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붉은 선 - 지도가 말하는 사람, 국경, 역사 그 운명의 선을 따라나서는 지정학 여행
페데리코 람피니 지음, 김정하 옮김 / 갈라파고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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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 좋은 지리 책을 만났다. 여러 지리 책에서 습득한 지식 중 다소 모자란 부분을 채울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문화, 경제를 지리라는 학문으로 설명한 부분이 좋았다. 물론 지리학에서 이런 시도는 오랜 된 것이지만 교양지리학 중 다룬 책은 별로 없어서 특별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인데 미국, 중국, 독일, 러시아 등 주요 국가들을 지리의 관점에서 다루고, 민주주의, 기후위기, 부의 집중 등을 역시 지리의 관점에서 다룬다. 미국과 중국은 다른 책과 비슷해 넘어가고 독일부터 살펴보았다.

 

1. 독일

 독일은 유럽대륙의 한 가운데 위치한다. 독일의 통일은 매우 늦었지만 그 이후로 사실상 유럽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강국이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이후의 프랑스에 굴욕을 안겼고, 통일 독일은 1차 2차대전을 일으켰으며, 현재의 독일은 유럽 최강의 경제국이다. 때문에 독일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유럽의 향방을 결정해왔다. 그리고 이런 독일은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그 경계가 항상 들쭉날쭉했으며 그 변화가 곧 다른 국가의 운명을 결정했다.

 독일의 경계가 불분명한 건 주변에 이렇다할 지리적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북으로는 좁은 해안이 경계가 되어주지만 큰 의미가 없으며 남으로는 알프스가 지나치게 멀리있고, 동과 서는 이렇다할 경계가 전혀없다. 때문에 최대판도의 독일은 남으론 알프스 서로는 프랑스, 동으로는 러시아까지 치고나갈수 있다. 

 독일은 로마 이후 이를 재건하려는 유럽적 소망을 가장 강하게 가져온 국가다. 독일에 자리한 카롤링거 제국, 신성로마제국, 히틀러의 제3제국이 그렇다. 이중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중경향보다는 지역 자치국의 영향이 강했는데 이런 지역자치적 경향은 현대독일에도 그래도 남아있으며 이 국가의 통합을 늦게 했다. 2차대전 때 독일은 자연에 의한 방어선이 없어 포위되었다는 묘한 신드롬이 있었고 그 결과 활력적인 공간을 확보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대상은 야만인이 존재하는 슬라브의 땅, 그리고 아프리카 식민지였다. 하지만 패전후 독일은 아데나워 수상에 의해 지정학적 선택을 새로하게 되고 철저히 서양을 택한다. 그 결과로 서독의 새로운 수도는 프랑스에 인접한 본으로 결정된다. 

 철저히 서양지향의 운명을 택한 독일은 1990년에 통일하며 새로운 운명을 맞게 된다. 통일 독일은 1700만 동독 주민을 흡수하였고, 경제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1:1 환율로 동독의 통화를 인정해주어 동독지역으로 막대한 부를 이양한다. 초기엔 동독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실업이 급증하고 연방예산에 무리가 따랐지만 지금은 문제가 대부분 해소되었다. 동독지역의 소득은 현재 서독의 75%수준까지 올라왔다. 독일의 마르크화는 강한 경제력으로 유럽 최고의 화폐였다. 마르크는 안정되었고, 낮은 인플레이션에 높은 구매력을 유지하는 화폐였다. 당시 독일의 통일은 유럽 각국의 불안을 야기했는데 특히, 프랑스가 공포에 떨었다. 프랑스의 미테랑은 독일의 통일을 반대하였으나 역사의 시계추를 돌리기 어렵자 유로화를 하나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독일 역시 과거의 잘못으로 주변 국가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초식강국이었다. 독일은 이 제안을 수용하고 유로화가 출범한다. 2008 경제위기가 닥치자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서방국가들이 독일의 소극적 역할을 비판했다. 하지만 독일인에게 경제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이들은 오히려 미국이나 다른 유럽국가들이 사치와 낭비로 경제위기를 자처해놓고도 돈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국을 비판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때문에 독일은 2008 경제위기에서 중국만큼 적극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 


2. 러시아

 강국이자 침략의 이미지가 강한 러시아는 의외로 역사상 침공을 많이 당한 국가다. 러시아의 역사는 침공으로 얼룩져있고 몽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전까지 이렇다할 존재감이 없던 나라다. 러시아 역시 독일처럼 동서방향으로 이렇다할 지리적 방어물이 없다보니 항상 침공을 당했고 그 해결의 발로로 확장을 택했다. 러시아는 외부세계를 모스크바와 샹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멀리하는 것이 목표였고 이러한 성향은 지금도 유효하다. 겁이 많은 사람이 오히려 폭력적이라는 건 국가에도 해당하는 셈이다. 

 러시아는 강국이란 이미자강 강하지만 사실 역사상 강했던 적이 없다는게 사실에 가깝다. 그들의 제국은 항상 컸지만 텅 비어있었고 후진적이었다. 1900년대 1인당 소득은 영국의 1/5였고 기대수명은 영국이 52세인데 비해 러시아는 30세 문식률도 1/3에 불과했다. 지금도 러시아는 서구사회에 비해 평균소득이 절반정도에 불과하고 기대수명이 났다. 러시아는 국방력 하나는 강한 편인데 소련시절인 1960년대부터 과학기술을 발달시켜 현재의 무시무시한 핵무기 체계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강한 과학기술과 국방산업의 이면은 어둡기 그지 없다. 삶의 수준과 물질적 행복은 제3세계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소련이 붕괴하지 러시아의 국방은 크게 후퇴한다. 1988-1994 러시아 군대는 500만에서 100만을 줄고 예산 역시 2460억 달러에서 140억 달러가 된다. 푸틴은 2008 조지아 전쟁과 캅카스, 남오셰티아 분리주의 사건을 계기로 이후 10년간 7000억 달러를 쏟아부어 러시아를 다시 군사강국으로 만든다. 

 러시아는 912세기 키이우 인근 드네프르에서 형성했다. 기독교 개종과 키릴로스와 메로디우스 형제 선교사의 슬라브 지역의 복음화가 이뤄졌고 결정적으로 블라디미르 대공의 세례를 받았다. 러시아는 지리적으로 로마와 비잔티움에 거리를 두며 유럽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한 나라였다. 하지만 몽골의 침입으로 모스크바와 키이우가 박살나며 서유럽과 분리된다. 이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무슬림에 기울기도 했고 봉건기사와 도시혁명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서유럽의 르네상스도 겪지 못한다. 이로 인해 오랜기간 후진국에 머물게되며 이 영향을 지금도 남아있다. 

 러시아는 야만족의 침략과 접근으로 러시아 그리스 정교신앙에 집착한다. 또한 자신들은 유목, 아시아, 무슬림에 대항하는 유럽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며 이와 관련한 민족적 전설도 만들어낸다. 그래서 러시아의 민족서사에는 자신들이 완전한 유럽인이 아니라는 열등한 자의식과 더불어 유럽을 구원해야 한다는 우세한 자의식이 모순되게 병존한다. 그래서 러시아는 제3의 로마, 범슬라브주의, 국제공산주의 등을 내걸어 유럽을 대표하는 역할을 시도하기도 한다. 

 2009-2012년 푸틴이 잠시 물러난 시기 미국 오바마와 러시아 메드베데프의 사이는 좋았다. 러시아는 WTO에 가입했고 러시아는 미국인이 비자를 면제했다. 하지만 푸틴의 재집권후 그는 집권기반을 다지기 위해 미국을 적으로 간주한다. 나토는 지속적으로 유럽의 동으로 확장하여 러시아의 오랜 컴플렉스를 건드렸다. 러시아는 나토가 정권을 붕괴시키고 민주정치를 장려하여 세계의 질서를 바꾸려 한다고 보았다. 친 러시아 경향의 우크라이나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실각하자 우크라이나를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러시아의 푸틴은 군사작전을 개시해 크름반도를 합병한다. 현재 푸틴의 러시아는 민족주의, 외국인과 동성애 혐오, 가부장주의, 권위주의, 규율, 정보의 통제를 앞세운다. 세계적인 우경화로 세계화와 다민족주의에 환멸을 느끼는 사회가 많아졌지만 푸틴의 영향력은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는 러시아의 경제적 실패때문인데 오히려 비슷하지만 성공적인 중국의 영향력이 커졌다. 잘 드러나진 않지만 중국은 러시아의 여러 염원을 좌절시키고 있다. 러시아는 인도양으로의 진출을 늘 원했고 그래서 과거 아프간에 접근했지만 이미 중국이 파키스탄의 여러 항구를 통제하고 있다. 이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접근도 마찬가지다.


3. 인도

 알렉산드로스의 침공 이후 인도는 항상 서양문명의 일부였다. 인도는 아랍과 인접한다. 육로는 이란, 해로는 페르시아만으로 연결된다. 중국이 신비의 존재인 반면 인도는 항상 서양 교역의 일부이자 목표였다. 그래서 대항해시대 유럽은 인도를 찾아 헤맸고, 엉뚱한 여러곳에 인도의 지명을 남겼다. 

