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화가들 - 살면서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아주 특별한 미술 수업
정우철 지음 / 나무의철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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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무척 덥다. 장마가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 처음이다. 지구온난화가 아직 본격화하기 전인 1994년엔 한반도 아래에 머무르던 정체전선이 갑자기 일거에 위로 밀려 올라가며 이렇다할 비 없이 장마가 끝나 기온이 40도를 기록한 적이 있다. 하지만 미처 올라오지 않은체 정체전선이 사라진건 뭘까? 앞으로 장마는 이런식으로 진행될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6월에 비가 많이 내려 한반도는 그다지 많이 달궈지진 않았다. 원체 더운 일부지방을 제외한다면 아마 40도를 찍긴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더우니 책도 손에 안잡힌다. 더울땐 추리소설이나 가벼운 책이 좋다. 그래서 내가 사랑한 화가들을 봤다. 가볍게 예쁘게 예술에 다가가게 할 만한 책같았고, 예상은 뭐 거의 맞았다. 저자는 작품에 다가가는 여러 방법중 그 예술가의 삶을 아는 방식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맞는 말이며 그래서 책은 예술가들의 삶을 가볍우면서도 빠짐없이 그 굴곡을 다룬다.

 모딜리아니는 그림이 무척 특이한데 사람들의 목과 얼굴이 모두 길고 눈이 길게 째졌다. 모딜리아니는 조각 작품도 많은데 원래 조각가로 출발했다가 재료가 너무 비싸 공사장에 굴러다니는 안 좋은 재료를 썼고 가난한데도 조각하며 분진을 마셔 건강을 상해 회화로 돌아섰다고 한다. 모딜리아니 작품의 인물이 이리 길쭉한건 당시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그림을 볼때마다 가슴이 무척 아프고 마치 영화 쏘우의 장면을 보는 것처럼 내가 아프게 느껴지는 프리다 칼로. 삶이 너무 불행하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 한쪽이 웃자랐고 그로 인해 절게된다. 무사히 어른이 되어 대학에 가서 연애도 하지마 버스가 전동차와 충돌하는 대형 사고로 온몸이 부서진다. 다리는 산산조각 났고 부서진 손잡이가 자궁을 뚫어 평생 생리불순에 아이를 갖기 힘든 몸이 된다. 남편 디에고를 만났는데 아버지뻘의 나이에 무척 비만한 몸임에도 바람둥이에 여자가 끝이질 않았다. 최악을 프리다의 동생과 디에고가 바람을 핀 것일 것이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따로 없다. 프리다의 그림을 보면 장기와 피, 상처들이 많은데 이런게 아프게 느껴진건 프리다가 의학을 전공하였기에 이를 무척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로드레크 포스터라는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유명한 귀족출신인데 조상들간의 근친상간으로 농축이골증이라는 뼈가 잘 부러지는 병을 앓게 되었다. 어릴적 닿기만 해도 뼈가 부러지곤 했는데 다리가 크게 부러진 이후 다리는 자라지 않고 상체만 자라 이상한 외모를 갖게 되었다. 로드레크는 알폰스 무하처럼 포스터를 그렸는데 무하가 순정만화 같은 일러스트를 그렸다면 르도레크는 대상을 미화시키지 않고 단순화하여 그려냈다. 그는 댄서나 무희들의 삶은 많이 그려내어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역동적인 무용장면과 말을 많이 그렸다. 움직임에 대한 갈망이었을 것이다. 

 캐터 콜비츠는 독일의 작가다. 그는 예술의 존재 의의를 사회참여라고 생각하고 처음엔 하층민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했고, 1차대전과 2차대전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비판했다. 콜비츠와 남편은 매우 진보적이었음에도 불행히도 뜻대로 되는 자식은 없는 지라 둘째아들 페터가 1차대전에 나갔다 불과 열흘만에 전사한다. 그리고 2차대전인 1942년엔 같은 이름의 손자페터도 전쟁에서 전사한다. 콜비츠는 반전운동에 열심히 참여했고 예술을 사용했다. 회화보다는 판화가 노동자의 현실과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나치 독일에 반대했지만 나치가 들어섰고 그녀의 작품은 베를린이 폭격당해 대부분 소실되고 만다. 

