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가 된 인간 - 나는 어떻게 인간의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
토머스 트웨이츠 지음, 황성원 옮김 / 책세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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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본 책중 가장 독특한 책이다. 책을 읽으면 항상 리뷰를 하고 정리할 생각을 하며 큰 그림을 그리고 나름대로 책을 파훼하여 다시 머릿속에서 세워보지만 이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왜 이런 행동을하고 책을 냈을까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책이었다. 그만큼 저자의 책은 독특하고 이상하다.

 동기부터 이상하다. 잘은 모르지만 작가는 토스터기로 몇년전에 뭔가 업적을 이루어냈다. 나름 세상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로부터 5-6년의 시점이 지났다. 어느덧 33세의 나이가 된 작가는 무직에 세상에서 요구하는 안정을 위한 뭔가가 전혀 없다. 그런데 친구들은 의사가 되었으며 안정적인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런 작가지만 묘하게 여자친구는 있다. 작가인 트웨이츠는 생각했다. 이런 세상사에 대한 걱정없이 살고 싶다고. 그래서 동물이 되기로 했다. 동물이라고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극히 본능적이거나 현재적이고 인간처럼 쓸데없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게 없는 지나친 미래까지 걱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 찍은 건 코끼리였다. 그리고 한 프로젝트에 응모해 돈도 받아냈다. 그런데 코끼리가 되려고 하니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크기도 커서 인력이 아닌 자동차 수준의 엔진이 필요했고, 너무나도 컸다. 거기에 도구나 다름없는 코를 사용하는 것이 웬지 둉물적이지 못했다. 잎으로 풀을 뜯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찍은게 염소다. 물론 지원단체에 재설명이 필요했다. 왜 염소인지.

 작가는 동물이 되고 싶긴 했짐나 충분히 인간적이어서 겨울에 산을 타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에 염소가 되고 싶으면서도 짝짓기를 위해 자신의 소변을 수염에 바르는 염소수컷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염소의 번식기와 겨울을 피하고자 하니 시간은 가을 뿐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그는 진정한 염소가 되기위해 염소의 영혼과 마음, 몸에 대해 연구한다. 영혼을 알고자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이 떠올랐는지 무당을 찾아가 이상한 의식을 한다. 마음을 알기 위해서 동물연구자들을 찾아갔으며 마침내 몸을 알기 위해서는 염소를 같이 해부까지 한다.

 우여곡저끝에 매우 우스꽝스러운 염소의 몸체를 만들었는데 몸체를 만들어준 연구자까지도 염소처럼 걷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그리고 풀을 먹고 싶은게 문제였다. 몸체는 그렇다쳐도 풀을 당으로 바꾸어주는 염소의 내장기관은 도무지 무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셀룰로스를 소화하는 화학 물질을 준비하고 자신이 염소처럼 씹은 후 풀을 그 약품에 뱉어 소화시킨 후 먹기로 한다. 물론 맛을 보고는 정말 맛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침내 알프스로가서 염소떼와 함께 산을 내려오기로 하는데 도저히 그들의 속도를 맞출수가 없어 몇시간 미리 하산하지만 추월당한다. 평소 충분히 걷는 연습을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인 만들어놓은 지극히 평평한 바닥에서였고 경사지는 처음이었으며 그로 인해 더욱 힘들었다. 어쨌든 작가는 내려오고 염소떼는 마치 그를 환영하는 듯 하다.

 거기에 염소들은 제법 비슷한 작가에게 친근감을 보이기도 했고 심지어 이녀 석이 풀을 뜯으니 몇몇 경계심을 보이는 무리들은 안도하기 까지 한다. 간혹 동물 프로그램에서 어설픈 위장이나 로봇으로 야생동물에 접근하는데 쉽게 성공하곤 하는데 이런걸 보면 동물들이 자신의 종을 외형으로 구분하는 능력은 그리 정밀하지 못한듯 쉽다. 인간이 보기엔 단박에 아닌데 말이다.

 이런 재밌는 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염소이 생태와 마음에 대해서는 좀 알게되었다. 이런 초식동물의 다리가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는 것은 속도를 위해서이며 속도를 더욱 내기위해 네발을 웅크렸다고 점프한 후 강한 등근육으로 다시 펴서 더욱 속도를 낸다는건 재밌었다. 거기에 사람의 무릎처름 보이는 염소나 말의 뒷다리가 사실은 발목이고 발처럼 보이는 부위가 발끝부분이 변형된 것이란 것도 놀라웠다. 그러니 생김새가 휘는 것이 그러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개도뒷다리가 좀 이상했던 것 같은데......

 하여튼 재밌고 이상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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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과 제왕 - 문화인류학 3부작 넥스트 3
마빈 해리스 / 한길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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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빈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은 꽤 유명하다. 몇년 전 돌아가신 지인이 추천해준 책인데, 그 당시 사놓고 쟁여만 놓고 있었다. 책도 좀 오래돼 보이고 문화인류학이라는 것이 그닥. 한물간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휴가철을 맞아 일주간 매일 반나절 정도 나만의 시간이 생기는 행운덕에 그동안 구매만 했던 책들을 본격 소비하고 있다. 모처럼 소비가 구매를 초월하고 있다. 그러다가 서재 제일 아랫칸에 묻힌 이녀석을 발견했다. 이녀석을 본건 사실 우연이 아니다. 지인이 죽고나서도 꽤 오랜기간 가상공간에 여러 흔적이 있었는데 며칠전 우연히 지워진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은 보였을 것이다. 