 중국의 대두 후 서양은 중국에 실망한 나머지 인도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인도는 중국과는 다르게 어쨌든 민주적이며 매우 다원적 국가이기 때문이다. 인도는 중국에 비해 몇 가지 장기적 우위가 있는데 젊은 노동 연령층과 , 기술적 능력, 민주정치, 영어의 보편화, 서양과의 높은 친근성이다. 인도는 중국의 팽창주의를 저지하는데 이해관계를 미국과 같이 한다. 하지만 인도가 미국과 친근해진건 지극히 최근의 일이며 과거 인도는 미국과 그리 친근하지도 않았고 별로 민주적이지도 않았다. 

 인도의 가장 큰 문제중 하나는 카스트다. 인도는 지리적 한계로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도전역이 통일된 적이 몇번 없다. 마우리아 왕조와 무굴제국이 전부이며 타의적으로는 영국에 의해서다. 인도는 지리적 분리로 인해 봉건적 성격이 강하며 이로 인해 한 주에서 다른 주로 물건이 이동하는데 같은 국가내에서임에도 관세가 붙는다. 인도에는 무려 1600개의 언어가 존재한다. 때문에 침략자가 남긴 영어가 국민통합과 소통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인도의 위협은 또 있다. 기후변화에 따른 물문제다. 인도는 인구는 상당하지만 기후변화로 고통받고 있으며 물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인도의 물은 티벳에서 기원하는데 적대국인 중국이 이 지역을 손아귀에 넣고 있어 문제다. 

 다른 위협은 이슬람 근본주의다. 힌두로 통합된 인두에 무슨 종교문제냐 싶지만 4000만의 무슬림이 인도에 거주하고 있으며 파키스탄과의 갈등이 여전하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 인도는 오랜 기간 무슬림의 침공을 받았다. 결국 완전히 점령되어 무굴제국이 생겨났는데 무굴은 17세기 인구의 1억으로 오스만제국의 5배이고 매우 부유하고, 고급 자원을 보유하고 생산력이 높은 나라였다. 무굴제국은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어서 개방적 이슬람으로 힌두교, 기독교 등 다른 종교와 평화로이 공존했다. 하지만 1658-1707년 무굴의 황제 아우랑제브는 종교를 탄압했다. 그는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시크교와 시아파를 탄압했다. 이런 탄압이 현재 인도내 힌두교근본주의의 시작이 된다. 

 강력한 무굴제국은 200년에 걸쳐 영국에 복속된다. 종교탄압으로 무굴제국내 교단 공동체의 분열로 이슬람세력도 쇠퇴한다. 그리고 무굴의 황제들은 중국처럼 시대착오적 인식으로 해상보단 내륙에 집중했다. 영국은 부유한 뭄바이, 캘거타를 획득하여 인도의 가장 부유한 벵골에 접근했다. 그들은 벵골상인에게 무굴제국보다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여 막대한 부를 안겼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공고해지자 벵골은 무굴에서 벗어나 영국에 붙는다. 영국은 이 지역의 부로 인도인만으로 구성된 현지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국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관계는 역전되어 인도는 낮은 가격의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고 영국의 완제품을 비싼 가격으로 수입하게 된다. 벵골에 부를 쌓아주던 영국이 벵골의 부를 대규모로 유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라가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독립한 인도의 열망은 엉뚱하게도 종교간 균열로 이어진다. 1946년 영국으로부터의 분리가 승인되었고 네루의 국민회의가 과반을 차지했지만 이슬람 교도는 무슬림 동맹을 지지하여 이탈한다. 그리고 영국은 이 분리를 수용한다. 그래서 1947년 8월까지의 독립을 앞두고 종교에 따른 대규모 이동과 탄압이 일어난다. 봉기와 살인,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무려 100만의 사상자와 1100만의 대규모 난민이 발생한다. 통합을 외쳤던 간디는 1948년 힌두교도에 의해 살해된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서구보다 수십년 먼저 이슬람 테러가 만연한다.  

 힌두교도 입장에서 이슬람은 오랜 침략자이자 인도 카스트 질서의 파괴자다. 카스트의 하층민들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신앙에 끌린다. 몰락한 브라만들은 최하층이 이런 종교를 바탕으로 의회시스템을 장아갛고 균등한 경제정착을 취하는 것이 불만이다. 이런 인도의 종교갈등은 최근 극심해졌는데 유명한 유적지인 타지마하에 대한 유지기금 지원 중단 사건이 대표적이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유산이기에 힌두교근본주의자들이 보기엔 매우 못마땅한 건물이다. 그래서 힌두통합주의 사제 아디티야나르가 통치했던 우타르 프라데시 주 정부는 2017년 이 유적에 대한 유지 기금을 중단한다.


4. 동남아시아

 미얀마의 원래 이름은 버마이며 수도는 양곤이었다. 이 나라를 망친 것은 군부다. 미얀마는 기대수명이 아시아 최하 수준이고 아동사망률도 7%에 달한다. 1인당 국민소득도 700달러에 불과하다. 미얀마 군부는 1988년 민주주의 운동의 중심인 도시중산층을 붕괴시키고자 수도를 양곤에서 500km나 북으로 떨어진 네피도로 이전한다. 국명도 미얀마로 바꾼다. 중국과 인도는 미얀마의 곤부를 비호하면서 이 나라의 석유와 풍부한 삼림자원을 약탈하고 있다.

 미얀마의 군부를 오랜 투쟁으로 탄생했다. 미얀마는 영국, 일본, 중국, 게릴라와의 무장투쟁으로 무려 40만의 군대를 갖는다. 이 군대가 변질되어 국민의 모든 자원을 착취중인데 사실상 무장마피아나 다름이 없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는 고층빌딩과 사치스러운 호텔, 교통체증, 영어의 보편화로 다국적 기업의 콜센터가 많다. 필리핀은 인구 9천만으로 아시아 4위이고 1인당 소득은 중국과 비슷하며 베트남의 2배다. 하지만 빈부격차가 매우 크고 종교갈등으로 인해 치안이 불안정하다. 필리핀에서는 지난 5년간 800건의 처형이 일어났고, 58명의 신문기자가 살해되었다. 

 긴장의 진원지는 민다나오 섬이다. 민다나오 섬 주민 35%는 무슬림이다. 과거 스페인 기독교 세력의 침공으로 기독교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  민다나오에서는 지난 10년간 12만이 사망했는데 이는 무슬림의 과도한 폭력때문이다. 이 섬은 1950-60년대 평화스러웠으나 70년대부터 모로해방전선이라는 무장운동이 탄생했다. 독재자의 마르코스의 방치로 섬의 폭력은 더욱 심해져갔고 지난 15년간 이슬람 근본주의가 확산했다. 섬의 젊은이들은 중동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며 이들은 기독교인들은 개종시키려 한다. 


5. 실리콘 벨리

 실리콘 벨리의 중심은 샌프란시스코다. 이곳이 지금처럼 세계 유수의 5대 빅테크 기업의 요람이 된데는 역사문화적 배경이 있다. 루스벨트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일본과의 대결을 위해 일본과 가까운 태평양연안으로 산업기지를 이동시킨다. 그리고 그 전인 대공황시기에 스탠퍼드 대학의 휴렛과 패커드가 우정을 쌓고 기억을 설립했으며 오클랜드 대학, 버클리 대학에서 핵과학자들이 활동했다. 또한 바버리해안, 잭런던, 1848 황금열풍 등 이 지역은 약탈과 모험의 역사가 자리한다. 여기에 1950-60년대 비틀즈와 밥딜런이 시대를 풍미할때도 이 지역은 시각예술, 환경주의와 더불어 성해방, 동양정신, 전체론적인 이론이 함께하는 뉴에이지 철학이 유행했다. 즉,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반문화의 요람이고 이것이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창의성이 발현하기 좋은 지역인 셈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지금 기술지배로 인한 독점과 독과점으로 얼룩졌고 극심한 부의 유입으로 빈부격차가 만연해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명성에 비해 인구 80만의 비교적 작은 도시다. 노숙자는 6686명인데 매2년마다 4%씩 급증하고 있는게 문제다. 이 지역엔 엄청난 부가 유입되었고 세계 유수의 인재가 모여들면서 물가 및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이로 인해 많은 현지인들이 도시에서 이탈하고 노숙자가 되고 있다. 실리콘 벨리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진보적 자본주의로 세금을 회피하려 하고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으며 이렇다할 성장모델을 제시하지 못한다.

