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현암사 동양고전
오강남 옮기고 해설 / 현암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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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시간이나 세계사 시간에만 들어본 장자를 봤다. 장자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없고, 직접 읽어본 사람도 딱히 없다는데 내가 딱 그랬다. 노자와 장자의 도가사상은 의외로 오랬동안 동양사회에서 살아남아 왔는데 유교적 가르침이 실용과 윤리를 강조한다면 도가사상은 그의 반작용으로 내면적 초월과 자유 및 이 살기 힘든 현세에서 벗어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일반백성들이나 권력자들에게는 도교신앙의 변질된 육체의 장생불사에 대한 욕망이 한몫 했을 것이다.

 책에는 노자와 장자의 차이가 먼저 등장하는데 노자 도덕경이 주로 간략한 어록이나 시, 산문으로 구성한다면 장자는 주로 이야기 형식이다. 그리고 노자 도덕경이 정치지도자를 위한 지침서 성격이라면 장자는 도가적 삶에 관심을 둔다. 마지막으로 노자가 도를 주로 만물의 생성변화의 근원이나 귀착점으로 본다면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변화 그자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뭔가 장자가 보다 자유로운 부분으로 진일보 한것 같은 느낌이다.

 저자는 장자는 체계적인 인식 내용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일깨움이 목적이라는데 그래서 책에서는 체계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렵고, 그래서 뭔가를 아는 것도 어려웠다.

 장자에게 있어서 참다운 인간상은 신인인데, 이 신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망기와 망공, 망명인데 망기는 몸의 안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망공은 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망명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 욕망을 발현하는 모든 통로를 막아내는 셈이다.

 장자는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는데 이 책은 주로 내편을 소개한다. 외편은 제자들이 썼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치 성경의 신약과 구약처럼 성격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아서다. 주로 내편이 장자의 직접적 생각이 많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데 무수한 일화가 등장한다. 하나같이 뜬구름 잡은 신선놀음식 이야기인데 저자가 해석을 달아놓은 것을 보면 아 그렇구나 싶다.

 재밌게도 일화에는 장자와 의견을 자주 다투는 혜자가 많이 등장한다. 이경우는 장자와 혜자가 이야기하는 식이다. 그리고 의의로 공자와 그 제자도 같이 나온다. 공자를 많이 다루는 것에 있어서는 공자사상을 비판하고 넘어서려 했기 때문이란 말도 있지만 공자의 유가사상을 토대로 더욱 사상을 발전시켰기에 공자가 자주 등장한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일화들의 주제는 모두 같다고 볼수 있는데 작은 미물이나 사물이 뭔가 거대한 것으로 변모한다던가, 내가 사실은 A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A가 아니라던지, 아니면 A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A라던지 하는 식이다. 예를 들면 쓸모없는 것이 사실은 더 큰 쓰임새가 있고, 쓰임새가 있는 것이 사실은 쓸모가 없다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나 사물의 주측면보다는 인간인 오히려 바라보기 힘든 다른 면을 보고 그것을 깨달아가면서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현세를 초월하자는게 주제인듯 하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도 우리는 현세를 살아가야하는 몸인데 그것을 마냥 모른체 하고 무관심하게 구는게 무책임한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다 싶을때 쯤, 장자의 인간세 부분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처세법과 정치사회윤리에 관한 부분으로 결국 장자도 어느 정도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민도 다룬 셈이다. 장자는 사람이 처세를 함에 있어 우선 심제를 강조하는데 심제는 마음을 굶기는 것으로 자신의 세속적 마음을 비워 도와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앞서 말한 망기와 망명, 망공을 실현한 상태랄까? 실제로 이런 상태에서 정치를 한다면 공명정대하지 않을까 싶다.

 장자는 윤리자체를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리 자체를 버리는 것도 아니다. 윤리가 지닌 한계성을 비판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핑계로 비윤리적인 것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을 더욱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불립문자라고 해서 도가 사상이나 불교에서는 진정한 깨달음은 문자로는 한계가 있고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장자는 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인의, 예악 같은 이치주의나 윤리지상주의 같은 구조를 버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이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것들에서 벗어나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선 이런것들을 알고 통달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모르고 그 이상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사실 이런것에 관심이 없는 동물과 같다는 점에서 이런 지적을 그럴듯하다.

