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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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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라면 내가 어렸을 적, 좀 살림이 나아진 우리나라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을 가던 곳. 그리고 값싸고 맛있는 귤이 마구 나는 곳, 하루방의 땅. 북한과 대비되어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과 백록담이 있는 곳이었다. 최근엔 제주가 유네스코 자연문화 유산에 등재되었고, 올레길도 유명해지고 제주자치도의 정책으로 중국인들의 부동산투자가 몰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등 여러모로 과거보다 느낌이 향상된 곳이다. 이젠 뭍사람들도 제주도에 한번 가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모기업은 본사를 십년정도 전에 제주로 옮기기도 했다.

 과거 교과서에서 여순사건과 함께 또 하나의 반란으로 배웠던 것이 제주 4.3이다. 이 두사건은 마치 샌드위치 같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사건이기도 했고, 한국전쟁과 일제강점기에서의 해방이라는 굵직한 사건 사이에 일어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이나 4.19혁명등의 굵직한 민주화운동에 비해 가치나 피해에 대한 인식도 희박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제주4.3이 국가기념일로 인정된 2014년에 발행되었다. 인정받은 시기가 자못 의외인데(박통의 시기가 아닌가!) 인정은 했어도 제대로 된 지원은 없어서인지 제주일대에서 발굴중이던 4.3의 희생자 발굴은 국가 예산 지원이 중단되 10년째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정권이 제대로 돌아온 지금에야 다시 재개, 그리고 대통령은 노통에 이어 다시금 4.3에 대해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책 내용으로 돌아오면 4.3의 진행은 이렇다. 주지하다시피 해방정국에서 한국을 담당한 맥아더와 하지 중장은 남한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미 일본으로부터 많은 실권을 넘겨받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는데 처음 미군정은 이들과 협력한다. 하지만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본격화하면서 건준은 점차 친일파를 기반으로한 우파에 힘을 실어주는 미군정에 의해 차츰 무력화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배운 사람들의 입장에서였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일반 인민들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먹고 사는 것과 다시는 힘든 외세의 침입따윈 없었으면 하는 것, 그리고 우리민족의 자주 국가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1947년 제주도에선 이 인민들의 바램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당시 남한에서는 일본이나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로 인해 인구가 전체적으로 급증했다. 반면 흉년으로 공급은 준데 비해 인구가 늘어 수요는 많아져 남한 전역에서의 전체적인 식량난이 일어나게 되는데 미군정은 이에 제주도에서 식량의 공출을 실행한 것이다. 제주라고 식량 사정이 좋을리는 없었고, 일본에서 돌아온 사람은 제주역시 많았기에 집단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제주사람들의 눈엔 미국의 공출 역시 지긋지긋한 일본의 공출과 비슷하네 느껴졌을 것이다. 거기에 남한 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는 이야기까지 돌자 47년 3월 1일을 맞이하여 제주 사람들은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연다.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허가 까지 미리 받은 이 시위에 관은 과잉대응하였고, 마치 광주의 일처럼 한 아이가 경찰의 말에 밟혀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사고에 대한 해당 경찰의 대응은 마치 뺑소니범과 같아서 격분한 제주사람들이 경찰을 공격하고, 다른 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해 주민 6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격분한 제주 사람들은 그해 3월 10일 민관총파업에 돌입한다. 하지만 끝까지 협상을 모르는 정부는 대규모 경찰병력을 뭍에서 파견하고 제주도지사까지 강경파로 바꾼다. 긴장이 완화되지 않은 체로 해는 1948년으로 넘어갔으며 심지어 취조를 받던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고문치사하는 사건

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마침내 제주 남로당을 중심으로 4.3일 무장봉기가 발생한다.

 초기 전투가 빈발했지만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지위관 김달삼의 노력으로 평화 협상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불과 닷새만에 오라리에서 방화사건이 일어나면서 전투는 재개된다. 48년은 이승만정권에 의한 남한 단독정부를 구성하는 시기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제주는 4.3사건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다.(그래서 애초 200명으로 계획했던 우리나라 제헌국회는 198명으로 시작한다) 때문에 미국과 이승만은 제주 사건에 민감하고 강경하게 반응하게 된다.

 전투 재개후, 파견된 지휘관 송요찬은 초법적인 지시를 내리는데 제주 해안선 5km 이상 지역에 통행금지를 내리고 이를 어길시 이유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무장대가 산간을 근거지로 했기 때문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제주에는 많은 중산간 마을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명령은 중산간지역을 기반으로 수많은 학살이 일어나는 근원이 되고 많다. 제주민들 역시 이 명령에 따르기 어려웠는데 가축이나 논밭등 생업이 있는 마을을 떠나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 명령을 따랐음에도 학살당하는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경에는 친일 부역자가 많아서였는지 그들의 학살과정은 일제의 그것과 유사했으면 상당히 잔혹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의 남자면 위험인자로 간주하여 학살하였고, 마을이나 집에 남자가 없으면 무장대에 합류한 것으로 간주해 집안 사람들을 학살했다. 끌고간 이들은 무장대에 협력한 사람으로 간주해 사라진 가족의 행방이나 무장대에 협력한 사람을 말할때까지 잔혹하게 고문했다. 이 고문에 죽어나가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문에 못이겨 아무 이름이나 말한 경우도 많았다.