 책은 놀라웠다. 책의 출간 시점이 94년인만큼 97년 정도인 총균쇠를 앞선다. 그게 아니었음 총균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책으로 오인했겠지만 사실은 당연히 반대다. 어찌보면 총균쇠는 이 책을 다양한 사례와 균 정도를 보충하고 좀더 전시대를 자세히 보며 자신만의 의견을 강하게 보충한 책에 불과할지도 모를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지리학계의 도킨스인 셈이다. 

 문화인류학이라고는 하지만 기실 이 책은 지리책에 가깝다. 상당히 지리적 결정론적 관점에서 쓴 책이다. 그 문화라는 것이 철저히 지리로 인한 생산력과 기후, 동물 및 생태계군에 절대적 영향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도 문화보다는 그를 파생한 지리 이야기가 대다수다. 해리스는 공식을 보이는데 처음 정착지에서 생식압력(인구증가압력)이 생겨나고 이를 위해 생산력을 증가하기 위한 노력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된다. 그러면 이를 극복할 새로운 생산양식이 출현하여 문명이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다. 해리스는 이를 문화유물로적 결정론이라고 했으며(지리적 환원로이나 지리적 결정론이 더 잘어울리는데......) 이래 놓고서도 애써 자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창의력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쨌든 책은 수렵시대부터 농경의 시작, 원시국가, 전쟁, 식인, 자본주의의 탄생과 그 한계를 다룬다. 인류역사 전체를 다룬 셈이고 시기순으로 다루었음에도 좀 시기마다 도약하는 듯한 모습과 주제별로 다룬 면이 있어 통사적인 느낌은 의외로 별로 없다.

 수렵시대에는 인류는 평방마일당 2-3인의 인구밀도를 유지했다. 그 이상이면 생산력 저하가 급격히 오기 때문인데 마땅한 인구조절 방법이 없던 시기 해결책은 노인 살해 및 영아 살해였다. 당시 평균수명이 30세정도였고, 여성의 가임기시작부터 그 나이까지 생존하면 8회 정도의 임신이 가능하다. 절반정도의 아이가 여러 이유로 초기에 자연사해도 위의 인구밀도를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2정도여야 한다. 그러면 2-3명정도를 살해할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영아 살해는 수렵시대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 이르기직전까지 암묵적으로 꾸준히 유지되며 주로 여아에 집중된다. 해리스는 그 증거로 각 시대마다 인구밀도 과잉으로 인한 생산력 위기시에 등장하는 비 정상적 성비를 보여준다. 남아선호가 한창이던 20세기 말의 한국의 저리가라 할정도이며 1자녀 정책으로 남아를 선호하는 중국역시 명암을 못내밀 정도다. 이런 수렵인들에게도 나름의 인구조절 피임법이 있었는데 자로 수유기간을 길게 갖는것과 단백질 위주의 식습관이다. 이는 출산후 생리를 현저히 늦춘다

 재밌는건 수렵시기라고 해서 인간에게 농경시대의 특징은 가축화와 재배기술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이미 사람은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었고, 정식 농경까지는 아니지만 농경기술을 적지 않게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발현하지 않은 것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직 충분히 많은 수의 잡아먹을 동물과 식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 결핍이 기술의 발전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빙하기의 끝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

 BC 1만3천년경 온난화로 동물의 터전인 목초지가 대규모로 사라지고 숲이 등장하게 된다. 게다가 인간이 수렵기간동안 상당수의 대형동물을 절멸시킨 상황이어서 상황은 설상가상이었다. 자연히 인간의 식생활은 토끼나 사슴따위의 전에는 눈여겨 보지도 않던 작은 동물로 향하게 되었으면 조개류나 물고기도 주요 식량원이 되었다. 거기에 식물재배에도 노력을 기울여 농경이 시작되었고 육식위주의 오랜 식습관에서 채식의 비율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다. 아마 온난화로 식물을 매우 잘 자랐을 것이다. 

 동물이 귀해짐에 따라 농경과 더불어 가축화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염소나 소등의 가축들이 다행스럽게도 인간이 먹지 않는 식물의 다른 부위를 먹기에 무리없이 가능했다. 불행히도 아메리카는 구대륙보다 더 빠르게 대형동물이 절멸하여 딱히 가축화할 동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에 구대륙만큼 농경에 적합한 식물도 많지 않았다. 총균쇠에 나온 것처럼 이 커다란 차이는 향후 더 엄청난 차이를 불러온다. 왜냐하면 가축은 생산력증강과 단백질 공급은 물론이요 힘쓰는 동물로 사용한 경우, 바퀴나 축, 도르레등 기술발전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에서도 발견된 바퀴가 고작 애들 장난감으로만 쓰인 것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해리스는 이런 가축화를 전무후무한 동물 보호운동이라 했는데 정말 기가막힌 표현이었다. 

