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계단 수학여행 1 - 비지니스맨과 돌멩이의 비밀 무한의 계단 수학여행 1
최재훈 지음, 김기수 그림, 장세원.김준 감수, 무한의 계단 원작 / 서울문화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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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다 보면 수학적인 뇌는 정말 타고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하기야 시간만 투입한다고 성과가 나면 누가 수학 때문에 고민을 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수학을 아예 손을 놓자니 학업에서 수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고난 재능보다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수학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일단은 수학이라는 개념 자체에 좀 더 친근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매체와 수학의 접목은 부모 입장에서 반갑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제목부터가 '무한의 계단'이어서 수학이라는 주제와 상당히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모바일 게임 이름이라고 하며 세계여행, 추리게임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많은 학습 만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IP였다.

동명의 모바일 게임을 하는 유저라면 이 책 특전으로 추가 캐릭터를 얻을 수 있는 등 게임과 연동된 보너스들도 있으므로 게임을 즐기는 아이라면 게임의 흥미를 책으로 돌릴 수 있는 장치들을 활용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아직 모바일 게임에 눈을 뜨지 않았지만 캐릭터들은 책 안에서 소개가 충분히 되고 있고 내용 역시 거부감 없는 만화 형식이기 때문에 읽는데 문제는 없었다.

내용 자체는 만화로 되어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지만, 어려운 용어는 해설이 붙어 있고 각종 수학 기호의 유래 등 생각보다 정보량이 많았다.

(pg 17)

얇은 두께의 별책으로 워크북이 붙어 있어서 읽은 후 문제풀이 연습도 해볼 수 있다.

워크북은 전체적으로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가 보기에는 난이도가 제법 있는 편이었지만 그만큼 오래 읽을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모바일 게임 IP이기 때문에 모바일 게임에도 눈을 뜨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면 훨씬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을법한 난이도로 설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워크북 pg 4-5)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가 혼자서 만화를 읽고 연습문제를 스스로 풀어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므로 책만 던져주고 읽게 놔두기보다는 문제를 같이 읽어보고 답을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는 정도의 역할은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만화의 내용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고 그 안에 수학의 개념을 잘 소개해 주고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아이에게 선물할 수 있는 책이었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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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 델 토로 - 타로카드 & 한글 가이드북
토마스 히조 지음, 송민경 옮김, 기예르모 델 토로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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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점이나 사주를 믿는 편이 아니라서 평소에 타로에도 그다지 관심이 많지는 않았는데 '기예르모 델 토로'라는 이름이 박힌 타로 카드를 보니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저자는 '판의 미로', '헬보이', '퍼시픽 림' 등의 걸출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감독으로 유명한데, 이번에는 그가 타로 카드에 손을 댔다.



그의 영화들이 대체로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지만 그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친 듯이 좋아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나 역시 그중 하나다.

기괴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 계속 보고 싶게 만드는 그만의 연출 스타일을 상당히 좋아하는 터라 그의 스타일이 타로 카드라는 전혀 다른 매체를 통해서는 어떻게 발현되었을지 기대가 컸다.

사실 그가 참여한 카드 자체를 소장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크지만 이왕이면 타로 카드를 어떻게 쓰는지도 알면 당연히 좋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글 가이드북이 함께 동봉되어 있어서 이 기회에 타로 카드를 제대로 배워서 즐겨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구성이다.



전체 구성: 멋진 상자 안에 타로 카드 1벌과 국문 타로 가이드가 포함되어 있다.

카드 속 그림들은 모두 그가 작업했던 영화 속의 캐릭터들이다.

예를 들면 6번 카드인 '연인'에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종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준 그 연인들이 등장한다.

모두 판화를 기반으로 제작되어 그림의 질감이 거칠면서도 독특한 분위기인지라 그의 영화 속 음울함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음에 쏙 들 것이라 생각한다.

포함된 국문 가이드는 얇은 소책자 형태인데 타로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본적인 카드 설명에서부터 카드를 읽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다.

타로를 읽는 방법에도 주관이 많이 개입될 수 있는 만큼 설명이 아주 구체적이지는 않다.

'이 카드는 대체로는 이 정도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이고, 역방향으로 나올 경우 그 속성이 어떻게 변화한다'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꽤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요즘 세상에 점을 치는 용도로 타로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역시 타로를 스토리 구상에 활용한다고 한다.

몇 장의 카드를 뽑아 이런저런 의미들을 부여하다 보면 괜찮은 이야기가 나오는 모양이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는 이렇게 창작자들의 브레인스토밍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 더 유용하고 의미도 있을 것 같다.

