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집 - 불을 켜면 빵처럼 부풀고 종처럼 울리는 말들
안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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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이 단어들과 제 삶이 톱니처럼 맞물린 적 있다는 사실이에요. 어떤 단어는 시간의 역할을 대신했고 어떤 단어는 공간의 역할을 대신했어요.

프롤로그에 써진 작가의 말. 각각의 단어와 그 단어를 만나거나 떠올리는 순간의 이야기가 모여있다. 라페나 버저비트처럼 내게도 익숙한 단어가 작가의 눈으로 새롭게 쓰일 때는 흥미로웠고, 밀코메다 같은 단어를 보면 먹먹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밀코메다(Milkomeda)'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상상적 현실이다. 미 항공우주국에 따르면 현재 우리 은하의 이름은 '밀키웨이(Milky Way)'인데, 약 40억 년 뒤엔 안드로메다와 충돌해 새로운 은하가 탄생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새 은하의 이름이 (밀키웨이와 안드로메다의 합성어인) 밀코메다라고. (...) 그러나 그 먼 시간에도 이름이 있다. 내일, 한 달 뒤, 1년 뒤, 10년 뒤에게도 없는 이름이.

(...) 그러니 오늘의 나는 오늘 쓸 수 있는 문장을 쓰면서 이곳의 나를 찾아올 밀코메다의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다. 와야 할 시간은 기필코 오게 되어 있다. 그럴 때 나의 인사는 "왜 왔어?"가 아니라 "왜 이제야 왔어"이기를 바라며.

196p 밀코메다

명사를 잘 못 외우는 병이 있다. 한번 헷갈린 단어는 아주 오래 헷갈리는데, 머릿속에서 엉킨 정의를 딱히 바로 잡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모든 걸 제대로 아는 건 불가능하니 내 삶에 오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인지한 채로 사는 것도 나쁘진 않다. 시력이 나빴을 때(지금은 수술을 해서 좌우시력 1.5의 인간이 되고 말았다) 종종 안경을 쓰지 않고 다녔던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시인의 세상에서 단어를 오해하는 건 어떤 의미이려나. 안희연 작가는 낯설고 새로운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골동품을 발견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으로 받쳐들고 먼지를 후후 불고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서 단어마다 제자리를 찾아주는 사람 같다. 글을 읽을 때마다 그 조심스러움이 종이 너머로 따뜻하게 전해져서 뭉클했다.


한때 친구와 밀코메다의 시간을 상상한 적이 있다. 모두가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시간에 우리는 몰래 나와 건물 중앙계단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통창 너머를 마주보고 어둡고 찬 계단에 앉아 있었다. 운동장을 비추는 희부연 불빛에 의지해 베이지색 우주와 문명의 끝과 신인류에 대해 소근거렸다. 우린 더 이상 그 주제로 이야기하진 않지만 종종 그애를 만날 때마다 같이 듣던 노래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린다. '밀코메다'라는 단어를 마주친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쏟아졌다.


반면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한 적산온도는 경직된 의미에 갇히지 않고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온도를 저금한다는 말. 모든 존재가 꽃이라면, 나의 피어남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까.

(...)

왜 항상 스스로를 벌하는 방식으로만 살아온 걸까. 임계점은 한계가 아니라 꽃망울이 터지는 환희의 순간일 수도 있는데. 피려는 마음을 모른 척한 건 세상이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27-29p 적산온도



결핍은 결핍대로 아름답다는 거, 아니 결핍이 도리어 빛나는 무늬를 만든다는 거, 평생 모르고 사는 일도 허다하겠지. 알아도 부정하느라 애먼 시간만 허비하겠지. 노란 나비, 골목마다 놓인 전봇대와 가로수, 베란다의 화분들... 아주 가까이에서, 숱한 메신저들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데도 못 보겠지. 나타남과 드러남의 의미, 안 믿겠지.

39p 삽수



우리 집에도 있다. 결핍으로 무늬가 아름다운 식물이. 지금은 동면 중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흰색과 분홍빛의 얼룩이 점점이 묻은 연둣빛 잎을 피웠다. 잘 키우고 싶어서 생육법을 찾아봤더니 물을 줄 때는 미지근하게 데워줘야하고, 비료는 금물이었다. 부족한 성분 때문에 색이 화려한 거라 비료를 주게 되면 색이 변한다는 게 이유였다. 인간이 스스로 결핍을 만들어 놓고 사랑하는 게 기괴했지만 그런 기괴함이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내년에도 칼라디움의 아름다운 결핍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대목은 같은 작가의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오래된 이름 하나를 가리키며
나는 그에게 세번의 어둠과 수천번의 알록달록한 기억을 주었노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첫번째 어둠 앞에서 허물어졌다고 했습니다

(...)

