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주의 술을 정리한다.


41번째: 3월 28일(화)

과외를 같이한 친구들과 3개월에 한번씩 만나고 있는데, 이날이 그날이었다. 미식가가 하나 있어서 저녁을 늘 맛있는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장점. 이번에는 쭈꾸미였다. 신사역 부근에 위치한 쭈꾸미집은 맛도 대단했지만 물이 아주 좋아서 ‘한번 더 가고픈 집’으로 내 머리에 각인되었다. 젊은 여자들끼리 온 테이블이 몇 개 있던데, 쭈꾸미에는 여성들에게 어필할 뭔가가 있는 걸까? 감자탕이나 곱창을 먹고나면 불판에 비벼먹는 맛이 또 일품이지만, 그 어느것도 쭈꾸미를 먹고 난 뒤 비벼주는 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맛에 취해 지나치게 많이 먹어서, 2차를 가서는 남들 모르게 허리띠를 풀고 있어야 했다.


거기까진 좋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예정된 코스로 가려고 하기에 집에 간다고 했더니 친구가 막 화를 낸다. “너 임마, 간만에 만나서 재미있게 놀려는데 너 왜그래?”

끌려가서 보낸 시간은, 솔직히 내게는 과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끌고 간 친구가 돈을 냈으니 좀 낫지만. 아, 역시 거절은 어렵다.


42번째: 3월 30일(목)

‘곰님’과 함께 영화를 보고 술을 마셨다. 어림잡아 주량이 소주 다섯병쯤 되는 곰님과 대적한다는 건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라 쉬엄쉬엄 술을 마셨다. 내가 좋아하는, 대학로의 한 식당에 가서 소주를 마셨고, 2차로 ‘로제’라는 흑맥주 전문점에 갔다. ‘로제’는 내가 학교를 다닐 때도 있었는데, 그 시절의 술집이 다 간판을 바꾼 뒤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고교 동문회를 할 때 거길 갔었던 기억이 난다. 10명 중 8명이 그 집에서 오버이트를 할 때, 비교적 정신이 말짱했던 난 이 사람, 저 사람의 등을 두드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기지 못할 때까지 술을 먹이던 악습이 굳건히 남아있던 시절의 이야기지만, 지금도 그런 사람은 있다. 아무튼 로제는, 여전히 운치있고 싼 좋은 술집이었다. 쉬엄쉬엄 마셨지만 집에 갈 때는 정신이 혼미했다. 곰님은 참 좋은 사람이다.


43번째: 3월 31일(금)

모시기 힘든 미녀분, 그리고 또다른 미녀분을 모시고 술을 마셨다. 전날 곰님과 갔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그건 순전히, 내가 자신있게 권할만한 집이 그집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국물이 맛있고 계란말이가 맛있고 추억의 도시락이 있는 그집은 금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고, 우린 대략 십분 가량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토요일밤보다 금요일이 훨씬 더 붐비게 된 건 벌써 오래 된 일인데, 그래서 2차는 내가 아는 가장 조용한 집으로 가고 싶었다. 사람도 없고 음악도 크지 않아서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곳에. 하지만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그곳은 대학로였다. 어두컴컴한 조명에 주인 혼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게 그집의 일상적인 풍경이었지만, 그날은, 우리가 일어날 때쯤엔, 테이블이 꽉 차서 빈자리가 없었다. 술자리가 파한 뒤 야구모자를 파는 리어커를 발견한 게 신기해 뉴욕 양키스 모자를 사가지고 집에 왔다. 소주 한병에 맥주 세병을 마셨지만 정신은 말짱했던,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올 수 있었던 밤.


44번째: 4월 1일(토)

만우절이라 종일 거짓말만 일삼던 하루.

“나 쌍거플 하러 왔어요.”

“박찬호가 타자로 전향했데요.”

이런 거짓말을 지겹게도 해댔던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사촌들과의 술자리. 남동생과 매제를 제외하면 다들 말술이라 몸을 좀 만들었어야 하건만, 난 잠이 부족해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모임에 나갔다.


황소곱창은, 전에도 그랬지만 그날도 곱창이 별로 없다면서 “곱창 4인분”을 주문하는 우리한테 “곱창 둘에 양 둘을 먹어라.”고 협박했다. 곱창이 떨어지면 새로운 손님을 못받으니 이미 들어온 사람들에겐 곱창 대신 딴 걸 팔아먹겠다는 속셈. 물론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법, 맛있는 곱창을 먹기 위해선 비굴하지만 그쪽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 곱창과 더불어 1차에선 한병 이상의 소주를 먹었고, 2차에서는 사촌형이 제조해준 폭탄주를 먹었다. 그리고 이어진 3차. 난 몹시 힘들고 지쳐 있었다. 맥주를 좀 마시다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그곳을 탈출했고, 그 덕분에 다음날 테니스를 무리없이 쳤다. 술이 나보다 약한 매제와 나랑 주량이 비슷한 남동생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하다. 그 궁금증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지만, 뭐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


45번째: 4월 3일(월)

간암으로 투병 중이신 전 학장님이 재임 시절 당신을 도와준 사람들을 불렀다. 말이 ‘도와준 사람’이지, 모이고 보니까 그분이 좋아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다. 하기야, 일이란 원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거 아닌가. 비싼 항암제 때문에 많이 어려우실텐데-한달에 800만원 이상 든다고 들었다-우리에게 소고기를 사주셨다.

“돼지를 많이 먹지만 가끔씩은 소도 먹어줘야 해요.”

