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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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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 책 '세한도'를 읽고 추사 김정희에 대해 관심이 더 생겨났다. 세한도도 좋은 책이었지만 좀 얇았고 자세하진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추사 김정희란 책을 사놓은게 생각났다. 그래서 집었는데 생각보다 두껍고 요즘 직장일이 번잡해 좀처럼 읽히질 않았다. 김정희는 세한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림보다는 서예로 유명한 학자다. 그래서 이 책은 그림보단 한문글자가 무척 많다.

 우리 조상들은 글씨가 마음과 학식을 반영한다 하여 무척 중시했는데 그 흔적이 남아 어릴적 국대시절 글씨쓰기 대회나 글씨 못쓰는 이유로 고통을 받았다. 자칭 우리반 5대악필이었는데 글씨를 못쓰면 담탱이님께 성의가 없거나 대충했다는걸로 여겨져 혼나거나 숙제를 다시하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시절 숙제는 노력을 요하는게 많았다. 뭔가를 무척 많이 쓴다든지 하는 것들.

 의외로 추사 김정희에 대해 우리 학계는 일제시대 학자인 후지쓰카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청대공부를 하며 청대 유수의 학자들과 김정희의 교류를 알게 되었고, 김정희를 청대학문연구의 일인자로 칭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각종 유물과 작품들을 많이 모으게 되었고, 책 세한도와 책 추사 김정희도 그의 연구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후지쓰카의 아들은 만년에 아버지가 소장하던 많은 김정희의 작품을 한국에 기증하니 뜻 깊은 일이다.

 하여튼 김정희는 정조 10년인 1786년에 태어난다. 영조와 사위를 맺은 월성위 집안으로 왕실의 외척인 경주김씨이기에 귀공자였다. 백부인 김노영이 자식이 없기에 출가하여 양자가 되었고, 친부는 김노경이다. 아버지 김노경은 무려 40세인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였음에도 불과 20년의 관직 경력에 각종 판서와 주요 지방의 감사직을 두루 지냈다. 추사는 그런 집안의 자제였고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박제가라는 당대 실학자의 제자여서 북학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정조는 중국의 문물을 따라잡고 우리 것으로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청의 서책을 사들였고, 이로 인해 연경에 가는 사신들도 많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정희는 자연스레 연경에 동경을 품게 된다.

 당시엔 연경에 주요 대신들의 자제가 자제군관으로 같이 가는 특혜가 있었는데 아버지 김노경의 첫연행시엔 너무 어렸고 두번째 연행때는 24세의 나이가 되어 연행에 동참한다. 거기서 그는 청의 대학자인 옹방강과 완원 등을 만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연행이고 2-3달의 체류였지만 그간의 경험이 평생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다. 옹방강이나 완원역시 김정희에 강한 인상을 받고 거의 제자로 삼는다.

 조선에 돌아와 예술과 학업에 매진하던 그는 마침내 34세의 나이에 대과에 오른다. 2대 연속의 벼슬살이로 집안은 탄탄했고 같은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가 있었다. 김정희 역시 아버지 만큼 요직을 거치진 못했지만 높은 벼슬살이를 했으며 이를 통해 연경과의 교류도 계속되었고 청의 서책과 문물을 계속 접한다. 또한 그는 금석문에 관심이 많아 진흥왕 순수비를 찾거나 조선의 각종 명승지와 산들, 유적을 탐색한다. 일종의 학자이자 지리역사학자 및 고고학자의 성향이 강했던 것. 요즘으로 치자면 종합예술학자느낌이다. 김정희는 독특하게도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이론적으로 통달했는데 그래서 그는 사찰의 현판에 글을 많이 남기기도 했고, 스님들과의 이론 논쟁 및 교류도 많았다. 조선시대 유학자치곤 매우 드문일이었다. 젊어서는 그는 자신만의 소신과 지론이 강한 편이었고 이로 인해 남들과 오해 및 다툼도 잦았는데 맞다고 생각하는 말은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었다. 그래서 훗날 김정희를 모함하는 안동김씨 세력의 김우명을 암행어사 시절 고발해 파면시키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김정희가 벼슬에서 물러나고 조정엔 안동김씨 세력이 득세한다. 그들은 경쟁세력인 경주김씨를 못마땅히 여기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공격을 시작한다.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은 벼슬에서 물러나자마자 상소로 공격을 받았고 급기야는 고금도로 유배된다. 추사는 독특하게도 왕실의 행차에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격식과 법도를 중시하면서도 맞다면 과감히 새로운 것과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갖는 추사의 개성을 보여주는 면목이었다. 이후에도 안동김씨 세력의 공격은 계속되어 부친 김노경은 사후에 관작이 박탈되고 공격은 김정희에게 이어져 억울한 상황임에도 그는 무려 제주도의 대정현으로 위리안치된다.