삶과 죽음을 가르는 건 단 한걸음 차이였다고 했습니다
설탕이 물에 녹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너무 좋아서 우는 중)


인간이 제아무리 약하다 해도 인간은 저절로 강한 면이 있다. (...)

우리는 모두 찢기기 쉬운 피막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의 피막에 함부로 막대기를 꽂아 휘저을 수 없다. 대단한 무엇이 파괴되어서가 아니다. 한 인간을 둘러싼 피막이 손상될 때 인간은 죽는다. 아주 작은 찢김으로도 상한다. 그러니 겪고 뒤척이면서 두터워지는 수밖엔 없다.

78-79p 피막




나는 그 애의 울음을 참는 얼굴을 알고, 우리가 눈 마주친 순간 반으로 쪼개진 커다란 슬픔을 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집이라면 그 집을 짓기 위해 설계된 내력벽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공평히 나누어 가진 부재의 기억같은. 신의 입장에선 당연한 설계일지 몰라도 인간의 관점에선 피하고 싶은 불운이다.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해보면 내력벽이라는 건 모든 걸 부숴도 부서지지 않는 최후의 보루, 영혼의 핵심인 셈이니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아름다운 것이겠다.

100-101p 내력벽



마법이라는 단어를 여기에 쓰면 안될 것 같지만 슬픔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한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울음을 견디던 4월이 있었다. 그 봄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들은 조금 특별하다.



세상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제자리를 찾는 것들이 있다. 마음이 펄펄 끓을 땐 너는 왜 내게 심장을 꺼내 주지 않느냐고 따져 묻기 전에 이런 주문을 외워보는 건 어떨까. 일일시호일. 일일시생일. 날마다 좋은 날, 날마다 생일이라는 마음으로.

131p 구득



왜 당신은 인간에게 죽음을 가르치나요? 왜 당신은 시간의 손바닥 위에 우리를 올려두고 주사위 놀이를 하나요? 이 세계가 하나의 얼굴이라면, 왜 당신은 한결같이 슬픈 표정만 짓고 있나요?

166p 꼭두


꼭두는 상여를 장식하는 나무 조각상을 이르는 말로, 이승과 저승, 꿈과 현실을 잇는 존재다. 망자에게 길을 안내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영혼을 위로하는 역할을 한다. 꼭두는 언제나 선두에 있다. 꼭두새벽이 아주 이른 새벽을 부르는 말이듯이 꼭두는 언제나 맨 앞에서 길을 내고 불가능한 물을 열며 나아간다.

167p 꼭두


존재가 깃털 같아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

168p 꼭두

당신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합니까. 가장 깊이 찔린 기억과 가장 높이 뛰어올랐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어떨 때 흩어지거나 맺힙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온도, 색깔, 질감, 경도는 어떠합니다.

172p 안료

이거 완전 고백 아닌가요. 저런 게 궁금하면 사랑이지. (이마 짚)


이주영 배우님이 저 문장 낭독해주시면 좋겠다. 모닝콜로 해놓고(할 줄 모름) 매일 아침 나무아미타불할렐루야갓뎀 외치면서 일어날래.
중국어 버전은 주동우가... (혼절) 저 주동우 너무 좋아해서 중국판 우결도 꾹 참고 봤다요. 우결이 주동우 마지막 헤테로 역할이면 좋겠다. (아님)

갑자기 주동우 생각에 정신이 혼미하네.


안료는 염료와 다르다. 안료와 염료는 물질에 색을 발현시키는 색소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염료는 물에 녹아 스며드는 반면 안료는 물이나 기름에 녹지 않는 성질을 지녔다. 안료는 다른 무엇과 섞이더라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오히려 더 분명하게 자신임을 증명한다. 그런 안료를 재료 삼아 빚는 시는 빛에도 열에도 추위에도 강할 것이다.

174p 안료


내가 쓴 문장들이 징검다리가 될 때가 있다. 과거의 문장을 딛고 현재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현재의 문장을 딛고 미래의 문장을 내려놓는다. 그렇게 간신히 한 걸음씩 나아간다. 망망대해 같은 바다를. 말과 사람이 함께, 느리더라도 함께.

179p 탁성

가끔 예전에 쓴 글을 보면서 위로 받을 때가 있다. 며칠 전에도 4년 전 일기에 쓴 문장에 기댔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도 무언가 써놓아야 겠다. 느리더라도 멈추지 않고 걷기 위해 써야지.



