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 지구가 목적, 사업은 수단 인사이드 파타고니아
이본 쉬나드 지음, 이영래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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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타고니아란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어디 지명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파타고니아는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으로 남극과 가까워 제법 추운 지역이다. 그리고 한 기업의 상호명이기도 하다. 책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은 그 기업의 설립자 쉬나드가 썼다. 이 책은 쉬나드가 어떤 배경에서 탄생해 삶은 어떻게 살다가 파타고니아란 기업을 설립하게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그리고 기업 파타고니아의 경영방침도 마찬가지다.

 쉬나드는 책에서 그의 아들이 난독증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쉬나드 자신의 어린 시절 서술만 보면 그 역시 난독증이 아니었을가 싶다. 쉬나드 집안은 캐나다 퀘백 지역 가문으로 아버지가 가세를 정리하고 난데없이 미서부로 이주한다. 이본 쉬나드란 이름에 영어까지 못했던 쉬나드는 학습은 크게 부진했고 학우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데 모험심은 무척 강한 소년이었다. 어릴적부터 어쩌다 산을 타기 시작하더니 인근 지역 산을 모두 뒤져나가며 무모하리만치 산을 열심히 탔다. 

 그는 책에서 자신이 여러 번 죽을 뻔했다고 했는데 사연 하나하나를 들어보면 가관이다. 우선 생초보시절 산을 제대로 탈줄도 모르면서 전문가들과 같이 산을 탔던 일, 깊이를 알수 없는 수심 30cm강에 다이빙 해 목에 골절상을 입을 일, 카누를 막 배워 1급 코스를 타다 죽을 뻔 한 일, 산에서 눈사태를 만나 머리와 목, 갈비를 크게 다친 일이 그렇다.(이 사고에선 실제 같이 있던 사람이 둘이나 죽었다.) 그는 이런 무모한 삶은 젊은 시절 내내 유지하다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고 나서야 슬슬 자제하기 시작한다. 야생, 날 것의 삶 그대로를 산 사람인데 평생 산을 타고, 과거에 자연이 살아 있던 지역이 이후 세계의 인구가 늘어나고 온난화가 되고,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면서 파괴된 것을 직접 목도하며 환경에도 관심을 많이 갖게 된다.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고, 위험한 스포츠만 즐기던 그가 회사를 설립하게 된 것도 기가 막힌다. 그는 등산을 좋아했고 그가 젊었던 20세기 중반만 해도 등산 장비와 옷을 형편 없는 수준이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등산 장비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것을 잘 만들어 친구들과 같이 팔았다. 돈을 벌 생각은 전혀 없었다. 쉬나드와 그 친구들에게 돈이란 바로 어디론가 떠나서 다시 산을 타기 위해서만 필요했다. 그렇게 쉬나드 이큅먼트가 생겨나고 커진다. 

 파타고니아는 쉬나드가 등산용 옷을 만들 필요성을 생각하면서 탄생한 기업이다. 쉬나드 자체가 등산가인 만큼 그들에게 필요한 재질, 기능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적합한 신소재를 찾고, 다채로운 컬러를 도입하는 등 시장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며 기업이 크게 성장한다. 그의 기업은 시작부터 친구들과의 협업이었기에 기업 자체가 성장하면서도 외부인사 영입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회사의 정체성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타고니아의 정체성이라면 모든 생산과 유통, 판매과정에서 환경을 매우 중시하는 것, 이익을 환경보호를 위해 사용하는 것, 회사 직원들의 복지에 충실하고 자유로운 근무환경을 유지하는 것, 회사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외부인사의 영입과 대규모 성장보다는 내부 인사를 키우고 작은 규모를 유지하는 것, 주식회사가 되어 주주를 위해 이익 만을 중시하는 기업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작지만 최고의 회사가 되는 것, 제품의 품질을 가장 우선시 하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파타고니아는 의류 회사이면서도 환경을 중시한다. 의류 회사는 그 재료, 생산과정, 그리고 잦은 폐기로 환경에 큰 부담을 미친다. 하지만 파타고니아는 다르다. 그들은 유기농 목화만을 가급적 고집하고 그 재배 과정에서도 환경에 미치는 부담이 적어야 한다. 또한 세탁과정에서도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게 의류를 제작하며 고가이지만 매우 튼튼하고 옷을 만들어 수선을 하게 만든다. 그들의 옷이 품질이 우수한 것은 환경을 생각한 것도 있지만 쉬나드 자체가 등산가이기에 위기 상황에서 옷의 기능이 등산가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점을 알았기에 초창기부터 고집한 점이다.

 파타고니아는 그래서 유명한 회사지만 광고를 많이 하지 않으며 충성도가 높은 고객 집단을 장기가 확보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회사는 불황기에도 판매 실적이 좋은 편이다. 사람들은 불황이면 확실한 제품만 사는 경향만 있기 때문이다. 

