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힘 - 2012 시대정신은 '증오의 종언'이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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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원장(이하 존칭생략)이 대선에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동료 선생과 고기 내기를 했다. 난 '안 나온다'는 쪽이었는데, 이유인즉슨 정치라는 건 마을에 놓인 다리가 자기가 세운 것인 양 허풍을 떨어야 하고, 불법자금을 받아놓고선 안 받았다고 둘러대는 뻔뻔함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조국교수는 이런 걸 '정치적 근육'이라고 했는데, 매사 수줍은 듯한 안철수가 이런 걸 가지고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강준만 교수가 쓴 <안철수의 힘>을 읽고 나니 갑자기 내기에서 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우선 서문만 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나는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를 지지하기로 했다."(6쪽)

강준만이 누군가? <김대중 죽이기>와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통해 킹메이커로 불렸던 분이 아니겠는가? 김대중이야 원래 대통령에 가까웠다 해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데엔 그가 쓴 책의 힘이 컸다는 건 다들 인정할 거다. 그 강준만이 안철수를 지지한다면 이건 뭔가가 있다 싶어 서둘러 책을 읽었다.

 

책은 재미있었다.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됐고, 그 덕분에 안철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난 무에서 유를 만들었고... 정치만 한 분, 변호사 하다가 시정하는 분에 비하면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다."(20쪽)

박원순을 저 아래로 보는 이 말을 과연 안철수가 했을까, 싶을 정도로 오만한 말이다. "세상을 진보. 보수 문제로 보는 것은 머리 나쁜 사람들의 분류 방식이다"(71쪽)라고 한 것 역시 그리 겸손해 보이진 않는다.

 

이 말들로 보아 안철수가 자기 자랑에 약하다는 건 순전히 내 선입견이었다. 더 놀랐던 건 윤여준에 대한 그의 발언이었다. 언론에 몇 번 보도된 것처럼 윤여준은 안철수의 멘토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런지 윤여준이 마치 안철수를 대변하는 듯 떠든 적이 있었나보다. 거기에 대해 안철수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그분이 발언을 굉장히 많이 하시는데 사실 감사하긴 하다. 그런데 저한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이거 가지고 뭘 놀라냐고 하겠지만, 다음 말을 보시라.

"그래서 어제 직접 말씀드렸다. 앞으로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이것만 가지고도 안철수가 다른 정치인들에게 휘둘리진 않겠구나 싶은데, 그 다음 말은 그 점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한다.

"그분이 제 멘토라고 얘기한 적 없다. 그분이 제 멘토라면 제 멘토 역할을 하시는 분은 한 300명 정도 된다."(126쪽)

바로 이 뒤에 김제동, 김여진이 멘토라는 얘기가 이어지니, 강준만이 "안철수가 겉보기완 달리 독하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간다.

 

게다가 난 안철수의 지지도를 일정 부분 거품으로 봤다. 막상 대선출마를 하면 10%대로 지지율이 추락할 거라는 생각. 하지만 강준만은 이 책에서 안철수의 장점들을 하나둘씩 짚어 주는데, 진영논리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가 좋은 대학을 나온 성공한 기업인이란 것도 장점이 된단다.

"진보세력은...엄친아 성공 코드가 없어서 그들의 개혁론을 약자의 원한 비슷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안철수의 개혁론은 그들에게...안도감을 준다."(198쪽)

이건 또 어떤가? "안랩에 안철수의 일가친척이 사돈의 팔촌까지 포함해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은 안철수가 후보들 중 연줄부패에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 후보"라는데, 대통령마다 지겹게 되풀이되던 친인척 비리가 덜하다는 것만으로도 안철수를 지지할 사람이 꽤 있을 것 같다.

 

흥미롭게 책을 읽긴 했다만, '나꼼수' 얘기가 등장하는 10장부터는 안철수 얘기가 거의 나오지 않고 한국 정치에 대한 평소의 지론이 지면을 채우고 있었던 게 아쉬웠다. 또한 지금 시중엔 <안철수 생각>이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데, 그 책이 나온 다음에 이게 나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독자 입장에선 안철수의 정책 공약집에 가까운 <안철수 생각>보단 이 책이 좀 더 재미있을 것 같지만 말이다.