 중산간 사람들은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굴에 숨기 시작했다. 굴에 숨은 사람들은 토벌대에 발각될까 깊이 숨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막다가 아이가 질식사하기도 했고, 토벌대가 굴을 찾아내면 더 깊이 들어갔다 길을 잃어 죽기도 했다. 토벌대는 사람들이 나오도록 굴에 불을 피웠고, 사람들은 질식사하거나 나와서 학살당했다. 학살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아, 학살당한 시체사이에서 나온 한살 배기 아이의 다리를 잡고 현무암덩어리에 패대기 치기도 했으며 임산부를 죽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끔찍한 학살은 49년이 되어서야 잦아들기 시작했고, 국회의원 두명이 선출되면서 끝을 보게 된다. 하지만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관련자로 지목된 사람은 한국전쟁 동란중 관리대상으로 다시 학살되었다. 학살기간중 상당수가 기껏 탈출했던 일본으로 다시 밀항하였는데 학살의 정도가 어느정도였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관련자로 연좌되거나 찍힌 제주청년들이 살기위해 한국전쟁 기간 중 그 어느지역보다 자원입대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이도저도 아닌바에 강제로 한쪽으로 찍혀 학살당하기보단 차라리 군인이 되는 것이 가족과 자신에게 더욱 안전한 것임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관광지인 한라산은 48년이후 금산조치 되었다가 6년후인 54년에야 다시 입산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4.3은 이승만이 쫓겨난 1960년에야 다시 회자되었다가 박정희와 군사정권에 의해 1987년이 후까지 기나긴 침묵을 맡게 된다. 물론 몇몇 사람들이 일본에서 책을 내고, 용기있게 소설을 내기도 했다.(그 대가로 안기부에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와 같은 책은 그 분들의 소산일 것이다.

 책 말미에는 제주4.3과 관련한 제주관광루트가 나온다. 아름다운 제주를 방문하여 이런 루트로 관광해보는 것오 아픈 역사를 잊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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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의 조선사 - 지배 권력에 맞선 백성의 열 가지 얼굴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2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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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이미 역사학계에서는 위대한 인물이나 왕들이 아닌 일반 사람들의 역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움직이고 사실상 중요한 것은 이들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아직도 역사는 주요 인물들이나 고관대작 중심으로 다루어질 뿐 일반백성들에 대한 연구와 시선을 적은 편이다. 아직 시선이 완전히 전환되지 않은 측면도 있고, 고관대작들에 비해 백성에 관한 기록은 사실 매우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모멸의 조선사는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을 다룬 책이다. 요약하면 고난함과 계속되는 수탈, 나름의 저항이라 할수 있겠다.

 책을 통해 나의 조상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조선일반 백성들의 삶의 고난함을 느낄수 있었고 더불어 단순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조선백성들의 여러 직업을 느껴볼수 있었다. 이런 것들이 이 책의 장점이다.

 조선하면 백성의 직업으로 농민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이 책은 그 이에도 상인과 수공업자, 광산업자, 광대, 백정, 노비, 도시노동자, 어부, 기생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조선이 농업에 근간한 나라인 만큼 농민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양반층은 자신들 이외에 모든 직업을 멸시했지만 그래도 농업경제이고 그것이 자신들의 세력 기반인지라 농업인을 천하의 근본이라 칭하며 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말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이니 농민은 착취와 수탈의 제1대상에 불과했다.

 양인인 농민은 본래 법적으로는 자신이 토지를 보유했을 시에는 토지세인 전세와 각종 역, 그리고 공납을 부담했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로 갈수록 양반층의 토지겸병이 시작되면서 병작농으로 대부분 전락한다. 병작농은 대개 자신의 수확물의 절반을 바치고, 토지세는 양반이 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조선 후기 농업생산량이 증대하면서 노동의 가치가 하락하자, 위치가 크게 하락한다.

