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인에게 조선은 애증의 나라가 아닐까 한다. 시기 상 가장 대한민국과 가장 인접한 나라라 정서적 공감과 이해가 상대적으로 강하고, 많은 기록이 있어 무수한 이야기 거리를 주기도 하며, 세종대왕인 이순신처럼 뛰어난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100년 전 거의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치욕적 망국을 기록했고, 성리학에 경도되어 실리보단 명분과 형식에 치우쳐 자주적인 면에서 아쉬움을 보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망국과 관련하면 항상 세도정치 이전의 영정조 르네상스 시기가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은 개화시기에 국왕이 영정조였거나, 그 당시의 실학이 주류로 자리잡아 조선을 변화시켰다면 망국으로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정조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는 아직까지도 무척 강하며, 정조와 함게 했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이야기는 드라마나 영화로 꾸준히 만들어져 사람들은 정조와 정약용 하면 매우 근대적이고 개방적이며, 상당히 지적으로 훌륭한 인물이란 이미지가 많이 생성되어 있다. 

 하지만 책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를 보면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책을 보며 처음 알았는데 정조는 재위시절 문체반정이란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는 청의 전성기로 청을 통해 조선에 많은 문물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명말 청초의 양명학이나 서학 등이 그런 것들이었다. 정조는 놀랍게도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은 선비들의 문체가 정도를 벗어나 경박하고, 좋지 못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정조는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승들을 중심으로 경고하고, 몇몇 선비들은 심지어 실제 벌을 내리기도 했다.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지 않은가. 

 보수적인 측면에서는 다산도 마찬가지다. 다산의 대표적 저서는 목민 심서인데 여기서 다산은 상당히 엄격한 조건을 수령에게 강조한다. 소위 수령은 성리학에 밝으면서도 이호예병형공의 모든 지식에 통달하며, 윤리적으로 자신에게 엄격하고 청빈해야 한다. 상당히 많은 메뉴얼을 수령에게 요구한는데 정말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형국이다.

 실학자 중 박지원은 정조 그리고 다산 정약용에 비해 주목도가 크게 적다. 정약용이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는 많지만 박지원을 다룬 것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인은 박지원을 알고 있는데 바로 역사 교과서에 그가 남긴 열하일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제목만 알고 열하일기의 열하가 어딘지도 몰랐는데 열하는 북경 동북부에 있는 곳으로 청황제의 피서지였다. 박지원은 청황제의 팔순잔치를 축하하는 조선 사신단에 합류하여 북경을 갔다가 연경까지 들르게 되고 당시 경험한 문물을 남긴 것이 열하일기다. 당시 열하는 유목민의 문명과 청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여러 나라의 사신단과 선물들이 얽혀 매우 국제적이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런 모든 것들이 흥미롭고 재미를 느낄만큼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박지원과 정약용은 같은 실학자로 분류되나 매우 다르다. 일단 둘은 나이차가 상당하다. 연암 박지원이 거의 30이 되어서야 정약용이 태어난다. 한참 병아리인 셈이다. 다른 것은 나이 뿐만이 나이다. 박지원은 의외로 집안이 노론 정파 계열이다. 당시 집권 세력의 주류였던 셈이다. 반면 다산 정약용은 남인 출신이다. 이들은 정조 시절 등용되어 영수격인 체제공이 정승이 되며 전성기를 맞미나 정조의 죽음과 동시에 천주교로 인해 공격 받아 몰락한다. 이런 배경과 타고난 성향 때문인지 성공에 대한 두 사람의 접근도 다르다. 연암은 나그네 혹은 유목민 같은 성격으로 평생을 변방을 떠돌았다. 벼슬에 대한 생각이 도통 없었다. 명성이 높아 정조가 은연 중 몇번 관심을 보이긴 했으나 그 때마다 겉돌았다. 나이 50이 되어서야 생활고에 시달려 어쩔수 없이 음서로 관직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 때도 정조가 크게 쓰기 위해 과거를 보게 하려 했다. 그의 높은 학문적 경지와 노론의 중심이었던 집안 형편으로 보았을 때 필시 과거만 봐서 입격했다면 고속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걸 거부하고 적당히 외관직을 떠돈다. 반면 다산은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항상 꿈꿨다. 다산은 일찍 성균관 태생이 되었으나 이후 대과에 붙는데는 무려 6년이 걸렸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중앙정계에 진출했고 관직도 높이 오를 수 있었다.

 둘은 인간 관계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연암은 그 특유의 수평적 성향으로 인해 관계도 그렇게 맺는다. 연암은 같이 풍류를 즐기는 친구들이 많았고, 여인이나 중인등 하층 계급과도 적극저긍로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다산은 다르다. 다산의 인간 관계는 주로 형제 집단이 많다. 둘은 다른 사람의 묘지명도 많이 썼는데 그것도 다르다. 연암은 여인이나 친구들의 묘지명을 주로 썼고, 묘지명은 하나 같이 짧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과 감정이 묻어난다. 반면 다산이 남긴 묘지명은 상당히 긴 편이다. 특히, 천주교로 인해 희생당한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기록을 상당히 남겼다. 

 학풍도 달랐다. 연암은 사상이 자유롭고 서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다양한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관료로 근무할때도 형식이나 겉치레를 중시하지 않았고 본질에 집중했다. 그래서인지 저작을 많이 남기지도 않았지만 하나같이 짧고 핵심을 찌른다. 그리고 열하일기 같은 글에는 해학과 유머가 넘쳐난다. 열하를 방문했을 때, 청 사신이 티베트 승려를 만나는 것을 권장했는데 유학자입장인 사신단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암은 조선 사신이 이를 거부해 황제의 진로를 사게 되어 저먼 강남으로 유배되면 같이 온 마당에 본인도 동행하여 낯선 문물을 경험할 생각에 오히려 기뻐한다. 그는 이런 식이다. 하지만 다산은 다르다. 다산은 보수적이지만 성리학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천주교에 빠져든다. 그는 중심과 질서를 향한 갈망이 있는데 천주교는 이런 그의 성향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정조와의 만남으로 서학을 정리한다. 그는 과거의 선진고경의 드높은 이상을 체득하고 그것을 경세치용에 쓰는 것을 이상적으로 삼았다. 다산은 백과사전적 인물이고 관직을 통해 현실정치를 오래 경험했기에 이상적 학문을 중심으로 경세치용을 위한 글을 매우 길고 많이 썼다. 그래서 다산은 연암과 다르게 무척 저술이 많다.