5년 전 선거에서 허경영을 찍었던 건 찍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지만, 강준만이 책을 내지 않았던 것도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 책이 나왔으니 이번 선거에선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난 대표적인 강준만 빠돌이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금방 설득이 돼버리니까. 갑자기 남의 일처럼 느껴졌던 대선이 기대되기 시작한다. 지금 난 주문을 외우는 중이다. 내가 고기를 사도록 안선생님께서 좀 도와주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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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3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3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3 0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3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테레사 2012-07-2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하... 마태우스님은 정말이지....전 올 대선 때 심장마비로 죽는 건 아닌지 싶어, 당분간 멀리 떠나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 글을 읽으니...더더욱...심장이 ....떨리네요....아, 전 새눌당만 아니라면....하는 안일한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었는데....흠...

테레사 2012-07-23 10:18   좋아요 0 | URL
또 하나, 전 솔직히 말하면 안철수란 분이 너무 달라서(기존 흠많은 정치인들과 비교해서) 불안하기도 하지만, 또 하나, 우리 국민 수준에 이정도의 대통령을 가질 만한가 하는 회의도 듭니다.왜냐면,지난 대선에 경제살리겠단 말한마디에 그 모든 가치들을 던져버린 국민 아닙니까? 자신을 진정 대변하는 정당이 누군지도 모르는 국민 아닙니까? 여전히 유신 때로 회귀하려는 사람에 대한 지지가 높은 국민 아닙니까? 해서 설마 우리가 이런 분을 대통령으로 가질 만큼의 수준이 되나..아직..아냐 아냐..하는...비관적인...자조적인...뭐 그런 ...

2012-07-23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2-07-23 11:28   좋아요 0 | URL
암튼 테사라님, 가뜩이나 댓글도 없는데 두개나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달사르 2012-07-23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안철수의 생각, 에 이어 안철수의 힘. 도 있군요.
짜증 안 내면서 정치란 단어를 떠올리니 정말 좋은데요. ^^

ㅋㅋㅋ. 저도 허경영 찍었...

마태우스 2012-07-23 15:48   좋아요 0 | URL
오옷 그 희귀한 허경영 표의 주인이 여기 다 계셨군요^^
님 말씀대로 갑자기 희망이 좀 생기려고 합니다^^

BRINY 2012-07-23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마교수님과 비슷한 생각으로 안철수 출마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기우였나요?

마태우스 2012-07-23 15:48   좋아요 0 | URL
제가 여기다 안썼는데요 기업가로서 정리해고를 했던 사람이라, 단호한 면이 있다는군요. 사람을 안믿기로 하긴 했지만, 한번 믿어 볼까 싶네요.

책읽는나무 2012-07-2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나도 내기를 한 번 해볼까?
했다면..나왔음 하는 마음과는 반대로 안 나온다쪽이었는데..
리뷰 읽고 나니 갑자기 나온다쪽으로 저도 기우네요.
소고기를 쏘신다면 동료분들은 너무 좋으시겠어요.
고기도 먹고,뜻하는대로 이루어지고..^^

마태우스 2012-07-24 18:13   좋아요 0 | URL
호호 제 동료 중에선 극우보수가 꽤 있답니다 안철수에 대해 빨갱이 소리가 슬슬 나올 때가 됐지요 아마...^^ 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

심장원 2012-07-2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서빠' 하렵니다.
사실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선생님께서 한겨레에 연재하실 때부터 선생님 글 좋아했어요.
^^;;
안철수가 출마하든 말든 날씨 선선해지면 같이 고기를 불판에...
ㅋㅋ

마태우스 2012-07-24 18:13   좋아요 0 | URL
아앗 심장원님 그 무슨 말씀을.... 더울 때 먹는 고기가 더 맛있습니다^^

레와 2012-07-2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심하게 읽어보고 싶은데요!
 
