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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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역사가 제법 길기도 하지만, 우리완 다르게 상당히 많은 수와 왕조들이 자주 명멸해갔다. 한국에선 통일왕조가, 혹은 분열상황에서도 서로 간의 균형이 500년 정도는 가는 반면 중국은 그 기간이 이삼백년 정도로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여기엔 아무래도 이렇다할 지리적 방어선이 없는 기름진 중원을 침탈해오는 유목세력들의 꾸준함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장성도 만들었을 것이다. 별 쓸모는 없었지만.

 이 책은 그렇게 많은 왕조가 명멸한 중국의 여섯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도 여러 왕조가 도읍으로 삼은 도시가 있듯, 중국도 역시 그러하다. 여섯개의 도시는 장안, 뤄양, 카이펑, 항저우, 난징, 베이징이다.

 

1. 장안

 장안은 한자 뜻 그대로 길게 오래도록 평안한 곳이라는 의미이다. 왕조가 오래도록 평화롭게 지속되는 염원이 담겼다 할 수 있다. 장안은 중국인들이 중원이라고 일컫는 황하 중상류 지역에 위치하며 이곳은 강으로 둘러쌓여 교통의 요지이면서 방어가 유리하고 여러곳으로 접근하기 쉬운 천혜의 장소이다. 그래서인지 중국 초기 국가들과 문명은 여기서 발생했으며 그래서인지 역대왕조가 가장 많이 도읍한 곳이기도 하다.

 중국의 고대국가인 하, 상, 주, 전국시대의 진, 한, 수, 당이 모두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장안성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국제적 성격이 강했던 전성기 당의 수도로서의 장안이다. 워낙 대단해 발해와 일본의 왕조가 장안을 본따 그들의 수도를 건설했다. 전성기 장안의 인구는 무려 백만에 달했으며 크기는 동서로 9.7km 남북으로는 8.5km의 장방형으로 당시 서양 최고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의 무려 7배에 달하는 크기였다.

 장안에는 방이라는 폐쇄공간이 있었는데 이것들이 108개가 장안성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시의 가운데는 황제가 다니는 주작대로가 있었으며 주작대로를 기점으로 동시와 서시로 나뉘었다. 도성의 동서남북에는 각각 3개의 문이 있었는데 천지인을 뜻했다. 도성내부에는 방 사이로 9개의 길이 있었는데 고래로 중국은 우리가 전토를 팔도로 나누는 것처럼 땅을 구주로 나누는 전통이 있었으며 이는 그를 의미한다. 거기에 방은 13줄로 배열되었는데 이는 12달과 윤달을 의미하며, 황성 남쪽에 있던 4개의 방은 4계절을 의미한다. 이처럼 장안은 중국 전체와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는 표현하려는듯 철학적으로 완벽한 도시였다.

 하지만 문제도 많았다. 일단 도시가 너무 폐쇄적이었다. 장안은 상당한 크기였지만 웅장한 성벽에 둘러쌓여 도시와 확장에 문제가 많았다. 또한 장안 내부의 방들도 폐쇄적이었다. 성도 아니면서 각 방들은 높은 담장에 둘러쌓여있었다. 밤이면 각 방은 문을 닫고 도시경비대가 순찰을 돌았다.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동시엔 고관대작과 귀족이 거주하는 반면 서시는 외국상인들와 평민들이 살았다. 공간적으로 분리된 셈이다. 이로 인해 당의 장안에는 대부분의 백성이 세들어 살았으며 당의 국운이 기울었을 댄 가난함이 이루말하기 힘들정도였다고 한다.

 

2. 뤄양

우리가 낙양으로 알고 있는 도시다. 한자로 양은 강의 북쪽을 의미하므로 뤄양은 낙하의 북쪽에 있는 도시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한양도 한강의 북쪽이란 뜻이다. 뤄양은 동주, 후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당, 후량, 후당의 아홉왕조가 도읍한 곳으로 장안 만큼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은 위용을 자랑한다.

 뤄양은 장안에 비해 뚜렷한 장점이 있었는데 장안이 기후가 건조해 농사가 잘 되지 않아 식량수급에 문제가 많았던 반면 뤄양은 식량 공급이 매우 원활했다는 점이다. 이는 기후탓도 있지만 좀더 하류에 위치하고 낙하의 존재로 조운에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수나라때 대운하가 건설된 이후로는 뤄양은 조운의 중심지로 사용되어 매우 많은 곡식창고가 건설되었다.

 

3. 카이펑

 카이펑은 후량, 후진, 후한, 후주, 송이 도읍한 도시다. 카이펑은 장안이나 뤄양에 비해선 좀 덜알려진 편인데 아무래도 중국 왕조중 군사적인 면에서 가장 맥을 못춘 송왕조의 도읍이어서가 아닌가 싶다. 카이펑은 주변 지세가 낮고, 주변에 이렇다할 산 하나 없어 방어에 매우 취약했다. 하지만 이를 만회할 만한 장점이 있었는데 바로 드넓은 평지와 더불어 주변 수로가 도시에 촘촘히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중국의 왕조들은 카이펑 인근에 인공운하인 변하를 건설하고 황하와 회하를 연결하는 수상교통의 요지를 건설했다.

 카이펑은 주변하천이 많고 지세가 낮아 교통엔 유리했지만 이로 인해 수공을 자주당했다. 카이펑은 점령한 적들은 대부분 변하를 막아 물을 모아 터뜨리는 형태로 카이펑을 침수시켜 점령하는 방법을 자주 택했다. 역설적으로 이는 방어에도 사용된 적이 있는데 중일전쟁시절 일본군의 진군을 막기위해 변하주변의 제방을 국민들군이 터뜨린적이 있다고 한다.

 카이펑은 수도로 삼은 송을 세운것은 조광윤이다. 그는 조선의 이성계가 고려의 장수였던 것처럼 후주의 신하였다. 후주의 7살황제 공제가 다스리던 시절 갑자기 북방의 요가 후주를 침입한단 소문이 들렸고 이에 절도사 조광윤은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다. 원정중 천막에서 잠든 조광윤이 일어나자 자신의 몸엔 어느새 황포가 덮여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이에 조광윤은 천명을 깨닫고 회군하여 왕위를 찬탈한다. 우리의 위화도 회군과 참 많이 비슷하다.

 조광윤은 북벌을 하기 보다는 보다 쉬운 남쪽의 왕조들을 먼저 정벌하였으며 사대부를 중시하였다. 조선과 많이 비슷한 점인데 조선의 성리학의 토대인 주자학인 송대에 발전하였기 때문인듯 하다. 그래서인지 송의 황궁은 중국의 매우 화려한 다른 궁에 비해 매우 적은 규모였다. 또한 송은 백성을 위한 복지제도가 발전하고, 상업이 발전하는등 현대적 관점에서 상당히 선진적인 국가를 건설했다. 당의 장안과는 다르게 폐쇄적인 방도 없었으며 야간 통금도 없었다. 하지만 북벌을 결국 해내지 못한 점과 문치주의로 군사력이 약해 결국 금에 의해 남으로 쫓겨나 남송이 되며 원의 쿠빌라이에 멸망당하고 만다.