 5대 빅테크들은 역설적이게도 좌파의 입장에서 기후변화, 이민, 동성애등은 옹호하면서도 자신들의 독과점과 이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엔 눈을 감는다. 이 기업들은 인간의 일자리를 없애는데 가장 앞장서고 있으며 많은 인력을 아웃소싱하여 저임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초창기에 인터넷 기업은 오픈소스를 통한 평등과 자유의 분위기가 있었지만 독과점과 공급 독점으로 이는 붕괴된지 오래다. MS와 애플은 소프트웨어를 독점 공급하고 있고 구글은 연구동력을 반독점 하고 있으며 메타는 소셜미디어를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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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08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앞으로 100년 : 인류의 미래를 위한 100장의 지도
이언 골딘 외 지음, 권태형 외 옮김 / 동아시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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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화, 기후, 도시화, 기술, 불평등, 지정학, 폭력, 인구, 이주, 식량, 건강, 교육, 문화는 인류가 앞으로의 100년, 그리고 그 이후를 영위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다. 이 책은 이런 주제들의 현재와 과거, 미래를 지도로 보여주며 그 추이와 심각성, 국제성, 해결을 위한 협력의 필요성을 잘 드러낸다. 이런 지도는 구글링을 통해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들인데 그런 것들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책이 주는 혜안과 통찰력, 재미와 가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1. 세계화

 책의 세계화에 대한 어조는 긍정적인 편이다. 세계화는 전 세계 경제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분업화를 낳았고, 이를 통해 세계인은 평화와 저렴한 가격에 여러 자원과 재화를 소비할 수 있었다. 에너지와 운송비용의 큰 하락으로 시스템은 표준화되었고 제조업체들을 다양한 국가에 위탁 생산을 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 이후 세계화는 이를 통해 유럽과 북미지역외에도 신흥 경제국가들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혼합도니 방식의 사고 통합으로 이어지리란 기대도 있었다. 미 당국자들은 이런 순진한 생각을 중국은 물론, 이라크, 아프간에도 기대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세계화는 민주주의 체제의 발전을 낳았다. 현재 민주주의와 독재정치의 비율은 2:1정도이며 과거엔 비슷했었다. 

 하지만 세계화는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실제 사고의 통합을 없었고 다름으로 인한 긴장이 여전하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사실상 근로자의 실질 임금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으며, 국가간 불균형은 크게 줄었지만 선진국을 중심으로 국내 불평등 수준이 상당해져서 선진국내 외부이민자 집단에 대한 불만과 극우주의적 성향이 부활하는 조짐을 낳았다.

 더군다나 코로나 19로 인해 주각난 공급망과 3d 프린터, 로봇의 도입으로 다국적 기업의 생산시설은 다시 국내로 외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세계화는 자금세탁, 세금탈루, 불법적인 자금송금의 증가를 낳았다. 인터넷은 세계화의 주요 수단 중 하나인데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그 확산을 낳았지만 가짜뉴스와 절도, 랜섬웨어, 극단적 사상의 통로가 되기도 했다. 특히, 다크 웹이 무분별하게 퍼지면서 마약, 사이버, 아동성범죄를 조장하기도 했다. 현재 세계화로 인한 전체 무역의 0%가 불법거래 및 활동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화의 길을 버려서는 안된다. 세계는 인구증가와 식량과 미중갈등, 다중체제, 기후위기등으로 국제공조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2. 기후 위기

 1950년대 이후로 히말라야 8000m 봉우리를 등반하다 사망한 사람이 무려 2만5천 이상이다. 히말라야의 얼음은 남극과 북극 다음의 규모로 엄청난 담수 저장고이다. 그리고 수십개의 강의 발원지이자 수십억 인구의 자양분이다. 그런데 이게 온난화로 녹고 있다. 네팔 지역에선 천 개의 새로운 빙하호가 고지대에 형성되었다. 지난 10년간 70%가 증가한 것이다. 지진이 빈번한 이 지역에서 이런 빙하호는 큰 재난을 일으키곤 한다. 

 지구기온이 2도 상승하면 빙하의 2/3이 사라진다. 히말라야 힌두쿠시로 이어지는 고산지대 2억 4천만의 사람에게 이는 재앙이다. 우선 축적된 물이 범람하여 홍수가 난다. 이후 하천 유량이 급감하고 수력발전도 할 수 없게 된다. 유량 고갈로 영세농업이 망하고 농업생산성이 크게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집단이주가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게 된다.  

 현재 100개 기업에 세계 온실 가스의 70%이상을 배출한다. 그래서 뉴욕,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들과 미국의 일부지역은 기후 변화에 대한 책임과 그간의 혼란에 대해 정유와 가스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2015년 네덜란드 국민은 정부에 비슷한 소송에서 승리하여 2021년 이전가지 온실가스 25%감축을 약속받았다. 

 2018년 기업들의 온실가스 배출이 320억톤이라면 산불은 370억톤을 배출했다. 미국에서만 연간 무려 10만건의 산불이 발생한다. 1990년대 이후 발생한 150만건의 산불 중 80%가 사람이 일으킨 것이다. 가스회사들은 주를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이 부족하면 잉여 원유를 태워버린다. 이걸 가스 플레어링이라한다. 이들은 하루 25억 세제곱 피트의 석유를 소각하여 환경을 오염시키고 온실가스를 발생시킨다. 이게 비용상 이득이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광활한 원시림이 사라졌다. 주로 농축산업 때문이며 천연 자원의 채춰도 약간 관련한다. 삼림의 20-25%를 벌목할 경우 아마존은 이산화탄소 흡수능력을 상실하고 이후엔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지역으로 전환된다. 나무가 사라지면 지역이 머금고 있던 막대한 수분이 사라져 열대우림이 관목지역으로 변하는 다이백 현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기후가 온난화하면 빙하가 녹고 물의 부피가 증가하여 해수면이 상승한다. 문제는 위험 지역에 상당도시와 인구가 거주한다는 점이다. 위험범람원에 거주하는 아시아 인구는 2060년까지 2배로 증가할 예정이다. 북미의 경우 동부 해안과 걸프 연안 도시는 해수면 상승의 최전선이다. 그린란드 해빙과 대서양 해류의 약화로 더욱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90개 이상의 미국 해안도시가 만성적인 홍수를 겪을 것으로 예측된다. 


3. 도시화

 오늘날 도시는 세계 GDP의 80%이상을 차지한다. 지식 경제의 핵심으로 특허도 90%가 출원된다. 도시가 진정 중요한 이유는 민주주의 회복, 불평등 해소, 전염병 대비와 대응, 탄소제로 같은 적응에 있어 인류의 가장 현실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분열되어가고 정체성이 와해된 국가와는 달리 도시는 부지런히 온실가스 감축과 새로운 거버넌스와 경제적 사고 실험을 시행하고 있다.  

 도시의 기준은 의외로 애매하지만 2018년 EU집행위원회는 도시화를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고해상도 위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 관측을 토대로 인구 5만 이상에 1km2당 인구밀도가 최소 1500명 이상 이면 도시 중심부이다. 그리고 인구 5천 이상에 같은 면적에 인구밀도가 300이상이면 도시 클러스터이며 그 기준 이하면 농촌이 된다. 

 메가리전은 최소 인구 100만 이상의 대도시권이 2개 이상 인접한 것으로 경제생산량이 합계 3000억 달러 이상이어야 한다. 이런 메가리전은 전 세계 29개가 있다. 아시아 11개, 북미 10개, 유럽 6개, 남미 1개, 아프리카 1개다. 

 도시는 생각보다 취약하다. 높은 불평등과 빈곤 수준, 통제 없이 늘어나는 인구, 치솟는 실업률, 혼랍과 오염, 폭력 범죄, 자연 재해 같은 스트레스 요인 때문이다. 전체도시의 10%가 높은 취약성을 보였으며 20%미만의 도시 만이 낮은 취약성을 보였다. 아프리카 도시는 무려 90%가 높은 취약성과 중간 취약성정도를 보였다. 큰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고 인프라 투자도 낮다. 더군다나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향후 기후온난화로 인한 기온상승에 노출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4.불평등

 1930-1970년대는 정부가 부자 대상 증세를 하고 사회복지를 강화하여 불평등이 크게 감소한 시기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시작되자 불평등은 다시 심화되었다. 이 시가 자유무역이 확대되고 세계화가 되며 국가간의 격차는 크게 줄었지만 개별 국가의 국내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특히, 최근 기술의 발달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다. 단순업무의 자동화와 비정규직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플랫폼이 부상하면서 생활수준의 예측이 불가능해졌고 고용안정성은 더욱 낮아졌기 때문이다. 

 고소득층에 편중된 부의 상승과 저금리, 유동성의 강화는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켰다. 그 결과 원주민이자 빈민들은 도시에 거주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대중교통비마져 오르며 장거리 통근도 장점이 사라졌다. 물가상승률을 포함한 실질임금은 1970년대 이래로 정체중인데 같은 긱간 국내총생산은 350%증가했다. 즉, 상승분은 부유층이 모조리 차지했다는 셈이된다.

 이런 극심한 불평등은 경제성장률을 침체시키고, 범죄율을 올리며 질병과 우울증이 증가하고 포퓰리즘과 보호무역주의, 극단주의적 정치를 강화시킨다. 


5. 지정학

세계는 미국 제일의 단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향하고 있다. 이번 세기는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 인도 등의 다극체제로 갈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론적으로는 다극체제가 안정적이다. 하지만 다극체제는 여러 체제가 경쟁하는 만큼 힘의 균형이 무너져 파국으로 이를 경우 그 여파가 매우 큰데 2차대전이나 1차대전이 다극체제의 균형이 무너진 결과다. 단극체제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우나 역사상 오래지속되지 못했다. 양극체제는 힘의 균형이 이뤄져 안정적이나 2인자가 1인자에 강하게 도전하는 형국에서는 매우 불안정해진다. 