사랑의 기초 : 연인들 사랑의 기초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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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넘게도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그것도 2년째로, 강좌 제목은 <과학적 글쓰기>다.

믿는 거라곤 경향에다 3년째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는 것과

빈약한 결과에도 미사여구를 동원해 그럴듯하게 논문을 써왔다는 건데,

학생들이 뭘 좀 얻어갔는지 여부는 강의평가가 말해주겠지만

개인적으론 무지 부끄럽다.

내가 대체 뭐라고 그런 걸 가르치나.

 

외부강사를 모시는 건 그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작년엔 내 영원한 은인이자 무영문학상 수상작가인 xxx 작가님을 모셨는데,

감동을 받은 학생들이 "한명 더 모셨으면 좋겠다"고 강의평가에 썼기에

올해는 두분의 강사를 목표로 했다.

물론 내 영원한 은인 xxx 작가님은 어려운 와중에도 흔쾌히 와주셨지만

나머지 한명이 문제였다.

ㄷㄱㄴ로 유명한 xxx, 문화평론가 ㅈoo, ㄲoㄴ oㄹo의 xxx 등등

많은 작가들에게 문자나 메일로 강의를 부탁드렸지만,

이곳은 천안이고, 강의시각은 오후 1시 20분이었다.

내 강의에 오면 하루를 다 날려야 하니, 선뜻 내키지가 않는 것 같았다(강사료도 적은데다!).

 

그나마도 대부분 응답을 안하는 걸로 답변을 대신했지만

정이현 작가님은 "그럼요, 서민님 기억하죠"로 시작되는 따뜻한 답장을 보내주셨다.

결론은 하는 일이 많아서 안되겠다,는 거였지만,

날 기억하고 계시다는 게 무지무지 기분 좋았던 기억이 난다.

메일을 받고나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프랑스의 유명작가 알랭 드 보통과 사랑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란다.

정말 바쁘시겠구나, 싶었고 그 와중에도 답장을 보내주신 것에 감사드렸다.

 

그 바쁨의 결과물인 <사랑의 기초>를 읽었다.

아, 바빴던 보람이 있구나,라는 감탄이 나오는 그런 책.

대부분의 책들이 사랑을 장밋빛으로 그리건만

이 책은 어떤 다큐보다 더 사랑의 진짜 모습을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다.

만남 초기엔 자기들의 만남에 작용한 수많은 우연들을 생각하며 서로를 운명이라 생각하다

권태기가 되면 헤어지잔 말도 못한 채 상대가 먼저 그 말을 해주길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원래 그런 사람들 있어요. 관계가 끝난 걸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끝까지 자기가 악역을 맡기 싫은 거예요. 미적미적.

상대방이 알아서 정리하기를 바라는 거죠."

이 대목을 읽고 마음 한구석이 따끔했다.

"어느 순간부터 현석은 늘 바쁘다고 했다. 주중에는 피곤했고, 주말에는 친구들 모임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라는 대목에서도 과거의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아무리 좋은 사람인 척해도, 사실 난 나쁜 놈이었단 걸

이 책을 읽으며 깨닫는다.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런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 아닐까.

정작가님, 우리 학교 강의는 그냥 제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대신 좋은 책 많이 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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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7-12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적 글쓰기>는 마태님이 재밌게 잘 하실 거 같아요.^^
강사비 적으면 강사 모시기도 힘들죠.
저도 월욜에 강사비는 적지만 부탁할 때마다 선뜻 받아주시는 교수님 모시고
다산 특강, 주민교양강좌를 엽니다.^^

2012-07-13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2 0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3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07-12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는 이 책 관심도 없었는데 이 글을 읽고나니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불끈.

아, 마태우스님. 제가 유명 작가라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마태우스님께 이메일을 보내서, 제가 마태우스님 글쓰기 강의에 강사로 하루쯤 가고 싶은데 받아주실건가요, 라고 할텐데 말입니다. 저는 작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제 마음이 이렇다는 것은 알아주셔요, 마태우스님. 흑.

