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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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의 책을 처음 본 것은 대학 초년 시절 본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이었다. 지금 보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당시만 해도 간신히 읽고 잘 이해도 안갔었다. 전공이 경제학이었음에도 말이다. 책에서 유시민은 경쟁과 그를 위한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 경제의 효용을 극대화한다는 소위 자유주의 계열의 부자의 경제학과 평등과 복지, 이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빈민의 경제학'을 나눠 제시하였다. 

 이번 '역사의 역사'도 그렇게 나눴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오직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입장과 주관적인 서술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물론 당연히 저자는 이 정도 생각은 해보았을 것이고 그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서술을 했을 것이다. 

 책 '역사의 역사'에서는 고대 역사의 시작으로 알려진 시점부터 최근의 역사서술을 망라한다. 물론 중요한 역사서와 사람만이다. 처음으로 다룬 것은 당연히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투기디데서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만큼 역사를 저술했고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저술했다. 두 사람 모두 문자시대 초기의 사람으로 당시 대부분의 정보는 구술로 전해졌고 문자로 접한 것도 구술을 문자화한 것이었다. 많은 정보가 전달과정에서 즉시 사라졌고 살아남아도 전승되는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왜곡, 각색, 변형되었다. 이들은 이런 시대를 살았기에 상당히 지금의 관점에서는 문제가 많은 역사서를 쓸수 밖에 없었지만 매우 의미있는 작업을 해내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당대의 문명이었던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이집트 등의 문명에 대한 지리, 인정, 도시 ,민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내었다. 그리스 인임에도 이들 문명에 대해 불편부당하지 않았고 적절한 분량을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그래도 그의 성향은 딱딱한 사실 중심보다는 군데군데의 빈 이야기를 주관적으로 채워나가는 서사꾼이나 이야기꾼에 가까웠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정보의 진위와 가치를 비교적 꼼꼼하게 점검하였고 사실을 시간순으로 배치하며 신화와 전설을 최대한 배제하였다. 그래서 그의 역사서는 현대의 역사서와 비슷한 형식과 내용을 갖췄다. 여기에 주요사건들이 서로 몇년간의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서술하여 현대의 역사가들이 해당 사건의 연도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아시아의 역사가로는 역시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크고 작은 전쟁, 국가의 흥망, 다야한 사회 제도의 특성과 변화, 개인의 생애, 전설과 신화에서 한 왕조에 이르는 수천년 중국 사회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서술하였다. 중국은 기록을 중시한 나라로 종이가 없었음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었다. 사실을 중시한 사마천은 사기를 쓰며 무려 103종의 책을 참고 했다. 역시 죽간이 없었기에 최초의 사기는 죽간에 남았다. 본기 12권, 표10권, 서8권, 세가30권, 열전70권 총 130권이다. 본기는 황제나 그에 준하는 권력자의 행적과 업적을, 표는 중요한 역사적 서술을 연대순으로 배열했다. 서는 도덕, 음악, 군사, 천문, 치수 등 고대 중국 문화나 제도의 특징과 변화를, 세가는 춘추전국시대 왕과 제후를 비롯하여 황제까진 아니지만 세상에 영향을 미친 권세가에 대해, 열전은 지식인, 정치인, 강도, 자객, 광대까지 독특한 개인의 생애를 다뤘다. 

 사마천의 이런 역사서술체계는 기전체라 불리며 19세기 후반까지 중국 문명권의 역사서술을 지배한다. 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사마천의 사기도 약점은 많다. 우선 주변민족이나 국가에 대해서는 자신이 비판한 공자의 춘추필법을 따라 부정확하고 단편적이며 편향적으로 서술한다. 여기에 기록된 사실이 빈약한 열전에서는 문학적 상상력도 많이 발휘한다. 물론 이 부분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슬람 세계엔 그 유명한 이븐 할둔이 있다. 그는 역사 서설을 썼는데 그의 특이한 점은 문명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고 세계를 7개의 기후대로 나누어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살피면서 인류사를 서술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역사서설은 과학과 역사의 첫 만남이라 할 수 있으며 그래서인지 책 뒷부분에 언급하는 총균쇠 및 사피엔스와 닮았다. 이븐할둔은 뜬금없게도 역사서설 중반중반에 과도할 정도로 신에 대한 찬양을 하는데 유시민은 당시 종교적 압박이 강했던 이슬람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것을 파악한다. 

 유럽으로 돌아가 랑케가 등장한다. 그의 시대는 산업과 과학의 시대로 랑케는 많은 학문들이 전문화하고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태어나 자신의 전문분야에 전문역사학자로 일할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보수적 성향으로 군주제를 옹호했기에 유럽의 여러 각종 문서와 왕실 도서관에 접근할 수 있었다. 랑케는 과학기술문명은 진보하나 인간의 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역사철학을 보였는데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니 신학과 군주정이 옹호되었다. 랑케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이런 그의 생각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큰 사고를 불러왔다. 물론 이는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지만 역사가 객관적 학문이라는 생각을 불러와 많은 역사가들을 정치적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점도 있었다. 

 유시민은 맑스도 역사가로 본다. 그의 공산당 선언이 역사의 주체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역사가들의 관심 밖에 놓였있었던 노예, 농노, 노동자, 농민 등의 피지배계급을 사회를 변혁하고 역사를 만드는 주역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유물사관도 매우 이례적이다. 당시만 해도 물질적인 것 보다는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질서나 이성, 법칙에 대한 관심이 사회에서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맑스는 물질이 먼저이고 인간의 정신과 의식은 나중이라는 유물론을 주장했다. 

 조선의 역사가도 언급된다. 우리의 역사가로 유시민은 박은식과 신채로 백낙준을 거론한다. 박은식은 조선망국과정을 정리한 한국통사와 이순신전, 안중근전을 남겼다. 박은식은 다소 옛 인물로 개명유학자이기에 한문이 가장 편해서인지 순한문체로 저술했다. 때문에 초기엔 보수적인 시각도 남아있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훗날 쓰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한다. 신채호는 고대사 검증에 주력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남겼는데 사실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다루고 싶었으나 무장투쟁운동에 주력하고 체포되고 옥사하게 되면서 단군부터 백제의 패망까지만을 다루게 되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주터전이 한반도로 국한된것이 아니라 만주나 요동까지였음을 밝혀냈다. 

 에드워드 카는 랑케와는 다르게 정확성은 역사가의 미덕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사실은 이야기로 남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다. 역사가가 그 사실을 남기고 다루어야만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랑케는 객관적 역사 서술을 위해 문헌을 무척 중시했지만 사실 이 문헌조차 어떤 역사가가 과거의 특정 사실만을 주목해 기록으로 남긴 것에 불과하다. 크로체는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로고 선언했다. 역사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의 임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닌 평가하는 것이 된다. 역사가와 사실은 평등한 주고 받는 관계다. 역사가는 끊임없이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반대로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기도 한다. 즉, 역사란 오늘을 사는 역사가들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19세기까지 역사가들은 민족이나 가문, 왕조, 사회, 지역,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서술했다. 하지만 토인비가 등장하면서 역사는 문명단위로 승격된다. 토인비는 유럽은 역사가 모두 연결되어 대영제국을 제외한다면 개체로 연구할만한 국가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슈팽글러의 영향을 받았는데 슈팽글러는 서구의 몰락이라는 저서에서 서구 중심의 역사관을 한물간 천동설과 동격취급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역사도 중시하는 자신의 역사관을 지동설로 취급하고 스스로를 역사학의 코페르니쿠스로 칭하기도 했다. 토인비는 그의 관점을 받아들여 서구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역사를 서술했다. 토인비는 20개가 넘는 당대 문명에 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였고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찾았다. 그는 인종과 환경설을 모두 배척하였고 문명은 외부환경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 응정과 실패로 흥망성쇠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토인비가 말하는 도전은 다섯 가지로 척박한 땅이 주는 도전, 새로운 땅이 주는 도전,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침공), 외부의 계속적인 압력, 사회 내부 집단에 대한 제재(압제)다. 사회의 진보는 이런 도전에 대해 소수의 창조적 천재에 의해 이뤄진다. 이들이 이런 도전을 창조적이고 성공적으로 다루면 비창조적 다수가 결국 이를 따르게 되고 사회는 성공한다. 이를 미메시스라고 한다. 하지만 창조적 소수자는 언젠간 그 창조력을 잃는다. 그러면 비창조적 다수는 기존의 미메시스를 철회하는데 이것이 네메시스다. 

 창조적 소수자는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망하는데 일시적인 자아의 우상화, 일시적인 제도의 우상화, 일시적 기술의 우상화가 그것이다. 용어는 다르지만 기존의 성공방식을 고수하다 새로운 도전에 적응못해 나타나는 문제다. 토인비의 패러다임에서는 세 집단이 있는데 창조적 소수자와 내적 프롤레타리아트, 외적 프롤레타리아트다. 내적인 집단 내부의 노예, 농노, 천민, 노동자등 피지배 계급이며 외적은 문명 외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집단으로 야만인이다. 이 세 집단의 상호관계가 문명의 향배를 좌우한다. 

 최근엔 역사서술의 하나로 인류사가 등장한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첫 등장에서 가장 최근을 다루는 인류사가 역사서술의 단위로 대두한 것이다. 인류사는 실제 과학과 역사를 전면 통합한다. 그래서 총균쇠나 하라리의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및 그외 여러 학자가 다루는 최근의 인류사 책을 보면 이것이 과학서적인지 인류학 서적인지 헷갈리는 이유다. 총균쇠를 쓴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토인비와는 다르게 환경을 인류사에 주 원인으로 다뤘다. 인간의 차이 및 사회 문화와는 크게 무관하게 인류사는 환경이 좌우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륙마다 가축, 작물의 분포가 큰 차이를 보이고 확산과 이동의 속도가 대륙마다 지형, 기후에 의해 크게 다르며, 대륙마다 고립도가 다르고, 대륙마다 인구과 민족 분포가 다름을 제시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4가지는 객관적 증명이 가능한 것으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하였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더 나아가 인류사는 사실 역사적 사건이 아닌 생물학적 사건이라 말한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혁명인 인지혁명과 농업혁명, 과학혁명이 일어났는데 다른 모든 혁명을 사실상 촉발한 첫번째 혁명인 인지혁명이 인간 뇌의 생물학적 변화로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라리는 과학혁명이 인류사의 마지막 혁명이 될 것으로 파악했다. 이를 통해 인간은 호모사피엔스에서 벗어나 호모 데우스의 길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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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6-28 1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방대한 내용을 기준점을 잡아 정리하는 능력 참 부럽습니다.

닷슈 2022-06-29 16: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런데 자꾸 정리만 하고 제 생각이 잘 안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꼬마요정 2022-06-29 18:38   좋아요 1 | URL
네엣? 닷슈님 생각이 안 들어가다니요ㅠㅠ 너무 잘 쓰시는데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하시다니... 또 부러워하면서 배워갑니다^^
 
폭격기의 달이 뜨면 - 1940 런던 공습, 전격하는 히틀러와 처칠의 도전
에릭 라슨 지음, 이경남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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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관총의 발명으로 지루한 참호전이었던 1차대전에 비해 2차대전은 신무기의 향연이었다. 전차가 등장하여 참호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해상에서는 잠수함과 구축함, 그리고 항공모함이, 공중에서는 전투기와 폭격기가 등장했다. 