 전체적으로 책은 뭔가 알것 같은 면을 주면서도 좀처럼 잡히지 않는 그런 느낌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럴수도 없었겠지만 뭔게 체계성도 부족하고 한 가지 주제로 꾸준히 뜬 구름 잡는 이야기로 동어반복을 하는 느낌이다. 그래도 장자니까, 그리고 우리는 속세에 메여 살면서도 벗어나길 희망하는 존재이니 읽을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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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없는 삶 - 불안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
필 주커먼 지음, 박윤정 옮김 / 판미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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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들어 한국사회도 무종교를 표방하는 사람이 절반을 넘어섰다. 종교를 갖는 사람은 꾸준히 증가세였는데 이제는 어느덧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과학기술 문명을 구축한 나라임에도 역설적으로 선진국중 가장 종교인의 수가 많다. 심지어 대통령도 취임때 법전도 아니고 성경에 손을 얹고 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미국도 어느새 3억을 넘는 인구중 수천만가량이 무종교로 돌아섰다. 어찌보면 선진사회에서 무종교는 트랜드인듯 하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여전히 종교가 주는 스트레스가 상당한 모양이다. 책에 의하면 미국사회에서는 군대내에서 종교를 상당히 권장하고 있으며 실제 식사시간에 단체기도가 이루어진다. 거기에 기독교 세력이 강한 몇몇 주에서는 종교적 중립을 지켜야 마땅할 교사 및 심지어 교장까지도 종교문제로 갈등을 겪는 무신론 집안의 자식과 부모에게 종교를 믿어서 문제를 해결할 것을 강권한다고 한다. 거기에 미국사회에서는 전반적으로 종교가 없는 사람은 비도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되다는 의식이 팽배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니 저자가 이런 책을 낸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책을 통해 비종교인들도 충분히 도덕적이고 책임감이 있으며 공동체적 삶을 잘 영위할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비종교적 성향을 가진 서유럽지역, 일본, 대한민국등은 모든 면에서 인간의 복지를 잘 구현하고 민주주의를 잘 실현하는 선진사회다. 이 나라들은 사망률이 낮고 교육 수준및 복지수준이 매우 높으며 사회가 안정적이고 치안이 잘 구현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경제력이 높다. 반면 종교적 성향이 강한 아프리카나 남미의 국가들은 이와는 정반대다. 종교를 믿으면서도 살인률과 범죄률이 높아 치안이 낮고 평균수명이 짧으며 교육수준 및 복지가 빈곤하고 정치적으로 개 독재국가다.

 이는 국가간 뿐만 아니라 한 국가내에서도 잘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 무종교적 성향이 강한 북부지역의 주들이 경제력이 높고 개방적인 반면 종교적 성향이 강한 남부의 주들은 그렇지가 못하다.(아마 이탈리아도 북부와 남부가 이럴 것 같다.) 무종교적 성향이 강한 나라들의 유일한 단점은 자살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종교적 성향이 강한 나라중 경제력과 복지, 민주주의가 잘 구현되지 못하는 나라도 있는데 중국과 베트남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들의 무종교적 성향은 공산주의에서 기인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물론 무종교적 태도가 반드시 그 국가의 여러 선진적 지표를 만들어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은 되어 보인다. 

 저자는 세계적으로 종교가 감소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든다. 우선 종교와 보수적 우파 정치가 노골적으로 결합한 것이 시민사회에 실망감을 준 것, 그리고 카톨릭 사제들의 소아성애 스캔들에 대한 감추기, 마지막으로 임금노동력으로 돈을 버는 여성들이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무종교의 삶을 사는 세속주의자의 특징도 드러낸다. 그들의 특징은 물질적인 수단으로 현세의 삶을 향상시키고, 과학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섭리이며, 선을 행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 세속주의자의 선은 황금률로 소위 역지사지의 원리이다. 즉,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무종교주의자는 사회, 문화, 정치적으로도 개방적인데 이들은 인종차별이나, 강경한 국수주의 , 전쟁찬성에 모두 반대한다. 다원적 삶은 추구하는 민주주의와도 잘 어울리는 것이다.

 책에 의하면 무종교주의자들은 전체적으로 오히려 종교주의자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수하다. 이는 수감률로 비교할수 있는데 무종교주의자들의 수감률은 종교주의자들의 수감률보다 낮다. 책은 이를 도덕성에 대한 자기 주체성으로 설명한다. 종교주의자들의 도덕성은 종교의 신에 기반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벌이나 상을 타산적으로 의식하는 도덕성이라는 것이다. 반면 무종교주의자들은 이를 황금률에 기반한 내면적 나침반에 의존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을 진다. 책에 나오는 한 사람은 종교에 기반한 도덕을 "도덕을 아웃소싱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기가막힌 표현이다.

