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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 국제정치 편 - 역사 분쟁 · 무역 전쟁 · 이념 갈등 차이나는 클라스 4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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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는 클래스를 본적이 없다. 아이들 키우며 아내가 고장난 TV를 고치지 않은 탓이다. 수리비가 20만원이 나왔는데 새로사는게 차라리 낫지 않겠냐란 의견을 서로 나눈후 무려 3년을 TV없이 살고 있다. 좁쌀같은 성격에 누구도 적극성이 없어 이리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내가 그 대단했던 월드컵 사상 최대 이변인 러시아 월드컵 한국대 독일전 마저 주방용 조그만 TV로 시청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차이나는 클래스도 당연히 보지 못하지 않겠는가. 이대로라면 코로나가 다음 월드컵을 허락한들 역시 주방TV신세일 것이다. 

 이 책은 쉬운데 좀 알찬 지식들이 있다. 북한과 소련, 중국의 개혁 개방이다. 북한의 개혁 개방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우선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유학하며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고, 기득권을 물리칠만한 강력한 1인집권체제라는 점과 동시에 중국, 베트남이라는 성공적 모델도 같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소련을 개혁개방에 실패했다. 이는 소련이 절대빈곤이 아닌 중화학 공업중심으로 소비재가 부족해 돈이 있어도 소비재는 못사는 기형적 빈곤상태였으며, 개혁개뱡의 주체였던 고르바초프가 불과 4세대 지도자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르바초프는 아예 기득권층의 저항을 물리치고자 민주정치를 감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억눌렸던 민족주의가 되살아나 소련연방은 여러나라로 쪽져 버렸다.

 반면 중국의 개혁개방은 성공한다. 중국은 우선 절대적으로 빈곤한 상태였고, 덩샤오핑은 무려 1세대 혁명지도자로 특별한 지위없이도 사실상 최강의 권위를 누린 존재로 개혁개방 반대세력을 억누를수 있었으며 사실상 일당독재이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집단지도체제로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으로 본다. 덩샤오핑은 민주체제가 매우 비효율적이고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언제든 분열가능성이 있는 중국을 분열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로 보았다. 때문에 중국은 한국이나 대만식의 민주화가 아닌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정치제도화의 길을 택했다. 정치제도화는 민주화는 아니지만 시민들이 원하는 국방, 치안, 사회복지, 경제성장등의 필수적 정치재를 제공해 안정화를 노리는 것이다. 

 중국은 때문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 정치재의 제공에 사활을 건다. 중국은 국유기업이 많은데 효율성이 떨어져 적자를 보는 경우에도 일자리의 제공이라는 사회적 역할때문에 적자를 국유은행이 보전해준다. 그러면 그 기업을 쓸데없이 살아남아 생산을 지속해 과잉생산을 일으켜 시장을 혼동시키고, 사회에 필요한 자원을 역시 쓸데없이 집어삼켜 좀비기업화한다. 중국의 체제가 유지되려면 매년 2천만개의 일자리가 요구되는데 공산당은 어떻게든 천 이삼백만개의 일자리를 생성하여 제공한다. 

 중국 공산당원은 무려 8900만에 달하는데 인구대비로 생각하면 소수다. 이중 겨우 2000명을 뽑아 5년마다 공산당 전당대회를 연다. 여기서 다시 200명의 정위원과 160명의 후보위원을 뽁고 이들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중앙위원회가 1년에 1-2회 열리고 중국을 좌지우지하는 엘리트집단이다. 또 여기서 중앙정치부에 속하는 25명의 위원이 있고 또 여기서 상무위원 7명이 선출된다. 시진핑은 중국의 상무위원직책중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 국가주석을 겸임한다. 국가주석은 상징적 권력에 불과하지만 총서기는 공산당 인사권자이며 중앙군사위원 주석은 무려 군지휘권자다. 사실상 모든 권력을 장악한 셈인데 시진핑 이전 부정부패한 기득권층이 공산당 지도부에 저항한 사건으로 인해 권력집중이 허용되었다. 시진핑은 이미 헌법개정으로 무한집권이 가능한 상태다.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이다. 글자그대로 종교와 공화정이 결합한 초유의 실험인 셈인데 이슬람 법학자인 최고지도자가 국가원수이자 성직자이고, 그가 군통수권과 전쟁성포권, 외교 사법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하지만 공화정 체제로 대통령을 놀랍게도 직선으로 선출하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는다. 이란의 국정은 최고지도자가 더 큰 영향력으 갖지만 대통령 및 공화정 인사들과 협의를 하는 체제이다. 양자의 조화랄까나. 

 이란이 이리된데는 영국과 미국의 탓이 크다. 이란은 본디 오랜 기간 왕정체제였다. 영국은 이란의 유전을 개발해 이란 왕조와 결탁했고, 영국이 이득을 취하는 대가로 사우디처럼 왕가는 보호받았고, 이득을 얻었다. 그러다 모함마드 모사데그란 자가 등장한다. 그는 영국이 자국의 석유로 이득을 취하고 이란 국민이 가난한 것에 분개해 영국이 장악한 석유를 국영화해버렸다. 이에 영국은 미국을 종용해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그를 축출한다. 당시 한국전쟁 직후로 영국은 사회주의자인 모사데그가 소련과 결탁할 우려를 제기해 미국을 설득했다. 모사데그 이후 이란은 급진적인 백색혁명으로 서구의 여러 문화와 제도를 도입한다. 이란에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 같은 급진적 변화는 많은 이란의 전통주의자들에게 경각심과 반감을 불러온다. 또한 이후 팔레비는 부를 쌓기만 하고 역시 이란 국민을 돌보지 않는다. 결과는 호메이니 혁명이었고 이란은 지금의 모습이 된다. 

