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힘
성석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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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중한 유머감각을 갖춘 성석제는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극을 비롯해 옛날 얘기를 싫어하는지라 초반부가 약간 지루하긴 했지만, 이야기의 감이 잡히고 난 중반부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다간 여지없이 환자로 몰릴 판이다. 예컨대 다음 대목을 보자.

[동구는 환도(가보로 내려온 칼)를 칼집에서 뽑으며 하늘을 향해 외쳤다. '가자꾸나...때가 왔다!' 그런데 환도가 녹이 슬었는지 종내 칼집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84쪽)]

주인공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겠구나, 하고 기대했던 내 입에서 '그럼 그렇지!'란 말이 나온 건 바로 이 대목이었다. 시작은 거창하지만 끝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스토리가 성석제 유머의 매력 아닌가. 다음 구절도 참으로 웃긴다.

[(단식투쟁을 하는 동구를 찾아온 현감은) 동구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살피고는 고개를 꼬았다....안색에 혈기가 남아 있었고, 앉은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거다. 현감은...입속으로 '낮에는 굶고 밤에는 사슴 육포라도 먹는 거 아닌가' 하고 궁시렁거리다가 .........(193쪽)]

이괄의 난을 진압하려 부지런히 서울로 가니 이미 난이 진압되고, '죽을 고생을 해가며 강화도에 도착했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한 것을 알고는 땅을 쳤다'는 등, 주인공의 행동은 꼭 돈키호테를 연상케 한다. 일관된 행동이 결국 뭔가를 이루지만,'나도 수없이 생각해봤네만 아직 모르겠네'라고 말한 외숙의 말처럼, 주인공 동구의 일생은 적어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들다.

<돈키호테>를 통해 시대에 뒤떨어진 기사들을 풍자했던 세르반테스처럼, 성석제 또한 공리공론만 일삼아 화를 자초했던 당시의 양반들을 비웃고자 한 게 아닐까? 하지만 마지막 장을 읽고나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인간의 힘>이라는 제목처럼, 작가는 '끝까지 변함없이 신념을 지킨 것'의 소중함을 말하고자 하는 모양이다. 글쎄다. 신념도 신념 나름이지,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 신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책 곳곳에 촌철살인의 유머가 번뜩이지만, 난 이 책을 편한 마음으로만 읽을 수는 없었다. '명나라에서는 인조반정을 왕권 찬탈로 보고 책봉을 미루어 반정 주역들을 애타게 했는데(110쪽)'라는 구절은 5.16 쿠테타 때 반란군의 주역들이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해 애를 태웠던 사건을 상기시키고, 명나라를 임금으로 섬기던 조선의 분위기는 지난 수십년간 '반미'가 용공으로 치부되던 우리의 현재를 떠올리게 한다. 오랑캐 우두머리 앞에서 인조가 머리를 9번이나 땅에 찧는 치욕을 당해야 했던 우리 조상들이 미국의 침략전쟁에 서둘러 파병을 하는 후손들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인간의 힘도 중요하지만, 우선 나라의 힘을 기르자. 우리의 후손들도 우리처럼 살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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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 치명적 유혹, 매혹당한 영혼들
이명옥 지음 / 다빈치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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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쁜 여자가 있다. 어떻게 한번 해보고 싶은데, 그녀는 관심도 없다. 이럴 때 남자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선화공주를 꼬시고자 한 무왕처럼 터무니없는 루머를 퍼뜨릴 수도 있겠고, 죽자고 따라다니는 스토킹을 감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쉬운 것은 그녀를 마녀로 모는 거다. '저 포도는 시어서 못먹을 꺼야'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 여우처럼, 이쁜 여자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있어 멋모르고 사귀면 파멸할 것이라는 팜므파탈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오랜 세월 동안 남성들이 취해온 방법이었다. 얼굴이 반반한 여자에게 '쟤가 그렇게 헤프대!'라고 하는 말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저자는 팜므 파탈의 신화를 세기말 페미니즘이 대두한 데 따른 불안감으로 보지만, 페미니즘 이전에도 팜므 파탈은 언제나 존재했다. 팜므 파탈의 신화는 소설, 시, 연극 등 각종 예술 장르를 통해 확대재생산됐는데, 그림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책에는 팜므 파탈의 제물이 된 29명의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미술작품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그에 얽힌 얘기들이 너무도 재미있어,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아쉽기까지 했다. 그림에 대한 친절한 해설까지 곁들여져, 읽고 난 뒤 머리가 꽉 찬 느낌마저 주는, 한마디로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다.

