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구범진 지음 / 까치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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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광대한 인구와 영토를 자랑하는 중화왕조와 강한 군사력을 갖춘 기병 위주의 북방 유목민족을 지척에 두고도 멸망하지 않고 오래도록 나라를 유지해왔다. 이는 산과 강, 삼면이 바다라는 자연방어책(하지만 인도와 중국사이의 히말라야처럼 절대 못 넘을 만한게 못된다)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력한 국방력때문이었다. 고구려는 수당의 침입을 막아냈고, 고려는 요와 금, 원의 공격을 차례로 막아냈다. 그리고 조선은 임진왜란에서 수십년간 전쟁으로 단련되고 조총이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왜를 막아내었다.

 물론 참담한 패배가 없던 건 아니다. 고조선은 1년의 농성끝에 한에 왕검성이 점령되어 멸망하였고, 백제와 고구려는 결국 당과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하지만 한반도 혹은 만주에 기반한 우리나라 왕조를 멸망시키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침략국가는 수년 혹은 수십년 간의 인적 물적 경제적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한국답지 않은 어이없는 패배가 있으니 바로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은 불과 2달만에 끝난 전쟁이며 왕이 포위되어 굴욕적 항복을 하고 수십만의 백성이 노예로 끌려가는 대사건이었다. 한국의 역사에 이런 굴욕적 패배가 어디 또 있을까. 그런 병자호란의 패배를 침략자의 우두머리인 청 태종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 이 책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이다. 


1. 전쟁 발발과 청의 전력

 정묘호란 후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조선 역시 명과의 사대가 있었지만 후금의 군사력을 당해낼수 없었기에 상당히 맹약을 지키기 위해 조심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다. 조선조정에서는 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침략을 조심하고 방비를 강화하라는 교서를 변방에 내렸는데 이것이 그만 청의 사신단에 넘어가고 만것이다. 청은 이를 절화교서로 규정하고 조선이 맹약을 어긴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홍타이지의 칭제 사건이다. 

 홍타이지는 조선정벌(정묘호란), 자하르 정복, 그리고 과거 원황제의 옥새를 손에 넣고 이 업적을 바탕으로 칭제를 한다. 하지만 당시 청에 와있던 조선의 사신단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홍타이지의 칭제행사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명의 최대 조공국인 조선의 이런 반항은 홍타이지 입장에선 자신의 칭제의 정당성을 상당히 부인하는 사건이었다.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 의지는 이로써 확고해지게 된다. 

 혹자들은 조선 침략을 명을 정벌하기 이전 후방을 정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과 명, 청의 지정학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그럴만 하다. 하지만 정묘호란 이후, 아직 왜란의 상처에서 회복하지 못한 조선은 이미 청의 후방을 공격할 능력과 의도가 없음을 청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은 명공격을 위한 후방 정리가 아닌 그 자체가 목표였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홍타이지는 조선 공격전 명의 후방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북경 일대에 대대적 침공을 가해 약탈을 감행한다. 

 병자호란이 조선자체가 목적이었다는 또 다른 근거는 친정이다. 고대로부터 어느 왕조든 친정은 매우 큰 부담이 따르는 사건이다. 황제나 왕이 전사하거나 적의 포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홍타이지가 적의 내지로 직접 들어가 친정하는 것은 조선정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조선정벌에 상당한 우선순위를 두었다고 볼수 있는 대목이다.

 마지막은 청이 동원한 전력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은 절대 큰 나라가 아니었다. 국방력을 막강했을 지언정 인구는 130-240만정도로 명에 비하면 인구수나 경제력면에서 1%정도밖에 되지 않는 나라였다. 이중 청의 군대인 팔기만주의 남자 총인구수는 34만정도였다. 게다가 이중 21만은 자유민이 아닌 한인 출신의 노복으로 그들은 군역의 의무가 없었다. 결국 징병 가능 청의 총 인구수는 12만정도에 불과했다. 조선은 절대적 패배를 강조하기 위해 청의 군사가 30만이거나 12만 8천정도로 이야기하지만 이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어쨌든 홍타이지는 그럼에도 조선 정벌에 무려 3만4천의 병력을 동원한다. 팔기만주와 팔기몽고가 1만 우전초하 1만, 명에서 항복한 천우, 천조병 2천, 외몽고병사 1만2천이었다. 총력전이었던 셈이다. 


2. 조선의 방어전략과 청의 공격전략

조선은 정묘호란에서 여진인의 강력한 군사력을 맛보았다. 1619년 심하천투를 통해 조선은 적과 평지전에서 조우하면 승산이 전혀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낮은 평지성의 공성 능력 역시 적은 매우 뛰어났다. 때문에 조선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적 침공시 기병이 점령이 어려운 산성으로의 입보였다. 조선의 방어선은 3중으로 압록강과 청천강, 황해도 방어선이었다.

 압록강은 너무 길기에 모든 지역을 방어할 수 없어 침공로로 예측되는 의주와 창성지역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전쟁발발시 이 지역 군사들은 백마산성과 당아산성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청천강 방어선은 안주와 영변으로 안주는 적이 의주로 침공할시, 영변은 적이 창성으로 침공할시 방어기점이 되었다. 안주성에는 평안병사 유림을, 영변의 철옹산성에는 부원수 신경원에세 수천의 정예병을 주어 지키게 하였다. 양지역은 서로 기각지세로 서로 위험할 경우 응원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마지막은 황해도 방어선으로 황주와 평산일대였다. 황주는 홍산 근처의 정방산성에 도원수 김자점에 평산지역은 태백산성이었다. 

 이런 조선의 방어전략은 정묘년에서의 경험에 바탕을 둔것으로 정묘호란시 청은 주요 평지성들을 손쉽게 점령하였고 요충지에서 만난 조선군을 쉽게 격파하였다. 때문에 산성으로 피신하여 요충지가 점령당하지 않고 시간을 끌어 적을 불리하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조정은 상황에 따라 강화도로 피난하는게 전략의 골자였다.

 하지만 청의 공격전략은 이런 조선의 전략과 확연히 달랐다. 청은 정묘년과는 다르게 조선의 항복이 목적이었으므로 요충지의 점령에는 관심이 없었다.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도성을 포위해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제 일 목적이었다. 또한 침공로 역시 한군데가 아니라 두곳이었다. 청은 의주와 창성 두지역으로 모두 침공한다. 하지만 의주로 침공한 부대는 빠르게 전격전을 감행한 반면 창성으로 침공한 부대는 요충지를 점령하면서 천천히 진군했다. 빠른 전격적은 보급로의 문제와 고립의 문제가 있으므로 양자를 병행해 약점을 보완하려던게 아닌게 생각된다. 하여튼 이런 청의 방식은 조선에 상당한 혼란을 일으킨다. 

 홍타이지는 선발대 300명을 상인으로 변장시켜 진군시켰는데 이들은 한양도성에 불과 침공 후 4일만에 도달한다. 이런 빠른 진군에 조선 조정은 겁을 집어먹고 강화도로 파천하지 못한다. 강화도 파천에는 3-4일의 말미가 필요한데 이런 시간을 방어선들이 벌어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처음 도달한 선발대는 소규모였으므로 충분히 강화도로 파천이 가능했지만 청의 전광석화 같은 진군으로 혼란스럽게 도달하는 장계에 정신이 빠진 조선 조정은 그런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때문에 인조는 부랴부랴 남한 산성으로 입성한다. 물론 청의 포위망이 완성되기전 남한산성에 갇힐 것을 우려해 성을 나오려 하였지만 날씨가 이를 돕지 않았다. 이 처럼 전방 조선군의 산성입보는 이처럼 청의 전격전에 큰 도움이 되고 말았다. 

 계절도 문제였다. 만주에서 한양까지는 큰 여러개의 강이 있다. 압록강, 청천강, 예성강이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전격적은 위해 겨울까지 침공을 기다린다. 1월이 되어 강이 모두 얼자 청의 기병은 빠른 속도로 도하가 가능했다. 물론 1월이라고 강이 반드시 어는 것은 아니었지만 17세기는 전세계적인 소빙기로 무척 추웠고, 진군시기에 유독 추워 날씨가 청을 도왔다.  


3. 무너지는 조선군

물론 남한산에 갇혔어도 희망은 있었다. 강화도로 두 대군이 종묘사직을 들고 피신하였으며 청의 전격적으로 전장의 방어군이 그래도 온존했다. 또한 남4도의 근왕병 역시 기대할만 했다. 병자년 당시 조선은 국력이 피폐했지만 전란의 기운 속에 꾸준한 준비로 대충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3만 4천 전체가 최정예병인 청군과 단순하 숫자비교는 무리지만 3배에 달하는 순이었다. 그리고 남한산성 자체의 병력도 1만2천이었다. 남한산을 포위한 청군을 오히려 안팎으로 협공할수도 있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는 희망일 뿐이었다. 점령하며 창성으로 침공해온 청의 동로군은 당아산성을 함락하고 영변의 철옹산성도 공격한다. 그리고 이들은 영변에서 부원수 신경원과 김자점을 토산에서 격파한다. 이에 평안도의 홍명구와 유림도 남한산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한다. 하지만 청의 요격을 피해 동으로 크게 우회하여 진군이 늦어졌고 강원도 김화에서 오히려 북상하던 외번 몽고부대와 격돌하여 궤멸당한다. 