 쉬나드는 책에서 인간이 자행하는 환경 파괴에 대해 강하게 염려를 한다. 이 책이 나온 시점이 거의 10년 전인데 지금은 그 때보다 상황이 훨씬 악화되어 쉬나드의 걱정이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는 기업이 이윤창출만을 목적으로 인간의 소비심리를 과대하게 자극해 엄청난 소비를 이루게 만드는 것, 농업이나 목장이 화석연료에 의존해 오히려 토양을 파괴하고 과다한 비용으로 생산되지만 가격엔 그것이 전혀 반영되지 않는 점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지구상에 기업들 중 상당수가 파타고니아처럼 경영을 했다면 인간은 덜 풍요로웠겠지만 그로 인해 지구는 훨씬 더 풍요롭고 지금보다는 더 건전하게 춥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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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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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인간 답게 하는 것은 뭘까?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김영하 작가에겐 인간의 필멸성이 그 대답인 것 같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 즉,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때문에 그 짧은 생애 동안 자신이 경험하는 것과 믿게 된 이야기에 많은 가중치를 두고, 치열하게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하다 간혹 성공하고 대부분 실패하며 죽어간다. 심지어 후손에게 하고자 했던 뭔가에 대한 유지를 남기기도 한다. 

 이런 필멸성으로 인한 한계성, 그래서 주어진 시간에 일어난 행위와 경험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이 인간을 인간 답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사라질 미래에 인간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소설 작별 인사는 이런 궁금증에 대한 작가의 하나의 대답이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21세기 말이나 22세기 정도로 보이며 공간적 배경은 통일 한국이다. 한국은 통일을 이뤘지만 고령화로 인한 급격한 인구 감소로 지방은 크게 수축하여 쇠퇴해 버린 공간이 되었고, 정부가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지역은 서울, 인천, 부산, 평양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지역은 인구가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반란 세력의 통치를 받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과학기술은 상당히 발전해 인공지능을 탑재한 다양한 휴머노이드가 이미 인간사회에 상당히 침투해 있었다. 개들중 일부는 사실상 인간과 거의 구분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혈액이 있고, 생활을 위해 음식물을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며, 잠을 자고 꿈을꾸고 성욕을 느끼고 땀까지 흘려 씻지 않으면 마치 사람처럼 더러워지며 노화도 겪는다. 

 이런 미래 사회 평양은 한 기업 연구 캠퍼스에서 아버지와 철이가 같이 살아간다. 철이는 바깥 세상에 관심이 많지만 아버진 바깥은 위험하기만 하다며 만류한다. 캠퍼스 안에서도 매우 제한된 곳에서 있던 철은 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나왔다고 휴머노이드들에게 구류된다. 그 휴머노이드들은 미등록된 다른 휴머노이드들을 잡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철이를 휴머노이드로 인식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이 아무리 인간임을 주장해도 이 고철 덩어리들은 판별기의 결과 만을 들이대며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다. 철은 아버지가 자신을 금방 구해줄 것을 믿으며 이렇게 끌려온 휴머노이드들의 수용소에 끌려간다. 거긴 매우 다양한 휴머노이드들이 있었다. 예전 버전이고 전투용이기에 순수히 기계로 만들어진 것들, 그리고 인간과 유사한 휴머노이드들이 있었다. 최근에 정말 잘 만들어진 휴머노이드들은 철이처럼 자신이 인간이라고 끝가지 주장했는데 그러면 기계파들은 그 휴머노이드의 팔이라도 뽑아 기계 섬유를 드러내 너 역시 우리 같은 로봇임을 보이곤 했다. 철은 그런 기계들을 무척 조심해야 했다.

 철은 수용소에서 인간인 선과 휴머노이드 민을 만난다. 민은 어린 휴머노이드로 입양되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아 여기까지 흘러들게 되었고, 선은 복제 인간으로 학대 받으며 생활하다가 자신을 돌보는 사람이 죽어 수용소로 흘러들게 되었다. 선은 유일한 인간이기에 여기서 인간만의 특징은 거래를 하며 여러 기계와 휴머노이드들을 장악한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외부 상황이 악화되어 정부의 통제가 사라지며 수용소의 전기와 식량 공급이 끊긴다. 부족한 자원에 로봇 끼리의 약탈과 파괴가 일어나고 셋이 탈출한다. 

 탈출한 셋은 달마라는 로봇을 만난다. 그는 인간은 결국 멸망할 것이고 그들의 뒤를 이어받아 인공지능의 시대가 미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의식 자아는 모두 의미 없는 것이며 네트워크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통합된 하나의 지성이 탄생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런 말에 철은 그리고 선은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훗날 철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되고 선과 민과 이별한다. 그리고 최첨단 휴머노이드로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철은 육신을 잃고 네트워크에 흘러 인공지능으로 자리하게 된다. 몸을 통해 얻었던 모든 감각과 경험이 사라지고 첨단 지능이 된 것이다. 그런 그는 마치 인간을 대변하는 것처럼 먼 훗날 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 늙은 선도 다시 만난다.