 노동의 가치가 줄어 소작농들끼리 대지주의 토지 경작권을 갖고 경쟁하는 위치에 까지 놓이게 된것이다. 그러다보니 지주의 몫이었던 토지세는 물론이유 내년의 종자까지 병작농의 부담이 되니 일년농사의 소출중 자신의 몫은 겨우 20%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거기에 수시로 이런 저런 명목으로 역에 동원되어 농사시기를 놓치기 일쑤였으며 주변 농민이 도망이라도 치면 자신에게 그 몫이 전가되기도 했다. 역의 부담은 나날이 커져 조선후기에 이르르면 일부 농민들은 남자아이를 낳는 것을 꺼리기 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후기 이앙법과 이모작이 성행하면서 농민층은 크게 변화한다. 조선의 세력들은 이앙법이 비교적 일찍 개발되었음에도 법적으로 금지시켰는데 이는 물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 농사를 망칠 위험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금지에도 이앙법은 급속히 퍼졌는데 노동력이 크게 절감되고 생산력은 커서 각종 수탈에도 그럭저럭 먹고 살만큼의 식량을 확보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세금의 대상은 쌀뿐이었으므로 이모작을 통한 보리는 온전히 농민의 몫이 되는 점도 중요한 동인이었다.

 이앙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자 토지에서 쫓겨나거나 상황이 악화되는 농민이 크게 많아졌으며 일부 농민은 부농으로 성장하여 양반층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상인의 삶도 기막히다. 이들은 양반층에 의해 천시받았으며 상업자체가 조선초기부터 권력에 의해 강하게 틍제받았다. 이는 농업경제에 기반한 양반층이 상업의 지나친 성장이 강한 사회변혁을 이끌고 와 자신들의 기반을 흔들 것을 우려해서였다. 때문에 시장은 원천적으로 금지였으며 도성내 육의전을 운영하는 시전상인들만 상업이 가능했다. 이들 시전상인은 이런 독점의 대가로 왕가나 주요 관료들의 행사의 인력 및 운영물품을 대야했고, 이를 충원하기 위해 매점매석을 일삼고 물가를 조절하여 백성의 삶을 고달프게 했다.

 농업생산력과 화폐경제의 발달로 조선후기 들이 사상의 세력이 강해졌다. 이들이 시전상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했고, 도성주위엔 상설시장이 그리고 지방에는 5일장이 정례화된다. 하지만 이들 사상역시 시전상인의 위치를 그저 대물림한 것에 불과해 사회를 변혁하는 세력이나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킬 상업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져 중앙의 관료들에게 줄을 대어 불공정한 비리를 저지르거나 매점매석으로 백성을 삶을 어지럽힐 뿐이었다.

 중앙에 의지하고 불공정 거래로 이미 경재력이 없었던 사상들은 개화기 외국 상품과 외국 자본에 거의 대응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자생력이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백정이다. 백정은 본디 고려시대만 해도 백성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것을 세종때 차별을 없애고자 이들을 백정이라 칭하면서 백정은 차별의 용어로 변모하고 본디 백정이란 말은 백성으로 대체된다. 이들은 조선의 유랑민이었다. 정착농업경제국가에서 유랑민은 위정자들이 보기에 불안한 존재였다. 여러 반란 세력에 쉽게 가담할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수탈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 조선은 이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거나 역을 면해주는 조건으로 정착시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은 전혀사라지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이들이 북방민족출신이 다수라는 점이 한몫한다. 이른바 오랑캐 취급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백성들중 사정에 따라 백정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그렇게만 볼수 없는 점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은 복식와 일상에서의 의례에서도 엄청났는데 남자 백성의 경우 항상 패랭이를 써야했고, 혼인한 여자는 쪽빗을 사용하지 못하고 머리를 둥글게 올려 말아야했다. 특히 패랭이는 양인의 경우 상을 치룰때만 죄인이라는 명목으로 쓰는 것이라 그 차별적 의미가 더욱 엄청났다. 백정은 일반 양인의 아이에게까지 존대어를 써야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일반 양인남성들이 백정아녀자를 성적으로 희롱했다는 점이다. 백정의 아녀자를 올라타 말이나 소취급을 하는 놀이였는데 일제시기 까지 이어져, 법적으로 차별이 금지된 당시에 자녀의 운동회에 참가했던 백정계급의 어머니가 딸이 보는 눈앞에서 그 일을 당하고 자살했다는 장면이 책에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광대다. 광대는 한때 조선시대에 4만명에 이를 정도로 수가 엄청났는데 이는 조선의 억불정책에 기인한다. 상당수의 승려가 절에서 쫓겨나면서 유랑인이 되고 광대집단에 합류한 것이다. 또한 많은 농민들이 지주에 토지를 잃고 유랑민이 되면서 합류하기도 하였다. 광대들은 주로 왕실이나 양반가문의 행사, 그리고 과거 급제 행사에 출연했다. 광대들은 조선후기에 수가 많아지는데 그 시기 들어 이전보다 과거 횟수가 매우 많아졌고, 지방에 시장들이 많아 짐에 따라 광대가 할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책 조선의 모멸사를 보면 일정한 패턴이 느껴진다. 조선 초기 공고했던 신분제가 법을 만들고 이끌어나간 양반층의 이익도모에 의해 무너져감에 따라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후기 들어 농업생산력 발달에 따른 농민의 분화 및 유랑민화, 그리고 상업의 발달로 시장과 상품에 대한 수요가 커진 것도 한몫한다. 이에 따라 백성들의 직업과 그 양상은 매우 다양해졌지만 수탈과 착취는 오히려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일부 농민이나 상업계층은 양반의 권력을 흔들어 놓을 만큼 성장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을 착취해온 시스템에 감히 도전할 의사나 안목을 갖지 못한다.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계층으로 사회를 변혁해나가기 보다는 기존 양반층에 돈으로 기대거나 합류하여 자신과 같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세력으로 남게된다. 이래서 조선이 망한 것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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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3-01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었던 책이네요...급 관심 가요...