 남은 것은 남부 4도의 근왕병뿐이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충청도가 먼저 움직였다. 충청 감사 정세규는 용인의 험천에 충청병사 이의배는 안성의 죽전 산성에 진을 친다. 이들은 청의 기세가 대단하여 단독으로 붙기보다는 전라와 경상의 병사와 합류하여 대군을 이룰 요량이었다. 하지만 청군은 험천의 군을 격파하고 이를 구원하던 이의배의 군사도 격파한다. 그리고 원정길이 이끌던 강원의 군사다 검단산에서 격파한다. 

 1만에 달하던 경상의 군사가 전장에 도착하여 쌍령에 진을 쳤다. 하지만 청군은 고작 300의 기병으로 이들을 격퇴한다. 사상자만 3천여명에 달할정도로 참혹한 패배였다. 마지막은 전라도의 군사였다. 이들은 가장 먼 거리였던 만큼 전란후 13일만에 광교산에 북상한다. 광교산의 김순룡은 청군을 상대로 모처럼 승리를 거둔다. 청은 지휘관 양구리가 전사할 정도였으며 큰 피해를 입었으나 조선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화살과 양식 부족으로 전라군은 수원으로 피신하고 오히려 청에게 군마를 1140필이나 노획당하고 만다. 안타까운 대목이다. 

 이처럼 하4도와 황해, 평안도의 군사가 궤멸당하자 남은 것은 아직 남진하지 않은 함경도의 군사였다. 이들은 미원에 심기원과 합류하여 무려 2만 3천의 병력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쟁의 마지막까지 참전하지 않는다 청군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차례로 궤멸한 다른 군을 보았기 때문이다. 


4. 강화도 함락

청군은 1637년 2월 16일 강화도를 공략한다. 광교산 전투후 16일이 지나서였다. 강화도는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보여준 것처럼 상당히 넓은 면적의 해도이면서도 험준한 해안 지형과 넓고 깊은 수렁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거기에 임진년에 보여준 것처럼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청은 수군의 개념이 아예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이런 강화도가 하루만에 함락된다. 왜였을까?

 조선의 강화도 방어전략은 해상에서의 저지였다. 강화도와 경기도 사이에는 염하수로가 흐른다. 이 수로는 조류가 심하고 수심이 얕다. 때문에 판옥선의 진군 및 주둔이 어려웠다. 또한 당시는 겨울로 강에 얼음이 얼어 있어 배로의 도하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조선군은 염하수로의 북쪽입구인 연미정과 남쪽 입구인 광성진에만 병력을 배치했다. 특히 북쪽으로의 상류이 더 어려웠기에 남쪽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당시 강화도엔 1600의 병력이 있었는데 600은 이미 다른 지역의 구원을 위해 나간 상태였다. 즉, 상륙을 방어할만한 혹은 상륙한 적을 상대할 만한 병력이 거의 없었다닌 이야기다. 

 때문에 강화도는 청의 기습 상륙에 하루만에 무너진다. 강화도를 공격한 청의 병력은 3만으로 알려져있지만 이 병력은 청의 전군이다. 청은 강화도 공략에 44척의 배를 동원했는데 이를 감안하면 그들의 병력은 3200정도로 추정된다. 청은 강화도 지형과 조수의 이치를 잘 깨닫고 갑곶진으로 기습 상륙했는데 여기엔 향화호인이 한 몫은 한것으로 추정된다. 향화호인은 귀화한 여진인으로 조선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해안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정묘년부터 조선인들은 이들의 배신을 의심하였는데 병자년에 이것이 현실화한다. 향화호인들의 정보로 인해 청은 강화도의 약점을 파고 들었고 갑곶진으로 상륙한다. 반면 조수의 역흐름에 걸린 조선 함대는 제대로 진군하지 못해 이를 막지 못한다.


5.갑작스런 항복 권유와 신속한 철군

 이처럼 조선의 전황이 절망적이었음에도 청의 항복 조건은 매우 후했다. 인조의 출성과 척화신 2-3명의 박송이었다. 하지만 이 후한 조건도 조선에겐 어려웠다. 대부분의 신하가 척화신이라 2-3명의 희생양을 마련하기도 어려웠고 오랑캐의 말을 믿고 출성했다 왕이 낭패를 볼수 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중국 송의 휘종과 흠종은 금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죽었과 고구려의 보장왕과 백제의 의자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황이 좋지 못하고 남한산이 완전 포위되어 바깥으로부터의 소식도 끊기자 조선은 점차 저자세로 변해간다. 하지만 청은 인조의 출성을 끝까지 고집하며 오히려 회담을 거부한다. 그러다 갑작스레 청이 빠른 화의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조선조정은 근왕군의 승리나 명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책의 저자는 홍타이지의 이런 태세전환이 다름 아닌 천연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은 절멸된 병이지만 천연두는 18세기 매년 40만의 희생자를 내던 무서운 병이었다. 천연두는 남부지역의 병으로 만리장성 이북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병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누르하치에서 홍타이지시절에 이르기까지 만주에는 만, 한, 몽 연합 거주가 나타난다. 특히 한족이 문제였는데 이들과 함께 천연두도 자연히 따라와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청은 천연두를 앓고 살아남은 숙신과 아직 감염되지 않은 생신을 구분하고 명 내지를 공략할때는 숙신들을 주로 투입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마찬가지 였는데 당시 서울엔 이미 천연두가 창궐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전격전을 위해 강이 얼어붙은 겨울을 침공시기로 정했지만 그 시기는 천연두가 창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홍타이지 어영 주변에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빠른 태세전환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 홍타이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오래머물지 않고 빠른 철군을 한다. 서울은 물론이고 어떤 중소도시에도 들르지 않았으며 마중을 나온 조선의 관원들도 모두 피했다. 천연두가 아니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방역을 중심에 둔다면 이해가 가는 면이다. 

 항복 후 인조는 생각보다 후한대접을 받는다. 원의 침략을 받았던 고려는 오랜 저항과 쿠빌라이라는 유력자를 알아보고 제대로 항복하여 부마국의 대접을 받았지만 인조의 조선은 의외였다. 홍타이지는 삼전도의 의례후 인조를 청의 주요 친왕들보다 더 높은 바로 자신의 옆자리, 즉 2인자의 자리에 앉힌다. 조선에 대한 대접이었다. 이를 향후 청이 중원을 제패한 후 만든 국제질서에서 조선이 생각보다 높은 위상을 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임진왜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잊힌 병자호란에 대해 여러 면을 새롭게 보여준다. 특히, 조선의 사료뿐만 아니라 청의 만문 사료를 많이 활용하여 객관적이지 못했던 부분의 새로운 퍼즐을 맞춰낸 느낌이다. 멸망 직전의 조선을 살린 것이 평소 조선 백성을 괴롭히던 천연두라는 사실이 재밌다. 과학기술이 절정에 달한 지금처럼 과거에도 최강국일지라도 감염병에는 맥을 못췄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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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7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30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2전환점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필립 M. H. 벨 지음, 황의방 옮김 / 까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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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도 80년 가까이 되어간다. 아마 직접 겪은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럽과 북미, 극동을 중심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이 전쟁은 그 이전의 그리고 그 이후의 전쟁을 모두 덮어버린 듯한 인상을 준다. 아마 관련 국가들이 전쟁 중 2차대전과 관련한 책이나 영화, 만화 등을 가장 많이 만든다는게 그 반증일 것이다.(미드웨이, 진주만, 퍼시픽, 라이언일병구하기, 밴드오브 브라더스가 모두 2차대전 영화 드라마다.) 2차대전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은 지금의 세계를 만든게 바로 2차대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전쟁으로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산업의 패권국으로 떠올랐고, 아직도 그 지위를 유지중이다. 소련은 해체되었지만 러시아가 그 뒤를 이어받아 여전히 군사적으로 강력하다. 그리고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은 2차대전후 냉전의 그늘하에 오히려 더 경제적으로 부강해졌다. 아마 이 질서를 뒤흔들어 재편할 만한 나라는 중국이 될 것이다. 그리고 미중 경쟁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된다면 아마 2차대전도 잊혀지지 않을런지.

 하여튼 그 2차대전의 주요 흐름을 잘 짚어 정리한 책이 이번에 읽은 12전환점으로 읽는 2차세계대전이다. 전쟁의 발발부터 종전까지 주요 전환점을 잘 짚어냈다. 읽으면서 2차대전을 잘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국이 2차대전 관련 저작물을 많이 만들어내다보니 그들이 무수한 희생을 치르고 전쟁을 끝낸것 처럼 느껴지지만 2차대전 당시 미군 전사자는 27만에 불과했다. 1000만에 달하는 소련을 생각하며 우스운 정도인데 이것도 미국이 영화를 많이 만들고 2차세계 대전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1. 전쟁의 시작과 프랑스 점령

 2차 대전의 시작은 역시 독일이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다. 야욕을 숨기지 않은 그는 1935년 이후 빠른 속도로 재무장을 시작한다. 1938년엔 오스트리아를 병합했고 같은 해 9월 체코의 수테텐을 차지한다. 1939년 2월엔 체코의 나머지 지역도 병합했고 같은 해 9월엔 폴란드를 침공해서 겨우 5주만에 점령해버린다. 이런 야욕에도 1차대전의 트라우마가 컸던 영국과 프랑스는 유화정책으로 일관해 이런 독일의 세력확장을 초기해 견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경제를 봉쇄하고자 했는데 한발 빨랐던 히틀러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자원을 공급받기로 한다. 스탈린 역시 공산주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국경의 안정이 필요했다. 양자의 이해가 일치한 셈이다. 