 책을 마무리하며 저자는 무종교적 삶을 사는 4가지 형태를 제시한다.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인본주의자, 경외주의자다. 무신론자는 기본적으로 유신론을 부정하는 형태이므로 제한적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반면 불가지론자는 제한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좀 낫다고 보지만 어찌보면 신과 종교에 대한 입장을 피하는 한계가 있다. 또한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면이 강하다고 한다. 인본주의자는 이성과 과학, 이성적 탐구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전반적으로 좋은 개념이지만 지나치게 이성적이다. 그래서 저자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경외주의자다. 경외주의자는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생겨난 과정과 그 까닭을 인간이 어쩌면 영원히 알수 없다고 생각하며 우주의 신비를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학자이면서도 우주의 신비를 논한 아인슈타인이나 그외 수많은 과학자들은 어찌보면 인본주이자라기 보다는 경외주의자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면 위의 네가지 입장중 자신이 어디에 해당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인본주의자에 상당히 가까운 경외주의자 인것 같다.

 책의 끄트머리에 나온 인상적인 구절로 마무리한다. "경외를 느끼고 경험하는데 신은 필요없다. 생명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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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27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으셨네요 전 읽는중이라~ㅎㅎ

닷슈 2018-09-27 11:50   좋아요 1 | URL
벨루치님이라면 금방 보실수 있을 겁니다.

카알벨루치 2018-09-27 12:05   좋아요 1 | URL
머리에 쥐날려고 합니다 ㅋㅋ숙제느낌이...

2018-09-27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8-09-27 16:00   좋아요 1 | URL
책에도 나오지만 종교인들의 종교 강요 및 억압, 회유는 기본적으로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한국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건 처음 듣네요. 저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지휘관이나 부대성격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자대는 아니어도 훈련소에서는 종교행사가 좀 강압적이란 생각은 받았습니다. 물론 초코파이나 먹을 걸 주니 알아서 가는 면도 있지만요. 종교나 군대나 기본적으로 비민주적인 집단이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신의 위대한 질문 - 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질문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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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 죽었다고 니체가 말하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에 불과하다고 맑스가 말한지 100년도 더 지났다. 그들이 그말을 한 후로도 과학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하였고, 인간은 하라리가 호모데우스에서 말한 것 처럼 신이 더이상 필요치 않은 곧 엄청난 존재가 될 것만 같다. 이쯤되면 오래되고 구닥다리인 종교는 사라져도 무방할 것만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서구유럽의 제1세계에선 그 세력을 상당히 상실한지 오래지만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제3세계 다른 지역들, 그리고 중동과 아프리카등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종교는 기세등등하다. 오히려 시대가 지났음에도 과학에 대해 반발이라도 하듯 세계 각지에서 근본주의까지 난리다.

 이처럼 종교는 과학기술로 인해 세상을 설명할 능력을 상실하고 근본주의나 세속주의 심지어는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연명하고 있음에도 아직 종교가 인간에게 필요하고 많은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는게 이 책 [신의 위대한 질문]의 저자 배철현의 생각인것 같다. 저자는 구약 성경의 주요인물들에게 신이 던지는 막연한 질문들에 대해 그 의미를 역사적으로 혹은 그가 책에서 잘 쓰는 표현처럼 축자적으로 해석해서 오늘날까지 연장시키고자 하는 듯 하다. 나오는 인물은 아브라함, 카인과 아벨, 이샤야, 야곱, 욥, 다윗 등으로 과거 성당을 다닌 적이 있어 비교적 일화도 어느 정도 알고 친숙한 인물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한 첫 질문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물은 것으로 저자는 이 질문이 단순히 시간과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닌 그것을 초월한 질문으로 본다.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 머무르고 생활하고 활동함으로 자신이 결정되므로 사실 어떤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는 단순한 장소라기보다는 그사람의 인생 목적과 그 여정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질문은 아담과 하와의 자식인 카인과 아벨을 거쳐 그 후대인 아브람에게로 향한다. 아브람은 중동지역의 종교에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 유대교과,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기원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자식만 빼고 모든 것을 다 가진 한 지역의 대 부호인 아브람에게 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을 떠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기도 한데 성경에서 신은 아브라함과 욥, 예수 단 세명만 시험한다. 이 질문은 단순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음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자아로 자립하게 됨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어쨌든 아브람은 신의 말을 따라 자신의 지역을 떠나고 시험을 이겨내 다 늙은 나이에 아들 이삭을 얻게 된다.