아내가 카드를 보더니 얼른 공부해서 점을 봐달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외울 것이 많아서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개인적인 성향상 습득하는 데 꽤 오래 걸리기야 하겠지만, 그의 영화와 이야기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꽤나 즐거운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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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픽처스
제이슨 르쿨락 지음, 유소영 옮김 / 문학수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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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듯하면서도 섬뜩한 표지를 가진 호러 소설이다.

넷플릭스와 계약되었다는 것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우고 있는데 다 읽고 나니 영상화되면 진짜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주인공은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 베이비시터로 새 출발을 하고자 하는 '맬러리'라는 젊은 여성이다.

사교적인 부모와 귀여운 아이, 수영장까지 딸린 그림 같은 집에서 머물 수 있고 급여도 좋아서 맬러리는 열정적으로 일하며 재활을 병행한다.

그러다 그 집의 아이가 기묘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애냐'라고 하는 가상 친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 친구를 그리는 것이라 말한다.

게다가 맬러리가 기거하는 별채에서 70년 전에 한 사람이 죽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들려온다.

아이의 그림 역시 점점 더 기묘하게 변하게 되자 맬러리는 이 그림에 담긴 비밀을 찾고자 하는데, 여기까지가 작품의 초중반 정도 된다고 보면 되겠다.

먼저 예전에 사람이 죽었던 곳에 살게 된다는 것과 아이가 귀신 그림을 그린다는 다소 고전적인 장치를 활용했는데, 이야기의 전개는 뻔하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줄거리만 봤을 때는 '대충 이렇게 전개되겠구나' 싶은 부분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예상과 전혀 다른 결말이어서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읽는 재미가 있었다.

반전을 찾는데 능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작품의 진상을 예상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의 분류는 '호러'로 되어 있지만 귀신이 등장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추리 소설로 봐도 좋을 정도로 숨겨진 내막을 찾아가는 재미가 좋았다.

문장도 그리 어렵지 않고 번역도 깔끔해서 읽는 몰입감이 상당히 좋아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두께임에도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보통의 문학 작품에서 마약중독자는 대체로 긍정적이지 못한 결말을 맞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에서는 약물중독자도 착실하게 치료하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상화하기에도 아주 좋을 스토리라서 나오면 한번 봐야 될 것 같다.

제목처럼 그림이 이야기 전개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책 안에도 그림이 제법 많은데 이를 영상에서 어떻게 구현할지도 궁금해진다.

오랜만에 재밌는 작품을 쓰는 작가를 한 명 더 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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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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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매우 친절한 양자역학 책으로 만나봤던 카를로 로벨리의 대표 저서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시간에 대해 물리학에서 밝혀진 내용을 저자 특유의 친절한 서술로 풀어내고 있다.



사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은 다른 책들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다.

동물들은 미래를 예측하며 살지 않지만 인류는 내일의 날씨부터 태양과 달의 움직임 등 자연의 순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우리에게 시간이란 반드시 1차원적으로만 움직이는 고정된 그 무언가로 보인다는 점이다.

직관적으로만 보면 시간은 과거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로만 흐르고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현재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지금까지 물리학으로 밝혀낸 바와 어떻게 상충되는지를 설명한다고 보면 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는 시간관념 변화의 역사는 뉴턴을 거쳐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진다.

일단 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고, 질량과 속도에 따라 시공간 역시 변화할 수 있는 값이라는 점까지는 이전에 읽은 다른 과학 교양서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에 무리 없이 이해했다.

여기까지의 논의는 하단의 그림으로 종합할 수 있는데, 설명하면 일반적으로는 시간을 좌상단 그림처럼 인지하지만 실제로는 우하단 그림에 가깝다는 것이 핵심이다.

(pg 58-59)

여기까지는 평이한데, 저자의 전문 분야인 양자 중력이론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난이도가 제법 상승한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할 수 없고 공간이 곧 질량을 가진 물질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시간 역시 질량을 가진 그 무언가로부터 파생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역시 최소의 입자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텐데, 이를 플랑크 시간이라 한다.

이 역시 최소의 입자, 즉 양자이기 때문에 양자역학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저자가 양자역학의 가장 논리적인 설명이라 주장하는 관계론적 설명으로 시간의 정체도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양자중력 이론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물들이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서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세상 사물들이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것뿐이다.