 독일의 야욕이 눈앞에 드러나자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구축하고 방어계획을 세운다. 1차대전에서 서 최전선으로 워낙 고생했지만 무너지지 않았던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방어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빠르게 군대를 진군시켜 독일을 막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독일이 허를 찌른다. 바위지대로 진군이 어렵다고 생각했던 아르덴 지역으로 기갑사단을 진군시킨 것이다. 이 곳은 실제로 진군이 어려워 독일은 많은 교통체증을 일으켰지만 연합군은 이를 발견하지 못한다. 1940년 5월 13일 독일은 뫼르 강에 도착해 프랑스 진지를 1500대 가량의 폭격기로 맹폭한다. 벙커안 프랑스군은 56명만 사망할 정도로 피해가 적었지만 그들의 정신이 붕괴된다. 55보병사단이 전의를 잃고 와해되었으며 지상의 철저한 파괴로 통신이 두절된다. 독일은 빠르게 진군하여 대서양에 도착해 프랑스를 남북으로 분단시켜 버린다. 5월 24일 독일 기갑군이 덩캐르크로부터 불과 16km 떨어진 곳에 도달하지만 폰 룬트슈테르의 사령부와 히틀러는 너무나도 빠른 진격이 걱정스러웠는지 부대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이 귀중한 시간동안 연합군은 영화 덩케르트에 나온 것처럼 무려 22만의 영국군과 11만의 동맹군을 영국으로 귀환시킬수 있었다. 물론 무기는 모두 버리게 되었지만 말이다. 

 전쟁초기 프랑스는 이렇게 무력하게 빠른 시간안에 무너졌지만 갖고 있던 전력은 만만치 않았다. 프랑스는 탱크 3250기로 독일의 2440기보다 많았고 오히려 탱크의 성능도 우수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탱크는 연료통이 작아 작전반경이 좁았고, 무전시설도 없어 전장에서 고립시 지휘체계가 붕괴되는 일이 많았다. 결국 전쟁초기 독일군의 우세는 전력자체보다는 아르덴을 통과하는 전략적 사고와 그 기세를 이어 대서양까지 프랑스를 횡단해버려 적을 포위해버린 과감성,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한 부대의 기동성에 있다 하겠다. 

 패전한 프랑스는 독일과 강화를 맺는다. 협정은 굴욕적이었다. 프랑스는 전 영토의 2/3을 내어주었고 육군은 10만으로 감축한다. 함대는 무장해제당했으며 독일의 점령비를 부담했고 무려 180만의 전쟁포로는 평화시까지 수감되었다. 600만의 피란민이 발생했고 수도 역시 파리에서 온천도시인 비시로 옮겨졌다. 자유평등박애의 국가모토는 노력, 가족, 조국으로 변화했으며 이는 민주주의 질서의 파괴를 의미했다. 

 이런 독일의 전격적 승리에 세계는 동요했다. 파시즘은 과거 나폴레옹의 자유주의 처럼 새로운 질서로 세계를 뒤흔들 것처럼 느껴졌다. 이탈리아는 17년간의 파시즘으로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에도 참전하여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로 전선을 확대시켰다. 반면 스페인의 프랑코는 참전의 대가로 프랑스의 식민지와 영토, 전쟁보급품을 요구했다. 독일이 이를 거절하자 그는 참전하지 않고 추축국에 제한된 협조만을 하기로 한다. 겁을 먹은 영국은 한 때 독일과 강화를 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유혹을 현명하게 실행하지 않았다. 소련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은 애초 1차대전 처럼 독일과 영국프랑스가 오래도록 싸우며 힘을 빼는 사이 국력을 키울 심산이었다. 하지만 서유럽이 붕과히자 스탈린은 독일과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누가봐다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었다. 미국 역시 고민에 빠졌다. 대서양이라는 자연 장벽이 있었지만 프랑스가 붕괴한 이상 프랑스의 서아프리카 식민지와 카리브해 식민지에서 독일이 미국본토를 충분히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미국은 대서양을 포기하여 영국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참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아시아의 상황은 무주공산이었다. 유럽 열강들이 독일로 인해 혼이 빠진 사이 그들의 아시아 식민지를 무방비가 되었다. 일본은 약간의 의지만 보이면 이들은 곧 일본차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 바다사자작전

1940년 5월-6월은 히틀러가 영국을 침공하기 좋은 시기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승리에 놀란 히틀러는 이 시기를 놓친다. 그는 영국이 겁을 먹고 강화에 나설거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으며 히틀러가 망설이는 사이 영국은 빠르게 해군력과 공군력을 강화한다. 육상전력은 형편없었지만 영국의 공군과 해군은 달랐다. 영국의 스핏파이어기는 독일의 ME109, M110E보다 속도와 성능이 우수했다. 거기에 영국은 레이더를 개발해 최장 160km까지 적기의 탐지가 가능해졌다. 

 초기 독일은 영국의 비행기지와 분소들을 공격해나갔다. 독일은 영국의 공군력을 무력화하고자 했는데 실수로 런던을 공격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영국이 즉각 베를린을 폭격했는데 두 사건 역시 피해가 미미했다. 하지만 격분한 히틀러는 보복으로 대규모 런던 공습을 감행한다. 이에 영국공군은 기지를 회복할 시간을 갖게 되었고 지속적인 소모전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공군은 마침내 독일공군에 우위를 갖게 된다. 히틀러는 1940년 9월 17일 영국침공계획인 바다사자작전을 조용히 포기한다. 공군의 특성상 전사자는 양측다 극히 적었지만 현대전에서 공군의 역할을 감안한다면 큰 패배였다. 


3.바르바로사 작전

바르바로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이름이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작전을 이 이름으로 정한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조약을 깨고 히틀러가 310만의 독일군과 65만의 동맹군으로 소련을 침공한다. 아직 기계화가 미미해 탱크는 4천대에 불과했고 수송은 주로 말이 담당해 무려 75만 마리나 되었다.

 히틀러는 비스물라강과 우랄산맥 사이의 영토를 병합하여 천년 제국의 기초수립을 구상했다. 이는 삶의 공간이었고 독일 민족의 우수성과 경제적 자급자족, 세계권력에 대한 히틀러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독일이 침공한 우크라이나 지역을 비롯한 소련의 서쪽 지역들은 소련의 압제로 인해 독일군을 환영하는 상태였다. 초기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격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인종적 광기로 이 분열을 전혀 이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점령지에서 인종청소를 감행하여 환영을 증오로 바꿔버리며 이는 큰 패착이 된다. 

 개전초기 히틀러의 침공을 걱정했음에도 스탈린은 침공의 현실을 부인하며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소련 공군은 출격하지도 못하고 지상에 묶인체 1800대의 공격기가 파괴된다. 초기 공군력을 상실한 소련은 이후 독일의 항공기 공포에 상당기간 시달리게 된다. 독일은 프랑스의 경우처럼 속도와 소련군을 포위한다. 중부전선에서 75만 키예프에서 66만을 포로로 잡았으며 소련군 전사자는 200만에 달했다. 독일은 소련 포로를 방치하다시피해 이들중 상당수가 사망하게 된다. 독일의 진격을 매우 빨라 중앙집단간이 6주간 무려 700km를 이동해 모스크바를 350km남겨두게 된다. 그 기세였다면 모스크바 점령은 시간문제였지만 히틀러는 공격목표를 왜인지 레닌그라드로 바꾼다. 이 망설임이 시간을 주어 소련은 반격의 시간을 갖게된다.

 소련은 초기에 군이 궤멸되고 주요 산업시설을 모두 빼았겼지만 빠르게 우랄 시베리아 지역으로 산업생산시설을 이전한다. 500만의 예비군이 동원되었고 산업생산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소련의 무기 생산과 병력은 독일을 크게 상회하게 되었으며 이 소모전에서 기세가 점차 역전되기 시작한다.


3. 진주만 

일본은 1937년 중국 본토를 침공해 1939년 말이면 중국 영토의 1/4가량을 점령한다. 유럽 열강은 여력이 없어 이를 방관하는데 일본은 영국으로 하여금 장제스를 지원하는 버마 로드의 폐쇄를 요구하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입한다. 일본은 1940년 9월 삼국동맹을 결성한다. 하지만 독일의 기세가 주춤하자 영국은 다시 버마로드를 재개하였고 미국은 일본에 대한 고철수출과 석유수출을 전면 금지한다. 이에 일본은 동남아를 노리게 된다. 후방의 안정이 필요했던 일본은 소련과 마찰이 없기를 원했지만 독일이 말도없이 소련을 침공하자 당황한다. 1941년 일본은 제국회의에서 결국 소련을 침공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석유확보를 위해 인도차이나 남부를 점령하는데 그간 일본의 행보를 방관하던 미국은 이례적으로 신속히 반응한다.

 미국은 미국내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였고 석유수출을 전면금지하였다. 일본은 미국과 협상하면서 3가지 요구를 하였는데 미영의 장제스 돕기 중지와 미영의 중국, 태국, 동인도 제도의 군사기지 설치 금지, 미영의 일본과의 교역 회복이었다. 반면 미국은 장제스 정권 인정, 1900년 이후 중국에서 얻은 조차지의 모두 반환을 요구했다. 양국의 간극인 너무 컸던 셈이다. 협상은 결국 결렬되고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한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쿠 이소로쿠는 항공모항의 새로운 역할을 인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모가 함대의 우산이 아닌 독립적 타격군이라 생각했고 1938년 일본 해군은 이 새로운 전략개념을 받아들여 대형항모를 생산한다. 1941년말 일본 해군은 항모를 10척 보유하기에 이르는데 당시 미국의 항모는 겨우 5척이었으며 태평양엔 그나마 3척이 전부였다. 