 하지만 시험을 통과하고 인생의 좋은 날만 남았을 줄 알았던 아브람에게 신은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 시련을 안긴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서구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는지 책에는 아브람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고 이를 만류하는 천사의 모습을 여러 화가가 그린 장면이 등장한다. 화가마다 해석과 관점을 달리하는 것이 제법 재밌었다. 신이 아들을 손수 죽이려는 아브람에게 던진 질문은 "주님께 드릴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였다. 이 질문을 통해 아브람은 다시 시련을 그리고 아들 이삭은 자신을 죽여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 신의 시험을 다시금 통과한다. 화가마다 이 아브람의 모습과 이삭의 모습, 천사의 모습을 모두 제각기 해석한게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흘러 모세가 등장한다.  그 전에 등장한 야곱이 신의 시련을 이겨내고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을 받았다면 모세는 히브리인을 형성한 사람이다. 히브리인은 지금은 민족으로 여겨지나 과거에는 민족이나 인종이 아닌 국경을 넘나드는 떠돌이 집단을 의미했다. 일종의 유랑민족이나 유목민족인 셈인데 기원전 13세기 경 이집트로 일하기 위해 집단 이주했고 모세에 의해 하나의 민족 집단으로 형성된다. 신은 모세에ㅔ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어떤 시련에도 순종적이던 아브라함과 야곱, 이삭과는 달리 모세는 계속 신은 의심하고 자신이 신이 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묻고 고민하는 장면이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책은 이외에도 10개가 넘는 질문을 다루지만 솔직히 많이 인상적이진 않았다. 저자의 현대과학기술문명에서도 신과 종교이 필요성이 잘 강변되지는 않은 느낌. 하지만 종교의 필요성에 대한 저자의 생각엔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게 설로 잘 풀리지 않아서 그렇지.

 그 생각의 시작은 종교의 경전이 그리스 로마 문학과는 달리 모든 사실을 논리적으로 풀어내지 않고 문장간에 많은 행간을 두어 의미 부여를 인간에게 맡긴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인문학적이나 현대적으로 사람들이 언제나 살면서 부딪히는 고민에 질문을 던질수 있고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 물론 이를 악용해 자신들 맘대로 유리하게 해석하는 근본주의자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저자는 인간이 아직도 알 수 없는 우주나 자연에서 느끼는 경외감에서 영성을 느끼고 이를 통해 하나가 되고 자신을 대면하고 완성해가는 과정을 종교로 보고 있다. 유일신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 종교나 교리를 교조적으로 보는게 아니고 말이다.

 인상적이었던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창세기 1장 26절을 이야기하며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신의 현현으로 창조됐다. 라는 구절을 든다. 저자는 이 구절에 의미 부여를 하며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존엄하게 대해야 하는 기초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신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신의 형상을 지닌 다른 동료 인간들을 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에 대한 사랑의 완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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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철학 노트 - 철학이 난감한 이들에게
곽영직 지음 / Mid(엠아이디)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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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초년 시절 뭣도 모르고 철학을 집어들었던 기억이 난다. 알고는 싶었지만 너무 어려웠고, 의미를 찾기도 힘들었다. 남들은 원전을 본다는데 2차 서적도 보기가 버거웠다. 그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철학은 내게 어렵다. 그전만큼 관심은 없지만 여전히 흥미롭고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의 부채나 의무같기도하다. 더구나 최근엔 과학에 보다 관심이 많아 철학은 좀 많이 뒷전이었다.

 그래서인지 과학자의 철학노트란 제목이 확 다가왔다. 과학자의 관점으로 본 서양철학사라면 서양철학을 살펴보는 또 다른 관점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어느 정도 그러한 눈을 준것 같기도 하다.

