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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한국사 : 전근대편 쟁점 한국사
한명기 외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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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의 여러 한국사 전공자들이 우리나라 역사중 아마 자신의 전문분야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시대별로 엮은 책이다. 이것은 전근대편으로 고조선부터 조선일부까지를 다룬다. 전근대편이라 고조선이나 삼국, 남북국, 가야, 부여등을 기대했지만 대부분의 글이 고려에 집중되어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특히, 송호정 교수가 쓴 부여부분이 아쉬웠는데, 담담하게 담아내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해 축소적으로 보는 느낌이 많았다. 글도 부여가 제목이지만 부여보다는 고조선부터 시작해 부여로 이어지는 글을 썼고, 그 부분에서도 그런 느낌을 적잖게 드러내고 있다. 지도가 가장 적나라했는데, 3세기 부여전성기 영역지도였다. 부여는 뭐 그렇다 쳐도 삼국과 가야가 완전히 정립한 시기임에도 신라, 백제, 가야의 명칭은 없고 마한, 변한, 진한으로 짙게 표시해 사실상 삼국이 막 세워진 듯한 느낌을 주는 지도였다. 

 국사교과서에서는 삼국을 세운 시기를 그보다 이 삼백년 정도 전으로 보고 있으며 3세기 정도면 삼국이 고대국가로서의 틀을 제대로 정립한 시기로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사실상 건국시기로 보는 견해도 적지 않은데, 아무래도 송호정 교수는 그 견해를 따르는 것 같다. 역사는 물론 해석이 필요한 학문이고, 사료도 워낙 없는 시대라 그렇다. 나 역시 비전문가로 서로 상충되는 주장의 글을 볼때마다 널 뛰기를 늘 달리하는 편이라 항상 아쉬운 부분이다. 

 이 책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은 선덕여왕 즉위와 관련하여 성골이 무엇인지 해석한 부분이다. 나는 성골을 항상 양부모가 모두 성골인 경우를 의미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에서는 그럴 경우 성골이 갑작스레 선덕여왕 즉위즈음에 씨가 마른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근친혼이 아무리 많았더라도 오랫동안 소중히 관리되어 왔으며 신라 왕족의 성씨가 3개나 되는 만큼 사실 근친혼에 의한 사멸도 좀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책은 그래서 성골의 개념이 선덕여왕 즉위 즈음으로부터 상당히 최근에 생긴 개념이며 그 범위도 더욱 좁았을 것이라고 본다. 당시 신라는 삼국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이고 왕권강화를 위해 적극이용하였는데, 법흥왕의 그 시초이며 이차돈 사건은 관련한 유명한 사건이다. 법흥왕의 아들 진흥왕은 아버지 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자식들을 불교신화에 등장하는 4가지 유명한 왕들로 이름붙였다. 불교 신화에는 철륜, 동륜, 은륜, 금륜의 왕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뒤로 갈수록 전세계의 지배가 완성되어 간다. 그래서 책은 진흥왕 자신을 철륜으로 삼고, 첫째 왕자를 동륜, 막내인 진지왕을 금륜으로 이름붙였다고 보고 있다. 막내인 진지왕이 금륜인 것으로 볼때, 역사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둘째 은륜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 역시 만만치 않다. 진평왕은 스스로의 이름을 백정, 즉 석가모니의 아버지로 자칭하였고, 당연히 부인도 석가모니의 부인인 마야부인으로 명명한다. 아들은 당연히 석가모니가 되어야 하는데, 불교의 계율상 해탈한 석가모니의 인간으로의 재탄생은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진평왕에겐 아들이 없고 다행히 딸만 있었는데, 그 딸의 이름이 덕만으로 선덕여왕이다. 덕만은 본디 남자로 태어났어야 한나 중생의 구제를 위해 여자로 태어나게도니 불교의 인물이다.

 이런 양상으로 보았을 때 신라의 성골은 사실상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고 진흥왕을 그 시작으로 하며, 진흥왕과 동륜태자, 진평왕, 선덕여왕의 적장자 직계 왕족라인 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게 책의 해석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왜 그렇게 쉽게 성골이 사멸했고, 여성인 선덕여왕이 여자임에도 어떻게 왕위 죽위가 가능했는지 설명이 된다. 사실 선덕여왕 이전에는 아들이 없는 경우 공주의 남편, 즉 왕의 사위인 갈문왕에게 즉위를 물려주는 것이 통례였기 때문이다. 

 즉, 성골은 글자 그대로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라는 종교를 이용하여 성스러움을 부여한 진흥왕 적장자 라인의 협소한 개념이며 이 강한 파워로 선덕여왕의 무리한 즉위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조선의 수취체계 중 가장 문제가 컸던 공납으로 인한 비리와 백성들의 고충을 막고자 공납을 쌀로 대신하는 제도다. 대동법의 발상은 오래되었지만 전국적인 실시에는 거의 100여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흔히 이를 두고 양반계층의 기득권보호를 위한 강한 반발을 그 주원인으로 보는게 통념이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책은 조선의 양반계층은 상당히 도덕성이 높은 계층이었고, 고려와는 달리 음서를 통한 보장이 적어 한번 세도가가 되어도 자손 대대로의 권력 유지가 어려웠음을 지적한다. 아버지의 끝발로 어찌 관리가 된다하더라도 결국 실적이 필요했고, 그 자손의 자손은 결국 과거를 붙어야 권력이 유지되기 때문. 그래서 책은 대동법을 반발한 집단은 양반계층이 아니라 백성의 고혈에서 이익을 누리고 있는 집단 때문으로 보고 있다. 