 조선시대 귀양은 주로 천사와 부처, 안치로 구분하는데 천사는 고향에서 천리밖으로 이주시키는 것으로 고향에서 쫓아내는 것이고 부처는 중도부처의 준말로 죄인을 정상참작하여 귀양지로 가는 도중 그냥 도중의 한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었다. 안치는 이중 가장 가혹한 것으로 상황에 따라 고향이나 개인 별장, 혹은 유배지를 스스로 택할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도안치와 위리안치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절도안치는 글자그대로 섬에, 위리안치는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스스로 치고 그안에 갇히는 것이었다. 추사는 가장 먼 제주도에 그것도 위리안치된다.

 귀양길에서도 추사는 원교의 글씨를 폄하하고, 서예가인 창암 이상만의 글도 높이 치지 않는등 고고한 모습을 보인다. 제주에 도달해서도 귀공자로 자란 탓에 토착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으로 보내는 편지에 여러 음식의 조달을 부탁한다. 하지만 워낙 먼곳이라 상당수의 음식이 썩어 도착하고 장맛도 변하여 도착하는등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귀향 초기엔 벽파스님과 벌인 논쟁에서도 상당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귀양 생활은 상당히 고달팠는데 음식과 기후, 물등 모든 것이 그와 맞지 않았던듯 하다. 제주의 풍광은 아름다울진데 위리안치 신세니 나가지도 못하였다. 오랜 귀양생활중 학문의 일가를 이룬 정약용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지만 그의 학예는 좁은 곳에서도 할수 있는것이기에 다행이었다. 거기서도 연경의 소식을 접하고 지안들과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심지어 제자를 기르기도 하며 천거까지 한다. 세한도는 당시 연경을 오가던 역관 이상적에게 고마움에서 준 것이며 이상적은 세한도를 가져가 연경학자들로부터 그림에 대한 시를 받아 이를 책으로 엮기까지 한다.

 오랜 귀양생활로 추사의 생각과 성격은 많이 변화한다. 이전의 날카로움은 많이 사라졌고 관용적인 면과 토착적인 면, 인간적인 면이 더욱 많아진다. 귀양이 풀려 돌아오면서 과거 자신이 폄하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이야기하며 그들의 작품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오랜 유배생활로 집안은 예전만 못했다. 가세가 기울어 호화롭던 월성위궁은 이미 팔렸고, 추사는 서울 용상으니 강상에 머문다. 거기서 학예에 다시 집중하고 여러 사람과의 교류도 다시 시작되었지만 다시 모함을 받아 지난번과 정반대로 북방인 북청에 유배된다. 북청은 매우 추웠지만 중국과 가깝게 큰 고을이기에 제주만큼 힘겹진 않았다. 하지만 이미 60이 넘은 몸에 두번의 큰 유배생활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다.

 돌아와선 과천에 자리잡는다. 과거 부친 김노경이 별장을 세운 곳으로 그곳에서 말년 생활을 한다. 추사는 석파 이하응과도 교류가 있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흥선대원군이다. 대원군은 난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는데 그의 난 그리기는 추사로부터 배운 것이다. 추사는 이하응에게 난 그리기를 가르치기도 했고 난 그림을 묶은 서책을 보내기도 했다. 과천에서 많은 작품과 제자들을 남기고 있던 그는 71세의 나이에 죽는다. 죽기 3일전에도 큰 글씨를 남겼는데 평생 열개의 벼루의 바닥을 보고 수천개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든 만큼 끊임 없이 학예에 매진하던 그의 모습다웠다.

