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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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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을 탄 베케트의 작품이다.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를 보지 않듯, 난 노벨상을 받은 책에도 어느 정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다. 노벨상 수상작 중 내가 읽은 건 오엔 겐자부로의 <만년 원년의 풋볼>과 야스나리의 <설국> 등 극소수에 불과한데, 그 책들 역시 노벨상에 대한 내 거부감이 옳았음을 보여줬다. 이해가 안가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노벨의 심사위원들이 파악한 심오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어서였다.

그럼에도 난 이따금씩 노벨상을 탄 책을 산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 나도 문학의 심연을 맛보고 싶다는 욕망이 언뜻언뜻 들기 때문인데, <고도를 기다리며> 역시 나의 내공을 향상시키자는 불순한 의도에서 집어든 책이다. 목욕제계를 하고, 잔뜩 긴장을 하곤 첫페이지를 폈는데, 예상외로 너무 재미있어서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물론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걸 깨달았느냐, 하면 별로 할말이 없지만, 노벨 문학상을 탄 책을 재미나게 읽었다는 자체가 내겐 중요했다. 희곡을 읽은 건 세익스피어 이래로 처음인데, 여기 나오는 대사나 상황 설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연극으로도 한번 보고픈 마음이 생겼다.

고도가 뭐냐는 질문에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했단다. 그러니까 작가는 자신도 모르는 얘길 쓴 것, 정답이 없는 문제니 각자 나름대로의 답을 생각하면 될 터이다. 나의 고도는 무얼까? 로또에서 1등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좀스러워 보이니 평화통일이라고 고쳐 말하련다. 베케트의 책에서 고도는 열심히 기다리지만 영원히 오지 않을 그 어떤 것 같은데, 베케트의 고도와는 달리 통일은 가까운 미래에 왔으면 좋겠다. 우리 민족의 영달을 위해, 우리의 굴절된 역사를 이제라도 바로잡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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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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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배운 국사책은 일제시대가 끝이었다. 역사라는 게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현재를 조직하는 거라면, 지금 우리들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던 현대사를 수박 겉핥기로 넘어간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이 땅이 슬픈 역사를 잉태하고 있다는 건 분명 마음 아프지만, 가슴아픈 역사도 엄연히 역사이며, 역사의 진실과 대면할 때만이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토대가 마련되는 게 아닐까.

혹자는 이런다. 현대사의 사건들은 아직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선 안된다고. 그런데 그 역사적 평가라는 건 과연 언제 끝나는가? 누구에게든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가 과연 있는 걸까. 우리가 배운 조선시대의 역사 역시 당시 지배층의 시각으로 본, 승자의 기록이 아니던가. <대한민국사>에 실린 역사 이야기들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격동의 현대사를 아주 흥미롭게 서술해 놓고 있다. 알라딘 베스트셀러 순위를 보니 50위 안에도 이 책의 제목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좋은 책을 놔두고 다들 무슨 책을 읽는 걸까? 책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몇개만 소개해 본다.

[정부는 성조기를 불태운 학생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태극기를 태운 것도 아니고, 정작 미국에서는성조기를 불태우는 행위가 표현의 자유로 인정받는데 말이다(1권, 60쪽)]

[노근리 학살을 거론하고, 맥아더의 동상에 시비를 거는 게 배은망덕이라고? 입장을 바꾸어 북한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동상을 세웠다면 얼마나 꼴불견일까?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지만,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노병의 동상을 보며 나는 자꾸 숨이 막힌다(1권 211쪽)]

[국방의 의무를 지러 간 젊은이들을 전경으로 차출하여 치안유지에 돌리는 위헌을 일삼은 자들은 그것도 모자라 전경들을 미군기지 앞에 배치한다. 이 세상 어느 천지에 경찰이 군대를 지켜주는 꼴은 있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미군은 언필칭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있다는 존재가 아닌가?(1권, 246쪽)]

[할일없는 예비군에 어떤 일을 시킬까 궁리하던 정부는...예비군을 방범활동에 동원하기도 했다... 87만명의 예비군이 동원되어 37명의 범인을 검거하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기도..(2권 203쪽)]