2018-03-13 0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8-03-13 10:14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피지배층을 최대한 짜내기만합니다 나름괜찮았다던 세종이나 영정조시기도 근본적으론같았습니다
 
이덕일의 당당 한국사 -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국사 베스트 25장면
이덕일 지음 / 아라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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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인물과 전쟁, 문화재, 과학문화유산을 모두 합쳐 25개로 선정해 쓴 책이다. 어렵지 않고 쉬워서 학생들도 읽을 만하며 역사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보기에도 좋아보인다. 역사의 조예가 있으신 분이라면 쉽고 빠르게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물편의 이정기와 흑치상지편이 좀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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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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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은 중국이 일본과 2차대전에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전쟁이다. 하지만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 그리고 본격적인 전쟁이 38년에 시작했기에 오히려 조금더 다른 전쟁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이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기도 하다. 2차대전에 유럽에서의 전쟁이 주로 유명하고, 아시아에서는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만이 알려져 있지만 중일전쟁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영향력과 한 축을 담당했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책은 엄청 두껍다. 이 많은 일본군과 중국군의 주요 지휘관들과 전쟁의 개관과 뒷배경을 모두 파악하고 서술하느라 저자가 엄청난 고생을 했음을 짐작할수 있다. 쓸데없는 내용을 지리하게 써놨나 싶기도 했는데 읽어보니 마땅히 빠뜨릴 만한 것도 없다. 물론 상세히 쓰시기는 했다. 읽으며 3가지 정도를 얻은 것 같다. 좀처럼 익숙치 않은 중국의 주요 성의 위치와 도시 등의 지리적 감각, 무능하고 부패하여 항일전쟁은 물론 국공내전에서도 참패한 장개석 국민당 정권에 대한 재인식, 중일전쟁의 2차대전에서의 영향력이다.

 중국 신해혁명으로 청왕조가 무너지고 기대했던 위안스카이와 그가 이끄는 북양군의 이탈로 국민정부는 곧 내전에 돌입한다. 난징정부는 세력을 규합해 북양정권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위안스카이는 반란으로 황제자리에 오르지만 시대착오적 행각을 일삼아서 지지기반을 빠르게 잃어갔고, 곧 죽는다. 중국은 역사상 늘 그렇듯 중앙정부가 무너지면 곧바로 지방군벌들이 날뛰는데 위안스카이가 죽은 당시가 그러했다. 이들은 중국 북경을 놓고 다투었는데 당시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지휘관 장제스는 돋보였다. 장제스는 만주의 군벌은 장쭤린을 전쟁에서 이겼는데 당시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은 장쭤린이 친일적 성향을 보이지 않자 그가 탄 열차를 폭파하여 암살한다. 일본은 우두머리가 없는 무주공산을 노린 셈인데 그의 아들 장쉐량이 의외로 만주의 지배권을 빠르게 장악하며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장쉐량은 두고두고 장제스의 발목을 잡는다.

 만주는 당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한반도를 장악한 일본은 이를 호시탐탐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늘 그렇듯 트집을 잡아 기습 공격하였고 장쉐량의 동북군은 지리멸령하게 무너진다. 물론 동북군의 수가 일본군을 압도하여 충분한 반격과 재정비의 기회가 있었지만 일본이 만주 전체를 노리는게 아니라 무언가를 원한다고만 생각했던 장쉐량은 본격적인 반격을 주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그의 주력은 화북의 북경일대를 장제스와 다른군벌에게서 방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전력이 분산되 있었다. 결국 뒤늦게 장쉐량은 일본의 침략의도를 알았지만 때는 늦으리였다. 만주를 손쉽게 장악한 일본은 푸이를 압세워 만주국을 세운다.