 이중 폭격기는 적의 요격 범위와 관찰 범위를 벗어난 먼 상공에서 그리고 전선에서 멀리 벗어나 기존엔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적의 최후방을 타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리고 폭격이 정확할 수 없었음과 더불어 다분히 큰 의도성을 갖고 후방의 민간인을 타격하였다. 그래서 2차대전 당시 사람들은 이 신무기에 전율했고, 공군력이 강했고 멀리 바다로 인해 떨어져 있어 적의 본토를 직접 타격할 수 없었던 영국, 독일 양국은 서로를 폭격했다.

 책 '폭격기의 달이 뜨면'은 독일의 프랑스 점령 이후 미국의 참전을 기다리며 독일의 항공 공격을 버텨냈던 영국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주인공은 영국의 총리 처칠일가와 그 가족 및 조력자들이며 1940년에서 1941년까지 서로를 폭격한 역사를 다룬다. 책은 기본적으로 다큐이면서도 소설 같기도하며 역사적 사실도 충실이 다루고 있어 무거운 두께를 가졌음에도 술술 넘어간다.  

 1940년 4월 막강하다 여겼던 프랑스의 마지노선이 독일의 전격전에 쉽게 무너졌다. 영국은 이 사실을 초기에 믿지 못하였는데 자신들이 관측한 바 프랑스의 마지노선은 매우 막강했고 그들의 육군 역시 독일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저지대 국가들이 이렇다할 저항없이 항복해버렸다. 파견한 30만에 가까운 영국지원병력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곧 독일이 영국을 직접 타격할것이 분명해보였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시 영국의 총리는 체임벌린으로 그는 독일에 대해 유화책을 썼지만 결국 실패였다. 책임을 물어 사임하게 되었다. 영국 국왕 조지는 핼리팩스를 후임 총리로 염두에 두었지만 체임벌린과 정가의 성택은 처칠이었다. 처칠은 해군장관 출신으로 과거 전쟁실패로 사임했지만 전장에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대영제국이 독일을 맞아 버텨낼순 있어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미국의 참전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열쇠였지만 당시 미국대중은 오래된 고립주의로 인해 이 지경에도 유럽에 일말의 관심이 없었다. 

 히틀러는 1940년 5월 24일 역사책에도 남아있는 결정적 패착 두 가지를 범한다. 하나는 30만에 달하는 영국 원정국의 뒤를 쫓던 기갑사단에 전격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이다. 손실과 정비를 취하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병력이 귀환하게 되어 영국의 숨통을 틔워주게 된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영국 원정국 궤멸의 기회가 있었는데 괴링의 꾀임에 넘어가 이 임무를 항공부대인 루프트바페에 넘긴 것이다. 그래서 영화 덩케르크에는 독일 육군보다는 항공 부대에 의한 공격이 주로 자행된다. 

 1940년 5월 26일 처칠은 프랑스 해안에서 영국군을 철수시키는 다이나모 작전을 개시한다. 히틀러의 패착과 날씨의 도움으로 프랑스군 12만 5천 포함 총 33만의 대병력이 탈출에 성공한다. 물론 무기를 챙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작전의 성공으로 영국은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이런 대규모 상륙귀환이 쉽게 가능하다면 독일 역시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에서 지근 거리인 영국 해안에 상륙작전을 감행할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으로 영국에 대규모 상륙을 계획하기도 한다. 

 전쟁 전 영국은 다행히 레이더의 개발로 독일 공군의 접근을 사전에 알 수 있었다. 다만 기능이 미흡하여 적들의 고도와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었다. 영국 RAF 조종사들은 레이더 덕에 적을 쉽게 발견하고 격퇴하는게 가능했지만 레이더는 대강의 위치만 알려줄 뿐 결국엔 적을 육안으로 찾아야 했기에 야간에 이뤄지는 공격엔 방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적도 야간 공격이 불가능할터이니 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영국은 생각했다.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가 결국 히틀러와 휴전협상한다. 처칠은 육군을 그렇다쳐도 프랑스가 보유한 막강한 함대가 걱정되었다. 이들이 히틀러의 손에 들어갈 경우 지중해는 물론이고 대서양 및 북해가 독일에 넘어갈 판국이었다. 이에 처칠은 접근 가능한 모든 프랑스 함대를 무력으로 접수하는 캐터펠트 작전을 개시한다. 영국의 소머빌 제독을 프랑스 제독에 영국과 함께 싸우던가 아니면 영국 항구로 이동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 항구로 가서 무장해제 한 후 미국으로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날린다. 격분한 프랑스 제독은 이에 반발하고 교전이 벌어진다. 메르셀케비르 사태다. 프랑스 전함 브레타뉴가 침몰하고 프랑스군 1297명이 사망한다. 이 사건은 아군끼리 교전하는 비극이었지만 향후 프랑스 함대가 영국으로 이양되고 무엇보다 독일과 다른 세계에 영국의 교전의지를 내비친 주요 사건이 된다.

 히틀러가 영국지상군을 놓친 이유는 사실 그 자신이 영국에 큰 관심이 없어서였다. 히틀러의 주 목적은 영국이 아닌 소련이었다. 그래서 히틀러는 초기 위용을 보이면 영국이 지레 겁을 먹고 강화 및 평화협상에 들어갈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서부전선을 안정화 시킨 후 동부에 전력을 집중해 소련을 정복하는 것이 애초 그의 계획이었다. 

 영국이 항복할 의사가 없음이 분명해지면서 독일의 폭격기들이 영국 영토를 깊숙히 침범하여 폭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목격자도 많아지면서 전쟁은 피부에 와닿게 되었고 영국 RAF 조종사들도 빠르게 영웅이 되어갔다. 7월 14일 급기야 영국 BBC라디오는 이동취재팀을 이용하여 도버절벽에 기지국을 설치하고 공중전 상황을 중계하기 까지 하였다. 청취자는 열광했고 많은 지식인들은 이런 행태를 비판하였다. 

 영국 RAF는 당시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기가 주력이었다. 이들은 중무장에 기동성이 우수했다. 독일의 메셔슈미트 ME109는 높은 고도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였고 방어가 강한 중장갑을 구축했다. 스핏파이어는 8정의 기관총을 ME109는 2정의 기관총에 2문의 기관포를 보유하여 화력이 비슷했다. 두 기종 모두 90분정도 비행의 연료탱크를 보유하여 작전에 지장이 많았고 독일의 경우 런던을 공격하고 간신이 돌아올 정도였다. 독일의 조종사들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여 전투경험이 많고 평균 26세였던 반면 영국은 전투경험이 적고 20세의 나이였다. 

 당시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었다. 영국 입장에선 그나마 참전 가능성이 있는 루스벨트의 재선을 바라는 입장이었다. 한편 루스벨트는 고립주의 여론이 만만치 않은 자국에서 쉽사리 선거를 앞두고 영국을 도울 수 없었다. 거기에 미국은 1차대전 이후 사실상 비무장 상태였다. 병력도 고작 육군 17만 4천에 불과했고 개인화기도 1차대전에나 쓰던 스프링필드였다. 처칠은 해군력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미국에 낡은 구축함 50대를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응하기 쉽지 않았는데 미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영국의 대서양 기지를 미국이 장기 임대하는 조건으로 구축함을 거래형태로 넘기는 것을 제안한다. 

 한편 1940년 8월 13일 괴링을 폭격기 949기 , 급강하 폭격기 336기, 전투기 1002기등 총 2300기로 공격을 감행한다. 독일은 이때 비밀항법 빔을 개발한 상태였다. 이 빔으로 비행기를 유도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적진으로 항공기를 운행할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 RAF 는 이를 사전에 파악하여 교란빔을 개발해 놓은 상태였다. 이런 대규모 공격은 처음이기에 독일은 폭격기와 이를 엄호하는 전투기가 편대를 맞추는데만해도 30분을 소요했다. 전투기가 90분 운용만 가능하다는걸 생각하면 고작 작전시간이 60분 남은 셈이었다. 전투결과는 독일에 실망스러웠다. RAF 는 13기를 잃은데 반해 독일은 48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영국 RAF 의 강한 저항으로 공중전과 폭격에서 생각보다 재미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영국을 충분히 압박하고 있었는데 바다에서 U보트의 활약덕분이었다. 이들은 중요한 부품과 도구를 실은 배를 꾸준히 격침시켜 영국에 물자와 생산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폭격 역시 효과를 발휘했는데 겁에 질린 노동자들이 사직하거나 일을 거부하기도 했고 잘못된 경보로 인해 공장이 수시간 마비되는 일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폭격 이후 매우 힘들어졌는데 그런 이들에 희망을 준 것이 차였다. 이는 전쟁의 트라우를 진정시켰고 실제 공습 중 대피소나 공장, 군부대, 가정에서 차는 꾸준히 존재하며 사람들을 도왔다. 처칠이 끝까지 차배급에 손을 떼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영국은 처칠이 전쟁 초기 공군력을 강화하기 위해 선임한 항공생산부 장관 비버브룩의 놀라운 활약으로 8월 무려 476기의 전투기를 생산해낸다. 이는 자신들의 예상부도 200기를 상회하는 업적이었고 독일은 상상치 못한 수치였다. 

 독일은 영국 런던을 꾸준히 공습하였는데 그 결과 지붕에 뚫히고 유리창이 파괴된 집들이 많아졌다. 유리가 부족하여 판자나 천으로 메꾸는 일이 많아 비가 스며들었고, 전기와 가스는 잦은 공습으로 수시로 끊어졌다. 사람들은 잠을 이루기 어려워졌는데 언제 사이렌이 울릴지 모르고 거주공간도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난민의 수도 크게 늘어나 정부는 임시막사를 늘리고 특별 비상법으로 개인의 집을 징발하여 난민을 같이 살게 하였다. 사람들은 잦은 사이렌으로 위장장애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며 배급제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스스로 농축산물을 키워 자력구제하는 시민들이 늘어났다. 공습은 재밌게도 사람들의 성적 문란도 부추겼다. 젊은이들은 돈이나 결혼 때문이 아닌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쉽게 섹스했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혼외정사도 흔한일이 되었고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죽음 앞에서 자손 번식을 위한 성욕이 높아진 셈이다.

 지치긴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은 야간 폭격으로 스트레스가 높아졌다. 그들은 출격하는 항공기와 귀환하는 항공기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일정한 일정과 신중하게 짠 경로를 따라 비행해야했다. 

 영국 폭격이 여의치 않자 히틀러는 전략을 대폭 수정한다. 히틀러가 보기에 영국은 끝까지 버티고 있었고 이로 인한 미국의 전쟁 참여는 시간문제가 되어버렸다. 히틀러는 스탈린을 믿지 않았는데 히틀러는 그가 팽창야욕으로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히틀러는 스탈린의 소련이 더 강해지기 전에 소련을 제거해야한다는 판단에 이른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면 영국은 물론이고 소련과도 동맹을 맺어 독일을 포위할텐데 그 전에 소련을 먼저 제거해야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오랜 숙원인 아리아인을 위한 레벤스라움을 확보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처칠에게는 다행스럽게도 1940년 11월 5일 루스벨트가 10%이내로 대선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이 때 독일은 영국의 유서 깊은 도시 코번트리를 공습한다. 독일은 무려 11시간이 넘게 도시를 폭격하였는데 민간인 568명이 사망하고 856명이 중상을 당한다. 루프트바페는 고폭탄 500톤 소이탄 2만 9천발을 사용하여 건물 2294채를 파괴하고 4만 8940채를 파손시킨다. 이는 거의 도시 하나를 지워버리는 수준의 손실을 가져와 향후 영국은 공습에 의한 피해 정도를 1코벤트리 2코벤트리 하는 식으로 기준으로 삼게되기 까지 한다. 

