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명작 단편소설 모음집
알퐁스 도데 지음, 김이랑 옮김, 최경락 그림 / 시간과공간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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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했다.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이나 마찬가지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전 단편소설집을 읽은 것 같다. 20편의 세계명작 단편소설이 담긴 이 책에는 제목만 봐도 익숙한 작품이 있는 반면, 읽어보지 못한 낯선 작품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중에는 큰 바위 얼굴이나 별처럼 교과서에서 만난 작품들도 있고, 베니스의 상인이나 크리스마스 선물, 마지막 잎새처럼 읽었던 기억이 있는 작품도 있다. 마지막 수업과 귀여운 여인처럼 제목은 익숙하지만 내용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 작품도 있고, 얼마 전 읽었던 변신, 가난한 사람들 같은 작품들도 있었다. 그리고 고향과 밀회, 비곗덩어리처럼 낯선 작품도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작품들은 다시 한번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고, 낯선 작품들은 첫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책 속에 담긴 저자의 이름이었다. 다행이라면, 낯선 이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단편소설이라고 하지만, 20편의 길이는 제각각이었다. 가장 긴 작품은 제일 마지막에 있던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었다.

20편의 작품 모두 자신만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지만, 그중 기억에 남는 몇 작품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과 이반 투르게네프의 밀회 그리고 루쉰의 고향이다. 우선 알퐁스 도데라는 이름은 두 번째 담긴 "별" 때문에 익숙했다. 교과서를 통해서도 만났지만, 한참 한글 자판 연습을 많이 했던 작품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참 이상한 게 마지막 수업이라는 제목을 읽으며 떠올린 작품은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이유는 모르겠다.) 주인공인 프란츠는 오늘도 학교에 지각했다. 아멜 선생님으로부터 혼날 생각에 학교로 향하는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프란츠의 예상과 달리 아멜 선생님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넸다.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시상식 등의 자리에서만 입는 멋진 옷을 입고 있는 선생님과 교실 뒤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독일에 의해 오늘까지만 프랑스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됨으로 아멜 선생님의 수업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프란츠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그리고 프랑스어 수업이 어느 때보다 재미있고 쉽게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 수업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반 투르게네프의 밀회는 아쿨리나와 빅토르 알렉산드리치의 만남을 우연히 지켜보게 된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옮긴 것이다. 연인 사이인 둘은 이별을 앞두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빅토르 알렌산드리치가 일 때문에 떠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뭔가 이상하다. 이별을 앞두고 서로를 그리워하기 보다는, 빅토르 알렉산드리치가 아쿨리나를 무시하는 모습이 가득하다. 그런 빅토르의 행동과 말에 아쿨리나는 마음이 상한다. 하지만 떠나는 연인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었던 그녀는 그를 채근하지 않는다. 아쉬움 없이 일방적으로 자리를 떠나는 빅토르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아쿨리나. 그런 아쿨리나가 안타까웠던 나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만,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아쿨리나는 놀라서 도망을 친다.

루신의 고향은 얼마 전 루쉰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안면을 튼 작품이었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부유한 형편의 나와 동갑내기 룬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룬투는 어린시절 같이 놀았던 동네의 친구였다. 30년 가까이 흐른 후 다시 고향을 찾은 나는 어머니로부터 룬투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내심 옛날의 추억을 곱씹으며 이야기를 나눌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나를 만난 룬투는 나를 나리라고 부른다. 나는 룬투가 예전처럼 불러주길 원했지만, 룬투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룬투 곁에는 룬투를 꼭 닮은 아이가 서 있다. 과거와 달리 이들 사이에는 큰 벽이 있었다. 바로 돈이라는 벽 말이다. 룬투를 보며 나는 왠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리운 고향에 왔지만, 예전과는 다른 모습에 실망했듯이 룬투와의 옛날을 기억하고 있지만 너무 다른 삶을 살아온 둘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대비된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세계 명작 20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마치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기분이다. 특히 루쉰의 고향을 만날 수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기회가 된다면 세계명작 단편소설 모음집2도 나오면 좋겠다. 아직도 만나지 못한 명작 단편소설이 무척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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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속절없이 빠져드는 화학전쟁사 -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화학 이야기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20
곽재식.김민영 지음, 김지혜 북디자이너 / 21세기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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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알았는데, 화학 박사이자 현재는 교수가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곽재식. 일부러 그의 책을 찾아 읽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책에 담긴 화학적 이야기는 단순히 픽션은 아닐 거라는 기대감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읽은 그의 책은 소설보다는 논픽션적인 성격의 책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 역시 그의 전공을 십분 살린 화학을 기반으로 한 전쟁에 관한 역사서라고 볼 수 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시작은 화학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분명히 제목에는 책 속에 담긴 전쟁사의 기반이 화학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뭔가 아리송하다. 왜일까? 왜 저자는 제목에 대놓고 화학을 써놓고 막상 책의 중반부 정도 되어서야 화학을 슬그머니 꺼내는 걸까? 개인적인 뇌피셜이라면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과 시대적 상황 등을 통해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와 처음부터 화학이 등장하면 일반적인 독자들(과학과 담쌓고 사는 독자 포함)이 과민반응으로 책을 덮을까 우려했던 건 아닐까?