 농경이 시작됨에 따라 수렵채집인들에게 가능했던 피임법은 사용이 불가해졌고, 인구증가와 이를 위한 생산증강활동으로의 농경과 가축화는 삼림을 파괴하고 토양을 산성화 시키며 가축을 통한 질병까지 불러왔다. 농경시대의 전쟁은 이 해결책중 하나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쟁의 기원은 조금 다르다. 원리는 비슷하지만. 과거 국가 시스템이 전무하고 영토개념이 없던 시기 전쟁은 인근 부족을 쫓아내어 인근 배후 지역에 무인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무인지대는 생태계의 보고로 향후 생산활동에 필요한 농물과 식물보호 역할을 하였다. 전쟁의 다른 이유는 인구조절기능이다. 전쟁에서는 주로 남자가 죽지만 사실 남자의 살해를 통한 인구조절효과는 매우 일시적이다. 실제로 한국전쟁이나 세계2차대전후 세계 각국은 베이비붐을 통해 빠른 속도로 인구를 수년안에 회복한다. 하지만 몇세대 걸리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여성의 살해다. 남성은 수가 적더라도 여러 여성을 상대함으로 인해 인구조절에 기능이 없지만 여성의 경우는 다르다. 인구의 수는 여성의 수만큼 늘수가 있다. 때문에 초기 인류의 전쟁에서 인구조절은 여아살해에 초점이 이루어졌고, 전쟁을 통해 남성을 중시하게 되는 남성위주의 문화를 통해 남아선호를 통한 일상적 여아살해기능도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해리스는 원시국가의 기원을 태평양지역 부족의 빅맨에서 찾고 있다. 빅맨은 부족 전체를 돌보고시혜적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이는 재산상 빅맨에게 상당한 마이너스인데 이들 빅맨과 그 추종자들은 그럼에도 그 존경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행한다. 하지만 집약적 농업과 곡물이 대량수확되면서 이들 초기 지도자들은 상설 군대의 유지와 생산수단으로의 접근권을 제한할 권력을 갖게되며 본격적인 지배자로 올라선다. 이들 초기국가는 인구밀도가 과해지면서 분리되는 다른 촌락에 대해 재분배 기능을 제공하는 조건 혹은 패한 다른 촌락에 대해 추방대신 복종을 요구하며 성장해나간다. 초기 중심국가 주변에는 제2기 국가들이 들어서는데 이들은 초기국가에 대한 군사적 방어의 필요성과 초기 국가의 부로 인핸 무역 및 그 약탈을 위해 발생한다. 

 이런 국가의 성장을 이야기하던 해리스는 갑작스레 아즈텍의 식인문화로 향한다. 구세계의 주요 종교와 문화 및 관습들은 대개 식인을 금기시한다. 물론 다른 문화권에서도 일부 허용되던 적도 있다. 하지만 아즈텍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전면적으로 권장된 곳은 없다. 해리스는 정말 놀랍게도 이를 가축화할만한 동물이 부족하여 만성적 단백질 부족에 시달리던 아즈텍의 자연환경에서 찾는다. 아즈텍의 신들은 인간의 피와 심장에 굶주려 있는데 피라미드위에서 산체로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낸후, 신관들은 이 시신을 피라미드 아래로 굴린다. 문제는 이 시신이 아래쪽의 사람들에게 고기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물론 해리스는 아즈텍에서 포로로 잡아 인신공양에 사용된 사람의 숫자가 전체 사람들에게 충분한 단백질 공급원이 될만한 수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사람고기는 비싼법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수는 하위관리와 일부백성에게 지급되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반란을 막는 정도로는 충분하다고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아즈텍에도 칠면조와 개라는 고기가 있긴 했지만 칠면조는 사람이 먹는 곡물의 낟알을 먹으며 개는 고기를 먹는다. 때문에 단백질 공급원으로 매우 부적격이었기에 왕이나 일부 신관만이 사치스럽게 즐겼다. 또한 적절한 단백질 공급원이 될만한 리마나 기니피그를 가진 잉카문명에 식인습관이 없었던 것도 이를 어느정도 뒷받침한다. 

 그 다음엔 정확히 반대로 고기를 안먹는 쪽으로 간다. 바로 중동지역의 돼지금기와 인도의 소금기다. 농경이 심화되며 전세계 문화권은 늘 먹던 고기를 금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인구밀도가 증가함에 따라 재배지가 넓어지고 이에따라 가죽을 위한 유휴지가 부족해졌기때문이다. 게다가 가축은 노동력제공, 비료 공급, 섬유질 공급등 쓰임새가 많았다. 때문에 고기는 모두의 음식에서 사치품이 되어갔으며 종교차원에서 육식을 금지하는 교리가 생겨나게 된다. 

 돼지는 고기공급원으로서의 가치는 매우 높지만 젖을 제공하지도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힘든 동물이다. 따라서 사치품이 되어갔다. 특히나 돼지는 스스로 열을 발산하지 못해 습기가 많은 지역을 선호하는데 사막지역인 중동에서는 정말 쥐약인 셈이다. 거기에 돼지는 자연상태에서 돼지감자, 과일, 견과류등 비싼것만을 먹어치우니 자연스레 중동지역에서는 돼지에 대한 혐오감을 발달시키고 금기시하게 되었다. 

