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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선택 (크리스마스 패키징 에디션)
이동원 지음 / 라곰 / 2024년 12월
평점 :
찬란한 선택
‘선택’이란 말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조합하여 소설을 써본다면?
바로 이 책 <찬란한 선택>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맨 앞장에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일부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명운(150쪽)은 직업이 소설가다. 문학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고 거의 1-2년마다 장편소설을 한 편씩 펴내지만, 아직 그리 유명한 소설가는 아닌 소설가다.
소설가 명운의 신상을 밝히자면, 아직 미혼인데 연인이 있다. 연인 연우와는 10년 정도 만나 사귀는 사이다. 연우는 패션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사건이 일어났다.
마동석처럼 생긴(그래서 마동석이라 부른다, 물론 실제 영화배우 마동석과는 관련이 없다)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가 주인공 명운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당신이 가지 않은 인생의 길을 가보게 해주면 어때요?” (22쪽)
그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그 시를 언급하면서,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보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운은 그런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게 된다.
그런 길을 가면서, 무려, 장가도 가고 딸도 낳고 아내는 바람을 피우기까지 하는 인생을 살아본다.
시간을 종횡무진 횡단하면서 살아보는 것이다,
시작 지점이 미혼이었으니, 다채로운 인생 경험을 마동석 때문에 살아보는 것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하여
소설의 시작점에서 주인공은 미혼이다. 연인은 있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결혼에 대해 말할 정도도 아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연인 연우에게 결혼하자고 한다. 청혼한다.
그러니 시작과 끝나는 부분, 그 사이는 가지않은 길이 아니라, 가보려고 하던 길이다.
미리 여러 경로의 길을 보여주면서 과연 어떤 길을 가겠느냐고, 선택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간 군데 군데 ‘선택’에 대한 여러 상념들이 등장한다.
내가 택한 길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그 길을 걷는 과정에서 겪게 될 어려움은 경험해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안정적인 삶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잘 풀리지 않는다면 정말 비참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이 길을 가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면 나는 반드시 후회 할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갈 길을 정했다. 결코 후회 따위는 남기지 않으리라,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42쪽)
인간은 항상 자신이 선택하고 남의 탓을 한다. (53쪽)
내가 어제 ‘가지 않은 길’이 ‘너무’ 좋아 보였다. 새삼 삶은 운명에 달린 것도, 우연에 지배당하는 것도 아니며 선택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171쪽)
가지 않은 길을 가보면 나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다를 것은 없었다. 아마 또 다른 길을 간다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95쪽)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드라마는 갈등이다. 이는 작법의 기본이다. 갈등을 투박하게 설명하자면 주인공이 뭔가를 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주인공은 고난을 거치며 나아간다. 그러다 주인공이 목표를 달성하면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이다. (71쪽)
갈등이 조성되지 않으면 이야기는 긴장감을 주지 못한다. 시작하자마자 오해가 풀리고 두 시간 내내 사랑만 속삭인다면, 테러범이라고 나온 악당들이 주인공의 주먹 한 방에 나가 떨어진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72쪽)
그래서, 저자가 작품 속에서 갈등이 이야기의 기본이라 하기에, 갈등이 여기 나올 것이다.
그 갈등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소될 것인가? 기대가 된다.
‘너무’라는 말의 용법에 대하여
“그니까...... 그게... 설명을 잘 못하겠는데 그냥 너무 좋아요. 정말 너무너무......”
‘너무’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는 표현이란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루희가 내가 쓴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너무 잘 전달이 되었으니까. (170쪽)
저자는 ‘너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는 표현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국립국어원은 지난 (2015년 6월) 13일 올라온 ‘너무나랑 정말로 차이가 뭡니까’란 질문에는 “‘너무나’는 ‘너무’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로, ‘너무나 힘들다/너무나 밉다’와 같이 씁니다. ‘너무’는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주로 쓰입니다. 따라서 ‘너무나 고맙다.’라는 표현 대신 ‘정말 고맙다./정말로 고맙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너무’의 뜻을 변경한 뒤인 (2015년 6월) 18일에는 같은 질문에 ‘덧붙임’이란 형식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로 뜻풀이되어 긍정적인 서술어와 어울려 쓸 수 없었던 ‘너무’가, 현실 쓰임의 변화에 따라 2015년 6월 15일 자로 뜻풀이가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로 변경되어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처럼 긍정적인 서술어와도 어울려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수정했다.] (인터넷에서 인용)
다시, 이 책은?
이 책 제목이 <찬란한 선택>이니, 선택을 잘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한 선택은 어떨까? 제목처럼 찬란한 선택은 과연 어떤 선택일까? 그게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닐까.
이 책은 작가의 다짐이다. 작가가 글을 쓰겠다고 소설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천하에 알리는 것이다. 그 선택이 찬란한 선택이라고 저자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후회하고 있습니까?”
내가 고개를 들어 질문을 던진 마동석을 돌아보았다.
“작가님이 앞으로도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나이가 들어 죽고 나서야 사람들이 작가님의 글을 알아봐준다면, 그리고 이런 미래가 찾아올 것을 알고서 처음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도 다시 작가의 길을 걷겠습니까?” (43쪽)
이에 대한 주인공의 답변은, 아니 저자의 답변은?
“그런데 말이야, 그래도 나는 글이 쓰고 싶더라, 속으로 외쳤어, 상관없어! 아무도 보지 않아도 나는 글을 쓰고 싶어!”(316쪽)
그런 다짐이 듣기 좋다. 설령 작가가 쓴 책을 아무도 읽지 않는다해도 글을 쓰겠다는 그 결기가 고맙다. 그런 결기를 만나니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독자로서 기분이 좋다. 나같은 독자가 적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