 나라의 근본인 같은 성리학이어서인지 백성을 위하는 민본정치를 이념으로 삼고, 집권층이 사대부로 검약하고 군사력도 약해 외침에 크게 당했다는 점에서 송과 조선은 상당히 비슷했다.

 

4. 항저우와 난징

 항저우는 금에 카이펑을 잃은 송이 도읍한 곳이다. 유명한 중국음식인 동파육이 기원한 곳이고 상당히 유명한 자연환경과 문화가 가득했다. 책을 읽다보니 중국의 지배자들은 강남의 높은 문화수준와 생산력, 자연환경을 동경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이곳은 도읍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북방왕조의 침입에 의해 마지 못해 도망간 경우거나 왕조자체가 이곳에서 창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아무래도 문화의 중심과 한족의 정통성이 중원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난징은 베이징과 더불어 '경'을 유지하는 곳이다. 북경과 남경인 것이다. 오와 동진, 송, 제, 양, 진의 육조가 도읍하였다. 특히, 난징은 명의 초기 수도였는데 명을 세운 주원장이 수도로 삼았다. 주원장의 본명은 주중팔이었는데 주살안다는 의미의 주와 원나라의 원을 써서 원을 멸하는 인물이라는 뜻을 가진 주원장으로 개명하였고 이를 이루어낸다.

 주원장은 난징에 도성을 쌓고 13개의 문을 만들었는데 남쪽은 남두육성을 본따 북쪽은 북두칠성을 따라 만들었다. 남두육성은 삶은 관장하고 북두칠성은 죽음을 관장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삶전체를 관장한다는 뜻으로 도시를 만든듯 하다.

 난징은 매우 좋은 도시였지만 중국전체를 다스리기엔 무리가 있는 도시였다. 이에 주원장은 다른 지역으로 천도하고자 했지만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한다. 명은 지금의 북경으로 천도하는데 이는 주원장의 아들 주체가 왕위를 찬탈하였고, 연왕이었던 주체가 자신의 근거지로 수도를 옮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체는 조선의 이방원과 상당히 유사하다. 서열도 각각 넷째와 다섯째이며, 엄청난 견제를 받았으며 동생으로부터 나라를 빼았았다는 점도 같다. 이런 주체를 견제하기 위해 주원장은 공신세력을 엄청나게 숙청하였는데 이로 인해 정작 황태손을 지킬 세력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5. 베이징

 지금의 중국 수도인 베이징은 명, 원, 청등 가장 최근이면서도 굴직한 왕조들이 도읍한 곳이다. 그리고 명을 제외한다면 주로 유목 정복왕조가 도읍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엔 이유가 있는데 베이징은 바로 남쪽의 농경과 북쪽의 유목의 점이지대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을 따라 중국의 만리장성은 15인치 등우선과 거의 일치한다. 15인지는 연간 강수량 381mm로 농경의 한계지대이다.

 따라서 베이징은 유목민족이 자신의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농경민족인 한족은 지배관리하는 최적이자 한계지역이 된다. 베이징은 대부분의 도읍이 장방형인것과는 다르게 요철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베이징이 발전하면서 남부지역의 인구가 늘자 외성을 더 크게 축조하게 되었는데 남쪽부터 시작하여 그 쪽은 크게 짓고 도중에 비용이 모자로 역지로 연결하다보니 남쪽만 커졌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인에게는 하나의 큰 상징이자 자부심이며 한계이다. 그만큼 역설적인 곳인데 진시황이 처음 축조한 이유가 통일된 중국을 하나라 묶고 정립한 세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이며 더불어 북방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성은 그후로 계속 중국의 확장과 고립 및 공포와 폐쇄성의 양면을 갖는다. 장성은 수세시엔 방어와 폐쇄의 역할을 공세시엔 확장의 그 지역의 식민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공세인 요즘은 장성을 함부로 한반도 북쪽까지 연장하려는 속셈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책에 기대한 건 중국의 여섯도읍지와 수도로서의 지리적 이점등을 알고 싶어서였지만 사실 이 부분은 책의 일부이고 대부분이 역사적 문화적, 관련 인물 내용들이다. 중국의 역사를 좀더 알게 된 면도 있지만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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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 작전 - 서구 중세의 역사를 바꾼 특수작전 이야기
유발 하라리 지음, 김승욱 옮김, 박용진 감수 / 프시케의숲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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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대담한 작전'은 하라리의 인류문화 3부작이 국내에서 인기를 얻자 나온 책이다. 사실 '사피엔스' 이전에 쓴 논문같은 느낌의 책인데 하라리가 인기를 얻으면서 '호모데우스'와' 21세기를 위한 제언' 사이에 책이 출간되었다. 그냥 점만 찍어만 두었다가 우연히 보게되었는데 그의 인류문화 3부작과는 확연히 달랐다. 우선 이책은 그냥 역사책이다. 그것도 일반적이지 않고 매우 좁혀진 특정시기의 특별한 전쟁방식을 다룬다. 

 그것은 바로 특수작전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보는 무슨무슨 특공대 뭐 그런 것들이다. 이런 특수작전은 과거에도 있었으며 하라리가 주제로 삼은건 1100년에서 1500년까지만이다. 특수작전은 소규모 인원으로 상대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에 쓸모가 있는데 주로 상대의 기지나, 중요한 인물, 생산시설등을 파괴함으로써 상대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전쟁시 특수부대가 적의 후방에 침투하여 적 군수뇌부를 제거 및 납치한다던가, 적의 핵무기를 파괴하거나 탈취한다던지, 아니면 군수시설을 파괴하는 것들이 특수작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세에는 적의 기지를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폭탄이나 미사일이 없기 때문이다. 활이나 화승총으론 적의 기지에 흠짓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생산시설의 파괴도 문제였다. 역시 활이나 화승총으로 뭔가 큰 것을 부수기 어렵다는게 문제였고, 중세는 지금같은 대규모 생산시설이 없고 그나마도 분산되었기에 파괴의 의미도 없었다. 남은 것은 주요 인물의 암살이나 납치인데 이것만은 매우 유효했다. 활이나 화승총 정도의 무장으로도 가능하며 효과도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 대담한 작전의 특수작전은 대부분 적 수뇌부의 암살및 납치다. 1부에서는 이 시기에 등장했던 다양한 특수작전의 예들이 번잡하게 등장한다. 그려려니 하면서 읽힌다. 2부가 좀더 재밌는데 여기부턴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책이 다루는 시기 유럽에서 있었던 중요한 전쟁인 십자군 전쟁과 백년전쟁, 프랑스 통합전쟁, 합스부르크가와 프랑스의 패권대결이 여기에 등장한다.