말을 돌려서 했지만, 우리가 아는 이야기 혹은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부터 해서 독자의 관심을 끌고 가기에 성공한 것 같다. 마치 소설처럼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데?'나 '도대체 화학은 어디에 나오는 거야?'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시작해서 후삼국, 조선 전기에서 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전쟁사 속에 담겨있는 화학을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화학의 맛을 발견하게 만든다. 가령 시작이 되는 이야기는 포차(포장마차 아님) 이야기다. 포차 하면 자연스레 우리는 포장마차를 떠올리는데, 삼국시대의 포차는 바로 포를 쏘는 기계를 뜻했다. 그래서 지금과 달리 그 시대에 포차에 가자는 뜻은 돌 날리는 무기가 있는 군부대에 입대하자는 의미를 지녔을 거라고 말한다. 특히 첫 장에서는 화약이 발명되기 이전의 시대였으므로 무기로 사용했던 것은 바로 돌! 투석기다. 삼국시대에 종종 등장한 포차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만나볼 수 있다. 나마라는 벼슬을 하던 신득이라는 사람이 포노를 만들어 바쳤다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포는 돌을 던지는 기계를, 노는 쇠니라고 부르는 장치로 화살을 쏘는 데 도움을 주는 기계장치를 말한다. 아쉽게도 신득과 포노에 대한 기록은 이게 전부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삼국을 통일한 김춘추 그리고 김유신 이야기로 이어진다.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한산성(현재 광진구 아차산 지역)을 공격한다. 당시 신라의 수도는 경주였는데, 왜 그는 한산성을 공격한 것일까? 당시 신라는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를 멸망시켰고, 다음 차례는 고구려였다. 바로 뇌음신은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기 위해 뱃길로 이동하는 곳을 막기 위해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기록에 의하면 뇌음신의 공격은 상당한 피해를 입혔지만, 장마가 심해지고 천둥, 번개 등이 너무 잦아서 후퇴했다는 기록이 있다. 드디어 화학이 등장할 차례다. 앞에서 투석기(포차)를 설명했는데, 이 투석기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는 바로 밧줄이다. 밧줄의 재료로 사용되는 것은 바로 새끼줄인데, 이 새끼줄은 지푸라기로 만들었다. 지푸라기는 알다시피 벼의 줄기인데, 지푸라기에도 포도당이 있다. 단맛을 나는 포도당과는 다른 질기도 억센 성분을 가지고 있는 짚의 주 성분은 셀룰로오스(섬유소)라고 한다. 문제는 짚이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비가 오고 습기가 높으면 자연스레 벌레가 생기기 쉽고, 벌레가 지푸라기를 먹어치우고 곰팡이가 나면 당연히 삭게 된다. 이는 자연스레 새끼줄의 강도에 영향을 미치고, 투석기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밧줄이 약해지면 투석기 역시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책은 여기서 더 나아가 나일론 그리고 탄소섬유까지 이야기한다.

그 밖에도 후백제의 견훤과 기병대(미오신, ATP), 조선의 이성계와 접착제(활의 아교), 조선 후기 운요호사건과 석탄 등 전쟁사 속에 담긴 화학의 이야기는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어서 그런지 무척 신선했다. 과거의 이야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화학 이야기 덕분에 흥미롭게 각 장을 읽을 수 있었다. 661년부터 1875년까지의 4개의 전쟁사를 통해 한결 화학과 가까워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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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부부 범죄
황세연 지음, 용석재 북디자이너 / 북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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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연애 때만 해도 알콩달콩 너 없이는 못 산다고 고백하던 사이가 결혼을 하면 너 때문에 못산다는 상황으로 돌변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로 헤어지기가 싫어서, 너무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인데, 왜 몇 년이 안돼서 서로의 존재에 고통을 느끼는 사이가 되는 걸까?