 책에서 작가는 다소 낭만적이면서도 허무함이 느껴지는 결말을 맺는다. 이야기를 잘 쓰는 작가인 만큼 책이 흥미 있게 잘 읽히고 어렵지도 않다. 결론 부분의 임팩트가 좀 아쉽긴 한데 개인적 생각일 뿐이다. 난 이미 나이가 많지만 과학 기술이 발달해 내게도 생명체로서 필멸의 길과 인공지능과 통합한 영생의 길 중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택할지 고민이다. 이미 많은 영화와 책에서 그런 것을 다루고 있지만 필멸의 존재로서 그런 매체에서 내린 선택에는 인간으로서의 선택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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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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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기자였던 구본준의 또 다른 건축 책이다. 그는 건축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에 그가 쓴 다른 책인 두 남자의 집짓기를 내가 봤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했다. 그는 2014년 이탈리아 출장 중 돌연사했다. 아직 40대의 젊은 나이였다. 최근 건축책은 유현준의 책을 주로 보고 있지만 과거엔 구본준이 있었던 셈이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더 좋은 책을 많이 냈을 것이 확실해 아쉽다. 한국의 미 특강을 쓴 오주석, 역사를 쓴 남경태 작가도 구본준 만큼은 아니지만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같은 이유로 무척 아쉬운 분들이다.

 이 책은 2013년에 발간한 책으로 사실상 그의 유작이다. 다른 건축책들과는 좀 다르게 한국의 건축에 집중하고 있어서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시기는 근대와 과거, 현대를 모두 아우른다. 

 책의 서두를 장식한 것은 이진아 기념 도서관이다. 이진아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무척 사랑한 딸이었다. 그 딸은 2003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딸을 무척 사랑했던 아버지는 세상에 그녀를 남기고 싶었고 그런 그가 건축비를 대고 지자체가 토지를 대어 완성한 것이 이진아기념도서관이다. 이 건물은 건축 자체가 뜻 깊은 시도이기도 했고 서대문 형무소의 벽돌을 활용하여 의자를 만든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서울엔 많은 종교 건축물이 있다. 명동 성당, 불교 조계사, 천도교 중앙대성당, 개신교의 정동교회와 경동교회,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 그렇다. 이중 서울 대성당은 고딕 양식이 아닌 로마네스크 형식인데도 한국적 양식을 많이 적용해 더욱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대개 교회 건물은 고딕 양식으로 지으며 이는 신에 가까워지고 싶은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서울 대성당은 그렇지 않다. 여기엔 건축가의 뜻이 담겼다. 건축가는 1914년 성공회의 트롤로프 주교였다. 그는 건축가 아서딕슨에 서한을 보내 종교 건축물은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설득한다. 수개월의 뱃길로 조선에 도착한 아서딕슨은 한국의 건축물과 가옥을 살핀다. 그리고 고딕을 포기한다. 그래서 서울 대성당은 기와 같은 지붕에 한옥의 창호 같은 창문, 오방색의 스테인글라스를 갖게 된다. 이런 현지 전략으로 서울 대성당은 다른 근대 건물들과는 다르게 한옥들과 같이 있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1990년대초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성노예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어서 1992년부터 일본대사관에서 일본군 성노예 사건에 항의하는 수요시위가 시작된다. 2000년대 들어 어느 새 고령화한 피해자들이 사망하기 시작하면서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처음엔 독립공원 내에 부지를 마련하려 했으나 늘 그렇듯 몇몇 보수단체의 반대로 위치가 마포구 성미산으로 옮겨진다. 국회와 정부가 마련한 돈은 겨우 5억이었기에 민간시민과 일본의 시민들이 돈을 모아 자산 20억이 만들어진다. 마포의 100평짜리 단독주택 구매에만 17억이 쓰이고 건축가는 고작 3억으로 건축을 해낸다. 바깥은 높은 벽을 세워 작은 건물을 크게 보이게 하였고, 할머니들의 얼굴과 손바닥 부조도 눈에 띈다. 집의 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은 할머니들이 끌려가 생활하던 공간처럼 꾸며졌다. 박물관은 전쟁에 끌려간 할머니들의 삶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형태로 완공되었다.

 조선은 유교 건물을 많이 지었다. 향교는 공립유학 교육기관이고 서원은 사립교육기관이다. 향교는 대개 고을의 중앙에 위치했는데 지금도 오랜 도시 지역의 중앙엔 교동이 있다. 바로 향교가 있던 마을이란 뜻이다. 서원은 풍수가 좋은 곳에 그리고 지역의 특성과 모시는 사람, 건축주의 특성이 반영되어 개성이 넘친다. 

 서원은 공통적으로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서 학생을 가르쳤기에 은행나무가 반드시 존재하고 교수 및 기숙사와 배향장소가 있다. 도동서원은 김굉필을 모시는 서원이다. 김굉필은 나도 처음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지 않으나 조선 사림들에겐 정신적으로 큰 울림을 준 사람이다. 젊은 시절을 탕아로 보내다 늦은 나이에 김종직을 만나 수학하여 40이 되어서야 입직한다. 당시 양반들은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뤘는데 대부분 돈을 주고 사람을 썼고 자신은 제사만 지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김굉필은 부, 모, 계모까지 총 9년 상을 스스로 해낸 사람이다. 워낙 강직해 연산 때 파직되고 사사되었다. 중종때 복귀되었는데 그의 강직함이 워낙 대단해 동방 5현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1번인데 동방오현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이다. 도동서원은 이런 김굉필을 기리는 서원이기에 많은 건축비를 확보할 수 있었고 그래서 돌을 활용한 재미난 장식들이 많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호주의 대표적 건물이다. 국가의 이미지를 이 정도로 잘 드러낸 건물도 많지 않은데 호주 정부는 이를 계획하고 설계를 공모한다. 당선자는 당시 39세로 덴마크의 신예 이외른 우촌이었다. 조개 껍데기를 연상시키는 여러 구조체를 설계한 그의 건물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건물은 정면이 따로 없었고 구조에도 구분이 없었다. 포개지는 거대한 고깔은 그 자체로 벽이자 지붕이자 관문이었다. 