안티가 없고 누구나 다 좋아하는 멋진 분, 내가 여자였다면 당장 프로포즈 하고픈 그 선생님이 왜 간담도암으로 고생하셔야 할까.


그냥 저녁만 먹고 온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가볍게 하고 갔는데, 의외로 많은 술을 마셔야 했다. 소주잔이 연거푸 날아왔다. 음주운전에 반대하는 나는 차를 가지고 온 맞은편 사람의 술을 다 책임져 줬다. 물론 거기엔 얄팍한 속셈도 있었다. 그 차를 타고 수원까지 같이 가려는. 하지만 그가 세 잔의 술을 어쩔 수 없이 마셨을 때, 난 내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았다. 2차를 갔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난 KTX를 타고 집에 왔고, 당연한 귀결이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래도 지난주엔 두 번의 휴식일이 있었다. 하지만 피로가 누적되서 그런지 그 전주보다 훨씬 더 힘들었던 한주. 이번주는 다행히 스케줄의 여유가 있지만, 강의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다. 이러다간 날밤도 새야 할 판. 오늘은 예과 MT를 따라가야 하니 술을 무지 마실 테고 돈도 원없이 쓸 거다. 그리고 내일은 서울에서 무슨 워크숍이 있고, 강의준비를 해야 할 목요일엔 내가 존경하는 지식인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 “안나오면 할복할 거예요^^”라는 문자를 보고 어찌 안갈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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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4-04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저 MT 가요. 잘 다녀 올께요! 알라딘을 잘 지켜 주시길!

물만두 2006-04-04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오세요~

월중가인 2006-04-0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히 다녀오세요 >므< //

2006-04-04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6-04-0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1: 신사동이면 강남구 신사동인가요..?? 거긴 여전히 물(?)이 좋군요..^^
#42: 로체요..? 혹시 서울대병원 후문쪽에서 주욱 올라가서 술집 골목으로 틀어서 다시 올라가면 있는 허름한 맥주집...말씀하시는건가요..^^
#43: 가끔 나만의 공간이 사람들로 붐빌 때 묘한 배신감이 느껴집니다..^^ 두 미녀분이 누군지는 이곳저곳을 다니니 파악이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44:정말..협박인가요 너무하네요 나름대로 단골이실 텐데.....
#45:좋은 분들과 오래오래 같이 있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꺼에요...

ceylontea 2006-04-04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 3개월 지났는데.. 45번째라구요?? 혹시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 술일기 쓰시는 건 아니시죠?

플라시보 2006-04-04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아빠집에 갔는데요. 아빠가 좋아하시는 술을 사들고 갔는데 아빠의 그분이 수퍼에 가서 다른걸로 바꿔오라 하더라구요. 아빠 이제 술 끊는다고.. 술로 치자면 울 아빠도 마태우스님 부럽잖은 분이신데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나보더라구요. 술 못마시는 아빠. 안타까웠어요. 아빠가 오래 건강해서 오래 술을 마시면 좋겠어요. 님처럼 몸관리를 열심히 하며 술을 마셨더라면 몇년쯤은 더 즐기실수 있었을텐데...

paviana 2006-04-04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 그 두분이 누구세요? 저도 궁금해요? ㅋㅋ

sweetmagic 2006-04-04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가 오래 건강해서 오래 술을 마시면 좋겠어요. 님처럼 몸관리를 열심히 하며 술을 마셨더라면 몇년쯤은 더 즐기실수 있었을텐데...
여기에 밑줄 긋고 싶어요.. ^---^

마태우스 2006-04-06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님 서재에 가서 답 드렸습니다.
매직님/결혼하시기 전에 부산 가야 할텐데... 4월 중순까지는 바빠서 못가고 4월 말쯤에 가볼까 싶어요... 괜찮으시죠?
파비님/저도 궁금...
플라시보님/술을 목적으로 삼으면 안되요. 저처럼 수단으로 이용해야지..^^ 언제 술이라도 한잔... 가능할까요??
실론티님/그러게요. 생각보다 많네요... 100번은 이미 물건너갔고...
메피스토님/어어 로제...아시나봐요? 전 혜화역 쪽에서만 가봤는데 설대병원에서 가면 그렇게 가겠지요. 거기 괜찮죠? 글구 황소곱창에선 단골도 소용없답니다.
바일라님/잘 다녀왔습니다 덕분에!
물만두님/감사합니다. 안주고 살아왔어요!



 

 

영화본 거 리뷰도 못쓰고, 책도 못읽고 있는 3월, 술은 그래도 꼬박꼬박 먹지만 술일기가 밀려버렸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한꺼번에 쓴다.


 

 

 

 

1) 27번째: 3월 2일(목)


모 신문에 칼럼을 썼다. 댓글도 별로 안달리는 사이트에 분노한 댓글이 열 개가 넘을 정도로 끔찍한 글이었다. 그 신문의 성격에 맞추어 두 번째 칼럼을 썼다. 댓글은 다행히 세 개밖에 없었고, 그 세 개는 한 사람이 쓴 거였다. “이게 글이냐?”는 게 댓글의 취지. 난 그분께 “언제 한번 만나서 글쓰기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고, 그는 진짜로 연락을 했다. 나보다 한 살이 많은 그는 S대 철학과를 나와 지금은 놀고 있으며, 앞으로는 정치를 할 생각이라고 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서 난 그가 심각한 과대망상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박근혜랑 결혼할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다” “내가 정치판에 나서지 않으면 이 나라가 위험한 지경”


나중에 보니까 그는 모든 칼럼에 비판적인 댓글을 썼으며, 정희진님의 글에 “아직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식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만 만나는 게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이었지만, 그의 제의를 뿌리치기에는 내가 너무 심약했다. 그래서 가진 두 번째 술자리, 그가 하는 모든 말-광주시장에 출마하겠다는 말부터 시작해서-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술자리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내게 놀라운 제안을 한다.