 이 책엔 고갱과 샤갈, 클림트, 알폰스 무하, 에곤 실레의 삶도 실려있다. 그들의 작품과 함게 가볍게 삶을 느껴보는데 좋다. 여름에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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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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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뭉크하면 역시 절규가 떠오른다. 하지만 뭉크가 노르웨이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절규의 판본이 여러개라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것 같다. 그리고 이 절규는 소더비 미술품 경매에서 1억 1992만 달러에 팔려 당시론 최고가였다. 뭉크의 작품은 도난에도 많이 시달렸는데 작품 대부분이 오슬로 시 소유고, 살아생전 주목 받던 것에 비해 다시 조명받는데 시간이 좀 걸렸기 때문이다.

 뭉크가 태어난 노르웨이는 겨울은 무척 어둡고 춥고 눈으로 뒤덮여 흑과 백의 무채색풍경이다. 하지만 여름은 짧고 강렬하며 온 세상의 것들이 에너지가 넘친다. 이런 극단적 계절변화 그리고 어려서부터 뒤틀린 그의 감정은 강렬한 색채의 그의 작품으로 이어진다. 뭉크는 다섯살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어린시절 쭉 같이 놀던 누이가 뭉크가 13세때 역시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뭉크의 아버지는 종교에 매달려 안그래도 힘든 뭉크의 유년을 옥죄였다. 어린시절 그는 매우 병약해 천식에 류마티스성 고열을 앓았고 이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어 가정학습을 하는 바람에 친구하나 없었다. 더군다나 뭉크의 집안은 가난하지만 유명한 집안인지라 노동자계층의 거주지에 살면서도 부르주아라서 이웃과의 친분 및 교류도 없었다. 

 그런 뭉크가 세상에 나온건 20살이 다되어서였다. 아버진 뭉크를 1880년 크리스티아니아 공학대학에 보내지만 뭉크는 1년만에 그만두고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뭉크는 1884년 화가 프리츠 타우로브가 운영하는 야외 아카데미에 참석해 타우로브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경제적 지원을 얻고 선진미술을 보고 올 수 있게 된다. 1885년 뭉크는 만국박람회를 경험하고 선진미술체험을 통해, 예술적으로 성장하고 자유롭고 다채로운 붓질을 시도하며 노르웨이 화단의 지배적인 화풍인 인상주의와 사실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1885년에서 1927년까지 무려 40년의 기간 동안 뭉크는 '아픈 아이' 그림을 반복해서 그린다. 여러버전의 판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이 작품의 모티브를 아무래도 누이 소피의 죽음이다. 뭉크는 그 죽음의 충격을 도달하고픈 예술의 경지까지 계속 끌어올린듯 하다. 뭉크는 먼친척뻘인 다그니 율을 만나게 되는데 뭉크는 남자들이 한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무수한 손을 뻗는 작품인 '손들' 그리고 '마돈나'를 율을 모델라 그려낸다. 뭉크의 마돈나는 기존의 성모마리아의 성스러운 모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관능적이면서도 붉은 아우라를 표현해, 성스러우면서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성모를 표현한다. 마돈나의 석판 버전엔 정자와 태아가 그려진 프레임이 있는 것도 특징이다. 

 다르니 율 이후 뭉크는 여인 툴라와 약혼하지만 그녀의 결혼 요구에 지쳐 뭉크는 지쳐간다. 둘은 싸우다 뭉크의 실수로 총이 격발되어 뭉크는 왼손을 다치게 된다. 주손이 아니었지만 이후 뭉크는 특유의 신경증으로 다시는 그림을 못그리게 될 거라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 소동으로 그리 집착하던 툴라가 떠나가 황당한 나머지 뭉크는 신경증이 더욱 심해진다. 

