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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청미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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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의 책은 불안과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그리고 단독 저술은 아니지만 사피엔스의 미래에서 접해보았다. 우리 인간은 당연히 뭔가 부족한 존재이기에 보통씨는 이 책에서 인기가 없고, 가난하고, 좌절했으며, 부적절하기까지 하고, 상심했고, 어려움에 처한 인간들의 고민에 과거 철학자들의 힘을 빌려 철학적 위로를 전하고 있다. 이게 이 책의 집필이유인듯하다. 책을 읽으면서 각 철학자들에 대한 보통씨의 해석과 나름 사안에 대한 철학적 위안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위의 감정들은 살면서 누구나 여러번은 느낄만한 것들이다. 

 인기없는 자들에서는 소크라테스를 다룬다. 소크라테스야 말로 인기가 없어서 죽지 않았는가?  소크라테스는 3명의 사람이 고발하여 배심원재판끝에 그야말로 인기투표에서 져서 죽었다. 훗날의 인간들이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옳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당시 아테네는 이웃경쟁국가의와 전쟁에서 패하며 쇠락의 길로 진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희생양이 소크라테스였다는게 보통씨의 설명이다. 살면서 진리와 소신을 가진 많은 이들이 어리석은 대중과 다른 사람에 의해 실패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살아간다. 수많은 예술가들과 혁명가들 정치인들이 그렇다. 우리 개인들 역시 일상생활과 회사 및 조직내에서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소신과 진리가 중요하다는게 소크라테스와 보통씨의 위로다.

 다음은 가난이다.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와 가장 관련이 깊다고 볼수 있는데 여기선 에피쿠로스가 등장한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으며 행복을 위한 반드시 필요한 것들로 기본적인 의식주, 우정, 사색, 자유를 말한다. 실제로 현대사회의 많은 연구들은 기초적인 물질조건이 해결되면 그 이후의 행복은 그것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매슬로우의 욕구이론도 그러하며 얼마전 읽은 행복의 기원역시 행복의 근원을 인간관계에서 찾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에피쿠로스가 물질적 쾌락의 추구를 완전 부인한건 아니다. 그 한계를 알고 적절히 느낄 능력이 된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좌절에서는 로마의 세네카를 소환한다.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 출신으로 결국 네로에 의해 모함받아 죽음을 당한다. 이 때보여준 세네카의 좌절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배울만한 점이라고 보통씨는 생각한듯 하다. 살다보면 실제로 어쩔수 없는 일이 많다. 당장 아마게돈 영화처럼 소혹성이 떨어져도 지구를 탈출할수 없으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수명은 120을 못넘는다. 지금 당장은. 거기에 폴워커처럼 근육질의 완벽 건강체도 암덩어리에 의한 갑작스런 요절을 피하진 못했다. 이런 인간의 상황을 세네카는 인간이 어디로 나아갈지 모르는 짐마차게 약간의 여유가 있는 사슬에 묶인 개와 비슷하다고 한다. 숙명의 방향은 어디로 갈지 모르는 짐마차가 정하며 우리 인간은 그 안에서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약간의 변화를 줄수 있을 뿐이다. 마땅히 내가 할수 있는 불의엔 저항하고 나아가야 겠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좌절은 숙명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부적절한 존재들을 위로하는 사람은 몽테뉴다. 그는 대부분의 부적절이 상당수의 사람들이 숙고조차 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내면화한 관습에 의지함을 지적한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음식과 의복문화, 예절과 법등 많은 것들이 그렇하다. 그리고 사소한 유럽의 그런 것을 잣대로 아메리카 토착민들을 잔혹하게 도륙한 스페인 침략자들을 강도높게 비난한다. 이런 부적절함에서 벗어나고 또한 부적절함의 잘못을 잘 판단하기 위해 몽테뉴는 꾸준히 공부해야 함을 말한다.

 상심에 대한 위로철학자는 쇼펜하우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생의 의지로 생존에 대한 욕구와 자손 번식에 대한 욕구를 제시한다. 이는 철저한 무의식의 자리한 것으로 의식은 이것을 자각하지도 못하며 자신이 이걸 위해 움직이고 노력하고 괴로워함을 알지 못한다. 때문에 이런 생의 의지를 위한 자신의 상심은 부질없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결국 이룰수 있는 것도 아니며 설사 이룬다 해도 금방사라지는 그런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어려움에 처한자들의 상담자는 니체다. 초기의 니체는 쇼펜하우어에 크가 감화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성향이 짙었다. 하지만 서서히 변화하여 오랜 고통을 동반한 노력끝에 산의 정상위에 올라 초인이 되는 철학을 제시했다. 그의 초인은 전체주의에 의해 이용되기도 했지만 그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이런 초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니체는 적절한 위안이나 노력을 방해하는 종교나 술등의 배척한다. 니체에게 진정한 어려움의 극복은 적절하면서도 매우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고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인간의 고충에 대해 철학자들의 이론을 제시하고 나름의 해결책을 붙인 것 책의 좋은 시도 같다. 개인적 어려움과 철학을 모두 즐길수 있지만 사실 이도저도 아닌 느낌도 적잖다. 오히려 이런 류의 책이라면 강신주의 책이 더 나은 것 같다. 또한 철학자 의견을 주로 제시하다 보니 보통씨의 생각이 별로 없는 부분이 책의 아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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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소년 2017-09-22 2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는 옳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진리와 소신을 가진 많은이들이 어리석은 대중과 다른 사람에 의해 실패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살아간다.