(pg 127)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굳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변수를 포함하지 않아도 양자역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사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의 관계가 사건을 만들어내야만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양자역학 역시 관계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시간 역시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시간 변수가 없는 세상은 복잡한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그물망이며, 여기에 작용하는 변수들은

우리가 믿기 힘들 정도로 대부분 잘 알고 있는 확률 규칙을 따르고 있다.

(pg 130)

그렇다면 제목처럼 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했던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진짜로 변화하는 것은 엔트로피 뿐이다.

엔트로피는 무조건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만 변화하는데, 이 때문에 미래의 흔적이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과거의 흔적 뿐이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흔적만' 있는 이유는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과거의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것뿐이다.

흔적이 남으려면 무엇인가 정지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을 통해서만,

즉 에너지를 열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pg 174-175)

저자 역시 책 후미에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 담긴 모든 정보가 실험을 통해 100% 확인된 내용들은 아니라고 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 자신이 볼 때에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난이도 역시 함께 상승하는 구조이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분야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쉽게 쓰려고 부단히도 노력한 흔적들이 엿보이며 이 책을 선택할 사람들이라면 질겁을 할 수식도 책을 통틀어 단 두 줄 등장할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생존의 기회를 늘리는데,

진화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뇌 구조를 선택해왔다. 우리가 바로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선택이 우리 정신 구조의 핵심이다.

이 선택이 우리에게는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pg 186)

그러면서도 인류가 지금까지 밝혀온 시간에 대한 지식, 특히 물리학 뿐 아니라 고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역에 이르는 지식을 불과 200여 페이지 정도의 책으로 맛볼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가치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 중략 -

실제로 잘 살펴보면, 매우 '사물다운' 사물들은 장기간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주 단단한 돌의 경우, 우리가 화학과 물리학, 광물학, 지질학, 심리학에서

배운 바로는 양자장의 복잡한 진동이고, 힘들의 순간적인 작용이다.

돌은 짧은 순간 동안 자신의 형상을 유지하고, 다시 먼지로 분해되기 전 자체적으로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pg 105-106)

읽을 때는 거짓말처럼 술술 책장이 넘어가지만 다 읽고 나서는 '난 대체 지금까지 뭘 읽은 걸까?'라는 자괴감이 함께 찾아오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론)도 있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론)도 있어' 등등 나열식인 여타 물리학 책들과는 다르게 '내 생각엔 이 이론이 맞는 것 같아'라는 방식으로 쓴 책이라 논리가 일관적이고 혼란의 여지가 적어서 좋았다.

태생적 문과인으로서 물리학 교양서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도전이다.

하지만 저자를 비롯해 많은 과학자들이 일반 대중들을 위해 쓴 책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교양 수준의 지식은 쌓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같아 기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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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1~3 세트 - 전3권
류츠신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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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작품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지금까지 꽤 많은 SF 작품들을 읽었고 개중에는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도 많았는데 이 작품 역시 그 칭호로 불려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생기기 어려울 것 같다.

평범해 보이지만 무슨 뜻인지 언뜻 짐작하기 어려운 제목에 개인적인 반중 감정이 더해져 구매 버튼을 누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다.

제목인 삼체는 말 그대로 세 개의 물체를 의미하는 물리학 개념이다.

질량이 비슷한 물체 두 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움직이고 있다고 할 때, 그 두 물체의 질량과 속도를 알고 있다면 미래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 물체가 세 개가 되면 그 세 물체는 카오스적으로 움직여서 미래의 움직임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수학적으로는 이미 일반해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밝혀졌다.)

이 작품은 태양을 세 개 가진 행성이 존재하고, 그 안에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는 우주를 가정하고 있다.

그 세계를 삼체 세계라 부르는데, 이 세계의 문명인(삼체인)들은 당장 내일의 날씨조차도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적응하며 기어코 항성 간 이동이 가능한 수준의 과학기술 발전을 이뤄낸다.

하지만 과학이 그 정도로 발달해도 삼체문제는 여전히 해결할 수 없었기에 삼체인들은 행성을 버리고 새로운 행성으로 떠나려 한다.

그 무렵 지구에서도 한참 외계 생명체를 찾겠다며 SETI 프로젝트 같은 것들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한다.

그중 한 시도가 삼체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태양이 하나뿐인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삼체인들은 지구로 원정을 결정한다.

삼체 세계와 지구는 4광년 떨어져 있었고, 삼체의 함대가 지구에 도달하기까지 약 400년의 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 지구인들은 삼체인들에 맞설 준비를 시작한다.