 중세에서는 다들 특수작전의 효과에 공감하면서도 상당히 조심스레 실행했어야 하는데 이는 중세 특유의 기사도 정신때문이었다. 이 기사도 정신은 정정당당함에서 비롯되는 명예를 매우 중시하고 그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기에 특수작전은 비교적 금기시되었다. 명예를 잃는 다는 것은 실용적 입장에서 본다면 별것 아닌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중세 유럽에선 그렇지가 않았다. 왕이든 귀족이든 자신이 직접 다루는 병력 기반은 대개 취약했고 부족한 부분은 용병을 쓰거나 동맹이나 휘화의 귀족 병력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왕이나 귀족이 명예를 잃는 다는 것은 바로 이런 병력 동원에 차질을 불러올수 밖에 없는 문제였기에 명예는 실질적으로 중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세에 몰린 적이나 자신의 성공에 굶주린 하급귀족이나 귀족집안의 차남들은 특수작전을 감행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잃을게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 십자군 편에는 하지리라는 중동의 독특한 암살집단이 등장한다. 영어로 암살자인 어쌔신의 어원은 이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하지리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암살자로 육성되었으며 암살의 성공률이 상당히 높아 주변의 영주와 왕들은 이들을 두려워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미약한 세력인 하지리를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지리들이 우리의 상상처럼 고된 육체 훈련으로 무예나 암기를 익힌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학문이나 언어 및 교양에도 상당한 중점을 두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독특한 암살방법때문이었다.

 하지리들은 목표물이 정해지면 오랜세월을 두고 목표물의 심복이나 주변에 침투한 후 완전한 기회후에 목표물을 공개적으로 암살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검만을 사용해서이다. 이런 치밀함에 유럽 각국의 군주와 특히, 중동의 권력자들을 하지리가 궤멸될때까지 두려움에 떨었다.

 책의 다른 재밌는 부분은 결혼에 의한 왕국의 합병이었다.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 권에서는 서자일지라도 적자가 없다면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권력정통성에 흠집을 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중세 유럽은 그렇지 않았다. 군주가 아무리 처첩으로부터 사생아를 많이 낳았어도 이들은  상속권이 없었다. 군주는 오직 정식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이혼도 쉽지 않아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없다면 방법은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대가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런 경우 남겨진 아내의 재혼상대나 군주의 친척들이 그 세력을 상속하곤 했다. 이런 독특함으로 인해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이 시작되었으며 한때 일개 소국의 영주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플랑드르와 이탈리아 북부, 스페인, 서부독일 일대를 차지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할수 있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하라리의 책치곤 매우 빠른 시간에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역시 단점이라면 사피엔스나 호모데우스 같은 것들을 기대한 독자는 실망할수 밖에 없다는 점과 중세유럽의 역사적 맥락을 모른다면 책의 흐름을 쉽사리 탈 수 없다는 것이다. 카페왕조나 샤를, 안티오키아 등이 매우 생소하다면 책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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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8-12-20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발하라리 책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저에겐 어렵겠네요~(말씀하신 단어들 거의 생소~ㅎㅎ)

닷슈 2018-12-20 23:49   좋아요 1 | URL
그럴수도 있겠지만 한번 도전해보십시오. 십자군 전쟁과 백년전쟁정도를조금 알아보고 읽으면 훨씬 나을 듯 합니다.

붕붕툐툐 2018-12-24 11:32   좋아요 1 | URL
넵!! 유발 하라리의 새로운 스타일이라니, 도전해 보겠습니다~^^

cyrus 2018-12-21 14: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류 3부작이 대박나지 않았으면 이 책은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

닷슈 2018-12-21 14:10   좋아요 0 | URL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2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메리크리스마스~알라딘에서 만나 소통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닷슈 2018-12-24 22:04   좋아요 1 | URL
저도 벨루치님을 알게되서 기쁩니다 성탄잘보내세요

2018-12-24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8-12-25 10: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성탄보내세요
 
오랑캐-주변국 지식인이 쓴 反중국역사
양하이잉 지음, 우상규 옮김 / 살림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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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인 양하이잉은 북방계 유목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중국 오르무스 출신이다. 지역 이름 처럼 이곳은 중국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며 거주인들은 몽골계기 다수다. 종교도 다양해서 티베트 불교와 이슬람교, 심지어 기독교가 병존한다. 민족도 마찬가지여서 간혹 위구르게 백인종도 눈에 띈다. 이런 곳에서 자란 저자라 한족 중심의 중국사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펴낸것이 이 책이다. 일본에서 유학해서인지 저자의 반중국역사의 이론적 근간은 일본인 스승이 자리한다.

 양하이잉이 비판하고 싶은 것은 지나친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대개 하-은-주-춘추전국시대-진-한-위진남북조-수-당-송-원-명-청 이다. 저자는 이 연보 자체가 중국중심이라 비판한다. 이중에 순수 한족이 세운 나라는 진,한,송,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보자.

 

1. 중화사상

 중화사상은 고대 화북지역의 지나 중심국가에서 생겨난 원중화사상이 중심이다. 중국이 지리적으로 개방되어 있다보니 항상 이민족의 위협에 시달렸고, 높은 성벽을 구축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배경을 지녔다. 그러다 보니 성벽의 안쪽은 천하이자 세계이고, 외부는 비문명, 비문화의 야만인 지역으로 구분된다. 전세계의 차이나 타운은 결국 이 성벽도시 국가의 현대판의 불과하다는게 저자의 통찰이다. 이 중화사상은 후에 유목민족 및 서구, 일본의 침략을 당하면서 더욱 폐쇄적인 왜곡된 콤플렉스로의 중화사상으로 발전한다. 이 사상은 매우 자기중심적이어서 자신들 영역의 무한 확장은 허용하고 윤리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침략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중국이 일본의 침략과 서양의 침략에 매우 분개하면서도 자신들의 침략과 현재의 확장을 당연시하는 모순을 보이는 것은 이것에 기인한다.

 

2. 우메사오의 이론

우메사오는 세계를 제 1지역과 2지역으로 나누었다.

제1지역은 일본과 서유럽으로 풍부한 지역으로 중위도 온대기후, 적당한 강우와 높은 생산력을 지닌 지역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변방에 속해 중앙아시아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반전을 위한 힘을 구축할 수 있기도 했다.

 

제2지역은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로 기후적으로 중앙에 거대한 건조지대가 자리한다. 고대문명은 대개 그 건조지대나 주변 사바나에서 발생했다. 이들은 지리상 중앙의 건조지대와 가까워 유목민을 주류로 한 파괴집단의 위협에 늘 노출되었다. 그래서 이 지역의 역사는 농경지역의 문명건설과 유목민의 파괴 및 대체가 무한 반복되었으며 이는 근대화를 통해 힘의 무게추가 농경지역으로 완전히 이전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3. 유목민의 파워

유목민 하면 문명은 떨어지나 말을 활용한 강력한 군사력과 약탈 착취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는 편견이다. 유목민의 파워는 군사력 뿐만 아니라 정보력과 유동성, 높은 사회적 개방 조직이다. 유목민은 광대한 지역을 유목을 위해 이동하는 만큼 다양한 집단과 땅을 만나게 되고 이를 통해 정보력이 높았다. 세계의 상당수 기술이 북방을 통해 이동했음은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다른 민족과 자주 접하는 만큼 상당히 높은 수준의 개방조직을 갖출 수 밖에 없었다. 중국에 세워진 유목민 국가들이 높은 수준의 민족적 다양성과 종교적 개방성과 사회조직을 갖춘 것은 바로 이에 기인한다.