이 책을 덮으면서 느낀 것 하나. 한국전쟁 때 자행된 민간인 학살, 녹화사업 등 독재정권 시절에 있었던 수많은 의문사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보수언론들이 대북송금 의혹에 대해서는 '국민의 알 권리'라면서 길길이 뛰는 이유가 뭘까? 돈이 생명보다 더 중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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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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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은 탁월한 글쟁이다.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를 읽고 그에게 매료된 이후, 그가 내는 책이라면 뭐든지 읽는다. 옛날 이문열의 책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내 교양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다른 학자들과 달리 그는 글을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쓴다. 그로 인해 난 미학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유익한 내용을 재미있게 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재주다. 인간의 잔혹성을 주제로 한 <레퀴엠> 역시 그의 글쓰기가 가진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은 가미가제라는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적에게 타격을 가하려 한다. 운좋게 적의 항모에 도달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공포화에 맞아 바다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단다. 그렇게 무모한 개죽음에 젊은이들이 동참한 것은 나라를 위한 거룩한 죽음은 인간 존재의 자기완성을 가져와, 신이 되어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온다는 허황된 믿음 때문이었다. 진중권은 이들을 전장으로 내몬 전범들을 이렇게 비꼰다.

'남에게 옥쇄를 권하던 A급 전범들은 왜 사무라이답게 자결을 하지 않고 구차하게 살아남았을까? 신이 되어 영생할 수 있는 기회를 왜 스스로 내던져버렸을까? (81쪽)]

언제나 극우보수 이데올로기만을 설파하는, 소설가라고 하지만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복거일에 대해 진중권은 이렇게 말한다.

[다친 딸을 끌어안고...절규하는 어머니. 얼마 전까지는 살아 있었으나 이제는 자동차 속에서 새카만 숯덩이로 변한 어느 가족. 이런 참극 앞에서 글을 쓴다는 사람이 태연히 '미국의 전쟁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그야말로 초현실주의적 상황이다. 이 해괴한 감성을 가진 문인은 한때 영어 공용화론으로 사회를 시끄럽게 한 후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아직까지 한글로 책을 쓰고 있는 복거일 씨다(93쪽)]

후후, '알 수없는 이유에서 한글로 책을 쓰는'이란 대목에서 난 웃었다. 해학은 이렇듯 상대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 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안돌려줄까봐 굉장히 떨면서 누군가에게 이 책을 빌려 줬는데, 그가 재미있게 잘 봤다면서 덧붙이는 말이 '좀 과격하더군요'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일관되게 반전평화를 역설하는 진중권을 '과격'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 그건 우리가 알게 모르게 미국이 지배하는 질서를 당연하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교조 역시 반전평화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는 이유로 '과격하다'는 비난을 배부를만큼 받았지 않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반전평화'를 '반미'라고 하는 건, 미국이 전쟁광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 되는데. 노무현의 말처럼 '반미'면 또 어떤가. 우리 아이들도 우리처럼 미국의 지배 아래서 신음해야겠는가? 일본이 100년은 갈 줄 알았다고 안타까워했던 서정주의 오판처럼, 100년 이상 가는 권력은 없다. 해가 지지 않던 나라 영국이나,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던 스페인과 포루투칼,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이 오늘날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한다면 끝이 없을 것 같은 팍스 아메리카나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거다. '반전평화'의 외침이 '반미'나 '과격'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르짖어야 할 당연한 목소리로 인식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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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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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프레이리가 쓴 <페다고지>를 아주 힘들게 읽었다. 259쪽이니 페이지 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책의 내용이 굉장히 지루했다. 이 책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프레이리의 교육법이 '교사에 의한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에 반대하고, 학생과 교사가 더불어 배우는 교육을 지향한다'는 거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 책이 금서지만, 민중의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교육학의 전범처럼 읽힌다고 들었다. 그래도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인지라 한번쯤 읽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랜 기간 망설이다 이 책을 샀다. 그 망설임은 책이 너무 어려울까봐였는데, 어렵진 않았지만 무지하게 지루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이 책은 올바른 교육방법을 말하고 있지 않다. 민중을 믿고, 그들로 하여금 억압자에 대항할 의식을 갖추도록 하고, 결국에는 민중이 주인되는 혁명을 이루자는 것, 그게 바로 이 책이 일관되게 얘기하는 주제다. 그러니까 이건 혁명을 할 때 혁명 지도자가 알아야 할 것들을 써놓은 것이지, 내가 원했던 것처럼 학생 교육에 관한 책은 아니었다. 물론 귀담아 들을 말들이 많고, 그 중 일부는 학생 교육에도 적용할 수 있겠지만, 그다지 날 성찰하게 만들지 못했다. 이 책의 한대목이다.