 현재 전 세계는 경쟁주이다. 힘을 잃긴 했으나 미국은 지원을 명목으로 177개 국가 및 영토에 800개 이상의 기지를 갖고 있으며 병력만 20만을 배치해놓고 있다. 유지엔 연간 1000억 달러가 필요하다. 

 전 세계는 신 경제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주요 광물의 매장량을 확보하려 혈안이다. 그리고 자유주의 질서는 힘을 잃고 있는데 국내 지지 하락이 원인이다. 민주주의는 신생국과 선진국에서 모두지지를 잃고 있다. 선출직들은 그간 국내 대중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부유층의 문제만 해결함으로써 신뢰를 잃었고 양극화의 주범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선출직을 믿지 않고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세계 정치는 더 격앙되고 급진화했다. 불평등과 어려움으로 집단 정체성이 가오하되었고 이는 민족, 인종, 종교, 성별 정체성 문제로 분출되고 있다. 

 놀랍우면서도 당연하게 젊은 층일수록 민주주의에 회의적이다. 유럽은 정당가입자수, 노조가입자수, 종교인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 집단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데 장기적으로 이런 정체성, 특히 정당의 쇠락은 민주주의를 쇠퇴시킨다. 


6. 이주자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사와 국가는 이주자 비율이 높았다. 이는 그 도시와 국가가 그들을 수용할만큼 강한 국력과 개방성 및 역동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국경을 봉쇄하고 이민자는 탄압하는 단일민족 국가는 쇠퇴하고 뒤쳐졌는데 레콩키스타 이후의 스페인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주자는 공공서비스와 예산을 증가시킨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국가와 도시에서 경제적 번영을 일으키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주자는 대개 생산 가능 연령인 경우가 많기에 고령화에 시달리는 선진 도시와 국가에 보탬이 된다. 또한 그들은 원주민보다 더 많이 일하는 경향이 있으며 피 부양자가 대개 본국에 남아 있기에 보다 많이 소비하기도 한다. 이주자는 원주민보다 장기근속하며 선진사회의 돌봄일을 맡는 경우도 많아 원주민들의 고용을 촉진하기도 한다. 이주자는 당연히 보장된 커리어를 갖고 있지 못하므로 안정적 정규직 취업보다는 창업을 많이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주자의 특허 신청 비율이 원주민의 3배다로 전체 특허의 40%다.

 사람들은 이주자의 수를 과다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부분의 이주자나 난민이 북미나 서유럽으로 편입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주자들은 대개 자기 나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며 문화적으로 비슷한 국가를 선호한다. 때문에 터키370만, 파키스탄 140만, 우간다에 120만에 난민이 있다. 


7. 식량

 팜유는 지구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식물성 기름이다. 빵, 쵸콜릿, 땅콩버터, 샴푸, 화장품, 세정제등 거의 안 사용하는 곳이 없다. 이 팜유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90%를 생산하며 콜롬비아와 에콰도르가 뒤를 따른다. 팜유를 생산하기 위해 이들 국가는 토착삼림을 파괴하고 플랜테이션을 한다. 

 우리의 식단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온실가스의 1/3이 여기서 배출되고 담수의 75%를 식량생산에 쓰기 때문이다. 식량의 이동은 지난 20년간 가속화했다. 세계는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지만 사실 식량을 충분하다. 이를 해결할 정부와 국제기구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굶주린다.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사람은 8억 2천만이고 건강하지 않은 비만 식단으로 조기사망하는 사람이 20%에 달한다. 영양불량으로 신체적 정신적 발달 장애를 겪는 어린이는 1억 5천만 이상이다. 세계 20억 인구가 철분, 비타민, 미네랄등 미량 영양소 결핍으로 건강에 문제를 겪는다. 

 반면 1975년 이후 비만 인구는 3배가 늘었다. 미국, 쿠웨이트, 사우디, 카리브제도 국가는 1/3이상이 비만인구다. 호주, 아르헨티나, 멕시코 인구의 25%가 비만이고, 이집트, 알제리는 30%가 넘는다. 

 현재 농경지는 한계에 다다랐다. 인간은 사실상 경작 가능한 거의 모든 토지를 식량 생산에 사용한다. 인구는 계속 늘어날 예정인데 지구온난화와 담수의 부족으로 식량생산성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농경지의 80%는 가축 사육에 이용된다. 중국인은 연간 62kg의 육류를 소비하는데 이는 미국인의 두배 수치다. 

 모든 해상 어획량의 1/3이 동물 사료로 이용된다. 작은 치어와 플랑크톤이 이들인데 아시아는 가장많은 선단을 보유하고 물고기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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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10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류의 과제를 지도로 확인하는 책 좋네요. 닷슈님 글보고 어떤 책인가 싶어 검색해보고 왔습니다. 지도 보는거 좋아하는 제가 딱 좋아할 책인듯해서 오늘도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닷슈 2022-10-11 09:11   좋아요 1 | URL
저도 지도를 좋아해서 이 책 보면서 좋았습니다. 지도 좋아하신다면 만족하실 겁니다.
그리고 책이 제법 두꺼운데 사실 지도가 반입니다.

서니데이 2022-11-09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이하라 2022-11-09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기쁜 날들 보내세요.^^

닷슈 2022-11-10 21: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thkang1001 2022-11-09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강나루 2022-11-10 0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닷슈 2022-11-10 21: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역시 축하드립니다.
 
풍운의 도시, 난징 지성인들의 도시 아카이브 1
신경란 지음 / 보고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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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오랫동안 하나였던 것 같지만 홍콩과 대만의 분리문제에서 드러내는 단일화 콤플렉스처럼 수차례 분열되었고, 열국이었고, 다른 민족에 침략 지배당한 역사가 제법 길다. 그래서 중국엔 무려 200개 도시가, 지금은 중국사에 편입된 여러 나라의 도읍지였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서울, 경주, 평양처럼 주요 국가의 도읍지였던 곳은 지금의 서안, 뤄양, 북경, 남경 4개의 도시를 꼽는다. 예전부터 왜 북경은 북경이고 남경은 남경인지 궁금했는데(서안이나 뤄양의 북과 남이라 그런줄 알았다.) 주원장이 명을 세우며 남경을 응천이라 했지만 넷째 아들 영락제가 북경을 순천이라 명하면서 서로 어느 곳도 중심이 되지 못한채 북경과 남경이 되었다. 비슷한 사례로 송의 조광윤은 개봉을 수도로 하며 그곳을 중경이라 하고 싶었겠지만 뤄양과 서안이 중심이기에 개봉을 동경성이라 명했고, 일본의 에도막부도 에도인 동경을 일본 천황이 있는 교토를 무시할수 없기에 에도가 그 동쪽에 있어 동경이라 칭했다. 그래서 이곳은 오늘날도 도쿄다.

 이 책은 도시 아카이브 시리즈로 지난 번 읽은 베이징의 전편이다.(저자도 같다.) 거꾸로 간 셈인데 이 책 역시 전작처럼 남경이라 불리는 난징의 역사, 문화, 인물, 전쟁, 지리적 요소가 꽉 차 있다. 중국 역사상 강남인 이 곳 난징을 최초로 수도로 삼은 자는 삼국지의 유명인사 오나라의 손권이다. 그 전에 전국시대의 오와 월도 이곳을 중요하게 다루었지만 최초로 도읍지로까지 삼은 것 손권이 최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전국을 순시하며 금릉이라 불리던 난징을 지나며 왕기가 있다는 소문에 난징의 산맥을 끊고 물길을 내는 등의 행위를 했고 이름도 말릉이라 바꾼다. 이후 버려진 곳이던 이곳을 손권이 위와 매우 인접했음에도 과감하게 도읍으로 정하고 이름도 건업으로 바꾼다. 그럴만했던게 난징은 양자강이 도시의 서쪽과 북쪽을 막아주고 남으로만 뚫려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도 많이 내리고 토양도 좋아 인구부양력도 충분했다.

 손권 이후 송, 제, 양, 진이 남경을 차례로 수도로 삼으며 이곳은 계속 발전한다. 남조왕조들이 위치상 어쩔 수 없기도 하였지만 한족문화권에서 변방인 이곳을 계속 수도로 삼은 것은 아무래도 남쪽 지역의 온난한 기후와 풍부한 강수량, 질좋은 토양으로 인한 높은 농업 생산력과 동남아 등으로 이어지는 해로를 통한 교역에서 나오는 경제력과 지역 자체의 풍부한 물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나라의 통일전쟁으로 남경이 파괴되며 쇠퇴기에 이른다. 송, 제, 양, 진의 남조 시절 남경엔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이 자주 왕래했다. 고구려 사신의 객관은 현인관, 백제 사신의 객관은 집아관이라 하는데 아무래도 고구려는 북조국가와 인접하니 국방상의 이유로 남조와의 협력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는 남조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경쟁하는 백제도 남조를 온전히 고구려에 넘기긴 좀 그랬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문화 수입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남경과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당나라 시절로도 연결된다. 신라 최치원은 어린 나이에 당에 유학과 외국인 국가고시인 빈공과에 합격한다. 이 수제는 남경으로 발령나 율수구와 고순구의 율수 현위가 된다. 최치원은 이곳에 무려 4년간 재직한 후 신라로 향하며 이후 그의 불행한 행보는 우리가 모두 아는 바이다. 