 이런 둘에게도 공통점이 있다. 우선 정조에 대한 애정이다. 물론 정조에 대한 애정은 그의 죽음과 운명을 거의 같이 한 다산이 훨씬 더 크다. 하지만 연암도 호학 군주였던 정조에 대한 상당한 호감을 품고 있었다. 문체반정의 용의자로 의심 받았음에도 말이다. 또한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것도 같은 점이다. 연암은 항상 주변인이었기에 학문적으로 힘쓸 시기가 많았다. 하지만 현직에서 꾸준히 일한 다산은 정조가 죽어서 고초를 당하고 집안이 몰락하고 나서야 학문적으로 꽃을 피운다. 다산은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거기서 다산초당을 만들고 목민심서를 비롯한 그의 주요 저작들을 저술한다. 다산은 강진에서 거의 18년만에 유배가 해제되고 이후에는 비슷한 시기를 더 살았으나 묘하게도 유배 이후엔 거의 저술이 없다. 거칠고 모진 유배와 세상과의 단절이 오히려 그에게 학문적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어보니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고 생각했었던 다산과 정조는 보수적이었고, 별 관심이 없었던 연암이 보다 진보적이었다. 이 둘을 삶과 학문, 성격적인 측면에서 비교한 이 책은 무척 재미있었다. 다만 책이 다소 두꺼운 편이었는데 비슷한 내용이 다소 다른 맥락에서 변주되는 느낌이어서 좀 아쉬운 면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근대사를 꿰뚫는 질문 29 - 고종 즉위부터 임시정부 수립까지, 개정판
김태웅.김대호 지음 / arte(아르테)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근대사 중 고종 즉위에서 대한 제국까지 시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 29가지를 주제로 정리한 책이다. 당시 세계는 격변하고 있었고 한국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시기로 조선의 주체적인 면이 많이 부정되고는 하지만 책은 이것은 결과론적인 설명일 뿐 우리 나름대로의 노력이 드러났음을 보여준다. 물론 충분치 못했고, 방향성에도 문제가 있으며, 얼마 되지 않는 힘도 충분히 뭉치지 못했음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주 이유다. 

 우리는 강화도 조약으로 알고 있는 것의 실제 이름은 조일수호조규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은 기존 유교질서에서는 외교 관계를 조규나 장정으로 맺었다. 조선 역시 전통적인 관계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조규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향후 청과는 조청상민수륙장정을 맺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일수호조규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교과서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문제로 관세 문제가 있다. 일본은 처음엔 조선 측에 5%정도의 관세를 허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이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른다. 전통적으로 일본 상인과 거래하는 조선 상인의 각 포구에 세금을 물려왔었기에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관세 문제는 이후 조미수호 통상조약을 맺게 되어서야 자주권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비싼 수업료를 치뤄가며 하나하나 근대 조약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이다. 

 갑신 정변은 급진 개화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당시 20-30대로 무척 이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으로 개혁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에 의해 민씨 일가가 적극 등용되어 급진 개화파 자신들의 입지가 크게 줄었다. 또한 정부가 심각한 재정 위기로 이렇다 할 개혁을 하기 어려운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불과 삼일천하로 끝나게 된다. 실패 이유로는 이들이 지나치게 젊어서 주변에서 신의를 얻기 어려웠다는 것, 이합집산하는 것처럼 보였던 개화 반대 세력들이 정변 시 의외로 결집한 것, 의지했으나 일본인 너무나도 쉽게 물러난 것, 마지막으로 백성의 지지가 없었던 것이 꼽힌다.  

 임오군란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된다. 장정은 언급한 것처럼 청과 조선의 전통적인 규정이다. 청은 이 장정으로 5% 관세율, 치외법권, 내지 통상권을 얻는다. 내지 통상권으로 인해 조선의 상인 집단이 큰 타격을 입는다. 이전만 해도 개항장의 조석 객주는 상품중개, 숙박업, 자금대여를 했고 기존의 외국 상인은 이 객주를 통해 물건을 사들이고 판매했다. 하지만 내지 통상권으로 객주가 배제되었고 유통단계가 줄어 청으로부터의 수입품 가격이 싸져 조선 상품의 경쟁력이 크게 상실된다. 청은 일본 상인을 압도했는데 양쪽다 유럽에서 수입한 물건을 판매하면서 청은 직수입해 판매했고, 일본은 청에 유럽에서 수입한 물건을 다시 수입해 파는 형태였기에 가격 경쟁력이 더 낮았기 때문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어찌보면 망해가는 조선의 마지막 보루였다. 하지만 패배했는데 책은 그 요인으로 4가지를 꼽는다. 우선 군사전문가가 아니었던 전봉준의 전술적 패착이다. 물론 무기나 훈련도 면에서 동학군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수가 훨씬 많았고, 지리적 우위가 있었던 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다음은 남접과 북접의 노선 차이다. 양자는 서로를 적대하기 까지 했고 보다 호전적이던 남접에 비해 북접은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은 늦은 봉기다. 청일전쟁으로 일본군이 7월에 경복궁을 불법 점령했는데 농민군은 10월에서야 봉기한다. 이 3개월 간 일본군은 후방의 불안한 없이 청군에 집중해 그들을 제압하고 편안하게 조선군까지 장악 후 농민군을 상대할 수 있었다. 농민군은 좌충우돌하느라 결정적 시기를 놓쳤고 빨리 올라오지 못해 충분한 병력 규합도 이뤄지지 않았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무대로 일어난 만큼 큰 피해를 안겼다. 일본은 전쟁 중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군으로 협박하여 각종 협정을 강제로 체결해 조선 내 병참기지를 건설하고 인부와 우마, 군량을 마구잡이로 징발했다. 말을 듣지 않는 조선인은 쉽게 살해하기도 하였다. 대포는 20문, 소총은 무려 2천정을 조선군에게서 약탈한다. 일본군과 관련자 20만을 위한 물자를 조선에 강요하였고 각종 성범죄를 일으켜 성병을 퍼뜨리기도 하였다. 청군과의 평양성 전투에서는 수많은 시체와 동물사체를 방치해 이질이 발생하였다. 결국 청일전쟁으로 조선인은 무려 30만이 사망하게 되는데 이중 주 무대였던 평안도에서만 6만이 사망하게 된다.  

 청은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자신들의 중화질서 최후의 보루인 조선을 사실상 상실하게 된다. 시모노셰키 조약으로 요동반도와, 타이완, 펑후열도를 상실하고 전쟁배상금을 무려 은 2억냥을 물게 된다. 이는 당시 청의 3년치 재정으로 청은 배상금을 내기 위해 유럽 국가에 차관을 빌려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된다. 여기에 청은 약체로 취급되어 유럽열강들의 마구잡이 침략에 더욱 시달리게 된다. 반면 일본은 서구 열강의 재평가를 받게 되며 사실상 열강의 반열에 올라선다. 또한 청에 조계를 설치하게 되어 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을 확보하게 되고 적자가 흑자로 전환된다. 그리고 청에게서 받은 배상금으로 제철소를 설립하고 배상금의 84%를 군비확장에 이용해 또 다른 침략을 준비하게 된다. 

 갑오개혁은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1894년 7월에서 -12월로 군국기무처가 중심이 되었다. 당시 청일전쟁으로 일본의 간섭이 적어 조선의 자율성이 컸다. 2기는 12월에서 1895년 7월로 일본이 승리하고 농민군 마저 진압해 박영효를 내세워 내정에 개입했다. 일본인 고문관이 간섭을 했고 홍범14조가 반포된다. 3기는 1895년 7월에서 8월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3국 간섭으로 일본의 조선 보호국 시도가 실패한다. 박영효는 역모로 몰렸고 조선의 자율성이 다시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4기는 을미사변기로 1895년 8월에서 96년 2월까지다. 을미개혁 시기로 태양력, 단발력, 종두법이 시행되며 이로 인해 반일, 반정부 투쟁이 강화된다. 