 모든 게 좋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호주 정부는 2년 정도의 건축 기간에 350만 달러의 예산을 예상했다. 하지만 해안가이다 보니 지반 문제가 발생했고 당시 낮은 건축 수준으로 인해 실현 가능한 재료와 구조의 변경 및 설계 등으로 실제 건축 기간은 10년 이상에 예산은 총 5700만 달러가 들었다. 호주 정부와 건축가의 갈등은 심해졌고 자신의 이상이 현실에 밀리는 느낌을 받은 우촌은 그대로 귀향해버린다. 호주정부는 자국의 건축가들을 이용해 현실적인 작업을 벌려 오페라 하우스를 마무리한다. 우촌은 개관식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먼 훗날에야 오페라 하우스를 다시 방문한다.

 조선의 5개 궁궐 중 창덕궁은 후원이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창덕궁의 후원은 우리 전통처럼 자연스러움이 그 특징이다. 창덕궁의 또 다른 특징은 정자가 많다는 것이다. 가장 화려한 정자는 부용정으로 열십자 지붕에 한 차례 각을 더 따낸 정자로 정조가 애용했다. 관람정은 전국에서 유일한 부채꼴 모양의 지붕을 가진 정자고 승재정은 작은 공예품 같이 아름다운 정자로 보통 사방이 트인 다른 정자와 달리 창호가 있고, 툇마루도 있다. 아마 겨울에도 애용한 것이 아닐지. 존덕정은 디자인이 독특한데 지붕이 2겹이고 한 모서리에 가는 기둥이 3개씩 붙어 있다. 청의정은 농업국가인 조선을 상징하는 것으로 정자의 지붕이 초가다. 왕은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사를 선농단에서 올렸고 친경했다. 그리고 매년 청의정의 초가 지붕을 교체했다. 선농단 제사 후 제물로 사용한 소를 잡아 탕을 끓여 주변 60세 이상 백성에게 대접했는데 이것이 설렁탕의 시초란 이야기가 있다. 

 강릉에 가본 사람은 선교장을 한 번 정도를 들어봤을 것이다. 선교장은 집의 이름으로 현존하는 조선건물 중 가장 크다. 보통 양반의 집엔 당이나 각이 붙는데 선교장은 워낙 커서 장이 붙은 것이다. 선교장은 강릉에 위치하는데 그것이 더 대단하다. 강원 지역은 농경지가 척박하고 좁기 때문이다. 선교장 가문의 땅은 주문진에서 삼척에 이를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선교장 가문의 시작은 권씨부인이다. 본래 충주로 시집갔었는데 남편이 죽고 전처의 장자가 모든 가산을 상속하자 자신의 아이와 강릉으로 돌아와 염전 사업을 해서 자수성가한다. 그들은 개척된 땅은 비과세하는 법을 이용해 강원도의 척박한 땅을 농지로 바꾸며 땅을 늘려갔다. 

 선교장은 한양의 유력가와 통혼하여 세력을 유지했고, 문화적 후원과 교류도 자주해서 정치감각과 문화감각을 유지했다. 김정희나 여운형도 방문했다. 조선시대 양반에게 관동팔경과 금강산은 주요 관광지였는데 선교장은 그 초입으로 같이 방문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선교장은 손님대접에 상당한 신경을 썼는데 소반만 300개를 대접하고 손님이 떠날때는 옷도 지어 선물했다. 사랑채는 큰 사랑채, 중간 사랑채, 아랫사랑채로 나눠 손님의 학문적 수준과 지위에 따라 위에서 아래 순으로 배치했다.

 선교장은 처음부터 큰 건물이 아니라 대를 이어가며 꾸준히 증축하여 매번 당주의 취향과 철학이 반영되어 건축물이 다양하다. 선교장의 6대 이근우는 1908년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잡고자 인재 양성을 위해 동진학교를 설립했다. 교사로 여운형과 이시형을 초빙할 정도였고 학생에게 숙식과 학비를 제공했으나 일제에 의해 3년만에 폐교 된다.