 진주만 공격은 사실 동남아사이 방어 전략의 일환이었다. 일본의 목표는 미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하여 남쪽으로의 대규모 병력 이동을 막는 것이었다. 야마모트는 미국의 장기적 산업생산능력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장기전이 불리하기에 단기전으로 끝낼 생각을 갔고 있었다. 

 진주만은 일본에서 무려 5600km거리에 있어 재급유가 작전에 중요했다. 공격방법도 고민이었는데 급강하와 어뢰를 통한 공격이 모두 고민이었다. 급강하는 행위 자체가 위험했고 어뢰는 진주만의 얕은 해안에서 잘 먹힐지 의문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강도 높은 개인훈련과 기동훈련을 실시한다. 일본해군 정보국은 미주재대사를 통해 진주만 해도를 입수한다. 미 정보장교는 이를 파악했지만 이를 군에 전달하지 못했으며 미 장교 일부의 진주만 주변 정찰요구도 이뤄지지 못한다. 

 1941년 11월 미 최고 사령부는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감지했지만 목표를 알아낼 수 없었다. 미국 정보망엔 구멍이 많았는데 일본 1,2사단의 항모 4척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11월 26일 일본군은 나구모 제독의 지휘 아래 쿠릴열도의 한 섬인 에도로푸 섬에서 북쪽 항로를 따라 하와이로 항진한다. 6대의 항모, 2척의 전함, 13척의 손양함, 그외 다양한 작은 전함과 상선으로 이뤄진 대규모 선단이었다. 항모에 탑재된 항공기도 450기였다. 

 이 기습은 알려진 대로 큰 성공을 거둔다. 8척의 미 전함중 6대가 침몰하고 나머지 2대도 항행불능상태가 된다. 11척의 작은 전함이 손상되었으며 188대의 항공기가 파괴되고 사망자가 2403명에 달한다. 일본의 피해는 고작 29대의 항공기 파괴와 6척 잠수함 손실이 고작이었다. 일본은 재공격하여 진주만의 기름탱크를 파괴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엄청난 비축유가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진주만 이후 일본은 승승장구하여 홍콩과 괌을 점령하고 필리핀을 침공한다. 말레이 싱가폴 보호를 위해 온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와 리펄스 호도 침몰시킨다. 1942년 싱가폴을 점령하였고 다수의 영국군 포로를 잡는다. 호주의 북부도시 다윈도 폭격하는데 이로써 동남아 전역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4.미드웨이

미드웨이는 태평양 한복판의 작은 섬으로 32대의 장거리 비행정과 23대의 폭격기가 있는 중요하지 않은 곳이다. 일본은 미드웨이에 대한 공격가능성이 회의적으로 공격을 주저한다. 하지만 진주만 이후 감행한 둘리틀 부대의 도쿄 폭격으로 미드웨이 공격이 결정된다. 

 일본은 호주 근방 코럴해에서 렉싱턴 호를 침몰시킨다. 하지만 일본은 렉싱턴과 요크타운 2항모를 침몰시킨 것으로 착각하였는데 미군은 거짓 교신으로 이를 더욱 믿게 만든다. 당시 일본은 항모4척과 소형항모 2척, 전함 9, 순양함 12, 구축함 44로 항모 3, 순양함 8, 구축함 15에 불과한 미해군을 전력에서 압도하고 있었다. 

 일본은 6월 4일 나구모가 이끄는 함대로 미드웨이를 폭격한다. 미군 기지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나구모는 다시 미드웨이를 폭격하려다 미 전함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뢰를 항공기에 설치한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어 다시 폭격을 준비한다. 이런 윗선의 혼란에 갑판과 아래층은 혼선에 빠진다. 미국은 51기의 폭격기가 어뢰로 일본 항모를 공격한다. 어뢰 폭격기는 당시 수면에 수평으로 저공비행을 하였기에 전함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7척만 남고 모두 파괴되었으며 전과가 없었지만 철통같던 일본함대의 방어진형을 흐뜨려놓는데 성공한다. 일본 전투기들 역시 이 어뢰폭격기를 격추하느라 수면 근처로 내려와있었는데 이 때 돈트리스 하강폭격기 54기가 일본 함선으로 급강하한다. 순간 무방비였던 일본 해군은 무차별적 폭격을 당하고 소류, 아카기, 카가 등 4항모를 모두 잃게 된다. 이후 양국의 해군 전력은 역전되는데 일본은 이후 10척 정도의 항모를 더 건조하지만 같은 기간 미국은 무려 90척의 항모를 더 건조하기 때문이다. 


5. 대서양전쟁

 대서양에선 태평양같은 격렬한 해전은 없었지만 꾸준한 소규모 전투가 있었다. 바로 독일 U보트에 의한 전투다. 2차 대전중 영국은 북미에서는 물자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독일 입장에선 이 공급을 해상에서 끊는게 중요했다. 독일은 2차대전중 무려 1150척의 U보트를 건조한다. 군인도 4만 900명을 배치하였는데 초기 U보트의 성과는 매우 경이적이었다. 독일의 U보트 사용은 노르웨이 점령과 프랑스 점령으로 대서양 주요 항구를 사용할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0년 58만톤, 1941년에는 100만톤의 선박을 침몰시틴다. U보트는 항속거리가 길고 속도가 대부분의 상선보다 빨라 매우 위력적이었다. 다만 어뢰공격을 위해서는 수면 가까이로 부상해야하는 약점이 있었다. 독일 U보트는 암호정보로 호송대의 위치를 알아낸뒤 일군의 U보트를 집단파견하여 공격하는 이리전술로 재미를 보았다. 이처럼 독일 U보트는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꾸준히 소모되어 몇년 만에 주요 잠수함의 함장이 모두 20대의 어린나이로 채워지게 된다. 

 U보트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상선호위는 상당히 효과가 있었는데 호위시 생환율은 80%였던 반면 호위가 없는 상선은 고작 20%만이 살아남았다. 영국은 블레츨리 파크에서 독일군 암호를 해독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연합군은 호위함 호위기를 늘리고 호위거리의 갭을 없애고자 노력한다. U보트는 그로 인해 점차 위력을 잃게된다. 거기에 U보트 상당수가 지중해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로 파견되어 롬멜을 지원하게 되었고, 소련 침공을 위해 노르웨이로 배치되어 대서양에서 더욱 힘을 잃게 된다. 

 전세는 점차 역전되어 1943년 ONS 5 호송대 전투에서 독일은 U보트 41척을 출동시켜 12척 이상의 상선을 침몰시키지만 U보트가 9척 침몰하고 5척이 심한 손상을 입는다. 1:1의 손실비율이라면 독일입장에선 큰 손실이었다. 연합군은 독일 암호의 해독으로 인한 정보전의 승리와 공중전력으로 대서양전쟁에서 승기를 가져가기 시작한다. 대서양 전투에선 무려 2828척의 상선과 148척의 전함이 침몰하였다. 사망자도 5만을 넘는다. U보트는 1131척중 754척이 침몰하였고 4만의 군인중 무려 3만이 전사한다. 독일의 손실 역시 만만치 않았던 셈이다. 


6. 노르망디 상륙

1943년 1월에서 1944년 5월 사이 140만의 미군이 영국에 상륙한다. 그리고 1944년 900만 톤의 보급품도 대서양을 건넌다. 상륙전을 위해 연합군은 약 7천척의 전함과 수송선, 상륙용 주정을 집결시킨다. 해군작전은 조수와 달에 의존하는데 상륙부대들이 해안의 장애물을 처리하려면 조수의 상태가 최선이어야 하고 ,낙하산이나 글라이더를 이요한 공정부대의 침공에는 좋은 시야가 필요해 만월일때가 좋았다. 1944년 6월에 조수가 가장 좋은 때는 5-7일, 18-20일이였다. 그리고 우여곡적끝에 D-day는 6일로 결정된다. 

 독일은 엽합군이 드칼레로 상륙할 것으로 예상했다. 영국에서 최단거리해로이고, 항공기 지원이 용이하며 독일로 진군하기도 좋아 여러모로 최적이었다. 독일의 롬멜은 적이 상륙하여 정비하기전 해안에 기갑부대를 배치에 다시 해안으로 몰아넣는 방어계획을 주장했고, 폰 룬트슈테른은 적 상륙후 주력을 파악한 후 기갑부대로 집중공격하는 방어계획을 주장한다. 히틀러는 어리석게도 양자를 모두 채택해 안그래도 부족한 기갑부대를 프랑스 전역에 분산해버린다. 

 연합군은 노르망디의 다섯개 해안에 상륙하는데 유타와 오마하에는 미군이 골드에는 캐나다가 주노와 소드에는 영국이 상륙한다. 독일은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음에도 이를 연막으로 여기고 드칼레에 집중해 초기 대응을 놓치고 만다. 거기에 독일 21기갑사단의 선택은 더욱 아쉬웠다. 이들은 초기 발빠르게 진군에 캐나다와 영국군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상륙하는 엄청난 수의 연합군을 목도하고 퇴각해버린다. 

 이에 6월 16일까지 영국군은 2개 기갑사단 등 7개사단을 미국은 11개 사단을 상륙시킨다. 무려 50만의 병력과 7만 7천대의 차량이었다. 