 추사의 글씨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는 이가 많았으며 실제 추사 자신도 살아생전 여러 사람에게 글씨를 청탁받았다. 그리고 상당수 서예가들이 입고와 출신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반면 추사는 입고와 출신을 완벽히 통달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입고는 옛글씨를 학습하는 것으로 주로 금석학인데, 입고에 치중하다보면 새로운 것을 만다는 출신이 약했고, 출신이 강하다보면 근본이 없어져 입고가 약한 편이었다. 하지만 추사는 금석과 과거의 비문을 많이 연구한 사람으로 입고에서 출신이 나온 학자였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는 추사체라는 새로운 장르로 확립된다.

 책을 읽으며 한문을 잘 모르고 서예도 모르기에 그의 작품들이 아름다움이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굴곡진 삶에서 변해가는 글씨를 보며 한 사람의 삶이 느껴졌고 거기서 오는 울림이 있었다. 책엔 부록으로 대표 작품집 책자도 있었는데 책을 완독하고 보니 이런 식의 부록을 준비한 저자의 생각에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다. 저자 유홍준도 나이대별로 그의 삶에 따라 변화한 그의 글씨가 감명깊었던 것이다. 유홍준은 말년에 이르러 삶을 관조하고 낭만적이며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한 추사의 글씨는 마치 어린아이의 글씨처럼 돌아갔다고 했다. 추사가 어릴적 글을 썼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말이다. 돌고 돌아 처음으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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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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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네이버 블로그]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의 그림 중 세한도라는 것이 있다. 바로 요것인데, 국보 180호라고 한다. 그림은 썰렁하고 황량하기 그지 없다. 느낌상 겨울이 분명하고, 집이라고 하나 있는데 문하나가 전부고 대충 그린 느낌마저 없지 않다. 그리고 사람도 동물도 하나 없다.

 이번에 본 책은 이 세한도의 탄생배경에 관한 책이다. 김정희의 삶과 이상에 대해 알수 있었던 책으로 자연히 세한도는 그 연장선에 있다. 김정희는 한때 잘나가는 집안의 사람이었다. 영조와 인척지간으로 정조때만해도 가문의 위세가 자못대단했다. 하지만 영조 사후 안동김씨가 득세하고, 자신의 집안이 그 반대 쪽에 위치하면서 수난이 시작된다. 1830년에 아버지는 전라도의 고금도로 그리고 1840년대에는 자신이 무려 제주도에 위리안치된다. 모함을 받아 일전에 숱한 고문이 있었으며 그 결과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관작마저 박탈된다, 그나마 아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본인의 목숨을 건지고 제주도로 귀양 간 것이 다행이었다.

 세한도는 귀양생활중 김정희가 남긴 그림이다. 김정희는 젊어서부터 그림과 북학에 관심이 많았다. 1644년 조선이 물심양면으로 사대해온 명이 망한다. 우리는 청에 당했어도 설마 명까지 하던 조선인들에게 명의 멸망은 충격이었다. 특히,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의 충격이 컸다. 그도 그럴것이 일단 사대하고 배울 대상이 사라졌다.  도덕이나 학문적으로 완벽하다고 느꼈던 나라가 일개 야만민족에게 망한 것이다. 이런 사태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우선 명의 멸망은 도덕적 쇠퇴와 그로인한 사상적 혼란에서 찾았다. 성리학의 피상적인 도학적 공리공론이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후 학문의 흐름은 경학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실용적인 경세의식을 강조한다. 때문에 경학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고증적 방법론이 떠올랐고, 실용적인 연구와 학문에 대한 관심이 증폭한다. 조선의 실학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처음에 조선인들은 무관심했다. 청은 야먄의 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명의 잔존세력이 결국 제거되고 청이 안정화하자 청문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다. 주체는 정조였다. 그는 청의 문물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북학이 시작되었고, 청의 주요 지식인들이 사망한 후 수십년이 지나서야 그들을 공부하던 조선인들에게 그들과 현시대를 함께하며 학문을 연구하자는 병세의식도 자리잡았다. 정조 사후에도 북학의 유행은 가속화하였고, 중국 북경에 다녀오는 연행은 조선 지식사회에서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잡게 된다. 인싸의 필수 요소가 된 것이다.

