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2 - 중국, 사람이 하늘을 열어젖히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2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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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 미술 이야기 1편이 인도편이었다면 이번엔 당연히 중국 편이다. 중국 편은 길게 다룰 요량인지 2권을 보았는데 한나라 때까지의 미술 흐름을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당연히 도자기부터 시작한다. 

 흙으로 만든 그릇은 토기, 도기, 자기가 있다. 흙으로 빚어 굽는게 공통점인데 토기는 낮은 온도에서 굽거나 햇볕에 말린 것이고 도기는 무려 800-1000도에서 자기는 1200도 이상에서 구운 것이다. 이렇게 굽고 유약을 바르면 경도가 올리가고 물이 흡수되지 않아 그릇으로 적합해진다. 유럽은 차와 커피문화가 발달하며 중국산 도자기에 열광했다. 하지만 중국은 명과 청대 해금정책으로 일관했다. 간절했던 유럽이 대안으로 찾은 것은 베트남산과 일본산 도자기였다. 일본은 임진년의 침략으로 조선도공을 수백 납치한 후에야 도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조선과 중국은 뛰어난 도자기 기술이 있었음에도 해금정책으로 이런 거래에 참여하지 못했다.

 중국 도자기는 기원전 5000-3000년 양소문화, 기원전 2500-2000 용산문화에서 발견되었다. 이중 용산문화만이 청동기문화로 이어진다. 양소문화는 채도를 만들었는데 토기를 땅에 박아 사용했으므로 박히지 않는 윗부분에만 화려한 문양이 그려졌다. 당시의 토기는 두께가 얇고 일정한 것으로 보아 물레를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또한 흙은 걸러내고 겉에 화장토를 발라 색이 멀겋고 붉다. 무늬는 붓으로 그렸으며 토기의 대량생산을 위한 분업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의 가마는 구덩이를 파고 밑에 돌과 장작 그위에 토기, 그리고 그 위를 짚과 장작등으로 덮고 불을 지피는 형식이었다. 높은 온도를 기대할 수 없는 구조였다.

 용산문화의 토기는 좀더 진일보한 가마를 이용했다. 층계식 가마를 사용하여 공기의 대류를 이용했다. 달궈진 아래의 공기가 위로 이동해 차가운 공기를 밀어내고 이 공기가 다시 달궈져 도는 형태로 온도를 올렸다. 여기서 제작한 흑도는 까매서 흑도다. 가마에서 구워 공기가 차단되어 산화되지 않고 가마의 불을 끄는 과정에서 그을려져 색이 검어졌다. 

 중국의 홍산문화는 옥의 문화다. 옥은 생긴 것과 달리 매우 단단하여 철보다도 가공이 어렵다. 중국인은 옥이 사악한 것을 막고 부패를 막아 사람이 다시 살아돌아올 수 있다고 믿어 귀하게 여겼다. 다만 산지가 모두 중원 외곽이라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옥벽은 둥근 도넛 모양의 옥으로 하늘을 상징한다. 이 옥벽은 시신의 가슴이나 머리에 두었는데 그래서 사람이 죽어 하늘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사마천은 사기에 상나라와 하나라가 있다고 서술했다. 주나라까지는 확실한 실체가 있었으나 상나라인 은나라는 그렇지 못했는데 갑골이 발견되며 그 실체가 드러났다. 갑골은 상의 왕이 점을 치고 제사를 지낸 것이다. 갑골은 거북이 등껍질이나 동물의 등뼈를 사용한 것인데 가운데 부분에 구멍을 내고 양쪽에 서로 다른 결과를 적고 불에 달군다. 그리고 금이 가는 방향의 글귀로 점을 치는 형식이다. 

 이시기 중국은 청동기가 고도로 발달한다. 청동기는 어떤 금속을 합금하느냐에 따라 강도와 색이 변화한다. 그리고 합금엔 고도의 기술이 따른다. 이 시기 방정이 나타나는데 이는 다리가 넷인 직사각형의 솥단지다. 제사에 바칠 동물을 담는 용으로 신화속 동물인 도철이 많이 새겨졌다. 중국의 사천성은 중원과 멀어 당시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있었다. 청동마스크나 청동나무가 그렇다. 청동나무는 산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상은 변방의 소국이던 주에 멸망한다. 주는 상을 대신하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천명사상을 중국에서 처음으로 도입한다. 지신들의 통치가 하늘의 뜻이며 주왕은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인 천자라 칭하게 된다. 사회도 제사 중심의 주술 사회에서 현실 도덕규범과 질서, 사회를 중시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신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변모한다. 주는 혈연기반의 봉건제를 실시하고 서열을 확실히 하는 계급사회를 구축한다. 그리고 이를 내면화하도록 백성을 교육하여 의례가 강화되고 효와 예의 문화가 강조된다. 