 뭉크는 고향 노르웨이에선 신진화가로 크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독일에선 꽃을 피운다. 당시 독일은 철학과 문학에선 독보적이었지만 예술분야에선 이렇다할 인재가 없었다. 1871년 이후 통일과 산업혁명으로 인구가 급성장하며 사회 분위기가 역동적으로 바뀌며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는 분위기였다. 뭉크는 이런 분위기에서 베를린 화가 협회의 상설 전시장인 빌헬름 거리의 건축가의 집에서 첫 독일 전시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보수적이던 베를린 화가 협회장 안톤 폰 베르너는 뭉크를 맹 비난했고, 프랑스에 적대적이던 당시 분위기도 뭉크의 인상주의적 그림에 좋지 못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악명도 유명세인지라 뭉크는 이일로 독일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뭉크는 돈을 벌기 위해 직접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금전적으로 크게 이득을 얻진 못한다. 하지만 더욱 유명해져, 덴마크 코펜하겐, 독일 블레슬라우, 드레스덴, 뮌헨에서 전시회 요청이 쇄도한다. 당시 30대의 뭉크는 베를린 중심거리인 운터 덴 린덴에서 전시회를 하며 처음으로 그림 5점을 엮어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당시만 해도 연작에 대한 개념은 없던 시절이어서 이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뭉크는 베를린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이 주로 모이던 검은 새끼 돼지 주점을 자주 찾는다. 입구에 걸린 아르메니아산 와인 주머니가 검은 새끼 돼지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뭉크는 화가임에도 회화보다는 문학에 많이 심취해 있었고 실제로 많은 글을 남기기도 한다. 검은 새끼 돼지의 멤버들은 문학과 예술과 연관하여 새로운 사상, 상징주의와 데가당트미학, 최신의 과학적 발견, 이국적인 방식이나 현상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럼에도 뭉크는 이들 일파가 과도하게 급진적이거나 퇴폐적으로 흐르면 다소 거리를 두어 인근의 카페 바우어를 찾곤 했다. 검은 새끼 돼지들의 멤버가 하나둘 떠나가며 쇠퇴하자 뭉크는 1896년 파리로 이동한다. 

 파리유학에서 뭉크는 그림은 살아 숨쉬고, 느끼고, 아파하며, 사랑하고,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야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뭉크는 '사랑' 연작처럼 그림 개개보다는 이들을 함께 묶어서 본다면 주제 전달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1918년 10월 뭉크는 블롬크비스트 갤러리에서 회화 30점, 약 70점의 스케치와 수채화를 포함한 인생역작인 '생의 프리즈'를 선보이게 된다. 프리즈는 건물 내부나 와부의 벽 윗부분의 그림이나 부조조각이 일렬로 연결된 띠 모양의 장식이다. 생의 프리즈는 작품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전시되느냐에 따라 변화되고 조정될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뭉크 시기 화가는 그림에 담을 모티브나, 주제, 화풍만을 고민했지 그림을 어떻게 보여주고 전시할 것인지에 대한 고려는 없는 시기였다. 뭉크는 전시기획과 디자인을 고민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던 셈이다. 

 1930년대 뭉크는 오른쪽 눈 혈관이 터지는 병에 걸려 한동안 거의 실명상태로 지내게 된다. 1939년 2차대전이 터지자 나치의 노르웨이 침공이 예상되었지만 피신할 생각을 하지 않던 뭉크는 나치지배하에서 농수산부의 명령으로 농사를 짓게 된다. 뭉크는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감을 맛본다. 그리고 일전 나치가 자신의 그림을 퇴폐 미술전에서 전시한 것을 경험했던 지라 자신의 모든 그림들이 처분될 것을 우려하게 된다. 뭉크는 1940년 자신의 작품을 모두 오슬로시에 기부하게 된다. 그리고 1944년 나치의 패망을 목격하지 못하고 80세로 사망한다. 

 뭉크의 그림을 보면 같은 주제를 여러번 다르게 그려내며 분위기를 다르게 하고 좀더 완성시키려고 하는 노력에서 경지에 다가가려 했다는 느낌이 든다. 또한 연작의 개념도 재미있고 실제로 생의 프리즈는 매번 다르게 전시된다. 당시의 생의 프리즈와 지금의 생의 프리즈 전시는 구성이 다르다. 거기에 노르웨이의 변화무쌍한 자연이 준 강렬한 색감과 표현,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으로 평생 지속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알고 싶은 마음, 그리고 풀리지 않는 여성 관계는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된다. 절규 이외에도 뭉크의 많은 작품을 알 수 있어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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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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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폰스 무하의 그림을 처음 본것은 책 '시대를 훔친 미술'에서였다. 20세기 초반 과학기술의 발달과 사상의 변화로 다양한 미술 실험이 일어날 때인데 시대에 맞지 않는 정말 예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지금 봐도 어색하지 않을 멋진 일러스트레이트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실제 알폰스 무하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주요 광고와 포스터에 일러트스레이트를 그려넣었다.