 당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화를 중시했다. 그림과 시를 표현방법만 다르지 하나로 보고 함께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조선사회는 시를 중시한 반면 그림은 천시했다. 때문에 연행을 통해 서화와 시를 모두 중시한 추사 김정희는 사실상 조선에서 최초로 학예일치를 이룬 사람이 된다. 전통시대 그림은 전문화가나 민간에서 그린 그림과 문인들이 그린 그림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문인들이 그린 문인화는 북종화와 남종화로 구분하는데 남종화는 사물의 형상보다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묘사하는데 중점을 둔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그래서 당연히 남종화가 된다.

 추사는 연행을 통해 짧은 만남이었지만 옹강경이라는 당대 최고 학자의 제자가 된다. 완원이라는 학자와도 교분을 쌓았다. 추후 서신을 주고 받으며 학문적 교류가 계속되고 추사의 학문적 깊이는 더해갔다. 추사는 학문에 접근하는 방법으로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작업을 점차 연구해갔다. 당대의 두부의 시를 알고 싶다면 명청대에서 대표작에서 시작해, 송대, 원대, 그리고 두보로 접근하는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두보의 아류가 되지 않고, 그와 동등한 입장에서 같은 경지에 오를수 있다고 본 것이다.

 추사는 호 가 무척 많았다. 무려 백개에 달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이름에 관한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 현대인은 하나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지만 과거의 양반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태어나며 어릴적 이름은 아명이 주어진다. 아명은 대개 깊고 큰 의미보단 다소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이름이다. 그러다 성인식은 관례를 하게되면 우리가 아는 이름이 부모로부터 주어진다. 김정희가 그것이다. 그리고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에서 주로 스승으로부터 '자'가 주어지며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자신이나 친구들이 그에 걸맞는 '호'를 붙여준다.  자신의 이름이 성인이 되어가며 부모로부터 주어지다가 스승 및 친구 자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조선시대의 이름짓기는 주체성의 확립이자 홀로서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며 그린 것이다. 그는 유배지로 향할적만 해도 자신의 친우가 안동김씨의 일파중 하나여서 오래지 않아 풀려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유배생활 3년만에 죽자 희망은 사라진다. 그리고 젊어서부터 그렇게 친하던 친구들도 하나하나 교류가 끊어져간다. 정계에서 안동김씨들의 위세는 사그라들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자신이 추천했던 이상적이란 역관만이 추사에 최선을 다한다. 연행을 자주다니는 직업이다보니 추사가 원하는 청의 책이나 서화등을 구해준다. 추사는 이상적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세한도를 그에게 준다.