 일본의 야욕은 끝이 없어 만주국의 점령이후에도 화북지방을 계속도발하고 마침내는 상하이 사변까지 일으킨다. 당시 상하이에는 주요 열강의 조계가 있어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무모한 도발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강행한다. 책에서도 주로 지적하지만 당시 일본은 군부를 행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형태로 일본의 2차대전과 중일전쟁의 많은 도발에는 현장지휘관들의 무모한 야심과 독선에 의한 것이 많았다. 상하이 사변에서 국민당정부는 좀 소극적이었는데 공산당과의 전쟁, 그리고 일본과의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수도 난징에 대한 방어 등 복잡한 상황이었다. 결국 장제스는 중앙군을 투입하지만 상황은 어려웠고, 일본과 타협한다. 장제스는 많은 비난을 받지만 당분간 일본과의 전쟁을 억제하면서 안을 정비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상하이 사변 이후 장제스는 늘 말썽이던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하고, 지방군벌들을 복속시키는등 자신의 정권을 강화해나간다. 만주사변과 상하이 사변에서 알수 있듯 당시 중국군의 전력은 형편없었으므로 독일과의 교류를 통해 군사협력을 없고 군대를 강화시켜나갔다. 독일은 당시 주요 자원들에 대한 해외의존이 필요했는데 영국 프랑스에 견제당하는 상황에서 중국은 주요 자원수입원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흘러 1937년 일본은 본격적인 중일전쟁을 시작한다. 만류하는 일본내 정치인도 있었으나 일본 군벌에 의해 암살되거나 실각하기 일쑤였다. 천황과 일본의 정치권은 무모한 일본 관동군의 행태에 패망까지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관동군은 만주국에 주둔하는 군대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의 동쪽에 있다하여 관동군이라고 한다.

 일본군은 장쉐량이 지키던 북경과 텐진지역을 손쉽게 점령해나갔으며 화북 지역 전역을 점령해나간다. 중국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며 아직도 각 성의 지방군벌들은 자신의 전력을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장제스의 중앙군과 지방군은 원래 세력이 달라 군복이 다른 경우도 많았고, 수장이 다르다보니 지휘계통의 문제 언어의 문제, 무장정도의 차이등 병력만 많았지 전투에 지장이 되는 문제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명령에 의해 자리를 지켜야 할 부대가 마음대로 퇴각하여 측면이나 후방을 돌파당하기 일쑤였고, 지방군벌들은 싸우려는 의지도 부족했다.

 상당히 빠른 시간에 중국은 화북일대를 상실했으며 수도 난징이 점령당해 그 악명높은 난징대학살이 일어난다. 난징을 상실한 국민정부는 수도를 우한에서 충칭을 옮겼지만 일본군은 우한일대에도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 점령한다. 거기에 중국의 동남해안 일대 도시를 점령하여 철광석은 풍부하지만 그외에 많은 물자를 헤외에 의존하던 국민당 정부의 숨통을 조여나간다. 하지만 매번 중국군은 영토를 상실해나가면서도 끈질기게 저항하여 일본군에도 적잖은 피해를 주고 있었으며 현장지휘관들의 독선과 무능, 중국군을 얕보는 경향, 병참등의 문제로 일본군의 피로도 만만치 않게 누적되어 간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린다. 자원을 외존하던 미국과의 교류가 끊어졌고 국 영토가 드넓었지만 정작 일본이 필요로 하는 석유와 고무등의 자원은 동남아에 풍부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선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 섬을 점령하는데 이로 인해 열강들을 일본에 긴장하고 견제하기 시작한다. 늘 그렇듯 기습으로 일본은 아시아 주요국과 섬들을 손쉽게 점령해나간다. 주요 아시아 식민지에 주둔한 유럽군대들은 당시 본국이 독일과의 전쟁으로 힘을 쓸수 없었고, 군대의 상당수도 식민지인으로 구성되어 이렇다할 전투력이 없는 상태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령사이에 끼어 완충지로 독립을 유지하던 태국은 일본군이 다가오자 그들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 간신히 독립을 유지한다. 일본군의 통행과 철도 및 공항건설 시설이용등 적잖은 주권침해였다. 이로 인해 태국에서 버마를 연결하는 죽음의 철도가 일본에 의해 완공되었으며 우기에 시작한 공사로 공사기간중 현지인 7천명이 사망한다.

 해안과 동남아를 통한 자원루트가 막히기 시작하자 중국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주요 열강의 지원을 기대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장제스는 오랜 고립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지만 연합군에게 중국은 상당히 부차적인 장소에 불과했으며 미국역시 침공은 일본에게서 받고 공세는 독일에 취하는 자세를 보인다. 더군다나 섬멸직전의 상황에서 일본과의 전쟁으로 국공합작을 한 공산군은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일본군의 세력이 닿지 않는 화북일대에서 자신들의 근거지를 널혀나가 장제스를 더욱 골치아프게 했다.

 당시 미국이 파견한 미군 지휘관은 스틸월이었는데 버마에 파견된 그는 일본군에 버마를 잃고 이를 탈환하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스틸웰은 미국의 협력을 대가로 장제스에 정예군을 요청하고 전력이 모자란 장제스는 이에 응한다. 하지만 스틸웰의 무능으로 버마는 일본에 점령되고 장제스는 정예병의 상당수를 잃는다. 일본군은 화남에서도 대공세를 이어 3차례나 방어하였던 창사와 형양비행장, 동남아 주용 교역의 창구인 난닝을 차례로 잃어가며 영토가 반으로 쪼개진다.

