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월 27일
마신 양: 소주 한병 + 맥주
모 신문에 3주마다 글을 쓰게 되면서, 내 시간은 3주 단위로 재편되었다. 3주 동안 소재를 찾아 눈을 부라리며 살다가, 원고를 보내고 잠시 한숨을 쉬고 나자마자 3주 뒤를 위해 또다시 눈을 부라린다.
언젠가는 꼭, ‘일부’ 남성들의 음주문화에 대해 쓰고 싶었다. 여자를 더듬지 않으면 술을 못 마시는 남성들의 변태성에 대해, 그리고 그 근저에 깔린 남성들간의 소통 부재에 대해. 하지만 내게 글을 제의했던 기자에게 배운 소중한 교훈대로, 신문에 실리는 글은 시사적인 것과 결부되어야 효과를 내는 거였다. 학벌에 대해 전여옥이 헛소리를 했을 때 우리나라의 학벌주의를 비판해야 하듯이. 그러니 내가 지금 음주문화에 대해 쓰려면, 정치권에서 그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나야 했다.
“내가 국회의원들 초대해서 광란 파티라도 해야 하나?”
주말까지 아무 일도 없었고, 결국 난 거기에 관한 글을 쓰지 못했다. 대신 난 우리나라 쇼트트랙 선수들이 “다리가 짧은 게 비결”이라는, 누구나 쓸 수 있는 평이한 이야기를 써서 일요일 밤에 보냈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네이버 사이트는 최연희 의원의 일로 인해 난리가 아니었다. “음식점 주인인 줄 알았다.”고 했던 그의 변명처럼, 그건 술김에 한 ‘순간적 실수’일 수도 있다. 상대가 ‘기자님’ 정도 되니 이슈화가 된 거지, 정말 식당 아주머니였다면 아무런 문제도 안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술김에 한 실수는 평소 행동을 반영한다는 톰 글래빈의 말처럼,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은 평상시 단란에서 숱한 여자를 농락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속이었던 거다.
이게 좀 진작 터져 줬다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데, 사실은 내게 아직 하루의 시간이 더 있고, 오늘 내로 글을 다시 써서 보내면 교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어제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과 그 문제를 논의했다. 문학을 전공한 그는 내 글쓰기에 긍정적인 조언을 많이 해줬고, 나에 대해 실제보다 높은 평가를 해주는 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의 말투.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법인데, 내가 쇼트트랙에 대해서 쓴 글의 개요를 그에게 말해 줬더니 그는 대번에 이런다.
“네티즌 댓글보다 못한 걸 써가지고 신문에 실으려고 하냐?”
그는 시종 “다리가 짧아서 잘된다는 과학적 근거를 대라.” “유럽인들도 다리 짧은 애가 많다.”면서 나랑 지리한 공방을 계속했다. 그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의 삐딱한 말하기 방식은 나로 하여금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나와 만났을 때마다 “나이브하다.” “니가 세상을 몰라서 그런다.”는 핀잔을 수십번씩 되풀이하는 사람이며, 내가 읽는 책을 보고는 “이딴 책 읽지 말고 레이몬드 카바 책을 읽어.”라고 말해 나로 하여금 카바를 미워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이다. 십년 전 그를 처음 만난 이후, 그 짜증스러운 어휘 구사는 변함이 없었다. 난 그에게 말했다.
“나 그냥 글 안바꿀래요. 님 말씀 들어보니까 바꾸기가 싫고, 쇼트트랙 글도 괜찮은 거 같아요.”
그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고, 심판 판정이 미국에게 유리하다고 쓰는 건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좋지 않은 글이 될 수 있잖아. 그거보단 음주 문화에 대해 쓰는 게 훨씬 시의적절하지 않을까?”
몇시간의 잠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지, 술이 깬 지금은 음주문화에 대한 글을 끄적거리고 있다. 잘 되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