마태우스 2012-07-13 18:05   좋아요 0 | URL
음, 우린 참 이상해요. 둘 다 서로의 팬이라니, 이럴 수도 있는 거군요. 전 다락방님이 세상에서 리뷰를 제일 잘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이 제 리뷰를 읽고 책에 흥미가 동했다니 기분 좋습니다. 내년에 강사로 모시겠습니다. 그때 꼭 와주십시오. 리뷰 쓰는 법에 대해서요!

stefanet 2012-07-12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

마태우스 2012-07-15 14:50   좋아요 0 | URL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꾸벅

페크pek0501 2012-07-1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적 글쓰기 강의, 저도 듣고 싶네요.ㅋㅋ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는 구입하려고 찜해 놓았는데, 정이현 님의 책까지 관심이 가네요.

요즘 마태우스 님의 불타오르는 글발에 "앗 뜨거"하고 갑니다.




마태우스 2012-07-15 14:50   좋아요 0 | URL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 이후 저랑 소원해졌답니다. 대신 정이현 작가님은 앞으로도 쭉 팬 하려구요. 보통 책 읽으시고 소감 말해주세요. 글구 제 강의는, 호홋, 알라딘 분들이 들으면 너무 수준낮다,라고 할 거 같은데요
 
그들이 살았던 오늘 - 이제 역사가 된 하루하루를 읽다
김형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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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이 책을 한권 보낼테니 서평을 부탁한다고 했다.

지인이라고 안하고 아는 분이라고 한 건 그렇게까지 친분이 있는 건 아니어서인데,

알고보니 그 아는 분이 해당 책의 저자도 아니었다.

어떤 책일까 했는데 배달된 책을 보니 제목이 <그들이 살았던 오늘>이고, 무지 두껍다.

척 보니까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얘기 같다.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삼일간 보지 않았다.

그 대신 다음날 배송된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을 폭풍처럼 읽었다.

 

책이 충분히 만족스러웠기에 그 포만감을 간직하기 위해 <제노사이드>를 마저 읽을까 하다가,

아 참, 서평을 부탁받았지,란 생각에 그래도 예의상 책을 집어들었다.

누운 채 책날개를 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자 이름이 낯익다 했는데, 내가 아는 그 김형민이 맞았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익함과 재미를 모두 갖춘 <썸데이서울>의 저자.

그 책을 몇 분에게 추천했고, 알라딘에 <별 여섯 개를 주고 싶습니다>란 리뷰도 썼는데,

그 리뷰를 보고 책을 읽게 된 알라딘의 대표적인 서평가인 마냐님은 그 책에 대해 이런 서평을 썼다.

[그의 글은 살아 있다...그다지 에세이류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완전히 사로잡혀버렸다. 코드가 맞는달까....무엇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는 삶....을 지향하면서도 때로는 슬쩍 고개를 숙여버리고...때로는 나중에야, 화끈거리는 얼굴로 진실과 마주하는 우리네 사는 방식. 그 진정성을 함께 나눌 수 있는게 이 책의 미덕이 아닌가 싶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을 읽으면서 마냐님이 했고 <범죄와의 전쟁>에도 나왔던 그 대사가 떠올랐다.

"살아 있네."

특정 날짜와 관계된 사람을 선정해 그에 관한 얘기를 하는 내용인데,

모르는 사람의 경우엔 그에 관한 소개를 해주고, 아는 사람인 경우엔 우리가 모르는 뒷얘기를 해준다.

글쓰기에 관한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는 키가 컸다"라고 하는 대신 "그는 출입문에 들어갈 때 허리를 구부렸다"라고 하면 더 생동감이 있다고.

김형민의 글은 생동감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으며,

독자들은 그 사람의 생을 옆에서 관찰하는 것처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으리라.

게다가 그의 삶에 관해 나름의 코멘트를 할 때면 가슴이 애잔해진다.