 주의 상류층들은 청동기에 명문을 새겨넣었다. 상의 귀족들은 자신의 청동기에 소유자의 이름 정도를 새긴 반면 주의 상류층들은 가문의 영광스러운 일을 적어넣었기에 명문의 길이가 무척 길어진다. 그래서 주나라 후반기에 나타나는 방정은 상의 것과는 다르게 무늬가 매우 단순하고 표면이 평범하여 문양을 새기기 좋은 형태로 바뀌게 된다.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며 주의 청동기는 더욱화려해진다. 이민족의 영향으로 청동에 상감기법이 등장한다. 금이나 은을 상감했으며 청동기 자체의 모양도 매우 화려해진다. 청동기의 제작 방법은 도범주조법과 실랍법이 있다. 도범주조법은 흙으로 모양을 제작한 후, 겉에 진흙을 바른다. 겉흙이 마르면 떼어내여 겉틀로 쓰고 속틀을 제작한다. 겉틀과 속틀을 합친 후 진흙을 발라 굽고 청동물이 들어갈 구멍을 만든다. 청동물을 부어 굽힌 후 흙을 제거하고 청동을 다듬는 형식이다. 

 실랍법은 진흙으로 대강 물체를 빚은 후 여기에 밀랍을 입히고 매우 정교하게 무늬를 새긴다. 그 위에 진흙을 입히고 청동물을 부을 구멍을 만든 후 진흙이 마르면 가마에 굽는다. 열로 밀랍이 녹으면 그것을 빼낸 후 청동물을 붓는다. 청동이 굳으면 흙을 제거해 다듬어 완성하는데 밀랍이 가공이 쉽고 정교한 조각이 가능해 도범주조법보다 훨씬 정교한 청동기를 만들 수 있다. 

 주는 청동 편종도 제작한다. 무게가 어마어마하며 65개의 종이 모두 다른 음을 내는 상당한 수준이다. 한국의 청동기는 중국의 것에 비해 소형이고 수량이 적다. 이는 한국의 청동기가 유목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목민족은 항상 이동하기에 청동기를 소형으로 조금만 제작해서 가지고 다녔다.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한 진시황은 중국의 고대의 삼황오제를 따서 자신의 황제라 칭하고 최초이므로 시황제라 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는데 방술사 중 하나인 서복은 보내 불로장생약을 찾게 했다. 서복은 제주도에 왔다갔는데 서귀포시가 서복이 귀로한 곳이란 뜻이란 설이 있을 정도이다. 그 진시황이 죽은 진시황릉은 무려 38년간 64만 평 규모로 조성된다. 이는 에버랜드의 3배 수준이다. 시황릉에는 4층짜리 궁전에 황제의 공간이 있고 그것을 내성과 외성의 궁이 둘러쌓다. 여긴 발굴을 하고 있지 않은데 현행 기술론 훼손을 피할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조사로 어떤 공간인지만 알아냈을 뿐이다. 

 이 진시황릉을 3개의 병마용이 둘러싸 지키고 있다. 1호갱은 보병부대로 무려 6천구, 2호갱은 궁수 1천3백구와 기병, 전차부대가, 3호갱엔 기마병과 말이 있다. 1호갱의 6천구는 얼굴이 모두 다르다. 실제 병사가 모델인듯 하며 채색까지 이뤄졌다. 다만 신경쓴 얼굴과 자세, 무기, 머리스타일에 비해 몸은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이다.  

 진시황은 강하게 법가로 천하를 통치했다. 이에 백성은 고통받았는데 반발로 한고조 유방은 상당히 도교적 성향을 보였다. 한 무제는 이들의 중간으로 유교적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았다. 미술품에도 유교적 색채가 강해졌고 주나라때처럼 의례가 강화되었다. 무제는 곽거병을 통해 흉노를 정벌했는데 그의 무덤을 효와 충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황제의 능 인근에 배치했다. 배장묘인데 여기에 더 나아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돌로 흉노를 제압하는 말을 조각했다. 무덤에 일너 석상을 배치하는 것은 이후에도 이어져 한국의 왕릉에도 문인석과 무인석, 석호, 석양등이 배치되게 된다. 

 도교적 성향을 띠는 한대 초기 중국엔 박산향로가 많이 만들어진다. 박산은 도교의 이상적인 산으로 물에 떠있다. 때문에 박산은 흔들리지 않게 신선이 보낸 물고기와 거북이가 그 산을 받치고 있다. 때문에 박산향로의 아랫부분은 파도와 더불어 물고기, 거북이가 조각된다. 박산향로는 백제금동대향로와 유사하나 시기적으로 많은 차이가 난다. 박산향로는 유교이념이 확립된 3세기를 기반으로 거의 사라지나 백제금동대향로는 6세기 작품이다. 거기에 백제의 것은 상부에 봉황과 4명의 악사가 그리고 물에 떠다니는 박산을 연꽃으로 표현했다. 즉, 도교와 불교의 성향이 뒤섞인 한국의 독자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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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혁명 - 행복한 삶을 위한 공간 심리학
세라 W. 골드헤이건 지음, 윤제원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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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자연에 적응해 보금자리를 만들어왔다. 집이 시작인데 땅을 파고 나무나, 가죽, 돌, 여러 가지를 동원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다 종교적 건물, 요새, 성, 궁궐, 식당, 목욕탕 등 여러 가지 문화시설을 짓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 지구상엔 인간이 구축한 건물로 공간이 꽉찬 도시란 것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쯤되면 인간은 건축하는 동물이라 칭할만 하지만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건축한 건물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아왔다. 