연말에 아껴둔 카드처럼 꺼내 읽기 좋은 책이라 많이 추천하고 싶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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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게임 취급 설명서 - 게임에 대해 궁금하지만 게이머들은 답해줄 수 없는 것들
최태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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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를 쓴 최태섭 작가의 신작. 게임 산업이라 하면 규제, 노동자 이슈와 여혐 문제 등 여러 개의 키워드가 한 번에 떠오른다. 게임이 진짜 문제일까? (그럴 리가 없지.)



게임을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곰곰히 되짚어보니 나도 게임을 굉장히 좋아했다.






한때 컴퓨터에 기본으로 깔려있던 고인돌을 좋아했으며 (고인물 아님)



친구와 크레이지아케이드를 하던 시절도 있었고, 바람의 나라에서 열심히 도토리를 줍던 때도 있었다. 티끌 모아 비싼 갑옷 사놓고 레벨이 안되어서 못 입고 있었는데, 길드원에서 배신 당하고(킬 당함) 갑옷을 뺏긴 뒤로 온라인 게임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다행인가.)



한때 CD 게임이 유행할 땐 쥬타이쿤과 롤러코스터 타이쿤도 했었고, 쇼미더머니의 스펠링을 외우게 만든 스타크래프트나 양육과는 전혀 관계 없는 육성 시뮬레이션 프린세스 메이커도 좋아했다.



휴대폰이 생긴 뒤로는 각종 타이쿤의 제왕이 되었다. 생과일 타이쿤, 붕어빵 타이쿤, 짜요짜요(젖소 키워서 우유파는 타이쿤), 편의점 타이쿤 등. 폰 게임으로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는 것 같다. (왜 게임에서도 프롤레타리아를 벗어나지 못한 건지.)



꾸준히 오락실의 하우스 오브 데드를 좋아했는데(좀비 총살 게임), 고등학교 때는 뒤늦게 펌프에 빠져서 담임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야자 시간에 오락실에 간 적도 있었다.


그리고 폰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에 영혼을 팔았다. 지인들이랑 길드까지 만들어서 약 3년을 열심히 키웠는데, 무과금 유저는 손가락 관절을 갈아넣어야 키울 수 있는 구조로 바뀌어서 지금은 하지 않고 있다. 약탈하는 것도 재밌고, 일본 길드랑 붙을 때마다 질 수 없다며 다들 진심이 되는 것도 재밌었는데...


최근에는 동생이 산 닌텐도로 동물의 숲이나 낚시 게임 같은 걸 하기도 했다. 아, 사실 나는 엄청난 게임쟁이었구나...?!






PC, 콘솔, 스마트폰 등 다양한 기기를 거쳐 게임을 즐기기는 했지만 정작 유명한 롤이나 오버워치 같은 게임은 해본 적이 없다.


'모두'를 위한 게임 설명서라는 제목에 걸맞게 게임 산업과, 시장, 게이머, 노동자 등 게임과 연관된 다양한 키워드를 설명하는데, 게임학개론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전공은 아니고 교양 수업 같은. 게임 산업에 대해 전반적으로 훑기에 좋았다. 전혀 게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4장 때문이었다. 본격적으로 게임과 얽힌 이슈를 풀어주는 장이기도 하고 게임에 갖고 있는 오해를 풀어주는 장이기도 하다.


성우가 Girls Do not need a prince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그가 메갈리아(나는 아직도 이 집단의 정체를 모르겠다. 너무 온갖 이슈에 소환되는데 실체를 본 적이 없어서 관념 속의 커뮤니티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라며 남성 유저들이 항의한 일이 있었다. 결국 그 성우의 분량은 삭제됐다. 소설 <1984> 속 세상도 아니고 21세기에 사상 검증이라니, 당시에도 믿을 수 없었지만 지금도 아리송하다.


'혜지'라는 단어는 특정 여성의 이름이 아니었다. 너 왜 이렇게 여자 같냐, 라는 말을 보다 구체적이고 모욕적으로 쓰기 위해 채택한 이름이었다는 게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게임하는 '일부' 남성이 문제라는 건가, 게임업계가 문제인가? 싶었는데, 잘못된 질문이었다.



이것이 다 게임 탓이라는 것은 사실 앞뒤가 바뀐 말이다. 오히려 세상이 게임에 반영되고 있다. 현실의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현실의 스트레스와 분노가, 현실의 능력주의와 약강강약의 비열함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는 사이버 세상 속에서도 그 지긋지긋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오늘날 게임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게임에는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이미 그런 잠재력을 보여준 많은 게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게임에 세상이 반영되고 있다는 당연한 말이 새삼스럽게 소름 끼쳤다. 범죄에도 세상이 반영된다. '묻지마 살인 사건'이라고 불리는 여성혐오 범죄가 얼마나 많았던가. 게임 속 세상만 정의로울 까닭이 없지. 오히려 가상의 세계이기에 더 필터링 없는 생각들이 오고 간다고 생각하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조금 암담하기도 했다.