 겨울이 다가오자 파손된 집은 추위를 막지 못한다. 깨지고 부서진 지붕과 창문으로 눈, 비, 바람이 들이닥쳤고 전기, 연료가 자주 끊겨 난방도 여의치가 않았다. 등화관제로 난방을 하는 것은 더욱힘들었다. 사람들은 공습경보가 울리면 공공 대피소르 피난했는데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런던의 공공대피소는 더럽고, 악취에 , 습하여 대중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3층 침대마저 사용했는데 층간 높이가 너무 낮아 옆으로 눕는게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대피소내 임시변소도 매우 비위생적이었고 심지어 침대 근처이 있기까지 했다. 

 히틀러는 결국 1940년 12월 1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 시점에 전쟁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크리스마스는 중요했다. 영국 처칠은 독일의 공격이 없는 한 이 시기 공격을 감행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다행히 독일도 이에 응해 양국의 사람들은 모처럼 비공식 휴전 기간을 갖게 되었다. 다만 공습오인 우려로 교회에서 종소리만은 금지되었다. 

 1940년 한 해동안의 독일의 런던 공습으로 영국은 시민 1만 3596명이 사망하였고, 1만 8387명이 중상을 입는 피해를 입었다. 공습은 물자도 파괴하였는데 1941년 1월 12일 폭격은 설탕 2만 5천 톤과 치즈 730톤, 차 530톤, 베이컨과 햄 288톤, 잼과 마멀레이드 970톤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배급제에 시달리던 영국민들에겐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1941년 2월 8일 미국 하원에서 무기 대여법이 통과된다. 그 낡은 구축함 50대의 인도가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는 1941년 3월 8일 작전지시 24호를 발령한다. 이는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극동의 일본이 군사행동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강력한 영국군의 발을 극동에 묶고 미국 역시 유럽보다는 태평양으로 향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1941년 4월 12일 독일은 영국 브리스틀을 공습한다. 6시간 동안 200톤의 고폭탄, 3만 7천개의 소이탄을 투하해 180명이 죽고 382명이 부상당한다. 독일은 시간지연 폭탄과 소음을 내는 폭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심과 트라우마를 안겼고, 시간 지연 폭탄으로 인해 피해지역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해 구조를 늦어지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 처칠은 이 와중에도 폭격 바로 다음날 브리스틀을 방문하여 대학학위수여식에 참석해 대중을 감동시킨다.

 4월 17일 런던 공습으로 사망자 1180명의 사상 최악 피해가 난다. 피카달리, 첼시, 풀몰, 옥스퍼드 스트리트, 화이트홀등이 피해를 입었고 크리스트 경매소도 파괴된다. 상징적인 해군 건물도 큰 균열이 갈 정도였다. 4월 24-25일 영국군 1만 7천이 그리스에서 패주한다. 다음 날 1만 9천 병력이 철수하는데 처칠이 총리가 된 후 노르웨이, 덩케르크에 이은 3번째 대규모 패주였다. 

 영국 RAF는 독일 항법 빔을 능숙능란하게 교란하고 교란유도 지점에 유인용 화재를 일으켜 독일 폭격기를 상당히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처칠은 비버브룩을 통해 항공전 방어를 위해 국력을 항공기 생산에 집중하였다. 하지만 이는 전차의 부족을 야기하여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그 대가를 치루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히틀러가 바다사자작전이라도 감행하는 날엔 본토를 방어할 기갑사단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다. 

 1941년 5월 10일 저녁 11시 독일이 6시간 동안 최대 공습을 감행한다. 6시간 동안 소이탄 7천개 고폭탄 718톤, 폭격기 505기가 동원되었다. 화이트 홀과 웨스트 민스터 사원이 큰 피해를 입었다. 블룸스베리에서 불길이 일어 대영박물관의 책 25만권이 소실된다. 이 공습으로 사망자는 1436명 이재민이 1만 2천명, 중상자가 1792명 발생한다. 하원 본회의장 마저 파괴될 지경이었다. 

 한편 독일의 전력이 소련과의 전쟁으로 동부로 집중됨에 따라 5월 폭격 사망자는 5612명이던 것이 6월엔 410명, 월엔 162명, 12월엔 37명으로 크게 감소한다. 여기엔 공대공 레이더의 개발과 빔교교란의 효과 대공포의 정확도 상승으로 격추율이 상승한 것도 기여했다. 1940년에서 1941년의 폭격기간동안 영국 전역에서의 사망자는 민간인 4만 4562명, 부상 5만 2370명이었다. 이중 어린이 사망자는 5626명에 달했고 런던에서만 2만 9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941년 6월 독일은 마침내 소련을 침공했고, 12월엔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다. 처칠은 기다렸다는 듯 루스벨트와 함께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요구에 응해준 일본에 보답하기 위해 히틀러는 12월 11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오래 버틴 끝에 처칠이 원하던 미국의 참전이라는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잠자던 사자는 히틀러의 예상과는 다르게 유럽과 태평양 양쪽을 감당할 위력을 갖고 있었다.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잠자고 있었기에 초기의 전황은연합국에 좋지 못했다. 영국은 극동의 보루인 싱가폴을 일본에 빼앗기고, 독일은 크레타에서 영국을 몰아내고 루브룩을 점령한다.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1942년 말부터로 영국은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눈엣가시 같던 롬멜을 격파한다. 그리고 미국은 미드웨이에서 일본을 격파한다. 

 처칠의 오랜 버티기가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2차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요인은 크게 세 가지 정도라 생각한다. 우선 소련이 상당한 피해를 보며 독일의 기갑사단과 육군을 결국 막아낸 것, 그리고 미국이 참전한 것, 영국이 그 소련과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기 전까지 프랑스의 궤멸에도 불구하고 홀로 버텨낸 것이다. 책은 세 번째를 다루는 것이다. 당시 영국의 처절함과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폭격의 무서움과 사람들의 공포와 생활을 잘 다루었다. 사람들은 폭격이 막 시작되고 나서야 그것의 시작을 알 수 있었고, 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소리나는 폭탄은 폭탄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대강 알려주었지만 그렇다고 피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 지연 폭탄(불발인지 시간지연인지 알수 없었다)은 언제터질지 몰라 막 죽어가는 사람을 구조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적은 일부로 전기 수도시설을 파괴하여 화재진압을 어렵게 만들었다. 폭격의 타겟은 전쟁 초기 군부대 및 생산시설이었지만 전쟁이 지속되며 자연스레 민간인으로 바뀌었다. 모든 건물이 목표가 될 수 있었으며 그것을 사전에 알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살아낸 것이 대단하다. 이 책은 그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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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5-07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닷슈 2022-05-07 21:24   좋아요 1 | URL
늘 감사합니다. 좋은 연휴 보내세요.

강나루 2022-05-08 18: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닷슈 2022-05-10 22:1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나루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김건우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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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9년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하지만 당시 현정부는 야당과의 분쟁을 피하고 정치적 개혁과제의 원만한 수행을 위하여 건국 100주년 기념을 대대적으로 하지 않고 비교적 조용히 지나갔다. 이는 헌법에 대한민국의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국내에 상당함을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이를 반대했던 세력은 현 한국사회의 우익세력인데 상당히 아이러니 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파가 아닌  반공, 기독교, 민족주의 특징을 지닌 전형적인 우익세력이 중심인 집단이었다는 점이다. 현 한국의 우익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굳이 1919년이 아닌 1948년으로 잡고 싶은 것은 1948년의 정부세력이 전통적인 관점의 우파세력이라기 보다는 냉전질서에 기초해 당시 한국에 강한 세력을 행사하던 친미, 친일에 기초한 집단이었기 때문이며 이들이 현 한국 우익의 조상격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 한국 우익세력은 우익임에도 불구하고 사상의 중심에 자국 민족주의가 최우선이 아닌 친미 친일에 기초한 외교관계나 그들에 대한 의존이 더 우선시 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과거 이런 의존이 그들 집단의 생존과 권력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책 '대한 민국의 설계자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후, 남한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진정한 보수우익들에 대해 살핀 책이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반공, 기독교, 반일, 민족주의에 기초한 당시의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지만, 해방 후엔 미국과 연합한 친일 세력 중심의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이후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의 주류세력에 편입되지 못함으로써 한국 우익의 적장자들이 되지 못했다. 이는 한국사회의 안타까운 대목으로 아직도 진정한 민족주의의 실현의 어려움과(과거 독재정권과 지금의 보수는 민족주의를 매우 강조하지만 이는 독재 및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 다수의 시민을 경제적으로 희생시켜 상위층이 주로 이득을 향유하는 불공평한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왔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른 나라에 비해 우측으로 지나치게 편향되는 불균형성을 야기하였다.

 책이 주목하는 초기 우익들은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근거하는 우익 기독교인들로 이들은 대개 지주나 상공인 출신이었다. 분단과 함께 진영재편이 이뤄지면서 탄압을 받은 이들은 일찌기 공산주의의 좋지 못한 점을 경험하고 한국전 이전에 이미 반공정신을 투철하게 갖게 된다. 이들은 일제 시기 평양을 근거로 하는 도산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 중 여러가지 이유로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이들이 이후 건국의 주체로써 떠오르게 된다. 평안도에 기독교가 광범위하기 퍼져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조선시대 내내 차별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중국과 연결되어 있어 조선후기 실학이 꽃피던 시절부터 외부세계의 문명이 들어오는 입구로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서북은 일찍이 상공업이 발달했고 ,개화 계몽기에는 기독교가 빠르게 수용되었다. 기독교를 통한 서북의 개화는 사립학교의 대거 설립으로 이어졌는데 일제 말 각종 사립학교의 70% 이지역에 집중하였다. 서북인들은 과거 조선과는 다른 새로운 국가를 꿈꾸었고 이것이 이들이 발빠르게 개화한 주 이유였다. 

 책은 이런 인사들로 정치쪽에서는 장준하, 김준엽, 서영훈,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을 꼽는다. 그리고 종교인으로는 김수환, 지학순을 문인으로는 조지훈, 김수영을 언론인이나 학계에선 천관우, 이기백을 종교사상가로는 류영모, 함석헌, 김재준을 꼽는다. 이들은 일제말 제국의 학문을 접할수 있었던 매우 소수 엘리트로 1917-1923년 정도에 출생하여 학병으로 강제징집되는 나이대의 인물이었다. 어렸기에 친일을 강요당하거나 친일을 할만한 기회가 없었고 이로 인해 깨끗하고 주체적인 건국세력으로 물망에 오르는게 가능했다.  

 장준하는 학병으로 징집되어 탈출 후 대한광복군에 들어갔다. 박정희와 대립하며 자신의 광복군 출신임을 자랑했던 그였지만 당시엔 광복군의 현실에 적잖이 실망하였다. 광복군은 말로만 군대였지 훈련 및 시설이 매우 열악하여 제대로된 군사훈련을 커녕 도수제련이 고작인데다고 미약한 세력임애도 3개의 지대가 서로 파벌싸움을 하고 있었다. 장준하는 반공정신을 가진 인물로 이 중 김원봉이 이끄는 제1지대에 대해서 상당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장준하는 백범 김구계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이범석 계로 실제 그는 이범석이 해방 후 귀국하여 조선민족 청년단을 조직하자 여기에 합류한다. 장준하는 반공정신이 강했기에 통일정부를 구상한 김구와는 다르게 남한의 단독 정부수립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이런 장준하의 생각은 박정희의 독재와 1960년대 중반부터 함석한과 한국신학대학 계열 인사들과 교류하며 바뀌게 된다. 1972년 7.4남북 공동선언 때에 이르면 장준하는 중도통일 노선을 표명하고 한국사회의 모든 적폐와 문제점은 분단에서 기원함을 주장하고 이로인해 남북 통일을 민족 최대의 지상과제로 주장할 정도로 바뀌게 된다.  