 세한도는 당대 그림들과는 좀 다르게 조선의 종이로 만들어졌다. 황량한 마음을 사치품은 중국 종이에 담을 수 없어서다. 또한 종이를 이어 붙여 길게 그렸다. 나무는 네 그루엔데 노송인 소나무는 종을 알 수 있지만 나머지 3종은 침엽수일 뿐 알수 없다. 소나무나 잣나무등 침엽수가 겨울에도 버티기에 사대부로 부터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오래 사랑받았다. 노송은 보통 추사자신으로 보는데 아직 소나무이지만 오랜 유배로 꺾이고 망가지며 외로움이 느껴진다. 노송의 가지로 제목과 인장이 연결된다. 이런 독특한 인장으로 인장도 세한도에선 작품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이상적은 이를 북경에 가져간다. 당대 중국학자들은 워낙 유명했던 추사와 그의 작품 그리고 이들의 우정을 보며 감탄한다. 세한도의 이런 배경을 알고 나니 그림이 더욱 쓸쓸히 느껴진다. 세한도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처량함과 그러면서도 아직 굴하지 않음 그리고 친우에 대한 우정이 담긴 그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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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의 도시 가이드
제프 마노 지음, 김주양 옮김 / 열림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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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건축하면 당연히 건축가나 예술가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은 도둑을 주제로 건축과 도시를 다룬다. 왜냐하면 도둑이야말로 건축가나 설계가 못지 않고 건물과 도시에 대해 잘 알고 공부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도둑은 적어도 자기가 털고자 하는 건물의 구조와 설계 및 설비, 보안에 대해 빠삭하게 알아야 한다. 그것도 모자란다. 시간도 중요하다. 같은 경로로 들어가더라도 언제는 되고 언제는 안되기 때문이다. 도시에 대한 것도 중요하다. 절도에 성공했어도 도주에 실패한다면 모든건 물거품이니까. 그래서 건물 인근에 차를 대기는 적합한지. 도망갈 곳은 적당한지. 지하철이나 사람이 많은지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이 책은 이런 도둑의 입장에서 목표물인 건물과 도시를 조망한 책이다. 그래서 독특하고 재밌는 지점이 좀 있었다. 재밌는 관점은 도시 설계 자체가 도둑을 양산한다는 관점이다. 도둑입장에서는 분명 털기도 좋고 도망가기에도 좋은 도시란게 있다. 대표적인예가 LA다. LA는 미국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나중에 개발되었기에 광역도로망이 발달했다. 이는 도둑 입장에선 차를 갖고 와서 대고 절도를 한 후, 바로 도망가기에 매우 용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 일부 은행들은 매우 보안이 허술한 도로변에 위치에 도둑들에게 매우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90년대 LA에서는 매일 45분마다 은행절도가 일어났다고 하니 정말 가관이 아닐수없다. 더 웃긴건 은행측의 대처다. 이 정도면 은행을 옮기거나 보안강화를 고심할만도 한데 면멸히 수지타산을 따지 은행측은 보안요원을 두어 보안을 강화하거나 옮기는 비용보다 절도가 싸다가 판단했다. 자신들의 보안 비용을 어쩌면 경찰, 즉, 일반 시민에 전가한 셈이다.

 또 다른 재밌는 개념은 포획주택이다. 범죄가 많고 나라가 넓어 검거율이 50%에 불과한 미국에서는 포획주택을 이용한 절도범 검거가 가능하다. 일종의 함정수산데 말이다. 포획주택은 우선 절도범의 프로파일링에서 시작한다. 녀석의 동선, 그리고 성향등을 면밀히 검토해 털만한 주택을 만든다. 이 주택은 정말 일반 주택과 똑같아서 절도범은 자신이 잡히고서도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고 한다. 절도범은 포획주택을 털면서 잡히기도 하고, 혹은 그 과정에서 집에 설치된 다양한 장치에 의해 증거를 다량 남기게 되어 결국 체포된다.

 재밌는(?)절도 사례들도 좀 있다. 한 일당은 수도관을 따라 수km의 땅굴을 파서 은행을 털었다. 그들은 사륜바이크를 이용했는데 긴거리를 이동하고, 훔친 물건을 다시 실어나르기 위함이었다. 절도범은 쓰레기통도 이용한다. 거대한 미국식 쓰레기통이 어느날 한 건물 옆에 등장한다. 이를 신경쓰는 경찰이나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쓰레기통안에는 쓰레기 대신 절도범 무리가 매일밤 등장한다. 그들은 쓰레기통에 붙은 건물 벽을 부시기 사작한다. 이 작업은 하루에 끝나는 경우도 있고 수주에 걸친 프로젝트가 되기도 한다. 파낸 흙벽들은 치밀하게 인근 수로로 모두 흘려보내 증거를 남기지 않곤 한다. 또한 건물에 싸인 쓰레기 더미도 절도의 도움이 된다. 그대로 올라간 옥상쪽으로 침입하는 것이다. 어떤 일당은 동료를 캐리나 커다란 박스로 위장해 이용하기도 한다. 한 고급 주택에 고급진 커다란 가구를 배달한다. 당황한 가족에겐 먼 해외의 친척이 유산으로 배송한거라고 한다. 미국은 이민자 국가니 조상중에 하나 그런사람이 있을 법도 하니 먹히나 보다. 하여튼 그 가구에 숨어있던 도둑은 밤에 나와 집을 턴다. 그리고 며칠후 일당이 다시와 택배배송이 잘못된거라고 말하며 가구와 동료 귀중품을 같이 가지고 나간다. 도둑들은 같은 구조를 가진 집들을 선호한다. 아마 미국의 도둑들은 한국에 오면 환호할 것이다. 같은 구주의 아파트 단지와 주택단지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이얼마나 도망가기 힘든 나라인지를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을 것이다.(높은 인구밀도, CCTV, 좁고 꽉찬 도로때문이다.)