 68혁명은 오늘날 세계를 만든 결정적 사건이다.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64년 TV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이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본게 혁명의 계기였다. 자유주의의 수호를 자처하던 미국에게서 유럽의 젊은이들은 제국주의적 면모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혁명은 파리를 시작으로 독일, 런던은 물론 철의 장막을 넘어 동유럽인 체코 프라하의 봄으로 이어진다. 대서양을 건나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거기에 일본까지 간다. 물론 독재의 압제하에 있던 한국은 아니었다. 68혁명 이전 독일 사회는 지금의 일본처럼 과거청산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총리가 나치당원 출신이니 정말 지금의 일본과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하지만 68혁명이후 독일은 지금의 독일로 변모한다. 모든 분야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이 68혁명이 한국엔 도달하지 못한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권으로 독재가 극에 달할때였으며 오히려 베트남 전쟁에 40만에 달하는 병력을 파병한 나라였다. 유럽의 68혁명세대에는 한국은 86세대가 대응된다. 한국민주화에 큰 공헌을 한 세대이며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 세대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이후 오랜 세월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20년전 비교적 30대의 젊은 나이에 정치권력을 차지한 이들은 5-60대가 된 지금도 자리를 차지한다. 그 덕에 한국정치세력은 세대, 그리고 직능에서 대표성이 크게 떨어진다. 직능에선 언론, 법률, 교수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책은 한국민주주의의 실현은 광장이 아닌 일상에서의 민주주의가 실현될때 가능하다고 본다. 광장과 정치에선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실생활인 가정과 직장, 학교에서는 유교적, 군사적 문화가 혼합한 권위주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 후엔 북한이 통일한국정치권력의 캐스팅 보드를 잡을 것으로 본다. 우린 독일의 통일을 서독이 주도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동독인들이 많은 봉기와 적극성을 보였다. 그리고 메르켈 총리를 비롯하여 통일 이후 독일의 집권자는 대개 동독 출신이었는데 이는 정치권력이 균형적이었던 서독의 세력을 동독 세력이 선택해야 집권이 가능했다는 정치지형과 관련한다. 이는 수구세력과 보수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상황과 매우 유사한데 소수지만 2천5백만의 북한시민이 캐스팅 보드를 쥐는 정치지형을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 호남과 경상이 대립하여 충청이 캐스팅 보드를 잡았던 묘한 상황과 유사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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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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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1 2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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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미술사 - 주먹도끼부터 스마트폰까지
이태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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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숙의 '시대를 훔친 미술'을 읽으며 시대의 정신 및 문명의 발달과 함께 호흡하며 서로를 견인해나가는 미술과 시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우리 미술 혹은 동양미술엔 이런 흐름이 없을까 궁금했다. 여러 책을 좀 보긴 했는데 그런 사조가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물론 동양과 서양의 역사 흐름은 다르며 역사를 단선적으로 보는건 위험한 시각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그런 흐름은 있다고 본다. 그러다 이 책 '이야기 미술사'를 보게 되었다. 분량은 무려 600쪽, 저자의 야심이 대단해 무려 구석기부터 현대의 한국미술을 총망라했다. 한국미술 전반을 아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직접 주요 유물의 발굴 및 견학에 참여한 저자의 식견이 빛난 책이다. 아마도 체한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소화한 것을 조금씩 써본다.


1. 토기와 도자기

 서양과 다른 동양의 미술 장르는 확실히 토기, 도자기다. 서양은 미술이 실용과 확실히 분리된 듯 하지만 동양은 그렇지 않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우리의 달항아리는 사실 관상용이 아니라 고기 따위를 담아놓던 보관용 그릇이었다. 연구에서 달항아리 중간 부분 기름층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고기따위를 보관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한국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로 시작한다. 교과서에 나온 것과는 다르게 빗살무늬 토기는 무척 큰데 50cm에 달하기도 한다. 대체 이 빗살은 왜 있는걸까 궁금증이 드는데 단순한 장식이란 견해에서, 주술적 의미, 아무표시도 없는 빈공간에 대한 불안감의 대처, 그리고 실질적 용도로 마찰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것까지 다양하다. 신석기 후기로 들며 토기는 작아지고 아래는 편평해졌으며 크기도 작아지는 경향이 뚜렷해졌는데 이는 음식을 큰 그릇에 담아놓고 같이 먹던 습관에서 점차 작은 크기의 그릇에 덜어먹는 형태로의 식습관 변화를 의미한다. 신석기 시절 토기는 가까우면서도 먼 한중일이 모두 상당히 다르다. 중국의 토기는 대부분 채색토기로 화려하고 검고 붉은 채색이 많은데 이 시기 인도, 서아시아, 아프리카의 것이 유사하다. 한국의 토기는 빗살과 무채색인데 만주, 몽고, 핀란드, 우랄, 알타이의 북아시아 쪽과 유사하다. 반면 일본은 한국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조몬시대 이르러 구연 부분을 조각하는 특유의 형태로 차별성을 드러낸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빗살무늬 토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위 부분에만 점을 찍는 가벼운 띠무늬 형태 토기가 많아진다. 이 시기부터는 물레가 생겨나 세련된 둥근 형태의 토기 제작이 가능해졌다.