 이어 원나라때도 우리와의 인연이 이어진다. 이번엔 고려말 명장 최영이 주인공이다. 원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 순제 때(기황후 남편이다.)는 승상이 톡토였다. 권력이 막강했던 톡토는 장사성이 농민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자 원 각지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힘이 모자랐는지 속국에도 군대를 요청한다. 당시 고려의 친원파 채하중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혼란한 고려의 상황은 고려치 않고 충분히 군대를 동원할 수 있음을 주장하여 고려는 없는 살림에 최영등의 장수와 수천의 군사를 머나먼 원으로 파견한다. 파병 중 북경 등지에서 군사가 크게 불어 군은 2만 3천의 대군이 되고 웬일인지 원의 진압군 80만의 선봉까지 하게 된다. 진압군은 장사성을 거의 물리치지만 기황후에 의해 톡토가 실각하고, 후임 지휘관의 무능까지 더해져 수차례 창에 찔리는 최영의 분전에도 패퇴하고 만다.

 명대에 이르러 주원장이 금릉을 남경이라 칭하고 수도로 삼는다. 그간 남경은 도성의 주축선이 양자강의 흐름에 맞추어 남서-동북방향으로 기울어져 지어졌는데 주원장은 이를 강의 흐름과 상관없이 남북방향으로 주축선을 수정한다. 거기에 남경을 요새화하는데 궁성, 황성, 도성, 외곽성의 4중구조로 성을 쌓았고, 20년 대공사에 규모도 크다보니 무려 3억 5천만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자금성도 축조한다. 남경의 자금성은 사실 북경 자금성의 원조격인데 훗날 영락제가 북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남경 자금성의 설계를 그대로 본따 북경에 자금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영락제는 아버지보다 궁을 크게 짓기 좀 그랬는지 남경 자금성보다 좀 작게 북경에 자금성을 지었다.

 남경엔 그 유명한 정화의 조선소가 있었다. 남경은 바다와 무려 300km나 떨어져있지만 양자강이 바다로 이어지기에 사실상 항구 역할을 한다. 정화는 1405년에서 1432년까지 일곱차례 인도양을 향했으며 선단의 규모도 유럽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정화는 회족으로 주원장이 운남성을 정복한 후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거세해 환관으로 삼은 아이들 중의 하나다. 본래 이름은 무함마드의 이름을 음차해 마삼보였지만 이후 영락제의 눈에 들고 정초패에서 큰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정씨성을 하사받아 정화가 되었다.

 이후 남경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들어서는 것은 청나라 말 아편전쟁으로 인한 난징조약 때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해 19세기 말 3차례 조약을 강요받는데 1차는 홍콩섬 2차는 구룡반도의 영국으로의 영구 할양 3차는 신계를 99년간 임대하는 것이었다. 사실 중국은 이름 그대로 천하의 중심국가로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머진 모두 동등한 대상이 아닌 속국이자 조공국이었다. 영토도 크고 천하의 중심은 중국은 물산도 풍부하여 교역의 필요성도 딱히 느끼지 못했다. 그런 중국에게 다른 나라와의 대등한 조약이나 무역은 전혀 없는 개념이었다. 특히, 지금과 다르게 당시 홍콩은 쓸모없는 무인도에 가까웠고, 개항이 요구된 상해 역시 요충지이긴 하나 황무지였다. 영국의 관세문제도 청 자체게 무역으로 인한 조세수입이 거의 의미가 없어 조약의 주요조건으로서 무의미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중에 절실하게 느끼게 되며 중국에서는 천하의 중심국가에서 만국공법의 세계 일부로 강제 편입된 이 사건을 중국의 근현대사의 시작으로 파악하다. 우리에게 강화도 조약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후 남경엔 태평천국군이 들어선다. 이들은 이곳을 수도로 삼는데 수많은 전란과 혼란으로 청대에 백만에 달하던 남경의 인구는 이시기 15만까지 축소된다. 청은 태평천국군을 북경의 팔기군으로 제압하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수가 적은 만주족은 항상 수가 많은 한족 중심의 지방군을 반란의 위험으로 인해 그 사용을 기피하였는데 어쩔수 없이 태평천국군의 진압을 위해 이 지방군에까지 의존하는 상황에 이른다. 증국번 주도의 호남성 상군은 20여년간의 사투끝에 태평천국군을 진압하게 되고 이는 결국 청의 병권이 한족 중심으로 넘어가는 결과를 낳고 만다. 태평천국군은 무려 1-3만이 해외로 도피하는데 그 지역이 칠레다. 이들은 초석탄광 계약자로 노예처럼 일하다 이후 초석전쟁에서 칠레군으로 참여해 승전한다. 그래서 현재 칠레 북부 이키케 지역엔 이들의 후예가 무려 10만이나 있다.

 청이 망하고 남경은 중화민국의 수도가 된다. 손문과의 약속과 달리 북양군 출신의 원세개가 황제에 오르며 긴 투쟁이 시작되고, 이후 손문의 후계자인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과 만주국의 세운 일제의 침략군, 그리고 마오쩌둥의 공산군이 뒤섞이며 중국은 혼란의 20세기 초반을 보내게 된다. 망국 이후 임시정부를 세운 김구와 김원봉이 주로 활약한 곳이 바로 남경이다.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의 교장으로 있었고 그 시절 졸업생을 우대했는데 김원봉이 바로 그 학교 졸업생이었다. 또한 김구 역시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 공원 의거로 장개석에 인정받고 크게 지원받는다. 김원봉은 조선혁명간부 훈련반을 개교했는데 재밌게도 시인으로 알려진 이육사가 이 학교 제 1기 졸업생이었다.

 1937년 일제는 남경을 침략하고 함락시킨다. 이는 천인공노할 난징대학살로 이어지는데 희생자는 적어도 3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중국군은 끝까지 싸우도 적절한 퇴각시기를 놓치는데 이로 인해 질서정연한 후퇴에 실패해 상당수의 패잔병이 도시 전역으로 숨어들게 된다. 일본군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시작한다. 상해, 약탈, 강간이 무자비하게 이뤄졌다. 이때 난징판 쉰들러 리스트가 있었는데 바로 욘 라베다. 나치당원인 그는 일제의 남경침략후 자국민 보호를 위한 각국의 소개명령에도 20여명과 남아 남경안전구역 국제위원회를 설립한다. 민간기구였음에도 이 기구는 힘이 있어 약 4만제곱 킬로미터의 면적에 25개 수용소를 만들고 약 30만을 보호한다. 라베는 이후 일본의 압력으로 독일에 귀국해 존 메기가 목숨걸고 촬영한 남경대학살 필름을 독일 각지에서 상영하고 라베일기도 출간한다. 하지만 일본과 독일이 함께 전쟁하던 시기라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져가다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에 의해 재조명된다. 일제는 난징대학살 외에도 1644부대라는 남경판 731부대를 만들어 무려 1천명의 중국인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킨다.

 이처럼 난징은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로 자리매김하면서도 현대사의 아픔을 갖는 중국의 도시지만 문화측면에서도 매력적인 도시다. 본래 강남은 쌀이 주식이고, 민물고기를 주로 먹었는데 북조의 인사들이 남조로 내려오고 교류가 이뤄지면서 오리고기와 잡곡을 이용한 요리도 시작되었다. 강남의 경제력을 바탕에 남조의 귀족문화가 합쳐져 여러 요리법과 조리도구가 경쟁적으로 발전하여 요리문화가 발전하였다. 여기에 해안으로부터 들어오는 요리에 원나라 때 회족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의 입맛이 합쳐지며 매우 다양한 요리문화를 갖게 되었다. 남경은 특히 딤섬이 유명한대 본래 딤섬은 배고플 때 요기하는 떡이나 부침개 정도를 의미했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문화가 들어오면서 딤섬은 차를 마실 때 곁들이는 간단한 요리로 변화하고 이게 영국에도 영향을 미쳐 차에 곁들이는 애프터눈 티 과자가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책엔 여기서 정리한 내용 이외에도 남경의 거의 모든 것이라할 만큼 자세한 내용은 잔뜩 실려있다. 난징을 한 번 가고픈 마음이 드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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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grr 2021-01-05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좋은 날이 와서 선생님의 난징 방문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2021-01-05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21-01-05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시 하나를 중심으로 역사를 풀어가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닷슈님 덕분에 좋은 책 하나를 또 얻어갑니다. ^^

닷슈 2021-01-05 08:59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이렇게 도시 하나를 두고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도시아카이브 시리즈1권입니다. 2권 나가사키, 3권 베이징 이렇게 나왔더군요. 저는 난징과 베이징을 읽었습니다. 작가분이 중국에서 오래 공부하셔서 그런지 중국의 도시에 대해서 정말 아는게 많으십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인데도 그 도시의 모든 것이 재밌고 밀도있게 담겨 있습니다.
 