 이처럼 1944년까지만 해도 중국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지만 연합국의 전세는 극도로 전환되어 43년에는 이탈리아가 항복하여 독일에 선전포고 하고 독일 역시 항복한다. 독일의 항복에는 미국의 가세도 있지만 소련과의 동부전선이 무너진게 큰 역할을 하였는데 소련은 2차 대전중 일본 관동군의 시베리아 침입을 우려해 독일과의 서부전선에 계속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무려 70만의 극동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전쟁교착으로 일본 관동권의 전력이 투입되자 스탈린은 일본의 침공이 없을 것으로 확신하고 과감하게 극동권을 서부전전에 투입하여 전황을 뒤집을수 있었다.

 결국 독일이 항복하고 일본은 손쉽게 점령한 섬과 아시아 여러나라들을 빠르게 잃어갔다. 특히 섬하나하나를 지키고자 병력을 분산하였는데 이로인해 병참의 문제와 함께 각 군대가 손쉽게 각개격파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결국 핵 두발로 일본은 항복한다.

 문제는 이로 인해 발생하는데 아직도 중국내에는 무려 300만에 달하는 일본군과 일본인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본군 세력을 무장해제하고 사용하는데 국민당과 공산군은 치열하게 경쟁한다. 공산군은 화북 세력을 기반으로 빠르게 만주와 화북지역을 장악하였는데 이는 소련군이 전쟁 말미에 빠르게 만주지역을 장악했기데 가능했다. 이로 인해 공산군은 장제스와 일국을 양자강을 경계로 이분하자는 주장까지 할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전쟁이 끝나자마자 국공내전이 발생하였으며 일본과의 오랜 침략으로 전력에 큰 손실을 입은 국민당 군은 각지에서 대패한다. 거기에 장제스는 일본과의 항전과정에서 전략적 외교를 통해 시간을 벌고자 일본과의 여러 협상에서 저자세를 보이곤 했는데 그것이 발목이 되어 민심을 많이 상실한 상태였으며 일본군의 무장해제 과정과 각 지역의 탈환과정에서 각 지휘관들의 부패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중국은 공산화 되었고 장제스 정권은 타이완으로 탈출한다. 중일전쟁중 국민당 정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지원을 인색했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국공내전은 여러 부작용을 갖고 왔다. 우선 독일처럼 연합군은 일본은 분할점령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동과 북쪽 지역을 소련과 중국이 점령하고 나머지 지역을 영국과 일본이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맥아더의 강력한 반대와 국공내전으로 무산되고 분할점령은 엉뚱하게도 한반도가 당하게 된다. 거기에 일본과의 배상협상에서 일본측은 승전국인 중국에 막대한 피해 배상을 각오하였지만 타이완으로 쫓겨난 장제스는 국제사회에서 빠르게 인정받기 위해 손쉽게 포기하였으며 공산당 역시 고립을 우려해 이를 빠르게 포기하였다. 친일 부역자에 대한 처리도 국공내전으로 어려웠다. 당장의 전쟁으로 이들을 심판하기 어려웠고, 전쟁에 활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처럼 이들의 사회중심지위에 올라 호령하는 일은 없었다.

 중국내의 일본인들의 운명도 기구했다. 소련에 점령당한 만주지역의 100만가량의 일본군과 일본인들은 약탈과 강간 살해의 대상이었으며 시베리아로 끌려가 상당기간 노역에 동원되었다. 중국내에 300만 정도의 일본인은 100만가량이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나머지는 국공전쟁에 동원되기 도 하고 어려 가지 이유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전쟁의 대가를 가혹하게 치른 셈이었다.

 이처럼 중일전쟁은 2차세계대전에 미친 영향력, 그리고 공산당의 세력확산의 기회로 향후 중국이 공산화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의미있는 전쟁이었다. 한반도에도 상당히 영향을 미쳤음에도 이런 중요한 전쟁이 잘 다루어지지 않고 잊혀져 있는 것이 무척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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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6-09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고 있는데 책 재밌네요.ㅎㅎㅎㅎ
 
강자의 조건 - 군림할 것인가 매혹할 것인가
이주희 지음 / Mid(엠아이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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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시드마이어의 문명5 게임을 좋아한다.(이미 6탄이 나왔는데도 거의 5년째 5탄만 하고 있다.)

거의 중독수준인데 이 게임의 중독성은 코에이사의 삼국지에 비할바가 아니다. 게임 문명에는 참으로 다양한 문명이 등장하는데 다 내노라하는 문명들이다.(안타깝게도 한국문명은 기본판에는 항상 없고 확장판에서나 간신히 등장하곤 한다) 때문에 게임 문명과 관련해서 이 책을 참 재밌게 읽었다. 문명 게임에서 등장하는 몇몇 유닛과 지도자의 명성과 지역의 명칭들에 대해서도 좀더 잘 알게 되었다. 