 이런 경향은 현대에 들어와서 더 심해진 느낌이 있는데 거의 모든 도시의 현대적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상당히 천편일률적으로 똑같기 때문이다. 책은 이런 무미건조하고 어떤 자극과 위안도 주지 못하는 건축이 들어찬 곳을 장소의 비장소화라 칭한다. 장소의 비장소화가 일어난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비용의 문제다. 건축업자는 건축을 하면서 각종 법률적 제한과 용도 제한, 토지 거래와 건축 인허가등 무수한 문제와 부딪혀야 한다. 이런 와중에 인간적 건축이란데 신경을 쓰는것은 쉽지 않다. 다음은 시간적 문제다. 건축은 시간의 문제다. 공기가 길어질수록 들어가는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건축업자가 투자자로부터 혹은 은행으로부터 혹은 구매자로부터 대출을 받거나 선금을 받고 사업을 이어가기에 오랜 시간 공을 들려 건축하기 쉽지 않다.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인식의 문제다. 건축업자들은 건축물의 인간적 디자인에 대해 공부해본적이 없고 관심도 갖고 있지 않다. 놀랍게도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디자인에 대해서 공부하지만 신경건축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과거 주요 유명한 디자인은 인간을 편안하게 하고 적당히 자극하기보다는 편의성이 없고 매우 독특하며 자극적인 건물이 많이 지어졌다. 이는 그들을 관리감독하는 사람들이나 정부관계자들 심지어 그들의 수요자인 건축물의 소비자 역시 마찬가지다. 전체적으로 건축 디자인에 대해 사람들이 눈을 뜨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볼 수 있다.

 신경건축학이 등장한 것은 2004년의 일로 불과 20년도 되지 않았다. 신경건축학은 인간의 인지사고 과정이 공간에 영향을 받는다는 가설에 기반을 두고 그 인지적 영향을 측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학문이다. 체화인지, 기반인지, 상황인지 등의 패러다임이 출현하며 신경건축학은 힘을 얻었는데 건축환경은 인간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 사람을 형성하고 사회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강한 영향을 준다. 이런 부분에 신경을 쓰자는 것이 신경건축한인 셈이다. 

 건축의 중요성은 도시로 갈수록 커진다. 도시는 건축물로 꽉찬 곳이고 당연히 건축이 중요하고 자연과 동떨어진 곳이므로 자연을 대체할 만한 건축공간이 무엇보다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330년까지 인구 100-500만의 도시는 550개, 500-1000만 사이는 41개, 1000만 이상의 메가시티는 41개로 늘어날 얘정이다. 도시가 크게 늘어날 예정인 셈인데 사정이 녹록치 않다. 국민일인당 소득 7만달러에 달하는 미국에서도 새건축물의 85%에 디자이너가 배제된다. 여유가 있음에도 인식이 부족한 것이다. 가난한 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남아시아 인구의 30%가 도시의 슬럼에 거주하고, 사하라 이남 인구의 60%가 슬럼에 거주한다. 세계적으로는 무려 10억 인구다. 이들의 거주 공간은 비좁고 비위생적이며 사람으로 들끓으며 치안도 엉망이다.

  이런 가난 자체도 문제지만 공간이 자라날 어린이들에게 주는 악영향도 문제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북적되고 시끄럽고 좁고,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넓은 공간에서 자라는 아이보다 전체적 발달이 느리다.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하고, 가정, 학교에서 문제행동이 많으며 질서가 없다. 이는 집이라는 공간이 올바른 자아를 형성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간이 넓고 조용하며 자기만의 공간이 있어야 공간에 대한 자율성과 자기통제력이 생기며 올바른 자아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공간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보다 큰데 영국에서는 34개 학교 751명 학생을 연구한 결과 건물의 디자인이 학습진도에 25%나 영향을 미쳤다. 영향을 미친 주요인은 색상, 선택권, 복잡성, 유연성, 조명, 연결성이었다. 이런 것이 좋으려면 학교에서 학생의 머리위에 바로 조명이 있고 카페테리아 같은 폭신한 가구 같은 책상과 의자에, 자연 채광, 창문, 환기가 잘 되어야 한다. 최근 대학생들이나 중고생이 공부장소로 독서실을 팽개치고 카페를 택하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셈이다. 카페는 위의 조건을 대부분 만족시킨다. 머리위에 조명이 있고, 창이 바로 옆에 있으며 경치가 대부분 좋고, 앉은 의자와 책상은 안락하며 넓고 쾌적하고, 잔잔한 음악에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가 있다.