 

4. 유목민과 중국의 초기역사

저자 양하이잉은 중국은 중국이라 부르지 않고 책에선 지나라 표현한다. 현재의 중국엔 다양한 민족 집단과 종교가 강제로 통합되어 있고, 한인 중심주의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하이잉은 순수한 한족 집단과 그 국가를 지나로 칭한다.

 저자는 본격적 서술에 앞서 한인개념을 비판한다. 대개 다른 나라들은 자신들의 민족이 설정되어 있는 반면 중국인 한인개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한족 보다는 한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란 개념이다. 하지만 한자가 단일민족에 의해 생성된게 아니므로 한인이라는 개념은 애초부터 오류투성이가 된다. 1919년 중화민국에 의해 현대 중국어가 지나중심으로 자리잡기 이전 중국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언어가 사용되었다. 또한 중국은 고대 한자 생성시기 양쯔강을 경계로 북방과 남방이 구분되는데 이들의 언어가 매우 다르다. 북방인은 유목민은 알타이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n.l.r의 구분이 가능한 반면 남방계인은 그렇지 않다. 북방계는 강을 칭함에 있어 허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북방계은 흔적이며 남방계는 강은 지앙으로 발음하고 강으로 칭한다. 그래서 황하는 황허이고 양자강은 양쯔강인 셈이다.

 중국에는 동남아계 한인인 하인이 처음 들어서고 기원전 13세기 경 만주 동북면에서 은인이 그리서 서쪽에서 유목민이 주인이 들어서서 차차 왕조를 바꾸어간다. 그들은 점차 한인으로 정체성을 잡아가며 주변 이민족을 야만시했는데 동이와 , 북적, 남만, 서융이 그것이다. 초기 지나의 영역은 지금에 비해 매우 좁아 동이는 오늘날의 산둥성 부근, 북적은 만리장성의 산시성, 남쪽은 양쯔강이었다. 한인이 증가하면서 이들의 영역을 확장되어 가는데 북 , 동, 서는 그대로면서 남으로의 경계만 확장된다. 이는 동, 북, 서에 강력한 유목민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역사는 고대에 남쪽으로 주로 확장된다.

 지나는 자신들의 지도자를 황제로 칭한다. 황제는 곧 천자라는 말로 권위가 강화되는데 사실 지나의 고대종교는 제왕신앙으로 제왕은 신이나 하늘과는 무관했다. 하늘과 연결되는 것은 유목민인 지닌 배천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저자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무수히 많은 배천신앙 문화인 황금기둥을 그 예로 든다.

 

5. 유목민들이 세운 나라

유목민들은 지나 초기 역사부터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일부는 지나화하기도 하고, 일부는 침략과 적대를 하기도 했다. 동쪽에서는 흉노가 등장했는데 이들이 활약한 시기는 기원전 318년부터 기원후 415년정도 까지이며 흉노는 사실상 서구로 진출한 훈족과 같다. 흉노는 멸망후 서하라는 대국을 세웠으며 몽골인들은 현대까지도 자신들의 흉노의 후손이라 생각한다.

 지나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이 시기에 5대 10국으로 통하는 남북조시대를 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받은 것이 역시 선비, 탁발계가 세운 수와 당이다. 당은 지나가 자랑하는 나라지만 선비탁발계의 나라이며 이들은 높은 국제성과 관용성을 바탕으로 번성한다. 실제 당의 안녹산은 유목민 출신이며 유명한 고선지도 고구려계다. 이는 유목민 사회가 실력사회인 평등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이들은 지도자도 왕국이 성립하기 전에는 선거로 선출했다.

 한편 동서양 최초의 충돌로 알려진 탈라스전투에서 당이 패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은 6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이슬람이 침투한다. 이 시기에 경교나 마나교 조로아스터교등 다양한 종교가 침투하며 이슬람도 침투한다. 또한 투르크화도 진행된다. 투르크화는 이란 출신 유목민들로 그들의 언어와 문화가 침투한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중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슬람을 믿고 국호가 -탄으로 끝나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들 지역은 종교가 매우 다양함에도 그 근저에 투르크계라는 근원의식이 깔려 있어 단결력이 강하다때문에 이란과 터키가 이들 나라에 갖는 영향력 역시 제법지대하다.

 유목민의 왕조는 이후 동북지역에 대키타이국인 거란을 세우며, 후에는 금국 이이서 원으로 이어진다. 거란과, 금은 모두 대제국이며 그나마 남아있던 작은 지나의 나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지만 지나의 역사의 정식계보엔 포함되지 못한다. 금은 남송을 더욱 압박하기 위해 수도를 베이징에서 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으로 옮기지만 지나친 남방정책은 북방에 대한 틈을 보여 원에 의해 멸명한다. 원은 대제국으로 칭키즈칸 사후 높은 관용성으로 정복집단의 사람들은 관료로 적극등용한다. 종교에도 매우 관용적이어서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도교의 4개 일파가 모여 토론을 벌인일도 유명하며 4개의 칸국의 칸들도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하지만 이러한 원도 점자 지나화하여 백련교도의 난으로 명이 등장한다.

 명은 매우 작은 왕조로 국제적으로 힘을 떨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폐쇄적 중화주의로 정화의 원정이후 해금정책으로 일관한다. 정화의 원정 역시 정화 자체가 유목민이고 원제국이 세웠던 도시들은 예방하는 수준이었다. 원대 이후로 중국을 차지한 황제들은 옥새를 갖고 있었는데 명의 황제는 북원에서 옥새를 갖고 있었고 이를 무력으로 차지하지 못해 스스로 옥새를 위조하고 정당화하는 촌극을 벌인다. 이 옥새를 다시 차지하고 진정한 제국의 주인이 된것은 역시 유목민 왕조인 청이다.