 소는 정확히 반대다 소의 금기는 신성화로 나타났다. 돼지는 필요없음에 소는 너무나 필요했음에 나타난 현상이다. 인도 갠지스 강 유역의 인구밀도는 매우 조밀했다. 거기에 여건상 관개수로가 매우 약하다보니 변덕이 심한 몬순의 강우량에 지역전체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때문에 농경이 매우 중요해졌는데 소의 노동력이 더욱 절실해질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재밌는건 암소의 신성화다. 수소는 노동력의 제공으로 가정에서 사육되지만 암소는 방목한다. 하지만 일상에선 크게 필요치 않은 암소도 기근이 심하여 노동력이 더욱 절실해지거나 수소의 재생산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하다. 때문에 보호받는 수소에 비해 일상에서는 보호하지 않은 암소를 신성으로 보호했다는 것이 해리스의 견해다. 

 하지만 이런 소의 신성화의 경우 소를 사용한 다른 몬순 아시아 지역에서는 어째서 소의 신성화가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해리스는 중국의 예를 든다. 중국에서도 역시 소는 농경을 위해 귀한 동물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지금도 그렇지만 인도와 인구는 비슷하면서도 몇배에 달하는 영토를 갖는다. 거기에 농경생산성도 인도의 두배에 달해 소에 대한 의존도가 인도에 비해 낮았다. 게다가 다른 가축을 위한 땅 및 기후조건도 좋아 굳이 소의 신성시까지 갈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자본주의외 의회민주주의다. 해리스는 왜 이 것이 세계 다른 지역이 아닌 알프스 이북의 북유럽에서만 등장할수 있었는지를 살핀다. 우선 아시아지역을 살피는데 인도및 중국 지역의 문명을 비트포겔의 개념을 빌려 수력사회로 간주한다. 수력사회는 문명이 주로 건조 및 반건조지역에 위치에 하천의 물을 끌어다쓰는 평원과 계곡에 발달한 사회를 말한다. 이 사회에서는 생식압력에 대처하고자 필연적으로 수리시설의 강화가 필요하며 이는 이를 관리하기 위한 강력한 관료제를 동반한다. 수력사회에서 왕조의 순환은 다음과 같다. 초기 왕조는 치수-관개생산양식을 회복하거나 개선한다. 이로 인해 인구가 다시 조밀해지며 생산력을 한계에 도달한다. 그리고 왕조의 지속에 따라 이를 해결해야할 관료조직 역시 부패해지며 생산력이 더욱 떨어져 일반 백성은 극빈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결과 새로운 패권을 다툴 반란 혹은 외부 침입이 일어나고 그 결과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여 이 쳇바퀴를 다시 돌리게 된다. 

 이런 수력사회는 관개의존성으로 인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체제를 갖게되며 국가가 대내적 수탈 대외적 수탈, 공공기관을 통해 국내의 모든 재산을 통제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생기기 매우 어려운 여건에 놓이게 된다.

 반면 알프스 이북의 기후는 겨울의 많은 강설량과 봄비로 연간 충분한 습기가 공급된다. 게다가 이렇다할  큰 강도 존재하지 않아 강 주변에 문명이 집중하는 수력사회에 적합치 않다. 이로 인해 인구가 전역에 분산되며 문명이 지방 분권적 경향을 갖게 된다. 국가형성 이후에도 이런 경향이 이어져 로마제국이 붕괴하고 중세장원경제체제하에서도 왕과는 별도로 장원경제가 돌아갔다. 생산수단에 대한 확실한 접근제한권을 갖고 있던 수력사회와는 달리 유럽지역을 왕이 이렇다할 칼자루를 갖지 못했던 셈이다. 

 이런 장원경제는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해리스의 공식처럼 장원경제체제의 생산력이 인구밀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자연스런 여아조절로 성비가 130대 100에 달할정도로 인구조절에 들어가지만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장원의 생산성에 관심이 많은 영주와 농민들은 수입원 보충 수단으로 양모를 얻기 위한 양치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양을 위한 목초지가 재배지를 집어삼키면서 농민의 토지는 감소하였으며 땅을 잃은 농민들은 빈민화 하거나 먹고 살기 위해 발달하고 있는 도시노동자로 변모한다. 이는 도시노동자의 임금을 극적으로 저하시키는 효과를 낳아 제조업이 발달하는 최저 환경을 제공하게 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으며 자본주의 체제는 개인의 부 축적을 방해하던 여러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제약을 풀어헤침으로써 역사상 최고의 생산력 약진을 가져온 제도로 해리스는 판단한다. 

 마지막으로 해리스는 화석연료에 의지한 지금의 생산력이 화석연료의 고갈 및 생태계 파괴로 인해 다른 문명들처럼 곧 생산한계에 직면할 것으로 예측한다. 책을 쓴 시점이 94년이니 그럴만도 한데 무려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화석연료에 충분히 의존하고 아직 그 고갈에 큰 신경을 안쓰고 있으며 환경을 더욱 크게 파괴되었지만 매우 더워진 지구에서 그럭저럭 버티며 4차산업혁명을 목전에 둔 인류를 보면 저자가 어떤 혜안과 반응을 보일지 자못궁금하다. 하긴 당시만 해도 지구온난화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본격화되고 심각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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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넘어 인문학 - 미운 오리 새끼도 행복한 어른을 꿈꾼다
조정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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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서문에서 어릴 적 어머님이 사주신 동화전집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 말한다. 그리고 저자의 어머니는 동화전집을 보고 눈이 빛나던 작가를 보고 그걸 사준걸 후회하신다. 그토록 힘든 글쟁이의 길을 가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외에도 누구나 동화 전집이나 위인 전집, 혹은 백과사전 한질씩은 갖고 있던 어린시절이 있었다. 딱히 놀것도 없던 시절이고 마냥 밖에서 놀수 만은 없는 경우도 있으니 그럴때는 이런 책과 함께 했을 것이고 몇번이고 계속 읽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어릴때의 뇌는 책이든 영화든 만화든 두세번 보는것을 이상스레 지겨워하지 않았다.