7. 원자탄 투하

 레이테만 전투에서 일본은 전함 3척 쾌속항모 4척 순양함 16척 구축함 9척을 잃어 사실상 해상전력이 궤멸된다. 미국의 상륙 및 점령만이 남았는데 이게 쉽지 않았다. 이오섬 전투에서는 11만 미해병이 상륙행 5천이 전사하고 1만5천이 부상당한다. 오키나와에서도 17만이 상륙하여 1만2천이 전사하고 3만 6천이 부상당한다. 엄청난 비율의 손실에 미군은 일본 점령에 대한 손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대서양 전투처럼 미국인 해상전력이 궤멸한 일본이 상선을 마음껏 유린한다. 미 잠수함은 1943년 180만 톤 1944년 390만 톤의 일본 상선을 침몰시킨다. 거기에 일본 근해에 기뢰까지 부설하여 이본의 해로를 막아버린다. 사실상 봉쇄된 일본은 자원 부족과 식량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1944년 마리아나 군도에 비행장이 완성되어 일본 본토 폭격이 시작도니다. B29 폭격기는 일본의 주요도시를 폭격하였는데 30-80만이 사망하고 800만이 집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군은 일본의 건물이 주로 목조건물이어 소이탄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로 인한 화재 피해가 엄청났다. 

 미국은 맨하탄 프로젝트를 끝내고 원자탄을 개발한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가했는데 7만 6천채의 건물중 6채만 남고 파괴되었으며 인명손실도 7-13만에었다. 두번째 원폭은 나가사키였다. 원래 목표는 코쿠라였는데 날씨 문제로 목표가 나가카시카 바뀐다. 나가카시는 지형이 능성이 있고 계곡이 있어 핵폭풍피해가 반감되었다. 인명 피해는 3만에서 7만이었고, 이 무시무시한 두 폭판으로 일본은 항복을 결정하며 2차대전이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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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4-16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질적으로 독일을 상대로 가장 큰 피해
를 치르고, 독일군 주력을 격파한 나라는
소련이었는데 너무 연합국 위주로 전쟁사
가 편중된 그런 느낌입니다.

1944년에 소련에서 개시한 바그라티온
작전이 빠진 게 아쉽네요. 실제로 독일
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 넣은 작전이었
는데 말이죠.

닷슈 2021-04-16 10:57   좋아요 1 | URL
책에 바그라티온 작전은 책에 실려 있었습니다. 제가 리뷰에서 뺀 거죠.
말씀하신 것처럼 소련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4년여를 버텨냈고 일본의 후방을 견제했기에 승리할수 있었던 전쟁입니다. 저도 소련의 공로를 의식하면서도 전황을 극적으로 바꾼게 미국인지라 편향된듯 합니다. 미국의 희생이 고작 27만이란건 참. 그렇습니다.
 
인삼의 세계사 - 서양이 은폐한 '세계상품' 인삼을 찾아서
설혜심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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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대항해시대를 이끈 건 값비싼 동양의 향신료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이슬람제국이 길을 막고 중개무역을 독점하자 서양인들은 한 때 헤라클라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으로 막혔다던 대서양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커다란 아프리카를 돌아 동양에 다다랐고, 그 과정이 너무 힘드니 상대적으로 짧다고 생각한 서쪽으로 가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커피, 후추, 정향, 육두구, 카카오 같은 것들이 모두 인기가 좋았다. 서양은 동양에서 그것들을 직접 서양으로 날랐고, 수십 배의 이득을 누렸다. 그리고 향후엔 식민지를 건설하고 직접 플랜테이션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팔아치운 서양인들이 중국인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고 귀중했던 인삼을 몰랐을까? 이 책을 읽기 전엔 인삼이 아무래도 약재이고, 동아시아에서만 교역을 하는 것이니 그런 무역체제에 편입이 되지 않은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책 '인삼의 세계사'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인삼은 진시황이 불로초의 하나로 가능성을 점칠 정도로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에서 약재로 효능이 높았다. 무역은 당연히 생길 수 밖에 없었는데 위진시대 해로를 통해 인삼 무역이 시작되어 당나라 초기에 이르러 매우 중요해졌다. 당시 중국에서는 한반도에서 오는 인삼을 통칭해서 신라인삼이라 불렀다. 인삼은 명나라 중기에 전성기를 맞는데 사회가 안정되자 사치품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수요증대로 중국자체내의 인삼이 거의 고갈되자 변경의 마시나 호시를 통한 요동삼과 고려인삼을 많이 수입했다. 청을 세운 누르하치가 인삼과 모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게 가능해진 이유이기도 했다. 청대에는 만주족이 자신들의 토대인 만주를 중시하여 만주내에서의 인삼, 진주, 초피는 국가가 철저히 관리했다. 청초기만 해도 이게 잘 운용되어 성경지역에서만 인삼을 채취했지만 차차 재정결핍으로 인삼채취 지역이 만주내에서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인삼은 삼국시대부터 이미 채취가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인삼을 징수하고 생산지가 아닌 곳에서는 인삼세를 징수했다. 조선은 공납으로 인삼을 징수하였는데 전국 329개 군현중 112개 고을에서 인삼을 산출해 약재로 쓰거나 공물로 바쳤다고 한다. 조선은 인삼의 해외 유출을 통제하였는데 임진왜란때 군대를 따라 들어온 명상인들이 돈이 되는 고려인삼을 반출해갔다. 조선은 요동에서의 식량 조달을 위해 중강개시를 허용했는데 이를 통해 명이 자신들이 부족한 인삼과 은을 반출해갔다. 일본 역시 임진왜란때 고려인삼 종자를 탈취해가 조선인 포로로 하여금 자국내 이식을 시도한다. 조선의 인삼교역을 청대에 다소 혼란에 빠졌는데 늘 정기적으로 인삼을 요구한 중국황제들 중 거의 최초로 고려인삼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여진족들 자체가 만주에서 인삼을 얻어왔기 때문으로 이렇게 수출길이 막히자 조선 정부는 인삼을 일본으로 수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17세기 중반부터 청에서도 인삼 수요가 늘어나자 다시 인삼무역이 시작되었고 사행무역과 중강개시 및 후시를 중심으로 무역이 이루어진다. 조선 상인은 주로 청에서 백사와 비단을 수입했고 은과 인삼으로 대금결제를 하는 식이었다. 일본에서는 자생삼인 죽절삼이 있었지만 고려인삼에 비해 약효가 크게 떨어졌고,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일본에 동의보감등의 조선의학서가 보급되면서 인삼의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 이에 조선상인은 일본에 인삼을 팔아 은을 얻고, 이 은으로 중국에서 비단을 사고 일부를 국내에 유통하고 이를 다시 일본에 팔아 큰 무역이익을 얻는다. 당시 일본은 세계 제2의 은공급국이었는데 잦은 무역으로 은이 고갈되자 인삼 결제를 위해 은함략이 높은 특주은까지 만들어낼 정도였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조선내의 인삼도 고갈되고 일본내의 은도 고갈되자 양측의 인삼교역은 쇠퇴하게 된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이전엔 인삼을 끓여서 가공했다. 아무래도 생삼은 무역이 어려웠기에 건조하거나 끓이는 등의 가공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공재배가 시작된 이후 쪄서 말리는 증포방식으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홍삼의 시작이다. 조선에서 홍삼무역을 주도한 것은 역관과 한양의 상인으로 홍삼제조 증포소는 1797년 한양에 처음설립된다. 하지만 1810년 개성으로 이전하는데 이는 개성상인의 힘이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이후 개성은 조선의 홍삼제조와 생산을 독점하여 1896는 개성의 인삼밭은 전국의 47%에 달했고 인근 금천, 장단, 풍덕을 더하면 무려 92%에 이르게 된다. 조선은 개화기에 이르자 왕실의 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내장원을 설치한다. 내장원은 산하에 인삼 및 홍삼에 대한 관리들 담당하는 삼정과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국내외 홍삼판매의 국영독점을 의미하게 된다. 이에 개성상인들은 직접 수출을 통한 이득이 크게 줄어 개성민요를 일으키기도 한다. 나라가 망하며 조선총독부의 주재로 개성의 홍삼무역은 미쓰이물산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해방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전란을 피했던 개성의 상인들은 홍삼산지와 제조지를 모두 잃게 된다. 이들은 1952년 전란중에도 개성에 잠입후 고려인삼 종자를 얻어오게 되며 이를 이전까지만 해도 인삼의 주변부였던 풍기, 금산등에 이식해 새로운 현대식 홍삼제조시설은 고려인삼창을 준공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유럽의 동인도 회사는 17세기부터 동아시아의 인삼을 유럽으로 들여온다. 하지만 인삼은 유럽자체에 수요가 많지 않았기에 본질적으로 장거리 무역상품이 아니었다. 동인도 회사의 현지무역상품이었는데 그것은 아시아의 한 지역에서 구입한 상품을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처분하고 그 돈으로 그 지역의 상품을 사서 다른 곳에 파는 연쇄거래를 의미한다. 동인도 회사는 유럽에 소량의 인삼만을 팔았으며 그 덕에 매우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삼이 돈이 되기 시작하자 북미지역에서 인삼을 찾는 노력이 이뤄지고 캐나다에서 인삼이 발견된다. 기후가 동아시아와 비슷하다는 것에 주목한 성과였다. 캐나다 모피 상인들은 원주민을 동원해 캐낸 인삼을 수출하기 시작했고, 북미의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인삼이 발견되기 시작한다. 북미의 인삼은 화기삼이라 불리는데 이는 미국의 상선이 처음 성조기를 달고 광둥에 입항할때 그 깃발이 꽃처럼 보여 중국인들이 화기라 불렀고, 화기가 가져온 삼이라 화기삼이 된 것이다. 북미에서 인삼에 대한 경제적 열품은 골드러시 못지 않았다. 그리고 막 독립하여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미국이 국제교역에 참여하는데 소중한 자산이기도 했다. 미국은 식민지 시절 차를 매우 비싼 가격에 수입하고 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를 통한 교역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독립후, 차 수요가 끊이질 않자 차 수요 해결을 위해 중국과의 직접 교역이 필요했지만 서부개척 이전이라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긴 항로를 이용할수 밖에 없었다. 자본이 취약했던 미국에게는 차교역을 위해 미국에선 쉽고 싸게 구할수 있으면서도 중국엔 비싸게 팔수 있는 물건이 필요했는데 당시로선 화기삼이 유일했다. 미국은 중국과의 첫 교역을 위해 군선이던 배를 중국황후호로 개조하였고 첫 교역물품으로 화물 27만달러어치중 무려 24만달러치가 화기삼이었다. 첫 화기삼 거래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상선은 미국으로 돌아와 1500%의 이익을 누리게 된다. 이후 60년간 화기삼 수출로 뉴잉글랜드 상인들을 큰 자본을 축적하게 된다. 반면 화기삼의 엄청난 공급으로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영국은 인삼교역에서 거의 발을 떼게 된다. 그리고 아편에 집중한다. 중국내에서 화기삼은 인기가 값어치가 높지 않았는데 공급이 과잉한것도 있었지만 포장상태가 만주산이나 한국산에 비해 매우 조악했으며 만주나 한국산의 높은 수준의 가공기술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아편 공급으로 아편중독자가 크게 늘어나자 인삼의 해독능력에 의존하여 인삼수요가 늘었는데 상류층은 고려인삼을 서민층은 화기삼을 이용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18세기 들어 인삼의 위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는 중국에 대한 서구의 인식변화와 일치하는데 산업혁명으로 과학기술 문명이 발달하며 따라잡고 싶고 닮고 싶어하던 중국을 정체된 곳이자 계몽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엔 약전이란게 있었는데 의약품의 균질성을 보전하려고 제법, 성상, 성능, 품질과 저장방법등에 대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지침서였다. 18세기 후반 유럽에선 약전 개혁이 일어났고 표준화를 위해 유효성분이 있는 것에 주목했는데 이점에서 인삼이 불리했다. 인삼의 주성분인 사포닌이 한 분자내에 비극성 분자와 극성분자가 공존하는 화합물로 비누처럼 거품형태로 발생하여 이를 분리, 정제하기가 무척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삼의 성분은 당시 기술로 분석이 어려웠고, 효능이 워낙 좋다보니 동아시아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쓰여 그 효과가 오히려 더욱 의심받게 되었다. 거기에 서구에서 인삼의 위상이 추락하게 된 것은 서구화가 되지 못한 면도 컸다. 아시아나 아메리카의 다른 향신료들은 서구 자체내에 많은 수요를 일으켰고, 이에 플랜테이션으로 재배하기 시작했지만 서구의 식민지들중 인삼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없었다. 이로 인해 서구의 교역역사에서 인삼은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인삼의 성분이 진세노사이드라는것이 분명히 밝혀지고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지금은 전 세계에서 인삼이 재배되고 있다. 한중일은 인삼이 고갈되기 시작한 18세기 말부터 인삼재배가 본격화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캐나다나 뉴질랜드에서도 인삼이 재배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약효가 좋은 고려인삼의 종자가 마구잡이로 유출되었는데 인삼자원에 대한 보호는 지금도 잘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거기에 최근 고려인삼은 열을 높이는 작용을 하고 반면 서구의 인삼은 열을 내린다는 프레임이 생겨나 열대국가에서는 오히려 서구의 인삼이 인기가 좋아지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인삼은 다른 향신료들처럼 대항해시대 서구의 중요한 상품 중 하나였다. 특히, 미국같은 나라에는 초기 자본을 형성하게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상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차이점은 다른 향신료들은 서구사회 자체에 수요가 높았던 반면 인삼은 인기가 좋은 중국의 상품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거기에 동아시아의 높은 가공수준을 화기삼이 따라가지 못한 점이나 오리엔탈리즘으로 아시아의 모든 것을 얕잡아보고 기술적 한계로 인삼의 유효성분이 적절히 추출되지 못해 약리작용이 뒤늦게 입증되면서 인삼이 서구의 역사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게 이 책에서 말하는 결론이다. 주제가 무척 흥미롭고 재밌는 책이었지만 처음으로 다루는 주제를 발굴한 책이다보니 잘 정리가 안된 느낌도 조금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읽어볼만한 책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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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루전쟁 - 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도현신 지음 / 이다북스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소금, 설탕, 후추, 밀, 커피, 코코아 지금은 모두 전 세계 웬만한 곳에선 넘쳐나는 것들이다. 하지만 과거엔 모두 특정지역에서만 나는 사치품이었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없었으며 이것들을 얻기 위한 노력은 인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 설탕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설탕을 먹은 지역은 인도다. 사탕수수가 인도 갠지스 강 유역이 원산지이기 때문인데 지역이 무덥고 습해 사탕수수 재배지역으로 딱이다. 인도는 치즈덩어리를 밀가루로 말아 튀긴 다음 설탕 시럽에 담가 먹는 굴립자문이나 코코넛 가루와 설탕을 반죽한 덩어리를 밀가루로 싼 모닥 같은 과자를 과거부터 즐겼다. 