 갑오개혁으로 조선은 사실상 근대사회로 편입된다. 군주권을 제한하고, 의정부와 내각의 결정권을 높였다. 8아문과 이를 관리하는 대신이 생겨난다. 탁지아문은 중구난방이었던 조선의 조세를 체계화하고 관리했다. 신분제도와 과거제가 폐지되었고, 학무아문으로 교육을 강화한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신변에 큰 위기를 느끼고 아관파천한다. 첫 시대는 병사를 일으켜 크게 움직이는 바람에 실패했으므로 2차 시도는 엄비를 통해 소규모로 실시해 성공한다. 고종은 엄비를 궁으로 불러들였고 당시 궁녀들인 수시로 궁과 바깥을 드나들었기에 엄비가 궁에서 나가는 가마 두 개를 이용해 세자와 함께 탈출한다. 아관파천으로 갑오정부 대신들은 몰락한다. 이후 박정양, 이완용, 이범진 등 러시아는 미국을 중시하는 관리를 등용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한다. 하지만 아관파천으로 여러 이권을 상실한다. 러시아는 삼림채벌권을 획득해간다. 아관파천 신 내각은 반일 왕권강화 세력이었다. 과거 의정부 시스템을 부활시키고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을 파면하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을 초청한다. 아관파천 이후 열강은 이전보다 적극적인 직접 투자를 통한 이권 약탈을 시도한다. 광산채굴권이나 삼림벌채권, 철도 부설권 등이다. 이에 대규모 사업에 필요한 필요한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투입된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3개의 의정서를 체결한다. 1차는 러시아가 유리해서 조선내에서 일본 상인과 균형을 맞추는 합의가 이뤄진다. 2차에선 일본과 러시아의 이익이 균형을 이루고 

3차에서는 러시아가 일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이는 당시 러시아가 만주의 뤼순과 다렌을 조차하여 만주에서의 이권을 강화했기에 일본을 달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결국 궁으로 돌아온다. 경복궁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기도 했고 방어가 어려웠기에 고민 끝에 경운궁으로 환궁을 결정한다. 훈련 받은 친위대 80명을 배치했고 수리 공사 후 환궁하게 된다. 돌아온 고종은 칭제건원한다. 고민이 있었으나 수많은 관료들이 찬성한다. 칭제건원을 국제사회가 인정하느냐가 문제였는데 공사가 반대의견을 냈던 러시아가 의외로 가장 먼저 이를 인정하고 축하전문을 보냈다. 일본도 조문하여 이를 인정한다. 당시 극심했던 조선 내 반일감정을 누그러트리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되니 조선과 큰 이해가 없던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도 제국 선포를 인정하게 된다. 가장 불만을 가진 건 청이었다. 청의 일부 사람들은 이를 청일전쟁의 패배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내에 청의 상인이 상당히 많이 진출해있었기에 이들의 보호를 위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독립신문은 서재필이 창간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주역 중 하나로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0년이 지나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의사자격으로 귀국해 신문을 창간한다. 서재필은 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다. 대한제국의 선포와 이에 따른 각계각층의 호응이 이어졌고 고종은 공사비의 20%를 지원한다. 독립신문은 순한글로 발행한 근대신문이었다. 신문은 무려 3천부나 발행되었는데 당시 신문 1부를 거의 200명 정도가 돌려보거나 공공장소에서 낭독을 통해 같이 읽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영향력이었다. 하지만 독립신문은 근대화를 이끌었으나 서구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전통을 지나치게 냉소하고 혐오하며 멸시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민중 역시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고 의병은 심지어 도적으로 취급했다. 때문에 독립신문은 역사적 평가와는 달리 위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한 셈이다. 독립신문은 의회 설립을 추진한다.그들은 정부 25인 독립협회 선출 25인으로 구성된 중추원을 제안했으며 민의를 반영하는 하원에는 관심이 없었다. 

 간도는 아쉬움의 땅이다. 청은 자신들의 발원지인 이 지역을 신성시해 봉금정책을 폈다. 하지만 청이 약해지며 19세기에 봉금정책이 느슨해지자 조선 농민 다수가 세도정치를 피해 두만강 너머로 이주한다. 영국과 러시아의 위협으로 청은 1881년 봉금을 해제하고 자국민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킨다. 이로 인해 청인과 조선인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청일 전쟁 후, 청의 세력이 조선에서 약해지자 조선은 간도문제를 다시 거론한다. 그리고 1897-98년 조사를 하여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닌 쑹화강의 지류하고 확신한다. 1900년 청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자 산둥성에서 수천명의 피난민이 발생하여 간도로 이주한다. 대한 제국은 이에 1901년 함경북도 국경에 경무서와 본서를 설치하고 200명 규모의 경찰을 파견해 자국민을 보호한다.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간도 시찰원으로 파견해 조사를 한다. 1903년 2만 7천여호에 1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간도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청이 파견한 관리가 세금을 강요하고 변발에 호복까지 요구해 피해가 많았다. 이범윤은 청의 관리를 포박하고 납세의 의무가 없음을 선언한다.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북변간도 관리사로 임명했으며 현명한 이범윤은 정식 군대를 동원할 시 국제 문제의 발생을 우려해 사병을 조직해 조선인을 보호한다. 하지만 러일 전쟁 후 일본 통감부는 간도를 대한제국령으로 승인하려다 구미 열강을 의식해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에 일방적으로 양도한다. 대신 만주에서의 이권을 확보하게 된다. 

 러일전쟁은 일본 함대가 인천과 뤼순을 동시 기습 선제공격하며 발발한다. 일본은 뤼순을 핵심 목표로 삼았는데 해안 포대로 러시아군이 이곳을 요새화하자 점령이 불가능했다. 이에 대규모 육군을 동원한다. 하지만 방어가 강해 무려 3만이 사망하자 인근 고지를 점령하여 러시아 군의 동태를 파악해 극동함대를 제압하고 뤼순을 점령한다. 러시아의 사상자는 3만이었으나 일본군은 무려 6만이 사망한 승리 아닌 승리였다. 뤼순의 점령은 양국의 운명을 갈랐는데 일본의 승리를 점친 열강이 일본의 국채를 사들여 일본은 전비 확보가 유리해졌고 러시아는 국제적 위상이 추락하고 내부분열에 휩싸인다. 

 뤼순 전투 이후 양국은 만주 평텐에서 격돌한다. 러시아군 31만에 일본군 25만의 대전투에서 러시아는 9만 일본은 7만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일본은 여기서도 승리해 승기를 잡았으나 대규모 병력 손실로 더 이상의 전투여력이 남지 않았다. 반면 당시 인구대국 러시아는 본토에 충분한 병력이 남아있었다. 여기에 일본은 재정난도 심각했다. 하지만 1905년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하며 전쟁수행이 어려워진다. 러시아의 발트함대는 220일간 지구의 3/4를 돌아 동해에 당도한다. 발트함대는 영국이 일본을 도왔기에 수에즈를 이용할 수 없었고 인도, 싱가폴, 말레이시아에 정박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패배했고 포츠머스 회담이 열린다. 

 이 회담에서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모든 일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된다. 일본은 뤼순, 다롄의 조차권과 창춘 이남 철도 부설권, 북위 50도 이하의 사할린 섬에 대한 권리를 얻는다. 여기에 동해, 오츠크해, 베링해의 러이사령 어업권도 얻어낸다. 어이없게도 조선을 사실상 넘긴 이 조약을 중재한 미국의 루스벨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조약 후 일본에서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다. 1905년 9월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시작한 폭동으로 파출소 70%가 전소하고 1000명이 사상자가 생겼다. 일본인들은 러일전쟁으로 무려 20만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고, 전비부담으로 크게 가난해졌다. 이들은 청일전쟁처럼 막대한 배상금을 기대했는데 배상금은 전혀없었고 이권만 챙겨오니 이에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러일전쟁은 어이없게도 쑨원, 호치민, 네루등 아시아의 주요 지도자들에게 식민지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 이들은 이 전쟁을 찬양했는데 제국주의 일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아쉬움이었다. 