 인간은 자연친화적 동물로 야외로 나가 자연과 함께 하기를 항상 갈망한다. 그래서 정원이 있고 주말만 되면 교외로 향하는 도로가 막힌다. 자연은 인간에게 즉각적으로 유익한 영향을 준다. 자연풍광을 20초만 접해도 빨라진 심장 박동이 진정이 되고 3-5분이면 혈압이 정상화한다. 그런데 세계 주요 도시의 녹지비율은 엉망이다. 보고타는 4%,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8.9%, 이스탄불은 1.5%, 로스엔젤리스는 6.7%, 뭄바이는 2.5%, 파리는 9.4%, 서울은 2.3%, 상하이는 2.6%, 도쿄는 3.4%에 불과하다. 하지만 높은 곳도 있다. 런던, 시드니, 싱가폴, 스톡홀롬은 녹지비율이 무려 35% 넘는다. 주요 정책 입안자들과 도시 설계자들, 시민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경건축학으로 잠시 돌아가면 인지의 볼진과 인지가 건축 환경 경험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탐구하려면 다음 세 가지 사실이 중요하다. 우선 신체는 인간의 정신적 사고 작용을 형성하며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인간은 신체적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은유하는데 어릴 적 자신보다 절대적으로 큰 부모에게 의지한 경험은 큰 것은 안전하고 위대하며 권위적이라는 은유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세계 모든 문명의 권위적 건물은 크고 웅장하게 지어져 사람을 압도한다. 또한 인간은 부모품의 따뜻함을 경험하여 그러한 촉감과 온도를 가진 건물을 안정적으로 느낀다. 두 번째는 인간의 신체는 그간 살아온 환경에 따라 형성되며 내면의 인지적 삶 대부분은 인간의 의식 수준 아래에서 일어나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라난 건축환경이 그 인간의 자아형성에 상당한 작용을 하며 그 영향을 그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용한다는 점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마지막은 이런 요소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다르게 이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복도식 아파트나 여러집이 공유하는 골목길에서 자라는 사람과 다른 이웃을 전혀 접하지 않는 계단식 아파트에서 자라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고 이해하는 방식을 필경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프라임이란 개념이 있다. 프라임은 사람이 비의식적으로 지각하는 환경적 자극으로 기억이나 정서 다양한 인지적 연상을 활성화해 이후의 사고나 느낌,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추위와 쓰레기 냄새에 노출되면 신체적 불쾌감이 높아져 이는 마음 속 분노와 고독감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그의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 한 사람이 집을 나서며 쓰레기를 추위에 노출된 외곽의 더러운 곳에 버릴 수 밖에 없을때 누군가 그에게 전화를 한다면 사소한 일로도 싸울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프라임은 우리가 사는 모든 건축요소가 될 수 있다. 모든 표면, 모든 건축이 잠재적 프라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프라임이 되진 않으며 대부분의 환경요소는 이렇다할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건축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집이다. 장소 애착이란 개념이 있는데 이는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매우 중요하다. 장소에 애착이 강한 사람은 행복감을 더 느끼고, 공동체와의 유대감도 강하며 이기적인 태도와 사리사욕을 보리고 타인과의 공감능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인간은 건축물에서 조망과 피신 두 요인이 필요한다. 집은 피신 공간이다. 집에서는 자율성과 통제력이 커지며 집은 이런 요소를 잘 갖출수 있도록 지어져야 한다. 여러 사람이 같이 머물면서도 각자의 공간이 있고 시끄럽지 않으며 천정은 적당히 높고 자연공간과 가까워야 하며 자연광이 잘 들고 환기가 잘 되어야 한다. 

 이런 집처럼 도시 지역의 여러 경관도 인간이 애착을 느낄 수 있도록 지어져야 한다. 그러려먼 다음의 요소를 갖춰야 한다. 우선 장소의 디자인이 인간의 활동을 촉진해야 한다. 너무 웅장하고 장엄하여 들어가기 부담스럽다던가, 아름답지만 머물만한 공간이 없는 로비는 불합격이다. 반면 노르웨이 오슬로의 국립발레극장은 지붕을 경사지게 완만하게 계속 아래로 내려 호수가와 맞닿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이 건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여길지 쉽게 예측되는 부분이다. 둘 째는 이런 활동사이의 조화를 유도하는 방식과 공간내 물체의 패턴화된 배치다. 인간은 자연에서 규칙성, 즉, 패턴을 본능적으로 찾는다. 때문에 너무 단조롭지 않은 적당한 자극을 주는 패턴이 건축물에 필요하다. 마지막은 물체의 형태가 유도하는 연상작용이다. 인간은 체화된 인지로 은유하는데 건축물이 주는 은유가 많은 부분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의 지붕은 해안에 위치해 돛을 연상하기도 하고, 조개껍데기를 연상하기도 하며 바닷가의 오래된 생명체를 연상시킨다. 또한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은 새의 둥지를 형상화했다. 새의 둥지는 무척 약하지만 이 경기장의 둥지는 강철로 매우 튼튼하다. 이런 은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재미를 갖게 하고 이 장소에 애착을 갖고 계속 찾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최근 한국에서도 공간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을 인식하고 다양한 시도가 시작되었다. 교육에서도 영향을 미쳐 교육부는 이미 학교공간을 재구조화하는 그린스마트학교 사업을 시작했다. 학교공간을 학습친화적으로 인간친화적으로 바꾸려는 시도이며 이 과정에서 주체는 학교의 주인인 학생, 학부모, 교사가 된다. 이들이 교육과정을 통해 학교공간 재구조화 프로젝트를 하고 이를 디자이너가 검토한 후 서로 의견 조율을 통해 이를 구현해나가는 것이다. 탄소배출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지만 전혀 자극적이지 않고 장소의 비장소화를 가장 크게 구현하는 아파트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책에 보면 건축물 층사이에 물결무늬를 돌출시켜 건물 전체가 역동적으로 파도치는 모습으로 구현한 건축물이 있었고 다소 튀어나온 물결 부분은 발코니로 쓰이고 있었다. 아파트에도 이런 시도가 가능한 것이다. 친인간적인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전환 및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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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1~2 세트 - 전2권 (스페셜 에디션) - 고흐의 시선과 열정을 담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박은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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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서양 예술가는 아마도 거의 반고흐일 것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의 얼마 안되는 예술가와 그 자품 목록 에 가장 먼저 고흐의 이름과 작품들이 떠오르는 건 확실하다. 이는 어른들 뿐만 아니고 학생들도 대개 마찬가지인데 특별히 여러 다른 예술가나 그들의 작품들을 언급해주지 않으면 각종 감상 미술 과제에서 반고흐는 손쉬운 선정 대상이 된다.