 대동법 실시전에 백성들은 무려 60말을 공납용으로 사용하였는데 대동법 시행이후에는 12말 수준으로 줄었다 그렇다면 중간에서 48말을 착취한 집단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책에서는 그 집단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공납을 대행하는 상인 집단들과 그들과 결탁한 지방 아전들이 그 집단이 아닐까 싶다. 고을 수령 역시 양반으로 교체되는 사람이기 때문. 

 어쨌든 책은 대동법으로 인한 세금제도의 개선으로 조선왕조의 수명이 100년 이상 늘었다고 보며 망국을 앞둔 19세기에 이르러 세도정치로 대동법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부담이 다시 대동법 이전 시기로 회귀하였음을 보인다. 

 책은 가볍고 잘 읽힌다. 여러 저자의 견해를 엮에 체계성은 없고, 중첩되는 부분도 적지 않지만 일독할만하독 생각된다. 독서력이 높고 한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3-4시간이면 독파가 가능하다. 다음 근대편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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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기 전에 - 1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김정섭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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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제1차대전은 이름만큼 굉장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 동생뻘인 2차대전에 비한다면 잊혀진 전쟁이나 다름없다. 둘의 발생 시기차가 고작 20년정도 차이에 불과하고 1차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새로운 세계질서가 사실상 2차세계대전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전쟁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의 정도는 다소 놀랍다. 2차대전하면 정말 많은 것이 생각난다. 히틀러, 무솔리니, 도죠히데키등의 전범자들은 물론이고 2차대전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 책 등의 저작물도 정말 많다. 하지만 1차대전의 그것들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워호스 정도의 영화가 간신히 생각이 나는 수준이다.

 책, '낙엽이 지기전에'는 이런 1차대전을 다룬다. 1차대전이 발발하던 당시의 국제적 상황과 주요정책결정자들과 그들의 성향, 그리고 사라예보사건 이후, 각 나라들의 복잡하고 급박했으며 어리석었던 의사결정들, 그리고 그것들이 연결되어 전쟁이 이루어지고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장면들을 딱딱하지 않고 생생히 보여준다. 저자도 의도했다고 말하지만 주로 묘사로 서술되어 약간은 소설같은 기분도 느낄수 있었다.

 우선 18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은 유럽의 떠오르는 신생 강대국으로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의 주도하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알자스 로렌지역을 차지한 상태였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격퇴했음에도 더 이상의 팽창은 주저하였으며, 언제든 위협이 될 수 있는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정책을 구사했다. 그래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등 가급적 모든 유럽국가들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구축해나갔다. 식민지정책에도 부정적이어서 식민지정책이 가져올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과 다른 유럽국가들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했다. 즉, 비스마르크의 정책은 신생제국 독일의 무리한 확장보다는 그것을 유지하고 유럽내에서 지위를 인정받으며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지금의 독일 정책과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황제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면서 상황은 급반전한다. 독일의 공업수준이 최대치에 이르며 국내시장이 포화에 이르자, 새로운 시장으로서 식민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고 여기에 황제의 야심도 더해졌다. 이에 독일은 새로운 식민지 개척을 위해 적극나서지만 그를 위해서는 제해권을 잡고 있으며 전세계에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는 영국을 제압해야 했다. 이 때부터 제해권을 둘러싼 독일과 영국의 건함경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무리한 건함경쟁에도 모로코를 둘러싼 힘의 외교전에서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에 패배하고, 러시아 오랜 경쟁관계인 영국과 합작하기 시작하자  독일은 사실상 건함정책을 포기하고 유럽에서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만다.

 이는 자신들의 팽창이 초래한 바이지만 이로 인해 독일은 지상군위주로 전환하며 1차대전 전략의 근간이되는 슐리펜 계획을 세운다.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 부분의 서부지역을 공세할때 벨기에 부분으로 우익기동하고 방어가 강한 프랑스 부분의 좌익 부분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편성한 후, 전력을 집중시켜 단기간 내에 프랑스를 제압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후, 러시아 부분의 동부전선에 서부전선에서 생긴 여유분의 병력을 증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간다는 것이 핵심전략이었다. 이 슐리펜 계획은 1차세계대전에서의 전략적 패배와 외교적 여지를 크게 줄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듯 1910년대 유럽은 독일-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이탈리아의 삼국동맹과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협상이 팽팽이 맞서는 상태였다. 이런 와중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태자가 세르비아 사라예보를 순방중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간섭하는 슬라브계인이 저지란 사건이었다. 사실 첫번째 암살시도는 폭탄에 의한 것이었는데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황태자와 경호책임자는 무리한 순방을 계속해 황태자부부는 결국 실패한 테러를 포기하고 돌아가던 또다른 암살자 눈앞에 나타나 사살되고 만다.

 이 사건에 피해자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자국의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 강화와 제국의 황태자암살이라는 손상받은 위신을 만회하고자 세르비아에 강력한 경고장을 날리려고 한다. 하지만 거기엔 러시아란 문제가 있었다. 발칸반도에 많은 슬라브계 사람들이 살고 있고, 세르비아에 대한 강력한 조치는 러시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독일제국에 협조를 요청한다. 놀랍게도 빌헬름2세와 독일 정책자들은 이런 오스트리아의 물음에 무한한 협조를 약속하는 유명한 백지수표에 가까운 협조를 약속한다. 그리고 빌헬름2세는 어처구니 없게도 이긴박한 순간에 그같은 결정을 내리고서도 무책임하게 3주간의 북유럽요트여행을 떠난다. 이 같은 독일의 강경한 협조요청에 놀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상당히 호전적으로 돌변하여 세르비아의 주권과 자존심을 건드는 최후통첩을 날린다.