 의병은 구한말부터 꾸준히 발생했다. 하지만 내부 문제가 많았는데 가장 심각했던 것은 신분갈드이었다. 실전에 무능한 양반이 신분을 이유로 요직을 차지했는데 이는 전투력 약화와 갈등을 불러왔다. 실제 의병장 유인석은 평민 대장 김백선을 처형했는데 다른 양반 대장이 김백선을 제때 지원하지 않아 김백선이 이에 강하게 항의하지 군기 문란으로 처형한 것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각 도의 13도 창의대진소라는 연합부대가 결성된다. 10만에 달하는 대병력이었지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으로 물러나자 이합집산 흩어진다.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뚜렷했다. 하지만 의병의 전투력은 막강했다. 스스로 무기를 개량했고 일제의 것을 탈취하고 지리적 이점과 지역의 도움을 받아 일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일제는 1909년 9월에서 11월까지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을 실행한다. 이 과정에서 의병 1만 7천명이 사망하고 부상만 3만 7천명이 발생한다. 일제는 의병에 협력한 정황만 보여도 민가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의병토벌엔 한국인 헌병 보조원 4200명도 합세했다. 이들은 대한제국 시기 하급군인 출신으로 악소배들이었다. 당대 지식인들은 의병에 대한 의견도 좋지못했다. 이들은 의병은 시대착오적인 무지몽매한 이들로 취급했고 그래서 무시했다.  

 1차대전의 종전과 파리강화회의에서의 민족자결주의가 널리 알려진다. 이에 고무된 일본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600명이 몰려 2.8독립선언문을 낭독한다. 이들 중 359명이 귀국해 3.1운동의 선두가 된다. 이들은 종교계의 대표인사들과 만나 독립선언문을 준비하는데 비폭력 만세운동을 원칙으로 한다. 3.1독립선언서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하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인사였다. 기독교 16명 천도교 15명 불교 2명이었다. 기독교는 일제가 사립학교 법을 통해 종교 수업을 금지시키가 반발심이 컸고, 천도교는 민족 종교로 100만 신자에 막강한 자금력을 갖고 있었다. 불교는 조선의 억불정책에서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해 일제의 협력적이었기에 참여가 적었으며 천주교는 안중근의 의거 후 탄압이 이어질까 두려워 프랑스 주교들이 신자들에게 단속하여 참여가 어려웠다. 유교계의 참여가 적었던 것이 의외인 부분이다. 민족대표의 구성은 아쉬운 부분이다. 자본가, 교육자, 지식인이 모두 제외되고 종교인사로만 채워졌고 사실상 국민의 대부분인 농민도 없었다. 때문에 대표성이 크게 부족했다. 이들은 민중으로 채워진 탑골공원이 아닌 요릿집에서 선언문을 발표하고 체포된다. 3.1운동은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와 이에 따른 독살설로 달아올랐다. 서울에서만 수십만이 참여했고 전국적으로는 200만 이상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폭력으로 일관하여 서울에서의 만세 운동은 잦아들고 지방으로 퍼지게 된다. 3.1운동은 사실상 혁명의 성격이 강했고 그래서 3.1혁명으로 오랫동안 불렸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제헌헌법초안을 다듬는 과정에서 한민당 계열 의원들이 3.1운동으로 이를 격하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 - 전쟁의 기원에서 미래의 전쟁까지, 한 권으로 읽는 전쟁의 세계사
제러미 블랙 지음, 유나영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지 못하는 동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은 생존을 위해 다른 생물을 죽여야 한다. 다른 종의 개체는 주로 먹이로 이용하기 위해 죽이지만 같은 동족 끼리는 자원을 놓고 경쟁하며 죽인다. 인간은 협력하여 집단 사냥을 오랫동안 해왔기에 사냥과 전쟁은 인류사 초기엔 잘 구분되지 않았고 크게 분화되지도 않았다. 전쟁보단 아무래도 사냥을 더 많이 했을테니 사냥했을때의 집단 행동과 양식 전술이 그대로 다툼에 이용되었을 개연성도 크다. 

 그러다 사회가 크게 분화하고 커지면서 서로 경계를 맞닿게 되었고 그러면서 전쟁이 사냥에서 본격 분화하며 전문화하였을 것이다. 인간은 전쟁을 위해 진화하기도 하였는데 전투집단 내에서 인간은 강력한 동료애와 흥분 및 고양감을 느낀다. 이는 광범위한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진화한 심리이므로 인간이 전쟁을 위한 심리적 적응을 했음을 입증한다. 

 무기로는 초기에 석재가 쓰였지만 광석에서 금속을 분리할 수 있게 되면서 청동같은 금속 무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말은 기원전 4천년경 흑해 부근에서 가축화하여 기원전 1700년경 전차에 활용되었다. 전차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재갈과 바퀴살이 필요했다. 초기 제국들이 커지면서 전쟁은 점차 대규모화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대규모화는 식량과 식수, 숙소, 장비의 보급을 요구했으며 이는 고대엔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필연적으로 주변 지역 및 피정복민에 대한 착취가 이뤄졌으며 전쟁과는 다른 갈등을 낳기도 했다. 

 중동지역은 비옥한 충적토 덕에 인구부양 효과가 컸고 그로 인해 초기부터 대규모 전쟁이 이뤄졌다. 이 지역에서 철기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히타이트 였지만 그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철기를 제대로 사용하여 중동을 제패한 것은 아시리아였다. 그들은 단호한 리더십과 군사주의 문화, 아슈르 신의 가호로 무장했으며 공성추와 공성탑 등 이전에 비해 매우 뛰어난 공성 능력을 갖고 있었다. 바빌론과 페르시아가 차례로 무너졌고 말 4마리의 중전차로 화력을 강화했다. 

 중국은 북부지역에 대규모 농경이 시작되며 무력 충돌과 국가가 생겨난다. 기원전 3천년경 이 지역에 성벽을 두른 거주지와 금속 무기가 등장했고 2500년 경에 청쯔야에 성벽도시가 생기고 1800년경 상왕조가 등장했다. 중국에서 전차와 합성궁, 청동으로 창끝을 댄 극과 창이 발달한 것이 기원전 2000년 경이다. 한편 서부 변경의 주나라는 유목민과의 교류로 얻은 저차를 활용하여 상을 무너뜨린다. 주나라까지 중국에서는 귀족들에 의한 소규모 전차전투가 주류였다. 하지만 전국시대부터는 석궁과 같은 무기와 대규모 보병 진형에 의한 전투가 시작된다. 무력충돌이 대규모화했고 이로 인해 전차보다는 보병이 더욱 중요해졌다. 