'복지 프로그램은 궁극적으로 정복이라는 목적에 기여.....복지 프로그램은 피억압자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분산시켜, 문제의 진정한 원인과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게 한다. 또한 피억압자를....분열시킨다(195-6쪽)'

스웨덴과 같은 복지국가를 바라는 내게 이 구절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최소한의 복지조차 갖추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이런 말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런 혁명성 때문에 그가 그처럼 오랜 기간 탄압을 받았던 것 같다. 어느 신부가 그에게 들려준 경험담이란다.

[칠레의 판자촌에 삭로있는 가난에 찌든 몇몇 가정을 방문했을 때, 나는 이런 생활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물었죠.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늘 한결같았어요. '어쩌겠어요? 신의 뜻이니 따를 수밖에요'(211쪽)]

사람들에게 삶의 의지가 되어주는 종교는 이처럼 민중들을 기존 질서에 복무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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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루스 노부스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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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첫페이지에 그림이 하나 나오는데, 벌거벗은 여인이 얼굴을 가리고 있고, 나이든 노인들이 놀란 눈으로 그녀의 몸을 감상한다. 노인들 중 몇은 맛이 간 표정이다. 진중권의 설명이다. [저 아름다운 여인은 ...창부 프리네다....창부라는 말은...기혼 명사들의 애인 역할을 했던 교양있는 여인들을 가리켰다고 한다]

'소녀의 청순함에 지능까지 갖췄던' 프리네는 당시 한다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이 여인의 향기를 증오하던 사람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진중권은 그 이유를 이렇게 추측한다. '구애를 했다가 거절을 당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남자들이란 원래 좀 치사한 동물이 아닌가. 자기가 못먹을 감은 남도 못먹게 하는 물귀신 심리, 물귀신이 전부 남자인 건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

하여간 프리네는 사소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됐는데, 이 경우 그리스에서는 대개 사형을 당했단다. 그녀의 변호를 맡은 전 애인 알파, 구차한 말로 변명을 하느니 '프리네의 아름다움에 호소하기로' 한다. '그는 배심원들 앞에서 여인의 몸을 덮고 있던 천을 갑자기 들춘다...순간 배심원들은...저 여인의 아름다움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어제 까르네 스테이션에서 식사를 하던 가정적인 내 친구는 노란옷을 입은 늘씬한 여인이 지나갈 때마다 숨도 안쉬고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말했다. '별로 이쁘지도 않잖아' 그의 대답, '살이 많이 보이잖아!' 내 친구가 프리네의 벗은 모습을 봤다면 질식해서 응급실로 가지 않았을까?

하여간 배심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 저 아름다움을 우리는 신의 의지로 받아들이자' 저 신적인 아름다움 앞에서는 한갓 피조물이 만들어낸 법이나 기준은 효력을 잃는다. 판결은 내려졌다. 무죄! 천을 들췄는데 무우다리와 똥배가 나왔다면 사형을 당했을 거란 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이쁜 여자가 유리한 건 변함이 없는가보다.

미학이란 건 물론 이쁜 여자의 미를 밝히는 학문은 아니다. 처음 이야기만 이럴 뿐, 안그런 것도 많다. 그래도 이건 확실하다. 진중권의 미학 강의는 참 재미있다는 것. 그의 유려한 글솜씨에 각종 그림들이 어우러진 이 책은 다 읽고 나서도 책을 덮기가 굉장히 안타까웠다. 진중권의 책을 갈비에 비유하는 게 결례가 되겠지만, 맛있는 갈비의 마지막 한 점을 먹으면서 느끼는 그런 아쉬움과 비교하면 될까?

상한 고기, 물먹인 소고기, 병든 닭과 같은 책들이 수없이 범람하는 이 세상에서, 그래서 좋은 책을 고르기가 무지하게 어려운 이 시대에, 진중권이라는 이름은 책의 품질을 보장하는 KS 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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