 주장을 펼친다.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 종과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이 현대의 인간에게 부여한 뇌는
특정 방식에 따라 결정을 내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 특정한 방식은 조상들의 유전자가 되물림될 가능성을 꾸준히 향상시켜 주었던 방식을 말한다. (pg 32)

 

 

다시 말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진화적으로 더욱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심층 합리성'이라 부른다.
이 논리에 따르면 행동심리학에서 주장했던 인간의 판단미스, 오류들은 실제로는 설계상 결함이 아니라
설계상 특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특정 상황에서는 비이성적인 판단을 한다고 결론낼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진화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이러한 시각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수년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본 실험이 기억난다.

횡단보도에서 누가 먼저 길을 건너려는 모션을 취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따라 건너려고 하는지를 관찰했었는데,

이 때 정장을 입은 남자와 캐주얼을 입은 남자로 나누어 복장에 따라 사람들의 판단이 달라지는지를 실험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정장을 입은, 권위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따라 가려는 경향이 더 강했다.

이 실험의 결과도 진화적으로 따져보면, 단순히 우리가 권위 있어 보이는 사람을 더 쉽게 따르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낼 것이 아니라,

권위 있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생존에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어떤 부족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때,

산전수전 다 겪고 부족에서 추앙받는 권위 있는 어르신의 말을 따르겠는가, 패기 넘치는 젊은 청년의 말을 따르겠는가?

어떤 선택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납득이 갈만한 추론이다.

 

이러한 진화론적 관점은 아래와 같은 통찰을 준다.

 

첫째, 인지 편향이나 행동 편향 대부분은 진화적으로 더 깊은 기능을 지닌다.

둘째, 특정 편향의 적응 기능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 편향이 어느 순간에 강해지고 어느 순간에 약해지는지 한결 쉽게 예측할 수 있다.

(pg 84)

 

따라서 저자는 어떤 행동의 원인을 추론할 때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원인(근접인) 뿐만 아니라

좀 더 깊숙한 진화적 차원에서의 원인(궁극인)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궁극인을 찾아내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이 '부분자아'라는 개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의 자아는 단일한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는다.

흔히 그날 기분에 따라, 컨디션에 따라, 상황에 따라 동일한 사람이지만 다른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이 '기분에 따라'라는 애매한 말 대신, 어떠한 상황에서 우리의 자아가 무엇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부분자아라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계속해서 다양한 도전 과제를 해결해야 했고, 그로 인해 인간의 정신은 각각의 과제 해결에 부합하도록

다양한 심리 시스템을 갖추는 진화적 결과가 생겨났다. - 중략 -

이렇게 각자 역할을 맡아 나뉜 심리 시스템이 부분자아라고 생각하면 된다. (pg 64)

 

저자는 위와 같은 부분자아가 누구에게나 최소한 다음과 같은 7개는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pg 80)

 

 

 

 

결론적으로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우리의 부분자아 중 어느 것이 활성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결정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의도적으로 부분자아 중 어떤 것을 활성화 시킬 수 있다면 의사결정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타인의 부분자아의 활성화 정도를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타인의 의사결정의 방향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책의 후미에서는 이렇게 타인의 부분자아에 영향을 미쳐 교묘히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들의 예도 들어주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진화론적으로 보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행동경제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어떠한 의사결정이 인간이 비이성적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진화적 성향이 언제나 우리를 옳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말은 아니다.

심층 합리성은 현대 세계가 아니라 고대 세계에 맞게 계기판이 조정되어 있다. (pg 320)

 

 

우리의 자아는 단일하지 않다.

따라서 지난 의사결정을 돌아보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자책하기 보다는,

그 당시 자신의 어떤 부분자아가 그러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반추해 본다면

동일한 상황에 다시 처하게 될 때 자신의 부분자아에 영향을 주어 보다 현명한 의사결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욕구가 더 깊은 진화적 욕구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신용카드를 한도까지 꽉 채워 사용하기 전에

똑같은 진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다른 방법을 고민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중요한 통찰이 생겨난다. - 중략 -

우리의 뇌는 물질적 재화가 아닌 진화적 욕구를 충족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현명한 조상들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굳이 은행 잔고를 비우지 않아도 이런 욕구를 충족시킬 능력이 충분하다. (pg 316)

 

단순히 어떤 의사결정에 대한 판단을 할 때에도, '이때는 합리적이었어', '이때는 비합리적이었어' 라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어떠한 부분자아가 의사결정의 배경이 되었는지를 파악해 본다면, 이후에는 보다 상황에 적합한 의사결정을 내릴수도 있을 것이다.

 

책 자체는 기대한만큼 재미있는 책이었다.

먼저 나같은 문외한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만큼 문장이 쉽고 명료하다.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으면서도 (나에게는) 새로운 시각이 가득해서 읽고난 후 얻는 것도 많았다.

 

예시나 실험 결과들도 매우 흥미로웠다.

일부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예를 들면 성별에 따라 이성에게 어필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주장 등)

전반적으로는 아주 논리적으로 전개되어 쉽게 이해가 갔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유머러스한 표현들을 집어넣어 책이 지루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누구에게든 '요즘 뭐 읽을만한 책 없어?'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딱 추천해 줄 수 있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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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 김영사 모던&클래식
로버트 노직 지음, 김한영 옮김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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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깊은 구절

모든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 자신의 안녕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의 안녕과 긴밀히 묶여 있는 것이다. (pg 91)

 

 

책의 저자인 '로버트 노직'은 최근 신정완 교수의 저작과 강의를 접하면서 친숙해진 이름이다.