 책의 구성은 연대순이다. 다른 철학서적 처럼 그리스로마시기-헬레니즘-종교시대-르네상스-절대왕정시기-계몽주의-과학혁명으로 나아가는 순이다. 개별장마다 각 주요 시기의 철학자가 나오는데 독특한 점은 그들의 실제 얼굴은 아닐지언정 일단 알려진 얼굴이 나오고, 삶이 간략히 소개되며 그 후 철학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하나의 철학자마다 철학의 내용을 제법 압축해서 소개한다. 물론 저자의 생각에 따라 철학자들의 분량이 꽤 차이나긴 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렇다 보니 많은 철학자가 소개되고 책의 볼륨도 제법이다.

 나 역시 시대 흐름을 느껴가며 읽었다. 이번 리뷰는 그 와중에 나름 인상적인 사람들 중심으로 써보려고 한다. 가장 처음 나오는 그리스로마시기는 사실상 서양철학의 씨앗을 뿌린 시기다. 물론 그 대개의 내용이 지금의 관점에선 터무니 없지만 이들의 통찰력은 사실 상당한 수준이라고 느껴진다. 이 사람들이 지금의 문명수준으로 세계를 볼 수 있었다면 상당히 엄청났을 것이란 건 분명해 보인다. 뭔가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신, 법칙, 로고스, 숫자 등)등에 대한 생각이 나타났고, 물질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생각도 나타났다.(4원소설이나 원자, 등) 어찌보면. 이후의 철학은 이 생각들이 서로 주도권을 주고 받으며 발전하는 과정이기에 사실 토대는 이미 완성된 셈이라고 볼수도 있다.

 종교시대도 생각보다 재밌었다. 다른 철학책이 주로 아퀴나스나 신학을 위해 철학을 사용하는 부분을 많이 거론한다면 이 책에서는 기독교의 교리의 완성과정을 잘 소개한다. 종교시대에 기독교의 문제는 크게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인지의 기독론과 어떻게 하면 구원이 가능한지의 구원론 두가지였다.

 예수는 신적인 존재이면서 인간이었기에 문제가 되었다. 양자를 모두 인정하기도 부인할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인데 무수한 많은 이론이 오랜 시간을 걸쳐 결국 익히 알려진 삼위일체론으로 정리되었다. 구원론은 인간이 원죄를 지은 결과 선행능력을 상실하여 결국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만 가능하다는 설과, 자유의지지가 있어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설이 있었다.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기독교가 부패하고,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으로 볼 때 전자에서 후자로 점진적으로 생각이 이행한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 시기 인상적인 사람은 단연 데카르트였다. 그리스로마시기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보다 체계화 했으며 그로 인해 근대철학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책은 평가한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형이상학적인 영역에 속하는 정신의 세계와 역학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으로 나누었다. 그는 물질의 속성으로 연장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연장은 물질이 공간을 차지하는 속성이다. 즉,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물질인 것이다. 이런 연장개념은 과학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당시 자연계에 만연한 정령이나, 영혼등의 전통적 사고를 물질에서 제외하는 성과를 낳았으며 이는 자연과학이 발전하는 밑거름이 된다.

 데카르트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개념에서 착안하여 자신의 철학을 전개시켰는데, 증명할 필요가 없는 의심을 여지없는 제1원리를 찾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제1원리가 생성된다. 문제는 제1원리에서 다른 원리로 이행되는 과정이었는데 데카르트는 다소 어이없게도 선한 신이 있어 나를 속여 존재하지 않는 다른 것을 인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르네상스시기를 거쳐 도래한 계몽주의는 절대왕정과 로마카톨릭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되었다. 계몽주의의 성향은 당시 각 유럽 국가의 정치적 상황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었는데 프랑스의 경우는 대혁명의 계기가 되었고, 영국은 이신론과 자유주의에 영향을 독일에서는 국가건설을 위한 문명화의 일환으로 이용되었다.

 영국에서는 이시기 경험론이 발달하여 과학적 사고가 발달하는데 이바지 하였고, 새로운 윤리사상으로 공리주의가 등장하였다. 책은 공리주의를 일컬어 역사상 처음으로 신이나 종교에 의지하지 않은 새로운 윤리기준으로 평가한다. 공리주의를 우습게 보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이것은 근대시민 사회의 윤리기준으로 자리잡았고, 고전경제학과 자본주의의 사상적 기초이자 현대복지국가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리주의의 시작은 벤담으로 그는 인생의 목적은 결국 쾌락이고 이를 행복과 동일시 하였으며 이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공리주의가 이토록 강력한 것은 이런 벤담의 통찰력이 인간 본성의 한부분을 제대로 관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독일에서는 칸트가 가장 인상적이다. 이성의 시기에 칸트는 이성을 비판하는 세가지 서적을 만드러냈다.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이다.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각각 한계가 있다고 파악하고 이들을 종합하려고 시도하였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합리론은 인간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경험론은 귀납적으로 얻어진 상대적 진리만을 인정하여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으로의 길을 막았음을 각각 비판한다.