 무하는 체코 사람이다. 태어날 당시엔 체코가 없었고 아마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는 어릴적 바로크 양식의 교회에서 음악 활동을 했는데 이 경력은 그의 활동과 예술에 영향을 꾸준히 미쳤다. 

 무하는 모라비아의 시골에서 벗어나 빈으로 향한다. 빈에서 무하는 두 가지를 얻었는데 우선 극장과의 만남이다. 공방의 일로 극장을 드나들면서 무하는 새로운 영감과 원천을 얻어 극적 표현방법에 눈뜬다. 다음은 한스 마카르트와의 만남이다. 당시 빈을 주름잡던 그에게 무하는 신화화와 역사화에 깊은 관심을 얻게 된다. 하지만 빈에서의 생활은 잠시 극장의 화재로 무하는 일감을 상실한다. 풀리지 않는 인생에 무하는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미쿨로브라는 곳에 머물며 우연히 마을 사람들의 초상을 그리며 연명한다. 곧 지역의 대지주 쿠엔벨라 백작의 눈에 띄어 후원을 받게 되고 뮌헨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파리로 향하게 된다. 

 파리에서 무하는 민족주의자들과 계속 교류하며 체코의 민속 미술에 대해 사회적 역할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나비파 화가들과의 교류에서는 신비주의적이고 비의적인 관심을 고조하게 되며 초현실적인 존재에 대한 관심도 커지게 된다. 한편 무하는 백작의 후원에도 이렇다할 성과가 없자 백작은 무하에 대한 매달 200프랑의 지원을 끊는다. 생계가 어려워진 무하는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한다.

 일감을 조금씩 얻어 일러스트레이터로 명성을 얻어가던 무하에게 당대 최고 배우 사라 베르나라의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 의뢰가 들어온다. 무하는 이를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큰 성공과 명성을 얻는다. 1896년 사라 베르나르가 인쇄업자를 샹프누와로 옮기자 그들과 함께 장식 패널, 달력, 엽서등을 선보이며 소위 무하양식은 완성하게 된다. 

 무하는 특유의 양식과 더불어 광고주와 소비자가 원하는 이미지를 잘 파악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성공요인이었다. 실제 이당시 무하의 광고 포스터나 그림들은 지금의 현대적 광고 모델들이 취하는 포즈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무하의 작품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당시는 세기말로 팜므파탈이 유행했는데 무하의 여성들은 그와 달리 고운 살결에 풍성한 머리칼, 몸체를 이루는 풍만한 곡선에 우아한 의상, 잘 꾸며진 실내와 화려한 악세사리가 어우러져 예의단정하면서도 우아한 고품격의 매력을 풍긴다. 

 무하는 독일 역사의 여러장면과 일화 작업을 통해 역사 삽화가로 명성을 얻게 된다. 무하는 슬라브민족으로 게르만의 작업을 할것인지에 대해 고민했으나 게르만의 호전성이나 공격성을 드러내는 대신 그들의 지적, 정신적 공적에 주목하고 체코인들이 그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과 사건을 부각시키며 작업을 수락한다. 그의 역사 삽화는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했는데 이는 의상, 소품의 사실적 묘사와 극장 경험에서 우러나온 극적 연출때문이었다. 

 삽화가로서 무하는 글과 그림의 조화를 중시했다. 1894년 루티와 함께한 연속된 끈의 꼬임처럼 상징적이고 양식화된 표제양식은 무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52부 한정판의 일세에서는 132개에 달하는 무하의 삽화와 장식적 표지가 있었다. 무하의 이런 삽화는 중세의 필사본을 연상시키면서도 매우 현대적인 면이 있었다. 

 무하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에서 생활하지만 고국 체코로 돌아간다. 그는 그의 대표적 슬라브 서사시를 시작한다. 무려 20년 작업으로 슬라브 민족의 역사중 20개의 장면을 선정했다. 5개는 알레고리적 테마로 5개는 전쟁 5개는 종교 5개는 슬라브 문화였다. 그리고 이들 중 10개를 체코의 역사에서 그리고 나머지 10개를 다른 국가의 슬라브 역사에서 채택했다. 무하는 작업을 위해 서보헤미아의 즈비로흐성을 빌렸고, 캔버스를 팽팽히 하기 위해 거대 금속틀을 제작했으며 유화의 어려움을 경험해 템페라로 작업한다. 작업기간은 1차 대전중으로 재료 수급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무하는 1926년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후원자 크레인과 전시회후 이를 체코정부에 기증한다. 