인간은 변한다. 사랑은 변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무엇을 하든 마냥 예뻐 보였던 아이가 애물단지로 변하는 것,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던 신형 자동차, 핸드폰 등이 시간이 지나면 바꾸고 싶어지는 것... 이 모든 것이 누구의 문제인 것일까? 아니 문제가 맞긴 한 걸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지금의 나는 어떨까? 우선 내가 첫 문장에 "결혼 전"이라는 단어를 붙인 걸 보고 이미 짐작이 갈 테지만 나 역시 퇴근이 늦는 남편이 보고 싶어 눈물을 흘리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물론 퇴근이 늦는 남편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말이다. 살아보니 그럴 수밖에... 내 마음도, 내 외모도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버럭버럭 소리도 지르고, 때론 욕도 내뱉는다. 등짝 스매싱도 가끔 한다.

책 속에 부부들도 그렇다. 처음부터 죽이고 싶을 정도로 서로가 싫었다면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들도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서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들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것뿐 아니라 실행에 옮긴다. 물론 범인이 본인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고민을 거듭한다. 고약한 반전은 없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지기는 한다. 가령 결혼에서 무덤까지라는 작품을 보자면, 치매에 걸린 아내 하정이 등장한다. 70대의 그녀는 치매 환자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남편 세현은 골프채에 머리를 맞고 사망해 있었다.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그녀는 옷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한다. 바로 정신이 온전했을 때 만든 남편 살해 계획서다. 세현은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이진영. 세현은 하정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그녀와 바람을 피웠다. 그리고 그녀와 영상통화를 하는 장면은 하정이 설치한 도촬 영상에 담겨있었다. 귀가 어두웠던 세현이 소리를 크게 하는 바람에 영상에는 진영과 세현의 대화가 전부 녹음되어 있었다. 결국 하정은 칼을 빼든다. 남편을 죽이고, 남편의 전화로 진영을 집으로 불러낸 후, 하정이 만든 장치로 인해 집에 불이 나는 상황까지 미리 계획해둔다. 과연 하정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범죄 없는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에는 온 가족이 동원된다. 지금은 잘 일어나지 않는 연탄 중독사를 당한 남자의 집을 조사하러 온 형사들. 근데 뭔가 석연치 않다. 가족들을 조사하는 형사는 연통 이야기로 교묘히 닦달하고, 아내는 자신이 범인이라며 실토를 한다. 하지만 아들도, 딸도 본인이 범인이란다. 이야기를 듣던 형사는 남자가 가족폭력을 일삼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여자를 짝사랑했던 동네 청년이 여자가 자신과 연애를 했고, 이미 관계를 가졌다는 거짓말을 남자에게 전하면서 벌어진다. 계획대로 결혼은 했지만, 그날 이후 남자는 돌변해서 술을 먹고 아내를 때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신이 돌아오면 아내에게 빌며 용서를 구한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자신을 넘어 아이들에게까지 손찌검을 하는 남편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범인을 확정하는 순간, 생각지 못한 찝찝함을 느끼는 형사들. 과연 진범은 누구일까?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마음이 변했기 때문만 일까? 서로가 너무 편해 서로를 막 대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닐까? 참고로 책 속의 가장 큰 반전은 제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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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보통 시 - 서울 사람의 보통 이야기 서울 시
하상욱 지음 / arte(아르테)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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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안 좋아한다. 때론 무서워한다. 언제부터인 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시구를 읽고 그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의미들을 찾아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시랑 담쌓고 살면 안 되겠기에 '1년에 1권 이상 시집을 읽자.'가 새해 목표 중 하나다. 그럼에도 하상욱 시인의 시집은 그 범주를 벗어난다. 다른 시집과는 달리, 하상욱 시인의 시집은 퀴즈 같다. 시를 먼저 읽고, 제목을 추리해 내(야 하)는 시집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때론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의 시집은 제목부터 특이하고, 첫 장을 넘기면서 마지막 장까지 피식피식 웃다가 끝난다. 이번 시집의 제목은 서울 보통 시다.(그는 서울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그의 시집 태반이 서울이 들어간다.) 이번에는 서울특별시가 아닌, 서울 보통 (띄고) 시다. 다른 시는 그 안에 담긴 의미들을 찾아내기 싫어서 기피하는데, 이 책은 제목부터 막 파헤치고 싶다. 서울 사람의 보통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렸는데(그 또한 검은색과 흰색, 양각과 음악의 조화를 이루며 표지가 구성되어 있다.), 나는 서울특별시를 패러디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책 속 시를 통해 퀴즈를 풀어보자. 내용을 듣고 이 시의 제목을 맞춰보자!

다시

돌아간다면

행복

할수있을까

마치 헤어진 연인을 떠올리며, 현재의 삶을 씁쓸하게 느끼는 것 같은 화자의 감정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너무 갔다. 보통의 시를 생각하면서 당연히 그런 선입견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이 시의 제목은 "이별 후에"가 아닌 "연휴 첫날"이다. 제목을 읽고 다시 시를 읽어보자. 어떤가? 무척 수긍이 가지 않나? 나 역시 그랬다. 연휴 첫날은 앞으로 엄청 긴 휴일이 남았으니 뭐 하루 즈음은 그냥 편하게 넘겨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연휴 마지막 날이 되면 도대체 이 긴 연휴 동안 뭘 한 거지?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든다.