 지금 아이들은 매우 다르다. 간혹 이런 동화를 당연히 읽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의외로 읽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매우 당연시 되었던 동화교육에 대해서도 과거와는 달리 말이 많다. 어려서부터 선과 악이 분명한 일방적 도덕을 주입한다는 비판, 남여 관계가 너무 전통적이고 불평등하다는 비판, 과거의 가치관을 너무 주입한다는 비판등등.

 하지만 아직도 아이들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동화를보고 있으며 그 교육적 효과를 옹호하는 측도 만만치 않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런 동화를 가지고 인문학을 이야기한다. 서문에서 인문학을 어렵다 하셨는데, 지나친 겸양이셨다. 동화 하나와 인문학 서적 하나를 엮어 재밌고 다양한 주제로 생각보다 깊이 있게 책을 엮었다.

 이솝의 당나귀와 아버지와 아들에서는 주체적 사유 없이 이사람 저사람의 말에 휩쓸리는 어리석은 인간 군상이 나오며 여기서 사유없이 자본의 힘이 휩쓸려 이리저리 소모되며 사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를 한병철의 피로사회와 엮어낸다. 그리고 인어공주의 사랑에서는 축복받은 조건에서도 모든 걸버리고 달려나가는 사랑의 무모함과, 더불어 자신의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모습에서 사랑의 숭고함과 다른 이를 위한 보편적 희생을 찾아내기도 한다.

 책은 전체적으로 이런 식으로 짜여져 있으며 중간중간 저자의 고민과 성찰이 담긴 통찰력 있는 매력적인 문장들도 있었다. 몇 개 뽑아 봤다.

 

p58

삶은 영위하는 생명이란 외부로부터 흡수한 것을 다시 외부로 배출하는 존재입니다.

 

p74

사실 행복이란 아무 사건도 없는 평범하고 심심한 삶이다.

 

p78

우리는 대부분이 자기 중심적이라 상대에게 잘해주고 싶을 때 조차 자기 기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나와 우리 마누라는 서로를 기쁘게 해주는 선물을 좀처럼 하지 못한다.)

 

p82

개선장군은 모름지기 상례(喪禮)로 맞이 해야 한다. -노자

(개선장군을 위해 개선문을 세우고 잔치를 하지만 사실 개선장군은 수많은 적과 민간인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묻고 온 사람이다. 역사상 이런 배려를 한 재상이나 왕, 관리가 있었을까?)

 

p107

사랑은 원래 불가능이라는 연료로 인해 존재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p128

사랑의 근본적인 모순은 하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서로 다른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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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을 살아보니
김형석 지음 / 덴스토리(Denstory)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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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제목이 백년을 살아보니이다. 제목만 보고 그냥 꽤 오래 사신 분이 격동의 한국 20세기에 대해서 평한게 아닐까. 그리고 백년의 방점은 한국의 20세기가 아닐가 싶었다. 유시민작가도 반세기를 조금 넘게 살았지만 나의 한국현대사를 쓰지 않았는가.(생각해보니 그 책은 50년만 다뤘던 것 같기도) 그런데 저자 약력을 보니 정말로 100년을 살았다. 한국나이로 무려 98세.

 대한제국의 신민까지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의 신민에서, 일본의 엘리트 유학생, 해방후 공산주의에 고민하는 평안도 사람에서 남한으로의 탈출, 그리고 독재정권과 오늘 날의 민주정권까지. 정말 파란만장한 한국의 근대사를 글이 아닌 온몸으로 체험한 셈이다.

 그런 사람이 인생의 소회를 다룬 책이 이 책이다. 읽어보니 전체적인 느낌은 한국의 온건한 기독교 우파같은 생각이다. 아직 반세기도 살지 않은 나같은 사람이 평하자니 웃기기도 하지만 평은 평일 뿐이다. 사실 저자의 삶은 많이 굴곡진 한국근대사에 비하면 덜 굴곡진 삶처럼 보인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에 유학가서 대학을 마칠수 있는 엘리트였고, 학도병에 끌려갈까 고민을 했을뿐 독립운동은 하지 않았다. 물론 신사참배로 학교를 강제로 쉬게된 경우는 있다. 공산정권하에서 탈출했지만 전쟁에 참전하지는 않았고, 독재정권하에서도 꾸준히 교수생활을 영위한 걸 보면 독재정권을 비호하진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항거하지도 않은 것 같다. 물론 역시 적극적으로 어용학자가 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과거에는 식자층 자체도 적어 교수자체가 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처럼 굴곡진 한국사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성찰은 크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유시민처럼 그리고 독립투사들처럼 살순 없고, 나역시도 그렇지 않은 삶을 살고 있기에 이런 삶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나쁘다고 생각치도 않는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 종교인이지만 근본주의를 배격하고 다른 것을 포용하는 생각 그리고 휴머니즘을 가장 근본적이고 이상적인 가치로 삼은 것은 인상적이었다.