재미있는 점은 삼체 세계와의 만남이 인류와 삼체인의 배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처음 신호를 받은 삼체인은 추가적인 메시지가 도착할 경우 삼체인들이 해당 행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추가적인 회신을 하지 말라고 충고함으로써 동족을 배신한다. (물론 아래에 서술할 삼체인의 특징 때문에 곧바로 붙잡혀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인류의 배신자는 문화대혁명 때 인류의 바닥을 이미 경험한 뒤여서 차라리 외계 문명에 의해 멸망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하여 기어코 추가적인 회신으로 그들을 태양계로 초대한다.

여기까지가 대략 1권 후반부 정도의 내용이고, 1권이 3권 중 가장 얇다.

아마도 인간과 악의 관계는 대양과 그 위에 떠 있는 빙산의 관계로,

둘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빙산이 눈에 잘 띄는 이유는 그저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것의 실체는 거대한 물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인간 스스로 도덕적 자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 이외의 힘을 빌려야 한다.

(1권, pg 114)

줄거리를 다 요약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양이니, 삼체인과 인류의 전쟁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설정한 것들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400년 동안 인류가 삼체인들과 유사한 수준으로 과학기술을 진보시킬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위해 삼체인들이 양자(더 정확히는 양성자)에 AI 컴퓨터를 이식하여 지구로 보낸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는 작품에서 확인하도록 하고, 결론만 말하면 이 양성자 AI의 가장 큰 역할은 인류 활동의 전반적인 감시와 지구의 양자역학 수준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이 양성자 AI는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그 누가 언제 양자로 실험을 하더라도 개입해 방해를 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힌 발상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는 400년이 지나도 양자역학 수준은 현재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작가가 참 똑똑한 접근법을 택했다는 생각인데, 현시대의 양자역학을 이해하기도 버거운 마당에 400년 뒤의 세계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 속 인류는 고정된 양자역학 수준 안에서 발버둥을 쳐야 한다.


"삼체인들이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전할까요? 그들은 인류의 문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들이 우리를 벌레라고 칭하기 때문에요? 그건 달라요. 다른 민족이나 문명을 존중하는 최고의 방식이 뭔 줄 알아요?"

"그게 뭐죠?"

"바로 멸종시키는 거예요. 그건 문명에 대한 최고의 존중이에요."

(2권, pg 248)

공정한 게임(?)을 위해 작가가 인류에게만 핸디캡을 준 것은 아니다.

삼체인 역시 독특한 점이 있는데, 바로 언어와 사고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류처럼 사고를 음성이나 글로 변환해야만 진행되는 의사소통이 아니라 정신 그 자체로 소통하기 때문에 떠오르는 사실 그대로 여과 없이 소통이 가능하여 거짓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문명인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세계관이 익숙하다면 칼라를 잘라낼 수 없는 프로토스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이 점을 이용하여 '면벽 프로젝트'라는, 오로지 인류만이 가능한 기만전술의 극치를 활용하여 삼체인에게 저항하는 단계가 2권의 주요 내용이다.

유일하게 막을 수 없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서슬 퍼런 칼날처럼 단단한 것이든 무른 것이든

소리 없이 베어버리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 무엇도 시간의 발걸음을 흔들 수 없지만 시간은 그 무엇도 다 바꾸어 놓는다.

(2권, pg 426)

2권에서 꽤나 설득력 있으면서도 짜릿하게 결말이 나기 때문에 3권이 대체 무슨 내용으로 전개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의 저력은 3권에서 빛을 발한다.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그의 우주적 상상력의 집합체를 3권에서 만나볼 수 있다.

5000년 동안 미친 듯이 달려온 문명이었다.

끊임없는 진보가 더 빠른 진보를 부추기고, 수많은 기적이 더 큰 기적을 만들어냈다.

인류가 신처럼 위대한 힘을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진정한 힘을 가진 건 시간이며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3권, pg 664)

사실 SF 작품들의 시발점은 모두 허황된 상상이다.

본 작품 역시 상상력의 스케일 면에서는 기존의 그 어느 작품들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하드 SF의 매력을 최대한 살려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꽤나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상상으로도 떠올리기 힘든 차원의 이동을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지적 존재의 문명은 결국 그들이 가진 생각의 크기만큼 발전한다.

(3권, pg 791)

넷플릭스에서 영상화가 이루어져서 본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소설을 너무 재밌게 봐서 영상이 어떻게 뽑혔는지 정말 궁금하다.

총 세 권이라 짧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페이지로는 약 2천 페이지 정도로, 300페이지 정도의 보통 책이라면 5-6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라 생각보다 짧지 않다.

하지만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잠을 줄여가며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고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주는, 근래 읽은 문학 작품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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