예를 들어 형사를 도와 칼 든 소매치기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이근석씨 얘기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동료들은..몽둥이라도 하나 들었어야 한다는 둥, 너무 무모했다는 둥 사설을 달고 있었다. 그때 한 선배가 그 구설들을 한 마디로 틀어막았다. "용기 없으면 용기 있는 사람 존경이라도 하자. 그 사람이 그걸 몰라서 그랬겠냐.]

그러면저 저자는 이렇게 우리를 한번 더 부끄럽게 한다.

"용기라는 건 남보다 한발 더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발을 내딛었다가 상처받은 사람의 용기를 기리기보다 한발 나서지 않아 온전할 수 있었던 지혜를 대견스러워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용기는 무모함으로, 때로는 미련함으로 폄하되기 일쑤다.]

김형민의 전작 <썸데이서울>은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했다.

좋은 책이라고 다 잘 팔리는 게 아니라해도, 그리고 피디로 일하는 저자가 책의 판매에 그렇게 목을 맨 건 아니었다 해도, 무지 아쉬웠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은 이왕이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읽혔으면 한다.

저자가 나랑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가 될 거라는 확신 때문에.

책에 나온 말을 살짝 바꿔보자.

용기라는 건 남이 안사는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까지 하는 거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책을 산 사람의 용기를 기리기보단 책살 돈으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본 걸 대견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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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7-10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곰곰히 생각해보니 썸데이 서울을 마태우스님 덕분에 읽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분께 선물한터라 지금 제 손엔 그 책이 없지만 저도 그 책이 참 좋았어요. 글쓴 의도를 선명하게 제시하진 않지만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말하려는게 맘에 와닿아요.

마태우스 2012-07-11 21:12   좋아요 0 | URL
그래요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는 않는데요 은연중에 저자의 의도가 와닿는 게 이번 책에서도 느껴지더군요. 아치님은 책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세요!

무해한모리군 2012-07-10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적극 추천이시니 읽고 제 소감도 남길게요 ㅎㅎ

마태우스 2012-07-11 21:12   좋아요 0 | URL
아 네...원래 이런 댓글 보면 "무섭다" 이래야 하는데
저 책은 워낙 자신있지요^^

moonnight 2012-07-10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용기있는 사람이 되고자 보관함에 넣습니다. 감사합니다. ^^

마태우스 2012-07-11 21:11   좋아요 0 | URL
아 네..달밤님은 원래 용기있는 분이시죠^^

재는재로 2012-07-1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네이버 검색하다 님을 발견했습니다 숨은 그림찾기도 아니고 연가시에서 나오시네요 단국대학교 의학대학 기생충학 박사 서민 교수 Q & A
영화 연가시를 검색하다 발견했습니다
인터뷰를 보니 화면 잘받으시네요 목소리도 중후한게 좋은 다음에도 볼수 있으면 좋겠네요

마태우스 2012-07-11 21:11   좋아요 0 | URL
어..제가 네이버에 나오나요? 찾아봐야겠군요 근데 전 목소리도 엉망이고, 화면에 나올 땐 너무 바보같아요ㅠㅠ 연가시 인터뷰라고 다르겠나 싶네요ㅠㅠ
 
[eBook] 나의 삼촌 브루스 리 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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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은 그 이름만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사게 만드는 작가다.

그가 쓴 장편은 두 편밖에 안되고, 그 중 <고령화 가족>은 뭐 그렇게 재밌다고 생각지 않지만,

데뷔작이었던 <고래>가 워낙 뛰어난 작품이라,

후속작이 그 정도 수준만 유지한다 해도 읽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후속작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는데,

데뷔작에 쏟아지는 찬사 때문에 작가가 부담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 이후 장준환 감독이 결혼 말고는 한 일이 없는 것처럼.

 

<나의 삼촌 브루스 리>를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전에 읽고 있던 다른 책들을 제쳐두고 읽기 시작했는데,

<고래>에서 보여줬던 이야기꾼의 재능이 여전한데다 유머까지 잔뜩 포진해 있어 한 며칠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소설가 성석제한테서 유머기법을 배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예를 들어 이소룡의 대역을 위해 일군의 젊은이들이 홍콩으로 배를 타고 건너가는 대목을 보자.