 이근우는 일제 때 중추원 참의를 지내기도 했으나 뒤로는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댔다. 선교장은 해 방 후 토지개혁으로 땅을 강제 매각당하고 지가 증권을 얻었으나 산업자본으로 전환에 실패하여 과거의 위상을 잃는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이후에도 가문에서는 강릉시장과 은행장, 대학 부총장이 연이어 배출되었고 선교장의 유명한 열화당의 이름을 딴 출판사 열화당도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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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교육과정과 수업 디자인 - 2022 개정 교육과정 기반
유영식 지음 / 테크빌교육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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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상반기 2022 개정교육과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은 그간의 시대 변화를 반영하면서도 2015개정 교육과정을 부드럽게 계승한 느낌이다. 시대는 인공지능과 기술적 변화, 기후 재난 등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학습자 중심의 교육과 이를 위한 학교, 교사 자율성이 더욱 중요해졌다. 

 책 2022개정교육과정과 수업 디자인은 이런 2022 개정교육과정에 대한 친절한 대중해설서 성격이다. 물론 가장 인상적인 학교자율시간에 많은 초점을 두었다. 

 2022 개정교육과정은 미래 교육의 실현을 위해 만든 교육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학생맞춤형, 학습자 주도 교육이 중요해졌고, 이를 위해 만든 장치가 고교 학점제와 학교자율시간, 깊이 있는 학습이다. 학교는 이제 초중학교에서는 학교자율시간으로 학습자가 원하고 그들이 주도하며 교사와 지역에 맞는 학습 설계가 가능해졌고 고교에서는 고교학점제로 학습자가 자신의 진로에 맞는 경로 이수가 가능하다. 

 2022 개정교육과정의 주요 변화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인간상에서 자기주도적 인간, 창의적 인간, 교양 있는 인간, 더불어 사는 인간을 제시했다. 2015와 거의 동일하나 자주적인 사람이 자기주도적 인간으로 바뀌었는데 아무래도 학습자 중심을 초점에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역량은 6가지가 같이 제시되었으며 의사소통 역량이 협력적 소통 역량으로 바뀌었다. 미래 사회에서 단지 의사소통이 아니라 타인과의 협력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기에 이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기초 소양이 등장했다. 민주시민의 최소 소양으로 기존 3Rs을 강조했다면 이번엔 이를 언어 소양, 수리 소양, 디지털 소양으로 다시 제시했다. 언어 소양과 수리 소양은 기존의 3Rs라면 여기에 디지털 소양이 추가된 셈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초등학교의 경우 2015 개정교육과정에서는 입학초기 적응활동이 68시간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는 통합교과의 학교 단원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34시간으로 줄였고, 나머지 34시간은 한글 교육강화차원에서 국어과로 옮겨졌다. 세월호 사건 이후 도입한 안전한 생활 64시간은 바른생활 16시간, 슬기로운 생활 16시간, 즐거운 생활 32시간을 교과에 분산되었다. 또한 초등저학년이 신체활동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즐거운 생활에서 신체활동 관련 시수를 기존 80시간에서 128시간으로 증가시켰다. 

 중학교는 자유학년을 자유학기로 줄이고 차시는 102시간으로 편성하였으며 스포츠클럽을 연간 34-68시간에서 연간 34시간으로 축소했다. 고등학교는 기존의 204단위 이수제를 192학점의 학점제로 개편하였다. 1학점은 50분 기준 16회로 편성했다. 

 초중고에서 공통적으로 진로 연계 교육이 도입되었다. 초등은 중학교의 자유학기제에 대해서 중학교는 고등학교의 고교 학점제, 고등학교는 대학교와 사회진출과 관련한 진로교육을 하게 된다. 창의적 체험활동대 개편되었는데 기존의 자율, 동아리, 진로, 봉사의 4영역이 자치자율, 학생중심 동아리, 진로로 개편되었다. 봉사활동은 학생중심 동아리 영역에 포함되었다. 인공지능 소프트 웨어 교육도 강화하여 초등은 기존 17차시에서 34시간이 되었고 중학교는 68시간 고등학교는 이와 관련한 진로 및 융합 교육선택과목을 신설하였다. 

 2015 개정교육과정에서는 교과군별(음미체 교과 제외) 20% 범위 내에서 시수를 증감하여 편성 운영할 수 있었다. 2022 개정교육과정은 이것을 창의적 체험활동까지 넓혀 교과군과 창체를 포함하여 20% 시수 증감 편성이 가능해졌다. 사실상 교과의 수업 시수를 줄이고 창체를 확장할 수 있어 학교와 지역에 맞는 고유의 교육 재량권이 넓어졌다. 

 2022 개정교육과정 각론의 개발 방향은 다음과 같다. 우선 역량 함양을 위한 깊이 있는 학습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삶과 연계한 학습을 강조하고, 교과간 연계 및 통합을 지향했다. 그리고 학습에 대한 성찰을 강조한다. 내용체계표는 기존에 지식과 기능만 제시되었지만 2022는 지식과 이해, 과정과 기능, 가치와 태도로 분화하여 제시되었다.  

 2022 개정교육과정의 성취기준도 변화했다. 우선 성취기준은 교과학습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결과 혹은 도달점의 성격으로 제시해 일종의 평가준거 기능을 하게 하였다. 또한 내용 체계표와의 정합성을 강화했다. 역량 구현에 적합한 방식으로 진술하였다. 또한 교수학습과 평가의 자율권을 확대 보장하는 방향으로 진술했다. 즉, 성취기준상 구체적 활동을 제시하기 보단 도달점 위주로 진술하여 그 과정에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다. 