요즘이라고 해서 팜므 파탈의 신화가 끝난 건 아니다. 샤론 스톤이 나오는 '원초적 본능'이 선풍적 인기를 끈 것처럼, 팜므 파탈은 여전히 가장 잘 다루어지는 매력적인 소재다. 미인이 워낙 드물었던 예전과 달리, 성형수술의 발달로 미인의 숫자가 크게 늘어난 지금은 그만둘 만도 한데, 아직까지 그러는 이유가 뭘까? 비록 내 여자가 아닐지라도, 난 미녀들을 보면서 삶의 즐거움을 느낀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미녀들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삶의 고달픔을 견뎠을까? 미녀는 사회를 밝게 빛나게 해주는 존재, 팜므 파탈이니 뭐니 하면서 미녀들을 괴롭히는 짓은 제발 좀 그만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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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의 전쟁 견문록 - 상 - 이라크 학살전
이성주 지음 / 이가서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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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에 연재되던 펜더님의 글을 연방 감탄을 하며 읽었던 게 기억에 남아, 책이 나온 걸 알자마자 망설임 없이 주문을 했다. 딱딱해지기 쉬운 군사 얘기를 너무도 재미있게 풀어냈는데, 자신이 아는 바를 쉽고도 유머스럽게 표현해 내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재주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에 우선 놀라고, 언론들이 숨겨왔던 가증스러운 사실들에 또 놀라고, 책 맨 뒤에 수록된 참고문헌의 목록들에 압도되는 책이 바로 <펜더의 전쟁 견문록>이다.

걸프전 때 미국은 핵폐기물을 이용한 열화우라늄탄을 무지하게 썼는데, 그 결과가 정말이지 놀랍다.

[1991년 당시 미군애들 전사자가 140명이었다...12년이 지난 지금, 그 중 1만명이 죽었고, 참전군인 중 40퍼센트가 각종 질병과 암,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더구나 2세라고 태어난 애들이 다 기형이 아니면 소아암, 백혈병에 걸렸다...조지타운대학 교수인 두라코빅 박사가 발표한 내용이다. '내가...걸프전에 나갔던 참전용사 얘네들 조사해 봤거덩? 근데 이것들 뼈랑 신체조직에서 우라늄이 졸라 검출된 거야...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하권, 16-17쪽)]

미군이 이럴진대 이라크 사람들이 어떻겠는가.

[전쟁이 끝난 후 4년 동안 바스라의 160가구를 뽑아서 조사를 했는데, 이 중 20가구에서 기형아가 출산되었다. 이 20가구의 공통점은 참전군인들의 집이라는 거였다...바스라 지역의 소아암 발생률이 전쟁 전에 비해서 3배 이상 증가했고...가임여성들이 전쟁 전보다 다운증후군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을 출산하는 비율이 4배나 더 높아졌다...]

'2001년 9월 11일 빈 라덴이란 선지자가 악의 화신 미국을 향해 통쾌한 일격을 날렸다'는 표현이나, '미국 역사상 최초의 본토 공습으로 기록될 9.11 테러를 보면서 정말 속이 다 시원했었다'는 저자의 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갈수록 깡패국가가 되어가는 미국의 행보가 우려스러운 건 사실이다. 전세계 군사비의 절반 이상을 집행하는 나라, 억지로 전쟁을 일으켜 웬만한 국가의 예산에 해당할 수백억불을 아무렇지도 않게 탕진하는 나라,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그 자신이 대량살상무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는 나라인 미국, 그들을 말릴 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들을 말리려면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외계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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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뭉크 다빈치 art 1
에드바르드 뭉크 지음, 이충순 옮김 / 다빈치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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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화가인 에드바르드 뭉크, 그가 그린 '절규'는 워낙 인상적이라 미술에 문외한인 나도 기억이 나는데, <명화는 왜 유명할까>란 책을 보니 그 그림이 세계의 명화에 뽑혀 있다. 역시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그림이 바로 명화다. 고흐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정신병으로 고생했는데, 천재화가는 우리와는 좀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다. 위대한 예술가가 우리처럼 돈이나 장수에 행복의 기준을 두지는 않겠지만, 뭉크는 고흐에 비하자면 행복한 예술가였다. 고흐가 살아생전 그림을 거의 팔지 못했고 서른 중반의 나이에 일생을 마감했지만, 뭉크는 비싼 값에 그림이 팔리는 유명한 화가였고, 80세가 넘도록 살았으니까.

이 책은 뭉크가 쓴 일기와 판사이자 후원자였던 쉬플러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뭉크가 글을 잘 쓰는 편이라고 해도, 그의 글들을 읽는 건 영 지겨운 일이었다. '절규'가 그렇듯, 그의 그림들이 죽음과 불안 등을 소재로 한 울적한 것들인데 반해 쉬플러에게 보내는 편지는 시종일관 투정과 자기 자랑으로 일관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글라저는 매우 이성적인 비평가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항상 저에 대해서 우호적인 글을 써주고 있습니다(162쪽)]-자기를 칭찬하면 이성적이라고?
[(...)에 실린 티스의 글을 읽어보셨는지요? 이제 노르웨이에서도 사람들이 저를 강하게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182쪽)]
[방금 전 (...)란 신문에서 비평 하나를 읽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비평을 쓸 수 있는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그 비평가는 저능아처럼...어쩌고 저쩌고...(185쪽)]-자기를 비판하면 '저능아'고 '멍청한' 사람이 된다.