또 한 편의 시를 소개해 본다. 이번에는 잘 맞춰보자.

어디

있나

나의

반쪽

앞에서 한번 봤으니 또 속지는 않겠지만... 결혼하고 싶다, 연애상담소... 이런 유의 제목을 생각했다면 이번에도 속았다. 이 시의 제목은 "애인을 찾습니다"가 아니라 "에어팟"이다. 한쪽이 사라지면 자연히 찾게 되는 줄 없는 이어폰 말이다.

책 속의 시에 공감이 많이 가면 좋지 않다. 그만큼 팍팍한 삶을 살았다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근데 또 공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 모두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테니 그런 면에서 보면 또 공감이 갈 수밖에 없겠다 싶다. 이렇게 짧은 두세 줄의, 몇 개의 단어들을 통해 공감을 뽑아내는 걸 보면 그는 또 다른 의미의 창작의 고통을 많이 겪었겠다 싶다. 때론 읽으며 무슨 뜻인지 모르는 시를 곱씹기 보다 한 줄을 읽으며 무릎을 치는 시를 만나는 것은 어떨까? 오랜만에 하상욱 시인의 시집 앞에서 많이 웃고 많이 울다 스트레스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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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료시카의 밤
아쓰카와 다쓰미 지음, 이재원 옮김 / 리드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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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마트료시카라면 러시아의 인형 안에 또 인형이 들어있는 나무인형을 말하는 것인데, 작품 안에서 이 제목이 어떻게 풀어질지 궁금했다. 거기에 반전의 연속이라는 띠지의 문구가 기대를 품게 했다. 이 책 안에는 표제작 마트료시카의 밤을 포함해서 총 4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우선 책의 공통된 상황은 바로 코로나다. 코로나로 거리 두기가 심화되고, 어디도 편하게 갈 수 없는 그때의 모습이 각 작품마다 담겨있다. 첫 번째 작품은 탐정이 등장한다. 첫 페이지부터 익숙한 인물인 와카타케 나나미 작가의 이별의 수법 속 문장이 담겨있었다. 살인 곰 서점이 떠오르며 등장하는 탐정의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처음 보는 탐정 맞음)

사립탐정 와카쓰키 하루미가 찻집을 찾는다. 전날 밤 살해된 마키무라 신이치 사건의 범인을 쫓는 중인데, 마키무라 신이치가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 바로 이 찻집이었다. 주인으로부터 마키무라가 머물렀던 시간에 똑같은 가방을 가지고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탐정은 가방이 바뀐 남자가 헌책방 여러 곳을 들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가 찾고 있던 것은 바로 마키무라가 가지고 있던 책 얼룩무늬 눈밭이었다. 과연 마키무라는 가방이 바뀐 남자에게 살해당한 것일까? 탐정이 헌책방을 찾으며 점점 범인으로 보이는 인물에 가까워지는데, 과연 그가 진짜 범인일까? 예상치 못한 반전 그리고 또 반전 덕분에 허를 찔렸다. 이 책 속 어떤 작품도 반전 하나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니 긴장하면서 읽어볼 만하다.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바로 표제작인 마트료시카의 밤이다. 이 작품 속에는 제목에 등장하는 마트료시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읽고 나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유명 소설가의 집에 들어온 한 젊은 남자. 고겐샤의 신입 편집자였다. 소설가의 작품 여럿을 이야기하며 진땀을 흘리다가 제목을 잘못 말하는 실수를 해서 소설가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 이에 소설가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밀실 살인에 대한 플롯을 짜보자는 것이다. 지금부터 주인공인 소설과의 편집자는 연기를 해야 한다. 소설가가 편집자에게 준 배역은 자신을 죽이는 역할이었다. 점점 극에 몰입하는 편집자와 소설가. 극은 끝을 향해 나아가고, 소설가는 편집자의 존재를 눈치채게 된다. 자신의 집에 먼저 들어와있던 젊은 남자가 사실은 편집자가 아니고, 자신의 아내의 내연남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 가까스로 살아나온 편집자는 이내 반전을 준비하는데... 도대체 어디까지가 작품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한껏 빠져들었는데 작품 속 이야기였고, 또 그들의 이야기 같은데 또 작품 속 이야기였다. 그렇게 액자 안에 또 액자 그리고 또 액자...를 반복하는 상황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마트료시카가 떠오른다. 과연 그 마지막 진실은 무엇일까? 나 역시 도대체 헤어 나올 수 없는 반전의 맛에 정말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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