 그는 귀를 자르고 친했던 고갱과 결별했으며 워낙 평생 불우하게 살아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은 '별이 빛나는 밤에'와 '해바라기' 등이 유명하고 그의 괴팍한 얼굴을 더욱 괴팍하게 그린 자화상도 못지 않게 유명하다. 이런 괴팍함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본 두 책은 반고흐가 동생 테오 그리고 같은 예술가 친구인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책이다. 1권은 동생 테오에게 보낸 것이라 십년 정도의 기간이 수록되어 있고 2권은 라파르트에게 보낸 것이라 5년정도만 수록되어 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끝난 것은 반고흐가 의문이 많은 자살을 해서이고,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가 끝는 것은 둘의 우정이 사실상 끝나서였다. 

 편지를 보면 보면 고흐는 상당히 예민하고 감수성이 높으며,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을 꾸준히 실천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인사는 정말 안타깝기 그지 없는 수준이다. 37세까지 밖에 살지 못했지만 처음엔 집안 전통처럼 화상으로 출발했다, 목사가 되었다가, 대학에 다녔다가 아카데미를 잠시 다녔다가 결국 화가가 되었다. 집안에 사정도 순탄치 못했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고흐를 그의 아버지는 현실감각 없는 철부지로 취급했던 것 같으며 그래서 경제적으로 어려워 집안에 다시 들어와서도 누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다리 다친 어머니를 돌보고서야 겨우 밥값을 했다는 취급을 받는 느낌이다. 하지만 동생 테오에게 만큼음 달랐다. 테오는 평생 고흐를 돌보고 그의 그림을 팔았으며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형제간 우애가 남달라서인지 테오는 고흐가 죽자 반년도 안되어 31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고흐는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 어지간한 고백은 모조리 거절당했고 고흐의 마음을 받아준 것은 남자에게 임신한체로 버림 받은 매춘부와 10살 이상의 연상녀뿐이었다. 그나마도 오래가지 못했다. 매춘부 여성은 2년가까이 지났지만 결국 고흐와 멀어졌고 10살 이상의 연상녀는 가족들의 반대로 맺어지지 못했다. 고흐의 또래나 일반적 여성은 고흐의 고백에 모조리 퇴짜를 놓았는데 그는 괴팍하고 외모도 준수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했기에 그리된게 아닌가 싶다.

 고흐는 예술에 대한 비타협성과 성격의 괴팍함으로 여러 예술가들과도 오랜 관계를 지속하지 못했다. 고흐는 그들에게 자주 화를 냈고 폴고갱과는 잠시 동거하기도 했지만 서로의 견해차이로 헤어진다. 책에는 고흐가 길에서 반난 고갱에게 화를 내며 면도칼을 들이댔다는데 맨정신에 할일이 아니다. 하여튼 2권에서 이런 고흐를 길게 견뎌내준 라파르트와도 결국 결별한다. 고흐가 죽자 라파르트는 매우 안타까워했는데 성격이 그런 고흐란도 예술가로써 인정할 만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보면 그림과 그의 기괴한 성격으로 인한 사건으로만 알려진 인간 고흐에 대해 잘 살펴볼수 있다. 항상 경제적으로 곤궁함을 고민하며, 동생에게 신세짐을 미안해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여성에게 차일때마다 고민하는 그의 모습이다. 예술가로써 자연과 일반인들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들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사랑, 인상을 그려내고자 고민한다. 색채에 대한 고민이 많이 느껴지는데 밝은 색채, 그리고 이를 돋보이게하기 위해 푸른 계통의 대비를 주는 그의 특유의 그림은 이런 마음을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고흐는 그 기괴함에도 편지에선 상당히 정상적으로 보인다. 하긴 글은 순간적인 감정이나 행위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그리고 부치기 전까지도 고민하며 고쳐나가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책에 나오는 고흐의 작품을 보는 재미도 괜찮다. 유명한 작품 외에도 스케치와 석판작품, 수채화 작품도 많이 남겼으며 유명한 그의 말년 작품들과 달라 보는 재미가 있다. 요즘처럼 계절이 좋은 날에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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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 - 인도, 문명의 나무가 뻗어나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1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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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처한 시리즈 서양미술편의 성공에 이어 예상했듯 동양편이 나왔다. 거의 모든 것의 주도권이 200년전 서양으로 넘어가 아직 동양으로의 귀환이 안 된만큼 미술 영역 역시도 그렇다. 우리의 미술시각과 미술지식, 작품에 대해 갖는 심미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가장 대표하는 예술품의 가격이라는 것은 서양의 것이 동양의 것을 압도한다. 그래서 항상 동양미술에 딱히 아름다움을 크게 느끼지 못하면서도 알고자 하는 욕구와 부채의식이 있다.

