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타인에게 어필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바로 글쓰기이다. 글 속에는 자기 삶의 철학이나 관점, 가치관,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진실은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무슨 글을 써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편하게 쓰면 된다. 부담감은 글쓰기의 최대 적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책이 한두 권씩 출간되자, 왜 쓰냐고 했던 사람들, 나를 비웃던 사람들이 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질문이 바뀌었다. 어떻게 쓴 거냐고. 결과물이 나오면 주변 반응이 달라진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허준이 주목받는 이유는 신통한 의술을 가진 의사이기도 했겠지만 가장 핵심은 그가 동의보감을 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을 때 '책을 쓴 사람'을 찾는다. 가장 공신력 있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 역량이 돼서 쓰는 게 아니다. 쓰다 보면 역량을 갖추게 되는 이치이다.
글이나 책을 처음 내는 입장이라면 아무래도 나와 과거부터 현재까지 연관되어 있는 분야를 찾아 쓰는 것을 추천한다.
하루분량을 정해놓고 꾸준히 쓰다 보면 엄청난 양의 글이 축적된다. 글을 배워서 쓰는 게 아니다. 쓰면서 배운다. 쓰다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게 되면 자주 하게 되고, 자주 하게 되면 잘하게 된다.
초고 쓰기에 있어서 중요한 건 질보다 양이다. 질은 따지지 말고 하루에 쓸 양만 채운다는 생각으로 쓰자. 핵심은 하루 목표량을 정하고 쉬지 않고 한 달간 몰아치는 것이다. 이처럼 하루에 쓰는 양을 꾸준히 유지하다 보면 어느덧 원고는 완성되어 있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
일단 써라. 다 쓰고 나서 그것을 수정하면 된다. 이 방식이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직장생활을 하면 자신에게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따라서 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직장에 다녀야 한다. 직장에 다니며 쓰는 게 아니다. 직장에 다녀야 쓸 수 있다.
죽음은 생명을 끝내지만 관계를 끝내는 것은 아니다.
시한부 생명이라는 선고를 받도 병원에서 나오던 그날, 그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이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사라져 버릴 것인가, 아니면 남은 시간을 최선을 다해 보낼 것인가?'
함께 강의를 하던 동료가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하자 그 장례식에 참석했던 그는 낙심해서 집으로 돌아왔다."이런 부질없는 일이 어디 있담!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 멋진 말을 해 주는데 정작 주인공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하니 말이야."
코펠은 또 물었다."천천히 약해질 때 가장 두려운 게 뭡니까?"모리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켈레비전에 이런 말을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코펠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우리 교수님은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앵커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테드, 어느 날 누군가 내 엉덩이를 닦아 줘야만 한다는 사실이 가장 두렵소."
사랑을 나눠 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모리, 당신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70년이나 지났잖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나 고통스럽습니까?""그럼요."우리 선생님은 그렇게 속삭였다.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네.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거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가장 안타까워했던 데 바로 그거였어. 정신적인 안정감을 드리지 못한 게 가장 안타깝고 아쉽더군. 가족이 거기에서 자신을 지켜봐 주고 있으리라는 걸 느끼는 게 바로 정신적인 안정감이야. 가족 말고는 세상의 그 무엇도 그래 줄 수는 없어. 돈도, 명예도. 그리고 일도.
사람들이 자식을 낳아야 되느냐, 낳지 말아야 되느냐 물을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하라곤 말하지 않네. '자식을 갖는 것과 같은 경험은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다르지요'라고만 간단하게 말해. 그렇다네. 그 경험을 대신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난 그 무엇을 준대도 그런 경험을 놓치고 싶지 않네.비록 치러야 할 고통스러운 대가가 있긴 하지만.그래. 곧 그들을 두고 떠나야 하니까.
평균수명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노인들이 그만큼 행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이 아프면 돌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고,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고, 병원이나 시설에 들어가자니 다시는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몸이 아픈 노인을 돌보는 가족도 하루하루 궁지에 몰린다. 그러다 보니 '간병 살인, 영 케어러, 돌봄 독박, 고독사' 등 노인 돌봄의 새로운 문제적 양상들도 늘어가고 있다.
돌봄의 참혹한 현실, 24시간 계속되는 돌봄 속에서 가족들이 지쳐가고, 원래 해야 할 일들이 미뤄지는 것은 더욱 힘들다. 직장이나 학교에 다녀야 하거나 또 다른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등의 일들에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돌봐야 하는 가족들에게는 자신들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살인과 자살을 동반할 정도로 간병과 돌봄은 힘들다.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지원하지 못해 가족에게 '독박'쓰기를 강요하는 현실에서는 더욱 감당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은 돌봄이 필요해지는 순간부터 자신과 가족의 어려움과 서러움에 맞닥뜨린다.
TV에서 '간병비 지급 보장'이란 보험 광고를 접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간병이 필요한 사람에게 간병 비용을 보태주는 것만으로 간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너무 엄청난 비약이다. 이제 자본주의가 되었으니 '돈'으로 '사람'을 사서 돌봄을 받으라는 것은 일부 부자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결국, 사회 전체적으로는 많은 사람이 돌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삶이 엉망이 된다. 국민들의 돌봄 문제 해결에 있어서 국가가 적극 나서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결코 국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좋은 돌봄이 되려면 돌봄 관계에 들어 있는 세 행위자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 우선, 돌봄 필요자가 돌봄을 통해 일상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돌봄 책임자 역시 누군가의 돌봄을 책임지고 있음에고 불구하고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돌봄 제공자 역시 돌봄 노동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성취와 보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