책 도입부에서 게임과 문화로서의 게임에 대해 정의 내리면서 게임이라는 장르를 설명하는데, 게임은 현실과 마찬가지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영화 같은 영상매체에서도 시도되지만 게임처럼 높은 상호작용을 일으키긴 어렵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게임을 하면서 현실과 똑같이 공과금을 내고 9 to 6로 출퇴근을 하지는 않는다. 게이머들은 상호작용과 더불어 '재미'라는 목적을 공유하는데, 지금이 그 재미의 정의를 다시 내릴 때가 아닌가 싶었다.


게임은 게임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된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1기 하니포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게이머를 소수라고 칭하는 것은 여러모로 멋쩍은 일이다. 그리고 게이머라는 말만으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도 어렵다. 결국 어떤 게임을 어떻게 즐기고 있는지를 알아야 우리는 그가 어떤 게이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딱히 아니다.

여전히 젊은 남성이 가장 많지만 여성도, 중장년도 적지 않다. 이 조사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게이머는 장애인, 혼혈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빈곤층일 수도 있다. 게임을 하면서 호구조사를 할 일은 거의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게이머가 어떤 사람일 거라고 쉽게 넘겨짚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게이머는 그야말로 ‘아무나‘이기 때문이다. - P115

전 세계의 언론과 종교계, 교육계, 학부모에게 게임은 아이를 망치는 주적처럼 인식되어왔다.

여기에는 게임이 갖고 있던 편리한 특성들이 있다. 역사가 짧았던 게임은 젊은 층에서 주로 즐기고 기성세대들은 그게 뭔지 잘 모르는 ‘세대구분적인 취미‘였기 때문이다. 잘 모르기 때문에 쉽게 악마화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 혐오를 연구하는 많은 연구자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다. - P182

여성 캐릭터들이 모조리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끈이나 천 쪼가리 같은 것을 옷 대신 걸치고 등장하는 게임에 대해서도 ‘네가 예민한 것일 뿐‘이라고 퉁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일까? 또 할리우드 영화가 백인이 아닌 사람들을 비열한 방식으로 정형화하는 것이 문제라면, 게임에서 묘사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P184

남초커뮤니티의 일부 이용자들은 "허버허버가 특별히 남혐단어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여초에서도 ‘보이루‘를 가지고 똑같이 우겼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식의 주장을 펴기도 했다. - P218

젊은 (이성애자) 여성은 이성애자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다. 게다가 게임하는 여자는 특별한 존재다. 앞서 말했듯이 여성이란 일반적으로 게임을 못마땅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와 같은) 게임을 하는 여성이라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나를 이해해줄 가능성이 있다. 게임하는 여성은 이렇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유혹적인, 그리고 유혹하는 존재가 된다. 동시에 이것은 여성의 게임실력을 의심하는 새로운 근거가 된다. 여성은 ‘남자친구‘를 따라서 게임을 시작했거나 아니면 자신을 떠받들어주는 ‘보빨러‘들에게 업혀서 쉽게 등급을 올렸을 것이므로 그들은 게임을 잘 할 리 없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여성의 입장이 단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P223

<오버워치>와는 다르게 음성채팅이 존재하지 않는 <리그 오브 레전드>는 다른 사람의 성별을 식별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하지만 인터뷰에 참여한 남성 게이머들은 자신들이 ‘혜지‘를 식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사용하는 챔피언의 외형이나 성별, 움직임과 전투 방식에서의 ‘여성스러운‘ 플레이 스타일 등이 단서라고 주장했다. (중략) 이는 감식안이 별 의미가 없음을 입증하는 것은 물론이고, ‘혜지‘가 게임을 못하는 서포터를 ‘여성화‘해 모욕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 여성게이머에 대한 모욕을 넘어서, 게임을 빌미로 남성들이 여성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를 하등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고백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 P229

이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함의는 여성 게이머에 대한 그 수많은 말들은 모두 실제의 여성 게이머가 아니라 그저 남성 게이머들이 믿고 싶은 것을 떠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리는 없겠지만, 이렇게 지칭하는 단어까지 만들어내면서 떠들어댈 만큼 존재하는지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아마도 현실에서 ‘혜지‘보다는 훨씬 많이 존재할 <롤>을 잘하는 동성 친구의 캐리를 받아 티어를 올리는 남성 게이머들을 지칭하는 단어는 없으며, 이들은 친구를 잘 만났다는 우연 때문에 높은 티어를 얻었음에도 공정성을 해치는 이들로 지목 당하지 않았다. - P231