 현대 중국은 청에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적대하는데 이민족이 세웠고 결국 그들이 압도적 무력과 관용성으로 현대 중국의 국경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청은 만주에서 발원했는데 만주라는 지역명은 문수보살에 대한 신앙에서 유래된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6. 반종교적 반민족적 중국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결국 현대 중국은 복수를 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다른 나라들이 종교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종교가 매우 미진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중국의 종교는 유교와 도교로 볼수 있는데 유교는 학식층의 전유물이며 도교가 사실상 서민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중국인의 도교는 왜곡되어 매우 현세적으로 내세에 대한 관심이 적다. 도교는 천제사상을 지녀 중국인의 황제를 정당화하는 역할도 있다. 중국인이 종교에 적대적인 것은 서양과 다른 지역의 종교들이 이 천제개념을 대체할 것으로 우려하하는 것이며 그들의 왕조가 멸망할시 종교반란에 의한 민란이 빈번했기 때문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이처럼 저자의 생각은 중국이 그 발전과정에서 상당히 유목민과 다른 종교의 영향과 기여를 많이 받았음에도 왜곡된 중화컴플렉스로 이를 적대시하고 억누르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전체적으로 재미난 책이었지만 일본저자들의 생각이 많이 반영된 부분, 그리고 유목민들의 문화적 측면에 치중해서 서술되는 것이 조금 아쉽기도 했다. 무력적인 부분역시 많이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한국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다. 한국은 유목민이 중심세력으로 자리한 적도 있고, 그들과의 깊은 관계를 맺으며 성장과 반목을 거듭한 나라다. 저자에게 매우 흥미로운 주제가 될마도 한데 책에서는 거의 서술이 없었다. 이런 부분이 보충되며 더욱 균형있고 재미난 책이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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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1 - 1910-1915 무단통치와 함께 시작된 저항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1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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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 실록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대단한 그림과 군데군데 숨어 있는 익살, 거기에 왕들의 성격에 맞는 인물 작화와 용포의 색상, 실록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수많은 대신들간의 업적과 알력 다툼까지. 뭐하나가 빠지지 않았다. 만화라고 우습게 볼게 아니었다. 상당히 깊이 있는 만화이기에 완성까지도 근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런 작가의 다음 작품이 일제35년이다.

 아무래도 이 책은 7권시리즈인 것 같은데 5년단위로 끊어서 진행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역사이고 굴곡진 역사로 쓸 거리는 많을 수도 있겠지만 너무 길게 잡은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온지 좀 시간이 되긴 했지만 기대를 갖고 1권을 잡았다.

 역시나 책 내용이 쉽지가 않았다.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여러가지 일을 하는데 제법 역사에 관심좀 있다고 자부해온 나로써도 대부분의 인물들이 익숙치가 않았다. 한때 공무원공부좀 했었던 동생이 책을 살펴보면서 하는 말이 역사교재로 삼아도 되겠다고 할 정도였다.

 재밌는 부분은 종교 관련 부분이었다. 구한말 우리의 기존 종교들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일제의 적극적 포섭때문이었다. 우선 가장 큰 일제의 근심거리는 불교와 유교였다. 워낙 오래되었고 세가 강해 민족세력으로 집결시 무시못할 수준이었기 때문. 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포섭된다. 불교는 우선 사찰을 정비하고 큰 사찰의 주지를 일제가 자격을 허가해주는 형식을 구사했는데 대신 주지에게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에 대부분의 주지 후보자들은 일제에 충성하며 쉽게 포섭되었다.

 유교는 더욱 어이가 없다. 형식적으로나마 유교를 우대했으며 실권이 없는 자문기구인 중추원이 많은 사람들을 넣었기 때문이다. 겨우 이것에 낚여 많은 유학자들이 일제에 그대로 포섭디었다. 물론 이미 쓸만한 유학자들이 이 시점에서는 거의 항일운동이나 자결등으로 희생되었단 점도 컸다.

 반면 동학이 완전히 와해된 시점에서 나철의 대종교가 민족저항운동에서 역할을 하였고,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기독교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개화사상에 눈뜬 이들중 기독교를 자연스레 신봉하게 된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있었으며 아무리 서슬이 퍼런 일제라도 서양 선교사들의 비호를 받는 기독교 세력은 쉽사리 건드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대한 부분도 좀 나온다. 이승만은 사실 당시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 헛바람을 주었던 미국 대통령 윌슨을 어쩌다 접견하게 되어 상당한 후광을 업는다. 그는 상당히 빠른 기간에 석사와 박사를 마치는데 여기에 외교적이유를 댓고 그것을 허락한 프린스턴에서 말도 안되는 기간에 박사를 거저 얻는다. (그리고 평생 이박사로 칭송되니 웃길 일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하와이로 향한 후의 행보인데 이승만은 당시 하와이에서 민족지도자로 명성을 얻던 박용만의 도움으로 하와이에 정착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점차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는데 박용만의 일궈논 하와이 한인 사회를 가로채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만의 한인 단체를 만들고 어용들로 그 밑을 채웠으며 놀랍게도 법인이 되야할 단체를 사익화하려는 시도를 수차례한다. 개인적 친분으로 이를 묵인하던 박용만과도 부딪히게 되며 결국 하와이 사회는 상당부분 이승만의 차지가 된다.

 독립운동을 개인영달의 도구로 사용한 셈인데 이후 이루어질 그의 행보를 잘 보여줄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실력양성에서 이젠 무장투쟁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한 독립운동을 어이없게 보았는데 그가 보기에 강대한 일본을 상대로 해외에서 보잘것 없는 세력으로 큰 돈을 써가며 무력을 키우는 것보단 외교적 압박이 더욱 효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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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5-08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승만은 ‘대통령’이란 직함을 유독 좋아했죠
 
[eBook] 사피엔스의 식탁 : 인류가 선택한 9가지 식품 - 인류가 선택한 9가지 식품
문갑순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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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특질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특질은 바로 먹을거리다. 책은 인간의 먹을거리 변화가 얼마나 진화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고, 사회문화적으로도 인간 역사에 많은 작용을 하였으며 향후 환경에도 미칠 영향을 지적한다. 책은 그렇게 크게 3가지 부분으로 나눌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과학책 같기도 사회문화역사책인 것 같기도 환경책인것 같기도 하다.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역시 농경사회 더불어 인간이 선택한 9가지 종류의 먹거리인데 대충 예상한 것도 있었고, 전혀 의외의 것들도 있었다. 책이 선정한 9가지는 우선 [밀, 쌀, 옥수수], 감자, 콩, 소금, 향신료,  설탕, 생선, [커피, 차, 카카오], 바나나이다. 하나씩 책을 따라가며 기존에 먹기만 하던 식품들의 유래와 관련 지식, 세계사적 영향력에 대해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1. 밀, 쌀, 옥수수

 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경작하는 종으로 전분외에 단백질이 포함되어 물과 반죽하면 글루텐이란 망상조직을 생겨난다. 이걸 통해 우린 밀을 빵이나 국수로 가공해서 먹는다. 밀은 재배가 까다로운 편인데 토양에 질소량이 풍부하고 강수량이 적으며 한랭한 기후에 잘 자란다. 그리고 이러한 기후는 바로 지중해성 기후대다.

 하지만 밀은 파종 대비 수확량이 고작 3배에 불과하며 3대작물중 열량도 가장 낮아 인구부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유럽지역은 과거부터 가축에 의존하는 경향이 높았으며 낮은 인구밀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20세기들어 새로운 육종법의 개발로 수확량이 크게 늘어난다.