 해결책으로 칸트는 인간이 지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외부에서 얻어진 감각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것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판단하는 선천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양자가 조화되게 된것이며 지식은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일수 있게 된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칸트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에는 결국 우리의 주관적 기능이 있어 물질 자체인 물자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지성으로 사물의 현상을 분류하고 정리할수는 있으나 그 현상 너머의 본질파악을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한계지은 것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려 욕망의 지배를 받으나 내적인 도덕법칙으로 인해 갈등상황에 놓인다고 말한다. 때문에 칸트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현상이 아니라 물자체에서 찾아야하며 결국 이를 통해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의 능력 한계로 버린 형이상학적 세계를 다시금 인간에게 이끌어온다.

 판단력 비판은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조합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현실적 과학세계를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물자체의 초월세계를 다룬 것이라면 판단력 비판은 이들을 종합한다. 이 둘을 연결하기 위해 칸트는 인과율에 따르는 도덕이 자연과 조화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즉 ,물질 세계인 자연에서 도덕의 목적과 일치하는 모습을 발견할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계몽주의와 논리철학자 및 실존주의 철학의 현대철학 부분을 다룬후 과학철학 쪽으로 넘어가며 마무리된다. 사실 결론 부분에서의 언급이 없고, 전체적인 흐름을 말하는 종합이 없었기에 전체적으로 과학을 향한 혹은 과학자로서 서양철학을 바라보는 눈이 생각보다 약한 점은 이 책의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책을 보면서 느낀점은 서양철학에서 절대적 법칙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절대주의적 사고와 감각경험을 추구하고 상대적이면서도 과학에 있어서는 법칙을 찾으려는 상대주의가 대비된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인간의 특성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데 인간에게는 종으로서 공통되는 생물학적 특성과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되는 부분들이 있으면서도, 개체로서 살아가면서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부여된 자율적 지능과, 개체마다 주어지는 상대적 환경이 동시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에게 부여된 이런 절대성과 상대성으로 인해 세계 역시 결국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은 아닐런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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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3-13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 현대라고는 하지만, 고대, 근대의 특성, 잔재(?)들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해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이어져온 엘리트주의, 대중을 일깨워야 한다는 계몽주의, 인공 지능이 나오자 어떻게든 인간 이성을 우월시하려는 자세,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와 미신 등등등. 이 혼재가 당연한 건가 싶기도 하고요...

닷슈 2018-03-13 21:10   좋아요 1 | URL
저도 철학을 잘 모르지만 조금이나마 알수록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많이 공감합니다
 
벤담 & 싱어 : 매사에 공평하라 지식인마을 16
최훈 지음 / 김영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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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윤리시간에 배우는 것이지만 서양윤리의 흐름은 크게 두갈래로 나눈다. 하나는 의무론적 윤리이며 다른 하나는 결과론적 윤리이다. 의무론적 윤리는 윤리를 의무로서 보는 것으로 저자는 책에서 칸트의 윤리학과 종교의 윤리를 예로 든다. 그리고 다른 갈래인 결과론적 윤리의 대표는 벤담과 밀 그리고 그 계승자인 싱어의 공리주의다. 저자는 윤리의 기본 전제조건으로 보편원칙이 되어야함을 말하며 의무론적 윤리설과 결과론적 윤리설을 살핀다.

 먼저 의무론적 윤리의 하나로서 우선 저자는 종교를 말한다.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윤리가 의무가 되는 것의 바로 신 때문이다. 그것이 신의 계시이지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도덕적으로 살아야하는 것의 근거가 신이되는 것이다.

 이것을 논파하기 위해 저자는 발칙하게도 그렇다면 신이 나쁜 말을 지시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묻는다. 신자들은 정의로운 신이 그렇게 나쁜 말을 할리 없다고 항변한다. 신은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이말은 자체가 모순이되어 그렇다면 나쁜말과 좋은 말이란것 자체, 즉, 도덕과 비도덕이 애초에 신 이전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저자는 이런 이유로 종교는 도덕에서는 이제 분리되어야 할때라고 말한다. 종교가 인간이 만든 것임을 인정한다면 도덕에 우선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된다.