이것이 다 게임 탓이라는 것은 사실 앞뒤가 바뀐 말이다. 오히려 세상이 게임에 반영되고 있다. 현실의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현실의 스트레스와 분노가, 현실의 능력주의와 약강강약의 비열함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다는 사이버 세상 속에서도 그 지긋지긋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오늘날 게임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게임에는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이미 그런 잠재력을 보여준 많은 게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 P235

몇 겹의 아이러니 속에서 산업이자, 예술이자, 놀이이자, 매체로서의 게임이 존재한다. 게임은 우리에게 현실을 버텨낼 수 있는 즐거움과,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을 준다. 예기치 못한 인연과, 작은 승리들의 기쁨도 준다. 하지만 이것을 마음 편히 즐기려면 게임이 게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게임이 몰입의 핑계를 대면서 은근슬쩍 사람들의 삶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고, 재미라는 핑계를 대면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인류의 긴급한 퀘스트에 역행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중략)

게임은 게임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된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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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밤의 애도 - 고인을 온전히 품고 내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살 사별자들의 여섯 번의 애도 모임
고선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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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헤어진다는 의미를 깨닫고 이별에 천착하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죽음의 이미지를 꿈으로 꾸곤 했다. 예를 들면, 아주 어렵게 상대방과 통화를 하게 됐는데 내가 아무리 외쳐도 상대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나만 울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 꿈이다. 죽음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상대와 닿을 수 없게 만들었고, 그 사실은 절망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아무 것도 물을 수 없다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인 줄 몰랐다. 나 혼자 남겨져 절대 알 수 없는 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지인의 부고를 듣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평소 지병도 없고, 밝고 유쾌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기에 같이 부고 알림을 받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피싱 문자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러다 나중에 기사로 죽음의 전말을 알게 됐다. 그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죽기 직전 약 30분 간의 행적을 글로 옮긴 기사였는데 기사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매일 뉴스를 보면서 보았던 안타까움 죽음과 그 죽음이 지인의 것이라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었고, 그가 뉴스'거리'가 되었다는 충격에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그 뒤로는 자살이나 사고사 기사를 접하면 멍하니 행간을 읽는 버릇이 생겼다. 죽음을 가리키는 날짜와 정확한 시간, 죽음의 방식이나 원인을 추측하는 건조한 글로는 절대 담아낼 수 없는 가족이나 지인들의 충격을 잠시나마 애도하는 마음으로.





계속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




<여섯 밤의 애도>는 자살 사별자 모임에서 사별자 다섯 명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자살 사별자 중에는 애도를 부정 당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들은 바로 퀴어 커플이었다. 장례식장에서 파트너의 원가족에게 '친구 주제에' '네가 뭔데'라는 식의 말을 듣기도 하고,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사회로부터 파트너를 애도할 충분한 시간을 받아내지도 못한다. 심지어 자살 사별자 모임에 와서도 애인, 배우자를 의미하는 색깔의 팔찌가 아닌 지인이나 친구를 의미하는 색깔의 팔찌를 찼다는 구절에서 훌쩍이고 말았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형태의 이별이든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보장하도록 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자살 사별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내가 아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조심스럽다. 애도의 과정에서 무신경한 말로 상처입고 상처주고, 원망하고 원망받았던 적이 있어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내게 상처준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자살 사별자들은 그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결국 자신이 그 사람의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가며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누군가의 어둠을 온전히 감당할 필요도, 할 수도 없다는 것. 고선규 박사는 그래서 애도를 '치열한 노동'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자살 생존자들을 위한 조언이 몇 가지 있었는데, 일부 옮겨본다.




8. 한 번에 한 순간씩, 하루씩 넘기며 살아가세요.



12. 선택은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13. 도중에 좌절 또한 찾아올 것입니다. 감정이 밀물과 같이 들이닥친다면, 당신은 슬픔의 잔여물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24. 당신이 가진 질문, 분노, 죄책감, 그리고 다른 모든 감정을 보내줄 수 있을 때까지 닳도록 곱씹고 또 곱씹어도 됩니다. 감정을 보내주는 것은 고인을 잊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이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문장이 자꾸 눈에 밟힌다. 당연한 사실도 글로 읽으니 새삼스럽다.


감정을 보내주는 것은 고인을 잊는 것이 아니다. 이별은 평생이 걸려도 둘레를 다 걸어볼 수 없는 거대한 빙하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함께 즐거웠던 순간마저 나의 무신경함을 탓하며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어차피 이별을 알기 전으로 돌아가긴 글렀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1기 하니포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살 사별자들을 위로한다며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라는 말을 한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사람이 자살 사별자에게 하는 쉽고 편한 위로다. 자살은 사별자가 고인이 죽음을 향해 갔던 그 길을 고장난 기계처럼 무한정 구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이해할까 말까 한 일이다.