 이 책은 흥미롭지만 내용이 깊진 않다. 좀더 구조적이고 학문적인것도 기대했는데 사례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더운 여름밤에 가볍게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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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19-07-30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흥미로운 책이네요. 참지 못하고 주문했습니다...ㅎㅎ

닷슈 2019-07-3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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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 미술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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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방대한 서양미술사 중 근대 작가의 삶과 작품, 그들의 세계관을 담아낸 책이다. 매우 쉽게 썼고 사생활 비중과 그것이 작품세계에 미친 영향을 많이 담아냈기에 매우 쉽게 읽을 수 있는 편이다. 가벼운 듯 하지만 나름 깊이가 있고, 작가의 상상도 제법 재미를 준다.

 항상 미술가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못하는 편인데. 왜인지 생각해보니 그들의 얼굴을 모르는 것도 제법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다. 미술책들은 무척이나 작가들의 작품을 상세히 다루고 컬러도판을 아낌없이 실으면서도 이상스레 정작 작가의 얼굴엔 무관심했다. 그런데 이책엔 매 작가의 사진얼굴이 나온다. 사진 발명이 일어난 근대 작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예상외로 괴팍할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얼굴은 평범하다 못해 잘생기기까지 했다. 물론 현상도가 떨어지고 사진자체가 작으며 주름과 세월을 잡아내지 못하는 흑백사진이란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하여튼, 사진은 그들의 얼굴만 잘 나오게 한건 아니다. 그들의 작품세계도 변화시켰는데 신이 만든 세계에 대한 모사, 그리고 종교적, 신화적, 정치적 인물과 사건 대한 포장이 작품의 목적이었던 것이 사진의 등장으로 작가 주관의 세계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사진이야말로 최고의 모사가 가능하니 더이상은 모사로는 승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기 근대작가들의 작품은 매우 실험적이고 파괴적이며 독특하다. 그러니 오늘날에도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런지. 책에 등장하는 뭉크, 고흐, 프리다칼로, 에곤 실레, 클림트, 드가, 고갱은 자신의 주관에 의해 세계를 매우 독특하게 그림과 색상으로 표현했다. 거기엔 평소 그림의 대상이 되지 않던 계층과 사물을 표현하는 방식도 포함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상주의를 본격적으로 연 인물인 마네로 이어진다. 마네는 풀밭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로 전통을 철저히 파괴한다. 그의 영향을 받아 모네는 더 나아가 빛에 주목한다. 빛이 사물의 인상과 모습을 만들어낸 찰나를 기록한 건초더미 3연작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렇게 개인적이고 순간적이며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찰나와 변화에 몰두하던 인상주의에 제동을 건 것이 세잔이다. 세잔은 인상주의가 사물의 윤곽을 흐리고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인상주의의 뜻은 존중하되 그 표현방식을 달리했다. 사물의 진정한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인데 그 방식으로 그는 색상과 형태를 택한다. 그래서 세존은 입체주의와 색채를 드러내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세잔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게 피카소와 마티스다. 책은 피카소 편에 마티스를 같이 다루는데 둘은 라이벌이었다. 나이는 마티스가 훨씬 많았으며 입체주의 대가로 이미 파리에서 인정받고 있었지만 젊고 야망찬 피카소는 마티스의 입체주의를 빠르게 따라가며 야생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훔쳐 먼저 작품화하기까지 한다. 좌절한 마티스는 수십년간 고전하지만 스페인의 문양과 색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피카소와 다시 경쟁한다. 말년 둘은 서로 화해하고 서로의 작품은 서로의 색깔이 묻어나는 묘한 지경에 이른다. 입체의 피카소는 문양과 색상을 마티스는 입체를 쫓는 식이다.