 인도 역시 중국처럼 오랜 문명을 가졌다. 기원전 28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에 하라파, 칼리방간, 모헨조다로 성벽이 있었고 기원전 1000년경 펀자브에 요새화한 정착지가 나타났다. 인도는 북부와 남부가 크게 다르다. 인도 북부는 기후가 비교적 시원해 말의 번식과 사육이 가능해 기병의 운영이 가능했다. 반면 남부는 열대로 숲이 울창하고 질병이 많아 말이 건강을 유지하지 못해 기병이 없었다. 이는 침략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인도 북부는 북쪽의 좁은 회랑을 통해 침공을 자주 당한다. 아리아인, 쿠샨, 월지, 스키타이, 샤카등이 그러했다. 인도는 지리적 한계로 경작 지대가 원시림에 가로막혀 잘개 쪼개져있다. 때문에 인도는 이러한 경작지를 소유한 소국이 다양하게 많았으며 좀처럼 하나가 되지 못했다. 지금의 인도에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로마는 물리적 군사적으로 광범위한 환경에서 요새나 도로를 많이 건설해 오래가는 군사인프라를 구축한다. 로마는 행군마다 쉬는 곳에 숙영지를 건설했는데 이는 이후 방어와 연락망을 제공하고 향후엔 정착촌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로마는 강했지만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그들은 남부의 삼니움과 상당히 오래 경쟁했고 기원전 250년이 되어야 간신히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차지한다. 이후 스페인 남동부를 두고 카르타고와 경쟁하는데 로마는 해군력이 열세였음에도 빠르게 만회하여 전쟁에서 승리해 시칠리아를 차지하고 주변 두 섬도 얻는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선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로마 본토를 침공한다. 그들은 매우 강력하여 대부분의 전투에서 로마의 주력부대를 궤멸시키고 일부 동맹도 와해시킨다. 하지만 한니발의 군대를 강했으나 알프스를 넘어온 만큼 이렇다할 공성장비가 없었다. 여기에 기다리던 지원군과 해상전력은 로마에 의해 차단되었으므로 한니발은 사실상 퇴각할수 밖에 없었다. 

 로마는 포에니 전쟁 승리이후 기원전 36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시칠리아 해적을 정발함으로써 지중해를 완전히 손에 넣는다. 이덕에 매우 저렴하게 대규모 해외 무역과 식량 공급이 가능해졌다. 로마는 피정복민에게 로마인이 될 기회를 부여하여 현지인은 자기편으로 만들어 국경을 안정화하였다. 

 방어 구조물인 성은 과거엔 피신처였지만 점차 주거지로 변모한다. 석성은 화재에 강하다. 서구는 석재를 주로 사용하였고 동양은 흙, 벽돌, 목재로 성을 지었다. 석성은 화재에 강하지만 내부의 뼈대 구조물은 목재를 사용하였기에 아래를 파서 불을 붙이는 공격엔 붕괴되기 쉬웠다. 13세기부터 성규모와 높이, 복잡성에 증가했다. 궁수, 투척무기, 땅굴의 위험으로 성벽의 높이는 올라갔다. 

 유목민은 스텝의 동물을 전쟁에 이용했다. 이 동물들은 무척 강인하고 황량한 지형에 잘 적응했다. 유목문화의 생활양식은 대규모 경무장 기동전에 필수적인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 그들은 이동이 생활이었기에 병참이 매우 효율적이어서 별도의 인원이나 조직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목군대는 소수이기에 인명손실에 민감했고 그래서 정복보다는 약탈과 초토화를 택했다. 농경제국의 변경을 초토화하면 양지역 사이에 완충지가 생겨났고 희생이 적어 효과적이었다. 

 몽골은 칭기즈칸이 나타난 후 호라즘과 사마르칸트, 금을 정복한다. 송을 멸망시킬때는 해자를 잔해로 메꾸고 중동지역에서 들여온 공성병기를 배치했다. 이는 트레뷰셋인데 인력으로 밧줄을 당겨서 쏘는 방식에서 평형추를 다는 방식으로 개선되었는데 이를 몽골이 도입했다. 

 화약은 중국에서 등장했다. 9세기엔 화약 제조공식이 정확해졌고 11세기에는 화약 생산 상설 병기창이 생겼으며 12세기에는 총신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무기를 생산했고 14세기 들어 총과 포가 분리되었다. 초창기 공성용 사석포는 포미와 포신 분리형이었고 무겁고 발사후 열을 오랜기간 식혀야했다. 여기에 연철 이음색 부분을 만드는데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더 발전한 주조기술과 청동, 놋쇠등의 구리합금이나 주철을 사용하면서 대포는 가벼워지고 쓸만해진다. 1420년 서유럽에서는 알갱이 형태의 화약이 개발되는데 이는 구성성분이 잘 배합되고 파괴력을 높였다. 1400년경 질산칼륨대신 황산칼륨을 사용하면서 화약의 수분 흡수로 인해 품질저하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금속주조술의 향상으로 포신과 일체형의 포이가 도입되었다. 포이는 포신을 받치는 돌출부로 대포의 발사각을 조절하고 기동성과 발사속도를 향상시켰다. 

 총은 활보다 관통력이 뛰어났지만 탄알의 보급,, 연사의 어려움, 기후의 영향, 짧은 사거리, 기마에서의 사격의 어려움, 총기 폭발위험등 기존 궁병에 비해 단점이 무척 많았다. 여기에 총병은 궁병보다 명중률 향상에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때문에 총병은 명중률을 높이는 훈련보다는 전체를 집중시켜 전체발사량을 늘려 위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달한다. 총병은 장전에 오랜 시간이 걸려 보호를 해줄 창병이 필요해 같이 편성된다. 하지만 17세기 말에 총에 창검을 부착하게 되면서 창병이 사라진다. 18세기 들어 서양에ㅔ는 보병대열이 중앙에서 일제사격을 하고 양익을 기병이 보조하게 된다. 

 화약대포의 등장으로 성벽에도 변화가 생겨난다. 사각형 모양의 능보를 성벽 전체에 일정 간격으로 배치해 성벽에서도 대포사격을 하게 했다. 또한 성벽은 높이가 낮아졌다. 너무 높으면 포의 공격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낮으면 적이 오르기도 쉬워져 적정한 높이를 유지했다. 화약대포는 고지나 비탈의 성격도 변화시켰다. 고지나 비탈은 전통적으로 전투에 유리하다. 적을 내려다볼 수 있으며 위치에너지가 있으니 발사무기 및 돌격의 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하지만 적의 입장에선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화약대포가 생겨나자 노출된 비탈이나 고지를 지키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때문에 현대전에서도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비탈사면뒤에 병력을 숨기고는 한다. 

 근대에 들어서 전쟁에서는 이동과 보급, 통신기술이 중요해진다. 증기선과 통조림, 전신이 개발되며 혁신적인 변화가 등장한다. 군수물자의 개선은 열대에서 효과가 매우 컸는데 통조림과 분유, 연유, 마가린은 냉장기술이 없던 시기에 등장해 열대에서도 식량의 선도 유지 및 보급 규모 개선이 크게 작용한다. 도로나 철도는 군사와 물자의 보급에 매우 중요했다. 이는 공격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자국은 방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의 보급으로 전쟁에서 정보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중앙이나 사령부에 전달되게 되었다. 