 학교자율시간은 2022 개정 교육과정의 백미다. 이는 초등 3-6학년, 중학교 1-3학년에서 편성해야 하고 교과가 16+1주로 편성되어 뒷 부분의 1주 분량의 차시가 학교자율시간 시수가 된다. 초등같은 경우 3-4학년은 최대 58시간, 5-6학년은 64시간이 된다. 교과별 학교 자율시간 수는 교과의 편제 시수를 17로 나누면 된다. 

 학교자율시간 같은 것은 기존 시도 교육과정에 이미 등장하였다. 경기도의 학교자율과정, 전북의 학교교과목, 충북의 자율탐구과정, 충남의 학교자율특색과정, 인천의 학교자율교육과정 들이 그렇다. 이들은 거의 최대 20%의 교과시수를 활용가능하게 하여 연간 100시간 가까운 시간을 보장했기에 2022개정교육과정의 학교자율시간은 오히려 시수면에서 축소된 감이 없지 않다. 

 학교자율시간은 학생 중심의 교육과정, 교육과정 분권화와 자율화, 교사의 자율성과 주도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우 교사에게 업무적 과부하가 일어나거나 시수를 감축하는 만큼 기존 교과교육의 부실화 그리고 지역별 학교별 교육과정 편차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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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역사 - 외환위기부터 인플레이션의 부활까지 경제위기의 생성과 소멸
오건영 지음, 안병현 그림 / 페이지2(page2)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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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세계 경제는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었다. 2차 대전의 사실상 원인이 된 대공황과 70년대 케인즈 주의를 끝장내고 신자유주의 열풍과 스태그플래이션을 불러온 오일쇼크, 20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 미국을 부도 위기로 몰아 넣고 신자유주의에 경종을 울린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위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책 위기의 역사에서는 이 중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불어넣은 외환위기와 2000년의 닷컴 버블 위기, 2008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불러온 금융위기, 2020 코로나로 인한 위기를 다뤘다. 이 책의 장점은 매우 상세하고 분석적이면서도 책을 재밌고 쉽게 썼다는 점이다. 당시의 경제 기사들도 많이 다뤘는데 기사를 보니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 사회의 현실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져 무척 현장감이 느껴졌다. 마치 당시 상황에 있었던 느낌이랄까. 


1. 1998년 외환위기

 한국 경제는 사실상 이시기를 전후하여 극명하게 구분된다. 이전엔 고도 성장기로 연간 10%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누렸고 완전고용 상태에 가까웠으며 거의 모든 직원이 신분 안정을 누렸다. 회사는 직원을 과도한 노동시간으로 착취하긴 했지만 임금은 민주화 이후 꾸준히 상승했고, 어지간한 일로 직원을 해고하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만 해도 공무원은 크게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놀랍게도 양자의 정년까지의 고용안정성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매우 두터웠고, 빈부격차도 적은 시기였다.

 하지만 외환위기 모든게 바뀐다. 한국은 이후 성장률이 절대 5%를 거의 넘지 못했고, 일반 기업의 직업 안정성은 크게 낮아졌으며, 취업을 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보수차이가 매우 커졌다. 빈부격차가 매우 커졌고, 취업자체도 매우 어려워졌다. 부동산 가격 등 자산가격이 폭등하였다. 집과 직장을 모두 갖기가 어려우리 결혼율과 출산율이 모두 급격히 낮아졌다. 

 이렇게 한국 사회를 극명하게 바꾸어 놓은 외환위기는 왜 일어났을까. 이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대외적으론 일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은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고현상을 지속했다. 반면 국내 경기는 나날이 침체되어 높은 화폐가치를 이용해 해외 투자가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다 1994년 고베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엄청난 재앙으로 인해 일본의 보험사들은 갑작스레 거액의 보상액을 지불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해외 자산을 대거 매각하게 된다. 즉, 외화를 엔화로 바꾸어 보상하게 되니 안그래도 강력한 엔화가 초강세를 띠게 된다. 일본은 G7에 요청해 이번엔 역 플라자 합의로 엔화 약세 전환 협정을 맺는다. 이에 한국 기업들은 10년 간의 엔고 마감으로 갑작스러운 수출경쟁력 감소로 위기를 겪게 되고 수입 적자도 심화한다.

 또한 반도체 경기도 크게 후퇴한다. 95년 윈도우 출시로 세계 컴퓨터 시장은 호황을 맞는다. 또한 앞으로는 컴퓨터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추정되어 수요는 순간적으로 폭증하는데 이게 문제가 된다. 컴퓨터에는 당연히 반도체가 필요하기에 당시 최신 버전인 16mb 반도체의 가격도 크게 올랐다. 하지만 96년 후반부터 컴퓨터 시장은 급격히 얼어 붙게 되고 반도체 수요도 급감하여 올랐던 가격은 평소의 1/4수준으로 추락한다. 한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반도체가 주요 외환벌이 수단이었기에 수출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한국은 1996년 OECD에 가입한다. 한국은 이전까지 외국 자본의 국내 투자를 크게 제한하고 있었고 환율도 고정환율로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OECD가입으로 점차적으로 자본 시장을 개방하게 되었고 이는 당시의 세계화 열풍과도 관련한다. 한국은 당시 고금리 상황이었는데 한국의 종합금융사들은 이를 이용해 해외의 달러자산을 저이자로 빌린 후 이를 국내에 융통하여 이자 장사를 하고 있었다. 다만 이득을 더 크게 하기 위해 달러는 저금리 단기로 빌리고 국내엔 장기로 이를 융통했다.