오래된 미래도시, 베이징 지성인들의 도시 아카이브 3
신경란 지음 / 보고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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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중국 수도 베이징을 역사상 처음 도읍으로 삼은 왕조는 고려를 침입한 금나라였다. 그들은 베이징의 이름을 중도라 했고 이후 베이징은 금을 멸한 원, 그리고 그 원을 멸한 명, 또 명을 멸한 청, 그 청을 멸한 지금의 중화민국까지 무려 천 년간 중국의 수도로 자리잡아 왔다. 이러면 마치 베이징이 오랫동안 중국의 중심지였던 것 같지만 사실 중국의 중심지 중원은 황하 중상류지역이다. 지금은 고도로 크게 발달하지 못한 뤄양이나 시안이 그곳이다. 

 중국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에게 베이징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힘이 뻗치지 못하는 변경지역이었다. 베이징은 과거엔 연경이라 불렸는데 이 지역은 오래전엔 지금과는 해안선이 달라 북쪽으로 지역이 열려있어 유목민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 때문에 연경에는 유목민인 산융문화유적이 지금도 다수 남아있다. 추후 농경민들의 힘이 이 지역까지 도달하며 산융은 밀려나는데 이들으 흉노문화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한족, 즉, 농경문화의 힘이 베이징을 본격 흡수한 것은 주나라 때의 일로 처음으로 베이징에 제후국을 설치한다. 연과 계나라다. 연경이란 이름도 연나라에서 비롯되 것이다. 계가 백여년이 지나 연에 흡수되고 연은 인구가 150만 정도에 달할 정도로 강성해진다. 하지만 진이 통일한 후 끝까지 정항하던 연과 조, 제나라의 수만 가구가 조선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조선과 가장 인접한 연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조선으로 넘어와 훗날 왕위까지 찬탈하는게 위만이다. 

 베이징은 수당대에 이르러서는 유주의 중심지역으로 수와 당군이 고구려를 침략할때 군사집결지로 활약하게 된다. 당 말기엔 베이징을 근거지로 큰 난리를 피운 안록산이 등장한다. 삼국지의 동탁과의 혼동때문인지 난 이전엔 안록산도 동탁처럼 서북면의 군웅으로 착각했었다. 하여튼 안록산의 난으로 큰 고생을 치룬여파인지 훗날 상당기간 연경지역은 배반자의 땅으로 낙인을 찍혀 조정으로부터 불이익을 받게 된다. 

 세월이 흘러 거란이 등장한다. 거란은 세력을 뻗쳐 발해를 멸하고 연경 지역까지 확장한다. 중국 역사에서는 한족의 입장에서 거란에게 송이 연운 16주를 할양한 것을 굴욕으로 여긴다. 연운 16주란 만리장성과 상건하를 따라 동서 600km 남북200km에 달하는 지역으로 한반도의 절반가까이 되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베이징이 그런 것처럼 농경문화와 수렵문화의 접점이다. 농경에엔 북방 최후의 보루, 수렵민에겐 물산이 풍부한 남으로 진출하는 지역이다. 저자에 의하면 송의 연운 16주 할양은 사실 이미 2주를 빼앗긴 상태에서 14주를 넘긴 것이고 이미 14주 역시 송이 아닌 다른 세력에 빼앗긴 상태에서 그가 거란과 협력하에 거란의 힘을 통해 차지한 14주를 넘긴 것이기에 할양은 과도한 한족 중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거란은 송과 계속 대치하다 999년 거란의 남하에 송이 반격하여 무려 10년의 대치끝에 절연의 맹이란 강화를 맺고 100년의 평화기간을 맞이한다. 송은 평화를 대가로 거액의 물품을 매년 거란에 상납했고, 거란과의 무역을 통한 이문으로 바친 물품 이상의 혜택을 누리는 양자가 성공하는 거래였다. 평화 후 거란은 발해의 5경제도를 본따 베이징에 남경을 설치한다. 남경이 발전하는데는 여성인 소작의 힘이 컸다. 거란은 황제는 야율씨 그리고 황후는 소씨에서 배출하는 나라였는데 소작은 어려서 남경에서 자라 국제적 감각을 키우고 농경문화를 잘 이해하여 곡물생산량을 늘리고 과거제를 실시한다. 

 여진의 금이 등장하자 평화는 깨진다. 여진의 금은 125년 역사동안 115년을 송과 전쟁한다. 송은 처음에 숙적 거란을 멸하는데 금과 협조하기로 맹약한다. 대가는 오래전 잃은 베이징 지역인 연운 16주의 획득과 평화였고, 금이 얻는 것은 요의 나머지 영토와 매년 대량을 물품상납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지주의 토지겸병과 이에 따란 농민 반란으로 송은 군대 동원에 어려움을 겪는다. 간신히 협력하여 금과 송에 의해 요가 망한다. 금의 완안아골타는 연운 14주를 넘겨주지만 완안아골타의 뒤를 이은 금 태종이 송의 허약함을 목도하고 공격한다. 송은 형편없는 전쟁실력으로 황제 휘종과 그 아들 흠종이 금에 사로잡힌다. 수도 개봉 역시 함락되고 지금의 항주로 수도를 이전하며 새황제가 등장하는데 이름이 남송으로 바뀌는 계기다. 하여튼 연운 14주와 송의 북부를 차지한 금은 베이징을 중도라 개명하고 수도로 삼는다. 

 세월이 다시 지나 1234년 몽골에 의해 금도 멸망한다. 전쟁은 무려 20년간 지속되었는데 송은 원수같은 금을 멸망시키는데 역시 몽골에 협조한다. 하지만 몽골 역시 송의 허약함을 알고 경제력이 풍부한 강남을 차지하기 위해 송과의 45년 전쟁에 돌입한다. 이 전쟁은 처절했는데 최후까지 항전한 송나라 사람이 무려 20만이었고 최후의 황제는 자살한다. 중국전토를 차지한 몽골은 국호를 대원으로 고친다. 원은 중국 역경의 첫 괘이자 하늘을 상징한다. 몽골 민족 역시 텡그리 신앙으로 하늘의 뜻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원이란 글자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모두를 만족시키는 명칭으로 양자에세 손쉽게 채택되었다. 

 원은 베이징을 대도라 명명하고 대대적 수도 건설에 임한다. 금의 중도와는 비교가 안되는 규모였다. 커다란 외성을 사막의 느낌으로 흰색으로 채우며 자금성을 완성한다. 그리고 물이 부족한 베이징 내로 수로를 내기 위해 베이징 동서북의 계곡물을 모두 뒤지고 찾아내고 수로를 연결해 옹산박이란 거대한 호수를 조성하고 여기에 물길을 내어 베이징 시내로 끌어내었다. 이 물길은 방향과 형태가 조금씩 바뀌지만 명청대를 이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원은 사막민족의 나라이므로 물이 귀해 궁의 한가운데 호수를 조성한다.

 원이 망하고 명은 대도를 손쉽게 차지한다. 원의 순제가 생각보다 손쉽게 대도방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명은 처음엔 북방왕조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수도로 삼지 않는다. 이민족인 북방왕조의 수도이기도 했고 아직 강성한 몽골세력과 워낙 근접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원장은 아들중 가장 전투력이 막강한 넷째 주체를 연왕으로 삼아 연경에 배치한다. 연경을 세력권으로 둔 주체는 훗날 조선의 이방원과 매우 비슷하게 왕위를 찬탈하며 수도 역시 다시 베이징으로 옮긴다. 물론 원대의 거대한 자금성은 크기가 줄어든다. 자금성의 중심이었던 호수는 바깥으로 밀려나고 좀더 조밀해져 생활 및 활용이 더욱 편리해지게 된다. 자금성의 역사는 사실 화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명 230년동안만 무려 화재가 47번으로 평균 5년에 한번이었다. 자금성 자체가 워낙 거대하고 매 화재마다 명황제들은 중건을 반복하지만 국운의 쇠퇴와 재정난으로 원하는 수준의 중건은 이루지 못한다. 

 또 세월이 지나 마지막 왕조 청이 등장한다. 금이 중도를 건설하고 수백년이 흘러 다시 여진이 베이징을 차지한 것이다. 물론 금을 세운 여진과 만주여진은 매우 다르다는게 저자의 설명이다. 청은 강력한 군사국가인만큼 전 왕조들과는 다르게 베이징을 병영도시 개념으로 세운다. 청의 막강한 군사력은 팔기에서 나왔는데 이 팔기가 베이징에 주둔하도록 도시 전체를 8로 나누어 팔기를 주둔시킨 것이다. 팔기는 1기가 무려 7500명의 병력으로 상비군으로 유사시 무려 5-6만의 친위군 동원이 가능한 셈이었다. 팔기는 황제 직속의 2기와 황족과 귀족이 이끌며 경쟁하는 6기로 서로간의 경쟁으로 전투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신흥귀족인 팔기는 평생 급여가 보장되고 평화가 지속됨에 따라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유명무실화한다. 훗날 외세의 침략에 대포 소리 한번 듣고 가장 먼저 도망간게 팔기들이라고 한다. 청대엔 자금성 내에 원명원이 생겨난다. 원명원은 중국의 원림과 서양식의 다양한 궁전들이 총망라한 대규모의 정원이다. 하지만 아편전쟁때 불타고, 의화단 전쟁때 완전히 망가져 지금까지도 복원이 되고 있지 않다. 