사별 직후 자살 사별자들은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슬픔은 중요한 것을 상실했거나 목표를 잃어버리거나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다. 슬픔은 다른 사람에게 나의 필요를 전달하고 사랑받고 연결되기를 원하는 감정이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살 사별자들은 ‘슬픔‘이라는 당연한 감정에 도달하여 온전하게 슬퍼할 수 있을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별한 지 3개월 이내에 애도 상담에 찾아온 내담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했고, 따라서 무엇을 잃었는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어떤 사람이 목숨을 끊으려고 결심한다면, 전적으로 설득당해 난공불락으로 닫힌 세상으로 그가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곳에서는 모든 세세한 것들이 맞아떨어지고 모든 일이 그의 결정을 강화해준다. 이러한 죽음은 모두 각각 그 나름의 내적 논리와 다시는 없을 절망을 담고 있다.

우리가 매일 고통과 상실을 마주해야 하는데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마치 물속에 들어갔는데 젖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한다.

떠난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하고 그 사람을 우리 곁에 초대해 다시 기억하는 것이 "리멤버링"이며 애도는 리멤버링의 과정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듯 세상은 묘지 위에 있고, 죽은 자는 산 자의 틈 속에서 영원히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애써 지우려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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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 극단주의는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는가
율리아 에브너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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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 저자나 감독을 볼 때마다 놀라는 짓을 그만두고 싶다. 이번이 마지막이길.





91년생 정치학자 율리아 에브너가 서문에 '이 책의 목표는 디지털 극단주의 운동의 사회적 차원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밝혔듯이 저자 본인이 극단주의 집단에 잠입 취재 수기를 책으로 엮었다.




언시를 준비할 때, 욕하기 전에 그 집단을 관찰해 보라는 말을 듣고 극우로 유명한 커뮤니티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더라, 하는 말과 눈 앞에서 (물론 모니터 너머였지만)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건 너무 다른 일이었다. 한 페이지를 다 살펴보지도 못하고 토기를 느끼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일단 너무 상스러운 말이 가득해서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런데 실물로 그들을 마주한다니. 너무 역겹지 않을까?






하지만 책에 나오는 극단주의 일원들은 겉으로는 모두 멀쩡해보인다. 그러니까 (보진 않았지만) <조커>처럼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거나 음침해보이거나 햇볕을 보면 살갗이 타는 은둔자 스타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1장에서 소개된 '세대정체성'은 젊고 교육 수준이 높고(낮은 사람도 받지만 그들이 주가 되면 안된다고 말한다), 내부에서 따로 교양 교육을 시킬 정도로 철저하다.



그런 것 치고는 이들은 갖고 있는 공포는 순진하게 느껴지는데, '백인 말살' 정책이 행해진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낙태와 동성애를 척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음...




이들의 도발적 퍼포먼스를 담은 게시물과 트윗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 핵심 소셜미디어의 유명인사들에게 공유되었다. 이게 바로 '통제된 도발'이다. 이렇게 되면 전통적인 미디어 매체는 이들의 활동을 보도하며 이들에게 플랫폼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




전문 용어로 어그로?!



이들의 목표는 분열을 초래하는 콘텐츠를 퍼뜨려 중립을 취하는 모든 사람이 어느 한쪽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전략적 양극화'다.





책에 나오는 극단주의 사례는 (당연하지만) 백인 중심이라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극우들이 '전세계가 백인을 주목해!' 마인드가 너무 강해서 뭔가 전의를 상실하게 됨. Ok Bye...



그럼에도 백인 유모어에 자존심 상하게 웃긴 지점이 있었는데...




'백인' 애인을 만드는 데이팅 앱 사이트 이름 중 하나인 '트럼프싱글즈'. "데이트를 다시 위대하게"라니. 웃다 울었다. 자존심 상해.







히틀러랑 니체가 가상의 대화에서 싸우는 대목. 가상의 히틀러 나를 피식하게 만들다니. 진짜 자존심 상하네.





네오나치들이 뉴발란스 신는다는 것도 너무 웃겼다. (웃기면 안되는데) 쓸데 없는 기호에 혼자 의미부여하고 심각해지는 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구나.






학부시절 전국 대학생들을 데리고 하는 토론 엠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무슨 대학 지부라는 단체였고, 어디서 그 활동을 알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참가비가 거의 없다는 점이 계속 의심스러웠다. 콘도는 나쁘지 않았고, 식사도 잘 나왔고 간식과 밤에 마실 술도 넉넉했다. (물론 저는 술은 못 마시고 무서운 얘기하다가 귀 막고 엉엉 울어서 방으로 쫓겨났읍니다) 연사로는 큰 일간지의 논설위원이 왔었는데, 임의로 나눈 조 활동에서 우리에게 당시 이슈가 되던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결과를 제출하라고 했다.