 장준하가 한국사회에 기여한 큰 공로는 사상계의 출간이다. 사상계는 1950-60년대 대한민국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지식인 잡지로 1952년 4월 장준하와 서영훈이 '사상'을 출간하며 시작되었다. 사상의 발간에는 미국 공보원이 후원할 정도였는데 서북세력을 경계하던 이기붕과 박마리아에 의해 견제받아 폐간된다. 하지만 장준하의 은사 백낙준이 사상에 이은 사상계를 출간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백낙준은 한국사회에 뿌리 깊은 족적을 남겼는데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교육 목표인 홍익인간의 이념이 그의 작품이다. 홍익인간은 민족을 넘어선 세계주의적, 보편주의적 가치관을 표방하는 것이다. 그는 도마다 1개의 국립대학을 설치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실현시키기도 했다. 

 사상계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전성기엔 발행부수가 1만부에 달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말기까지 주요 인사가 서북출신에 편중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사상계의 편집 방향은 다섯 갈래로 민족의 통일, 민주사상, 경제발전, 새로운 문화창조, 민족적 자존심이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총체적 근대화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들은 국가이념의 모델로 서구자유주의를 설정하였으며 이는 이들 지식인들이 미국식 자유주의에 다소 경도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상계는 박정희 군사정부와 날을 세우게 되었고 군사정부는 세무사찰과 반품작전으로 이들을 압박하였다. 결정적 타격은 주로 대학교수였던 편집위원들을 압박하여 이들을 이탈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한국사회에서 교수들의 역할이 변하던 흐름과 맞물리기도 한다. 1960년대 이전의 대학교수들은 실천적 지식인에 가까웠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정부가 급여이외에도 연구비를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연구자로써 그리고 정부정책을 옹호하고 따르는 집단으로 변모하게 된다.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는 이런 실천지식인들에게 처음엔 환영받았다. 1960년대의 우익 지식인들은 이승만 정부를 구태세력으로 보았다. 그럴만도 한것이 그 중심세력이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에 국가를 잘못 경영하여 후배들에게 망국에서 자라나는 아픔을 선사한 망국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시의 우익 지식인들은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이 근대화를 열망하는 자신들과 결합하여 민족 근대화를 이뤄야한다고 생각했다. 무력을 가진 고려말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의 결합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때문에 당시 그들은 5.16을 무려 4.19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았다.

 사상계의 경우에서 언급했던 해방후 1950년대의 우익 지식인들은 근대화를 서구의 것을 따라가야하는 것으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망국의 아픔과 설움이라는 시대상황 속에 가질 수 밖에 없는 배경이었다. 하지만 이후 1960년대에는 근대화를 민족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변화가 생겨난다. 근대화의 맹아를 무조건 서구에서 찾기보다는 우리 본연에도 그러한 것이 있음을 바라보게 된것이다. 역사시간에 흔히 배우는 조선 후기 실학에서 자주적 근대화의 요소를 학습하게 되는 것은 이시기에 이뤄진 성과다. 

 한국우익 중에서는 무교회주의자들도 깊은 족적을 남겼다. 이들의 사상적 근원은 일제시대 일본학자 우치무라 간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 창조자로 천황에 대한 교육 칙어 불경사건과 러일전쟁 반대로 일본사회에서 찍힐대로 찍힌 인물이었다. 훗날 한국의 잡지 성서조선의 김교신, 양인성, 함석헌, 류석동, 정상훈, 송두용등이 그의 제자였다.

 성서조선은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의 가장 비타협적 지점에 위치한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하면서도 자신의 삶 전체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제도권 기독교와는 갈등관계였는데 그럴만한 것이 이들은 신앙공동체 자체를 교회로 파악하여 성직 제도나 예배당을 불필요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류달영은 5.16군사정부에서 국민재건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덴마크 모델에 기초한 국민교육, 농수로 제작과 농지개간을 하는 향토개발, 주택과 식생활과 환경을 개선하는 생활혁신, 도농자매결연, 결식아동급식등의 사회협동을 주장했다. 그는 가정의례준칙을 수립하고 각종 의식을 간소화했다. 무척 길던 결혼 예식을 지금수준으로 30분정도로 줄인 것은 그가 한 일이다. 그의 이런 사상은 훗날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달영은 국가주의자들과 사상적으로 부딪혀 정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는 마을금고라는 이름의 신용조합을 만들어냈고 평생교육이라는 개념도 최초로 사용한다. 

 이찬감은 1958년 충남 홍성 홍동면에서 지금도 매우 유명한 풀무학교와 풀무공동체를 설립한 사람이다. 풀무공동체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세계관 가치관 방법론을 집약한 곳으로 녹슨 쇠붙이를 녹이고 정련해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뜻으로 '풀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우치무라 간조의 위대한 범인과 함석헌의 씨알 개념을 사용하여 위대한 평민을 교훈으로 삼았다. 풀무공동체에서 학교는 하나의 마을이자 생활의 공동체로 이는 지금 한국 혁신 교육의 마을교육공동체와 이론적 실천적으로 연결된다. 지금은 유명한 유기농 역시 이 집단에서 시작되었다.

 함석헌은 우치무라보다 류영모에게 영향을 받았다. 류영모는 노자를 예수만큼 중시했는데 그는 참된 삶이란 신앙적인 진리 정신과 서민적인 근로정신이 일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함석헌의 씨알도 류영모에게 온 것으로 씨는 생명, ㅇ은 하늘, ㅏ는 극소이자 소우주인 자아, ㄹ은 활동양태다. 즉. 씨알은 우주의 생명의 내려와 인간의 얼이 된 존재다. 

 한국천주교는 개신교보다 그 역사가 오래됨에도 사회적 영향력이 미비했다. 이는 개별 교회가 각자 따로 노는 개신교에 비해 천주교가 로마바티칸을 중심으로 강한 통일성과 방침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즉, 지역성을 갖기 어려웠던 셈인데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로마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현대세계에 발맞춰 변화를 선택하면서 상황이 변하게 된다. 이 회의에서 기존 성직자 중심을 평신도 중심으로 이동시키고 미사에서 라틴어 외에 모국어도 사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김수환과 지학순은 사회 참여로 이해하였다. 

 김수환은 독일 요제프 회프너에게 기독교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런 학문적 배경을 바탕으로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다. 김수환은 1968년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이 되었으며 1972년 미사생중계때 정부의 국가호위 특별 조치법을 대놓고 비판함으로써 정부의 눈밖에 나게 된다. 하지만 추기경이라는 막강한 위치덕에 군사정권도 그를 어찌하지 못했는데 그 덕에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의 일종의 피난처 역할을 하게 된다. 김수환은 1972년 남북이 야합한 공동성명에 대해서도 남북의 정권을 연장하고자 하는 적대적 공존 수단으로 파악하여 비판하였다. 김수환은 자연법을 근거로 유신을 비판하였는데 자연법은 신적 정치에 기초해 모든 실정법 위에 존재하는 원리로 국가의 법이 이에 비치되면 그것은 악법이자 무효가 되는 것이었다. 김수환은 반공주의자로 민주화 운동 인사였음에도 공산주의에 대해 경계하는 발언을 하였다.

 지학순은 카톨릭이 평신도 위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966년 원주에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는데 이것이 지금도 존재하는 한살림의 전신이다. 그는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수용하였으며 1974년엔 최초로 유신헌법에 대항해 최초의 양심선언을 한다. 양심선언은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그로부터 2개월후 지금도 존재하는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된다. 

 천관우는 195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58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자 편집국장, 196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활약할 만큼 젊어서부터 언론인으로 성공했다. 그는 자유언론의 전통을 세웠는데 언론 자율과 자유 수호를 매우 중시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정권에 대한 날을 세우다 밀려났는데 이는 당시 일련의 흐름과 관계한다. 1950년대만 해도 언론에서는 언론을 만들어내는 기자나 편집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언론이 대형 기업화하면서 경영진이나 소유주가 편집인보다 우위에 서기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정권은 언론의 통제를 기존 기자통제에서 경영진을 통제하는 형태로 구조변경을 시도한다. 이런 언론 권력의 변화흐름에서 천관우는 힘을 잃는다.

 천관우는 뛰어난 언론인이기도 했지만 우수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학부 졸업논문이 실학의 개념과 발전과정을 최초로 이론화한 것인데 이는 세계사적 근대화의 맹아가 조선말 외래 유입에서 온 것이 아닌 자생적으로 생겼음을 주장하는 최초의 패러다임 변화였다. 언급한 것처럼 1960대는 학계에서 자생적 발전론에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이른 당시 한일 협정이라는 사회적 반감과도 관련한다. 

 책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사상적 흔적과 업적을 남긴 다양한 전통 우파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들은 현재 우파의 적장자가 되지 못해 크게 잊혀진 존재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들에 대한 배경과 업적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성공하여 현재 우파의 사상적 직계 조상으로 자리매김했다면 지금의 한국사회가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해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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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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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한국만 봐도, 고조선은 그렇다쳐도 패자인 고구려, 백제, 가야의 역사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세계사로 시선을 넓힌다면 승자를 유럽 쪽일 것이고 거기서도 정주세계, 즉 체계적 농경문화를 구축하고 여기서 산업화로의 성공적 이행까지 거둔 쪽일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지금도 세계를 지배하며 우리 역시 그 중 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교역과 선진기술의 흐름이 육상에서 해양으로 향하고, 화약으로 인해 기마병이 무력화되기 전까지 세계 역사의 중심축중 하나는 분명이 유목세계였다. 그리고 지구의 유목세계는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실크로드가 지나는 지역이다. 책은 이런 중앙아시아에서 어떤 민족과 나라가 흥망성쇠롤 거듭했는지 서술한다. 두껍지 않은 책에 여러 나라들과 민족, 종교, 인물, 사건등이 나열되어 좀처럼 읽기 쉽진 않았다. 하지만 무척 흥미로웠고 이부분에 대해 관심만 많지 접해본적은 없는 지라 많이 배우기도 했다.

 책에서 언급하는 중앙아시아는 지금의 -탄으로 끝나는 나라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북부, 중국 신장과 내몽골, 몽골과 만주지역, 남시베리아, 러시아 서부와 흑해 일대다. 이곳은 건조기후지역으로 유목에 적합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고 수목과 산맥이 없어 동서방향으로 이동이 용이하다. 하지만 건조하고 기후가 혹독하여 농경엔 부적합하여 인구밀도가 높지 않다. 중앙아시아에 등장한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책을 다읽고 나니 상당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국가나 민족개념보다는 씨족이나 부족연합체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들은 정주국가에 비해 신분개념이 다소 희박하여 칸으로 옹립하여도 동등한 일원 중 가장 고귀한 대표정도로 여겼다. 승계도 형제승계였으므로 정주국가의 농경왕조에 비해 평등해보이지만 체계가 쉽게 흔들리고 내부나 외부세력에 의해 내분에 휩싸이기 쉽다는 약점이 있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칸 이라는 명칭의 사용이다. 둘째는 개방성과 포용성이다. 확장하는 시점에서는 정주국가나 다른 유목민을 철저히 파괴하고 살해하지만 점령하고 나서는 현지인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확장하고 나면 현지 언어나 문화 종교를 잘 받아들이는 편이며 세월이 지나면 오히려 그곳에 융화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지리적 여건상 상업적 능력도 매우 우수했으며 다언어적 환경이었고 학문과 문화를 잘 융합하여 발전시키기도 했다. 종교의 경우 이슬람이 침투한 후에는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인다. 셋째는 연쇄효과다. 로마제국의 멸망 요인으로 훈족에 의한 게르만족의 침투를 꼽는다. 유목부족들은 자신들끼리의 정복과, 정주국가를 멸망시키거나 혹은 정주국가에 의해 토벌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세력을 밀어내기도 하며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여 다른 세력을 만들어내어 세계사를 흔들곤 했다. 