 본론으로 들어가면 이번에 본 책 강자의 조건에서 선정한 강자들은 게임 문명에 모두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도 로마, 몽골, 영국, 네덜란드, 미국이 강자들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들의 공통 분모로 다양한 종교와 인종, 사고에 대한 관용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사회의 다원성을 강자의 조건으로 꼽았다. 

 우선 시대순으로 로마부터 시작한다. 주지하다시피 로마의 시조는 늑대젖을 먹고자란 로물루스 형제다. 이 형제들은 거의 초기엔 산적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여자가 부족했는지 인근 사비니 부족을 초대하여 거짓연회를 베푼후, 남자들을 공격한 후 여자들을 취한다. 이 지저분한 전술에 격분한 사비니 남자들은 술에서 깨어난후 로마인을 공격하나 패한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양편에 남편을 두게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그리고 로마인들의 혜안으로 그들은 하나로 융합하고 심지어 왕들도 서로의 지도자가 공동으로 하게 된다.

 이런 로마의 확장 방식은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져 삼니움을 비롯한 주변 라틴소국들과도 이런 식의 통합을 하게 된다. 즉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면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로마제국의 동등한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용은 노예에게도 이어져 가정에서 일하는 노예의 경우 수십년을 일한 후 독립하여 자유민이 될수 있었고 자유민의 다음 후손은 로마시민권을 가질수 있었다. 대대손손 노예가 아니라 나 하나 고생하면 자손은 당당한 로마시민으 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노비가 알면 경천동지할 노릇이다. 

 로마에 위기가 찾아오니 카르타고와의 전쟁이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한니발의 아버지 바르카는 본국에 실망한 나머지 일가를 이끌고 스페인으로 바르셀로나 지역으로 이주한다. (바르카의 이름을 따서 바르셀로나가 된 것이다.) 이 일대를 평정한 후, 그 아들 한니발은 로마를 침공한다. 그것도 5만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서. 한니발의 작전은 이러했다. 알프스를 넘어서 로마 정예를 깨부순 후, 로마동맹을 흔드는 것. 실제로 본국과 동맹간의 차별이 심했던 과거 아테나와 스파르타, 페르시아는 정예병이 깨어지자 동맹이 배신하며 전체가 뿌리부터 흔들리며 자멸했다. 이런 역사의 교훈을 한니발은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전투의 천재인만큼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와 여러 전투에서 로마군을 궤멸시키나 로마 동맹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이것은 관용과 다양성에 기초한 로마의 제국확장방식때문이었다. 이미 로마와 동등한 시민인 동맹들은 좀처럼 배신하지 않았다. 이것이 한니발의 가장 큰 패인이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긴 로마는 아시다시피 한동안 역사의 주인공으로 군림한다.

 다음은 몽골이다. 몽골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만큼 수십만 대병을 몰고 다닐거라고 생각했는데 몽골이 세계정복시 운용한 병력은 고작 10만 가량이다. 하긴 수나라도 근거리인 고구려 원정에 백만을 동원하며 병참에 애를 먹었으니 수천킬로미터를 원정하는 몽골병사는 당연히 소수정예일수 밖에 없다. 몽골의 칭기즈칸 역시 관용과 다양성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벌하는 나라들마다 인력을 흡수해나갔다. 빠른 정벌을 위해 항복을 권하고 불응할시 무자비한 살육이 따랐지만 일단 항복하거나 제국의 일원이되면 동등하게 대우하며 그들의 기술을 흡수해나갔다. 오죽하면 프랑스군이 몽골의 한 장교를 잡았는데 알고보니 영국국적이었다고 한다. 유목민은 공성전과 수전에 약할수 밖에 없는데 다른 문명의 기술을 흡수하여 공성무기를 만들고 수군을 양성하여 이슬람의 높은 성벽과 남송의 양자강 방어선을 무력화시켜 대제국을 이룰수 있었다. 

 이는 사상에도 영향을 미쳐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서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도간의 종교토론이 일상회되었으며 기독교도인 몽골의 대칸도 참여하였다. 몽골은 동과 서를 역사상 처음으로 이어 사상과 문물의 교류를 이끌어 왔으며 정복된 나라들도 제국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세번째는 엘리자베스 치하의 영국이다. 당시 유럽의 패자는 스페인이었다. 이들은 레판토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을 무찌른 만큼 해군이 막강했으며 그래서 별칭이 그 유명한 무적함대이다. 당시 영국은 유럽의 삼등국가로 일개 도시국가인 밀라노공국보다도 세수가 적을 만큼 가난했다. 이런 영국이 감히 스페인과 대적하게 되는데 이는 종교전쟁과 연관이 크다.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는 카톨릭의 신봉자였고, 당시 신교가 난립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중이었다. 펠리페는 스페인이 커진 방식 그대로 영국의 신교문제도 정리할겸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부당한다.(펠리페의 이름을 딴 나라가 필리핀이다.) 거기에 도버해협바로 건너편에 있는 네덜란드를 순망치한으로 여긴 영국이 네덜란드에 병력을 지원하자 전쟁을 결심한다. 

