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컴 앞에 앉았다. 그간 술일기를 못쓰고 밀려있는 게 있었는데, 오늘 페이퍼 하나로 깔끔하게 정리하련다.
119번째: 9월 16일(금), 과외 친구들과
추석 연휴 전날이었다. 강남대로는 끔찍하게 밀렸고, 난 그 광경을 즐기면서 차보다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이런 걸 보면 난 결코 착한 애가 아니다). 연휴를 슬퍼하듯 술집은 북적였고, 난 오버하다 그만 정신을 잃었다. 착한 친구 하나가 날 집까지 데려다 줬다.
초등학교 동창인 우리가 과외를 함께 한 시간은 중1 때부터 1년 남짓, 그런데 아직까지도 모임이 지속되고 있다는 게 놀랍다. 물론 우리가 계속 이런 건 아니다. 중2 때 난데없는 과외금지령이 내려 헤어진 이후 공백기가 길었다. 친구 결혼식 같은 데서 만나면 “우리도 모여야지 않냐”고 했지만 그건 말뿐이었고, 피차 바쁜 처지에 아무도 모임의 연락책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명이 총대를 메서 다시 만나기 시작한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우리에게 영어 과외를 해준 분은 중학교 선생이었다. 그 선생님의 솥뚜껑같은 손바닥에 머리를 퍽퍽 맞곤 했었는데, 가장 많이 맞은 사람은 당시 과외에서 문제아였던 나다. 선생님은 내 머리의 굴곡이 당신의 손바닥과 일치하다며, 내 머리를 때릴 때가 가장 편하셨단다. 작년, 그 선생님이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한다기에 몇 명이 모여서 가봤다. 많이 늙으신 선생님을 보면서 우리는 세월을 느꼈다.
친구 중에는 다 커서 사귄 사람도 있지만, 어릴 적 친구가 편하긴 하다. 이말은 해도 될까, 하는 자기검열이 그들이랑 있을 때는 작동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되고, 그런 편함이 좋다.
123번째: 9월 21일(수) 지도학생들과
원래 난 1박2일로 지도학생 모임을 하자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었다. 근데 학생들도 시간이 잘 안맞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고, 그냥 고기 좀 먹고, 맥주집에서 2차를 하는 조촐한(?) 모임이 되고 말았다.
바쁜 의대 애들이랑 1박2일을 간다는 건 방학 때가 아니면 힘든 일이다. 게다가 지난달은 내가 여기 온 사상 가장 바쁜 달, 내 계획은 발상은 아름다웠을지언정 실현되기 어려운 거였다. 의대 사람만 그런 게 아닌지라 사람들은 다 바쁘다. 한달은커녕 석달에 한번 만나기도 어렵다. “언제 술이나 먹자”고 헤어지지만, 그게 일년이 되고 2년이 되버린다. 바쁨은 나이와도 별 관계가 없다. 우리 조카(누나의 아들)에게 영화라도 한번 보여줄까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안되고, 일요일도 오전만 돼!”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먼 길은 차로 왔다갔다하고. 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람이 하는 일의 상당수를 기계가 대신하는 요즘, 사람들은 왜 점점 바빠지는 걸까? 이 문제를 한번 연구해보고 싶다.
* 2차에서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술을 마셨는데, 난 정말 대단하게도 한번도 안걸리는 실력을 발휘했다. 가위바위보는 결코 운이 아니며, 여럿이 할 땐 더더욱 그렇다.
124번째: 9월 26일(월)
내가 관여하는 영화 사이트 모임에 갔다. 이 모임은 한달에 두세번 가량 열리는데, 두달동안 난 이 모임에 한번도 가지 못했다. 왜? 아까 했던 말의 연장이지만, 내가 겁나게 바빴기 때문. “죄송합니다. 이번주는 못가구요, 다음주는 꼭 갈께요”란 말을 두달간 하고 지냈다. 당시에는 다음주가 되면 밝은 세상이 올 것이며 그때는 모임에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날이 되면 또 무슨 일이 있고, 그래서 “미안하지만..”을 되풀이한다.
이날도 그랬다. 나오라는 협박 전화를 받았을 때, 난 이렇게 말했었다.
“저 어제 학교에서 밤 샜거든요. 그냥 안가면 안될까요”
하지만 '안돼요‘란 말에 나가야 했고, 피로 회복에는 술이 좋다는 믿음 때문에 계속 소주를 비웠다.
9월 30일, 지난달에 난 이날만 바라보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날 열리는 회의의 자료준비로 머리가 아팠던 한달을 살았는지라 10월 1일이 되면 이제 마음놓고 놀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뭔 회의가 그렇게 많은지, 게다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원만한 회의를 방해하는 세력은 또 얼마나 많은지, 10월의 일주일을 보낸 소감은 이렇다.
“10월도 장밋빛은 아니다”
그러니까 9월은 9월의 할 일이 있고, 10월은 10월의 할 일이 있는 것, 바쁜 게 좋다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좋은 날은 다 간 것 같다. 아까 던졌던 의문에 스스로 답을 내려 보자면 “내가 나이가 듦에 따라 더 중요한 사람이 되어가고, 그러니까 점점 바빠지는 것이다. 바쁨의 정도는 내가 이 조직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얘기다”
이 말이 맞건 틀리건, 난 그냥 이렇게 생각하련다.
*오늘 강의의 마지막 슬라이드는 이랬다. "주말 잘 보내세요. 전 오늘 대천에 놀러가요. 메롱" 미녀 둘과 간다는 얘기는 차마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