1. 유목민의 출현

기원전 1만에서 8천년 세계인구는 1천만이었고 이중 50만이 중앙아시아에 거주했다. 기원전 3천년기 인구가 늘면서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관개 농경이 등장하고 수공계, 야금에 종사하는 인구가 도시를 형성했다. 이들은 지구라트를 통해 알수 있는 것처럼 제도화된 종교도 발전시켰으며 초기 문자도 발전시켰다. 기원전 2천년기 지나친 경작과 재앙적 기후변화로 이 지역은 쇠퇴했고, 기원전 1천년기 이란계 민족이 흑해초원과 중앙아시아와 더 북방쪽으로 이주했다. 유목민에겐 말이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이 없는데 말의 사육은 기원전 4800년경에 시작됐다. 3700년경 말을 타기 시작했고 2000년경 일부 자급자족형 농민이 목축에 의존하며 스텝의 목초지로 계절이동을 하며 우리가 아는 유목민이 탄생하게 된다. 기원전 2천년기 스텝의 목축민 일부가 기마민족으로 발전하였고 기원전 2000년 전차가 처음 등장하여 중동과 중국으로 전파된다. 이어 나무와 동물의 힘줄을 이용한 복합궁이 발명되었는데 복합궁은 작으면서도 강하여 말위에서 모든 방향으로의 사격이 가능했다. 철제무기와 복합궁, 말이 결합되며 탄생한 강력한 기마 유목민은 주변에 대한 약탈이 가능해졌으며 이로 인해 세계사는 격변하게 된다. 

 유목민은 마구잡이 사회같지만 실제로를 매우 고도화된 사회였으며 신중하고 계획되고 방어된 경로를 이용해서 목초지로 이동했다. 이들은 노동집약적이지 않았고 큰 인구의 규모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유목은 가업으로 4-5가구가 함께 야영했고 대개 이들은 친족이었다. 보통 5인의 인구부양을 위해 대략 100마리 정도의 가축이 필요했다. 유목민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경우 농경민이 되기도 했는데 유목사회에서 이는 신분의 추락을 의미했다. 유목민은 전쟁만 한 것 같지만 사실 상업적 교역과 문명의 전파자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잉여물을 정주세걔의 식량, 물, 무기와 교환하였고 일부는 큰 부를 축적했다. 

 유목민은 정주세계와 교류 및 교역하며 집단을 대변할 필요성이 생겨났는데 이 과정에서 정치조직이 생겨났다. 유목민은 씨족 연합 기반으로 종종 연합했으며 대개 정치적으로 가장 강력한 부족의 명칭을 전체의 명칭으로 채택했다. 하지만 유목민은 대개의 경우 비국가적 부족 연합 상태였으며 오직 정주세계의 부를 탈취하거나 외부 침입이 있을 경우 집결하여 국가를 건설했다. 유목민은 많은 비용을 초래하는 정주국가의 정복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다만 성공적으로 하게 되는 경우 매우 강한 지배 왕조를 탄생시켰고 이 왕조는 신속히 제국 유지를 위해 정주제국을 모방하였고 휘하 유목민도 정주민으로 변모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은 실크로드 세계의 중심 연결 고리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은 당연히 이 교역로를 보호했다. 교역로는 몽골 고비사막, 신장 타클라마칸 사막, 투르크의 카라쿰 사막등을 경유해 매우 혹독한 환경이었다. 유목민은 단순 전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발명품인 현악기와 바지도 정주세계에 전파했으며 유목 세계 여성들의 전투참여는 아마존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신화 원형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고대유목국가들

고대의 중앙아시아의 주인은 이란계 주민이었다. 이들은 유목민의 특성보다는 정주인이었고 오아시스 인근에 정착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고 투르크어에서 도시를 의미하는 칸트는 이란어에서 차용되었다. 사마르칸트가 그 예다. 기원전 3000-2500년 전후 인도-유럽어 공동체가 해체하며 퍼지게된다. 토하라인이 기원전 3천년기 후반에서 2천년기 초반 신장에 도달했고, 인도-이란인이 동쪽으로 이주해 시베리아, 몽골, 신장, 북파키스탄에 도달한다. 인도-이란인은 기원전 2000년경 남아시아 인도어 사용 주민과 중앙아시아 이란어 사용인으로 분화한다. 기원전 3-4세기에 투르크계 민족이 나타나며 이란계를 몰아내고 본격적 유목시대를 연다. 

 오아시스와 강유역에 정착했던 이란계 주민들은 우즈벡 지역에서 소그디아인과 화라즘인으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박트리아인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이들의 국가는 키루스 2세가 중앙아시아를 침공하며 복속된다. 이 지역은 알렉산더의 원정 이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방령이 되며 페르시아의 통치아래 이란권 중앙아시아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장거리 교역 네트워크 연결을 한다. 

 기원전 3세기 그 유명한 흉노가 나타난다. 그 유래는 알기 어렵다. 기원전 215년 진은 흉노의 선우 두만을 북으로 몰아내며 이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당시 흉노는 월지에 복속상태였으므로 두만은 맏아들 묵특을 볼모로 보낸다. 이후 두만이 월지를 침공하고 묵특은 탈출해 원한관계인 아버지를 죽이고 묵특 선우가 된다. 세를 불린 흉노로 인해 진을 이은 한은 기원전 198년 화친 조약을 맺는다. 왕실공주와 상당량의 비단, 직물, 음식을 제공해야했다. 흉노는 그 대가로 중국천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고 침공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162년 노상 선우가 월지의 왕을 죽이고 월지를 서로 몰아낸다. 이로 인해 월지 이란계 유목민은 박트리아와 이란으로 이동하게 된다. 세가 역전되어 한무제가 기원전 127년에서 119년 중앙아시아를 침공한다. 한은 101년 페르가나를 정복해 목표로 하던 한혈마를 확보하고 중앙아시아를 안정화시켜 실크로드가 안정된다. 그 덕에 간헐적으로 도착하던 비단이 지중해세계에 안정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흉노는 기원전 72-71년 계속 패배한다. 중국은 흉노를 분열시켜 흉노는 남과 북으로 갈린다. 북흉노는 중국의 압박으로 서진해 강거로 이주한다. 이들은 선우가 살해되자 강거에서 훈이라는 이름으로 부족명을 개편한다. 남흉노는 한에 복속되었고 한 멸망후에는 선비, 강계 국가에 흡수된다. 

 서부에는 쿠샨과 훈이 부상한다. 쿠샨은 전성기에 박트리아, 동이란, 동서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이들은 중앙아시아 교차로에 위치해 여러 문화를 융합했다. 조로아스터교, 토착중교, 불교과 공존했고 예술은 사실적 표현과 , 곡선미의 인도양식, 정형화한 이란 양식을 종합해 간다라 미술을 탄생시킨다. 쿠샨은 관개로 농업을 발전시켰고, 상업도 발전했으며 대상으로 중앙아시아와 인도 항구바다를 연결했다. 불교 순례와 국제무역도 동시 장려한다. 

 쿠샨은 사산왕조에 230-270년경 멸망한다. 그리고 쿠샨의 빈자리를 채운게 훈족이다. 흉노계인 이들은 소수의 지배집단이 카자흐로 진출해 다른 부족과 합류하여 생겨났다. 훈은 중앙아시아 부족의 압박으로 375년 불가강을 건너 알란과 고트족을 격파한다. 그리고 이에 놀란 게르만 족이 로마영내로 이동하게 된다. 훈의 왕 아틸라는 440년 헝가리와 인접 지역의 게르만 슬라브, 기타 민족의 지배자로 부상한다. 아틸라는 로마제국의 변경을 약탈하였지만 실제 로마 정복이 목적은 아니었다. 다른 유목국가가 그렇듯 위협을 통한 공물 약탈이 주목적이었다. 훈의 공포는 서구 사회에 깊게 남았으나 사실 중대한 위협은 아니었다. 


3. 돌궐의 등장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나라의 기반을 만든 왕조로 평가된다. 오죽하면 중국인이 한족일까. 그리고 유목국가의 전범 같은 국가가 바로 돌궐이다. 흉노와 한이 멸망한 공백기에 중앙아시아에는 북중국의 탁발과 몽골 초원의 아바르, 쿠샨땅의 헤프탈이 등장한다. 탁발은 이후 중국식으로 북위로 개명한다. 아바르와 북위는 전쟁을 하는데 이 때문에 유목민이 서진하게 되어 내륙아시아 초원을 이란계에서 투르크인으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이 혼란에 돌궐이 부상한다.

 다른 유목민들이 그렇듯 돌궐도 암늑대와 적에게 전멸당한 한 부족의 유일한 생존자를 조상으로 둔다. 546년 돌궐 수령 부민이 아바르를 도와 철륵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세를 키워 아바르를 정복한다. 돌궐은 유라이사를 횡단하는 최초의 대제국을 세우는데 중국북부와 만주, 흑해에 이르는 영역이었다. 돌궐은 교역로를 확보하고 비잔틴과 외교하기도 한다. 

 유목국가가 그렇듯 이들은 제국을 세우면 영역을 나뉘는데 마치 유목민들이 부족이 연합해도 자기 고유 영역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실제 돌궐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뉜다. 기원한 지역인 동부가 서부에 비해 지위가 더 높았다. 돌궐 역시 유목전통으로 형제승계를 하였는데 삼촌들이 모두 물러나면 맏형의 아들에게 지위가 돌아갔다. 

 자연 내분이 일어났고 481년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돌궐에 첩자를 보내 분열시킨다. 하지만 수는 무리한 베트남, 고구려 침공으로 내부 반란이 일어나 붕괴하고 이 내부반란은 동돌궐이 돕는다. 이 후 등장한 당은 동돌궐의 힐리 카칸이 계속 침공하자 그에게 공물을 바치면서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 거기에 초원에 폭설과 서리가 수년간 지속되어 630년 당은 힐리 카칸을 생포하여 사망시킨다. 동돌궐은 이렇게 멸망하여 무려 100만이 당에 투항하고 당은 이들을 잘 융화하여 북방 변경에 정착시키고 자원으로 사용한다. 부족장은 중국식 칭호와 관직을 받았고 당태종은 이들을 무인으로 잘 활용한다. 이를 기반으로 640년 당태종은 신장의 고창을 정복한다. 그리고 659년 서돌궐마저도 당에 무릎을 꿇는다. 당은 중앙아시아를 장악해 아프간 일부와 이란 변경까지 진출한다. 

