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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수수께끼 - 플라네타 아르헨티나 문학상 수상작
파블로 데 산티스 지음, 조일아 옮김 / 대교출판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사실 이 책은 이 책에 등장하는 편견만큼이나 많은 편견을 갖게 하는 책이다.
( 이 책에 등장하는 편견이라면 조수에 대한 편견, 인종에 대한 편견, 여자에 대한 편견, 해당 국가의 국민성에 대한 편견을 말한다.)
1. 미스터리의 메이져 시장인 영미권이나 일본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
2. 문단의 호평을 받는 문학작가의 도전작이라는 것.
3. 탐정을, 그것도 12명이나 등장시킨다는 약간은 허무맹랑해 보이는 설정.
같은 이유로 '재미없겠다' 라는 생각을 갖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이는 서평 이벤트로 받은 책에 대한 상당히 예의 어긋난 행동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 화장실을 나오는 독자의 나쁜 예 >
하지만 정말로 저 위의 세가지 이유 때문에 읽는 내내 고생했다는 건, 이 책을 우리나라에 소개할 때 상당히 장벽이 높다는 이야기다. 왠만한 퀄리티와 홍보가 없이는 절판의 길을 걸어야되는 얄팍한 장르소설 시장에서 상당히 용감한 기획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되고 말이다.
이 책의 주요내용을 세줄 요약하자면
1. 세계에는 최고의 명탐정 12인이 있고 각각의 명조수들이 있다.
2. 파리의 만국박람회에 명탐정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탐정이 살해당한다.
3. 신비주의를 비밀을 조사하던 탐정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나머지 탐정들이 풀기 위해 도전한다.
정도인데 흥미를 끌만한 설정이 조금씩 더해진다.
일단 무대가 되는 세계에서는 탐정의 위상이 상당히 높고, 공권력과 맞먹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간적 배경인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사실성을 부여하는가 싶은 와중에 상당히 쌩뚱맞은 이야기라 느껴진다. 사실 '패러렐 월드' 정도로 인식하면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팩션처럼 그 쪽에 중점을 둔 소설은 아니다.
12인의 탐정과 '아틀라레테' 로 불리우는 조수들의 관계가 꽤 재밌는데, 조수들은 어찌된 일인지 '셜록 홈즈' 와 ' 왓슨' 의 관계라기보다는 추격자의 '오좆'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우리나라의 '노비' 개념이 참 잘 들어 맞는 그런 존재다.
< 명탐정 4885와 그의 아틀라레테 오zot>
주인공의 위치는 꽤 애매한데 정식적으로 아틀라레테가 되었다기보다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 휘말려 명탐정의 아틀라레테로 활동하게 되는 것에 가깝다. '노예근성'에 사로 잡힌 다른 아틀라레테와 차별성을 두고자 한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다.
책을 읽는 초반부에는 문학작가가 어린 날의 추억을 못 잊고 그냥 한 번 써 본 추리소설 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조수와 도구에 갖는 집착이 작가의 고집으로 느껴지기도 해서 '이 사람 요즘이 어떤 세상인지 알기나 하는 걸까' 조금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추리소설, 최근의 책을 그다지 많이 접해보지 않은 독자층에게나 권할만한 책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 꽤 잘 쓴 글입니다. 하지만 프로로서 성공할지는 미지수네요. 제 점수는요.>
그런데 읽으면서 묘한 매력이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루하지 않게 끝까지 괜찮은 분위기를 잘 이끌어 나간다는 점을 높이 살 수 있겠고, 탐정이란 존재에 대한 동경이 주는 느낌을 다시 끄집어 낸다는 게 맘에 들었다.
셜록 홈즈, 포와로, 드루리 레인, 브라운 신부 같은 탐정에서 느꼈던 동경. 이건 요즘엔 쉽게 느끼기 힘든 감정이다. 사건의 잔혹함이나 트릭의 기괴함 등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고 반전 강박증의 작가들은 쉽게 주인공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에는 고전 추리소설을 읽으며 어릴 적 느꼈던 두근거림을 나름 잘 살려주는 미스터리 팬에게는 따뜻한 책이다. 우타노 쇼고의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에서 클로즈드 서클, 본격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책은 탐정이란 인종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두 책에서 받은 비슷한 느낌은 비단 몇몇 유사성 떄문이 아닌 그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 본 독자일수록 이 책을 깔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흐믓하게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교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장르에 대한 애정이 더 원초적으로 잘 드러난 책이기 때문이다.
점수는 3.5/5다. 지금 시대에서 녹스의 10계를 들먹이며 추리소설의 모든 공식을 깼다고 광고하는 홍보문구가 꼴보기 싫었지만, 작품 자체가 갖는 따뜻함을 높이 사고 싶다.
오늘 '밀실살인게임'이 도착하면 그 처절한 세계로 떠나야 하는데, 이 책을 읽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