 책은 동양미술 중 그 시작으로 인도편을 다룬다. 시작부터 예상이 빗나간 셈인데 난처한 서양시리즈처럼 시대순으로 전체를 다룰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서양중심의 시각일런진 모르겠으나 하여튼 책은 1편으로 인도의 고대미술을 선정했다. 그리고 막상 그럴만도 한 것이 인도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 하나이며 동북아와 동남아, 남부아시아의 문화와 의식,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불교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미술은 동양의 미술에 비해 확실히 사상과 과학기술, 그리고 시대를 비추는 세계관이 바뀌며 그 사조를 달리한다. 즉, 역사성과 체계성을 비교적 크게 갖는데 동양의 미술은 어떤 책을 보아도 좀처럼 그런 것이 드물다. 그것은 서양의 미술이 일상에서 벗어나 그려져왔던 것에 비해 동양의 미술은 철저하게 일상에 밀착하여 생활형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인도로 다시 돌아가면 인도의 불교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을 생각보다 크다. 한국엔 범종이 많은데 범종의 범은 산스크리트어를 의미하므로 범종은 산스크리트어가 새겨진 종을 말한다. 동양식 종은 밖에 서 타종하여 소리를 내는데 비해 서양의 종은 내부에서 종을 울린다. 한해가 넘어가면 108범 타종을 하는데 이는 인도의 영향이다. 반면 한국은 과거 통행금지 시간에 28회 통금 풀리는 시간에 33번 타종하며 재야의 종도 33번 타종한다. 이는 불교의 새벽예불시간 28회, 저녁 예불시간 33회 타종의 영향을 받느 것이다. 33은 불교의 핵심세계관과 연결되는데 불교의 삼천대천세계와 관련한다.

 인더스강 유역은 알렉산더가 정벌했을 만큼 메소포타미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다. 그래서 서양중심이던 과거 역사계에서는 인더스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 이전의 선인더스 문명이 발굴되며 상황은 역전된다. 이 문명은 메스포타미아 유적의 시기를 아득히 앞지르기 때문이다. 선인더스 문명은 메르가르가 대표적이다

 선인더스 문명의 메르가르는 보통의 신석기 토기가 추상적 무늬를 그려넣는데 반해 구체적인 동물을 그려넣었고 그릇 벽이 상대적으로 매우 얇다. 이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으로 당시 문명의 발달정도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인도는 토기가 동북아시아처럼 도자기의 수준까지는 발달하지 않았는데 이는 도자기 그릇에 밥을 담아먹는 문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도는 과거에는 나뭇잎이나 나무, 최근에는 스탠이나 알루미늄에 카레나 식사를 담아 먹는다. 이는 인도인의 생각때문인데 흙은 물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고, 땅의 흙은 남의 침을 흡수한 것으로 더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대인도에는 토르소라는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조각상이 발견된다. 그리스 로마는 상당이 균형잡히고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조각상이 많은데 인도의 것들은 하나 같이 살집이 푸근하다. 고대인도인은 살집이 있는 몸을 이상적으로 바라보았는데 튀어나온 아랫배를 프라나라고 한다. 고대인도어로 숨, 숨결을 의미하는데 인도요가에서는 호흡을 중시하며 아랫배가 발달해야 온몸의 균형이 잡히고 호흡으로 몸의 기를 원화할게 순환시킬수 있기에 그렇다. 

 선인더스문명 이후 인더스 문명도 기원전 2천년 정도를 전후하여 쇠락한다. 아리아인이 이 지역을 차지하는데 그들이 베다에 남긴 드라비다 인에 대한 기록때문에 역사계는 한때 아리아인의 침공으로 인더스 문명의 주인이 교체된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과 제반 증거들은 침공보다는 기후의 변화로 자연스레 드라비다 족이 남으로 이주하고 건조지역에 익숙한 아리아인이 건조해진 이 지역을 계승한 것으로 보는 추세다. 

 베다는 사실 책이 아니고 구전이었다. 무려 기원전 1500-기원후 400년인 거의 이천년간 구전으로 이어져왔으며 이후에야 기록으로 남겨진다. 베다에서는 아리아인을 고귀하게 여겨 카스트제도의 발판을 마련한다. 카스트는 강고하여 왕족인 크샤트리아마저 브라만의 눈치를 보아야 했는데 이로 인해 부를 축적한 바이샤와 더불어 카스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다. 이시기 때마침 떠돌이 수행자들은 브라만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진리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이들 중 하나가 석가모니다. 

 석가의 가르침 역시 바로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의 사후 무려 500명의 제자가 서로 의견을 주고 이견없이 정설로 인정되는 것을 정리하였는데 이런 결집이 수백년간 여러차례 이뤄졌다. 그리고 1세기가 되어서야 글로 기록되었으며 석가가 깨우친 이런 진리를 다르마라고 한다. 카스트가 만연한 불교에서 모든 이가 해탈할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교는 유연하여 윤회등 인도의 전통사상을 받아들이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불교는 석가모니의 근거지인 인도동북부에서 시작되었고 200년간 인도 전역으로 퍼진다. 그리고 불교가 인도전역으로 퍼지는데는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통일과 그것을 해낸 아쇼카왕의 역할이 컸다.

 인도의 상징은 4마리 사자상인데 이 조각상을 만든게 아쇼카다. 알렉산더의 침공이후 그들이 철수하자 인더스상 북부 유역엔 힘의 공백이 생겨난다. 여기에 마우리아 왕조가 등장하여 지역의 강자로 부상해 인도를 통일한다. 아쇼카는 잔혹한 왕이었으나 통일 이후 자신의 행위에 회의를 느끼고 무차별 살상을 금지하는 법을 선포하고, 불교는 우선하며, 이를 나라의 통합수단으로 이용한다. 아쇼카는 페르시아의 것을 본따 불교의 가르침을 담은 12미터 높이의 석주를 전국 곳곳에 세운다. 석주에는 법륜이 있는데 법륜은 수레바퀴로 법의 바퀴를 뜻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의 움직임을 비유한 것으로 명백한 우주의 진리이자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바퀴를 굴리는 왕인 전륜성왕이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군주를 의미하며 아쇼카와 신라 진흥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자처했다. 