 다음은 칸트다. 칸트행위의 결과나 경향성을 통한 도덕을 부정한다. 결과는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이며 경향성은 글자그대로 사람의 성향을 의미한다. 착하거나 악한 성향이 그것이다. 칸트가 이것들을 도덕의 잣대로 삼지 않은 이유는 이것들이 통제불가능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무리 도덕적 의도를 가지 행위라도 그 결과는 정반대일수 있으면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사람의 선하고 악한 성향은 타고나거나 환경적인 것으로 어찌보면 개인의 손을 많이 떠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칸트가 강조한 것은 이성에 의한 의무감을 통한 도덕의 실현이다. 이것은 앞의 것과는 다르게 통제가 가능하여 개인의 도덕적 행위에 대해 상을주거나 벌을 주는 등의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다. 선하고 악하고의 경향성은 기본적인 도덕적 감정으로 어찌보면 이성에 앞서 형성된 것일 수 있다. 이런 감정도덕에 대한 무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거기에 이성에 의한 도덕적 의무의 실현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저촉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문제로 저자는 칸트에게서도 간단히 떠나간다. 

 결국 의무론적 윤리설은 글자그대로 보편원칙으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지만 역설적으로 의무가 어째서 의무가 되어야하는지에 대한 토대가 약한 셈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남은 것은 공리주의다. 벤담과 밀에의해 발생한 공리주의의 문제점은 결과에 대한 계산을 기초로 도덕성을 판단하기에 의무론적 윤리와는 다르게 어떤 보편적 원칙이 생기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론적 윤리설이라고 부르기도한다. 하지만 저자는 싱어의 실천윤리학을 통해 공리주의로서도 충분히 이러한 보편적 원칙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항변한다.

 피터싱어가 말한 보편적 원칙은 이익들에 대한 평등한 고려 원칙이다. 벤담과 밀의 시절에는 사회가 비교적 단순하여 사람들의 이익의 총합을 계산할수 있었을거란 착각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현대사회처럼 복잡하게 이익관계가 얽히고 사람의 주관이 판단되는 사회에서는 질적이든 양적이든 이익의 총합 계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기에 나비효과같은 것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이건 신의 영역이 된다.  

 그래서 싱어가 제시한 이익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다. 한 존재가 고통으로 인해 행복을 겪을 수 없게 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죽음이나 감금, 기아 등이 이런 고통에 포함되는 것이며 싱어가 말하는 이익은 이런것을 피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이익이 된다. 즉, 고통을 피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 것이며 이것으로 계산을 하는 공리주의자이기에 싱어는 부정적 공리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런 최소한의 이익추구는 보편성을 쉽게 갖출수 있다.

 최소한의 이익이외에도 싱어는 보편적 원리로 응분의 원리를 제시한다. 응분의 원리는 각자가 자신의 책임이 아닌 종교나 성, 국적, 지능, 집안등의 이유로 행복의 차등이 결정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싱어는 사실상 평등할 수 없는 기회의 평등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결과적 평등으로까지 간다. 하지만 결과적 평등을 강조한 사회주의의 비효율성을 알기에 싱어는 결과를 평등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되 그 이상적이고 강제적 실현이 오히려 사람의 자유를 억악합고 비효율성을 낳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인센티브는 허용하는 사회를 주장한다. 즉, 타고난 집안이나 지능에 의해 누군가는 의사가 되고 그렇지 않은 누군가가 청소부가 되는 것은 불공평하지만 의사가 되기 위해 거치는 지난한 과정에 대한 노력의 대가는 어느정도 인정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청소부의 의사가 보이는 20여배의 급여차는 수용할수 없으며 타고난 조건으로 의사가 되기에 유리한 사람이 충분히 노력하거나 용인할정도 수준의 급여차만 인정하자는 것이다. 다소 애매하다. 어느정도까지 가능할까? 2배 5배? 북유럽사회에서 고소득층이 상당부분을 세금으로 헌납함에도 자기 이익과 계발을 위해 매진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하기도 하겠다.