“나 정치할 건데 정치자금 좀 대시오.”

거절했다. 그랬더니 “내일 문익환 목사 추모제가 전남 강진에서 있다. 차비가 없어서 그러니 차비 좀 주라.”

3만원을 건내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너랑 다신 안본다.”

세상을 살다보면 별의별 이상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나처럼 일부러, 노력을 기울여가며 이상한 사람을 만나는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을 바보라고 한다. 난 바보다.


2) 28번째: 3월 3일(금)

내가 자랑하는 미녀 친구 둘과 술을 마셨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좋은 친구들, 그들이 결혼을 하더라도 나랑 쭉 놀아 줬으면 하고 바라는 건 내 욕심이겠지? 다 좋은데 주량이 너무 센 게 단점, 그날 역시 맥주에 소주, 다시 소주로 이어지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뎌야 했다.

 

 


3) 31번째: 3월 12일(일)

학생 하나가 만나잔다. 꼭 같이 술을 마시고 싶다고. 그 주에 나에게 가능한 날은 일요일뿐이었다. 학생들이 술마시자고 하는 걸 좋아하지만, 일요일날 쉬지도 못하고 천안에 내려가야 하는 게-그 학생은 천안서 자취를 한다-약간은 귀찮았다. 하지만 그 귀찮음은 충분히 보상받았다. 학생은 삼겹살집에 자리를 잡자마자 내가 쓴 책을 모조리 늘어놓고 싸인을 요구했다. 내가 버린 자식 취급을 하는 첫 책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고 할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단 한명이라도 유쾌함을 줄 수만 있다면 그 책은 충분히 존재 이유가 있지 않는가. 초창기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전보다는 덜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꽃샘추위에도 불구하고 화사한 봄 옷을 입은 탓에 달달 떨어야 했던 그날, 나와 그는 삼겹살에 소주, 이어서 곧바로 감자탕에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난, 근처 여관서 잤다.


4) 32번째: 3월 13일(월)-이건 쓴 거 같은데...

난 갑자기, 어려운 말로 즉흥적으로 술을 마시는 법이 드물다. 자랑은 아니지만 대략 2주 정도의 술 스케줄이 빼곡하게 휴대폰에 입력되어 있다. 하지만 나도 인간인지라 일주에 하루쯤은 쉬어야 하는 법, 그래서 내 스케줄 달력은 매주 하루씩이 비어 있다. 3월 13일 월요일이 바로 그런 날 중 하나, 집으로 가는 전철 안인데 한 미녀분한테 전화가 왔다.

“우리 언제 만나요?”

이날저날을 가지고 협상을 하다가 “오늘은 어때요?”란 질문을 던졌고, 미녀는 흔쾌히 동의했다. 황소곱창에 소주, 가장 환상적인 조합이 아닌가.


5) 36번째: 3월 20일(월)

이날 역시 쉬는 날이어서 밤 10시가 못되어 집에 들어왔다. 글이나 흐드러지게 쓰자고 컴 앞에 앉아 있는데, 12시 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술 한잔 안할래?”

내가 좋은 술친구로 각광받는 것은 가정이 없으니 아무 때나 불려나갈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소주에 소주를 마시고 또 소주를 마시다 보니 어느덧 새벽 4시, 다음날 쏟아지는 잠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6) 37번째: 3월 21일(화)

외국잡지에 논문을 투고하는 데 도움을 준 분들(남자 둘)에게 감자탕을 대접했다. 충무로에 의외로 맛집이 많다는 걸 깨달은 날이었는데, 감자탕이 맛있는 것까진 좋았지만 3인분을 먹고 나서 뼈 2인분을 추가로 시킨 게 나빴다. 배가 터질 듯한 상황에서 볶음밥까지 먹은 건 그렇다 치자. 그들과 헤어져 영화 동아리 모임에 가서는 왜 또 그리 많이 먹었을까? 고기를 보면 환장하는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난 평생 지금의 배와 더불어 여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7) 38번째: 3월 22일(수)

 

딴지일보의 스타인 미녀기자 둘과 장충동에서 족발을 먹었다. 장충동이 족발의 명소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맛의 차이는 있는데, 테이블 다리에 테니스 공을 끼워둔 게 특징적인 ‘평남 족발’이 그 중 가장 맛있다. 그 족발을 먹으면서 나이가 마흔이 될 때까지 족발을 멀리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는.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전날의 과식으로 인해 몸 상태가 상당히 안좋았다는 것. 술을 마시기 한시간 전까지도 속이 울렁거리고 헛구역질이 나서 할수없이 약국에 가야 했다. 그 약국서 지어준 소화제는 무척 드라마틱한 효과를 보여, 약을 먹고 난 뒤 십분이 지나자 난 평소와 다름없는 속도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소화제를 먹고 술을 마시는 투혼을 보인 날.


8) 39번째: 3월 23일(목)

 

 

원주로 출장을 갔다가 천안으로 돌아와 마음맞는 친구와 술을 마셨다. 각자 소주를 한병 반씩 먹어 얼큰하게 취했을 때, 개를 기르는 그 친구가 난데없이 개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갑자기 벤지 생각이 나서 울어 버렸다.