 애국심이라는 것이 독재정권의 비호에 악용되고 오늘날에는 보수정당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프레임이로 굳어져 상당히 아쉽긴 하지만 애국심은 여전히 신경써야하는 중요한 가치인건 분명하다. 유시민이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것 처럼 국가와 시민과의 관계, 그리고 시민적 가치가 우선시 되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란게 전제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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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인간은 잡식동물이다. 잡식동물의 혜택은 무진장한데, 우선 먹을 수 있는 것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여러 생물에게서 영양분을 얻을 수 있으니 칼로리 섭취도 높고, 환경변화에 강하다. 하지만 고민스럽기도 하다. 여러가지를 먹을 수 있다보니 무엇을 먹어야할지 고민이기도 한 것이다. 당장 우리가 숲에 떨어져서 무언가를 채집하고 사냥해서 연명해야 한다면, 정말 많은 고민이 들 것이다. 특히 여기저기 핀 버섯과 열매들을 보고 말이다. 또 만약 모르는 동물을 사냥했다면 이걸 어떻게 먹어야하지 어떤 부위를 먹어서는 안될지 정말 고민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이다. 여러면에서 먹을 것은 많은데 그 안전을 위해 끊임 없이 고민하고 실험하고 방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안전한 음식섭취를 위해 인간문화권에서는 엄격한 요리 방법, 사냥이나 채집에 있어 상대 생물에 대한 윤리나 금기를 발달시켜 왔다고 책은 말한다.  잡식이 두뇌발달과 더불어 우리 본성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윤리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한평생 유칼리툽스 잎만 먹는 코알라는 먹을 것에 대해 일말의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하나에서 모든 것을 얻어야 하므로 긴 소화관이 필요하며 소화관만으로도 부족해 그 안에 다양한 종류의 미생물들과 공생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고기만을 먹는 육식동물도 마찬가지다. 먹을 것의 선정에 고민이 없지만 몸은 알아서 그 소정의 먹을 거리에서 모든걸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가 발달하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 딜레마는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뜻하지 않게 현대판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불러왔다. 마트에 가면 먹을 것 천지이고 이 모든 것은 무척 안전해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심지어 그 원형이 무엇인지 혹은 어디서 왔는지 알수 없을 정도로 가공되거나 여러단계를 거친 것이다. 원산지란 사실상 오늘날 추적이 불가능하고 심지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또한 최근에는 유전자 조작까지 벌어지고 있으며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화학첨가물이 함께하기도 한다. 때문에 인간은 마트에서 다시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어떤 것이 안전한지 무엇을 어떻게 먹는게 건강에 좋은지 고민인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에 대한 무지와 막연한 믿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넘어가곤 한다.

 이런 종류의 무지에 대해 경각심을 보내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세가지 음식 사슬을 이야기한다. 산업적 음식사슬, 전원전 음식사슬, 수렵채집적 음식사슬이다. 음식 사슬이란 기본적으로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만들어낸 칼로리를 그걸 하지 못하는 다른 생물에게 칼로리를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저자는 책에서 산업적 음식사슬부터 시작하여 전원적 음식사슬,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렵채집적 음식사슬의 현장을 실제로 경험하고 성찰해나가면서 문제점을 짚어 냄과 동시에 인간이 음식사슬의 수혜자로서 다른 생물에게 가져야할 가치나 태도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고찰해나간다.

 책은 우선 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풀과 인간이 일종의 연합을 맺었다고 본다. 사람은 널리펼쳐진 풀밭을 보면 묘한 안정감과 평안을 느끼는데 이것은 인간과 풀의 오랜 연합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수렵채집사슬 시절 풀은 초식동물과 인간 양자에게 이점을 제공했다. 풀은 나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풀은 우선 초식동물에게 뛰어난 맛과 영양을 가진 풀잎을 제공했다. 풀밭에 초식동물이 자연스레 모여들자 인간은 이런 초식동물의 고기를 풀밭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풀밭이 잘 자라야 고기도 쉽게 얻게 되므로 인간은 풀이 잘 자라게끔 불을 지르고 이를 통해 나무를 제거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때문에 풀은 이런 조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초식동물의 강한 이빨과 불을 이겨내는 깊은 뿌리와 근두를 발달 시켜왔다. 그 덕에 풀은 불과 초식동물의 일차섭취에서 빠른 시간안에 회복한다.  

 전원적 음식사슬의 시대에서는 또 다른 풀들이 등장한다. 이 풀들은 영양분이 많은 씨를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과거 풀이 초식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칼로리를 전달하는 사슬에서 이젠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사슬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풀은 대개 여러해살이인데 영양분이 많은 씨를 제공하는 풀들은 모든 영양을 씨에만 투입하기 위해 아예 한해살이로 변모한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풀과 인간의 연합이 바로 농경의 시작이다. 전원적 음식사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산업적 음식사슬의 이야기는 이 한해살이 풀들중 아메리카에 서식하던 독특한 종에서 시작한다. 아메리카가 원산지인지라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늦어졌는데 이 녀석은 바로 옥수수다. 옥수수는 쌀이나 밀과는 다르게 씨앗들이 껍질에 여러겹으로 둘러쌓여 있어 아예 스스로 번식이 안되는 종이다. 껍질에 쌓인 옥수수를 땅헤 묻으면 동시에 알들이 발아하여 하나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모두 땅속에서 썩어버린다고 한다. 어찌보면 가장 인간에 의존하는 셈이다.