 당시의 해전은 일단 대포를 인사치레 가볍게 쏜후 접근하여 갈고리를 걸고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이었다. 사실 배위에서 싸울뿐 사실상의 육전이었다. 그리고 스페인은 배도 많고 육군도 당대 최강. 섬이라 아예 육군은 없다시피한 영국은 해전의 개념을 바꾼다. 일단 붙으면 지니 멀리서 화포를 사격하는 방식으로 하고 배 역시 이를 위해 가볍운 형태로 개량해 나간다. 당시 대포는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청동이 녹이슬지 않고 신축성이 있어 연사에도 깨어져나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동은 비쌌다. 청동은 업고 철만 많은 영국은 주철대포를 제작하였는데 가격은 삼분의 일 가량이면서도 그 성능은 우수했다. 결핍이 발전을 부른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전쟁에서 해적도 등용하는 다양성과 관용으로 우수한 선박 및 대포기술자 역시 유럽 각지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관용과 그로 인한 다양성의 확보는 승리의 키워드였다. 영국 부분에서 사략선이 나온다. 게임 문명에는 사략선유닛이 있는데 사실 해적선이다. 게임이지만 국가에서 해적선을 만드는게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문명에서 해적은 사실상 국가와 연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다음은 오렌지의 네덜란드다. 오렌지도 나지 않는 나라가 왜 오렌지를 이렇게 좋아하는 싶었는데 오렌지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공헌자 빌렘 드 오랴네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라고 한다. 이당시 역시 종교전쟁 시기로 네덜란드에는 칼뱅파 신교도가 많았다. 이는 칼뱅파의 교리가 소명주의를 핵심으로 해서인데 소명주의로 자신의 직업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카톨릭에서는 금융업을 죄악시 했는데 칼뱅파의 소명의식에 의하면 더이상 금융업이나 상인이라는 직업은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네덜란드 입맛에 맞는 신교가 난립하자 스페인 펠레페 2세는 강도높은 신교도 박해에 들어간다. 이에 반박해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스페인은 패하고 만다. 

 이과정에서 남부의 10개주는 스페인에 순응해 독립전쟁에서 빠지게 되며 이 부분들이 지금의 벨기에가 된다. 스페인이 패한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 탓도 있지만 자멸의 원인이 컸다. 과거 스페인은 이슬람의 영향으로 유대인과 이슬람, 카톨릭 모두가 공존하는 다원주의 국가였다. 하지만 레콩키스타 이후 카톨릭 일변도로 변하게 되었고 그결과 나라의 힘을 불어넣던 유대인과 기술자 집단들이 사라지게 된다. 스페인은 당시 신대륙에서 들여온 은과 금이 넘쳐났는데 이를 제대로 운용할 전문 금융집단이 사라지게 된것이다. 스페인은 유럽 각지에서 전쟁을 벌이며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는데 이자를 무려 40%나 물어야 했다. 

 이런 스페인의 자멸로 네덜란드는 독립후 빠르게 성장한다.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여 유럽 각지에서 인구가 유입되어 빠르게 인구가 성장하였고 전문가 집단을 확보하였다. 영국보다도 더 저렵하고 빠른 상선을 개발하여 화물운송량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각지의 무역지를 개척해나간다. 특히나 아시아에 진출하며 많은 투자가 필요해졌는데 이 때 등장한 것이 동인도회사이다. 근대적 주식회사의 개념으로 분산투자를 하며 수익의 일부를 가져가는 시스템이었다. 거기에 위험에 대한 투자까지 더해져 파생상품까지 등장한다. 

 마지막은 미국이다. 미국부분은 주로 흑인 인권운동에 초점을 두었는데 관용과 다양성이 국가를 성장시킨 앞의 4나라와는 약간 어긋난다. 미국은 남북전쟁후에도 흑인인권이 제대로 서지못했는데 이는 미국이 연방국가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흑인이 노예신분에서 벗어났음에도 남부의 여러주들은 흑인의 투표권을 무력화시키는 다양한 법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1960년대까지 이어지게 되며 이때서야 다양한 인권운동으로 흑인들의 인권이 확보되어 간다. 재밌는 점은 이전까지 남부의 주들이 미국평균소득의 절반에도 못미칠 만큼 가난했는데 오히려 흑인이 사실상의 노예신분에서 벗어나자 소득이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거저나 다름없는 노동력의 확보로 혁신을 게을리한 남부가 여기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어찌보면 이 책은 세계역사에서 관용과 그로 인한 다원성이 빛나는 시기를 찾아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역사의 일부를 들춘 셈이지만 무척 재밌고, 사건하나하나가 의미가 있다. 쉽고 재밌게 써서 빠르게 읽을 수 있다.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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