 

 


9) 40번째: 3월 24일(금)

알라딘의 두 미녀를 만난 날. 8시 쯤 황소곱창에 갔더니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도저히 갈 엄두가 안난다. 마치 콘서트장에 입장하려는 열성 팬들처럼 사람들은 곱창집 안과 밖, 그리고 옆 건물에 들어가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황소곱창 맛의 70% 정도를 보장하는 짝퉁 황소곱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람이 없어 좋았고, 그래서인지 종업원들도 친절하게 대해 줬다. 곱창 5인분과 양짓머리, 그리고 볶음밥을 먹고 난 뒤 서강대 앞에 있는 연탄삼겹살집에 갔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바로 이건데, 어떻게 곱창을 먹고난 뒤 삼겹살집에 갈 수 있느냐는 것. 물론 2차 장소를 제안한 사람은 나지만, 다른 모임 같으면 “너 돼지냐?”고 핀잔을 받을 제안이 그 모임에서는 “좋아요!”란 대답을 이끌어 내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는가. 그날 역시 술을 코가 비뚤어지게 먹었다.


결론:

일요일인 3월 19일부터 24일 금요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다. 토요일 약속이 뒤로 미뤄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건강이 최고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이런 무식한 음주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스케쥴을 봤더니, 이번주에도 오늘만 빼고 토요일까지 술약속이 다 잡혀 있다. 게다가 3월 30일과 31일, 4월 1일은 주량이 아주 센 분들을 만난다. 오늘 하루 주어진 휴식을 잘 이용해서 몸을 만들자. 여러분, 오늘 저한테 술 마시자고 전화하지 마세요! 오늘 마시면 저 쓰러질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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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3-2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정밀 밀린 일기네요. 그런데 s 철학과라 참 세상엔 특이한 사람이 많군요. 알라딘 두 미녀분은 누구일까요?^^

2006-03-27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만두 2006-03-2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가시지 말던가요~

진주 2006-03-27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오나요? 총정리 문제집같은 술일기 ㅋㅋㅋㅋ

한솔로 2006-03-27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꾸준함에 있어서는 저도 못지 않습니다만, 양에 있어서는 도저히.... 존경합니다. 꾸벅.

Mephistopheles 2006-03-27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7 : 다신 만나지 않길 하셨다니 다행이네요..삼자로서는 재미있는 상황이지만.
막상 당사자가 되면 술상을 엎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네요..^^
#28:마태님만의 미녀는 언제 만나실 수 있을까요..? ^^
#31:저도 마태님 책 하나 있는데....소장한테 빌려줬더니 줄 생각을 안하더군요..^^
#32:미녀와 술을 마셔본 적이 언제인가....가물가물..
#36:가족이 없으셔도 건강은 챙기셔야죠..^^
(이게 의사선생님에게 할말은 아닌듯 싶군요..^^)
#37:금주.라는 단어보다...금육...이 어떨까요...^^
#38:미녀들과의 술자리라면 누구라도 그러했을꺼라는 생각이 듭니다..ㅋㅋ
#39:악...술자리에서 울면 엄청 청승맞아 보이던데요...^^
#40:그 미녀분들이 누구일까요..?? 궁금궁금..
결론: 글이 밀리시니까.... 결국은 댓글도 밀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울보 2006-03-27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해요,어떻게 저렇게,,
일주일내내,,마태우스님 속이 가만히 있나요 가출하지 않았나요,,,

다락방 2006-03-27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전화 안할게요, 마태우스님.
(아아아아악~~
전화하고싶다,전화하고싶다,전화하고싶다,전화하고싶다,전화하고싶다,전화하고싶다,전화하고싶다,전화하고싶다.)

마태우스 2006-03-2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저도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제 소화기에게 늘 미안하죠...^^
메피님/왓 번호를 매겨서 댓글을 다시다니, 요즘 하시는 일이 어쩜 그리 깜찍하신가요. 근데 님 주위에 미녀들이 없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열미녀 안부러운 마님이 계시잖습니까. 마님을 모시는 게 마당쇠의 운명...호홋. 디카 기대할께요
한솔로님/전 양보다 꾸준함을 추구하는 분이 좋습니다. 글구 제 주량은 겨우 소주 두병-두병반이 고작이어요. 글은 좀 과장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진주님/중간고사라는 표현을 쓰실 수 있다니, 역시 진주님은 문학소녀십니다
물만두님/사실은 오늘 만나기로 한 유부녀가 있는데요,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걸로 보아 괜찮을 듯 싶습니다^^
속삭이신 분/연락도 없고 넘해!!! 뭐 좋은 일 있냐??
하늘바람님/절대로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p님과 ㅅ님이라고 하면 절대로 모르시겠지요?^^

마태우스 2006-03-27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피...전화번호도 모르시면서!!! 다락방님은 개구장이!

paviana 2006-03-2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viana 2006-03-27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음 제가 미녀는 아니지만 같이 오신분의 미모가 매우 뛰어나서 평균을 내면 저도 미녀라고 우길 수 있을지도..ㅋㅋ
근데 마태님의 전화를 받고도 안 오신 야X님 미워요. ㅠ.ㅠ

ceylontea 2006-03-27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5일 연속은 넘 심한거 아녀요??
이제 술 그만 드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마태님... 우~~~ 술 좀 그만 드세요~~~!

다락방 2006-03-27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클리오 2006-03-27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리고 책 선별이 무척 재미있어요. 근데 그 첫번째 사람, 정말 과대망상 사이코군요. 두번째 만나셨다니, 마태님은 바보 맞아요.. --; 그리고 부디.... 정말 다시는 만나지 마옵소서.. (거절 못하는 성격이라 걱정스러워. 궁시렁... )

펠릭스 2006-03-2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그러다 큰일 나세요!!!! ㄷㄷㄷ

가을산 2006-03-27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 술값 모으면 집 한채 사시겠어요!