 이 책은 인류초기부터 현대까지의 전쟁을 무기의 등장이나 전술, 주요 전쟁사를 빠짐없이 다루려고 한 책이다. 하지만 다루는 내용이 방대하고 책이 그리 두껍지 않다보니 매우 빠르고 짧게 한 소재를 다루며 넘어간다. 이 부분이 매우 아쉬운데 뭔가 이야기를 하다 마는 느낌이 들고 전쟁사 전체를 변화시키는 주요 혁신적 변화를 다루는 면이 아쉬웠다. 원거리 무기의 등장, 기병의 등장, 총기의 등장 등은 꽤나 전쟁을 혁신적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좋은 점은 모든 전쟁에서 단순히 무기나 전술이 아니라 성공을 위해서는 현지에서의 조력과 병참 문제의 해결, 그리고 동맹을 잘 다루고 와해하는게 인류사적으로 공통됨을 보이려고 했다는 점인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첨단×유산 - 역사와 과학을 꿰는 교차 상상력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기획 / 동아시아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려대학교에서 과거 유산과 첨단기술을 연결하여 엮은 책이다. 하지만 책에서 양자가 비중이 비등하진 않고 유산에 더 초점이 가 있다. 그리고 연결도 좀 매끄럽진 못한 편이다. 그럼에도 첨단지식과 과거역사문화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첫 장은 미술이다. 미술은 시점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회화가 평면인 만큼 동서양 모두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찾았다. 서양은 15세기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거울을 이용해 투시원근법을 개발했다. 이후 소실점을 그림에 한 개나 두 개, 세 개도 사용하며 과학적 접근을 한다. 동양은 이를 하늘로 올라가 극복했다. 부감법을 개발한 것이다. 

 한국은 조선시대 부감법을 많이 사용했는데 그리는 대상의 규모에 따라 높이를 달리 할 수 밖에 없었고 고공부감법, 고공경사부감법, 저공경사부감법, 평행사선부감법을 이용했다. 고공부감법은 하늘의 높이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것으로 궁궐의 장대함이나 많은 인원을 동원한 행사에 적합했다. 고공경사부감법은 시선을 약간 뒤로하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경사각을 표현한다. 정산의 금강전도, 김홍도의 월야선유도가 이 방법을 사용했다. 저공경사부감법은 살짝 만 뒤로 올라간 것으로 규모가 작고 대상을 크게 그려도 되는 풍속화에 적합했다. 서당이나 단오풍정 등이 이 방법을 사용했고 공간이 친밀하게 느껴지는 장점이 있다. 평행사선부감법은 고공경사부감법을 발전시킨 것으로 부감법의 최종판이다. 고공경사부감법을 취하되 건물만을 특이하게 정면에서 45도를 비틀어 그려 입체감을 드러낸다. 규장각도나 화성행궁도가 이 방법을 사용했으며 가까운 것을 오히려 작게 그리고 먼 것을 크게 그린다. 

 한국에는 평행사선부감법으로 제작한 대작으로 효명세자가 남긴 동궐도가 있다. 크기가 무려 576*273으로 창경궁과 창덕궁, 비원등 당시 궁궐의 전체를 남겼다. 워낙 대작이었기에 여러 화원이 나눠 그렸는데 그럼에도 하나의 시선으로 그림을 완성한 것이 대단하다.

 서양에서는 도자기를 도기와 석기, 자기로 구분한다. 기준은 온도인데 도기는 80-1100도, 석기는 1100-1250도, 자기는 1250도 이상이다. 이 구분에 따르면 삼국시대 백제토기는 800-900도였고 통일신라의 토기는 900-1000도, 조선 백자는 1250도 내외로 부합한다. 도자기는 유약을 쓰는데 그 역사는 철분의 역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분이 어느 정도 되느냐에 따라 색이 바뀌는데 흑색은 10%, 붉은 색은 5-10%다.  

 최초의 청자는 중국 한나라에서 1세기 쯤 탄생했다. 중국 항주 인근 절강성이 청자 집단 산지로 이후 1000년이 지나서야 고려에 들어왔다. 청자 생산의 핵심은 알맞은 태토를 찾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유약, 세 번째는 불을 때는 기술이다. 고려 청자의 가마기술은 아마 10세기 경 중국 월주요지역에서 장인을 통해 유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자는 가마 밑바닥에 뒤집어 놓은 듯이 동그란 모양으로 깔려있는 감발이란 것을 쓰는데 이는 보조역할을 한다. 감발을 사용하면 자기에 열을 고르게 전달해 발색이 좋다. 하지만 소수만 소성할 수 있기에 비용이 많이 들고 고급청자에만 쓴다. 

 백자와 청자는 태토가 매우 다르다. 청자는 논밭 1미터 정도 아래의 흙이 적합하고 강진과 부안의 것이 좋으며 양도 풍부하다. 하지만 백자는 돌을 부순 흙이 적합해 산 꼭대기에 태토가 있다. 여러 지역의 태토를 배합하기에 흙의 확보가 매우 어렵다. 유약은 재를 쓰는 것과 납을 쓰는 것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재를 쓰는데 납유약은 인체에 해롭기에 써도 주로 자기의 외부에만 쓴다. 납유약은 중국의 당삼채에 적합하다. 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각종 색상이 자연스레 흘러내리는데 그래서 당삼채의 색이 총천연색을 띄게된다. 반면 재유약은 채색이 어렵다. 무슨 나무 재를 얼마나 섞느냐가 중요하다. 

 중국의 가마는 상당히 규모가 크다. 높고 길이도 긴데 반면 고려의 것은 높이도 낮고 길이도 짧다. 중국의 가마는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고려의 것은 애초 소량생산 용이었던 것이다. 고려의 것은 대량생산은 어려운 반면 가마가 작기에 온도의 조절이 좋고 소성과 냉각이 쉽고 빠르다. 때문에 색이 좋고 고급청자가 잘 나온다. 청자의 색은 역시 철과 관련하는데 유약의 철이 환원하면 푸른색으로 변화한다. 가마 안의 장작이 타면 탄소가 발생하는데 탄소가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이산화탄소가 되어 날아간다. 이렇게 공기 중의 산소를 조절하여 산화환원을 조절해 색을 내는 것이다. 

 처음엔 아궁이에 소량의 장작을 넣고 문을 열어놓는다. 이러면 산소가 들어와 탄소와 결합하고 산소는 유약의 산화철과 결합하여 산화가 더욱 진행된다. 그러다 900도에 이르면 장작을 3-4배 넣고 문을 닫는다. 이러면 산소가 급격히 줄고 탄소가 늘어난다. 그리고 이 탄소가 유약의 산소를 빼앗아 유약을 환원시키는데 이려면서 푸른 색을 띄게 되는 것이다. 

 고려청자의 백미는 색과 더불어 상감이다. 하지만 상감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릇은 구우면 부피가 줄어드는데 청자는 15%, 백자는 20% 정도가 감소한다. 태토와 바른 유약의 열팽창계수가 같아야 같은 비중으로 줄어 균열이 없는데, 이를 맞추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대부분의 청자와 백자는 약간의 균열이 있다. 여기에 상감을 하면 태토와 유약, 그리고 백상감토, 흑상감토 4박자가 맞아야 한다. 고려청자는 중국 청자보다 색이 좋은데 이는 가마와 관련한다. 고려의 가마는 작아 빠른 냉각이 가능해 유약에 결정이 적다. 때문에 난반사가 적어 색이 잘 나는 것이다. 