 인도의 설탕을 중국과 페르시아로 퍼졌는데 페르시아는 기후 때문인지 실패했고, 중국은 성공해서 남북조시대부터 즐겨먹기 시작했다. 서양엔 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벌하며 퍼졌는데 기후가 맞지 않아 지중해 동부 일부에서만 생산량 조금 있었다. 

 설탕은 대량 생산한건 600년후반부터 지중해를 제패한 이슬람 세력때부터다. 그들은 이집트, 시리아, 페르시아, 크레타에 설탕 제조공장을 만들었고 이중 이집트 산이 가장 품질이 좋았다. 우리가 먹는 캐러멜도 아랍의 쿠르트 알 밀이라는 과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 이후 유럽인은 십자군 전쟁에서야 설탕의 단맛을 다시 보게 된다. 

 16세기 들어 유럽은 아메리카를 차지하며 축구선수 호날두의 고향이자 대서양의 섬인 마데이라 제도와 아이티, 브라질에 대규모 사탕수수재배 농장을 세운다. 토착민들은 전멸하거나 도망가기 일쑤였기에 흑인 노예를 동원했고, 1500년에서 1880년까지 무려 4천만의 흑인 노예가 강제 동원되었다. 이런 대규모 재배에 16세기 중반부터 설탕가격이 떨어진다. 프랑스는 아이티의 설탕에서 무려 국가재정의 25%를 얻었는데 3만의 프랑스인만 부유했고 48만의 아이티인들은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아이티의 독립을 자극했는데 투쟁끝에 아이티인들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최초로 독립을 이뤄낸 나라가 된다. 뒷끝이 강했던 프랑스는 설탕의 수입을 포기할수 없어 작은 국가 아이티를 재침공하겠다며 위협해 84년에 걸쳐 무려 9천만 프랑을 뜯어낸다. 아이티가 가난한 국가로 전락하게된 결정적 계기라 저자는 평한다.

 1745년 프로이센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그라프가 사탕무를 가열해 설탕 추출해 성공하며 설탕은 결정적으로 싸진다. 사탕무는 서늘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 유럽 전역에서 재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사탕무는 사탕수수보다 성장도 빠르고 가격이 쌌다. 이는 카리브해의 설탕경제에 치명타를 입혔으며 이로 인해 유럽국가들은 그냥 카리브해의 여러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켜준다.

 

2. 소금 

 소금은 해안이 아니어도 암염으로 얻을 수 있다. 암염은 과거 바다였던 곳의 소금기가 땅속에서 암석처럼 굳은 것이다. 소금은 과거 매우 귀했는데 로마는 유대지역의 사해 소금을 얻기 위해 유대를 정벌한다. 소금 빼곤 사실 쓸모가 없는 지역이었는데 그래서 로마는 제1차 유대전쟁에서 11만 제2차 유대전쟁에서 무려 58만의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까지 이 지역을 지켜낸다. 군소반란은 뭐 끊임이 없었다고 한다. 

 소금은 과거 급료로 쓰여 소금 화폐인 살라리움이 오늘날의 봉급을 뜻하는 샐러리가 되었고 프랑스의 소금화폐 솔드는 군인의 급료로 쓰여 군인의 어원인 솔져가 되었다고 한다. 

 베네치아 역시 소금과 무관치 않은데 훈족을 피해 염전이 많은 섬에 피신한게 베네치아다. 이들은 염전의 경제력으로 해군력을 키웠고, 소금을 적극적으로 팔았다. 하지만 힘이 강해진 이후, 자신들의 소금을 강매했고, 이를 위해 적국의 염전부터 해군으로 박살냈다고 한다. 독일의 한자동맹 역시 소금을 중시했는데 로마카톨릭은 예수가 죽은 금요일엔 고기를 금지했고 생선은 허용했기에 소금에 절인 청어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으로 가면 당의 황소가 소금장수였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소금을 전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라가 힘들어지면 소금가격이 매우 비싸지곤 했다. 황소같은 소금 밀매꾼은 이를 노려 많은 이득을 취했고 황소는 여기서 얻은 경제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하북과 산동 지역을 휩쓴다. 이어 물산이 풍부한 광주지역을 취하고 이곳의 절도사로 자신의 임명을 당 조정에 요구했는데 당이 거부하자 당나라 북방으로 쳐들어가 초토화시킨다. 이어 낙양을 점령하고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자 당황제는 사천으로까지 피한다. 굴욕적이게도 황소는 황제를 칭하고 나라를 세웠지만 당황제가 외부에 도움을 청해 패퇴한다. 당은 얼마가지 않아 망하는데 사실상 황소가 멸망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3. 후추

 후추나무의 열매로 덜익은 상태에선 녹색이나 이를 발효하고 말리면 붉거나 검게 변한다. 후추나무는 덥고 습한 열대에서 자라기에 인도 남서쪽 말라마르 해안이 원산지이며 말레시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잘 자란다. 