해적오리 2006-03-2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 님 의견에 동감.
전 어제 맥주 한 잔 마시고 완전히 나가떨어졌는데..

몸 조심 하시구요, 미녀님들 계속 만날라면 건강하셔야 합니다. 이상한 사람 덜 만나시고 체력을 아끼셔요.
참 밀린다왕문경 읽을 만 합니다. 예전에 동생이 추천해줘서 읽은 적이 있거든요.

kleinsusun 2006-03-27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글 읽다가 넘넘 웃겨서 쓰러질뻔 했어요.
싸이코 아저씨를 차비까지 주시면서 만나신거예요? 그것도 두번이나? ㅎㅎㅎㅎㅎ
마태님은 넘 착해요.^^

sweetrain 2006-03-28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겹살 먹을 수 있는데 ㅠ.ㅠ

마태우스 2006-03-31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비님/하하 맞아요 님 삼겹살 좋아하시죠
수선님/착한 게 아니라 바보 아닐까요^^
해적님/밀린다왕문경을 읽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진정한 해적이 뭔지를 보여주시네요... 건강은 꼭 신경쓰겠습니다. 감사.
가을산님/아이 요즘 집값이 얼만데요^^
펠릭스님/조직을 빨리 정리하고 술을 덜마셔야 할텐데..^^
클리오님/알겠습니다. 몸조리 잘 하시길!!!^^ 흐흑 전 바보예요!!
다락방님/님의 미소는 늘 제게 용기를 줍니다^^
실론티님/자전거 타면 넘어지지 않으려고 페달을 밟지요. 오토바이로 바꿀까봐요...^^
파비님/아네요 님도 나름 미녀세요!
 

 

 

 

 

일시: 3월 17일(금)

누구와: 드림팀과


금방 취소하긴 했지만 올해 술 목표를 100번 이하로 잡았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규정을 강화해 웬만큼 마시지 않으면 술 마신 걸로 치지 않기로 한 것. 그 결과 3월 21일까지 내가 마신 술의 횟수는 불과 서른여섯 번, 100번 달성은 어려울 듯했지만 164번을 마셨던 작년보다야 훨씬 덜 술을 마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 이맘때는 어땠을까 싶어서 기록을 뒤져봤다. 이럴 수가. 작년 3월 21일 난 서른번째의 술을 마신 것으로 되어 있다. 36회인 올해는 그러니까 작년보다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어났지 않는가. 물론 작년에는 8월 특수가 있어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지만, 스페인에서 마신 술을 모조리 안마신 걸로 치고도 이렇다면, 100회는커녕 150회 이하도 어려울 듯싶다. 에라 모르겠다. 이왕 망한 거, 설마 200번을 넘기랴 하는 마음으로 마셔 줘야겠다.


술을 마시는 조직 중 여자 둘로 구성된 팀이 있다 (물론 그런 팀이 한둘은 아니지만^^). 두분 다 보통 주량은 넘는 분들이라 그 팀과 만날 때는 긴장도 하고 몸도 만든다. 약간 피곤한 상태에서 술을 더 잘 받는다는 게 경험으로 증명되었기에 일부러 전날 잠을 덜자고 나간다. 17일날도 그랬다. 기찻길 왕갈비집에 가서 고기와 더불어 소주를 마셨다. 보통은 고기만 먹으면 이상하니까 술을 먹지만, 이분들과 있으면 고기는 수단이고 술이 목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누구 하나 원샷을 외치거나 술을 강요하는 분은 없다. 그저 각자 달릴 뿐이다. 하지만 그런 게 오히려 나의 전투 의욕을 더 부추기는데, 양쪽 옆에 앉은 여자분이 부지런히 잔을 비우는데 내가 어찌 멈춰 있을 수 있겠는가. 특히 순진한 얼굴을 한 젊은 분의 활약은 볼 때마다 경이롭다. 시종 ‘전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을 하고서 홀짝홀짝 잔을 들이키는지라 그분의 잔은 볼 때마다 비어 있다. 1차에서 몇병이나 마셨을까. 4병? 5병? 스포츠카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우리는 바람을 가르며 술을 마셨다.


그리고 이어진 2차. 또다시 소주병이 쌓여 갔고, 위기감은 점점 고조되었다. 내가 어떻게 집에 갔는지는 모닝케어를 먹지 않은 탓에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미녀분이 선물해준 책 두권을 무사히 가져갔고, 분실한 것도 없는 걸 보면 크게 문제될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물론 그 두분에게 또다시 완패했지만. 그분이 준 <수잔 서랜던>이란 책을 펼쳤다. 책 겉장에 파란색 볼펜으로 쓴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xx님, 술 조금만 드세요!”