 조선의 백자는 시기마다 사실 색이 조금 씩 다르다. 순백색으로 시작해 회백색, 백옥색, 청화백자로 이어지는데 가장 최고는 백옥색을 띤 18세기 백자다. 백자가 회백색을 띄는 시기는 나라 경제가 어려워 태토 확보가 어려웠던 시기다. 백자는 청자와 다르게 상감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데 이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초벌구이 한 백자는 표면이 입체이니 당연히 그림을 그리기가 어려우며 매우 건조하므로 수분을 빠르게 흡수한다. 때문에 한붓으로 빠르게 그리지 않으면 먹이나 물감을 모두 먹어버린다. 여기에 재벌하면 크기가 더 작아지기에 애초에 그림을 그릴때 축소 될 것도 감안해야 한다. 

 김정호는 평생 지도를 제작했다. 그는 30대였던 1834년 청구도를 제작했고 1859년 동여도를 완성하고 대동여지도를 완성한다. 대동여지도는 동여도를 초고로 삼아 판각한 것이다. 김정호는 지도제작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지리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편찬하여 지도와 지지를 항상 같이 제작하였다. 지도에는 정보를 담는데 큰 제약이 따르기에 그는 지지를 같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대동여지도의 지지편이 대동지지다.

 대동지지는 32권은로 1권이 서울, 2-24권은 8도의 각 군현, 25도는 산수고, 26도는 변방고, 27-28권은 정리고, 29-32권은 방여총지다. 정리고는 각종 도로망이고 방여총지는 단군에서 고려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영역을 담은 것이다. 

 김정호에 대한 오해는 세간에 널리 펴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도를 평생 전국을 돌며 실측해서 만들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정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옥사설이다. 이는 과거 교과서에 이렇다할 근거없이 짧게만 실렸던 것이 널리 퍼진 것으로 아마도 내용이 극단적이어서 였을 것이다. 책의 저자는 이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실측이다. 아무리 공간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도라도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단지를 그냥 걸어서 지도로 표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아파트단지는 단순하기로도 한데 경계가 복잡하고 산과 물이 접하고 고저가 있는 과거 조선의 군현은 어떨까. 물론 산 등 높은 곳으로 올라가 조망하는 방법도 있으나 전국을 이렇게 하기도 힘들고 막상 높은 곳은 시계가 나쁜 경우도 많다. 때문에 저자는 김정호가 실측이 아닌 방대한 자료를 얻어 이를 토대로 종합하여 지도를 편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기에 옥사설도 말이 안된다. 방대한 자료를 관으로부터 얻어 지도를 제작할 수 있던 자가 정부와 갈등관계이긴 어렵다. 저자는 사실상 김정호가 정부의 의뢰 혹은 관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어 정보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목판제작하였다. 목판은 약점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단색 표현으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과 필사지도와는 다르게 많은 정보를 넣기 어렵다는 점이다. 실제 동여도에는 지명이 1만 8천개인데 대동여지도에는 1만 2천개로 줄어든다. 김정호는 심사숙고하여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고 중요도를 기준으로 6천개를 떨군 것으로 보인다. 

대동여지도에는 특이하게 산과 강등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도로망만은 직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대에도 직선도로가 매우 드문데 조선에 직선도로가 웬말일까. 여기엔 김정호의 의도가 담겨있다. 목판본은 언급한 것처럼 단색이기에 도로망마저 실제로 그리면 산맥 및 하천 등 다른 것과의 구분이 매우 어려워진다. 이에 김정호는 도로를 직선표기하고 거리를 알려주기 위해 눈금표기 하였다. 때문에 지도를 보는 사람은 군현간의 실제 거리를 매우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또한 김정호는 실제 도로가 연결되지 않은 군현 사이에도 도로를 그려넣었는데 이는 도로는 없더라도 각 군현간의 관계망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여러모로 머리를 많이 쓴 셈이다. 

 조선에서 소식을 전하는 방법은 편지와 봉수, 필마가 있었다. 이중 가장 빠른 것은 봉수인데 속도가 시속 100km였다. 하지만 봉수는 매우 단순한 의도만 전달 할 수 있었는데 봉화가 5개여서 개수에 따라 정보가 달랐다. 하나면 평시이고 두 개면 국경에 접이 출몰, 세 개면 적의 침범, 네 개면 척의 침공, 다섯 개면 전투였다. 하지만 정보전달이 매우 단순하고 실수가 잦았으며 봉수꾼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필마에 더 의존했다.

 조선은 말을 통한 소식연결을 위해 전국에 역을 운영했다. 말은 시속이 60km로 빠르나 지구력이 약해 대충 30리 간격으로 역을 배치했다. 이로 인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15-20일이면 소식이 도달했고 실제 임진왜란때 선조는 3일 반만에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큰 규모의 역은 전국 41개 작은 역은 504개 였다. 찰방이라는 관리가 역의 총책임자였고 그 밑에 역리가 있었다. 큰 역에는 역리가 20-30명, 작은 역에는 2-3명 배치되었고 그 아래 역노비가 다수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암행어사가 동원하는 인원이 바로 이 역노비다. 1808년 전국 역에서 보유한 말의 수가 5380필에 달했다 .상당한 수인데 아마 전란이 일어나면 군마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역에서 말을 사용할 권리를 증빙하는게 마패다. 마패는 세 가지 역할을 했는데 역에서 말을 빌리고 ,신분을 증명하고 , 공문서에 도장으로 쓰인 것이다. 10마패는 왕, 7마패는 대군, 6마패는 정2품이상, 5마패는 종2품 관리이고 그 아래는 1-5마패를 썼다. 마패는 나무나 철로 초기 제작했는데 부식을 막기 위해서 나중에는 구리 마패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라시아 역사 기행 - 한반도에서 시베리아까지, 5천 년 초원 문명을 걷다
강인욱 지음 / 민음사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 4대 문명을 지금 사회의 시원으로 보지만 이는 농경사회, 특히 서구적 시각에 가깝다. 채집 및 유목은 농경보다 오래되었고, 특히 반건조지역인 초원은 화약의 발명으로 무력화되기 전까지 적은 인구수에도 인류문명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다. 많은 문화 및 기술의 전달 통로 역할을 하였고 단절된 농경지역을 교역로로 연결했으며 때론 막강한 군사력으로 농경제국을 허물고 세계제국을 세우기도 했다. 때문에 저자는 초원은 적어도 5대 문명쯤 취급받아야 한다고 본다. 현재 초원 문명중 농경사회에 삼켜지지 않고 이렇다할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보니 초원의 역사 역시 제대로 발굴되지 않는 측면이 상당하다. 

 농경문명을 계승한 지금의 국가들은 초원에 대해 두 가지 정도의 관점을 갖는다. 우선 대국들은 과거 초원에 당한 것을 생각하며 야만이나 이질적이고 공포의 대상으로 취급하면서도 그들이 이룬 대제국을 이중적으로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려 한다. 그리고 주변부의 국가들은 초원을 웬지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고 싶어한다. 동아시아로 치자면 전자는 중국, 후자는 한국과 일본의 태도다. 하지만 둘다 옳지 못한 태도이며 기본적으로 초원이 농경국가와 꾸준히 교류하고 기술문화적으로 상호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 종합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우린 초원을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하지만 인구가 적은 만큼 그 지역은 인구부양력을 갖지 못한 매우 혹독한 지역이다. 여름이 매우 짧고 겨울은 혹독하고 길다. 초원은 이 짧은 여름에 자라난 풀에 의존한다. 식량이 없기에 유목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효과적 가축 통제와 목초지로의 빠른 이동을 위해 식량수단이던 말을 이동수단으로 길들였다. 장성한 아들이 먼저 분가하여 새로운 목초지로 떠나기에 초원에선 마지막까지 남은 막내가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한다.