 하지만 당이 쇠퇴하자 동서돌궐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돌궐 제 2제국이 설립한다. 돌궐은 칸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돌궐의 카간은 하늘이 내린 존재로 피를 흘리면 안되는 존재였다. 그래서 돌궐은 칸은 살해하게 되는 경우 교살한다. 외튀겐 고지대와 오르콘 강 유역등 자신들의 기원 지역을 신성시하였고 여기를 지배하는게 칸의 정치적 정통성 확보에 중요하다. 이런 식의 전통의 이후 유목 국가에도 계승된다. 이들은 매우 강력하고 기동성있는 군대를 바탕으로 오래 번영했지만 결국 광대하면서도 다양한 민족을 지배하는데 드는 비용이 막대하였고 내부가 항상 불안하였기에 742년 결국 멸망하고 만다. 

 

4. 공백기 이슬람의 침투

 지금도 있는 위구르인이 이 때 등장하여 744년 돌궐과 당의 공백기에 몽골초원, 신장, 인근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위구르 카간국을 수립한다. 755년 위구르는 안녹산의 난으로 당이 도움을 요청하자 난을 진압해주고 당의 수도 장안을 약탈한다. 위구르는 돌궐과 다르게 소드드인과 중국인의 도움으로 수도를 건설하였고, 757년 오르콘 강 유역에 수도 오르두 발릭을 건설한다. 

 9세기 전반은 격동기였다. 중국은 쇠퇴했고, 티베트도 친불교파와 반불교파로 나뉘어 싸웠다. 위구르도 금새 내부분쟁이 일어났고 외부적으로는 티베트, 카를룩, 키르키즈와 싸웠다. 위구르 부족은 이 혼란에서 중국 변경으로 두주하여 신장과 간쑤에 소규모 국가를 세우고 토착민을 위구르화한다. 

 키르키즈는 중앙아시아 여타 유목 제국과는 다르게 오르콘강과 셀렝게 강 유역을 국가의 중심부로 삼지 않았다. 그들은 힘을 떨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근거지인 예니셰이 강으로 돌아갔으며 중동 중국과의 무역 관계에만 만족했다. 권력의 공백기에 등장한 것이 거란이다. 거란은 북중국과 만주에 요를 건국한다. 그리고 10-11세기에 이르면 인종적으로 몽골어 사용 유목민이 몽골초원에서 투르크계 언어 사용 유목민의 수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안녹산의 난으로 중국이 중앙아시아에서 철수하고 탈라스 전투에서도 주변 부족의 배신으로 이슬람이 승리한다. 그 결과 중앙아시아로 이슬람이 침투하는 기회가 열린다. 이슬람교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 지배종교가 된다. 트란스옥시아나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거의 일치한다. 오랜 기간 사용되던 아람어가 아랍어로 대체되었고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 다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이 지역을 오랜 기간 지배하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을 경제적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언급한 위구르 제국의 부상은 다시 민족 이동을 불러왔다. 투르크계 부족들이 이란-이슬람권 트란스옥시아나까지 밀려나가 일부는 흑해까지 밀려났다. 

 하자르 카간국은 서돌궐 아시나 혈통으로 북코카서스와 우크라이나, 남러시아 초원지대에 국가를 건설했다. 하자르인은 우크라이나의 불가르 족을 격파했는데 이 때 불가르 인들의 일부가 679년 발칸으로 이주하여 토착 슬라브인을 정복하고 동화하여 지금의 불가리아인으로 발전한다. 하자르 카간국은 이 지역에서 중세 최대의 상업지가 된다. 발트해-북유럽삼림지대-카스피해-볼가강을 지배하여 이슬람의 무역 경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하자르 칸국은 비잔틴과 자주 동맹관계를 맺고 통혼한다.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와 정치경제적으로 교류했고 강성하여 볼가강 하류 그들의 수도 아틸에는 무려 25개 피지배민족 상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사만왕조는 우마미야 왕조 시기 이슬람으로 개종한 지방 영주의 후예들로 9세기 초 트란스옥시아나의 지배세력이 된다. 사만왕조는 초원의 투르크계 유목민을 약탈 공격하여 군사노예로 삼는다. 사만왕조는 이들의 전투력에 반해 군사노예 학교를 설립하여 이를 아예 사업화한다. 하자르 칸국과 사만왕조는 당시 노예의 주 공급자였다. 이들은 전쟁포로나 동유럽 삼림, 농겨지대의 슬라브족을 노예로 삼았는데 이들을 이슬람 세계의 강자 압바스 왕조에 공급했다.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특정 정파와 민족에 휘둘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이들을 선호했다. 투르크계 민족들은 인내력과 전투력도 매우 우수했다. 아랍세계는 이 전투노예들은 처음에는 굴람 나중에는 맘루크라 부르게 된다. 굴람들은 특수부대에 편입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힘을 키운 이들이 나중에 압바스 왕조를 뒤집게 된다. 

 1005년 카라한 왕조가 사만왕조를 정복한다. 이들은 대부분 수니파 이슬람교도로 돌궐칸의 정치 전통을 계승해 국가를 왕족의 공동소유물로 보고 승계권이 돌고, 분할통치를 한다. 카라한 왕조는 투르크-이슬람 문화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슬람 색채의 문학을 가졌고 많은 수의 투르크계 유목민이 중앙아시아 농경지대로 이주한다. 그 결과 투르크어가 공동어가 된다. 


5. 몽골 제국

13세기 초 중앙아시아에는 신생 화라즘, 요의 후예가 세운 카라 키타이, 금, 셀주크 제국 4개의 나라가 있었다. 몽골은 12세기 몽골지역의 여러 부족 연합중 하나에 불과했다. 서구에서는 몽골인을 타타르인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타타르인은 초기 몽골의 적이었다. 실제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인에게 독살당한다. 칭기즈칸은 1189년 몽골 칸이 되고 1196년 타타르 격파 1206년 전 세계의 황제를 의미하는 칭지즈칸으로 추대된다. 그는 1209년 서하를 속국으로 삼고 1211년 금을 침공하여 1215년 대도를 함락한다. 1216-18년에는 카라 키타이 1219년 화라즘, 1220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함락한다. 1223년 루스를 격파하고 귀환길에 볼가 불가르를 침공했으며 1226년 서하를 정복하고 칭기즈칸은 사망한다. 

 칭기즈칸은 네 아들은 두었는데 첫째는 아버지보다 이미 먼저 사망하였고 셋째 우구데이가 대칸으로 추대된다. 각 형제는 울루스(백성, 토지)와 군대를 물려받았고 이들은 대 몽골국 내 작은 국가를 이루었다. 전통에 따라 맏아들이 부친의 땅에서 가장 먼곳을 물려받아 주치의 아들 바투와 오르다가 킵차크와 서시베리아 지역을 상속한다. 바투는 볼가강 유역에 수도 사라이를 건설한다. 우구데이는 북신장과 남시베리아, 이르티시를 상속하고 몽골초원 중앙부에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한다. 

 몽골은 확장을 지속하여 1241년 킵차크인과 루스공국을 복속하고 폴란드와 헝가리도 일시 점령한다. 하지만 우구데이가 사망하여 철수한다. 유럽인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구데이 사망후 대칸경쟁이 벌어지고 여기서 툴루이 가문이 승리해 뭉케가 자리를 이어 정복을 계속한다. 뭉케의 뒤를 이은 퀼라이는 이란, 이라크, 소아이아 대부분을 정복하지만 맘루크인이 이들을 저지한다. 

 쿠빌라이는 새 수도인 대도를 건설하고 국가명을 원으로 개명한다. 1279년 중국 정복을 완수하고 1270년 일본도 침공한다. 칭기즈칸은 네 아들 주치, 차가다이, 우구데이, 툴루이를 두었는데 주치는 14명 차가다이는 8명 우구데이는 7명 툴루이는 10명의 아들을 두었다. 이들은 각가 자기의 울루스를 두었고 권력투쟁에 참여해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다. 뭉케는 우구데이 사후 대칸 경쟁에서 우구데이, 차가다이 일족을 숙청한다. 여기서 주치와 툴루이 연합이 이뤄졌지만 이들의 연합도 이후 와해된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다언어 환경으로 인해 모든 언어를 표기할수 있는 언어의 개발에 착수한다. 1269년 티베트 승려 파스파에게 이를 개발하게 하여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노력과는 달리 이 알파벳은 널리 퍼지지 못한다. 파스파문자는 한글창제에도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있다. 

 원은 동과 서를 모두 연결하여 역사상 매우 안전하고 평화로운 문화, 교역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를 통한 정보교환으로 각지의 지식인과 상인들은 더 넓은 시야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얻게 된다. 원의 정복은 역시 민족의 이동을 불러왔는데 원의 팽창으로 밀려난 주변부 투르크인의 일파는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핵심세력이 되었고, 타이계 주민들은 버마 왕국으로 이주하여 변동을 일으킨다. 

 원의 몽골인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정복민과 동화되어갔다. 몽골인들은 의도적으로 투르크계 유목민을 재편하여 부족을 해체한 후 자신들의 군대에 편입시켰는데 그 결과 오랜 기간 유지되던 이들의 혈연 기반 부족전통이 와해되고 이후 자신들이 새로운 부족을 편성하는 경우 자신들의 혈통보다는 칭기스 계열의 혈통을 리더로 삼거나 유력인사를 집단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차가다이 울루스가 혼란상태에 빠지자 티무르가 등극한다. 그는 제국내 극심한 분열을 이용하여 1370년 실권자가 된다. 다만 그는 스스로 칸에 오르지 않고 칭기즈 일족을 꼭두각시로 하고 자신이 실질 통치한다. 티무르 제국은 유목민을 정착시키는데 그 결과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현대 우즈벡 민족의 형성에 주 역할을 한다. 티무르제국은 오스만을 격파하고 술탄마저 잡는등 위용을 과시한다. 티무르는 1404년 명정복을 위해 출정하나 가는 동중 1405년 사망한다. 명으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420년 칸 계승 분쟁, 가뭄, 전염병으로 주치 울루스의 해체도 가속화한다. 1443-1466년 크림반도, 볼가강 중류, 하류 아스트라한에 새로운 칸국들이 수립된다. 1368년 원이 멸망하자 초원으로 돌아간 몽골인들은 오이라트를 세운다. 오이라트는 서몽골, 신장, 이르티슈강 유역을 지배했다. 그들은 1449년 만주 및 중국까지 세력을 뻗여 명황제를 사로잡아 무려 1년가 생포한다. 주치 울루스의 또 다른 일족인 자니백과 기레이는 오이라트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스스로를 우즈벡-카작인으로 칭했는데 이들은 나중에 슬라브계 자유민 코사크를 지칭하게 된다. 이들은 수천단위로 지금의 발바슈호와 천산산맥 사이에 정착하여 오늘날의 카자흐인을 형성한다. 

 

6. 정주제국의 압박

16세기에 이르자 환경이 급변한다. 정주왕국은 화기를 개발하여 유목민을 강력한 기마부대를 무력화하는 수단을 갖게 된다. 또한 세계의 무역과 문화, 정보의 흐름이 기존 유라시아 육상로에서 해양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유목민족들은 이와 같은 시대변화에 민감하지 못했다. 16세기 중앙아시아는 여러 정주제국에 둘러싸인다. 사파비 왕조는 이란을 정복하고 시아파이슬람을 국교로 한다. 1550년 모스크바 대공국이 볼가강 유역의 주치 울루스 계열 국가를 정복한다. 