진지하게 토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은 의문을 제기했다. 활동을 뒷받침하는 돈의 출처가 어디냐는 거다. 이건 논의할 거리가 아니라는 말도 나왔다. 나는 옆에 앉은 언니랑 필담으로 이상하다는 말을 몇 마디 주고 받았다. 조장은 어떤 의견을 내든 상관 없다고 했고 순수한 단체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이상해진 분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연사의 이름과 그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일간에서 퍼뜨리는 온난화는 낭설이라며, 컵에 물을 가득 담아보면 알겠지만 표면 장력이 생겨 물이 넘치지 않는다고 했다. 빙하가 녹아도 대지가 잠기지 않는 근거로 그는 표면장력을 들었다. 이렇게 세세히 기억하는 이유는 그걸 필기해 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여전히 칼럼을 쓰고 있다니.



돌아와서도 그 단체의 정체가 종종 궁금했는데, 여전히 모르겠고 지금은 어느 커뮤니티에 잠입해 활동하지 않을까 싶어졌다.









친구 수가 많을수록 접하는 콘텐츠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페이스북 모순은 확증편향이라는 말로 온갖 플랫폼에 갖다 붙일 수 있다. 아주 개인적인 통계이지만 어떤 콘텐츠를 접하는 시간이 길수록 더 편향적이 되는 것도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만나기 피곤해졌다. 대체 뭘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는 늘 있는 일이다.



사실 집단주의에 대한 분석이 궁금해서 선택한 책이었는데, 다양한 극단주의 집단에 대한 사례가 더 많고 내가 궁금했던 부분은 거의 마지막장에 서술돼 있어서 분량이 조금 아쉬웠다.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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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 - 시대를 앞선 발상으로 아르누보 예술을 이끈 선구자의 생애와 작품
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지음, 김경애 옮김 / 씨네21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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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예술의 전당 알폰스 무하 전시에 다녀왔다. 처음 봤을 때 무하의 그림이 타로 카드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로보다 세로가 긴 프레임에 어딘가 온화한 얼굴의 여성, 그리고 사방에 화려한 장식이 더해지면 딱 타로 카드가 아닌가.


게다가 무하의 그림은 한때 카드캡터 체리 세계관에 진심이었던 나를 홀리고 말았다.


당연함. 카드캡터 체리도 타로카드도 전부 무하의 그림을 오마주한 거임.



예술가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겠지만, '무하 스타일'을 탄생시킬만큼 돌풍을 일으켰던 그의 그림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2013년 한국 전시가 아시아 최초 무하 전시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이후에 종종 무하의 전시가 열리는 걸 보면 무하의 그림은 꾸준히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모양이다.


요즘 하도 방법서가 많이 나와서 그런지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라는 제목에서 이 책도 무하의 성공 가도에 어떤 비법이 있었나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게 알폰스 무하 첫 전시는 그림은 예쁜데 어딘가 심심한 작가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무하가 삽화 위주로 작업했다는 걸 몰라서 그림 속의 사람들과 자꾸 눈이 마주치는 것과 풍경이나 여백 없이 인물로 꽉 들어찬 그림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14~15세기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궁정 미술가인 줄), 19~20세기를 살다 갔고 무하의 아들이 1991년까지 살았으니 거의 현대 미술가가 아닌가? (아님)


미술사적으로 시대 구분을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느끼기에 20세기 작가들은 자신들이 겪은 차별이나 전쟁의 공포를 그림에 반복되는 이미지로 녹여냈다. 멀리서 보더라도 어둠과 우울의 기운이 팍팍 뿜어져 나오도록.


무하의 그림 중엔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가 평탄하고 부유한 삶을 살았을 거라 멋대로 생각했다. (광고 삽화인데 어둡고 우울해 보이면 큰일이겠지...)


이 책은 마치 위인 전기처럼 무하의 생을 처음부터 쭉 따라가며 내 편견을 깨뜨렸다.


특히 청년 무하의 삶이 굉장히 와닿았다.



어쩐지 짠한 청년 무하

가족이 음식 꾸러미를 보내줄 때도 있었지만 두 청년은 거리 공연으로 생계를 이었다. 무하의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무일푼의 삶을 살아가는 무하가 브르노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몹시 화가 났다.


아저씨 나중에 그 아들 떼돈 버니까 그냥 두세요...


무하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사무실에서 하는 일, 반복되는 업무, 법원 사건을 처리하는 서류작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무슨 일을 해야 돈을 벌고 경력을 쌓을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역시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해.