[이봐 젊은이 인생은 분명 용기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지혜도 필요한 법이라네,라고 말해주고 싶은 이소룡, 그런데도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그게 무슨 뜻인데요,라고 물으면,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말이지, 음, 그럼 이렇게 얘기해볼까? 옛날 이탈리아에 프란체스코란 성인이 한분 계셨는데 그분께선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기셨다네. 주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게 하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런데도 여전히 아이, 씨발,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요,라고 하면 가지 말라고 인마! 가봤자 안된다고!라고 말해 주고 싶은 이소룡...(1권 318쪽)]

 

책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마워요, 여러분!"

저자가 이러는 건 그 구절을 읽는 독자라면 필경 책을 사봤을 거니까 그런 것일게다.

만일 책이 별로인데 작가가 이런다면 더 짜증이 나겠지만,

워낙 책을 재미있게 읽어서 그런지 마음속으로 이랬다.

"뭘요, 제가 감사드려야죠. 이렇게 멋진 책을 써주셔서요."

지금 막 생각난 거 하나. 독자가 작가의 말을 읽는 건 책이 재밌을 때일 확률이 높다.

내가 좋아하는 페더러 선수가 우승했을 때 시상식까지 보게 되는 것처럼,

재미있는 책을 폭풍처럼 읽고나면 여운이 남아 작가의 말까지 보게 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천명관의 다음 작품은 또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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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7-1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재미있죠 이소룡이라는 당대의 액션배우를 등장시키지만 결국 이소룡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남자 삼촌의 이야기죠 이소룡을 동경하고 그를 닮기를 원했지만 결국 무너져 버린
남자 80년대 군사정권아래 상처받고 무너진 인간군상들의 이야기

마태우스 2012-07-10 11:1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삼촌의 삶이 너무 답답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뭐, 그 정도면 해피엔딩인 듯... 그나저나 그 상구란 아이, 악마더군요. 어떻게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지, 소설인데도 읽다가 놀랐답니다.

레와 2012-07-10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보관함에 있어요!! ^^

마태우스 2012-07-11 21:13   좋아요 0 | URL
아 네... 한 며칠간 이 책의 폭풍에 빠져보시면 천명관의 팬이 될 거예요.

좋은날 2012-07-10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다 선물하고 싶은 책이예요.
상구가 한 짓은 소설인데도 읽으면서 어찌나 속이 상한지...
천명관님의 다음 소설이 빨리 나왔음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마태우스 2012-07-11 21:14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죠? 상구의 짓은 정말, 책을 집어던지고 싶을만큼 잔인하더군요
어린 나이라 더더욱 그랬죠...

blanca 2012-07-11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명관 작가 지금 ebs에서 <몬스터> 연재하고 있어요.(낭독 방송입니다) 앵벌이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인데 분량면이에서나 스케일면에서나 야심작이 될 것 같아요. 천명관 작가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마태우스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마태우스 2012-07-11 21:15   좋아요 0 | URL
아 네..낭독방송이라니, 좀 색다른 쟝르네요. 전 읽는 게 편한데, 앵벌이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니 끌리긴 하네요.
 
교양인을 위한 노벨상 강의 : 생리의학상편 교양인을 위한 노벨상 강의 2
야자와 사이언스 오피스 지음, 박선영 옮김 / 김영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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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은 연구자로서 큰 영광일뿐더러 해당 나라에도 경사다.

“유독 우리나라만 노벨상에 목을 맨다”는 비판도 있지만,

사실 어느 나라나 노벨상을 좋아하며,

최다 수상자를 낸 미국에서도 노벨상 수상자는 존경받는다.

이웃 일본만 해도 1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건만,

우리나라는 딱 한 명, 그것도 평화상이다.