 무하는 서사시 완성후 길고 폭이 넓은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흰두건을 한 여성을 많이 그려낸다. 삶의 경과에 대한 상징으로 보인다. 세월히 흘러 나치독일에 프라하가 점령되며 슬라브를 중시하는 무하는 나치 당국의 경계대상으로 체포되어 심문당한다. 심문의 여파인지 그는 1939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는 체코가 공산화하며 민족성과 애국주의에 대한 경계로 오래도록 묻혀지내가 무하의 아들 딸의 노력으로 점차 빛을 발하게 된다. 1998년 무하의 상설전시관이 건립되고 작품도 항상 전시되게 된다. 무하의 파리에서의 양식은 아르누보 양식으로 미술과 삶이 결합해 주변 환경에 총제적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예술이 보기 쉽고 아름다우며 상업적인 부분과도 결합할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나와도 성공할 일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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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6-16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셩격도 좋고 후배들에게도 잘하고 마음은 따뜻했고 실력은 천재였고. 자신의 노하우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예술계의 사기캐 아닙니까 ㅎㅎ *^^*

닷슈 2021-06-16 20:37   좋아요 2 | URL
책에도 나오긴 하는데 후배들 챙기고 매일 파티하느라 그렇게 성공하고도 돈을 못 모았더군요. 말년에 나치에 당한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레이스 2021-06-16 18: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았던 책입니다

닷슈 2021-06-16 20:37   좋아요 2 | URL
무하 단독 책은 처음 보았는데 좋았습니다.
 
클림트 - 빈에서 만난 황금빛 키스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3
전원경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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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도 더 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클림트 전을 했던게 기억이 난다. 한국에 온 진품은 일부고 주요 작품은 그냥 화면으로만 전시했던 기억이다. 지금보다도 미술에 대해 잘 모를 때였는데 클림트의 작품은 상당한 끌림이 있었다. 화려하고 그림을 정말 잘 그렸음에도 이상하게도 그림 속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나 풍경이 마치 이질적인 타일을 붙여놓은 듯 했다. 그리고 그 타일은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색이 많았다. 그래서 주인공은 더 빛나는 것 같기도 하고 더 가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거의 여성만 그렸는데 무엇이나 사랑이 고픈 사람이거나 사랑을 많은 받은 사람일거 라고 생각했었다. 미술에 미자도 모르는 문외한이 갑자기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마구 떠드니 당시 같이 갔던 사람은 무척 이상하게 여기며 말많다고 불편해했었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구스타프라는 이름에 스웨덴일거라 생각했었다. 클림트는 1852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태어나 1918년에 죽었다. 그가 살던 시기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그리고 평생을 빈에서 살아간 클림트도 도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란츠요제프 1세의 치하에 있었다.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의 아들인 그는 전통주의자였다. 19세기 였음에도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입헌군주제가 아닌 직접 통치를 하였으며 전기와 자동차, 수세식 화장실도 거부할정도로 꼰대였다.  

 그래서 19세기 말의 빈의 분위기는 모더니즘이 한창이던 다른 나라와 무척 달랐다. 요제프주의와 비더마이어로 대표될수 있는데 요제프주의는 황제의 강력한 왕권과 이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예술사업 독력, 비더마이어는 이런 전제정치로 시민들의 정치적 무기력과 소시민주의, 정치적 체념, 카톨릭신앙심, 독일 특유의 순응주의와 아름다움에 대한 매료가 결합한 것이다. 때문에 당시 빈의 예술 역시 모더니즘이 판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전통을 중시한다. 

 클림트는 이런 분위기에서 금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금을 잘 다룰 수 밖에 없는 배경이기도 한데, 그는 어린나이부터 예술가컴퍼니를 구성하고 주어진 천정화 작업을 잘 수행하면서 좋은 편팡을 얻게 된다. 당시의 천정화나 그림들은 매우 전통적인 형식으로 클림트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상징주의 스타일로 변하자 그는 곧 같은 컴퍼니 사람들과 결별하게 된다.

 그런 클림트가 들어간 곳이 빈 분리파다. 빈 분리파는 모더니즘의 바람을 빈에 도입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빈 특유의 분위기처럼 인상파나 야수파보다는 장식 예술과 건축에 매료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1회 전시회는 아바가르드 예술이 전 유럽에서 외면과 경멸을 받은 것과는 다르게 당국의 환영을 받았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여러 민족을 병합하고 있어 예술을 후원함으로써 민족 고유의 문화 말살이라는 제국내 민족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다. 