무하 고민 = 내 고민 = 이 시대 청년들 고민


무하가 공무원 일에 만족했다면

저의 카드캡터 체리X지수와 도진X청명 그리고 샤오랑은 없었겠지요.


이미 퇴사해서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별세했지만 그래도

무하의 퇴사를 응원해!


무하는 어릴 때부터 그림과 음악에 두각을 보였는데,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하지만 탈락한다.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것과

내 재능을 발휘하며 사는 건 전혀 상관이 없다는 행간을 읽어보고. 




무대 화가 일을 하며 이제 조금 돈을 보나 싶었는데 또 다시 사건 발생


1881년 12월 빈의 링 시어터에서 일어난 참혹한 화재로 5백 명이 사망하고 극장은 폐허가 되었다. 회사는 직원의 수를 줄여야 했고, 가장 젊은 나이였던 무하가 제일 먼저 해고되었다.

어리면 돈을 안 벌어도 되나요...!



무하는 재능을 알아본 이들에게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후원도 넘나리 순탄치 않았던 거임


망한 후원썰1

처음에는 부유한 후견인의 도움을 받았지만, 후원이 끊어지자 렌틸콩 몇 알만으로 버티면서 매서운 추위와 허름한 숙소를 감내해야 했다.


망한 후원썰 2


1889년 1월 무하에게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왔다. 백작은 무하에게 매달 2백 프랑의 후원금을 즉시 중단하겠다고 통보했다. 너그러운 후원자의 도움으로 파리에 집을 얻고 일주일의 엿새를 미술 공부에 전념하던 무하는 이 가혹하기만 한 환경의 변화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두번째 후원자는 무하가 그림은 안 그리고 공부만 하니까

당근보다 채찍을 주는 마음으로 후원을 끊은 것 같다.


알고보니 일잘러



파리에서 거둔 엄청난 성공으로 무하는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작품 수요를 맞추기 위해 조수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었다. 무하는 '진지한' 화가로 거듭나기 위해 1906년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무하는 연극계에서 초상화 의뢰를 받길 희망했고, 유명한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하고자 하는 부유한 고객을 찾으려 했다. 그는 훌륭한 화가였지만 삽화가로 너무 널리 알려진 나머지 순수미술을 할 기회를 얻기 힘들었다.


무하의 그림이 얼마나 사랑 받았는지,

그가 그린 극장 포스터는 붙여놓으면 사람들이 전부 떼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포스터를 대체 왜 떼어갔을까 싶다가도

요즘 매장에 놓인 유명인 등신대나 포스터를 가져가는 것처럼

무하의 포스터를 가져갔다고 생각하니 너무 귀엽다.

(그거 잘 보관했다가 물려주면 거의 코인 급일텐데...)



무하의 능력 중에 가장 부러운 능력


자신의 디자인을 의뢰인의 요구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 능력

현대 사회인은 이것을 초능력이라고 불러요...


무하의 민족 정체성


무하는 체코에서 태어나 7살 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을 보고 자랐다. 프랑스로 가서 성공했지만 유년기에 보고 겪은 전쟁의 이미지가 평생 남아 있었고 그는 자신이 슬라브 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던 듯 하다.


나는 내 작품이 상류층 인사들의 응접실을 장식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화관과 그림이 있는 전설적 장면이 가득한 책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내 동포들의 것을 사악하게 도용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하면서 내 생의 남은 시간 동안에는 오직 내 나라를 위한 작품을 만들 것을 엄숙히 다짐한다.


다짐이 바로 현실로 이어지진 못했다. 프랑스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둔 무하는 체코인보다 프랑스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 작품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1939년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했을 때 무하는 프라하에 살며 유대인 공동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 때문에 심문을 받았고, 쇠약해진 몸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무하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른다면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책을 읽으며 그림처럼 아름답기만 했을 것 같은 무하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게 되었다. 여느 삶과 마찬가지로 굴곡이 있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번갈아 찾아오지만 크게 꺾이거나 휘둘리지 않고 꾸준히 작업을 이어나갔다는 게 존경스럽다.


부와 명성을 모두 가진 무하라면 전쟁이나 세상의 갈등과 등 돌리고 말년을 편하게 보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편한 삶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그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무하 전시가 열린다면 말년의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싶다.

그가 평생 그리고 싶었던 작품,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작품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무하의 전시에 가보면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크기의 그림들이 전시 되어 있는데 책에서는 삽화가 아주 큼직큼직해서 확실히 보는 재미가 있다. 대충 그림만 휘리릭 넘겨도 눈호강. 


관객 없이 여유로운 전시장을 이곳저곳 누비는 기분이었다. 이 시국에 가장 안전하고 황홀한 전시가 아닐까.







*한겨레출판 서평단 하니포터 1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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