 옥수수는 다른 어떤 풀보다도 산업자본의 입맛에 알맞게 진화하여 선택받았다. 우선 옥수수가 곧고 단단한 줄기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는 단위면적에 가장 많은 개체를 재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옥수수는 화석연료로 만든 비료와 합성화학 약품에도 매우 잘 적응하여 산업적 농업에 알맞았다. 더욱 무서운 점은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부분이다. 농업회사들은 매번 옥수수 종자를 비싼 가격에 농가에 팔곤하는데, 이 씨앗을 심으면 옥수수로서 좋은 품질을 가진 잡종 1세대가 수확된다. 하지만 옥수수의 특성상 이 잡종1세대의 종자를 심어 수확한 잡종 2세대는 부모세대들이 갖고 있던 상품으로서의 장점을 모두 갖고 있지 못하면 모습도 다르고 생산량도 적다. 이런 옥수수의 형질은 자연스레 대규모 다국적 농업회사에 막대한 지적재산권수익을 보장해주었고, 다른 소작농들이 그들에 종속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이처럼 옥수수는 산업자본의 입맛에 매우 잘 맞게 진화한 작물로 이로 인해 산업적 음식사슬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의 먹는 양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공산품이나 사치품과는 달리 먹는 것을 파는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때문에 산업자본은 옥수수를 이용해 다른 여러가지를 행한다. 옥수수로 치즈와 기름, 감자프라이를 만들고 심지어 건전지의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까지 알아낸다. 또한 단맛을 내는 액상과당으로 변모하여 각종 음료수에도 사용되게 된다. 과거 코카콜라는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작은 병에 적은 용량으로 주로 유통되었는데 상대적으로 단가가 낮은 액상과당이 설탕을 대체하게 되자 코카콜라는 가격을 내리는 멍청한 짓 대신 대용량으로 매출규모를 오히려 늘리는 선택을 한다. 이게 1984년인데 우리나라에도 이로부터 몇년정도 지나서 1.5L들이 콜라가 팔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처럼 현대의 가공식품중 옥수수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현대인의 머리카락을  성분조사 하면 무려 60%이상이 옥수수에서 비롯한 물질로 판명된다. 특히 이 증상이 심한 북미인들을 책은 '두발 달린 콘칩'이라고 까지 말한다. 참고로 책에서 언급한 식품별 옥수수 함유비율은 다음과 같다.

(소다수100%, 밀크셰이크 78%, 셀러드드레싱65%, 치킨 너겟56%, 치즈버거52%, 프렌치프라이23%)