 삼국시대에 토기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토기가 매우 다르다. 백제와 고구려는 토기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형태가 무른 연질의 토기를 주로 제작했다. 하지만 신라와 가야는 단단한 경질의 토기 생산이 가능했다. 이는 가야 지역의 토기를 고온에서 구워내는 기술로 가능했다. 신라 토기는 가야 토기의 기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했는데 6세기 무렵이면 무려 1000도 이상에서 토기를 구워내고 유약을 살짝 바르기 시작했다. 고구려인들이 주로 벽화를 통해 삶을 표현한 반면 당대 신라인은 토기에 장식한 토우나 상형토기로 그들의 삶과 문화는 나타낸듯 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토기에서 도자기의 시대가 열린다. 유약을 본격 사용하고 고온에서 경질도기와 자기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도자기는 단연 청자다. 동북아시아에서 청자의 시작은 중국인데 청자는 당시 매우 귀한 사치품이었던 옥을 대신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즉, 어떻게 하면 그릇에 옥색을 내느냐가 초점이었던 것이다. 청자와 백자는 유약과 1200-1300도의 가마에서 구워내야 생산이 가능하다. 즉, 유약과 고온기술이 초점이다. 그래서 두 기술이 발달했는데 도자기는 흙과 불, 유약에 따라 그 결과가 매우 달라진다. 청자는 유약에 철분을 섞에 초벌하면 붉은 색이 되고, 이를 다시 재벌하면 푸른빛을 띤다는 것을 알게 되며 가능해졌다. 이 유약에 철분이 적으면 푸른 빛이고 다소 많아지면 탁한 갈색을 띠는 푸른빛의 청자가 된다. 가마기술은 비탈에 짓는 비탈가마와 평지가마가 있다. 비탈가마는 고온에서 산소를 차단하는 환원법으로 청자가 주로 갈색조나 황갈색조라 만들어지며 평직마에서는 산소가 많이 투입되는 산화법으로 맑은 녹색과 청생의 푸른빛의 청자를 만들어낸다. 고려는 이 중 비탈가마 형태를 받아들였다. 고려 청자의 톡특함은 유명한 상감이다. 상감은 본래 청동기에 금, 은, 보석, 뼈등을 박아 넣은 금속공예였는데 고려는 이 상감을 도자에 넣었다. 성형한 그릇의 표면에 백토나 자토를 채워넣었는데 문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유약이 얇아지다보니 상감청자의 유색은 약간 청회색조가 되었다. 조선은 초기엔 고려의 청자를 계승해 분청자가 유행했다. 분청자는 청자에 백토를 분장한 자기를 말한다. 그러다 세종대에 이르러 명나라의 청화백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청화백자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이로써 청자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2. 불교

 한국 미술에 불교를 빼놓을 수 없다. 불화나 사찰, 탑, 불상이 모두 불교에서 비롯한 예술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스투파라는 신도들이 예배를 하던 탑이 있었다. 스투파는 인도에선 둥근 사발을 뒤집은 듯한 복발형으로 무덤과 유사한 형태였다. 하지만 중국에 스투파가 유입되어 다층탑 형식과 결합하여 3-5층의 전망형 망루와 비슷한 탑으로 변모한다. 다만 중국에선 목탑이 대세였는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화강암이 많은 한국의 자연적 특성과 결합해 석탑이 유행한다.

 처음엔 탑이 중심이었지만 불상이 유래하며 불상의 인기가 탑을 넘어서게 된다.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본 뜻 것이기에 사리가 보관된 탑보다 신앙과 관련하여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해 신자들을 포섭하기 더 쉬웠다. 그래서 사찰도 탑 중심에서 불상을 모신 금당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불상 중 천불은 같은 모양과 크기를 지닌 천개의 불상을 의미하며 삼존불은 부처를 중심으로 미륵반가사유상과 보살상이 위치한 것이다. 7세기 전반엔 삼국에서 미륵반가사유상이 유행했는데 아무래도 전란과 나라의 멸망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이 결합한듯 하다. 반가사유상은 글자그대로 오른 다리를 왼다리에 걸치고 그 오른 무릎위에 올린 오른 팔로 턱을 괸채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의 불상이다. 중국의 반가사유상은 대개 석불이지만 한국은 금동불로 제작을 했다.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6-7세기 일본 불상과는 달리 적송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일본 불상이 대개 조립식이었던 것에 반해 반가사유상은 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일본 반가사유상은 한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삼국시대 탑과 불상의 배치인 가람배치는 지역마다 다르나 탑하나에 세개의 금당을 배치한 고구려식 1탑 3금당이 일반적이었다. 백제에는 3탑 3금당, 3탑 1금당식의 독특한 형태도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팔각형의 목탑이 많았고, 신라와 백제는 목탑과 석탑이 공존했다. 백제미륵사는 1탑 1금당으로 가운데 목탑이 있었고, 동서에 석탑이 있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다. 백제 사비시대의 정림사지 5층석탑은 목탑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한 완성형 석탑이다.1층의 탑신을 높게 설정하고 2층부터 탑신의 너비와 높이, 길이를 급격히 줄여 시선이 1층에 머물게 하였고 1:1.618의 황금비를 나타냈다. 