 인상주의에 마무리를 찍은(?)것은 마르셀 뒤샹이다. 샘으로 유명한 그는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을 작품화 하려 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상주의든 입체주의든 야수파든 모두 회화라는 틀에 갇혀있던 미술계에 뒤샹은 과감히 오브제란 개념을 새로 던진다. 그는 샘작품을 여러개 제작해서 팔기까지 했다. 스스로가 스타가 되고 작품을 양산해 팔아내는 이 방식은 미국의 팝아트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한다. 실제 훗날 앤디워홀이 딱 그렇게 한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재밌다. 대입초년생이나 이웃들에게 선물용으로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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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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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한국예능에 새로운 형태는 아니지만 섭외 인물을 전례없이 각 분야 전문가들로 하면서 재미와 깊이를 동시에 잡았던 프로 알쓸신잡. 짧게 시즌 1-2를 끝냈지만 그 때 유현준이란 사람을 처음 알게되었고, 그의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봤었다. 매일 공간을 향유하고 그로인해 오만 감정을 느끼면서도 문외한이었는데 그 책 덕문에 조금이나마 건축에 관심이 생겼더랬다. 그리고 그의 신작이 거의 일년만에 나왔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가 좀더 그의 건축에 대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집대성한것 같았다면, 이번 신작은 자신의 생각과 경험이 더 뭍어나는 책이었다. 그래서 읽기는 좀 더 쉽고 감정이입도 더 되지만 깊이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다. 하지만 재밌는 책임은 틀림없다.

 이번 책은 도시야말로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의 에드워드 글레이져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도시로 사람이 모여들고, 생각의 교류가 자연스레 많아지면서 혁신적이 사고와 발명이 폭발적으로 많아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많아지면 네트워크가 생겨 혁신이 일어나는 것인데 우리의 수도 서울은 사람만 많지 건축과 공간이 사람을 서로 단절시키는 형태라고 비판한다.

 처음으로 지적하는 곳은 한국의 공립학교다. 저자는 한국의 공립학교는 사실상 교도소와 구조가 같다고 말한다. 수용과 감시가 주 목적이라는 것. 교실은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이며 천정이 낮고, 운동장을 비롯한 바깥 공간과의 접근성이 나쁘다. 문제는 저층건물일수록 사람들간의 인적 교류가 활발해지고 천장이 높을 수록 창의성이 발현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저층형 건물로 학교를 구성하는 '스머프 마을'형 학교를 제시한다. 그런 학교에선 학생들이 학년이나 반이 바뀌어 건물이 바뀔때마다 매번 다른 풍경과 앞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또한 저층이라 다른 학년 반과 인적교류도 많아지고, 건물을 저층이라 천정도 높다. 저자는 이런 학교를 제시했는데 교육청 시설 관계자들은 이런 저런 안전상의 우려와 규제를 들어 허락을 하지 않더란다. 관성과 자기 편함에 젖은 사람이 너무 많아 도무지 혁신이 안되는 나라다. 오히려 유현준의 생각을 교육감이 반겼단다.

 다음으로 말하는 곳은 기업의 사옥이다. 기업의 본사 사옥은 그 기업의 이미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 외형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고층으로 사옥을 올리곤 하는데 고층사옥은 무거운 건물을 잔뜩 올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크고 높다는 점에서 외부사람으로 하여금 그 기업의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느낌이 들며 내부 공간이 층으로 단절되어 각 부서간 의사소통이 어렵게 된다.