그토록 술을 먹여놓고 어찌 이런 글귀를 책에다 쓸 수가 있단 말인가. 방법은 하나 뿐, 몸을 더 열심히 만들어서 다음번엔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밖에.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한다던 순진한 모습의 미녀가 결국 회사에 나가지 못했다는 얘기를 그와의 전화 통화에서 전해들은 게 약간의 위안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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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3-2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주변엔 미녀투성이, ^^ 술 조금만 드셔요

Mephistopheles 2006-03-22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상무를 한분 고용하세요...쓰고보니 반칙이겠군요...^^

다락방 2006-03-2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몸 열심히 만드세요 :)

펠릭스 2006-03-22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녀랑 먹기전에는 며칠간 술을 덜먹는건 어떨까요?ㅋㅋㅋ 강한모습을 미녀분들께만 보여드리면 되는거니까요. 너무 치사한가요?ㅎㅎㅎ

실비 2006-03-23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주위에 미녀님이 계시는군요.. 몸 생각하셔서 조금만 드셔요^^

soyo12 2006-03-23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술을 많이 마셔본 지가 언제인가? ㅋㅋ 정말 술 즐기시는 것 같아요.^.~

예삐오빠 2006-03-2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당히 드셔요...시간 되시면 저에게도 한번 쏴주세요

마태우스 2006-03-24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삐오빠님/혹시 찬섭이 맞지?? 반갑다! 안그래도 전화 한번 해야겠다 싶었어.
속삭이신 분/서교대첩이라니 너무 멋져 버리는군요!
소요님/전 술을 즐기는게 아니라 만남을 즐긴답니다 호호홋. 소요님도 술의 세계로 오세요!
실비님/그, 그게요 사심을 버리고 면벽수도 했더니 그리 되더이다^^
펠릭스님/늘상 미녀를 만나는데 어찌 하루라도 쉴 수가 있겠습니까. 호홋.
속삭이신 분/뭐 그럴 수도 있죠 뭐. 근데 넘 슬퍼요 흑...
속삭이신 ㅇㅇ님/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어찌 이기고 지고가 있겠습니까. 담번에 또 즐거운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해요
다락방님/몸을 만들기는커녕 오늘도 극한상황에서 술자리에 나간다는...^^
메피님/술상무라...야클님이 어떨까 싶군요^^
하늘바람님/낼까지만 마시면 일요일날 하루 쉴 수 있습니다.^^
 

일시: 3월 19일(일)

마신 양: 치사량


내가 만일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난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스포츠만 안좋아한다면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국땅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보겠다고 새벽에 일어날 필요도 없고, 우리 선수들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레이져빔을 쏠 일도 없으니 말이다.


어제부터 난, 야구를 피해다닌다. TV는 물론이고 신문과 인터넷에서도 야구 이야기를 피한다. 마음에 패인 상처가 덧나는 게 싫어서다. “틀림없이 이긴다.”고 호언을 했지만, 그건 나 스스로의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거였을 뿐, 나 역시 떨고 있었다. 그날 아침 테니스를 칠  때, 내가 잘해서 상대 팀과 5대 5 동점이 된 적이 있다. 그 순간 하느님께 빌었다. “이 경기 지면 이따가 일본한테 이기게 해주실 거죠?”

난 결국 그 경기를 6대 5로 졌지만, 하느님은 내 기도를 외면하셨다.


미녀와 잠실경기장을 찾았다. 10시에 개장을 했는데 11시 쯤 갔더니 좋은 자리는 이미 만원이었다.

 

내야는 이미 다 찼기에 외야 폴대 뒤에 자리를 잡았다.

 

더 옆으로 가면 TV가 안보이는 사각지대라, 그쪽엔 사람이 별로 없다. 이때만 해도 한국 팀의 승리를 빌면서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7회, 3대 0이 되자 난 할말을 잃었다. 손민한이 등판하자 감독이 오늘 경기를 버렸음을 알았다. 손민한은 일본 타자들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오승환으로 승부를 걸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대 0에서 난 자리를 떴다. 나 뿐 아니라 다른 관중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안일어났다면 옆에 있던 미녀는 얼어 죽었을 것이다. 참고로 그 미녀는, 야구 룰도 모르면서 순전히 내가 가자고 해서 유부초밥까지 싸가지고 경기장에 왔다.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후 세시부터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셨다. 얄궃게도 감자탕집에는 TV가 켜 있었다. 내 옆 테이블에는 등산을 다녀온 아저씨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TV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거 지금 생중계하는 거야?" 그들의 무지가 난 부러웠다. 난 저것 때문에 죽고 싶은데, 저들은 등산을 다녀 왔구나. 정말 다시 태어난다면 야구 같은 걸 안좋아할거야. 축구를 생각해 봐. 축구를 안좋아하니까 경기를 보지도 않고, 한국이 져도 아무런 느낌이 없잖아. 그리고 축구는 일주일에 한번씩 하니까 매일 하는 야구보다 훨씬 낫지.

시종일관 난 "술 마시다 죽을래. 야구도 졌는데..."라면서 잔을 들이켰다. 그때 심정은 정말 참담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플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난 지체없이 2006년 3월 19일이라고 대답할 거다.

 


 스포츠라는 건 사람을 이렇듯 이상하게 만든다. 하루 전만 해도 두번이나 봤던 한국-일본의 두번째 경기를 재방송으로 보고 있었고, 네이버의 야구 관련 댓글들을 보면서 희희낙락했지 않는가. 아니, 한주 내내 난 기분이 부웅 뜬 채 아무 일도 못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것이 단 하루만에 하이트 맥주의 원료인 암반수의 깊이만큼 기분이 가라앉아 버린 거다. 흔히 하는 말마따나 죽 쒀서 개 줬다.

병나발을 불어도 취하지 않았고, 내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화요일날 "져도 된다"는 느긋한 맘으로 쿠바와의 결승전을 지켜보려 했는데.

난 너.무. 슬.펐.다. 스포츠에서 졌을 때 슬픔의 정도는, 그 스포츠를 좋아하는 정도와 비례한다. 젠장, 난 야구를 너무 좋아했다.