 남북국 시대 신라는 불교를 이용해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삼민을 통합하고자 하였고, 왕즉불의 이념아래 전국토를 불국토로 이념화했다. 이에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이 건립되었고, 석굴암을 만들었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자연 석굴이 많아 석굴 사원을 만들기 손쉬웠지만 신라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에 거대한 인공암반을 그 산꼭대기에 올려놓고 인공석굴을 조성한게 석굴암이다. 그리고 불교의 소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범종도 많이 주조한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불교는 쇠퇴해 석탑이나 조형물의 조형미가 쇠퇴한다. 몰락한 왕권을 상징하는듯 한데 불상의 얼굴도 이상적이고 근엄한 것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얼굴도 우리와 유사해진다. 신라 말기 선종이 유입되었는데 이 선종은 중앙집권적인 교종과는 다르게 누구에게나 부처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지방세력의 입맛에 잘 맞았다. 때문에 이시기 지역색이 강한 불교 문화가 발달한다.

 고려가 들어서며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영향인지 고구려식 팔각형 목조탑형식을 따른 다각다층석탑이 유행한다. 13-14세기 고려말에 이르면 권문세가의 영향으로 취향이 담긴 화려하고 장식적인 불화가 많이 만들어진다. 이 불화는 적록의 보색대비를 강조한 고구려 벽화와 비슷하여 광물색의 원색조와 적록의 보색대비가 특징이다. 고려불화는 고급스럽게 비단에 적, 녹, 청색을 중심으로 흰색과 황색, 금색, 은색 물감을 사용하였다. 뒷면에도 물감을 칠하는 배채법을 사용하여 적록을 선명히 하고 변색을 막고 그림에 안정감을 주었다. 변상도는 불경의 주요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인데 14세기의 미륵하생경변상도는 옅은 선묘방식이 퇴락하고 미륵불의 이목구비가 매우 짙게 표현되어 조선초기 불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13-14세기는 원의 영향으로 진흙으로 구운 후 금박을 입힌 소조불이 나타났고, 3,5,7,9의 홀수탑에서 십이라는 숫자를 중시하는 화엄종의 영향으로 경천사지 10층석탑이 그것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불교는 탄압받지만 왕실의 후원과 민간의 신앙으로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한다. 특히, 전란후 승병의 활약으로 왕조보존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가 나서 불교를 중흥하는데 인조와 숙종대에 전국의 사찰이 새로 재건될 정도였다. 전란 후 조선에서는 희생된 수많은 이들을 기리는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의식이 활발했다. 때문에 천도의식을 위해 거는 불화인 괘불이 많이 제작된다. 괘불은 무려 10m크기로 법당 밖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때 거는 탱화였다. 