 이 세 가지 요인이 한 순간 폭발했다. 동남아사이 국가에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외국 투자자들은 아직 선진국이 아닌 개도국이었던 한국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된다. 외국자본이 이탈하자 한국은 외환보유고로 방어에 나서나 당시 보유액은 300억 달러에 불과했다. 더구나 반도체 경기 악화로 외화가 들어올 길은 없어 적자가 심화하고 있었고 대출상환 압박에 급박했던 종금사들은 돈을 장기로 빌려주고 달러로 갚아야 했기에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외환위기에 이른 것이다. 

 외환위기로 자금을 빌려준 IMF는 한국에 강도높은 구조조정과 해외 자본 이탈 방지를 위한 고금리를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중산층이 붕괴되고 자산가격이 해외에 헐값에 넘어가는 고통을 겪는다. 


2. 2000년 초 닷컴 버블위기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남미와 러시아로 위기가 이어진다. 세계적 실물 경기 둔화로 원자재와 유가가 크게 떨어졌고, 아시아 국가들은 통화가 가치가 하락했다. 그러다 보니 남미와 러시아 및 다른 신흥국들의 수출경쟁력도 하락해 이들이 위기를 겪게된다. 여기에 일본도 침체였고 아직 약했던 중국 역시 대규모 부실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세계 경기를 부양해야 할 필요성을 느긴 미국 연준은 금리를 인하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경제상태고 90년대 내내 이어진 호황으로 괜찮았지만 그럼에도 금리를 인하한 것이다. 

 그 결과 미국 증시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주가가 상승했고 미국 경제는 디지털 경제의 등장과 더불어 신경제란 용어가 생겨난다. 신경제에 대한 과도한 착각으로 주가는 급등했고, 자산이 상승했다고 착각한 사람들의 소비가 늘어나면서 물가가 상승한다. 미연준은 상승하는 물가를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닷컴 버블 붕괴의 시초가 된다. 

 닷컴 버블의 붕괴는 초기엔 IT기업의 주가만 폭락시켰지만 이어져서 실물경기도 둔화시킨다. 다른 기업들의 주가도 몇 년간의 시간차를 두고 크게 하락한 것이다. 미 연준은 이에 경제를 부양하기 위해 금리를 다시금 인하하지만 이런 불황은 오래도록 이어진다. 코로나 이전까지 세계 경제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저성장 저물가 기조를 오래도록 이어왔는데 이것의 시초가 된게 닷컴 버블 붕괴다. 


3. 2008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로 인한 금융위기

 닷컴 버블 이후 미국 주식 시장은 10년간의 하향기를 걷는다. 반면 부동산 시장은 같은 기간 견고히 안정적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 오랜 불황으로 세계적으로 믿을 만한 투자처가 사라진다. 즉, AAA짜리 안전적인 회사채가 크게 부족해진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흔들리고 도산한 결과였다. 이 두 가지는 맞물려 미국을 부도 위기로 몰아넣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촉발하게 된다.

 미국 부동산 시장은 주식시장과 별로도 2000년대 들어 안정적인 상승을 이어갔다. 이는 주식시장의 붕괴와 관련한다. 주식시장이 믿음을 주지 못하자 부동산으로 투자자금이 몰린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장은 오랜 기간 견고했기에 부동산 시장이 상당히 안전하고 꾸준히 우상향한다는 믿음이 비교적 장기간 형성되었다. 또한 닷컴 위기 이후 달러가 약세화하고 미 금리가 낮아졌는데 이로 인해 국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중국이 세계 공장으로 발돋움하며 더욱 올랐다. 신흥국들이 돈을 크게 번 상황에서 이 투자자금은 미국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갔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동자금을 흡수할 우량 등급의 회사채가 사라졌다. 투자자금은 갈 곳을 잃은 상황이었는데 이 물꼬를 스티브 글래스법의 해체가 열어준다. 스티브 글래스 법은 대공황기에 생겨난 법으로 상업은행의 방만한 투자를 크게 제한한 법이었다. 당시 대공황의 악화에 상업은행들의 무분별한 투자와 방만한 경영이 한몫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말부터 금융경제가 강조되며 미국은 상업은행들의 발이 묶인 방면 유럽은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기에 이와 같은 흐름이 스티브 글래스 법의 해체를 가져왔다. 