평화상도 좋은 일이긴 하지만, 평화상과 문학상은

그 나라의 연구 인프라가 갖춰져 있지 않아도 탈 수 있는 상,

그래서 노벨상을 한두번 받은 나라들은 대부분 문학상과 평화상이다.

우리나라는 이란, 가나, 케냐, 코스타리카 등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우리 소득수준이나 연구 인프라를 보면 과학분야의 노벨상을 두 번 정도는 탔어야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 생리의학상 등 과학 분야에 세 개나 상이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교양인을 위한 노벨상 강의-생리의학상 편>을 읽어보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있다.

2001년 노벨상 수상자인 하트웰은 어려서부터 동물 관찰이 취미였다는데,

‘도마뱀은 이빨이 없다’는 동물도감을 보고 도마뱀을 잡아서 입을 벌렸다가

도감과 달리 도마뱀의 이빨에 손가락을 물려 고통을 겼었단다.

HIV의 원인을 밝힌 몽타니에는 집 지하실에서 화학실험을 하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생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이들이

20년, 30년간 지속적으로 한 우물을 파서 노벨상을 탈만한 연구를 해낸다.

반면 우리나라는 연구를 하고 싶어서 의대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하고,

그나마도 자신의 뜻이 아닌, 부모의 뜻에 의해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이렇게 출발부터가 다르니 나중에도 정말 좋아서 연구를 하기보단

해야 하니깐, 승진에 필요하니깐 논문을 쓰기 위해서 연구를 한다.

노벨상의 필수요건인 독창적인 연구를 하지 못하고

선진국에서 하는 연구를 따라하는 연구를 하는데 어떻게 노벨상을 받겠는가?

설문조사 결과 앞으로 10년 안에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받을 확률이 낮다고 대답한 사람이

70%가 넘은 건 작금의 현실로 보아 당연한 일이다.

 

노벨상 타령은 그만하고 이제부터 책 얘기를 잠깐 해본다.

의대 학생들한테 노벨상을 향한 동기부여를 해주기 위해 선정했지만,

학생들이 읽기에 너무나도 어려웠다.

어떤 학생의 말마따나 “의학지식을 쉽게 풀어주던지,

노벨상 수상자의 노력에 초점을 맞추던지 했으면 좋았“을텐데

수상자들의 평생에 걸친 업적과 그들의 삶을 열 페이지 정도로 압축해 놓으니

이도저도 아닌 책이 돼버렸다.

그래서 학생들의 반응은 “너무 어렵다”가 주가 됐다.

하기야, 연구로 잔뼈가 굵은 내가 읽어도 이해 안가는 부분이 있었으니

학생들은 오죽하겠는가?

 

‘생리의학상’ 편은 ‘물리학상’에 이은 두 번째 시리즈인데,

‘물리학상’에 딱 하나 올라와 있는 리뷰를 보니 이렇게 돼있다.

“사실 나는 항상 물리학도서를 구입할때 지루함이 걱정되어 불안한 마음으로 구입한다.

하지만 이 책은 모두가 즐길수 있는 좋은 물리학책이다.

아이큐 148 초등학생인 나에게도 유치하거나 너무 어렵지 않다.“

같은 곳에서 나온 책인지라 난이도가 비슷할텐데

초등학생이 어렵지 않다고 하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많이 배운 것보단 아이큐가 중요하다, 뭐 이런 거?

그제야 제목을 다시금 상기하게 됐다.

‘교양인을 위한 노벨상 강의’

그렇다. 여기서 교양인은 아이큐가 높거나 연구에 잔뼈가 굵은 그런 사람을 말하는 거지,

연구와 유리된 삶을 사는 일반인은 해당사항이 없는 거였다.

이 책의 세일즈 포인트가 낮은 걸 보니 다들 알아서 안사는 것 같은데,

아주 현명한 선택이다.

학생들한테 읽으라고 권한 걸 뒤늦게 후회하는 나보다, 그들이 훨씬 더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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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2-05-0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의 고은님이 한번 수상하셨으면 좋았을텐데 다음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