 클림트는 1901년 완성한 유디트에서 처음으로 금박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이 전통주의자임을 알면서도 그런 전통을 뛰어넘을 뭔가를 원했다.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 여행으로 그 답을 찾아낸다. 1500년전 초기 기독교 시대에 제작된 라벤나 모자이크가 그것이다. 동로마제국의 모자이크 예술양식에서 그는 원형의 순수와 위대함, 그리고 금이라는 재료가 주는 영원과 무한함에 눈을 뜨게된다. 클림트는 거기서 평면성의 상징성을 발견하고, 평면자체가 오히려 많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새로움을 깨닫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가장 먼 과거를 향해 예술과 종교의 원형을 향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하에 클림트의 대표작들이 탄생한다. 키스, 유디트, 물뱀1, 다나에, 베토벤 프리즘, 아델레블로그-바흐의 초상화들이다. 클림트는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워낙 많은 습작을 하며 시간을 두는 까닭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다. 클림트의 다음 변화는 풍경화와 장식과 동양의 세계다. 1908년정도를 기점으로 클림트는 더이상 황금을 사용하지 않는다. 화려한 문양과 모자이크 풍의 황금대신 인물은 그대로지만 그를 덮고 있는 상징과 문양이 동양적인 것으로 바뀐다. 동양적 문양과 색상이 인물을 뒤덮게 된 것이다. 

 그의 풍경화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클림트는 이전에는 상당히 신비롭고 공허한 분위기는 나는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빈에 주로 머물렀지만 일년에 두어달 가량을 아더 호수에 머물렀다. 자연히 아더 호수 주변의 풍경을 많이 그렸는데 건물이 항상 없었지만 이 시기부터 풍경화에 건물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클림트는 나이가 들며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집착한다. 그의 아버지는 뇌출혈로 58세에 죽었는데 자신 역시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그렇게 될거라는 공포와 집착이 있었다. 그는 건강하고 운동도 많이 했지만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같은 증상으로 죽고만다. 클림트는 자신이 살아간 오스트리아처럼 모순의 예술과 모순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다. 전통에 기반하면서도 모더니즘을 추구했고, 수많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음에도 한명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 그의 삶이 그림에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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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만드는 학교 공간 이야기
고은석 외 지음 / 북트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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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본 학교공간개선 책들은 사실 장밋빛 같았다. 책에 수록된 사진 하나하나가 정말 예뻤고, 이런 학교라면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가 만족하며 아름다운 교육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런 학교를 짓기 위해서 수면 아래서 열심히 그리고 처절하게 갈퀴를 휘저어야 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이 책에 수록되었다. 책 표지에는 교육청 추천도서인데 정말 처절하게 교육청을 비판한다. 

 아직 학교공간 개선이 어색하던 2017년 한적한 광주광역시의 작은 시골학교에 한 선생님이 학교공간 개선을 추진한다. 혁신교육감이 등장하고, 학교 공간에 대해서도 윗선에서 나름 떠들고 약속도 하던터라 기대에 부풀었다. 힘들게 선생님들, 학부모들,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거 거의 교육기부다 싶은 금액으로 업체도 입찰한다. 이 모든걸 학교 선생님이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데 교육청이 어깃장을 놓는다.

 분명 사용자 참여설계를 한다고 했는데 그들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원하는 실과 교실 갯수를 물어보고 총액을 설정해버린다. 교육주체들의 의견이 반영된 주요 시설들도 안전을 이유로 관행을 이유로 법을 이유로 퇴짜놓아 버린다. 아마 지금 어른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일선 학교에 그네가 없다는 사실을. 대충 10여년 전인가 한 아이가 그네에서 놀다 다쳤고 그후로 안전을 이유로 학교에선 그네가 사라졌다. 그 뿐이 아니다. 십수년을 멀쩡히 있던 놀이터를 갑자기 안전진단을 했고 그 멀쩡한게 대부분 안전진단 불합격을 하자 반년 혹은 수개월을 펜스를 쳐놓고 아이들이 이용못하게 했다. 그리고 돈을 들여 기존 것과 거의 다를바 없는 새로운 놀이터를 구축했다. 이게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여튼 건축에서도 비슷했나보다. 벽돌을 흰색으로 하고 싶다는데 자기들 마음대로 단가를 맞추느라 붉은 벽돌을 가져오고, 간신히 주무관을 가르치고 시선을 유도해놓으면 어느샌가 보직이 변경되어 다른 사람이 와서 다시시작하게 만든다. 교육장이나 장학사니 하는 사람들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상당히 직설적으로 그들을 비판하는데 이런건 정말 필요하다. 잘못한 사람은 잘못했다고 호되게 나무라고 비판해야 한다. 언제까지 한국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계적 균형이나 맞추고 앉아야 할까나.