 세르비아는 당연히 거부할수 밖에 없었으며 이 사태를 주시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이런 태도의 배후에 독일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독일의 침공의지를 과대하게 위협적으로 평가한 러시아는 선제공격에 대한 군부의 압박, 그리고 독일에 대한 공포로 인해 총동원령을 내리고 만다. 러시아 황제와 관료들은 사실 부분동원령을 내리려고 했으나 당시 러시아의 후진적 상황과 독일에 대한 공포는 이를 허락치 않았다.

 어처구니 없게도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이런 러시아의 행동에 매우 놀란다. 휴가를 다녀온 빌헬름 2세는 이와 같은 러시아의 대처에 사촌지간인 니콜라스 러시아 황제에 서신으로 상호자제를 호소한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니콜라스의 손과 빌헬름의 손을 떠난 상황. 러시아의 총동원령에 오스트리아도 총동원령으로 대응하였으며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영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조용하면서도 영광스러운 고립적 외교로 유럽대륙의 문제에 비간섭으로 일관하던 영국 역시 상황이 급박해진다.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프랑스 함대는 지중해 연안에 집중해있엇고 이에 북해 부근의 프랑스 영해는 영국이 보호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신생중립국의 벨기에의 중립역시 영국의 이루어놓은 것이라 전쟁발발후 사실상 이루어질 독일의 벨기에 진격은 영국의 위신을 깎는 일일것이기 때문. 거기에 프랑스를 잃은 후, 영국이 과연 무사할 것인가라는 실제적 질문도 함께자리했다.

 프랑스가 이미 총동원령을 내리고, 독일 역시 이에 대응해 총동원령을 내리고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후 룩셈부르크를 침공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시작되고 만다. 사라예보사건 이후 정확히 한달 후의 일이었다.

 초기 전황은 독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압도적 군사력으로 서부전선에서 비교적 빠른 시간내에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제압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를 빠른 시간안에 침공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육군 역시 초기전투에 실패하여 퇴각하는 상황이었다. 동부역시 마찬가지여서 삼소노프가 이끌던 러시아군을 탄넨베르크에서 격멸하는 성과를 올린다. 러시아 군의 전사자는 무려 40만에 달했고, 독일은 겨우 1만에 그칠만큼 대승이었으며 이후 러시아는 동부전선에서 이렇다할 힘한번 써보지 못하고 독일에 계속밀리게 된다. 당시 러시아군은 병참능력이 떨어지고 심지어 통신역시 암호화하지 못하는등 후진적인 군대였으므로 패배는 자명했다. 그리고 대패이후 삼소노프는 자살한다.

 이에 고무된 독일의 몰트케는 서부전선의 2개군단을 동부전선으로 수송하는 치명적 판단 착오를 범하게 되고 연합군은 그 빈틈을 파고들어 마른전투에서 승리한다. 이로 인해 서부전선을 고착되고 만다. 당시 유럽 각국의 지휘관들은 신속한 공격전을 선호했는데, 이는 빠른 공격이 적의 영토로 신속하게 진격을 가능하게 하고, 이는 상대편지휘관으로 하여금 역시 신속한 공격전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1차대전의 발발위기에서 서로 빠르게 총동원령을 내려 서로의 동원령을 부추겨 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것도 이와 같은 신속한 공격전에 대한 상호간의 공포때문이었다. 또한 신속한 공격전에 대한 선호는 전쟁을 빨리 끝날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낙엽이 지기전에 이다. 전쟁을 선포한 장군과 관료, 황제들은 모두 전쟁이 조기 종료될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유럽의 하천지형과 자잘한 산맥들은 진격을 어렵게 만들었고, 기관총과 장거리 사정포의 등장으로 속도감있는 진격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물론 병사들은 무거운 장비로 속도를 내는 것 자체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전장이 교착되자 서로 점령하기 어려운 긴참호가 형성되었다. 1차대전이 참호전이라 불리는 이유다. 당시엔 이런 참호를 돌파할만한 전차도 공중지원도 없었다. 그러한 무기는 2차대전에 등장한다. 어쨌든 참호는 포탄이 떨어지지 않게 끔 폭은 넓지 않으면서 쉽게 조준되지 않게 구불구불 미로처럼 깊숙이 파졌다. 참호안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쥐와 민달팽이, 이, 사람의 오물, 시체 등으로 고약한 냄새가 났다. 냄새가 참호 수 km까지 퍼져 적들은 참호가 있음을 정찰없이 파악할 지경이었다. 안에서의 위생환경도 열악해 병사들은 발목이 세균성 감염으로 썩어나가는 참호족염에 시달리고 오한과 고열에 죽어나갔다. 포탄으로 인한 공포도 상당하여 신경쇠약증에  걸리기 일쑤였고, 이로 인한 정신병으로 전후에도 고통받게 된다.

 전황은 점차 독일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제해권이 없으므로 해외로부터 원료 및 식량확보가 어려웠다. 동등한 해군력으로 영국에 대항할 수 없던 독일은 유명한 유보트 작전을 시행한다. 잠수함으로 적의 상선을 타격한 것인데, 그러던 중 아일랜드 인근에서 미국인 128명을 죽게한 초호화 여객선의 침몰로 작전은 소극적으로 변화한다. 미국의 참전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전장이 더욱 장기화되작 주전론자들의 무차별 유보트 공격이 다시 힘을 얻고 만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미국의 참전이었다.