 하지만 산업적 음식사슬에서는 이로도 모자랐는지 옥수수를 사료로 쓰기 시작한다. 사실 앞서 말한 가공보다 사료로서의 쓰임이 먼저다. 이 기술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육식어종인 양식연어에게까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옥수수를 먹일정도라고 한다. 경악스런 사실이지만 일단 책에서 주로 문제삼는 동물은 소다. 소는 반추위를 갖고 있고 함께 공생하는 미생물들을 통해 풀에서 칼로리를 얻을 수 있게 진화한 놀라운 생물이다. 사람은 이런 소에게 비싼 풀대신 싸구려 옥수수를 먹이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소에게는 질병이 생겨난다. 우선 고창증이다. 옥수수에 전분이 많고 섬유질이 적다보니 소가 특유의 트림을 하지 못하게 된다. 가스배출이 일어나지 못해 더부룩하게 속에 가스게 차게되고 이게 폐를 압박하여 나타나는 질병이다. 다음은 산중독이다. 인간의 위와는 다르게 소의 위는 중성이다. 그런데 옥수수를 섭취하면 소의 위는 산성화한다. 이 때문에 소가 사료를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50일정도라고 한다. 소에게는 이외에도 옥수수로 사료를 바꾸어 빨리 덩치를 키우기 위해 젖을 빨리 떼는 고통이 주어지며, 좁은 사육환경등으로 갖가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로 인해 질병에 취약해지므로 소에게는 많은 종류의 약물과 항생제가 자연 처방된다. 인간이 최종소비자로서 이를 먹게 됨은 물론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본래 소고기에는 오메가 6지방산과 오메가 3지방산이 1:1로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옥수수를 먹고자란 소는 오메가 6지방산이 과다해지며 종국에는 10:1의 비정상적인 분포를 보이겐 된다. 원래 몸에 좋은 소고기가 심혈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식품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음식사슬의 폐해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간이 화학적으로 질소고정에 성공한 이후 산업적 음식사슬의 농업에서는 대규모로 비료사용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농경은 과거 태양에너지에 의존하던 것에서 화석연료에 의존하는것으로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게 된다. 책에서는 농업의 발견이 인간이 최초로 경험한 자연상태로부터의 타락이라면 화학비료의 발견은 두번째 타락이라는 말로 이런 세태를 극적으로 잘 비유한다. 농부들은 비료를 필요이상으로 사용하곤 하는데 결국 생산량에 대한 압박과 불안때문이다. 여분의 질소는 기화하여 산성비로 변모하거나 질산암모늄이 아산화 질소로 바뀌어 지구 온실가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잔류비료는 물에 녹아 아질산염이 되고 이게 인체에 들어갈 경우 헤모글로빈과 결합하여 산소부족현상을 만들어낸다. 이로 인해 심장에 선천적 질환을 갖는 청색아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산업적 음식사슬은 농부도 가만두질 않았다. 앞서 말한 지적재산권으로 인한 산업자본에의 종속은 물론이고, 옥수수농업만을 자발적으로 강요당하는 형국에 놓여있다. 대개 상품의 가격이 떨어지면 생산자는 공급량을 줄이는 선택을 하기 마련인데, 농부들은 오히려 생산을 늘려나간다. 다른 상품의 경우 가격이 떨어지면 판매량도 어느정도 늘기마련이나 인간이 먹는 농산물은 수요가 비탄력적이라 그렇지 못하다. 거기다 농부들의 농장가족경제는 계속되는 경영난을 타계하기 위해 어려 중장비투자로 상당부문 빚을 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항상 일정현금이 필요하기에 가격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유지해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처럼 산업적 음식 사슬은 그 종사자인 농부에게는 빚을, 소비자인 인간에게는 현대판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자연생태계에는 환경오염을, 가축들에게는 강제적 유전자 변형과 인간과 공생관계를 맺긴 했지만 동물로서 최소한의 동물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비극적 삶을 강요하고 있다. 이득을 보는 주체는 오직 산업자본 뿐이다. 이런 산업적 음식사슬에게데 내세울게 하나 있긴 한데, 바로 저렴한 공급이다. 지금처럼 싼 달걀과 닭고기 등의 육류, 곡식가격은 산업적 자본하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엔 숨겨진 가격이 있다. 파산하지 않고 계속해서 농부가 산업적 자본에 종속되게 만드는 국가의 보조금, 환경오염으로 인한 비용, 그리고 비만등 건강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들이다. 이런 엄청난 비용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전원적 음식사슬에서 산출되는 유기농 음식이 오히려 저렴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는 옥수수를 사료로 쓰는 것을 중단하고, 원래대로 풀을 사료로 쓰며 동물에게 풀을 뜯고 본능에 따라 노니는 동물다움의 자유를 허락한다. 때문에 열악한 환경과 질병을 막기 위한 항생제등의 남용도 없고 비료의 사용도 거의 없다. 이는 방목에 기반한다. 저자에 의하면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방목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소가 뜯은 풀은 영양균형 회복을 위해 먹힌 양의 잎만큼 뿌리부분을 포기한다. 이 포기한 뿌리 부분은 흙속의 박테리아, 균류, 지렁이가 이용하여 갈색의 부식토로 바뀌어 토양의 건강함을 유지한다. 또한 죽은 뿌리가 있던 자리는 벌레, 공기, 물의 통로가 되어 표층을 형성하기도 한다.

 방목의 또 다른 이점은 환경의 건강함의 지표이기도 한 종 다양성을 증가시킨다는 점이다. 풀들사이의 경쟁과 종의 차이로 풀밭에는 다양한 길이의 풀들이 존재한다. 초식동물은 이중 당연히 눈에 띄는 긴풀을 우선적으로 먹기 마련이며 그 결과 작은 풀들이 햇빛에 노출되어 성장이 촉진되고 풀밭 전체에 닿는 햇빛의 총량도 증가한다. 풀들중 콩과 식물들은 토양에 질소를 고정하여 땅 아래로는 이웃풀에 영양을 공급하고 땅위로는 가축에 질소를 공급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전원적 음식사슬은 산업적 음식사슬에 비해 비용도 결국 더 저렴하고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순환적 자연생태계가 된다. 또한 단위면적당 곡물과 가축의 생산량 역시 산업적 음식사슬의 생산량을 넘어선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해 보이는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도 저자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물을 죽이는 일이었다.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는 동물은 비교적 마음껏 동물다움을 누리며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다. 옥수수 사료에 의한 질병도, 좁디 좁은 환경도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뒤편에서는 도축하는 날이면 하루에 수백마라의 동물이 도축된다.

 그래서 작가의 눈은 자연스레 채식주의로 향하며 마지막 음식사슬인 수렵채집사슬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채식주의자들의 육식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작가의 심기를 무척 어지럽힌다. 오랜 고민끝에 수렵채집사슬을 통한 직접 동물의 사냥과 그 동물의 해체 및 요리, 그리고 식물의 채집과정을 통해 작가는 이 답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간 도덕에 대한 성찰이기도 한데, 저자가 보기엔 인간의 도덕이 종이 아닌 개체의 권리에 기초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인간과는 다르게 개체하나하나 보다는 종으로서 다루는 것이 더 중요한 동물에게 이 도덕이 적용되기가 용이치 않다. 또한 인간 도덕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처리하기 위해 만든 인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법칙이 인간 사회에 제대로 된 지침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불완전한 도덕 체계는 자연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도덕에 기초한 채식 주장은 결국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인간이 동물을 인간처럼 다루어 그 개체로서의 권리를 챙기는 것 보다는 종전체로서 동물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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