 인도는 돌이 사암이나 동판암이 많아 매우 무른 편이다. 그래서 조각하기가 매우 수월한데 그래서인지 회화보다 조각이 먼저 발달했다. 하지만 세월에도 약한 편이어서 인도인은 돌의 내구력을 높이기 위해 겉을 마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인도는 보통의 사람들이 사망하며 화장하여 유골을 강에 뿌리는 관습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은 화장하여 그 유골을 스투파라는 곳에 세워 묻었다. 스투파는 이후 투파, 탑파, 솔로파등으로 불리다 한국에서는 탑으로 명명된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자 그 사리를 주변 8개국 왕이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툰다. 결국 나누어 갖는데 이 8장소가 근본 8탑이 된다. 아쇼카가 이후 제곡을 통일하여 이 8개의 유골을 무려 8만 4천개로 나누어 전국에 뿌리는데 그래서 인도 전역에 8만4천개의 스투파가 생겨난다. 스투파 주변엔 자연스레 사원이 생겨 하나의 종교성지가 된다. 인도인들은 스투파 주변을 탑돌이하며 사리에 힘을 빌려 소원을 성취하고자 했는데 탑돌이는 우측으로 돌아야만 하며 그래서 본고장 인도의 스투파 주변에는 탑돌이를 위한 울타리가 있다.  

 향후 인도 각지로 스투파가 퍼지며 크기가 12cm정도로 매우 작아진다. 이런 미니 스투파는 개인 예배를 위한 것으로 왕이나 승려, 일반 신자도 이를 만들어 향후 자기 유골을 여기에 봉안하기도 했다. 이런 작은 스투파로의 변형이 스투파의 1차굴절이다.

 2차굴절은 동남아등지에서 생겨난다. 미얀마로 퍼져나간 스투파는 윗부분의산개와 하르카가 거의 사라지고 복발이 기존 인도이 반구형에서 계란 노른자처럼 하단부로 갈수록 퍼지는 형태로 변형된다. 이것이 유명한 미얀마의 쉐지곤 파고다와 쉐다곤 파고다로 이들은 수천킬로미터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형태가 매우 유사한 것으로 보아 당시 미얀마에 스투파를 만드는 전형이 있었던 것으로 예측된다. 이 미얀마의 것이 동남아의 표준으로 자리잡아 태국, 캄보디아 등지로 비슷한 형태의 것들이 생겨난다. 

 3차굴절은 동북아시아의 탑이다. 히말라야를 넘어간 불교 승려들은 현지인들에게 스투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북아시아는 화장하는 풍습이 없었고, 따라사 시신을 탑에 안치하지도 않았다. 다만 높이 쌓은 건물로 상상하여 만든 스투파가 탑이다. 초기엔 목탑을 지었으며 탑은 홀수로 지었는데 홀수가 기운이 강한 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목탑은 향후 석탑으로 바뀌는데 그 과도기에선 굳이 그럴 건축한적 필요가 없음에도 석탑을 목탑 양식처럼 짓곤 했다. 한국의 미륵사지 석탑이 그렇하다. 이후 석탑 만의 양식이 자리잡으며 목탑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인도에서는 스투파에 무덤이나 마찬가지인 큰 규모의 복발이 스투파의 대부분을 차지하나 동북아의 탑은 복발은 윗부분에 흔적만 남게되며 탑돌이를 위한 울타리와 다른 기단 부분이 합쳐져서 사실상 그부분이 탑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특히 문이 생겨나는데 이는 인도의 스투파의 큰 차이점이다. 목탑시절에는 인도에선 별 의미가 없는 장식적 역할인 찰주가 목탑 전체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였다. 탑의 층을 세는 방법은 지붕의 갯수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스투파에 이어 마침내 불상이 생겨난다. 사실 석가모니는 무려 천번의 전생끝에 열반에 들어간 자로 속세와의 연이 끊어진 자를 형상화하는 것자체가 논리적 모순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끝에 석가의 모습이 불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불상엔 인도에 있었던 쿠샨제국이 역할을 한다. 쿠샨은 매우 독특한 나라로 본디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의 월지가 흉노에 밀려 인도 북부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웠다. 이 지역엔 원래 알렉산더의 후예들이 만든 그리스 박트리아 제국이 있던 곳으로 쿠샨은 자신들의 중앙아시아 유목문화에 그리스 로마문화, 인도 북부의 문화가 섞여서 생겨난다. 

 그리스 로마는 유명인물이나 신의 모습을 주화로 만드는 문화가 있었는데 쿠샨도 이를 본땄고 카니슈가 왕의 동전을 앞면에 그리고 반대편에 여러 신의 모습을 새겼다. 그리고 이 신중 부처도 등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부처가 형상화된다. 이후 불상이 제작되는데 불상엔 공통적 특징이 있다. 우선 석가의 높은 지혜로 머리가 아닌 머리뼈가 불툭 튀어나온 유슈니가 있고, 석가를 빛내는 광배가 있다. 또한 통견이라는 승려들의 격식있는 복장이 모든 불상의 공통 특징이다. 