3. 조선시대 회화

 동아시아에서 산수는 만물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잘 부합했다. 산수는 이로인해 수신의 의미를 갖고 상징적 의미가 커지면서 산수화를 그리는 일이나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는 문화가 유학자들사이에서 보편적 문화로 자리한다. 산수화는 중국에서 시작해 조선도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중국의 기법은 크게 북종화와 남종화로 나뉜다. 북종화는 부벽준 기법으로 붓을 옆으로 눕혀 도끼처럼 찍는 방식으로 깎아지른 절벽이나 거친 절벽의 표현에 적합하다. 남종화는 피마준과 미점 기법으로 피마준은 갈필로 그려 산과 언덕의 주름을 표현하고, 미점은 붓을 옆으로 눕혀 툭툭 찍는 기법으로 안개를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조선 초기 산수화는 북종화의 영향을 받았다. 대가인 안견은 몽유도원도에서 북송대 거장 곽희의 산수기법은 운두준법을 사용하여 능선과 주름은 마치 구름같이 표현하였다. 후원자인 안평대군과 안견의 일파는 15-16세기 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양식인 남송화 기법이 유행한다. 기법에 이어 흐름도 크게 변하는데 17세기 중반 진경산수화가 시작되고 18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통념과는 달리 진경산수화는 사실 실경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과거 관념적인 중국의 이상화된 풍경을 그린 것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제 풍경을 그리되 자신의 인상과 주관에 따라 과장과 변형, 여러 시점을 이용해 그린 것이다. 즉, 현실경치에서 성리학적 이상을 구축한 것인데 이는 당시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등장해 새로운 유교문명국을 조선에서 찾고자하는 소중화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정선이 유명하다. 그의 3대 명화는 박연폭도, 금강전도, 인왕제색도인데 모두 실경을 바탕으로 그의 이상적 바램이 구상된 그림이다. 금강전도는 토산과 암벽산으로 구성되었고, 양자는 마치 태극모양처럼 표현된다. 봉우리에 눈을 부각하기 위해 주변 배경을 암청색으로 처리한 것도 돋보인다. 정선이후  강세황과 심사정등로 대표되는 신조류가 등장한다. 정선은 조선의 명승을 통해 이상을 꿈꾼 마음의 그림을 그렸고 이는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 노론 세력의 정신세계를 대표한다. 반면 강세황의 제자인 김홍도식 사실화법은 박지원, 정약용등의 실사구시학파의 입장과 유사하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산수화와 초상화 일색이던 그림판에 풍속화가 등장한다. 조선후기 상업이 발달하며 서민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결과인데 애정소설이 유행하고, 흥과 신명의 감정을 드러내는 당나라 시풍이 완연했으며 음악도 기존의 느리고 절제된 음률이 빨라지고 변화폭도 커졌다. 그림에도 이게 반영된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이런 흐름의 초기 주자로 평범한 서민들의 노동을 화폭에 담는 혁신적 변화를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에는 풍속화가 도화서 화원의 정식 시험과목으로 독립되기에 이르렀으며 김홍도는 단원풍속도첩에 무동, 씨름도, 서당등 25개의 화폭을 남겼다. 조선 후가 풍속화는 여성도 대상을 많이 부각되었는데 김홍도의 제자 신윤복은 남여 애정지사를 담은 노골적 성적 이미지를 그림에 담아 당대 신분사회를 질타했다. 이는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고 예교와 풍속이 느려진 사회상을 반영한다. 19세기에는 관찰을 통한 사실 위주의 그림이 유행하여 당대 화가들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좋아하는 대상을 개성적인 스타일로 그려냈다. 반면 김정희 풍의 문인화도 사대부가 무너지는 시기임에도 아이러니 하고 강조되어 갔다.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미술의 많은 변천과 양상을 담아냈다. 기대하고 예상했던 서양과 같은 고대인문주의에서 중세 종교 인문주의 낭만주의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이르는 시대적 흐름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흐름이라면 왕조의 흥망에 따라 초기 불교든 유교든 조금더 이상적인 흐름에서 후기에 이르러 사회적 법도와 왕조가 흔들리며 지방세력이나 백성의 요구에 맞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형국이다. 이런게 불교나 유교라는 그릇을 차용하여 반복되어 표현되는 느낌이다. 동아시아사가 발전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동아시아 수력기반 농경왕조가 다소간의 발전은 해나가지만 생산 및 분배체제가 초기엔 잘 잡혀있다가 이것이 무너지며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는 설의 흐름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여튼 책은 상당한 한국 미술품을 책에 담아냈고, 정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국 미술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고 싶다면 볼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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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그림을 보는 법 - 전통미술의 상징세계
허균 지음 / 돌베개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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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란한 마음에 집에 쟁여놓은 동양미술책을 주로 보는 지금 이 글의 제목이 진짜 사실은 아마도 아니겠지만 ,하나같이 흐름이 느껴지지 않다는 아쉬움이다. 총론은 없고 각론만 있는 느낌들. 내가 그런책들만 샀을수도 있지만 본 몇권의 책들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반영되거나 시대를 선도해간 동양미술의 흐름을 좀처럼 느낄수가 없다. 그런 흐름자체가 부재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책을 쓸만한 전공자나 책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가장 가능성 높겠지만 내가 그런 책을 못본것일까. 하여튼 아쉬운 대목이다ㅏ.

 이번책도 그래서 감흥이 떨어진다. 지난번 본책 '옛 그림을 읽는 법'과 제목도 매우 유사하다. 물론 이 책이 더 먼저 나왔고 책의 내용도 좀 더 다양하다.

 이 책 역시 산수부터 다루는데 전반적으로 고미술에 드러나는 여러가지 주제를 설명하고 그림을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그래서인지 미술책을 보는 것인지 조상의 삶을 바라보는 것인지 좀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다.   

 이 책도 산수부터 다룬다. 하여튼 우리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조상들은 산수를 다루는데 경치와 흥취, 이치 세가지를 우선시했다. 경치는 글자그대로 자연을 그대로 보고 즐기는 것으로 실경산수화에 해당한다. 가장 품격이 낮다. 다음은 흥취로 산수를 보며 인간으로서 자연과의 교감을 즐기는 것이다. 다음 순위라 할수 있다. 마지막은 이치다. 산수화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느끼고자 함인데, 동북아에서 자연의 이치는 불교와 도교, 유교적 이치다. 자연을 통해 우주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지만 변하지 않는 이치를 깨닫기에 자연을 항시 변화한다. 실상 공즉시색이고 색즉시공이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인데, 이것이 동양적 자연질서의 이치다. 때문에 이치를 드러낸 산수는 우리가 잘 아는 산수화처럼 뭔가 그린듯하고 안그린듯하기도 하며 경계가 흐릿하고 여백이 무척많다. 그림자체에 이런 이치를 실현했기 때문.

 이처럼 뭔가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선비들이지만 복제를 항상 염원하는 유전자를 몸에 담고 생명체인 이상 그들도 속세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진 않았다. 그래서 오복이란게 있다. 오복은 다섯가지 복으로 수(장수), 부(돈과 출세), 강녕(몸과 마음이 우환없이 편한 것), 유호덕(덕을 쌓아 복을 얻는 것), 고종명(천명을 누리다 편히 죽는 것)이다. 이것이 그림에도 그래도 드러났는데 유교사회에서는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한 만큼 자손의 번창과 관련한 그림도 많다. 연꽃과 석류, 오이, 참외등이 자손의 번창을 드러내는 그림이다. 연꽃은 특이하게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겨나 조상과 자식이 연생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며 석류는 임산부가 좋아하는 신맛에 많은 씨의 숫자로 인해, 그리고 오이와 참외는 유독 과일이 많이 맺히고 가지치기가 심하여 그렇단다.