 학교공간 개선에 있어 저자는 학생, 교사, 학부모를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한다. 그 단계가 유용해보인다. 우선 학생 워크숍

1. 기억하자

-일상을 기억하고 학교를 들여다보기

2.탐색하자

-학교지도 표현하고 장소 소개하기

3.만들자

-내가 바라는 학교 전체 모습 구상하기

4.상상하자

-키워드 배치를 바탕으로 학교 공간 모형 만들기

5.공유하기

-우리가 바라는 미래 학교 이야기하기


교사 워크숍

1.학교 살펴보기

-학교에 대한 이미지, 우리 학교에 해당하는 단어, 교사들의 장소 인식 및 현황 해석

2.학교의 구조, 공간과 행위

-학교의 구조 파악, 우리 학교에서 원하는 활동과 공간의 해석

3.학교의 환경 비전과 요구

-우리 학교 기대공간과 공간 내 활용

4.교실 보기와 학교공간 구성

-학교 교실 활용 현황과 관련 영역 확인


학부모 워크숍

1.학교 일상의 기억

-학교에서 가장 기억나는 하루 표현하기, 학교 지향점 공유

2.학교 공간의 탐구

-교육 지향점에 따른 공간 키워드, 키워드가 담긴 학교 공간 이미지 표현하기

3.교육 공동체속 학교 공간의 지향점 찾기

-학교교육 공동체의 의미와 지향점, 교육 공동체의 구체적 역할 놀이

4.다시 만든 학교에 가기

-학교 공간 디자인 이슈 발견하기, 학교 필요공간 도출, 교실의 역할과 범위 논의


책은 학교 공간개선에 관한 책이지만 학교교육과정에 과한 논의도 깊다. 양자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근무한 학교는 분교였다고 다시 본교가 될정도로 무척 작은 학교였다. 그 작은 학교를 살리기 위해 정말 많은 예술활동과 도전활동이 학교교육과정에 들어차있었다. 때문에 담임교사가 무엇을 할 여지가 거의 없는 수준이었는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학교교육과정은 목표와 방향성만을 제시해야지 지나치게 촘촘하면 안된다고 한다. 

 또한 학교교육과정에 안식년도 필요하다고 한다. 첨 듣는 주장인데 신박하다. 모두가 과도한 교육과정에서 버리기를 해야한다고 하는데 사실 다 필요해서 뭣하나 버릴게 없다. 이럴때 다 같이 한번 유예하는 안식년을 두자는 것이다. 아무래도 한 번 안해보면 그 필요함과 필요없음에 대해 절감하지 않을까나. 

 마지막으로 재밌던건 학교 공간 개선 과정에서 남향건물에 대한 포기였다. 건축업체는 관성처럼 남향 교사건물을 디자인해왔는데 그리되면 아이들이 운동장으로의 접근성과 동선이 크게 퇴행하였다. 때문에 건물을 서향으로 바꾸어 동선을 확보했다. 또한 학교 교실이 남향일 경우 수업시간인 낯시간에 해가 강하게 들이쳐 하루종일 블라인드를 해야한다는 점. 그리고 남향이 가장 효과적인 겨울철 정작 학생을 방학이라 학교에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참 좋았다. 또한 최근 학교공간 혁신에서 아이들의 운동장 및 숲속, 텃밭등으로의 접근성을 강조해 교실을 1층에 배치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 학교 아이들은 작은 학교 아이들이어서인지 1층 교실을 싫어했다. 높은 곳에서 학교의 풍경을 조망하고 싶어했고 그 결과 3-6학년 학생들은 2층에서 생활하게 건축이 진행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다들 아파트에 살아서 익숙해서 그렇지 어릴적 단독 살땐 항상 높은 풍경을 그리워했다. 높은 곳이 주는 묘미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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