 고층사옥말고 밥상머리 사옥이란것도 있다. 고층건물은 필연적으로 엘리베이터를 위한 코어가 필요한데 이 핵심 코어부분을 비워놓는 것이다. 즉, 가운데가 뚫린 건물이 된다. 그러면 건물 각 층마다 서로를 바라 볼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 좀더 유대감이 형성되어 고층사옥의 단점을 보완하게 된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보다 감시당하는 느낌도 생길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평형사옥이다. 수평형 사옥은 고층사옥과 다르게 저층이면서 수평으로 넓은 사옥이다. 미국에서 생겨난 것인데 미국 동부의 맨하탄은 단단한 암반이고 섬이기에 토지가 부족해 고층사옥이 발달했지만 실리콘 벨리의 캘리포니아는 사막이라 땅은 많고 반면 지진이 잦아 낮고 넓은 건물이 적합했다. 이래서 생겨난 것이 수평형사옥인 것이다. 이 사옥은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 회사원들의 창의성과 수평적 관계에서 생겨나는 혁신적 사고를 중시하는 기업에 적합하다. 그래서 애플은 도넛 모양의 수평형 사옥을 만들어 서로가 연결되고 도넛의 가운데에는 거대한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이 수평형 사옥도 단점은 있다. 외부인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어렵고 저밀도 지역에 주로 위치하다보니 주변 도시조직의 이용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가 입는 옷이나 액세서리도 공간과 관련한다. 미국의 힙합가수들은 유독 후드티를 많이 입는데 저자는 이 점도 공간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후드티를 입는 힙합가수들은 대개 빈민 출신인 경우가 많은데 가난으로 그들 자신만의 공간이 부족한 상황이다. 후드티를 입으면 주변이 가려져 자신만의 공간이 생겨난 기분이 들게 되는 것.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커다란 헤드폰이나 이어폰으로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는 것도 공공장소를 자신만의 사적 공간으로 바꾸는 행위이며 마이클 잭슨의 장갑역시 이러한 의미로 보아야한다는것이다. 재밌는 해석이었다.

 우리 청소년 같은 경우도 공간 부족에 허덕인다. 그들은 학교에서 감시당하고, 집에서도 물론이며 집과 공조한 학원에서도 감시 받는다. 그래서 그들이 향하는 곳은 편의점이다. 편의점은 맛있는 간식거리도 풍부하고 그런 핑계로 질책없이 충분히 갈수 있는 곳이며 점원과 cctv의 존재로 안전이 확보된 곳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청소년의 용돈으로 이용이 충분히 가능할 만큼 저렴하기도 하다. 공적으로 이용할 만한 공간이 절대부족한 한국에서는 사람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함에 따라 돈으로 공간을 구매하는데 편의점이나 노래방- 커피숍이나 모텔-자동차 등의 순으로 공간의 확보가 진행되간다.

 마지막으로 재밌었던 부분은 공공성과 개방성, 접근성에 대한 업급이었다. 저자는 3차선의 법칙을 말한다. 저자가 책에서 주창하는 것인데 자동차 도로 차선이 3차선이하일 경우까지 사람들이 인도를 활용하여 걸어다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걷고 싶은 거리 조성을 위해 차로를 줄일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강남의 경우 주거지인 아파트는 물론이고 각종 상업시설들이 지나치게 부유층만을 위한 폐쇄적인 형태임을 지적한다. 강남의 발전과 공공성을 위해 보다 개방적인 구조를 요구한다. 서울 시내의 공원과 도서관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공원의 경우 갯수는 부족하지 않은 편인데 접근성이 낮다는게 문제다. 뉴욕의 경우처럼 지하철 역과 공원 지하철역과 공원들 간의 거리고 매번 걸어서 갈만한 거리인 1.5km 정도를 유지하며 연결하는 것을 주장한다. 또한 각 공원들도 들어가는 입구가 몇개 없을 정도로 접근성이 낮고 폐쇄적인데 거의 모든 부분으로 마을에서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을 제안한다. 또한 도서관의 경우 우리는 대형도서관의 주류인데 그것보다는 소형도서관을 각 마을 중심마다 접근성이 높게 배치하여 활용도를 높이고 각 도서관마다 다양한 색깔을 입히는 것을 제안한다. 무척 좋은 생각이다. 한강 다리중 보행교를 제시한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그러고보니 한강엔 보행자교가 없다. 한강이 매우 기니 중간중간 경험할만한 이벤트를 제공하는 장소의 필요성도 빼먹지 않는다. 저자의 건축 경험과 다양한 제안이 재밌게 다가오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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