 재밌게도 고양이와 나비가 함께 그려진 묘접도가 장수의 상징이다. 이는 중국어의 발음때문인데 한자는 전혀 달라도 고양이 묘의 발음이 곡례라는 책에서 80을 의미하는 모와 비슷하고, 나비 접자의 발음이 90을 의미하는 질과 발음이 유사해서도, 즉, 고양이 나비 그림이 80-90의 장수를 의미하게 되는 셈. 이처럼 책을 보면 여러가지 복과 관련한 기원은 그 동물이나 상징물 자체의 성격에서 유래한 것도 있지만 이경우처럼 그져 발음이 유사하기에 그런것도 상당하다. 장수를 상징하는 그림중 기러기와 갈대가 함께 그려진 노안도 역시 갈대 노와 기러기 안자의 발음 때문이다.

 출세관련해서는 잉어, 닭, 원숭이 그림이 있다. 잉어는 고대 전설에서 잉어들이 용이 승천하는 용문앞에 모여 다투다 가장 훌륭한 한마리 만이 승천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게 바로 등용문이란 말의 시초다. 그래서 잉어그림은 출세를 상징하며 이 전설에 의하면 떨어진 잉어들의 머리엔 검은 점의 상처가 생기는데 이게 점액이다. 그리고 점액은 알려진 것처럼 과거의 낙방을 상징하게 된다. 메기는 비늘하나 없이 매끈한 몸임에도 대나무에 오르는 재능이 있다. 그래서 고난을 극복한 출세의 상징이 된다. 쏘가리는 궁궐의 궐과 발음이 비슷해 그리되었고, 원숭이는 제후의 후와 발음이 비슷해서 역시 그리된다. 수탉과 맨드라미 그림도 있는데 수탉의 벼슬과 맨드라의의 꽃모양이 마치 관을 연상시켜 그렇게 되었다. 관이 두개 인셈이니 출세도 보통 출세가 아니다.

 왕가에선 왕이 나라를 매우 잘 다스리면 상서로운 일이 나타난다고 하여 이를 중시했는데 상서로운 일이 생김은 곳 전설의 동물이나 좋은 일이 일어남을 말한다. 뭐 용이나, 기린, 해치, 봉황 같은 것의 등장이다. 실제로 그런일은 없었겠지만 이를 중시해 궐과 왕의 주변에는 이런 그림을 형상화한 건물이나 옷투성이였다.

 용은 상서로운 동물이지만 그자체가 강한 왕권을 상징한다. 용은 발톱수가 중요한데 중국의 황제가 발톱이 다섯개인 오조룡을 사용하였으나 조선의 왕도 오조룡을 썼다. 이는 황제 뿐만 아니라 중국의 친왕들도 오조룡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기회와 틈바구니를 노려 황제와 같은 상징을 쓰려고 애쓴 조선의 왕들이었다. 오조룡이 그렇고, 조상에게 왕이 아닌 '조', '종'을 쓴 것과 자신을 '고'가 아닌 '짐'이라 칭한게 그러하다. 하여튼 오조룡은 왕과 왕비, 사조룡은 왕세자와 세자비, 삼조룡은 왕세손이 써서 위계를 잘 드러낸다.

 색상과 관련한 것도 재밌는데 동양에서는 오방색이 색의 전부다. 서양에서는 색이 광학적인 색 자체를 의미하고 나중에서야 의미나 상징도 중요시했지만 동양에서는 색은 광학적 의미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훨씬 강했다. 동양의 오방색은 가운데가 황색, 동쪽이 적색, 서쪽이 백색, 북쪽이 검은색, 남쪽이 청색이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는 스스로가 중심이라 생각했기에 천자의 복색으로 황색을 썼으면 조선의 왕은 동쪽의 왕이란 점에서 적색의 곤룡포를 썼다. 그리고 조선의 신하들은 아주 고관이 아닌 경우는 청색을 입어 격을 맞추었다.  오방색은 상생의 원리에 맞추어지는데 색하나하나가 자연만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황은 대지를 청은 목을  적은 불을 백은 금, 흑은 물을 상징한다. 이들은 서로 보완관계로 오방색의 순서는 청-적-황-백-흑의 순서다. 그래서 옷이나 여러 물건의 오방색은 이 순서대로 배치된다. 실제로 색동저고리의 색띠들도 이 원리로 배열디었고, 잔치국수의 오색 고명도 그러했다고하니 무척 재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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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3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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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목은 사람이나 물건, 심지어 무형적인 것까지 그것의 가치를 알아 보는 눈이다. 안목이 높다면 다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는 그것만의 가치를 알아보는 셈이고 안목이 낮다면 그렇지 못한 셈이다. 코로나사태를 맞아 우리사회의 안목을 생각하게 된다. 사태에 대한 같은 대처를 놓고 어찌 이리 보는 안목이 다른지. 사회전반에 걸친 반지성주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어찌 자신의 자유로울 권리가 다른 사람의 안위에 우선할까! 

 하여튼 이 책 안목은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의 다른 책이다. 우리 미술을 보는 안목에 관한 책인데 뛰어난 미적 안목을 가졌던 우리의 미술가들과 그러한 안목을 갖고 예술품을 수장하고자 노력한 사람들, 마지막으로 유홍준의 안목으로 주목할 만한 우리 미술가를 소개하는 3개장으로 구성했다.