 말을 길들이는데는 3가지 중요한 마구가 필요했다. 우선 재갈이다. 재갈은 말의 이빨을 뽑아서 끼우거나 어금니를 갈아낸 후 끼우는 것으로 약간의 힘으로도 고삐를 당겨 말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다. 때문에 재갈이 개발되고 나서야 말에 탄 인간이 안정적으로 말의 방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은 안장이다. 말의 등뼈는 울퉁불퉁하여 등에 타면 탄 사람에게 상당한 부상과 불편한 감각을 준다. 때문에 안장을 개발해 등뼈를 덮고나서야 사람은 안정적으로 승마를 할 수 있게 디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기병이 등장한다. 마지막은 금속제 등자다. 등자는 이전에 개발되었지만 금속제 등자는 3-4세기 고구려고 처음 개발했다. 금속제 등자로 중무장 기병이 등장한다. 말위에서 무거운 무기를 휘두르거나 말 자체를 무겁게 무장시키면 승마자가 안정적일 수 없었는데 금속제 등자의 등장으로 큰 훈련없이도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바로 이 금속제 등자의 발명으로 탄생한 것이다. 

 말을 어느정도 다룰 수 있게 되자 전차가 등장했다. 전차는 무기이면서 신과 인간을 잇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전차는 매우 비싼 무기였는데 바퀴살이 개발되고나서 더욱 활성하한다. 유명한 카데시전투에서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맞붙었는데 히타이트는 바퀴살을 개발해 전차를 경량화한 덕에 3명이 전차에 승선했다. 한명의 방어, 한명의 공격, 한명의 운전이다. 반면 이집트는 기존처럼 한명 공격방어, 한명 운전으로 크게 불리했다. 전차는 기원전 11세기가 되어서야 중국 상나라에 전파하였고 한반도와 만주에선 별로 쓰이지 않았다. 이는 당시 한반도와 만주에 큰 전쟁이 없던 중교중심의 제정일치 사회라는 것과 산악지형이 많아 전차가 별로 쓸모가 없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초원 민족은 승마를 하기에 생식력이 낮았다. 승마는 위험한 것으로 격렬하게 오래 말을 타면 자연거세 확률이 높았다. 유목사회는 이런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여 보상하였고 생식과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욱 전투에 집중해 무서운 전투력을 가진 전사로 거듭났다. 유목사회는 인구유지를 위해 생식력을 보존한 다른 사람들이 많은 아이를 낳아 그 아이를 입양시키는 방법과 전쟁포로를 집단에 유입시키는 방안을 썼다. 

 사슴은 초원에서 생활에 필수적인 고기와 가죽을 제공하기에 매우 중요한 문화적 모티프가 된다. 사슴을 숭앙하는 풍습이 초원이 널리 분포하는데 이는 동아시아에도 이어진다. 기원전 9-5세기 초원에는 사슴돌이 만들어진다. 이는 2미터 정도 크기로 자바이칼, 알타이, 몽골 등지에 분포한다. 전면을 사슴문양으로 채운 이 돌은 전체가 초원전사를 의미한다. 귀부분엔 그래서 귀걸이가 허리부분엔 허리띠와 칼 문양이 등장한다. 스키타이 전사들은 역동적인 형태의 사슴을 새긴 청동이나 목제 장식품을 애용했다. 그들이 그린 사슴은 종류만 10종 이상에 자세도 매우 자세하여 사슴에 대한 상당한 관찰과 관심을 보여준다. 한편 사슴문화는 한반도에도 펴졌는데 그래서 기원전 3-1세기 사슴문양 청동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한반도는 사슴문화가 크기 않은 지역이다. 

 중국에선 초원 세력을 야만시하고 적대하지만 그들의 역사에 초원은 역시 깊이 자리한다. 중국은 초원세력인 원과 청, 요와 금을 겪었고, 몇몇 한족(?)왕조는 사실상 초원과의 연합세력이다. 우선 주나라를 들 수 있다. 주는 중원에서 서북방면으로 건너간 일파가 현지에서 주변 세력과 연합하여 힘을 키운 후 다시 중원으로 진출해 상을 멸하고 세운 나라다. 전국시대 조나라도 있다. 조나라의 무령왕은 인근 약소국인 중산국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다. 중산국은 유목문화를 받아들여 강한 기병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당하지 못한 것이다. 무령왕은 당시 중원인이 남여 모두 치마를 입던 것을 호복인 바지를 스스로 입고 명령하며 기병을 키웠다. 결국 이들은 중산국을 멸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다. 다음은 진이다. 진은 위치 자체가 중국 서북방면으로 애초에 중원과 거리가 멀다. 진은 오래된 국가인데 기원전 7세기에 묵공이 서융을 제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비로소 세력을 떨치게 된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특이한 양식으로 4세기 갑자그 등장해 200년간 유지된다. 알타이 지역의 파지릭 고분이 매우 유사하다. 파지릭 고분은 무덤 주변에 둘레돌을 두르고 무덤 위로 돌을 쌓고 안에는나무 무덤방을 놓는다. 둘 다 유라시아에서 매우 드문 방식이다. 신라와 가야에는 후발주자이고 고구려 백제와 달리 북방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짐에도 북방 문화가 많이 나타난다. 신라의 천마도와 황금보검 가야에서 출토되는 철제무기나 마구등이 그러하다. 학계에서는 한때 이들 지역이 북방기마민족의 후예가 내려와 강하게 영향을 미쳐서 그렇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저자는 그런 인구이동의 흔적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소국인 이들에게 이런 문화가 나타나는 것은 강한 힘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스스로가 북방과 대결하며 교류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고구려와 강한 문화적 정체성과 폐쇄적 농경문화의 백제에 비해 바다를 접해 개방적이고 오히려 교류가 원거리로 가능했던 이들 지역이 영향을 받기 쉬웠기 때문이 아닐까로 추정한다.

 한국의 대표적 먹거리 문화인 불고기는 사실 농경과 유목문화의 결합품이다. 초원에선 샤슬릭이란 꼬치구이가 오래전 부터 유행인데 그들은 양고기를 꼬치에 끼워넣고 다니며 불에 쉽게 구워먹곤 했다. 이를 발전시킨게 고구려의 맥적이다. 맥적은 반농반목 국가인 고구려에서 콩류의 양념을 고기에 재워 꼬치 형태로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양고기와 양념이 없는 고기는 아무래도 비린내가 나기 마련인데 맥적은 양념을 하여 이것을 잠재운 것이다. 맥적은 중국과 초원에서 인기가 매우 좋았고, 조선의 설하벽으로 이어지고 지금의 산적과 너비아니로 이어졌다. 지금의 불고기는 콩과 고추장류 양념에 채소를 곁들이는 것으로 완벽한 초원과 농경의 융합작품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2-07-05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 ‘기병이 등장하자 전차도 등장했다’는 의미는 전차가 기병 이후에 나왔다는 의미인지요?
그렇다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듯 합니다. 전 전차가 먼저 나오고 한참 후 기병이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닷슈 2022-07-05 22:01   좋아요 1 | URL
아니요, 북다님 말씀이 맞습니다. 전차 이후 기병입니다. 어느 정도 말을 쓸 수 있게 된다음 전차가 등장했다라는 표현을 하려던 것이었는데 좀 문제가 있네요. 고쳐야겠습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