별짓을 다 해봐도 죽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야구도 졌는데 살아서 뭐해?"라며 젓가락으로 날 찌르는 모습이다. 이걸 찔러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찌르겠지만...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이다.


괜찮다고 최후의 발악을 해보지만

 

난 쓰러져 버렸다. 소주 세병을 미처 다 못먹고, 일본에게 쓰러진 한국 대표팀처럼 난 쓰러졌다. 앞으로 한동안, 야구 관련 기사를 외면할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개 보름 동안의 즐거움을 선사해준 우리 대표팀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3월 19일은 올해 들어 가장 슬픈 날이지만, 그 전 보름은 너무도 아름다웠으니까. 아울러 사진을 찍어준 미녀분께도 감사드려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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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2006-03-2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승주나무 2006-03-2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슬퍼보입니다. 나는 일본이 졌을 때 수십 명의 일본인이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사알짝 했습니다. 마태 님// 죄송해요. 하느님이 제 우려를 들으셨던 것 같아요. 개미소리마냥 작게 말했는데^^

chika 2006-03-2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저는 새벽별님 뒤에서 입 틀어막고 박장대소를...;;;;)

날개 2006-03-21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뒤에서 웃은 저는 안보이죠? 흐흐~

panda78 2006-03-21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저는 맨 뒤라 가려서 하나도 안 보였을 거에요=3=3=3=3
(저 두 병을 한꺼번에 들고 마시시는 모습은 정말... 큭큭큭큭!)

Viewfinder 2006-03-21 0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표팀이 엘에이에서 샌디에고로 떠나기 전날 한인타운의 룸살롱에서 떡이 되도록
마셨다네요. 아가씨가 모자라서 근처 다른 가게의 아가씨들도 공수해다가...
감독은 이미 전날부터 경기를 내줄 생각을 한 건 아닐까요.
하루만 참아줬으면 우에하라에게 그리 무력하게 농락당하지 않았을지도...

starrysky 2006-03-21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너무 슬프신 나머지 술일기마저 엉뚱한 카테고리에 와서 헤매고 있군요. 흑흑. (혹시 내가 본 영화들 중에서도 이렇게 슬픈 영화는 없었다..라고 말씀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ㅠㅠ)
전 그날 올림픽공원에서 행사가 있어 가 있었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라디오를 들으며 안타까움에 몸부림쳤답니다. 그래도.. 덕분에 한동안 모든 국민이 즐거웠잖아요. ^^

다락방 2006-03-2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슬프다...ㅠㅠ

비연 2006-03-21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까지 본 중에 가장 슬퍼보이는 마태님의 모습이네요...흑흑~
저도 그날 펑펑 울고 잠들어서 담날 눈이 왕방울만해졌다는 슬픈 전설이....
마태님..힘내세요! 그래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쟎아요...^^

비로그인 2006-03-21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기분은 하이트 암반수의 깊이만큼이나 가라앉았다---아아, 정말 마태우스 님의 글쓰기 매력이 한 번에 드러나는 문체입니다.

paviana 2006-03-2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보기엔 미녀앞에서 귀여움을 떨려고 열심히 연출하면서 사진찍으신 듯 보여요.=3=3=3
미녀가 앞에 있고 술이 앞에 있는데 야구쯤 졌다고 (흑 죽 써서 개줬지만) 무에 그리 큰일이겠어요...

Mephistopheles 2006-03-2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 야구 보고 우리나라 선수들 참 잘했다고 감동받았구요..
이치로라는 선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무던하려고 했는데 마태님 페이퍼 보고 울화통이 치밀잖아요..^^

마태우스 2006-03-21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흑흑.... 슬픔이 아직도 걷히질 않네요..
파비님/미녀 중심주의에서 탈피하셔야 합니다. 물론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야구 진 건 제겐 큰일이어요
주드님/제, 제가 술 오리엔트 되가지고 뭐든지 술과 연관을 짓지요^^
비연님/님을 울게 한 우에하라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다락방님/흑...슬퍼 죽겠어요 엉엉엉
스타리님/앗 저 그날 올림픽공원에서 테니스 쳤었는데...그때 스타리님 뵐 수 있었던 거군요!
뷰파인더님/제가 워낙 술을 좋아해서 그런지 하루쯤 술 마신 거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엔 전날 술을 마시면 담날 테니스를 아주 잘치거든요... 술을 안마셨다면 우에하라의 공을 칠 수 있었을까요...
판다님/님은 부리만 이뻐하시는 줄 알았는데...
날개님/앗 제 이상형인 날개님이닷!
치카님/제 슬픔을 발판으로 웃으시다니 치카님 넘 귀여워요
별님/요즘 우리가 소원해졌다는 루머가 도는데, 이참에 그게 루머라는 걸 증명해 보이자구요
승주나무님/아니어요 엉엉 그게 승주나무님만의 잘못이겠어요...흑흑
타지마할님/엉엉 전 슬프단 말이어요

로드무비 2006-03-21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믹 드라마에 투입되어도 큰 인기를 끌 만한 캐릭터!
글은 또 얼마나 재밌는지......