 초기 미국은 겨우 1-2만 정도의 병력만 수송이 가능했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엄청난 병참능력을 보이며 1년만에 무려 100만에 달하는 병력과 물자들을 지원한다. 오랜 참호전에 지친 독일에겐 치명타였다. 거기에 초기 동맹을 약속했던 이탈리아 역시 배신하여 오히려 연합군에 가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도왔다. 초기 패전하고 정신을 못차리던 러시아는 혁명이 일어났다. 독일은 러시아의 혁명을 부채질하기 위해 레닌을 특별열차까지 동원하여 러사이로 수송하였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혁명으로 더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던 러시아는 독일과 강화협정을 맺는다. 이는 영토와 큰 상실과 발칸반도에서 영향력을 상당히 잃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러시아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거기에 러시아는 전세계가 곧 혁명화될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 큰 여유가 생긴 독일은 여세를 몰아 프랑스 베르됭을 공격한다. 전략적 요충지는 아니었으나 프랑스의 자존심이 걸린 역사문화도시였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 곳을 집중타격하면 프랑스가 결사항전하여 프랑스의 나머지 힘을 모조리 짜낼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는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도 실패하면서 독일을 몰락의 길을 걷는다.

 먼저 불가리아가 항복하고 이어서 오스만 제국도 항복한다. 여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항복을 하여 여러개의 나라로 쪼개진다. 이런 전황에 전쟁에 지친 독일내의 폭동과 항거 그리고 항복을 원하는 군부의 압박으로 빌헬름2세는 퇴위하고 항복한다.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1천만의 전사자가 나왔고, 1천만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거기에 1천만의 군인이 부상을 입게 되었다.

 전후 독일은 연합국에 알자스 로렌과 라인란트를 빼았겼으며 폴란드의 독립을 허용하게 된다. 거기에 막대한 배상금까지 안게 된다. 이에 대해 영국수상 조지 로이드는 너무 가혹한 응징으로 실지에 대한 독일의 복수로 25년뒤 다시 한번 세계대전을 치룰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프랑스 수상 조르주 클레망스는 강화조약이 너무 약하여 독일을 예전처럼 쪼개어 놓지 못한 것을 한탄했고, 이것이 전쟁으로 이어질것이라 내다봤다. 입장이 서로 다른 둘은 정확히 미래를 예측했다. 둘의 의견은 모두 옳았다.

 1차대전은 가해자와 의도가 분명했던 2차대전에 비해 애매한 전쟁으로 불린다. 전쟁의 원인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1차대전의 발발 원인을 공격이 유리하다는 잘못된 믿음, 전쟁에 대한 위험을 모두 계산했다는 착각, 위기 상황에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정책결정자들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꼽는다. 그리고 안보딜레마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안보딜레마란 A의 안보 증진 노력이 B의 안보를 저해함으로서 B가 자신의 안보를 강화하고, 그로 인해 A의 안보가 저해되어 다시 안보를 강화하고자 하는 악순환을 의미한다. 실제로 1차대전 당시의 서로간의 불신과 정보부족 몰이해로 인한 총동원령이나 위협은 상대방의 총동원령과 위협을 가져왔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이러한 1차대전의 상황을 한반도에 적용한다. 북한의 핵위협과 막강한 재래전력, 그리고 더욱 막강한 남한의 전력과 세계최강 미국군대의 전력이 한반도에 존재한다. 이는 서로 선제공격에도 불구하고 적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여 상대방의 2차공격으로 자기 역시 격멸에 가까운 상황을 양자가 맞게되는 형국이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안보딜레마 상황이지만 전략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국지적 도발로 인한 뜻하지 않은 전황의 극적인 전개로 전쟁에 치달을 수 있다고 보고 있으며 이의 방지를 위해 군위주의 판단으로 전쟁에 치달은 1차세계대전을 거울 삼아 군의 전문성을 인정하되 결정 및 판단에서 민간의 역할이 평소에 충분히 공유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의외로 한반도에 국한된 판단이라 다소 의외의 제안이기도 하다. 사실 한반도의 전쟁은 인계철선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한국으로의 침공을 자연히 남한을 포기할수 없는 미국의 참전을 의미하며, 안보를 위협받은 일본의 참전으로 이어질수 밖에 없다. 또한 미국과 일본의 참전은 당연히 북한을 순망치한으로 여기는 중국의 참전과 더 나아가서는 러시아의 참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는 1차대전과 매우 유사한데, 독일에게 오스트리아는 절대 잃을 수 없는 최후의 동맹이었고, 그런 오스트리아에게 세르비아와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러시아에겐 그런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태도는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졌으며, 러시아에 대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침공을 방관하는 것은 프랑스에겐 다음은 내 차례로 일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유럽에서 프랑스를 잃는 다는 것은 영국에겐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으며 자신들의 헤게모니가 위협받는 형국이었다. 이처럼 1차대전 당시 유럽 각국은 인계철선으로 연결된 셈이었다.