 베이징은 유목과 수렵문화가 만나는 지역이고 국제적 도시여서 매우 다양한 종교가 존재한다. 베이징에서 제1의 종교는 불교지만 제3의 종교는 이슬람교다. 이슬람 신자는 카타르인, 위구르 인 이외에도 회족이란 이름으로 중국 각지에 분포하며 베이징에만 무려 20만이 산다. 중국 왕조, 특히 개방적이었던 북방왕조들은 이슬람을 인정해주었는데 지금도 중국 각지에 기와를 얹은 독특한 중국식 모스크가 각지에 존재한다. 원대에 널리 퍼진 무슬림은 고려에도 꽤 많았던 듯 하다. 고려말은 물론 조선 세종때까지만 해도 이슬람의 대표적 송축 의례가 있었다고 한다. 세종9년에야 중지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책은 300쪽 정도로 짧지만 베이징엔 대한 역사, 지리, 인물, 왕조의 흥망이 자세히 수록되었다. 베이징에 대한 정보와 지식으로 꽉 찬 셈이다. 도시 아카이브 세 번째 시리즈인듯 한데 나머지 책도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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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4 0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닷슈님 베이징에 제1종교가 불교였어요 !유사시에 상비군을 오천 육천명도 아닌 만단위로 ㅋㅋ베이징이라고 하면 자금성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아직도 중국에대해 역사에 대해 모르는게 너무 많네요 닷슈님 포스팅 덕분에 새로운 사실들 많이 알게 되네요닷슈님 크리스,메리 메리
ᒄ₍⁽ˆ⁰ˆ⁾₎ᒃ♪♬

닷슈 2020-12-24 16:37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을 보고 중국과 베이징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가깝고 중요한데 아직 많이 모른단 생각입니다. 스콧님도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이전 호빵글은 참 좋았습니다.

shingrr 2020-12-24 10: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쓴 신경란입니다. 책을 읽어 주시고 이렇게 소개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닷슈 2020-12-24 16:38   좋아요 0 | URL
헉, 저자님이 왕림해주시다니. 놀랍습니다. 좋은 책 써주셔서 저야말로 많이 배웠습니다. 차기작 기대해봅니다.

shingrr 2020-12-24 17:5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선생님께 알라딘 편지 보내는 기능을 이용해서 편지를 드렸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같은 시리즈 난징 책도 제가 썼습니다. 한 권 부쳐 드리려고 합니다. shingrr@163.com으로 주소 보내주시면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대변동 : 위기, 선택, 변화 -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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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새 책이 나왔다. 단숨에 구입해서 읽었는데 이전 문명 3부작 시리즈와는 좀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다소 두껍다는건 비슷하지만. 이번에 소재로 삼은 것은 개인이 살면서 맞는 위기와 그 대응단계를 국가가 맞는 위기와 대응단계로 맞대응해서 틀을 짜 책을 썼다는 점이다. 과거 위기를 맞고 대응 및 극복한 국가로는 핀란드, 메이지 시대 일본, 독일, 칠레,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례를 들었다. 모두 저자가 직접 체류한 적이 있는 국가들이다. 다음으로는 현재 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들고 마지막으로는 전세계적인 위기와 그 대응 방안을 서술했다. 세계가 위기를 맞고 있고 이를 극복하려는 방안을 찾는다는 그의 큰 사고 틀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읽고나서 개인적 위기 대응단계와 국가의 위기 대응단계라는 공식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억지로 꿰어맞춘정도는 아니지만 이론화하여 대입할 정도는 아니랄까. 하지만 워낙 재밌게 어려운 내용을 서술하는 저자라 각 국의 역사전 변화와 이야기를 아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만족스럽고 재밌었다. 솔직히 핀란드, 칠레, 인도네시아 정도의 국가에 대해서 우린 많이 알지 못한다. 일본, 독일, 오스트레일리아도 마찬가지겠지만. 다 정리하긴 좀 길어 재밌는 국가만 정리해보았다.

 

1. 핀란드

 우선 핀란드. 핀란드하면 휘바와 자일리톨, 망한 노키아, 높은 국민소득과 복지, pisa에서 1위를 좀처럼 놓치진 않는 강력한 공교육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나라가 마땅히 서유럽의 일익을 담당하면서도 NATO 가입국이 아니란건 좀 의외다. 그 이유는 이들의 지정학적 위치에서 찾을 수 있다. 핀란드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나라꼴이 엉망인 상태에서도 세계 최강국 미국을 상대로 감히 한국전쟁에 큰 손실을 감수하고 뛰어든 이유가 북한을 순망치한으로 여긴 것처럼 러시아에게도 국경을 맞댄 핀란드는 그런 곳이었다. 차지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위협적인 존재는 확실히 아니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핀란드는 나토가입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구 소련을 비방하는 언론통제까지 한다. 생각외의 장면이 아닐수 없다.

 물론 그들이 첨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핀란드는 헝가리처럼 유럽에서 독특하게 유럽인도어족이 아니다. 아마도 천여년전에 유럽을 침공한 아시아계 북방민족이 정착하여 만든국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성은 매우 독특하며 오래도록 강국인 스웨덴과 러시아의 속방이면서도 자주성을 잃지 않았다. 그들을 오래지배한 러시아도 그래서인지 자치를 허용했다.

 1차대전 이후 유럽의 국경이 변하면서 이들은 독립한다. 하지만 소비에트로 변한 러시아의 위협이 여전했고, 이에 발트 3국은 러시아에 굴복하여 합병된다. 반면 핀란드는 저항을 택한다. 인구는 러시아의 20분의 1, 국토나 무기수준역시 비교가 안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긴전쟁으로 핀란드는 큰 손실을 입는다. 10만명이 전사하는데 인구가 많은 동아시아의 전쟁규모에선 별거 아닌 수준이지만 당시 인구가 200만 정도에 불과한 핀란드에선 대형참사였다. 그럼에도 오래 저항했기에 2차대전을 준비해야 하는 소련의 상황상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때의 경험은 핀란드 지도자들에게 대소비에트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한다. 2차대전 이후 핀란드는 잠시 되찾은 과거의 영토를 다시 소련에 선뜻 돌려주었고 아프지만 영구히 포기한다. 정책 역시 친소련정책으로 나토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소련의 대서방창구역할마져 수행한다. 이에 소련은 안심하고 전쟁 배상금을 줄이고 연기까지 해주었으며 소련과 국경을 인접한 국가로는 유일하게 공산정권을 세우지 않는다. 서구와 단절되면서도 그들의 발전상이 궁금하면 감시해야 할 소련으로선 오히려 핀란드가 우방이면서 서구를 접할 창구가 되는게 오히려 좋게 되어버렸다.

 핀란드 사람들은 친소련정책으로 언론통제는 물론, 일정 액수 이상의 소련 제품을 구매해야만 했는데 이를 원유로 대체하여 오히려 서방국가에서는 유일하게 오일쇼크나 중동의 불안정한 정세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 이 같은 핀란드의 지정학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미국의 우방이지만 이로인해 중국에 위협이 된다. 미국은 멀고 경제적 영향력도 점차 예전만 같지 않지만 여전히 중요하며 강하다. 하지만 중국은 바로 우리의 지척이며 국경을 맞대고 바다마저 가까워 보호막이 되지 못하며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접한 강국에 만만치 않은 국방력을 갖춰 무시하지 못하면서도 적이아니어서 근심을 덜어주는 것은 우리가 맞이해야할 지정학일런지도 모른다.

 

2. 오스트레일리아

지구상에서 가장 최근 생긴 국가중 하나다. 아직도 국가수반이 영국여왕이며 지폐인 그의 얼굴이 새겨진다. 200여년 전에 죄수의 급증으로 골치아픈 영국인 수인선단은 보내 정착한 후, 나라가 생겨났다. 이들은 처음부터 한나라는 아니었으며 지리적 격리로 인해 6개의 식민지로 성장해간다.

 호주는 미국과는 달리 영연방에 강한 소속감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아무상관도 없어보이는 1-2차대전에 참전한다. 영국이 영연방 국가들에게 외교적 자치권을 허락했을때 남아공과 캐나다등이 발빠르게 외교관을 파견한 반면 호주는 그렇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쇠락해가는 영국은 호주를 지켜주지 못한다. 적지 않은 인원을 파견해 피를 흘렸음에도 영국은 일본의 침공을 맞아 수적 우세에도 싱가포르 기지를 지켜내지 못한다. 심지어 항복이었다. 이는 호주에 영국에 대한 큰 배신감으로 다가온다. 일본의 위협을 느꼈던 호주는 2차대전 당시 파견 군대를 본국으로 돌려보낼 것을 처칠에 요구했으나 그는 싱가폴 기지가 있고 영국이 수호할 것을 천명했었다. 물론 이는 영국이 각국에 날린 무수한 무책임한 빈말중 하나였다.

 오판의 결과 호주는 일본에 다윈이라는 도시를 폭격당하고, 적이 지척까지 진군해오는 것을 목격한다. 호주는 큰대륙이었지만 당시 인구가 고작 400만 정도에 불과했던데 반해 일본은 무려 1억이었다. 거기에 중국은 무려 10억 정말 가까운 인도네이사 마져 2억의 인구를 자랑했다. 텅빈 땅이 가득한 호주는 전쟁중에도 전후에도 이들의 러시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농경이 기본인 이 민족들은 사막이 전부인 호주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호주는 그래서인지 미국에 조금 모자라는 영토를 갖고도 현재도 인구가 2천만 정도에 불과하다.