 16세기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그리스 정교회와 몽골 지배자로부터 정통성을 부여 받고 다른 루스 공국들을 복속한다. 1552년 이반 4세는 카잔 칸국을 정복하고 1556년 아스트라한 칸국을 정복한다. 이반 4세는 비잔틴 황제와 몽골의 칸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자신의 정복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성전처럼 묘사하였다. 러시아는 무슬림 타타르인들은 정교회로 광범위하게 개종하였고 타타르 귀족들은 등용되고 귀족화하여 러시아에 급속히 동화되었다. 이를 거부한 이들은 상인이나 이슬람 성직자인 울라마가 된다. 

 1500-1900년까지 러시아는 하루 130제곱km의 영토를 획득한다. 시베리아 지역엔 이렇다할 정치적 장애물이 이 시기엔 없었고 마침 시베리아 토착민들이 천연두와 여러 질병으로 떼죽음을 당하여 무주공산 상태였다. 러시아는 1638년 태평양에 도달하고 1640년 오호츠크를 건설한다. 러시아의 전진은 청과 충돌하고나서여 멈추게 된다. 

 이 시기 한 시대를 풍미하던 몽골은 부침이 심해진다. 이들의 분열은 심했는데 종교인 불교가 결집요인이 된다. 다얀 칸의 후손 알탄 칸이 동몽골을 부흥시키고 중국, 티베트, 오이라트와 전쟁을 한다. 북경근처까지 진격하여 명과 평화조약을 맺었고 명은 이들을 막기 위해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만리장성을 축조한다. 이시기부터 몽골에서 칭기즈 일족과 불교는 일체화하여 서로를 강화한다. 이 불교는 티베트 불교인데 칸들은 티베트 불교 승려들에 의해 이전 칸들의 환생으로 선포되며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반면 몽골은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의 패권을 보장했다. 

 

7. 근대 세계의 완성

17세기는 소빙기로 기근이 어이져 경기가 침체하고 인구는 감소하며 정치적 혼란이 찾아온다. 글로벌 위기로 세계무역의 패턴이 변화했는데 해상무역 그리고 육상무역의 방향 변화다. 유럽의 해양무역으로 이시기 육상교육이 크게 쇠퇴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방향이 바뀌었을뿐 규모자체는 크게 줄지 않았다. 기존 동서방향의 육상 교역은 남북방향으로 바뀌었다. 말과 노예 무역이 여전히 중시되었고 무굴제국은 연간 10만 마리의 말을 수입할 정도였다. 

 동오이라트는 준가르 제국을 건설한다. 정주세계에 위협을 가하는 사실상 마지막 중앙아시아 제국이라 할수 있다. 동오이라트의 지배자는 칭기즈의 후예가 아니어 칸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1670년 왕자 갈단이 티베트 유학길에 올라 달라이 라마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보슉트 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는다. 준가르는 청과 러시아를 이용했는데 청은 준가르가 몽골인을 통제하고 그 대가로 교역권을 제공했으며 러시아 역시 준가르에 교역권을 주었다. 하지만 1696년 청의 강희제가 40만 대군으로 준가르의 갈단군을 대파한다. 이에 준가르가 티베트를 약탈하자 청은 1720년 티베트를 편입하고 1757년 청은 준가르를 점령한다. 

 이후 중앙아시아에는 이전 보다 세가 매우 작은 칸 국인 부하라 칸국, 히바칸국, 코칸드 칸국이 생겨난다. 하지만 부하르는 1868년 러시아의 보호국, 히바칸국은 1873년 러시아 보호국, 코칸드 칸국은 1876년 러시아에 병합된다. 러이사는 국경을 이란, 아프간까지 확대하고 무려 2천만의 무슬림을 보유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내몽골에는 많은 중국인이 유입된다. 몽골 전역에서 중국 상인이 경제를 지배하고 문화적, 경제적 착취로 몽골과 중국사이에는 적대감이 생겨난다. 티베트 불교는 몽골인의 정체성 유지에 기여한다. 고비 사막 이북의 몽골 왕공들은 러시아를 중국견제로 이용한다. 이슬람화한 신장은 문화 종교의 현저한 차이로 청에 융화되지 않는다. 청은 1884년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신장을 지방으로 승격시키고 지배를 강화한다. 

 러시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카자흐 유목민은 러시아, 기독교화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분열시키려 민주주의, 근대화 유입을 차닪한다. 신무기 공급도, 이를 막기 위해 심지어 징집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현지 보수층과 손잡아 공중위생시설에 종교개념까지 붙여 이를 개선하지 않았다. 후진성의 영속화였다. 러시아는 현지를 자원수탈로만 바라보고 저항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다른 서구 열강처럼 이 지역의 종교, 씨족, 부족에 따라 민족 분류를 하였다. 이는 매우 작위적이었고 러시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1890년 러시아는 대규모 식민화로 이지역에 무려 100만의 러시아인을 이주시킨다. 20세기 들어 세계적 면화수요가 폭증하며 전통적 면화재배지역이었던 중앙아시아는 대표적 면화재배지역이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단일작물에 의존하게되어 경제적으로 취약해지고 수자원이 고갈되었다. 거기에 산업화로 전통장인과 공예가들이 몰락한다. 

 1920-40년 카자흐스탄, 투르크멘,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한다. 1929년 타직이, 1936년 키르키즈가 공화국이 된다. 이들은 과거 왕족 중심이었으나 소련에 의해 민족국가가 되었고 심지어 정체성도 갖게 되었다. 1970년대가 되어서 소련은 중앙아시아 공화국의 현지민들에게 통치권을 이양하기 시작한다. 

 1924년 동투르키스탄의 지식인들은 타슈켄트에서 모임을 갖고 위구르라는 명칭을 부활시킨다. 위구르 민족주위를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1944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설립하나 1949년 중국이 이를 해체하고 다시 신장으로 삼는다. 중국은 1960-70년대 신장으로 중국인을 대거 이주시켜 현재 위구르인 850만 중국인 750만 수준이다.

 내몽골의 지도자는 중국과 함께 일본군과 함께 싸워 자치권 획득을 노렸다. 하지만 실패하고 현재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중국은 1919-20년 외몽골을 차지하나 1921년 혁명가 수흐 바토르가 독립권을 찾았다. 1924년 군주제를 폐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운다. 그리고 2차대전후 몽골은 독립이 확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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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의 갈림길, 나가사키 지성인들의 도시 아카이브 2
서현섭 지음 / 보고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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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카시 하면 짬뽕과 원폭이 떠오른다. 상당히 상반된 이미지인데 실제 나가사키 역사도 그렇다. 나가사키는 일본 큐슈의 서남쪽에 있는 도시로 지리적으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류쿠, 동남아시아 쪽을 향하고 있다. 자연히 일본 교역과 무역의 중심지가 될 수 밖에 없는 지역이다. 상하이까지는 850km 부산까지는 49.5km 거리다. 인구는 140만정도인데 면적이나 인구 모두 일본 전체의 1%정도에 해당한다. 다만 평지가 적고 해안선은 무척 길다. 


1. 나카사키의 교역 

나가사키를 처음 찾은 서양인들은 대항해시대를 가장 먼저 연 포르투갈인이다. 나가사키 북서쪽에는 히라도라는 섬이 있는데 14세기 중반부터 왜구의 본거지였다. 그러던 것을 15세기 포르투갈이 먼저 들어와 1561년 히라도에 상관을 개설한다. 포르투갈은 1543년 조총을 전수하고 상관을 설치하여 히라도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활발히 교역한다. 하지만 막부는 카톨릭 포교 행위를 침략 전단계 행위로 인지하고 금교정책을 강화한다. 이에 따라 1624년 스페인선의 내항이 금지되고 상관도 폐쇄된다. 포르투갈 역시 기항지가 나가사키로 병합되고 더 좁혀져 1634년 신축한 인공섬 데지마로 축소된다. 1639년엔 포르투갈의 내항도 금지되는데 그들의 뒤를 이은게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스페인과 경쟁하며 막부측에 카톨릭의 포교와 침략을 이야기하였고 이것이 먹힌 셈이다. 

 1609년 막부는 동인도회사에 네덜란드 배는 일본의 어느 항구에도 입항해도 좋다는 허가장을 발부한다. 히라도 상관이 개설되고 네덜란드는 여기서 식량을 얻고 일본 용병을 동남아로 송출하기 까지 한다. 막부는 나가사키유력 상인 25명에게 공사비를 각출하여 부채꼴 모양의 데지마를 조성하였는데 네덜란드 만큼은 종파적으로 무해하고(신교이다) 통상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 특혜 대우하였다. 데지마의 연간임대료는 포르투갈은 은80관에 달했는데 네덜란드는 55관으로 매우 저렴했다. 막부는 데지마 상관에 가족단위의 이주를 불허하여 상관장인 카피탄을 비롯해 회계, 상주원, 창고관리원등이 모두 남자였다. 데지마 상관의 책임자인 카피탄은 에도산푸라 하여 에도를 방문해 쇼군을 알현하는 특혜가 있었다. 그들은 무역허가의 대가로 예물을 헌상했는데 의외로 안경이 매우 인기였다고 한다. 

 1642년 나가사키 일대에 흩어진 유곽을 정리하여 현재의 마루야마로 이전한다. 에도 막부시대에는 에도의 요사와라, 교토의 시마바라, 나가사키의 마루야마가 일본의 3대 유곽이었다. 나가사키 마루야마의 명성은 전국적이었는데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유일한 유곽인데다가 쇼군의 직할령인 나가사키출신만 그 적을 올릴수 있어서 였다. 1690년 마루야마의 황금기에는 유녀수가 무려 1443명이었고 네덜란드인을 상대로는 그 가격을 일본인, 중국인보다 3배를 더 받았다. 유녀들은 데지마로 출장 및 체류가 가능했으며 임신하게 되면 사내아이는 중절하게 여자아이인 경우는 출산했다. 다만 막부의 쇄국령이 본격화한 1636년에는 혼혈아와 서양인 첩 유녀들이 모두 마카오와 자카르타로 추방된다.

 나가사키는 서양인들의 무대였던 것 같지만 사실 17세기만 해도 중국인이 주인공이였다. 당대 최구의 경제대국과의 교역이고 지리적으로 인접하다보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1562년 중국상선이 나가사키에 최초 내항하는데 임진년 이후 갈등으로 10년간 교역이 중단된다. 1610년 중국인 선주 주성여가 막부로붜 거래허가서인 슈인장을 받아 일본각지에서 무역을 하고 1639년 포르투갈의 내항이 금지된 후에는 중국상선이 사실상 나가사키 경제를 좌우하게 된다. 1688년이면 나가사키 입항 중국배는 무려 200척에 달했고 인구 5-6만 나가사키인중 1만 가량이 활보하는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이 크게 늘어나며 자연 문제도 생겨나 이들을 수용할 도진야시키가 생겨난다. 1689년 건설했으며 수가 많은 만큼 9400평으로 데지마의 두배크기였다. 1732년이면 도진야시키 방문 유녀가 2만 4644명에 달한다. 중국에 대한 교역은 일본 당국이 향후 의도적으로 줄이는데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생사를 주로 수입하고 금과 은을 수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16세기 초반 조선으로부터 회련법을 배워 순도 높은 은을 전세계로 많이 수출했지만 이즈음이면 크게 고갈되어 국내 통화로 사용할 양의 확보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나가사키에 퍼진 난학과 문화

1774년 타헤르 아나토미아라는 네덜란드 해부학서가 해체신서라는 이름으로 번역된다. 일본최초의 서양의학서인데 이 때 한의학에는 없는 신경, 연골, 동맥, 처녀막등의 단어가 생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진다. 난학이 퍼지니 당연히 외국어에 대한 학습 필요성이 생겨났는ㄴ데 그래서 사전이 편찬된다. 포르투갈어 사전은 직즉 있었지만 네덜란드어 사전은 네덜란드가 일본에 미친 영향에 비해 매우 늦게 편찬되었는데 1854년에 이르러서야 사전 루프 하루마가 출현한다. 1808년 페이튼 호 사건으로 일본은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영어공부에도 매진하게 된다.