 이 책에서 우선 인상적인 부분은 도자기 부분이었다. 지금은 좀 관점이 달라진 듯하지만 서양미술의 입장에서 동양미술의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 중 하나는 도예다. 서양 미술사의 관점에서 도공은 그 역사자체가 매우 일천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이 아닌 기능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이유는 도공자체가 쓰임새가 목적이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기교와 디자인이 중요할분 예술가의 정신이나 개성이 발휘될 여지가 없다고 본다. 거기에 도자기에는 작가의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더욱 공예로 보는 관점이 강해진다.

 하지만 동양미술에서는 순수미와 사용의 분리가 엄격하지 않으며 회화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개인주의적 예술보다는 시대나 민족의 미감이 들어가있는 집단적 예술 성격이 강하다. 때문에 동양에서 모예는 마땅히 예술의 하나로 간주된다.

 우리 도자기에서 우선 주목할 시대는 고려시대다. 청자로 유명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는데 송대 소경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건국과 성읍, 궁전, 인물, 사찰, 풍속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어 고려의 모습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며 청자에 대해서도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청자에서 가장 큰 주제는 차와 술이었다. 다완에는 다도에 걸맞는 고요하고 맑고 정숙한 분위기가 있으며, 술은 감성적 해방이 허용되기에 술병과 매병에는 풍류와 낭만, 서정이 느껴진다. 그래서 술병에는 명시가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시명청자는 중국과 일본엔 없는 우리 고려청자만의 고유 특성이다. 이런 청자는 고려말에 들어 거의 생산과 사용이 사라진다.

 조선에 들어 청자는 거의 완전히 잊혀지고 백자의 시대가 시작된다.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크게 세가지 관점에서 비롯되는데 형태미와 빛깔, 문양이다. 동북아 삼국의 도자 중 일본의 것은 주로 빛깔에서 찬양받으며 중국은 형태, 한국의 것은 아름다운 곡선미로 주목받는다. 조선의 백자 중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달항아리다. 달항아리는 특유의 백색 빛깔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독특한 곡선으로 주목받는다. 달항아리의 곡선은 정확한 좌우대칭을 이루지 않으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데 이는 조선시대 기술적 한계에서 비롯된 미이다. 당시 전동이 아닌 크기가 작은 수동식 물레로 도기를 제작했는데 달항아리처럼 큰 조형물을 한방에 만들긴 불가능했다. 그렇다보니 고육지책으로 정확히 반씩 물레로 빚은 후, 나중에 두 왕사발을 합치는 형태로 달항아리를 제작하게 된 것. 이런 달항아리의 빛깔과 곡선미는 오늘 날에도 눈을 때지 못하는 미를 자랑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작가 김환기는 달항아리를 주제로 많은 회화를 남기기도 했다. 책에 나온 에피소드중 영국의 빅토리아앨버트 미술관에서는 유명인사 5인에게 이 미술관이 보물중 5가지를 꼽으라는 미션을 주었다. 이 유명인사중 007시리즈에 나온 주디 덴치는 5가지 보물중 하나라 조선의 백자항아리를 꼽았다. 하루종일 보고 있으면 근심이 사라진다는 이유였다는데 정말 공감이 가는 이유였다.

 개화기에 들어 일본은 우리의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도굴하거나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공식적이지 않지만 대충 2만에서 3만점의 우리 유물이 일본에 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유명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우선 고려청자를 도굴하고 수집했는데 조선시대 청자가 완전히 잊혀져 매우 쉽게 얻을 수있었다. 그들의 고려청자수집붐은 1910년대 분청사기와 조선백자로 이어졌고, 이후엔 삼국시대 토기와 불상, 금속유물과 회화, 고서로 이어진다. 이에 우리 수집가들도 조금씩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깨닫고 대응하기 시작한다. 1920년대부터 고미술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급기야 일본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확보한 미술품이 있었기에 일본에 넘어간 것이 어쩌면 2-3만정도 그쳤는지도 모를일이다.

 분단이후 한국미술은 현대미술로 접어든다. 남북은 체제의 차이로 제각각의 길을 걸었는데 일제강점기 잔재인 일본화된 인상화 화풍을 제거하기 위해 남에서는 서구 모더니즘이 도입되었고 사회주의 북에서는 리얼리즘에 도입된다. 러시아 유학 화가 변월룡은 이때 북으로 와서 북의 리얼리즘에 일조하며 많은 작품을 남기는데 당시대의 여러 인물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 독특했다. 남에서는 미술계가 산업화를 통해 어느정도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면서 단색조의 현대미술이 등장했고, 현실에 대한 참여와 고민으로 민중미술이 생겨나게 된다.

 책에는 굉장히 다양한 우리 미술품과 작가들이 소개된다. 보는 즐거움이 확실히 있는 편인데 주제가 좀 복잡하다보니 하나의 큰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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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읽는 법 - 하나를 알면 열이 보이는 감상의 기술
이종수 지음 / 유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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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맘이 불편한 요즘. 그냥 동양미술에 꽂히기로 했다. 그래봐야 기초교양수준을 보는 것이지만. 너무 몰라서인지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공공도서관도 문을 닫은 시국이라 집안에 쟁여놓은 서재의 책들중 이 소재만 가려 보고 있다. 의외로 좀 있었다. 동양미술에도 부채의식을 다소 갖고 있었나보다.

 사실 한국인은 한국인이면서도 동양화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 당연한 것이 우리 미술교육에서 단원이나 제재의 80%가 서양미술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거의 10여년 이상전 부터 국악이 제자와 단원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건만 미술은 서예와, 수묵화 관련 단원 하나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기초를 다루는 이책의 내용조차 거의 몰랐다. 다들 나와 비슷할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글을 남긴다.