 영국의 배신은 전후에도 계속된다. 당시 유럽은 유럽경제공동체를 설립했는데 잠시 망설이던 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여기에 가입한다. 유럽경제공동체는 공동체 국가끼리는 비관세를 하면서도 다른 국가에는 관세벽을 세워야 했는데 이로인해 호주는 그동안 관세없이 수출하던 영국에 관세를 지불하게 되었다. 호주의 농축산물이 덴마트나 독일 등의 제품으로 대체된단 이야기다. 영국의 경제적 중요성은 날로 멀어져갔고 가까운 아시아의 위상과 경제력은 날로 커져갔다.

 여기에 모자란 인구를 보충하고자 동류럽 및 다른 유럽인들은 대거 받아들인 결과 영국 직계로만 구성되던 인구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래저래 영국과는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백호주의를 포기하고 많은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받아들였으며 축구마져 AFC에 가입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국가수반은 영국여왕이며 영연반의 국기를 사용한다. 호주는 아직 정신을 못차린 것일까.

 

3. 칠레

칠레는 긴나라다. 안데스의 서쪽을 차지해 동쪽은 자연방어가 되며 북쪽은 한류로 인해 아타카마 사막이 자리한다. 그리고 태평양 방면으로는 이렇다할 나라가 없다. 지정한적으로 완벽히 안전한 것이다.

 칠레는 북은 사막이고 동은 상당히 높으며 남은 추운 관계로 영토가 제법 큼에도 인구의 대다수가 중부인 수도 산티아고 인근에 몰려있다. 이런 지리적 집중성과 인구의 대다수가 메스티소인 동질성은 칠레의 정체성 확립과 통합성에 기여했다. 칠레인들은 스스로를 남미인이라기 보다는 유럽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아메리카 원주민에 더 가까워 보이는 그들의 외모와 대서양과 동떨어진 그들의 위치를 생각하면 다소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하여튼 칠레는 소수의 대규모 농장주들이 권력을 지배한 남미국가임에도 민주적 통치가 자리잡았다. 칠레의 독특한 점은 그럼에도 독재가 생겨나 성행했다는 것이다. 여기엔 사회주의 아옌데 정권이 적잖은 이유를 제공한다. 당시 칠레는 사회주의 세력과 소수의 중도파, 우익이 서로 비등하게 자리잡아 아웅다웅 다투는 형국이었다. 어느쪽도 주도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 아옌데 역시 40%가 되지 못하는 지지를 얻고 간신히 대통령이 된다. 지지기반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

 그럼에도 아옌데는 사회주의 정책을 실행한다. 복지를 늘리고 지출을 늘렸지만 경제적으로 고립되고 화폐를 남발해 실업률이 급증하고, 적자와 인플레이션이 성행한다. 우리나라가 그렇듯 이런 흔들리는 나라에선 군부가 역사의 시계추를 뒤흔든다. 칠레의 군부역시 쪼개져서 사회주의에 경도된 장교와 우익 장교, 중도장교가 있었다. 우익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를 몰아내고 그는 자살한다. 우익은 아옌데와 정반대의 정책을 실행해 사회주의 정권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던 미국을 안심시키고 그들의 경제원조를 얻어낸다. 경제역시 나쁘지만 호전된다.

 불안한 아옌데 정권에 실망하던 지식인들과 경제인들도 쿠데타를 환영했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것은 우리나라의 박정희 처럼 그들이 지도자로 삼은 피노체트가 권력욕이 강하고 무척 잔인했다는 점이다. 피노체트는 무척 조용하고 온건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그래서 군부로부터 선택받았지만 비밀경찰대를 만들고 반대파를 척살하고 고문살해하며 자신의 정권을 지켜나갔다. 피노체트는 막판 선거에서의 실패로 종신집권엔 실패하였지만 그럼에도 종신상원의원직을 얻었으며 지지세력도 40%를 상회했다.

 이로인해 다시 민주정권을 되찾은 칠레에서도 과거의 비밀경찰 조직과 피노체트에 대한 단죄는 언급되기도 어려운 형국이다.

 

4.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 중 하나다. 역사와 전통이 없다는 것 국가정체성과 민족성이 부재하단 이야기이고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지고 다양한 민족과 언어가 존재하는 이 나라의 현실은 이를 더욱 어렵게 한다.

 이런 인도네시아에 국가적 정체성을 심은 이가 수카르노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 이뤄진 선거에서 칠레마냥 네개의 정당이 비슷한 지지를 얻는 형편없는 결과를 얻는다. 투표율이 높았음에도 말이다. 이를 타개하고자 정권을 잡은 수카르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도네시아는 국가의 관리가 필요한 교도적 민주주의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신규 국가엔 산적한 문제가 많았음에도 수카르노는 의외로 바깥으로 화살을 돌린다. 내부의 혼란을 외부에 사건과 적을 만들어 단결을 시도한 것일까? 그는 유명한 반둥회의를 통해 제3세계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반식민정책을 내세운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제1세계마냥 약한 나라를 침공하여 식민화한다. 뉴기니와 티모르가 그들의 타겟이었다. 이것도 모자라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말레이시아 마져 공격한다. 보르네오 섬을 통째로 먹을 요량이었던 것.

 그러던 중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들의 쿠데타는 우리나라 갑신정변 마냥 소란스럽기만 하고 영양가가 없었는데 이를 빌미로 우익은 쿠데타를 바로 진압하고 좌익 사냥에 나선다. 이 중심에 선게 수하르토다. 둘은 이름도 비슷하다. 우익의 반격이 너무나도 거세고 신속하며 계획적이어서 다이아몬드는 지금의 터키 쿠데타처럼 이 쿠데타는 일종의 숙청을 위한 기회 및 함정이었을 거라 본다.

 정권을 차지한 수하르토는 내치에 집중했는데 인도네시아의 산적한 문제는 많이 해결했지만 군부로 인해 정권을 차지한 만큼 군부에 지나친 특혜를 제공한다. 이로 인해 군부는 많은 예산을 착복하였고 인도네시아는 나라의 발전이나 복지에 써야할 동력을 잃어간다. 나라 전체는 부패가 가득했고 빈부격차는 커져간다. 잘나가던 수하르토는 아시아 경제위기로 인해 갑작스레 실각하는데 많은 가족의 비리에도 불구하고 지지세가 여전히 만만치 않다.

 

5. 현재의 위기

다이아몬드는 현재의 위기를 정리하며 일본의 경우는 과도한 국가부채와 고령화 및 저출산, 이민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많은 인구로 인한 자원부족과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미인정으로 인접지역에 우방을 만들지 못한 것을 든다.

 미국의 경우는 적이 없음에도 자신들의 정치적 양극화, 불평등의 고착을 위기의 요인으로 든다. 최강자의 적은 자기 자신이었는지 의외로 중국의 위협은 미국국내이 위협보다 적은 위기 요인으로 생각한듯 싶다.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는데 이로 인해 주요 행정업무의 진척이 없고, 우리가 목도한 것처럼 예산조차 수립하지 못해 정부가 셧다운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선거도 무한 경쟁이고 사실상 법적인 선거기한이 없어 정치인은 당선되자마자 바로 선거운동에 돌입하며 실제로 그들의 정치활동의 80%가 선거운동이라하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거기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구 조정이 매 선거마다 가능하다는게 놀라웠다. 가장 발전한 민주국가의 정치적 수준이 의외로 많이 낮았던 것.

 현재 세계의 전체적 위기로는 온난화와 핵무기, 불평등, 자원문제들을 예로 든다. 역시 환경에 민감한편인데 전세계 모든 사람이 미국같은 제1세계의 소비수준에 도달한 다면 우리는 지금 기준으로 800억 인구를 부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지구가 감당하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거기에 온난화로 인한 환경변화와 강을 공유하는 국가들은 물부족 문제로 분쟁에 휩싸이기 쉽다.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고원에서 발원하는 수계에서 시작한 강에 의존하는데 이 강은 동남아 여러 국가를 관통한다. 온난화로 빙하가 모두 녹거나 수자원 문제로 한 나라가 강에대한 통제를 시작하면 분쟁은 피할 길이 없다. 온난화나 환경변화와 관련하여 의외로 핵발전소를 조심스레 옹호하는데 최근 미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을 목도한 나로선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다.

 책은 유명한 저자의 글인 만큼 재밌고 빨리 일을 수 있다. 각국의 역사적 위기와 대응을 잘 정리한 그의 노력도 대단하다. 덕분에 공부가 많이 되었다. 하지만 이론적 틀 부분에서 좀 부족함이 들고 이번 책역시 훌륭하지만 과거의 전작만큼의 임팩트가 없는 것도 사실이어서 다소 아쉽긴 하다. 어느덧 80이 넘은 그이기에 이 책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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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6-25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의 노력이 대단하지만 ‘과거 전작만큼 임팩트가 없단’ 말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 저자가 사기꾼이라는 심정에 한 표 겁니다. ^^

gajjaegas 2019-08-04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 님께 묻습니다. 해당 저자가 왜 사기꾼인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책을 구매하는 데에 참고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