매우 공감되는 글입니다.. 옳은 생각하고 옳은 말 하던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탄압을 받았지요.. 세상은 더 진보하고 평등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 한 이유가 정의는 고독하기 때문일겁니다..

닷슈 2017-09-22 22:10   좋아요 1 | URL
결국 그 탄압하고 곁에없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든생각이 바뀌든 인정을 해주어야 인간사회에서 의미있는 진리가된다는게 아이러니입니다

북프리쿠키 2017-09-22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신주님의 책을 여러권 사다놓고
아직 펼쳐보지도 못했는데,
닷슈님의 글을 읽으니 의욕이 솟는걸요. 조만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닷슈 2017-09-22 22:17   좋아요 1 | URL
강신주님 책 강추합니다 좀두껍지만 가독성좋고 울림이있습니다
 
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지식인마을 37
김선희 지음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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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는 진화론과 불교를 알았을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떠오른 질문이었다.

이 책은 지식인 마을 시리즈의 한 권이다. 총 40권인데 올초에 1권인 '진화론도 진화한다 다윈&페일리 편' 읽으며 그 존재를 알았다. 이 책은 37권이다. 꽤 괜찮은 프로젝트 같아서 책을 사고 싶었지만 보관할 공간도 없고 해서 직장내 도서로 다행히 구입이 되었다. 곧 직장을 옮길 예정이라 빨리 읽어야 하는데 읽어보니 역시 철학은 쉽지가 않았다. 다른책을 보며 무려 1주일 이상을 질질 잡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어느정도 이해가 된 것 같지만 솔직히 니체는 아니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 밖에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유명한 인생론을 대학초년에 읽은 적이 있었다. 워낙 부정적이지만 그걸 부인할수 없어 우울하게 인상에 남았던 기억이 있다. 그 짧은 이해와 기억 탓에 그래도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라고 하면 음 그래 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는 되었다.

 쇼펜하우어의 대표 저서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여기서 표상은 마음 또는 의식에 현전하는 것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칸트는 세계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주관성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관찰하는 세계는 그 자체가 아닌 주관이 무척 들어간 표상인 것이며 인간종 전체가 같은 표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개개인마다 다른 표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인간종과 개가 파악하는 세계는 감각기관의 차이로 완전 다른 표상을 갖고 있으며 같은 인간이라도 색맹인 사람과 아닌 사람의 표상은 완전히 다를수 밖에 없다.

 어쨌든 세계는 개개인의 주관에 따른 표상이고, 따라서 이 표상은 개개인의 이성적 인식이 아닌 직관에 의존한다. 그리고 직관이라는 것은 사람의 감각적 육체에 근거하는 것인데 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의지이다. 의지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직관적으로 관찰하고 파악하는 것이 표상이므로 표상은 곧 의지에 근거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표상들은 모두 의지의 객관화인 셈이다. 여기서부터 진화론 냄새가 좀 풀풀난다.

 의지는 세가지 동인을 갖고 있어 원인과 자극, 동기에 의해서 움직인다. 원인은 주로 무기물에 작용하고, 자극은 식물, 동기는 동물에 작용한다. 하지만 인간은 특별하니 3가지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동물이지 인간에게 있어 의지의 근본은 두 가지이다. 바로 욕구의 충족인데 이는 모두 개체를 유지하는 것, 종족을 번식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생존과 번식의 욕구가 의지인 셈인 것이다.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이란 자연이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걸어놓은 마법의 지배하에 있다고 말했다는데 마치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를 말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러한 의지로 인해 인간은 한없이 고통받는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것은 결핍된 행성에 동물로 태어난 이상 한계가 있는 것일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해결방법은 어처구니 없게도 정관이다. 세계는 의지와 표상의 산물이고 내가 이걸로 인한 고통과 번뇌는 모두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한발 물러서서 파악하는 것이다. 마치 불교의 해탈같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해결에서 더 나아가 동고란걸 주장한다. 자신이 이런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났음에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다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내가 해탈했어도 같이 사는 이웃이나 가족이 고통스럽다면 나의 해탈은 실로 무의미하고 이기적일수 밖에 없다. 이런점에서 주장하는 것이 다른사람의 고통도 이해하고 나와 같은 길로 이끌어가는 동고이다. 이 역시 상당히 불교적이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고통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불교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셈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가 보기에......) 그래서인지 쇼펜하우어가 불교와 진화론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불교는 확실하진 않지만 알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진화론 같은 경우 다윈이 종의기원을 발표하기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나왔으므로 가능성이 없었다. 물론 다윈이 그 저서를 만들어놓고도 거의 10년이상을 썩힌 만큼 다윈과 친분이 있었다면 알았을수도 있겠지만 국적이 다른 만큼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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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6-2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윈이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을 1871년에 냈죠. 멘델이 유전법칙을 1865~1866년 사이 냈지요. 멘델의 유전 법칙을 알았다면 다윈이 그런 식으로 유전(부모 형질의 융합)을 말할 수 없었죠. 그 이론에 따르면 돌연변이 등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물론 멘델의 법칙이 수학공식에 가까워 수학을 잘 몰랐던 다윈이 이해하기 어려웠을 거란 추측도 있지만요^^;
많은 이론들을 보며 ‘그가 이걸 알았다면‘ 싶은 게 많아 저도 생각을 덧붙여 보았어요^^

닷슈 2017-06-22 16:3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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