 쌀은 인디카와 자포니카의 두 종이 있으며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작물중 최고다. 거기에 쌀은 기후에 따라 2모작이나 3모작이 가능해 밀과 비교한다면 인구부양력이 무려 3배에 달한다. 쌀의 주산지인 아시아가 땅의 넓이도 있지만 지금까지도 서구와 비교해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이유다. 쌀 역시 품종개발로 키가 작고 수확량이 많은 품종이 개발되었으며 우리나라의 통일벼도 그중 하나이다. 한때 통일벼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세계 최대에 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품종은 맛이 떨어져 수확량이 충분한 지금에는 사라지고 말았다.

 옥수수는 파종 대비 수확량이 무려 80배에 달하며 토질이 안좋아도 잘 자라는 품종이다. 미국에서 옥수수에 주목한 이래로 하이브리드 옥수수가 개발되어 잡종 1세대의 경우 멘델의 유전법칙에 따라 장점만 나타나 수확량이 크게 증대되었다. 하지만 잡종 2세대는 열성형질이 드러나 수확량이 떨어져 잡종 1세대를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에 종자를 의존해야하는 단점이 드러난다.

 과거 아즈텍인들은 자신들을 옥수수 인간이라 칭할 정도로 옥수수 사랑이 대단했지만 지금은 전세계 사람들이 스스로를 옥수수 인간으로 칭해야 할 정도로 전세계인들은 옥수수에 의존하고 있다. 수퍼마켓에 분포한 4만 5천여 제품중 무려 25%가 옥수수를 원료로 하고 있을 정도다. 거기에 고기 수요 급증으로 인한 대량 비육을 위해 옥수수는 사료로 사용되고 있으며 옥수수 전분은 소시지나 과자 식품 전반에 사용된다. 가격이 싸고 잘 변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과거 설탕을 사용하던 당류도 이성화당의 개발로 고과당 옥수수 시럽으로 대체된지 오래다.

 

2. 감자

감자는 재배적응력이 높고 옥수수 정도의 파종 대비 수확량을 자랑한다. 거기에 조리가 쉽고, 재배 방법이 간편하며 영양성분이 우수하고 한랭한 기후에서도 잘 자란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신대륙에서 도입된 감자는 좀처럼 유럽에서 자리잡지 못했다.

 이유는 종교 때문인데 당시 기독교의 영향으로 유럽인들은 신과 가까운 하늘의 음식인 새고기가 과일을 중시하고 땅에서 자라는 것들은 악마의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감자를 가지과 식물로 오인하여 마녀나 미신과 관련한 음식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감자에 주목한 유럽국가는 독일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제는 감자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식용조치하였다. 이에 프랑스가, 그리고 다른 나라로 감자는 전파된다. 가장 극적인 나라는 아일랜드였는데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는 식량수탈로 먹을 것이 없었다. 영국인이 남긴건 유제품류 뿐이었는데 당시 기술로 영국으로 가기전 모두 썩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일랜드에 감자와유제품의 조합은 나쁘지 않았다.

 감자덕에 아일랜드의 인구는 820만까지 늘었으나 감자마름병으로 100만 이상의 아사가 일어났으며 인구는 440만까지 격감한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여러 음식이 퍼지는 계기가 되는데 감자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도시노동자에게 감자만한 식품이 없었고, 기름이 저렴해지며 감자를 튀겨먹는 풍습이 자리한다. 기존의 생선튀김과 어울려 피쉬앤 칩스가 탄생한 계기다.

 미국의 경우 유럽의 편견과 다르게 감자가 빨리 자리잡았으며 감자는 노동력을 적게 요구해 땅은 넓고 인구는 적은 미국에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미국은 감자를 품종개량해 러셀버뱅크종을 개발하는데 이는 분절감자로 튀김에 매우 적합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감자가 강원도 화전민들의 대체식량으로 들어왔으며 잘 부서지지 않는 점질감자인 수미감자가 다수를 차지한다.

 감자는 이외에도 당면의 재료, 비타민c의 원료, 술주정등 여전히 다방면에서 사랑받는다.

 

3. 콩

농경을 시작한 문화권은 곡류와 더불어 콩류를 같이 재배한다. 이는 콩류가 곡류의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하기 때문인데 콩류는 단백질이 무려 20%나 분포하고 대두의 경우 40%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는 콩의 뿌리에 자리한 뿌리혹 박테리아 덕에 질소고정으로 콩류가 단백질 형성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콩은 지방 역시 20%나 갖고 있어 콩기름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나머지 찌꺼기는 단백질이 풍부한 사료로 적합하다.

 콩은 한민족과 관련이 깊은데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 북부와 만주지역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각종문헌도 콩을 처음으로 활용하여 발효시킨 민족이 한민족임을 말해준다. 콩은 영양가가 매우 높지만 단백질 소화저하 혈청용해, 소화불량등의 부작용도 있는데 발효는 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또한 콩을 발효하면 콩단백질이 분해되어 글루탐산을 형성해 매력적인 갈색과 풍미가 더해져 음식맛을 드높인다.

 콩은 중국남부에서 동남아시아로 전해졌는데 이들은 콩간장에 캐러맬화한 야자당과 향신료 혹은 어장을 첨가하여 걸쭉하게 만들었고 이를 케첩이라 불렀다. 이것이 유럽에 전해져 유럽인들이 자신들이 활용가능한 버섯이나 토마토를 활용하여 나름의 소스를 만들어 토마토 케첩이 된 것이다.

 농업을 산업화하는데 천부적인 미국은 콩을 주목했다. 대규모 콩 가공공장을 설립하는데 이들은 콩 전체를 섭최하는 아시아와는 달리 콩에서 기름을 생산하고 잔류물을 사료로 사용하는 공정을 택했다. 또한 잡초가 많이 자라는 콩밭의 제초제로 라운드 업을 개발했고, 라운드 업에 견디는 유전자 조작 콩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4. 소금

수렵시절 인류는 육식을 통해 소금을 자연히 얻었지만 농경시 시작되며 소금의 확보는 필수적이 되었다. 실제로 세계 문명의 산지 근처에는 강과 더불어 소금산지가 있음을 이를 잘 증명한다.

나트륨은 고등동물의 세포 외액에 존재하고 칼륨이 내액에 존재한다. 이들간의 농도차로 신경세포의 전기신호가 전달되며 영양소흡수에도 관여한다. 나트륨이 부족하면 신경전달은 물론 영양전달이 안되고 근육을 움직일 수 없단 의미다.

 반면 움직임이 없는 식물을 나트륨이 필요없어 그 함량이 낮다. 인간이 소금을 찾아 헤메게 된 이유다. 과거 로마에서는 병사에게 급료로 소금을 지급했는데 소금을 뜻하는 살에서 샐러리란 용어가 파생한다.