 후추는 인도양과 홍해를 통해 유럽으로 팔렸는데 이슬람 제국이 지역을 장악한다. 동로마와 페르시아는 아랍인을 무려 천년간 지배했기에 이들을 우습게 보았는데 결국 이들에 멸망한다. 이후 이슬람제국은 후추 무역을 독점하고 큰 부를 쌓는데 후추에 대한 열망은 유럽인에게 이어져 이것은 십자군 원정과 대항해시대의 원인이 된다. 

 대서양을 뺑 도는 항로를 개척한건 포르투갈이다. 이 소국은 1510년 인도 서부 항구인 고아를 점령하는데 23척의 전함과 1200의 군사로 9천의 이슬람교도를 무찔렀다. 포르투갈의 장군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는 이후 고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를 악랄하게 탄압했고 1961년에 인도가 정규군을 대규모로 동원하고 나서야 고야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알부케레케는 말라카도 점령한다.

 후추는 사치품으로 쓰이다. 17세기 공급이 확대되자 가격이 하락하며 인기를 잃는다


4. 밀

 밀은 3대 작물중 하나로 이슬람, 유럽 지역의 주식이다. 밀은 로마를 공화정에서 재정으로 바꾼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일전을 압두고 양국가의 가운데 위치한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선 점령한다. 시칠리아에는 밀이 잘 자랐는데 대규모로 재배하여 가격도 쌌다. 그 싼 밀이 로마로 대규모로 유입되며 로마의 자영농이 몰락한다. 이들은 도시 빈민이 되거나 일용직으로 전락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화정에 대한 원망이 상당했다. 반면 이들은 해외에서 실적을 쌓아온 장군집단엔 열광해 술라, 마리우스, 카이사르 등에 이어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는데 주요 밑기반이 되고 만다. 로마는 항상 식량 부족에 시달렸는데 이집트를 점령하고서야 만성적 식량부족이 해결되었다. 이집트의 밀 생산량은 제국 전체의 무려  1/3에 달했다고 한다.

 우린 흔히 약장수를 사기꾼이나 안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는데 유럽에선 빵장수가 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는 과거 유럽인들이 밀을 빵장수에게 맡겨 빵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이 빵장수가 밀가루를 흔히 가로챘기 때문에 생겨난 문화라고 한다. 아무래도 빵 자체가 효모로 부풀어 오르니 속이기 더 쉽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의 알제리 지역엔 바르바르 해적이 있었다. 스페인이 그라나라를 멸망시켜 이슬람 세력을 유럽에서 완전히 축출하자 스페인이 탄압당하고 쫓겨난 이들까지 합쳐져 바르바리 해적이 강성해졌다. 이들은 유럽에 기독교에 대한 강한 원망과 오스만 제국의 후원으로 오로지 기독교 선단만 공격한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의 선단은 오히려 밀 수출로 유럽으로부터 큰 돈을 벌었다.

 바르바리로 골치아픈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대규모 원정을 단행한 적도 있지만 그 때마다 이 해적들은 다른 지역으로 도망갔고, 이후 유럽이 철수하면 본거지로 돌아와 해적질을 계속했기에 근절이 어려웠다. 유럽 국가들은 평화협정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바르바리 해적들이 하나의 연합체가 아니었기에 단일한 협정이 불가능했고, 맺어도 다른 해적들이 노략질을 했기에 무용지물이었다. 바르바리는 오스만에 복속되어 있었기에 유사시엔 오스만의 해군이 되었다. 그렇기에 평소 유럽을 공격하고 밀을 약탈해 적의 잠재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노력도 있었다. 바르바리는 1830년 프랑스가 근거지인 알제리 전역을 식민지화하고 나서야 근절된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제패하고 영국을 노렸는데 해군력이 약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대륙 봉쇄령을 내려 고사작전을 펼쳤는데 영국은 북미와 교역하며 이를 버텨냈고 유럽 대륙 국가들만 힘들어지는 상황에 봉착한다. 이중 러시아는 영국으로 밀을 수출해 돈을 벌고 있었는데 견디다 못해 몰래 밀을 영국에 수출하다 발각되어 나폴레옹의 대규모 침공을 받는다. 그리고 러시아의 승리로 나폴레옹은 패망한다. 

 우리나라는 밀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로 밀의 생산량이 매우 적었다. 지금은 누구나 먹는 수제비도 본디 왕족의 음식이었다. 밀이 귀하니 국수도 귀해 국수는 생일날이나 잔치에서나 먹는 귀한 것이었다. 일본 역시 밀이 귀해서 쌀을 먹지 않았고 그들인 만든 단팥빵도 국민들에게 밀을 먹이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반면 중국은 북부지역에서 밀이 잘 자라 오래전부터 그들의 주식중 하나였다. 중국 북부의 군인들이 남쪽 지역으로 가면 먹어본 적이 없던 쌀을 먹게되어 이를 먹지 못해 굶어죽었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믿을 수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다. 


5. 커피

커피는 에디오피아가 원산지다. 아랍에서 먼저 유행했는데 아랍 수도승들은 명상시간에 졸음을 참기위해 커피를 애용했고, 술도 종교적으로 금지이기에 카페가 유행했다. 유럽은 16세기에 커피를 접했는데 18세기에야 대중화한다. 

 유럽에 커피가 전해진건 전쟁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은 빈을 두번 공략한다. 하지만 모두 패퇴하는데 두번째 공략전에선 폴란드의 윙드 후 사르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폴란드는 역사상 이 시기에 가장 강력했는데 이 모두가 윙드 후사르 덕분이었다. 이 군대는 독수리 날개를 단 판금 갑옷에 길이가 무려 5.5미터가 되는 창을 사용했다. 중세 전쟁에서 창의 길이는 매우 중요했는데 기마대가 적을 먼저 공격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세 유럽의 공주들은 시집가면서 스파이 노릇도 해서 적국의 창길이를 알아내는 일도 했다고 한다. 윙드 후사르는 긴 창으로 적을 공격하고 대열이 무너지지 않으면 선발대가 다시 돌아가 창을 보충해 재차 공격하는 전술을 썼다. 그래서 1608년엔 스웨덴, 1610년엔 러시아, 1621년엔 오스만을 무찌른다. 상대는 모두 몇배의 군사를 갖고 있었다. 제2차 빈공략전도 이들이 원군으로 나가 막아낸다. 전리품으로 커피콩이 있었는데 포로로 잡혀있던 사람이 커피를 먹는 법도 알아내 이를 전후 카페를 차려 성공적으로 대중화했다. 크림을 올리는 비엔나 커피나 아인스패너 커피가 이때 생겨났다. 

 유럽이나 이슬람과는 다르게 커피는 미국에선 노동자 문화가 된다. 이는 기업주들 때문인데 원래 미국에선 점심시간에 노동자들이 맥주나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 근무중에 음주는 당연히 생산성을 떨어뜨렸고 때문에 미국의 기업주들은 술대신 커피를 적극적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커피는 집중력을 높여 오히려 생산성을 높였으니 일석이조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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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1~2 세트 - 전2권 세계사보다 더 재미있는 최진기의 전쟁사
최진기 지음 / 이지퍼블리싱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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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살과 만행, 문명의 파괴가 있지만 전쟁사는 재밌다. 이는 후대의 인간이 당시 전쟁의 잔혹성을 목도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임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고 그도 아니면 그 자체를 즐기는 잔혹성을 가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장기나 바둑, 체스 그리고 최신의 전쟁관련 비디오, 모바일 게임들은 대개 인기가 좋다.(삼국지나 문명시리즈가 얼마나 재밌는가)

 그래서 목적이 무엇이든 전쟁을 다룬 책도 많다. 인간의 분명한 한 부분이기 때문 일 것이다. 그런데 전쟁책들은 대개 상세한 전술이나 이긴 전략, 무기등은 잘 다루지 않는 편이다. 그런면에서라면 이 책은 분명 빈틈을 잘 찌렀고 그래서 재밌다.

 저자 최진기는 두권의 책으로 고대부터 지금까지 10개정도의 전쟁을 다룬다. 다 재밌지만 새롭게 안 내용만 좀 정리해보았다. 과거 석기시대때도 전쟁은 있었겠지만 당시엔 어느 정도 규모의 문명도 없다고 봐야하니 제대로 된 문명의 전쟁 기록은 청동기부터라 할 수 있다. 청동은 귀하면서도 약했기에 청동기시대의 전쟁은 주로 귀족이 참가했다. 당시 국가재정도 열악하고 청동이 워낙 비싸 군인 스스로가 전투에 필요한 무장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 대가로 전쟁의 부산물도 약탈군인이 챙겼다.