 피터 싱어는 자신의 윤리의 적용대상을 동물로까지 확대한다. 사실 인간 역사에서 윤리의 대상은 점차  확장되어 왔다. 처음엔 자신, 가족, 타인과 사회, 민족과 국가, 지구인 전체로 말이다. 싱어는 여기에 동물이 들어가지 않을 이유는 없으며 동물역시 최소이익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그러함을 역설한다. 흔히 인간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들어 동물이 도덕의 대상이 될수 없음을 역설하지만 싱어가 보기엔 그 차이가 애매한 부분이 있으며 동물 역시 고통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최소이익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동물이 도덕적용이 될수 있다는입장중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싱어는 지능이나 언어 등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사실 애매한 부분이 있으며 사람의 나이나 장애 및 신체적 특징 여부에 따라 오히려 동물보다 지능이 낮거나 언어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있을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싱어는 인간과 동물의 구분보다는 도덕 적용의 대상으로 인격체의 개념을 말한다. 인격체는 사람이든 다른 동물이든 고통과 쾌락을 분명하게 느끼며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개념이 있고 이것이 현재로 이어지는 어느 정도의 자의식을 갖춘 존재를 말한다. 

 흔히 공리주의는 상대론적 윤리설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에서 보편적 원칙을 세우고자 한 피터싱어의 시도는 흥미로웠다. 물론 완전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싱어가 말한 것을 수용하더라도 결국 어느 것이 인격체고 아니냐의 구분은 역시 분명히 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완전해야 할  도덕이 이렇게 완벽하지 못한 이유는 인간의 도덕성이 결국 근원적으로 진화상 협력이 주는 적응도상의 이점에서 생겨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것이 인간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더욱 확장되어나갔고, 이렇게 되는데는 도킨스가 말하는 밈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찌보면 오늘날처럼 범위가 크게 확장된 인간의 도덕성은 오랜 협력이 준 적응도상의 이점이 진화에 반영된 결과가 설계를 넘어서 적용된 결과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이런 도덕범위의 확장은 기본적으로 물질적 풍요가 뒷받침되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먹기 살기에 충분한 식물식량이 제공되기에 동물을 도덕적 범위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처럼 먹고살기가 어렵다면 이런 주장이 과연 오늘날처럼 설득력이 있을까? 그것은 인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진화상의 호혜성원칙은 초기엔 관대하되 배신시에는 응징하는 것이다. 이는 무한한 관용은 없으며 물질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 상황이 악화될수 있는 근본적 원인이다. 또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선관용 배신후 응징 다시 선관용의 전략이 가장 높은 점수를 얻어 진화의 원칙으로 자리잡았음을 주장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협력적 상황이 더 큰 이득을 주는 제로섬 상황이 아닐때만 가능하다. 극도의 결핍으로 인해 협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실제로 자연계에서는 수많은 생물이 서로의 이득을 위해 공존하면서도 상대가 틈을 보이거나 면역계통에 문제가 생길경우 호전적으로 돌변하는 사례를 무수히 보여준다. 

 또한 다른 동물에게는 인간과 같은 도덕적 원칙이 없다는 것도 문제이다. 여성이나 유색인종, 사회적 하층계층에게로 도덕적 범위가 기본적으로 확장될수 있는 것은 그들이 결국 다른 계층처럼 도덕원칙을 갖고 적용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도덕원칙을 동물에게 적용한다하더라도 동물이 서로간에 그것을 적용할수 없고, 사람에게도 그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다른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저자 역시 이런 문제때문에 결국 동물의 실상을 그렇게 파헤쳤으메도 채식의 길로 들어서지 못했다. 또한 동물의 권리를 비교적 많이 보장해나가는 서구사회에서도 동물이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하는 경우 처리하는 방식은 그 동물을 죽이는 것이다. 제발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도덕은 기본적으로 언제든지 배신에 의해 무너질 우려가 있으며, 이기적인 이익의 관점에서 생겨난 것이고 풍요와 힘에의해 그 범위가 확장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토대가 매우 빈약한 셈이다. 인류의 도덕이 계속 확장되고 꽃을을 피우기 위해서는 풍요와 번영이 필수적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킨스의 말처럼 어느정도 유전자를 벗어날수 있는 존재이다. 실제로 남이 배신을하더라도 내가 굶어죽을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동물을 먹지 않거나 타인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분명히 적지 않게 존재한다. 거기에서 도덕의 토대가 단단해질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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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8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7-12-28 00:27   좋아요 1 | URL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도덕은 정말 어려우면서도 자꾸생각하게되는것같습니다

2017-12-30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7-12-30 14:14   좋아요 1 | URL
연말 잘보내시고 새해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