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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SF를 읽을 때 누릴 수 있는 수많은 즐거움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나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과 조우하게 되는 즐거움이 아닐까. 그것은 발견일 수도 있고, 배움일 수도 있고, 강제 각인일 수도 있다. 여운이나 울림 같은 것과는 다른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듯한 느낌, 똑같은 사물이 평소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 경험으로 이미 나는, 변화한 것이다.

<토탈 호러>라는 책에서 만났던 단편 '블러드 차일드'는 아주 묘한 느낌의 이야기였다. 외계인의 알을 품는 숙주로서의 인간이라는 설정이 기괴하고도 징그럽고 두려워서, 그 무서운 기분이 재미있어서 기억에 많이 남는 이야기였다. 당시 조지 RR. 마틴의 '샌드킹'과 더불어 역시 가장 아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세계 종말 문학 걸작선>(황금가지)에 실렸던 '말과 소리'라는 이야기는, 어딘가 <매드맥스>의 분위기를 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단편소설이었다. 그 비극적인 결말에 너무 가슴 아팠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블러드 차일드'와 '말과 소리'라는 단편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그 이상을 느끼지는 못했던 독자였다.
그렇게 끝났더라면 나는 매우 운이 나쁜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블러드 차일드>라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집을 읽고, 작가의 해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느꼈던 '묘함'과 '이상한 기분'에 대해 친절한 대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1. 블러드 차일드
<킨>에 실린 박상준 씨의 해설(그는 <토털 호러>를 통해 옥타비아 버틀러를 국내에 소개한 장본인이다.)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독자, 심지어 앤솔러지에 넣을 단편을 추린 기획자조차 단순히 노예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인식했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시선이 오히려 놀랍고, 사랑 이야기이자 '남성 임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설을 달아놓았다. 그 해설을 보았다고 한들 이 단편이 주는 비주얼적인 쇼킹함이나 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흐르는 긴장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두 주인공의 미묘한 관계 중에서도 흐릿한 어느 지점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 흉한 뉴스를 많이 봐서인지... 서로 다른 종류의 것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2. 저녁과 아침과 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은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정도의 반응으로 나뉘는 것 같다. '경이롭고 신비(신기)하다'와 '불쾌하다'이다. 첫 번째 반응은 우리가 몰랐을, 뇌장애나 정신질환 등으로 정상인들과 다른 삶을 사는 환자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고 볼 수가 있다. 두 번째 반응은 직업 윤리, 그러니까 의사가 환자의 불행한 삶을 다른 사람에게 재미있게 설명하며 희화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불쾌함이다.
'저녁과 아침과 밤'은 아마도 올리버 색스를 향한 호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다. 자기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할 정도로 과격함과 폭력성을 지닌 사람들과 그렇게 될 운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멀어지는지, 또 어떻게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3. 그리고 다른 이야기들
이 단편집에 실린 다른 이야기들도 좋아하지만 나는 특별히 '블러드 차일드'와 '저녁과 아침과 밤'을 좋아한다. 그리고 '말과 소리' '특사'에 이르게 되면 이 진절머리 나는 세상에서 역겨운 것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고통, 내가 인간이기 위해 지켜야 할 가치와 그것이 훼손당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살아야 하는 슬픔 같은 것을 공감하게 된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이야기는 읽는 이를 압도한다. 문장 하나하나에 실린 힘도 힘이지만, 뇌내에 강하게 각인된 이미지는 여타 다른 SF가 주는 경험과는 또 다른 차원의 것들이다.
사고의 확장. 내가 쓴 이 글을 다시 읽어봐도 내 어디가 더 나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히 세상을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는 렌즈 하나를 얻었다. 옥타비아 버틀러를 더 읽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정말 이 정도로 퀄리티 좋은 SF작품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남은 생을 누렸으면 좋겠다.
별 다섯에 별 다섯. 인생 베스트 SF 단편집을 고르라고 해도 다섯 권 안에는 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