 소금은 매우 귀했기에 국가의 번영과 관련했다. 5세기 아틸라의 훈족의 사육을 피해 베네치아에 지라잡은 이탈리아 인들은 도시의 소금을 이용해 번영한다. 지중해 연안은 겉보기에만 좋은 절벽이 가득해 소금생산에 매우 불리했다. 베네치아는 소금을 통한 무역으로 1000년가까이 번영한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국가차원에서 소금을 전매한다. 5세기까진 소금전매가 국가수입의 무려 80-90%였고, 청대에는 25%였다. 중국이 소금전매제를 폐지한건 최근인 2014년에 이르러서였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소금 수요는 커졌는데 중세 유럽의 주요 식량이 청어와 대구가 되면서 염장을 위해 소금수요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화학이 발달하며 소금은 그 활용도가 더욱 커졌지만 통조림의 등장과 냉동 냉장 기술의 발달, 건강에 대한 염려로 그 수요가 크게 줄어들게 된다.

 

5. 생선

인류는 수렵채집기부터 육식을 시작했는데 가장 안전한 육식은 아무래도 생선이었다. 인간의 뇌에는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불포화지방산이 많은데 이는 인간이 오래도록 해산물을 섭취한 증거로 받아들여지기도한다.

 유럽이 기독교화되자 교황청은 교인들에게 엄격한 금육 금식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예수의 고행과 관련한다. 금육기간은 연간 무려 251일일까지 늘어났는데 예외로 생선은 허용되었다. 물고기는 예수의 이름과 비슷하고 성경에 여러차례 등장하는등 긍정적 이미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생선 수요에 비해 잡는 기술은 떨어져 초기에는 강과 양식업이 중시되었다. 여러 물고기를 양식했는데 특히 물밖에서 무려 6일이나 생존하는 뱀장어가 중시되었다. 하지만 결국 늘어나는 수요로 바다를 향하게 된 유럽인들은 청어를 잡기 시작한다. 청어는 떼로 몰려다녀 그야말로 대박 생선이었다.

 하지만 청어는 기름기가 많아 쉽게 부패하여 소금이 많이 필요했는데 네덜란드에서는 이 청어를 빠르게 가공하는 방법이 개발되어 네덜란드는 청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얻고 이를 통해 금융업, 목재업 분야로 진출하며 스페인에게 청어무역이 봉쇄당하자 향후 향신료를 찾아 눈을 돌린다.

 청어 이후 유럽인이 주목한 생선은 대구다. 크기가 무려 1m에 달하고 무게도 100kg에 달하여 식량가치가 높은 대구는 흰살생선에 단백질이 많아 영양가가 높았다. 거기에 유순하여 상대적으로 잡기가 쉬웠는데 이 큰 대구에 먼저 도전한 것은 바이킹이었다. 이들은 북유럽과 그린란드 아이슬란드에 대구 가공공장을 세웠다.

 다음은 스페인의 바스크인으로 천일제염이 많은 자신들의 지역 특성을 이용해 오래도록 대구어업으로 번영한다. 바스키인의 어장은 오랜 비밀이었는데 영국인들이 이 곳이 뉴펀들랜드 지역임을 알아내고 이로 인해 이 지역으로의 이주가 시작된다. 미국에는 대구어장을 통해 보스턴이 설립되고 뉴잉글랜드 인들은 좋은 대구는 유럽으로 판매하고 질이 나쁜 대구는 카리브해의 노예용으로 판매한다. 대구 판매로 카리브해에서 당밀을 수입하고 이를 통해 노예무역을 하는 삼각무역이 이루어져 번영하나 미국의 독립후 노예제가 폐지되어 수요가 급감하자 북미 대구어업을 큰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들은 거대하게 성장하는 미국 내수시장의 성장으로 산업자본가화하는데 성공한다.

 

6.향신료

인류는 고귀한 향으로 인해 향신료를 신에게 봉헌물로 사용하곤 했다. 또다른 용도는 병의 치료였으며 다른 하나는 음식의 부패를 막고 산미를 증가시키는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유럽은 향신료의 존재를 알게되고 대량으로 유립하게 된다. 당시 유럽인은 양질의 고기는 귀족이 하품을 일반 농민이 소비하였는데 일반 농민은 대개 훈제나 염장고기를 먹고, 부패가 심해 이를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향신료는 부패취를 감추고 맛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향신료는 가격이 매우 비쌌으며 소금 무역으로 자본을 축척한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대상으로 향신료 무역을 한다. 베네치아가 공급한 향신료는 유럽 전체 공급량의 80%에 달했다.

 반면 포르투갈은 직접 향신료 산지를 노렸다. 이들은 다우전투의 승리로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정향과 육두구의 산지를 발견하고 실론섬의 계피도 차지한다. 포르투갈은 이로 번영하고 베네치아는 쇠퇴하나 곧 네덜란드가 등장한다. 이들은 포르투갈의 산지를 하나씩 빼았았다. 또한 포르투갈과는 달리 유통루트 차단을 넘어선 생산지 차단 관리에 들어간다. 이는플랜테이션 농업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고 세월이 훌러 다른 나라에 향신료가 유출되기 시작하며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져 향신료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과학의 발달로 약리효과도 사라지고 음식 본연의 맛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합성향신료도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7. 설탕

단맛에 대한 인간의 갈망한 상당한데 설탕이 없던 과거 북아프리카와 중동은 대추야자, 아시아에서는 엿기름, 그리스는 포도와 무화과가 감미료 역할을 해왔다.

 설탕은 사탕수수나 사탕무에 다량 존재하며 결정화가 쉽고 맛이 상쾌하다. 설탕은 7세기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확대함에 따라 지중해 전역으로 설탕정제술과 사탕수수가 퍼져나간다. 설탕 제조 방법은 강한 노동을 요구해 초기부터 노예노동이 시작되었다.

 사탕수수는 베어지자마자 옮겨져 수액의 추출과 가열이 시작되었는데 수액이 마르면 설탕의 수확과 결정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사탕수수는 크고 무거워 옮기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부를 강탈하고 노예공급을 시작하였는데 베냉지역에서 노예를 공급하다가 고갈되자 콩고지역으로 거기도 고갈되자 앙골라와 아프리카 전역으로 이루어지는 식이었다. 설탕재배는 콜럼버스에 의해 카리브해로 도입되었고, 지력 소모가 심해 섬을 자갈밭화하였다. 처음에는 자메이카, 다음은 아이티, 다음은 쿠바로 이동한다.

 유럽지역에서는 차마시는 문화가 퍼져나가며 설탕소비량이 급증한다. 홍차, 커피, 카카오등에 설탕이 사용되었으며 18세기 후반 영국이 서인도제도에서 벌어들인 설탕 관련 수입은 다른나라에서의 교역수입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처럼 유럽 각국에서는 설탕자본을 통해 거대자본이 등장하고 이들이 산업자본으로 변모하였다.