 저자는 앞서말한 민관군의 대화 소통 시스템을 구축하면 국지도발 시스템을 잘 막을 수 있다고 하였지만 국제적인 상황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물론 한반도 외에 다른 지역에서 적대세력간에 국지도발은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기엔 과거에 비해 상호 경제의존도가 매우 높아진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1차대전 당시 각 나라들은 비록 왕조시대이긴 해도 전쟁의 참상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애국심에 휩싸여 몇몇 어리석은 소수결정자가 수천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협조하였다. 이와 같은 일이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미국, 러시아에서는 벌어지지 않을까, 적어도 이중에서 그런걸 막을 정도로 성숙한 시민사회는 미국정도가 유일해 보인다. 그다음으로는 우리가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북한 핵도발에 대해 다른 평화적 의견을 좌파정권도 함부로 입에 담지못할 만큼 우리의 안보환경도 상당히 우편향적으로 경직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책은 매우 쉽게 읽힌다. 어찌보면 소설과 교양역사책의 중간정도 느낌이기도 하다.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가독성이 높다는 뜻이다. 덕분에 1차대전에 대한 많은 것을 알수 있었다. 전쟁은 끔찍하다. 그리고 전쟁을 주장하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으며 결국 전쟁에 대해 책임질수 있는 역량도 없음을 느낄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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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식탁 위의 한국사 -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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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잡식동물의 딜레마'라는 책을 보았는데,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이 먹는 음식이 인간의 본성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설득력 있는 말이다. 책은 잡식동물로서 음식에 대한 인간 선택의 딜레마가 두뇌와 사회성 발달. 그리고 음식에 대한 금기, 윤리에 영향을 미쳐 도덕성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렇다면 좀더 지역적으로 가서 비록 우리가 글로벌하긴 하지만 훨씬 압도적으로 자주 먹는 한식은 어떠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논리적으론 이렇게 되어야 맞지만 사실 내가 먼저 관심을 가진 책은 이 책 '식탁 위의 한국사'였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순전히 이 책의 옆에 있었기에 잡았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잡식을 먼저보고 이책을 나중에 보게 되었다.

 책은 20세기 한국음식의 변천과정을 고찰하고, 그렇게 된 시대적 원인을  잘 들여다보고 있다. 다 읽고난 느낌은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꽤 유구한 역사를 가졌을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왔던 우리 음식들이 기껏해야 그 역사적 연원이 조선후기 정도이고 상당수는 현대에 이르러 생겨났다는 점이다. 당연히 내가 모르는 음식은 없지만 그 역사적 변천과 원인 발생시점은 모두 다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르거나 예상을 빗나갔다. 특별히 좀 인상적인 것만 뽑아봤다.

 

1. 삼계탕

 "꿩 대신 닭"이란 말이 있다. 딱봐도 꿩이 닭보다 낫단 이야기인데, 이 속담은 실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진게 아닐지 모른다. 조선시대 닭은 꿩보다 귀했다. 소와 비슷한 경우인데, 닭은 달걀을 낳는 만큼 함부로 고기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고기로는 사냥으로 잡는 꿩을 많이 사용했고, 가격도 꿩이 더 쌌다고 한다.

 그런 것이 일제 강점기 대대적인 양계사업으로 닭의 수가 현격히 많아지며 크게 변한다. 닭이 많아지면서 닭백숙 같은 음식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 여기에 인삼이 추가되며 삼계탕이 아닌 계삼탕이란 음식이 나타났다. 인삼은 그냥 먹는 수삼(유통기한이 겁나 짧다), 껍질을 벗겨 말려낸 백삼, 그리고 껍질채 찐후, 말린 홍삼이 있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백삼이 귀하고 냉장고가 없어 인삼을 넣기 힘들어 닭을 강조한 계삼탕이 었다가 냉장고가 발달하여 유통이 크게 계산되어 인삼을 손쉽게 넣을 수 있게 되자 인삼을 강조한 삼계탕이 되었다고 한다.


2. 육개장

 개장이란 음식도 한번쯤 들어본적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육짜가 붙은 것이 육개장이므로 당연히 개장이 원조가 된다. 보통 나중에 파생한 단어에 추가적으로 뭔가 붙기 마련. 그럼 개장은 무엇일까? 예상대로 보신탕이다. 조선시대 개장은 매우 흔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애완견 애호가는 있었기에 개장에 개고기 대신 다른 것을 넣는 시도가 육개장의 시작이다.

 이 육개장은 소고기 도축을 사실상 금지했던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나서야 본격화되었다. 여기에는 88올림픽등 개고기에 대한 혐오를 보이는 다른 나라 문화권에 눈치보기도 한 몫했다.


3. 우리가 먹는 배추는 사실 중국배추다.

원래 김치는 배추김치만이 아닌 다양한 채소를 총동원한 절임음식이었다. 배추는 귀했던 만큼 중심이 아니었고, 그랬기에 배추김치는 김치중 으뜸이었다고 한다. 원래 김치에 사용한 배추는 우리 토종인 조선배추였다. 조선배추는 우거지가 많이 나고 감칠맛이 특징이어서 사랑받았지만 속이 좀처럼 차지 않고 수확량도 적어 동결이 약하고 귀했다. 반면 중국배추인 호배추는 동결에 강하고 속이 꽉찼으며 생산량도 많았다. 물론 우거지는 적고 맛도 없다. 하지만 결국 수요를 뒷받침 하기 위해 호배추가 많이 경작되었고, 어느새 우린 조선배추 맛은 아예 잊고 살고 있다.


4. 남한에서 돼지고기는 인기가 없었다.

 원래 남한 사람들은 1960-70년대만해도 압도적으로 소고기를 선호했다고 한다. 돼지고기는 평안도나 황해도등 북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남한에서 인기가 없는 이유로는 이렇다할 조리법이 없고 안좋은 속설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당시 남한에서는 돼지고기를 한약과 함께 먹으면 머리가 희어지거나, 기생충이 많아 잘못 먹으면 죽을 수 도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고 한다. 어쨌든 지나친 소사랑으로 소고기 값이 폭등하고 사회 문제가 되자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돼지고기 조리법을 개발하고 소비촉진 정책을 벌였다. 그 결과 1980년대에 이르러 족발집이나 보쌈집이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급기야는 돼지고기를 더 선호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삼겹살 이야기가 책에 없는게 아쉬운 대목.