 

1. 산수화

 우리 옛 그림의 갈래는 크게 네 가진인데 산수화와 인물화, 화조화, 풍속화다. 이 중 가장 으뜸으로 쳤고 지금도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남은 것이 산수화다. 산수화는 지배계층인 양반과 문인들이 좋아했기에 수요가 놓았고 당대의 대가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산수화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산수화는 글자 그래도 산과 물을 그린 것으로 중국의 남북조 시대인 대략 4-5세기 경 시작된 것으로 사려된다. 당시 중국의 종명이란 자가 자신의 늙고 병듬을 한탄하며 더 이상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며 집에 누워서 풍경을 대리만족 하고자 산수를 그리고 감상하기 시작 한것을 산수화의 시작으로 본다.

 이처럼 산수화는 집에서 산수를 감상하는 것이 목적이다보니 구체적이고 특정한 지역을 그리기보다는 그럴싸하고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산수를 작품으로 나타냈다. 실경이 아닌 관념적이거나 이상화된 산수가 산수화의 소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시 이런 관념산수화가 주류였다. 변화가 시작 된 것은 17세기로 중국이 아닌 조선의 실경을 그리는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가 등장한다. 이런 변화의 이유로는 우선 명의 멸망으로 조선을 유일한 문명국으로 여기는 소중화 사상으로 인해 중국의 산수만을 그리던 방식에서 조선의 산수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있다. 그리고 명대부터 유행했던 문인들의 산수유람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그리 되었다는 설도 있다.

 

2.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

 조선의 유명한 화가로는 문인출신인 삼재와 직업화가인 도화서 출신의 삼원이 있다. 삼재는 호를 따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를 말한다. 삼원은 단원 김홍도와 그 제자인 혜원 신윤복, 그리고 오원 장승업이다. 이중 이 책은 겸재 정선에 주목했다. 우리 그림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기법이나 관념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는데 중국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장르를 구축한 것은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이 유일하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진경산수화가 전통적인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경을 그려낸 것으로 실학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사실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그려낸 것이 아니다. 실경을 그려낸 것을 실경산수화로 정선 이전부터 다수의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이 있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관념이 아닌 실제의 실경을 그리되 화가의 주관이나 멋을 더해 실경 이상을 그려낸다. 그래서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는 한 시점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드러나는 다시점형태를 띤다. 금강산을 그린 그의 만폭동 작품에서는 정선이 보고 나타내고 싶은 금강산의 전부가 나타나 있다.

 이런 차이로 인해 진경산수화는 실경산수화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3. 수묵화를 볼때 몰랐던 것들

수묵화는 크게 종이나 비단에 그린 것들이 많다. 비단은 재료가 더 고급이고 화려한 맛을 주지만 배경이 너무 화려할 경우 그림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주로 상아색이나 담황색을 썼다. 하지만 종이보다 오래가지 않아, 비단작품의 경우 오래되면 작품자체가 어둡게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 그림은 캔버스에 그려 항상 펼쳐진 형태로 보관하지만 우리 그림은 가로나 세로로 둘둘마는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전시관이나 사진에서 모두 펼쳐놓아서 그런 상상이 잘 들지 않지만 과거 조상들은 둘둘 말린 그림을 조금씩 펴보는 형태로 감상했다고 한다.

 이런 감상형태는 당연히 표현에도 영향을 미쳤다. 화가들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서를 생각하며 공간을 드러내는 형태로 그림을 그렸고, 심지어 펴는 방향에 따라 시간에 따른 변화를 주는 것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것도 모르고 활짝 편채로 동양화를 감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그렇다.

 서양의 그림에는 거의 반드시 제목이 있는 편이지만 동양의 그림엔 사실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제목은 작가 자신이 붙이는 경우가 적었으며 그냥 표현한 것 자체가 제목이 되거나 후일 감상자에 의해 제목이 붙은경우가 대부분이다. 거기에 작가를 표시하는 관지라는 것을 썼는데 자신의 본명보다는 호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무려 200여개의 호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과거 사람들은 세월에 따른 자신의 내면 변화나 외면 변화에 따라 호를 꾸준히 변경했다. 동일작가의 관지가 제각각 다를수 밖에 없는 이유다. 거기에 왕의 어진이나 고관대작의 인물화의 경우 감히 관지를 넣을 수 가 없으니 여러 사료에 의해 작가를 찾아야 했다.

 관지말고 동양의 그림은 글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리 그림의 여백의 미는 애초에 이런 글을 위해 남긴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쓰는 이런 글을 화제라고 하는데 주로 제사나 찬들이 많았다. 이는 작품과 하나가 되어 작품을 빛내기도 하는데 그림을 감상한 사람이 후일에 쓰는 경우도 있었고, 요즘 동화책의 글과 그림을 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애초에 그림과 글을 협업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더 재밌는 부분은 인장이다. 인장은 그림에 남기는 도장인데 화가 자신이 남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작품의 소유주나 후일에 돌아가며 감상한 사람이 남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인주의 인장이 그림 여기저기를 점령한 경우도 많다. 그림반 도장 반이다. 이는 그림을 훼손시키는 행위갔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림을 높은 고관대작이나 중요한 문인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누가 인장을 찍은 그림이냐가 매우 중요했던 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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