자유주의 대표 사상가로 알려져 있어서 저작을 한번 보고 싶었는데 우연치않게 기회가 닿아 접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자유주의를 그다지 옹호하지 않는 입장이지만,

내 나이에 이미 하버드대 철학과 정교수가 된 자의 책이라면 무언가 배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특히나 책의 주제인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풀어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아래부터 나오는 푸른 글씨는 모두 원문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힌다.)

 

많은 사람들이 부제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질문'이라는 말에 낚여서 이 책이 마치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는데,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차용했을 뿐이지, 책 자체는 오로지 로버트 노직 본인의 사상을 담고 있다.

물론 본인의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다양한 다른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등장하지만 책의 핵심은 삶에 대한 로버트 노직의 사상이다.

(따라서 이 책을 보고 소크라테스 운운하는 사람들은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다.)

 

제목을 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책은 '삶'에 대한 사색이 담겨 있는 책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구나 궁금해하지만 누구도 답해줄 수 없는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이 26개의 소주제들로 묶여 있다.
이 소주제들은 마치 저자가 생각나는대로 써 나간듯이 배치되어 있어 얼핏 크게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부분부분 발췌해서 읽기 보다는 한 흐름으로 쭈욱 읽어가야 하는 책이다.

 

저자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생각을 전개해 나간다.

흔히 행복한 삶을 이상적인 삶으로 꼽고는 한다.

하지만 저자는 죽음, 사랑, 일상 등을 다루면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목적인 행복한 삶이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또한 쾌락이나 행복은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삶, 어리석은 쾌락이나, 소처럼 둔감한 만족이나,

경솔한 재미로만 채워진 삶, 행복하지만 피상적인 삶 등을 고려할 때,
쾌락이나 행복보다 더 큰 무엇인가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pg 140)
얼핏 그럴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한걸까?

저자는 사고의 흐름에 따라 쭉 논리를 전개해 나가지만 짧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삶, 그러한 자아다. (pg 164)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그것들에서 즐거움을 얻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정말 그렇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정말 그렇다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들이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우리는 단지 그것들이 그렇다는 생각에서 즐거움을 얻지 않는다. (pg 147)

이게 뭔소리야 싶지만, 저자는 자아, 실재의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신의 실재를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과의 소통,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의 소통이 필요하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추구하고자 하는 바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해야할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현재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는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영향을 받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개인은 그가 어디에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가에 따라 구체적인 모습이 형성된다. (pg 171)

 

저자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을 주욱 나열한 다음, 이를 목록표로 정리하는 작업도 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사진 pg 267)

사실 이 표보다 더욱 완성된 형태도 책에 제시되어 있는데, 이 표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저자가 이 표 자체를 삶의 정답으로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미리 정해진 척도에서 위로 이동할 때가 아니라,

실재의 차원들을 결합하고 드러내는 우리만의 새로운 방법을 찾고 발명할 때 가장 진실해진다.
우리 자신의 특징과 기회를 활용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삶을 형성해 실재의 차원들 속에서 특별한 궤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중략-
우리 각자는 최소한 은연중에라도 자신의 도표를 만들어야 하고, 상호 연결된 실재의 본성을 이해하고 살아야 하며,
도표에 추가하고 탐구하고 대응하고 우리 삶에 통합된 새로운 차원들을 식별해야 한다. (pg 295-296)

 

 

결국 우리 스스로가 위의 표처럼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들의 목록들을 만들고 이를 성실히 추구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들을 추구해야 하는지가 결정되면 어떤 것들을 얼만큼 추구할 것인가도 선택의 여지로 남는다.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들의 이상적인 한계라는 것이 사실상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무한대로 추구해가다 보면 결국 신의 존재에 도달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신은 존재의 기원이나 그 이전의 원인이 아니라 그 목표이고, 존재가 움직이고 작동하는 지향점인 것이다.

존재가 도달하는 곳은 신이 되는 것이다! (pg 264)

 

 

하지만 위 구절이 결코 '모두가 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자!'의 의미는 결코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착실히 추구하여 신에 근접한 예수나 석가모니같은 성인들이 있었다.

그 성인들은 우리같은 범인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만 모두가 그런 삶을 모델로 삼아야 하는가는 사실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

 

더 큰 실재를 향한 이동은 어두운 길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행복 원칙에서는 멀어질 수도 있다. (pg 293)

 

우리는 두 가지 유혹, 즉 성인이고 싶은 유혹과 인간이고 싶은 유혹을 충분히 그리고 똑같이 느끼지 않을까? (pg 365)

 

사실 성인들의 일대기를 보면 이들이 보통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삶을 산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위해 살아갔으므로 행복했을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정말로 '행복'하기만 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리 살아가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성인의 삶이 정말 행복할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저자는 따라서 모두가 성인으로 살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의 일상 속에서 자신의 실재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법륜스님의 책에서 본 생활 속의 수행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과적으로 책 자체는 참 괜찮았다.

별점이 다소 적은 이유는 역시나 이 책의 난이도 때문이다.
일단 가치, 의미 등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머릿속에 확 와닿는 느낌 자체가 좀 적으며 문장 자체도 상당히 어렵다.
분명히 국어인데도 문장을 서너번 읽어야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냥 원문 자체가 어려웠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흔한 말로 진도가 참 더디게 나가는 책이었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불쑥불쑥 들었다.

 

이해의 어려움은 물론 내가 가진 기초 지식의 함량 미달에 그 원인이 있겠지만, 누구에게든 쉽게 권해줄만한 책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출퇴근 시간 지하철 같은 곳에서 읽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며 장시간 책상 앞에 정자세로 앉아 차근차근 읽어가야 할 책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났을 때 건질것은 상당히 많을 것이다. (뭔가 모를 뿌듯함도 느껴진다!)

특히 본인의 이해 정도에 따라 삶에 대한 풍부한 사색을 하게 해주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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