5. 일본에서 유래한 김밥

 어릴적 소풍에는 김밥이 단연 최고 도시락 거리였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오늘과 어제 있었던 학교비정규직 파업으로 학교현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왔다고 한다. 때문에 나 역시 오래전부터 김밥을 당연시 우리 음식으로 여겨왔는데, 이상한 점을 처음으로 느낀 것은 초밥집에 가면서부터였다. 초밥집의 다른 초밥은 당연히 일본음식같은데 김초밥이라는 김밥과 똑같이 생긴 음식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당시 우리것을 따라하거나 비슷한게 있었던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책에 의하면 김밥은 원래 일본 음식은 노리마키스시에서 유래했다.

 

6. 빵집의 등장

 빵집은 일제 강점기부터 본격화 되었다. 당시에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빵을 파는 빵 행상이 주 공급처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밀가루가 귀해 빵은 그다지 쉽게 접할 음식은 아니었다. 한국 전쟁후 미국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위해 한국에 대규모의 무상원조를 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밀가루가 들어왔는데 이 때부터 빵도 본격화되었다.

 이은희 박사는 그 당시 빵집이름에는 세가지 경향이 있었다고 분석했는데 이부분이 재밌다. 우선 신흥당, 신라당, 유성사, 유정사처럼 당이나 사로 끝나는 일본식 이름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빵집의 지명이 그대로 이름인 경우도 많았다. 창원, 서울제과 같은게 그런 식이다. 마지막은 외국 유명지역명을 그대로 딴 경우다. 파리. 리스본, 뉴욕제과점, 독일빵집이 그런 것들이다.

 빵의 공급은 행상에서 빵집, 그리고 대규모로 밀가루가 넘치고 수요가 늘어나며 삼립식품이나 샤니 같은 대규모 공장으로 이어진다. 이런 공장들은 1980년대까지 국내 빵시장을 지배했지만 경제성장과 더불어 빵과 케이크에 대한 수요가 늘고, 소비 변화가 일어나며 전문제과점에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이 전문제과점들은 오늘날의 프렌차이즈 빵집으로 이어진다.


7. 한국음식의 프렌차이즈화

저자에 의하면 지금의 한국음식은 프렌차이즈가 지배하고 있고, 그 결과는 몰개성화다. 우리나라프렌차이즈의 시작은 1980년대로 맥도날드가 한국에 진출할까 고심중, 롯데리아의 성공을 보고 뒤늦게 뛰어든 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코코스나 TGI같은 레스토랑도 등장한다. 더불어 한국음식자체들도 프렌차이즈화가 시작되었는데 대부분 사업이 본격화되지 못했다. 저자는 한국음식점은 메뉴가 밥과 반찬으로 다양하게 제공되는 형태여서 메뉴표준화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그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국수류나 족발, 보쌈, 빈대떡 같이 간단하면서 표준화가 가능한 일부 메뉴가 성공적으로 프렌차이즈화했다고 본다.

  이런 프렌차이즈는 1990년대부터 본격화해 아이엠에프로 인한 자영업자의 지나친 증가, 그리고 프렌차이즈에 대한 잘못된 성공신화의 유행으로 마치 벽돌찍어내듯 골목자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프렌차이즈는 음식점마다 갖고 있던 독특한 손맛을 없앴다는 점에서 음식의 몰개성화에 한몫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또한 1980년데 산업화와 더불어 교통이 편리해진것도 원인이다. 이로 인해 음식의 지역적 특색이 점차 사라졌고, 5천만의 입맛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에는 경상도에서는 경상도 만의 전라도에서는 전라도 만의 지방특색을 그 지방에서만 느낄수가 있었다. 지금은 전국 어딜가도 비슷하다.


책은 내가 언급한 것보다 훨씬더 많은 한국음식을 다룬다. 내가 술을 한좋아해서 인상을 못받아서 그렇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희석식 소주나 막걸리, 약주등의 변천도 상당히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유일한 단점은 읽을수록 배가 고파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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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7-01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알쓸신잡>에서 황교익 씨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된 이유를 알려줬어요. 그 이야기 속에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닷슈 2017-07-01 16:12   좋아요 0 | URL
뭔지 궁금하군요 아마 먹을게 없어서일거같은데 한번봐야겠군요
 
심용환의 역사 토크 - 시시비비 역사 논쟁에서 절대 지지 않는 법
심용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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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위안부, 이승만, 박정희, 한국고대사, 친일파를 다룬다. 이런 것들이 쟁점이 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안타까우며, 자국 역사학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이란 생각이 든다. 공교롭게도 이 모든 사안들의 뒤에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라는데 공통원인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국의 분단원인을 일본의 식민통치와 그로 인한 패전에서 찾는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분단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하필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양적대세력에 나누어 점령되는 바람에 이렇게 되었다. 사실 분단되었어야 마땅한 것은 일본이다. 독일이 그리 된것처럼.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 정도를 소련이 먹고, 나머지를 미국이 먹는게 딱 그림이 좋았다. 물론 섬이라 힘들지만.

 어쨌든 책은 저자와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 혹은 동조하는 사람들과의 대담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매우 재밌고, 실제로 써먹을 만하며 빠르게 읽히지만 좀 정신없게 지나가는 면도 없지 않다.