 이를 위해 18-19세기 동안 무려 1000만 가까운 아프리카 노예가 수입되었고, 이들은 이동과정에서 지그재그로 누워 서로의 토사와 용변, 땀으로 뒤범벅되어 죽어나갔다. 이동과정에서 20%가 사망했다. 설탕플랜테이션은 매우 가혹하여 3년이내에 50%의 노예가 사망했다. 흡착롤러에 손과 온몸이 들어가기 일쑤여서 흡착롤러 곁엔 항상 도끼가 있었다. 이들 노예들은 영굯산 면직물과 염장대구 옥수수로 연명했다.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노예해방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아이티가 프랑스러부터 독립을 시도한다. 성공하나 프랑스는 아이티에 대량의 배상을 요구했고, 프랑스와의 무역금지,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의 무역 봉쇄로 아이티를 탄생과 더불어 최빈국으로 전락한다. 미국은 노예제가 폐지되자 루이지애나의 설탕농업을 하와이로 이식하는데 노동력이 부족하자 쿨리라고 불리는 인도계약노동자를 도입한다.

 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불만을 제기하자 다음은 중국, 그리고 다음은 일본, 그리고 다음은 한국, 포르투갈, 필리핀 노동자순이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의 전쟁으로 대륙이 봉쇄되자 사탕무에서 설탕을 정제하는 방법이 개발된다. 이를 통해 카리브해의 설탕농업은 붕괴하고 향후 아스파탐과 이성화당등의 개발로 설탕 농업은 사양화한다.

 

8. 차, 커피, 카카오

 신대륙에 도착하기전 전 유럽은 그야말로 술에 취해 살았다. 16세기 스웨덴인은 지금의 40배의 맥주를 마셨고, 영국은 1인당 하루 무려 3리터의 맥주를 마셨다. 이는 당시 염장음식이 많아 갈증이 심했고, 깨끗한 식수를 구하기 어려웠으며 힘든 현실의 도피처 역할을 술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대륙 도착이후 17세기 부터 커피와 차, 코코아가 이를 대체하기 시작한다. 커피는 예멘지역에서 재배되며 오스만 제국이 이를 통제했다. 초기엔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 악마의 음료로 배척했으나 점차 퍼져나가며 빈에서는 비엔나 커피가 영국에서는 커피하우스가 등장한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정치 비판과 학술의 장소가 되었으며 여기서 증권사나 은행, 보험사등의 근대적 기관이 탄생하기도 한다.

 차는 육로와 해로 양자로 퍼졌는데 육로에서는 차로 발음되고 해양에서는 푸젠어로 티로 알려진다. 영국은 쌀쌀한 날씨로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은 차가 인기가 좋았다. 중국과의 차무역에서 적자가 누적되자 영국은 인도에 심은 아편으로 이를 상쇄하였고, 이는 아편전쟁으로 이어진다.

 영국은 꾸준히 인도에 차를 이식하여 아삼지방에서 차나무를 재배하나 맛이 얼싸해 인기가 없었다. 그러다 중국의 차산지와 유사한 히말라야 인근의 다르즐링에서 차나무 재배에 성공하여 중국의 차 독점이 깨어진다.

 초기 미국인은 영국인들의 차습관을 모방하나 영국과의 갈등이 심해지고 보스턴 차사건으로 이어지자 홍차를 버리고 커피를 선택한다. 아메리카노의 시작이다.

 카카오는 다 익은 열매를 발효시키면 갈색으로 변하는데 이것을 건조한게 카카오 콩이고 볶아서 분말로 만든게 카카오페이스트며 여기서 카카오 버터를 제거한게 카카오 음료이고 카카오 버터와 설탕 우유를 첨가해 굳힌게 초콜릿이다.

 산업혁명시기 코코아 음료가 영국에서 인기가 드높았는데 카카오버터로 인해 맛이 기름지고 껄끄러웠다. 네덜란드인 콘라드 반 호템이 카카오 버터를 제거한 탈지카카오를 개발해 인기가 좋았으며 브리스틀의 프라이가 카카오버터를 곧힌 판형 초콜릿을 개발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스위스의 약제사 네슬레가 개발한 밀크초콜롯이 인가기 좋았고, 미국의 허시는 자신만의 밀크 초콜릿을 미국에서 개발한다. 그는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과 허쉬 키세스를 개발한다. 포레스트 마스는 아버지와 더불어 초코바 밀키웨이를 개발했으며 스니커즈를 만든다. 후에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 허쉬의 윌레엄머리와 합작하여 만든 초콜릿이 M&M이다.

 카카오는 비극을 낳았는데 카카오 주산지인 아프리카 서부 지역의 나라가 독립하여 가나가 된다. 가나의 대통령은 아프리카 카카오 카르텔을 구성하여 이익을 챙기고자 했으나 허쉬와 다른 기업의 사재기에 밀려 실패한다. 이들의 가격 후려치기에 원주민들은 열대우림을 파괴하여 카카오 경작지를 늘려나가나 가뭄과 화재로 가나의 카카오는 붕괴한다. 카카오는 이웃나라인 코트디부아르로 이동하는데 역시 원가후려치기에 이나라는 아동노예무역으로 원가절감에 대응한다.

 최근 이런 사태를 유발한 이 기업들에 철퇴가 내려지고 자정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9.바나나

마지막은 의외로 바나나다. 바나나는 우리에겐 과일이나 동아프리카와 열대지역 주민 4억명에겐 쌀과 같은 주식이다. 바나나는 보존성이 없어 냉장기술이나 포장법등 식품 유통기술의 발달에 기여한다.

 미국의 프레스턴이 최초로 바나나 기업인 UFC를 만들고 이것이 지금의 치키타이며 바카로는 Dole을 설립한다. 바나나는 주로 중남미에서 생산되었는데 이들 기업이 이를 독점하고 1920년대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적은 대가에 분개해 분쟁이 일어난다. 미국 정부는 이들 기업과 더불어 노동자 파업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1940-1950년대 콜롬비아에서만 무려 18만의 농민이 희생된다.

 과테말라에서는 ufc에 대항하여 아르벤스 대통령이 당선되나 미국과 이들 기업에 의해서 추방된다. 한편 이런 행태에 대한 세계적 비난과 미국내에서의 비판적 여론으로 미국 법무부는 태도를 바꾸어 이들 기업을 독점법으로 제재한다. 그 결과 UFC는 중남미에서는 철도사용권을 그리고 미국내에서는 수퍼 독점권을 잃는다. 그 사이 미국인의 입맛도 다변화하여 바나나의 수요가 급감해 이들 기업은 사양세를걷는다.

 바나나는 씨앗이 없는 품종으로 그 유전형질이 모두같다. 과거 그로미셸종이 사용되었으나 병으로 절멸하고 현재는 개번디시 종이 주 품종이다. 이 품종 역시 파나마 병에 취약하여 아직 병이 진행되고 있어 위험한 상태다.

 바나나에 의존하는 4억명의 사람들에게 큰 위기인 셈이다. 거기에 바나나는 아기에겐 이유식 그리고 이가 약한 노인도 먹을 수 있는 영양가 높은 과일이어서 고령화 시대에 적합한 작물이다. 우리가 바나나에 신경을 써야하는 또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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