 법이 해체되자 미국 상업은행들은 이전의 방만한 경영을 시작한다. 미국 은행들은 부동산 시장이 견고하다는 믿음하에 직업, 일자리가 없는 이른바 서브 프라임 계층에게까지 주택담보대출을 시작한다. 조건도 매우 너그러워 원금 상황 없이 장기간 이자만 내는 형태였다. 그리고 일부 투자기관들은 파생상품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은행이 갖고 있는 주택담보대출 수백건들을 하나로 묶어 MBS라는 채권을 만든 것이다. 은행들은 이 MBS를 투자기관에 팔아 생겨난 여분의 금액으로 또 다시 주택담보대출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대출로 투자기관은 또 다시 MBS를 만들어 팔았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투자기관들은 이 MBS조차도 모아서 CDO채권을 생성했다. 이 채권은 MBS중 연체율이 극히 낮은 우량의 담보대출은 모은 것으로 이것이 트리플 A 등급의 채권이 되어 세계적 유동자금을 흡수했다. 여기에 더 나아가 CDO채권에 보증을 서주고 낮은 수수료를 받는 CDS도 만들어냈다. 모두 얽히고 섥혔고 복잡하고 안전하게 만들었지만 근원은 주택담보대출에 있었고 이는 주택 자산가격의 꾸준한 상승과 주택담보채무자들의 이자지급능력에 매달리는 구조였다. 그리고 이것이 흔들리자 모든 것이 한방에 무너져내렸다.

 미연준은 늘 그렇듯 주택시장이 과열되자 금리를 인상하기에 이른다. 주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자산 가격이 폭등하면 소득이 향상되었다는 착각에 이르러 소비를 증진한다. 때문에 경기가 과열되고 인플레가 발생하는 것이다. 금리를 인상하자 주택담보대출자들의 연체율이 급증했고, 신용이 낮은 계급부터 자산을 팔아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리고 이들이 주택을 내놓자 집 가격이 폭락한다. 즉, 은행이 잡고 있던 담보물과 이자 모두가 무너진 것이다. 

 은행들은 평소 서로를 신뢰하고 믿기에 쉽게 상호 대출을 해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발생하면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 대출이 이뤄지지 않고 위기 은행을 도와줄 곳이 없어 자금이 막힌다. 그러면 소문이 나 뱅크런이 발생하고 은행이 도산한다. 전반에 퍼진 급격한 신용경색은 자금의 흐름을 정체시켜 결국 실물경제를 악화시켜 문제가 더욱 심해진다. 

 미국의 신용위기는 세계로 퍼졌다. 미국은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금리를 낮춰 유동성을 공급했으며 달러가 약세로 돌아섰다. 한국도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과거 외환위기읙 경험으로 충분한 외환보유고를 비축하고 있었고, 수출도 비교적 견조했다. 여기에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 체결로 위험요소가 별로 없었다. 


4. 2020코로나 위기와 40년만의 인플레이션

 코로나 이전 세계 경제는 물가가 적정하고 경기가 좋은 편이었다. 이에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성장에 초점을 두어 낮은 금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경제활동에 급작스레 중단되자 생산활동이 멎고 고용이 줄고 소득이 낮아져 수요와 공급이 모두 줄어들게 되었다. 여러 경제위기의 누적으로 기업과 가계는 모두 부채가 많은 상황이었기에 무척 경제가 악화되었다.

 타개책은 대규모 양적완화였다. 2008년 미국은 7000억 달러를 양적완화했지만 이번엔 무려 5조달러 규모였다. 지난 2년간 30년어치의 돈이 풀렸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셈이다.(아직 그돈이 묶인 미 증시와 세계 부동산 시장은 거품이 여전히 잔뜩끼어있다는 셈이다) 특히, 이번엔 고용을 전진시킬수가 없어 과거와 다르게 개인에 직접 현금을 지원했다. 그 효과는 막대하여 급격히 수요가 자극되어 경기가 폭발한다. 기업 실적은 크게 개선되었고 주식도 폭등했다.

 위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세계적 지원으로 수요가 팽창하고 달러는 유동성이 폭발해 크게 약세화한다. 원자재 가격은 폭등했고 제조업체의 생산이 증가해 원자재 가격이 더욱 상승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더욱 폭등한다. 러시아는 세계적 석유, 천연가스 및 원자재의 공급처이고 우크라이나는 밀의 공급처이기 때문이다. 공급측에서의 공급 부족과 수요측의 수요 폭발이 겹치자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번엔 미 연준의 대처가 사태를 키운다. 코로나를 잠재우는데 빠르게 움직였던 연준은 워낙 인플레이션이 오랜만에 일어나서인지 움직임이 늦었다. 인플레이션이 급격히 발생한지 1년이 되어서야 사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뒤늦게 금리를 인상한다. 미국은 뒤늦은 대체로 1년이란 기간동안 거의 5%에 가깝게 금리를 인상했다. 이런 금리인상은 80년대의 대규모 긴축 이후는 없었던 일로 오랫동안 풀린 자금으로 부채와 저금리에 익숙해있던 가계와 기업에 큰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물론 이는 거품을 빼는 과정으로 돈잔치에 익숙해진 가계와 기업이 마땅히 감수해야할 부분일 수도 있다. 경제는 결국 실물경기과 가까워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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