 세세한 놓친 사실을 다시 상기하는데 도움이 되고 친일파 부분에서는 전쟁범죄와 식민범죄를 구분한 개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대개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전쟁범죄와 식민범죄를 크게 구분하진 않지만 둘은 구분된다. 전쟁범죄는 불충분하긴 하나 어쨌든 승전국에 의한 재판으로 단죄를 받았다. 그러나 식민범죄는 그렇지 못했다는 이유이다. 까닭은 승전국들이 식민지를 전후에도 유지하려는 경향이 많아 패전국들의 식민지에 대한 독립 및 그 피해보상에 소극적이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 임시정부는 선전포고도 하고 연합국에 가담하는등 전후 승전국의 위치에 놓이려 무던히 애를썼지만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책을 읽고나서 드는 생각은 우리 어른들이다. 책에 나온 쟁점들은 바로 한국의 수구세력들이 역사를 호도하고 자신들의 세력기반으로 삼기위해 적극적으로 국민들을 속이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한국고대사도 물론 아주 연관이 없다곤 할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4가지는 성향이 비슷하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은 이에 상당히 포섭되어 있다.

 게다가 이 부분은 상당히 감정적이기 까지하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겠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어르신들과의 논쟁은 '그래 나 무식하다, 그렇게 밖에 못산걸 어쩌냐' 라던가, '니가 그 시절을 아냐'등등 의 격한 감정표현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물론 치열한 논쟁에 대한 소득도 없다. 어르신들의 이러한 반응은 마치 한국의 수구세력과 한배를 타고 있지 아니한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래서 책을 읽고 궁금한 것은 어쩌다 우리 어르신들이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들을 책에서 본적이 있다. 주로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본듯하다. 몇년되어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우선은 가난으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실제 미국을 비롯한 선진사회에서도 교육이 부족한 저소득측은 계급적 이익이 상충됨에도 오히려 보수우익을 쉽게 지지한다. 교육수준이 낮다보니 시민성이 크게 부족하고, 시민문화역시 부족하여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서비스직이나 기관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옹립의 대상으로 보기까지 한다.

 다음은 언론에 의한 오랜 세뇌의 결과라는 점이다. 독재정권에 의한 오랜 언론의 장악은 이러한 세뇌에 일익을 담당해왔다. 종이신문이 그 오랜 역할을 해왔고, 지금은 이명박정권에 의해 편성된 종편들이 역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최근엔 sns를 통한 가짜뉴스가 그 역할을 꽤 하고 있어 이 부분은 진화까지 하고 있다.

 세번째는 북한이다.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헌법상 불법인 국가는 거의 없다. 내가 알기론 냉전을 치룬 미국과 그 똘마니 국가라고 할수 있는 대만, 일본, 한국뿐이다. 공교롭게도 또한 이들 나라들만 야구가 매우 인기가 있다. 연관이 있을까? 어쨌든 북한과의 전쟁은 많은 증오와 공포를 불러왔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수구세력이 정치적 이득을 얻는데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수구세력을 지지하는 어른들은 안보에 매우 민감하다. 북한 역시 이를 정치적으로 내부단속하는데 많이 이용했음으로 북한정권과 남한의 안보팔이 수구세력은 서로 적대적 공범자임이 분명하다.

 네번째는 산업화이다. 주로 박정희 정권때 사람들은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것으로 인식하며 실제로 그런 부분은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그때 독재와 인권탄압, 노동탄압, 농촌배제등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 나라를 가난에서 탈출시킨 본인들과 그 때의 집권세력을 서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유시민이 지적한 것이지만 이게 아마도 가장 큰 동인이 아닐까 싶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많은 어르신들이 눈물을 흘린것도 이 때문이다.

 마지막은 노령화로 인한 정치적 보수화이다. 사람은 성향상 나이가 들면 자연히 어느정도 보수화된다. 세상의 시스템이 적응하고 불의를 느끼던 시간도 지나 어느세 그 시스템에서 이득을 보는 위치에 서고 지킬것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진보로 인한 변화는 자신이 가진것에 안정성을 없앤다. 따라서 사람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어느정도 보수화 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지금의 어르신들 중 상당수는 70-80년 에 장발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김대중을 지지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분들이 6월항쟁과 4.19도 한 것이 아닌가. 믿기 어렵지만 이명박도 4.19에 열심히 참여한 것으로 안다. 김문수도 6월항쟁당시 열심이 있고, 물론 진정성은 따로 평가할 문제다. 개인적으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선택한 우리 아버지도 40대 시절엔 김대중의 평민당 당원이었다. 이 때문에 어머니가 난리친걸 기억한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 이분들도 돌아가시고 지금의 40대 정도가 60대 정도의 나이가 된다면 그 땐 어떨지 궁금하다. 세대대결은 계속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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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26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2, 30대 중에 나이 들어서 꼰대나 생각이 꽉 막힌 사람이 나올 수 있어요. 최악의 인물이 되지 않으려면 죽을 때까지 세상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과 어울려야 해요. 그러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닷슈 2017-05-26 15:09   좋아요 1 | URL
맞는 말씀입니다

갱지 2017-05-26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누리당 같은 세력은 외국으로 치면 거의 나치나 제국주의 수구 세력에 비견될 만한 수준인 거죠.
첫단추가 꼬이는 순간 얼렁뚱땅 눈가림으로 시작해 오래 버티며 여기까지 와버린거지, 이제서야 다들 알아버려서 노인들이나 속이는 얍삽한 짓들이 소용없졌으니, 없어지진 않아도 점점 쪼그라들겠지요.
사실 남아봤자, 딱 예전 민노당 수준 정도까지 정도 되는게 맞는 수순인 거죠. 수구당 지지해서 정말 득보는 인간 머릿수가 그정도도 안될테니 말입니다.