[훈장 같은 것들을 받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번 훈장은 내 나라가 주는 호의의 표시라고 봅니다(188쪽)]-남이 탔으면 그 사람을 욕하지 않았을까?
[(...) 등 이들 비평지는 아주 감동적이었다는 비평을 실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분명 정확한 미술관을 지닌 집단임에 틀림없습니다(218쪽)]-정말 자기 중심적이지 않는가?

뭐, 자기가 최고라는 자존심이 있었으니까 평생 예술에 매진했을테지. 쉬플러에게 보내는 호칭의 추이도 웃긴다. 그가 가난할 때 판사였던 쉬플러에게 쓴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친애하는 재판장님께'

그러다가 돈을 좀 벌자 호칭이 바뀐다. '사랑하는 친구에게'

난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더 유명해지자 아예 막나간다. '친애하는 벗이여'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만세에 이름을 드날리는 뭉크가 판사보다는 훨씬 더 고귀한 인간이지만, 사람이 유명해졌다고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노르웨이 오슬로에 가면 뭉크의 집이 있다는데, 책을 다 읽고나니 거기 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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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살리기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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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작'으로 유명한 강준만 교수가 또하나의 책을 펴냈다. 이번에 나온 <노무현 살리기>는 20일 전에 나온 <노무현 죽이기>의 속편인데, 속편은 언제나 재미없다는 진리는 이 책에는 맞지 않는 듯하다. 난 이 책을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비결은 수구신문들이 자행하는 노무현 죽이기가 점점 더 유치해져, 코미디를 방불케 하는 탓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노무현이 중국에 갔을 때 '존경하는 중국 정치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노무현은 '모택동과 등소평'이라고 대답하면서 '한분이 다하기가 벅차 나누어 하신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모택동이 정치를, 등소평이 경제를 이룩했다는 말일텐데, 이건 정상외교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덕담 차원의 수사이리라. 하지만 조선일보는 이 말조차 '노무현 죽이기'의 용도로 사용했다. 논설위원 양상훈이 쓴 칼럼의 일부다.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국군 전사자들과 그 유가족들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를 도와 피를 흘렸던 유엔국과 참전 노병들은 또 무엇이 되는가. 중국인들조차 이를 어떻게 생각할지 부끄러울 뿐이다...]

이에 대한 강준만의 말, [이 양반들 개그 하는가?...노무현이 뭐라고 답하기를 원한 걸까?... 이들은 어쩌면 '존경하는 정치인은 없고, 모택동과 등소평을 증오한다'고 답했더라면 박수를 쳤을지도 모르겠다...그런 사고방식이라면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아무런 사과도 없는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까? (53-54쪽)]

[나를 진짜로 웃게 만든 건 전 대통령 김영삼이었다...;.한나라당 대표 최병렬을 만난 자리에서 '노대통령이 수백만명을 죽이고 공산혁명을 한 모택동을 존경한다고 말해 깜짝 놀랐다'며 노무현을 비판했다. 김영삼이 대통령 시절 중국을 방문해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뭐라고 답했을까? '징기스칸'이나 '달라이 라마'라고 답하는 묘기를 선보일 능력이 충만한 분인지라 생각만 해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57쪽)]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난 소리내서 웃었다. 이런 촌철살인의 유머까지 겸비했기에 그가 두터운 매니아층을 갖게 된 것일게다. 강준만 매니아, 이 책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강준만의 다른 저작들을 한두권씩은 읽어본, 수구신문의 문제점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왜나빠?'라며 봉창을 두들기는, 그러니까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할 사람들은 결코 이 책을 읽지 않는다.

빈익빈 부익부는 비단 경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닌지라, 아는 사람은 점점 많이 알고, 무식한 사람은 계속 무식한 채로 남아있다. 수구언론을 무작정 감싸기만 할 게 아니라 남들이 왜 욕을 하는지 한번쯤 귀를 기울여 보면 안될까? 97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 한권만 읽어본다면 그들에게도 새로운 세계가 열릴 텐데 말이다. 진실은 보려고 하는 자만이 볼 수 있다.

한가지 아쉬운 점. 책의 제목을 왜 하필 '노무현 살리기'로 했을까? 수구언론의 노무현 죽이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이 책도 계속 시리즈로 나올 텐데. '죽이기'와 '살리기'를 모두 써먹었으니, 다음 책은 '때리기', 그 다음 책은 '달래기', '꼬집기'... 이런 식으로 나갈 셈인가? <노무현 죽이기 2>라고 하는 게 훨씬 나았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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