 청동기엔 전차를 이용한 전투가 많았는데 그야말로 럭셔리전쟁이다. 청동무기에 마차, 말, 마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관점에선 우습게도 상대편과 장소와 시간을 약속잡아 전투했다고 한다. 전차가 평지에서만 운영이 가능하니 그랬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청동기 때 전차전투가 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인접군 귀족끼리 서로 아는 사이거나 인척이다 보니 전투에서 패배해도 대량학살이나 인명살상은 많지 않았다.

 본격적인 전투 규모의 확장은 철기시대 부터였다. 그리스는 보병중심의 부대를 갖추었는데 평지가 없다보니 기병이 양성되지 않고, 기병이 없다보니 궁병역시 양성하지 않았다. 상성상 보병은 궁병을 잡고, 궁병은 기병을 잡으며, 기병은 보병을 잡는다. 그리스 보병은 궁병과 기병이 없다는 점에서 약점을 갖지만 강력한 팔랑크스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팔랑크스 대형은 보병들이 여러열로 밀집해 오른손엔 긴 창을 왼손은 방패를 들고 전진하는 대형이다. 방패는 상당한 크기로 자신 뿐만 아니라 옆편의 아군까지 보호했다. 팔랑크스 대형은 강력하지만 약점도 있었는데 공성전을 하지 못했고, 전진공격밖에 되지 않으며, 평지가 아닌 산지에선 대형유지가 안되 쓸모가 없었다는 점이다. 팔랑크스 대형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서로들 사람인지라 팔랑크스 대형끼리 붙다보면 대형이 점차 오른쪽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이유인즉슨, 상대편이 창으로 찔러대니 왼손의 방패를 창만 들고 있는 자신의 몸 오른쪽에 슬슬 놓기 시작하고, 옆의 아군이 방패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하는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팔랑크스 대형끼리 맞붙으면 대형의 왼편이 적에게 노출되게 된다. 그렇다보니 팔랑크스 대형에서는 오른쪽엔 공격력이 강한자를 왼쪽에는 수비력이 강한자를 배치했다. 팔랑크스 대형의 전투결과는 극적이었는데 막강한 밀집대형이지만 조직력으로 버티는 지라 먼저 틈을 보이는 쪽이 수비대형이 무너져 갑작스레 적의 창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전술은 무거운 창과 방패를 오래들고 있는 쪽이 이기는 사실상의 체력전이었다.

 중세의 몽골 군은 세계최강의 군대였다. 몽골군은 거의 모조리 기병이었는데 말이 워낙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모두 안짱다리라 보병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또한 말때문인데 몽골인들이 워낙 어려서부터 말을 타다보니 그에 적합하게 다리에 변형이 와 안짱다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몽골군의 강점은 몇가지가 있는데 우선 몽골군은 수가 워낙 적다보니 자신들의 인명을 최우선하는 전략으로 전투를 했다점이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고 근접전을 최대한 피하고 멀리서 활로 공격하는 전략을 주로했다. 기본적인 전술은 만구다이라는 유인책들이 적을 유인해와 본진이 포위하여 적은 활로 섬멸하는 방식이었다.

 다음 강점은 이들의 빠른 기동력이었다. 몽골군은 조랑말을 이용하여 말이 순발력은 좋지 못했지만 지구력이 우수했다. 이런말로 하루에 수백킬로미터를 진군했다. 거기에 이들은 다른 농경국가와는 다르게 보급부대가 필요치 않았다. 식량을 말린 젖이나 말린 고기를 이용했는데 말린 고기를 물에 풀어 끓여 먹으면 훌륭한 식사가 되었다. 거기에 병사 일인이 수마리의 말을 갖고 다니며 교체하며 탔고, 말이 못쓰게 되면 잡아서 말고기로 사용했기에 웬만하면 보급에 의한 식량문제는 몽골군과 상관이 없었다.

 다음 강점은 흡수력과 합리적 정신과 잔혹함이다. 몽골군은 공성전과 수전에 약했다. 하지만 금나라와 호라즘을 공략하면서 그들의 공성기술을 익혔다. 고려에선 수전을 익힌다. 거기에 몽골군은 인명을 중시하고 오로지 이기는 것만이 우선이기에 상대편을 철저히 도구화한다. 몽골인은 풀을 먹는 사람과 고기를 먹는 사람으로 인간을 분류하고 고기를 먹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풀을 먹는 사람을 천시했는데 농경민이 바로 그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을 마구 학살하였고, 전쟁에 동원해 공성전시 앞장 세웠다. 그들은 화살받이가 되었거나 상대편 공성군의 사기와 체력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다. 몽골군은 마무리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초원이 근간이기에 점령한 성은 무너뜨리고 풀로 태워 초지화했다. 상대편에겐 항상 항복을 강요하였고, 저항시엔 모두 죽여 항복하는 적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원한이 있거나 본보기가 될 경우엔 항복의 약속을 어기고 모두 학살하는 만행도 더러있었다. 이런 몽골의 사고는 지배적인 종교나 철학 및 문화가 전반적으로 부재하고, 오로지 수적으로 열세인 유목민의 수를 중시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다 할 것이 없기에 흡수도 쉬웠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3대첩은 진주대첩과 한산도대첩, 행주대첩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입장에서고 일본입장에서는 우리에겐 가장 뼈아픈 칠천량해전과, 울산성전투, 벽제관 전투가 조선정벌의 3대전투다. 이중 벽제관 전투가 가장 의아한데, 이는 명군에게 일본군의 무서움을 알리고 이로인해 전황을 교착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명군은 초기의 실패를 딛고 이여송이 요동5만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하며 위세를 떨친다. 문제는 그 여세를 몰아 한양을 탈환코자 벽제관까지 정예기병을 이끌고 치달았다는 점이다. 일본군의 유인에 걸려 조총의 집중 사격을 당하여 패전하는데 지휘관만 무려 15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의외로 명군과 일본군의 피해는 비슷한데 막강했던 명군의 기병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벽제관 전투로 일본군을 명군과 조선군의 추격없이 남부로 피신하여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 전투이며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아 전황이 길어지는 것을 천추의 한으로 기록한다.

 칠천량해전은 임란중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배로 일본군은 거의 피해없이 일만에 달하는 조선군을 그야말로 학살한다. 낌새를 눈치채고 탈영한 경상우수사 배설의 12척이 통제사 이순신의 명량해전에서 쓸수 있었던 유일한 전력이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남으로 피신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는다. 당시 일본은 봉건영주가 성을 빼앗기면 패배하는 형태였기에 축성술이 매우 발달해있었다. 조명연합군은 마음먹고 가토 기요마사가 있던 울산왜성을 공격하지만 양측모두 치열한 전투끝에 1만5천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조명연합군이 포위를 풀어 끝이난다. 당시 물부족과 식량부족에 고전한 가토는 임란후 자신의 영지인 구마모토로 돌아가 성을 쌓으며 무려 우물을 12개나 팠다고 한다. 이 전투의 의미는 일본군이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며 히데요시 사후 무사히 퇴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

 베트남은 대단한 나라다. 2차대전후 아무것도 없는 무장상황에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기습전으로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공산화를 막기 위해 미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무장도 완벽하고 심지어 고지를 차지한데다 숫적으로도 우위였다. 그런 이들은 고지를 파고들어 점령했으며 무기를 분해하여 고지를 올라가 방공포를 설치해 상대의 공군전력도 무력화했다. 프랑스는 2차대전에 참여한 정예들이 일만이나 포로로 잡혔으며 이 큰 저당으로 인해 베트남에서 손을 뗄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가혹한 육로이동으로 일만중 무려 8천이 죽고 만다.

 이후 공산화가 이루어지자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한다. 마음같아선 북베트남을 치고 싶었지만 중국이란 큰 존재가 있기에 어쩌질 못한다. 중국과 인접한 공산국을 치면 어떻게 되는지를 한국전에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킹만 사건으로 명분을 어거지로 만든 후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직접 공격이 아닌 폭격을 감행한다. 전쟁은 북베트남이 공격해오기 전까지 주로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이루어진다. 하지만 미군의 보급로 차단 작전은 실패한다. 북베트남 정보는 보급로로 인근 사회주의 국가들을 경유하여 설정하여 미군이 어찌할 수 없었고, 베트남 내부에서는 정교하고 방대한 땅굴을 이용해 안전했다. 미군은 네이팜탄과 고엽제등으로 짜증나는 정글을 없애려 했지만 열대의 습기찬 정글은 좀처럼 타질 않았다. 밀림속에 감춰진 곡사포로 공중전도 쉽지 않았으며 기관총만 갖고 있는 베트남의 미그기에 미사일로 무장한 팬텀기가 일방적으로 당했다. 워낙 덥고 습한지역이라 열감지 장치가 잘 작동하지 않았고, 적의 후방을 잡기 위해 팬텀기가 크게 선회해야했는데 고장도 잦았다. 미국은 이런 복합적 요인을 감당치 못하고 패전한다. 베트남 전쟁은 기간이 무척 길고 폭격이 무척 잦았음에도 인명피해는 양측합해 200만이 안될 정도로 상대적으로 인명손실이 적었다. 밀림으로 인해 직접전이 적었고, 숨을 만한 곳이 많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이 전쟁외에도 다양한 전쟁들이 재밌게 실려있다. 한국인이 썼음에도 서양의 전투사가 대부분이란게 좀 아쉽다. 한국, 중국, 일본의 국제적이었던 고수, 고당전쟁이나 규모가 컸던 중국왕조들의 전투도 다루었으면 좋지않았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좋은 책이다. 빠르고 재밌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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