닷슈 2017-05-26 19:44   좋아요 2 | URL
저도 그리되면 좋겠습니다만 자신이 없는것도 사실입니다
 
[eBook] 그해, 역사가 바뀌다 -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결정적 변곡점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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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책 제목만 보고 쉽게 낚이곤 한다. 저자가 주경철 교수 정도로 대단하다면 더욱 그러하다.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또 낚인 것인지 아닌지 조금 애매했다. 책의 성격도 바로 그러하다. 이번에도 건명원 모음글이었다. 최진석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읽은게 바로 얼마전인데, 이것 역시 건명원 책인 줄을 몰랐다. 잘은 몰라도 건명원이 무척 재미난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냥 책 제목을 보고 뭔가 거대하게 꿰뚫는 사유를 주경철 교수가 보여주신게 아닌가 싶었다.  다 읽고 나니 그런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다.

 하여튼 책은 1492, 1820, 1914, 1945년 네가지를 가지고 역사의 중요한 분기를 잡아낸다. 주로 서양과 동양의 갈림길이기도 하고 공통적으로 가야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년도들이 매우 중요한 연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솔직히 난 1914는 잘 몰랐다. 그리고 실제로 책에서 1914에 부여하는 의미가 가장 좀 자의적이고 애매하기도 하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 앞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섬, 즉 서인도제도라고 잘못 이름 붙여진 곳에 도착한 해이다. 콜럼버스가 이탈리아 사람인 것은 지금은 정설이나 콜럼버스가 워낙 영향력이 큰 인물인지라 유럽의 이나라 저나라에서 서로 자기네 인물이라고 오랬동안 우겼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 지자체들에서 어떻게든 건져보려고 유명인물이 자기네 출신이라고 싸우는 격과 비슷해보인다. 그리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지구가 네모났고 콜럼버스 정도 되는 인물만이 구형임을 인지하고 있었다고하며, 콜럼버스와 함께한 선원들 역시 계속 가다가 떨어질까봐 겁을 냈다는 통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책은 당시 지구 구형설은 매우 일반적이었으며 콜럼버스는 오히려 지식이 부족해 지구의 크기를 실제보다 작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서양의 지식인층들은 지구의 크기를 크게 생각하고 있어 콜럼버스의 계획의 현실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토록 여기저기 문전박대 당한 것이다. 당시 통일과 이슬람 세력 축출에 막 성공한 스페인이 새롭게 생성된 국력의 배출구가 필요했었다는 행운이 없었다면 세계역사가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매우 종교적인 인물이었고, 이러한 종교적 열망이 항해의 주 동인이었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의 사실이었다. 꼭 합리성과 제대로된 이론을 가진 사람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1820년은 서양과 동양의 힘의 균형이 확실히 깨지는 시점이다. 산업혁명의 완료시기로 보기도 한다. 주경철은 과거 인류 문명의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동수단으로 배, 수레, 카라반을 꼽는다. 이중에서 근대이전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것으로 카라반을 꼽는데, 카라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낙타이다. 낙타는 중동사막지역과 초원지대에서 운송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문명의 교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000년 이상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부터 중동과 인도 북부, 중앙아시아에 세력을 가졌던 이슬람 세력이 세계의 중심으로 서양과 동양을 연결해주는 주요한 역할을 하는데 낙타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 산업혁명과 더불어 배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서양못지 않게 막강한 해양력을 가진 중국이 스스로 해금에 빠지게 된것이 서양과 동양의 힘차이를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저자는 중국이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데는 명대에 들어 북방민족에 대한 경계심과 이로 인한 수도의 북방으로의 이전, 그리고 중국의 오랜 숙원인 티벳지역과 북방민족에 대한 정벌을 이유로 든다. 확실히 중국입장에선 오랜 숙원을 해결하고, 지금의 강대한 영토의 기반을 마련한 셈이지만 힘의 균형추를 완전히 내어주었다는 면에서 패착일수 밖에 없다. 또한 중국의 해금정책으로 과거 동남아 지역과 인도양에서 적극적으로 교류했던 중국인들이 돌아가지 못하고 지원역시 끊겨 정착민이 화교가 되었다는 설명은 재미난 부분이었다. 반면 서양은 제국들이 중국처럼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된 상태였다. 그리고 스스로 끊임없는 전쟁속에서도 서로를 멸하지 못하였는데, 이와 같은 분열이 외부제국 구축을 위한 강한 동력이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총균쇠에 나오던 최적 분열의 법칙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1914년은 의외로 환경과 관련한다. 생태제국주의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는 큰 대륙의 생물들이 작은 대륙의 생물을 자연경쟁에서 압도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 대륙의 쥐나 토끼, 엉겅퀴같은 생물들은 호주나, 뉴질랜드, 고립되었던 섬의 자연환경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유럽의 식민지 경영결과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새 지역에 자신들에게 익숙한 환경을 이식하고자 했고, 그 결과 오늘날 같은 생태계 교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마지막 1945년은 2차대전의 마침해이다. 가장 참혹한 전쟁중 하나였던 만큼 이 분기점의 키워드는 평화이다. 스티븐 핑거의 예를 들며 인류의 문명발달로 평화가 도래하고 점차 폭력이 감소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단순수치에 의거한 핑거의 다소 낙관적 시선을 경계하는 편이다. 저자 역시 인간의 미래를 어느정도 낙관하면서도 조심성을 버리지 않는 것이 문명의 붕괴에서 보여준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태도와 비슷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편이다. 

 강의 글 모음이고 저자의 내공이 워낙 대단해 단숨에 읽힌다. 역시 좀 시간이 된다면 하루만에 일독이 가능하다. 제목의 대단함에 비해 크게 세계 역사를 관통하는 느낌은 확실히 부족하다. 약간 억지로 꿴느낌도 좀 있다. 하지만 여러가지 재미있는 개념과 숨겨진 역사적 사실을 보는 재미 역시 쏠쏠해서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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