 스페인 포르투갈 선교사는 16세기말 나가사키에 남만과자 카스텔라를 전파한다. 설탕, 밀가루, 계란을 혼합한 카스텔라는 처음엔 쇼군이나 상위층만 즐기는 귀중품이었지만 에도시대 중엽엔 서민들도 즐길수 있게 된다. 그런데 정작 포르투갈엔 카스텔라라는 빵이 없는데 포르투갈인들이 스페인 카스텔라 지역의 빵이라는 표현을 일본인들이 카스텔라로 오해해 명명된듯 하다. 1624년 개업한 후쿠사야가 나가사티 카스텔라의 원조 가게다.

 덴푸라도 카톨릭신자들에게서 전파되었다. 카톨릭 신자들은 사순절에 부활절을 앞두고 단식, 절식, 육식을 금하는데 생선 프라이는 가능했다. 이 생선 튀김이 콰르투 템포라스이고 이것이 덴푸라로 변형된다. 이전에 일본엔 튀김요리가 없었지만 아무 생선이나 저렴하고 가볍에 튀겨 즐길수 있어 인기가 상당해졌다. 

 네덜란드 의사 지볼트는 일본 의학의 선구자다. 그는 군의관 자격으로 나가사키에 도착해 데지마 상관에서 매주 3회 서양의학, 과학을 배우고자 하는 통역들과 의사들을 가르쳤다. 강의와 실습을 병행하고 천연두 백신 접종, 백내장수술등을 시연했다. 지볼트는 훌륭한 식물표본, 논문 작성자에게 전문서나 현미경을 선물했고, 과정을 마친 학생에겐 네덜란드어로 작성한 서양의학 수료증을 수여했다. 당대엔 최고 권위의 의사면허인 셈이었다. 지볼트는 일본 최초의 의료사숙 나루타키주쿠를 개설하고 주1회 강의와 시술을 하여 천하의 영재가 몰려들었다. 놀랍게도 수강료와 진료비가 없었으며 가난한 자에겐 식사까지 무료제공하였다. 안과, 산부인과, 의과등 여러분야의 의사, 천문학자 150명이 배출되어 일본 전역에 선진 의료기술과 과학지식이 전파되었다. 지볼트는 일본에 있으면서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 일본식물지, 일본동물지를 출간하여 유럽에서 일본 권위자로 명성을 얻기도 한다. 


3.기리시탄

 일본 카톨릭과 그 신자를 일본에선 기리시탄이라 한다. 1549년 동방의 사도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한 것이 카톨릭의 첫 일본 전래이다. 일본에 온 선교사들은 곧 일본인이 영주에 절대 충성함을 알게되고 타겟을 영주로 바꾸게 된다. 이에 1563년 나가사키와 시가의 영주 오무라 스미타다가 개종하게 되고 지역을 예수회에 기진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다른 영주의 침략을 방어하고 무역 관세 수입을 얻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실제 일본의 다른 영주들은 외세와의 교역에만 관심이 있었지 기리시탄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다노부나가는 경쟁세력인 불교세력을 탄압하고자 기리시탄을 공인하였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히데요시는 처음엔 기리시탄에 관용적이었지만 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남만 무역은 장려되었고, 포교도 어느 정도 묵인하에 이루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열자 1605년 20만, 1615년 50만의 기리시탄 신자가 생겨난다. 기리시탄의 교리는 주종관계와 상하질서를 거부하고 할복과 일부다처제를 부인해 일본 지배층의 질서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막부는 평등사상으로 인한 민중봉기 및 일부 경제적 이득을 노린 영주와 기리시틴 세력과의 결탁 가능성으로 인해 1614년에 금교령을 내리고 1635년까지 30만이 순교한다. 기리시탄의 시련은 1893년 금교령이 해제되고서야 풀린다. 

 1637년 나가사키 인근 시마바라에서 난이 일어난다. 시마바라와 아사쿠사에서 영주의 학정과 카톨릭 신교에 대한 박해에 항거한 반란으로 농민과 카톨릭 주축이었다. 사마바라, 아사쿠사는 기리시탄 다이묘인 아리마씨와 고니시씨의 영지로 주민 대다수가 카톨릭이었다. 하지만 기리시탄 임산부 고문치사 사건과 건축세, 선반세, 창문세, 출산세등 영주의 학정으로 백성들이 무장봉기한다. 막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규슈전 지역의 번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네덜란드 히라도 상관까지 지원을 요청해 그들에게 반란군을 향해 포격하게 한다. 막부는 10만 병력으로 하라성을 점령해 3만 반군을 모두 학살한다. 이후 막부는 네덜란드에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게되고 반란을 야기한 시마바라 영주와 아사쿠사 영주를 처벌한다. 시마바라 영주 가쓰이에는 막부역사상 유일하게 할복자살이 아닌 참수를 당한다.  

 2010년 나가사키 나카마치 성당에서 이문희 대주교와 나가사키 대교구장 다카미 미쓰아키 대주교가 성로렌조 성당 설립 4백주년 공동 미사를 집전했다. 성로렌조 성당은 임진왜란때 큐수로 끌려온 조선인이 1610년 세운 성당이다. 당시 조선인 무려 1300이 세례를 받고 나가사키에 스페인 순교자 로렌조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하는 성당을 건립하였는데 1614년 막부의 포교금지령으로 성당이 4년만에 파괴되고 만다.


4. 개항

 도쿠가와 막부는 개국 이후 해상 방어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2척의 군함을 발주한다. 1855년 이 군함을 운용할 해군 양성을 위해 나가사키 해군전습소가 개설된다. 네덜란드의 빌렘3세는 증기선 솜빙호를 쇼군에 증정하고 일본은 이를 관광호로 개명하요 해군전용전습소로 사용한다. 1857년에도에 쓰키지군함조련소가 신설되며 해군전습소는 사라진다.

 일본의 에노모토는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데 그는 유학하여 피셸링 교수에게 해상국제법을 익히고 이를 일일히 번역하여 만국해율전서라는 제목으로 제본한다. 그는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여 제철소, 병기공장을 시찰하고 1864년 발발한 덴마크, 프로에센, 오스트리아 전쟁도 참관한다. 귀국후 막부의 해군 부총재가 되지만 막부와 유신정부간의 보신전쟁에서 패해 8대의 함대로 탈출하여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를 점령하여 3천병사와 항전한다. 전세가 기울자 에노모토는 적장 구로다에 만군해율전서를 맡기고 이를 본 구로다는 에노모트의 깊은 식견과 해상법에 대한 전문성에 감탄한다. 결국 에노모토는 3년간 복역 후 특사로 풀려나 1874년 주 러시아 공사가 된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을 하고 조선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권력 정치의 감각을 익힌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조선으로 전출할 것을 건의한다. 

 글로버는 영국인으로 일본에 글로버 상회를 설립한다. 일본에 차수출을 하는 한 편, 사쓰마번, 조슈번의 요청으로 화약, 총기류, 함선류등을 상하이에서 수입을 주선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죽음의 상인이란 별칭도 얻는다. 글로버는 1865년 나가사키 오구라 해안에 일본최초의 철도를 부설하고 상하이에서 수입한 증기기관차1대를 주행하여 주목을 받는다. 글로버의 개항기 역할을 독보적이어서 일본 최초의 선박수리소, 다카시마 탄광 개설 자원, 일본 최초의 등대건설, 일본 최초의 조폐기 수입을 그가 수행한다. 글로버는 일본 개화기 중요인사들의 해외 유학을 도왔으며 막부의 붕괴를 예감하고 반군쪽을 지원한다. 다만 1868년 도마 후시미 전투에서 글로버는 반군에 최신 철포와 화기를 팔았는데 내전의 후유증으로 메이지정부로부터 1년간 대금을 받지 못해 상회가 파산하고 만다. 글로버는 파산후에 미쓰비시의 지원으로 부사장 역할을 하였고 1885년 일본 맥주제조회사를 설립하는데 이게 지금의 기린 맥주다. 글로버는 1908년 메이지 유신에 대한 기여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급 훈장을 수여하게 된다. 

 한편 이시기 나가사키에는 중국 푸저우 출신의 가난한 유학생이 다수였다. 중국인 크리스천 천핑순이 값이 싸면서도 푸짐한 영양만점의 중국식 우동을 개발하였고 이것이 짬뽕의 시작이 되었다. 짬뽕은 모든 것을 섞었다는 뜻과 식사하셨습니까라는 샤뽕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짬뽕 면은 밀면에 탄산나트륨이 주성분인 도아쿠를 섞어 먼들며 이로 인해 밀면이 잘 변질되지 않고 짬뽕면 특유의 맛을 내게 된다. 


5.원폭과 평화

 원래 2차대전 중 제2원폭 목표지는 후쿠오카현의 고쿠라였다. 하지만 구름과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로 방향을 선회해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한다. 24만 시민 중 7만 4천이 죽고, 7만 5천이 부상당했으며 2만 7천 조선인중 1만이 사망한다. 나가사키에는 조선소에서 전함과 어뢰를 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폭격의 타겟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8년 나가사키 시의회에서 공산당 시마타 보쿠의원과 모로시마 히로시 시장의 질의 응답중 시장이 천황이 전쟁중지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오키나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참극이 있었다고 발언하였다. 지방의 일이었지만 이것이 석간신문과 TV 뉴스에 방영되어 항의가 빗발한다. 하지만 건강한 시민사회세력도 있어 시장은 지지서명도 일일 1만 4천을 얻고 최종적으로는 38만명의 지지서명을 받기도 한다. 한편 우익단체는 시장을 위협하였는데 1990년 다지리 가즈미가 시장에게 총격을 가한다. 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모토시마 시장은 살아남는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재일 조선인, 중국인에 큰 관심을 가졌고, 조선인 원폭 위령비도 평화 공원 밖에 있던 것을 1979년 공원안으로 이전한다. 

 오카마사하루는 목사이자 나가사키 의원이고 나가사키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운영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가해자 배상책임 문제를 거론하고 조선인 원폭 피해실태조사에 착수했다. 그 결과 원폭과 조선인 전 6집을 간행한다. 1979년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건립하였고 하시마에서 1925년에서 1945년 사이 사망한 조선인 1222명에 대한 사망진단서를 찾아내 이들 대부분이 위험한 작업장에 배치되어 압사, 질식사, 폭사했음을 밝혀 이를 원폭과 조선인 4집에 기록했다. 마사하루 목사는 말년에 일본 가해 책임을 분명히 하고 재일 한국인 차별 철폐, 정부 보상 실현을 위한 자료관 설립에 심혈을 기울이다 사망한다. 

 군함도에서는 조선인이 1939년부터 집단 연행되었는데 조선인은 지하 1천미터 이상 온도 40도 이상의 환경에서 근무하였다. 군함도에서는 1925년에서 1945년까지 1295명이 사망하였는데 일본인은 겨우 58명 조선인 1222명 중국인 포로 15명이었다. 

 전후 조선인 징용공 200명은 귀향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는데 태풍으로 배가 긴급회항하다 나가사키 해안의 계보단이 이를 막아 난파되어 무려 160명이 수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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