 책은 인도고대 문화로 마무리하는데 보면서 예술책인지 인도 역사책인지 잘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그만큰 아시아에서 미술은 별도로 분리된 것이라기 보다는 역사 및 생활, 종교, 관습과 함께했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2권인 중국편인듯 하다. 기대되며 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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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미술관 - 아름답고 서늘한 명화 속 미스터리
진병관 지음 / 빅피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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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구석 미술관이 시리즈가 생각보다 크게 성공해서인지 비슷한 책이 최근 많이 나오고 있다. 이 책도 그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전문가가 자기 나름대로 범주를 분류해서 관심있거나 재밌어 보이는 작가의 작품 일부를 소개하는 형식이다. 그러면서 역사적 배경과 작가에 대한 이야기, 예술적 사조와, 예술 기법등이 약간 소개되는 정도다. 가볍게 읽기 좋은 수준이다.

 기묘한 미술관이라는 책에서는 범주로 취향, 지식, 아름다움, 죽음, 비밀을 다룬다. 새롭게 알게 된 점과 특이한 점을 소개한다. 모나리자는 매우 유명한 그림이고 루브르에서도 이걸 아주 짧은 시간을 보기 위해 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상상이지만 만약 지금 경매에 나온다면 그 가치를 무려 40조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 그림이 처음부터 인기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모나리자가 유명해진 것은 도난사건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림은 무려 2년을 떠돌아다닌다. 그리고 지금은 상상할수 없지만 과거 모나리자는 외국에 순방전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염산테러 마지막인 1974년 일본에서는 붉은 물감 테러가 있었다. 이런 기묘한 사건들이 중첩되 노이즈 마케팅을 일으켰고 그림 자체의 가치와 더불어 가치가 크게 선순환해 상승한게 지금의 모나리자다. 

 조토 디본도네라는 작가는 르네상스를 이끈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어떤 감정이나 표정도 없던 과거의 종교화와 역사화에 감정과 표현 행동을 강하게 불어넣어 차별성을 두었다. 그의 작품 '통곡'에는 예수의 죽음에 주변 인물들과 하늘의 천사들이 오열하고 절망하는 표정이 잘 나타난다. 재밌는 이야기로 조토가 살아가던 당시 파란색은 금보다도 비싼 색이었다. 과거 종교화에서는 성인의 아우라를 나타내기 위해 금동전을 얇게 두드려 직접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림 가격의 절반 가량이 금값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빛의 색을 금색에서 파란색으로 인식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파란색이 아프간 지역에서만 채취되는 울트라마린이란 돌에서만 나왔기에 파란색이 무척 비싸졌다. 왕가, 종교, 귀족가문의 푸른색 경쟁이 붙어 당시 울트라 마린은 금값보다 비싸졌다.

 렘브란트는 젊어서 무척 성공한 화가였는데 자화상을 많이 그린 그의 젊어서 자화상에서 이런 모습이 매우 잘 느껴찐다. 하지만 우리에게 유명한 그의 '야경' 그림 때문에 렘브란트의 팔자가 뒤바뀐다. 야경을 의뢰한 사람들은 마치 저녁같은 그림 풍경에 비겁한 기습을 연상했고, 그림에 나타난 인물의 하이라이트와 크기에 불만이 많았다. 결국 이 일로 램브렌트의 평판이 크게 하락했고 이러한 쓸쓸한 말년은 역시 그의 늙어서의 자화상에 잘 드러난다. 렘브판트는 특이하게도 도살한 소의 사체를 그렸는데 역시나 빛과 어둠이 대비된 이 그림은 그의 쓸쓸한 말년 심정이 반영될 결과라는게 저자의 해석이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는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대학자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 여성이 한명 있다. 최초의 여성철학자 히파티아다. 히파티아는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수학과 신플라톤주의에 뛰어났다. 미모도 대단해 뭇 남성들에게 청혼도 받았지만 모두 고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거주하던 알렉산드리아에 기독교 열풍이 불어닥치고 현실적이던 행정관과 주교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다. 행정관에 주로 조언을 하던 히파티아에 불만을 가진 주교는 히파티아를 광신도 무리와 함께 죽인다. 조개껍데기로 살을 찢고 화형시켰으니 증오가 엄청났었던듯 하다. 히파티아를 악의무리나 마녀취급했던게 아닐런지.

 고야는 '악마의 연희' '수프를 먹는 두 노인', '자기 아들을 먹는 사투르누스'등의 그렸다. 그의 작품은 이런 끔찍한 그림과 왕가와 귀족을 그린 그림, 마지막으로 사회와 전쟁을 비판하는 그림으로 나뉜다. 이렇게 범주가 극단적인 것은 그의 삶때문이다. 고야는 궁정화가였고 그렇게 오래 생활했기에 왕가와 귀족의 그림이 많다. 하지만 나이들어 왕가가 몰락한 후 사회에 나와 사회 비판적은 그림과 침략을 비판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끔찍한 그림들은 그의 집에 젋어서부터 오랬동안 그의 방안을 둘러싸 매일 보며 보관한 것이다. 고야는 자신의 이중적 생활과 내면을 이런 끔찍한 그림으로 반영한게 아닌가라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엔 다양한 주제와 재밌는 그림, 화가들로 가득찼다. 힐링하면서 가볍게 볼수 있고, 지식도 적잖게 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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