하늘바람 2006-03-2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녀분은 참 인내심도 좋으셔요. 저같으면 웃느라고 사진 못찍었을것같아요. 마태님의 슬픈글이 왜 이리 재미있을까요

울보 2006-03-2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이야 이사진을 보았습니다 어제 그러지 않아도 텔레비전에서 저 모습을 보여주길래 대단한 우리나라사람들했는데 마태우스님도 거기에 계셨군요,그런데 죄송할말씀인데 사진보며서 너무웃었습니다,,,

moonnight 2006-03-21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슬펐답니다. 마태우스님은 지금쯤 술마시고 계시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ㅠㅠ 우리선수들 너무 잘 했는데, 세번을 내리 이긴다는 건 정말 무리였어요. 미국이 미워욧. -_-+++

클리오 2006-03-21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이제 사진 연출의 예술의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 그리고 일본이 우승한건 정말 참... --;

마태우스 2006-03-22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이번 일이 야구에 대한 저의 관심을 팍 떨어뜨려, 앞으로 정상적이고 건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새벽에 일어나고 이러는 거, 이제 지겨워요..
달밤님/그래요 미국이 미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울보님/흑, 거리응원 갔다가 지니까 더 슬퍼요
하늘바람님/그러게요. 저도 사진 보고나서 얼마나 웃었다구요. 당시엔 몰랐는데 올라온 사진을 보니까 예술이구나 싶어요^^
로드무비님/저도 무비님처럼 글을 잘쓰고 싶어요!

펠릭스 2006-03-22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계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겼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흠....
 

 

일시: 3월 15일(수)

마신 양: 소주--> 맥주


고시생을 보면 늘 마음이 짠하다. 좁은 방에서 고독과 싸우며 공부를 해야 하고, 옆방에 들릴까 싶어 전화도 마음대로 못한단다. 하지만 합격만 하면 신분이 급상승하는 게 또한 고시여서, 검사가 되어 압구정동에 사는 내 친구에게서 옛날 신림동 고시촌 시절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에 고시를 친 미녀를 만났다. “잘 못봤어요.”라고 웃는 미녀는 나이도 나이니만큼 이번에 안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아프단다. 회사에 다니느라 고시를 너무 늦게 시작한 탓에 겨우 한번 떨어졌을 뿐인데도 이렇듯 고민을 해야 한다. 일년간 다시 고시촌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심난할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녀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것.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에 나오는 에릭 같은 남자라면 인생이 더 피곤해지겠지만,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걸 보니 다행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아주 맛있는 삼겹살을 먹었다. 난 찌개를 서비스로 주는 곳을 좋아하는데, 거기가 그랬다. 그녀가 서둘러 계산을 했다. 고시생을 등쳐먹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2차는 내가 샀지만, 맥주 몇병이라봤자 얼마나 나왔겠는가. 술이 덜 취한 것 같아 전철을 탔다. 자리에 앉으면 자버릴 것 같아 일부러 안앉는 센스를 발휘, 집까지 무사히 왔다. 고기를 잘 얻어먹은 것, 미녀임에도 불구하고 날 만나준 것도 고마운데 그녀는 내게 선물을 하나 보내왔다. 내가 모자에 심취한 걸 알고 모자걸이를 보낸 것. 길다란 끈에 모자를 끼우는 고리가 여러 개 달려 있는 구조인데, 총 24개까지 걸 수 있다. 모자를 끼우고 끈을 어디다 걸까 고민하다가 옷걸이에 걸었더니 다음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왼쪽에 쌓인 책들은 내가 사재기했던 내 책이다^^

 

하지만 위 사진으로는 모자걸이의 위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 같아 힘도 없는 할머니에게 모자걸이를 들고 계시라고 했다.  할머니는 얼굴이 나오면 안된다고 그 뒤로 숨으셨다.  모자걸이를 선물한 내 좋은 친구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안그래도 박스에 담긴 모자를 매일같이 세는데-혹시 여동생네 애들이 만졌을까봐-이젠 세기가 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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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6-03-21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이런게 있군요.
역시 세상은 알아갈수록 놀라움이예요. :)

세실 2006-03-21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빠도 고시공부할때 참 불쌍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보약도 해주었는데......
되고 나니 역시 좋으네요. 후훗.
할머님 고운 연두빛 자켓 입으셨군요~~~~ 얼굴도 보여주시지...

Mephistopheles 2006-03-2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LB모든 야구팀 모자 다 모으시면...끝...이신가요..^^

마태우스 2006-03-2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앞으로 여섯개만 더 사면 끝-입니다
세실님/그러게요 얼굴 찍으려 하면 늘 숨으시더라구요. 안그러셔도 되는데...님은 좋은 동생이시군요
다락방님/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놀랐습니다.
새벽별님/앗 그말은...님이 선물하시려 했다는 뜻?

울보 2006-03-2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명박시장의 테니스 이야기를 뉴스에서 들을때마다 왜 마태우스님이 떠오르지요,,후후

마태우스 2006-03-21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그건 제가 테니스를 워낙 잘치기 때문이지요 음하하하핫. 테니스의 황제, 황제 테니스 마태우스!

moonnight 2006-03-21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마태우스님 주변의 미녀분들은 맘씨도 고우셔라. 좋은 결과가 있으셨음 좋겠네요. 모자걸이, 신기해요. ^^

클리오 2006-03-2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봐도 할머님 같지가 않아요. 흐흐...

파란여우 2006-03-21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자를 보니까 점점 님이 좋아져요. 으흐흐흐흐

마태우스 2006-03-22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어맛 그래요? 안그래도 저 요즘 계속 모자 쓰고 다닙니다^^
클리오님/좀 젊어 보이시긴 해도, 가까이서 뵈면 좀 늙으셨어요...ㅠㅠ
달밤님/대표적인 분이 달밤님 아니십니까

2006-03-22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주신 모자를 쓰고 동네에서 뛰놀다가 모자 꼭지 떨어졌어요. 꼭지는 어디로 갔을까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