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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인간은 잡식동물이다. 잡식동물의 혜택은 무진장한데, 우선 먹을 수 있는 것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여러 생물에게서 영양분을 얻을 수 있으니 칼로리 섭취도 높고, 환경변화에 강하다. 하지만 고민스럽기도 하다. 여러가지를 먹을 수 있다보니 무엇을 먹어야할지 고민이기도 한 것이다. 당장 우리가 숲에 떨어져서 무언가를 채집하고 사냥해서 연명해야 한다면, 정말 많은 고민이 들 것이다. 특히 여기저기 핀 버섯과 열매들을 보고 말이다. 또 만약 모르는 동물을 사냥했다면 이걸 어떻게 먹어야하지 어떤 부위를 먹어서는 안될지 정말 고민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이다. 여러면에서 먹을 것은 많은데 그 안전을 위해 끊임 없이 고민하고 실험하고 방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안전한 음식섭취를 위해 인간문화권에서는 엄격한 요리 방법, 사냥이나 채집에 있어 상대 생물에 대한 윤리나 금기를 발달시켜 왔다고 책은 말한다. 잡식이 두뇌발달과 더불어 우리 본성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윤리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한평생 유칼리툽스 잎만 먹는 코알라는 먹을 것에 대해 일말의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하나에서 모든 것을 얻어야 하므로 긴 소화관이 필요하며 소화관만으로도 부족해 그 안에 다양한 종류의 미생물들과 공생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고기만을 먹는 육식동물도 마찬가지다. 먹을 것의 선정에 고민이 없지만 몸은 알아서 그 소정의 먹을 거리에서 모든걸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가 발달하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 딜레마는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뜻하지 않게 현대판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불러왔다. 마트에 가면 먹을 것 천지이고 이 모든 것은 무척 안전해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심지어 그 원형이 무엇인지 혹은 어디서 왔는지 알수 없을 정도로 가공되거나 여러단계를 거친 것이다. 원산지란 사실상 오늘날 추적이 불가능하고 심지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또한 최근에는 유전자 조작까지 벌어지고 있으며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화학첨가물이 함께하기도 한다. 때문에 인간은 마트에서 다시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어떤 것이 안전한지 무엇을 어떻게 먹는게 건강에 좋은지 고민인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에 대한 무지와 막연한 믿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넘어가곤 한다.
이런 종류의 무지에 대해 경각심을 보내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세가지 음식 사슬을 이야기한다. 산업적 음식사슬, 전원전 음식사슬, 수렵채집적 음식사슬이다. 음식 사슬이란 기본적으로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만들어낸 칼로리를 그걸 하지 못하는 다른 생물에게 칼로리를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저자는 책에서 산업적 음식사슬부터 시작하여 전원적 음식사슬,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렵채집적 음식사슬의 현장을 실제로 경험하고 성찰해나가면서 문제점을 짚어 냄과 동시에 인간이 음식사슬의 수혜자로서 다른 생물에게 가져야할 가치나 태도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고찰해나간다.
책은 우선 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풀과 인간이 일종의 연합을 맺었다고 본다. 사람은 널리펼쳐진 풀밭을 보면 묘한 안정감과 평안을 느끼는데 이것은 인간과 풀의 오랜 연합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수렵채집사슬 시절 풀은 초식동물과 인간 양자에게 이점을 제공했다. 풀은 나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풀은 우선 초식동물에게 뛰어난 맛과 영양을 가진 풀잎을 제공했다. 풀밭에 초식동물이 자연스레 모여들자 인간은 이런 초식동물의 고기를 풀밭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풀밭이 잘 자라야 고기도 쉽게 얻게 되므로 인간은 풀이 잘 자라게끔 불을 지르고 이를 통해 나무를 제거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때문에 풀은 이런 조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초식동물의 강한 이빨과 불을 이겨내는 깊은 뿌리와 근두를 발달 시켜왔다. 그 덕에 풀은 불과 초식동물의 일차섭취에서 빠른 시간안에 회복한다.
전원적 음식사슬의 시대에서는 또 다른 풀들이 등장한다. 이 풀들은 영양분이 많은 씨를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과거 풀이 초식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칼로리를 전달하는 사슬에서 이젠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사슬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풀은 대개 여러해살이인데 영양분이 많은 씨를 제공하는 풀들은 모든 영양을 씨에만 투입하기 위해 아예 한해살이로 변모한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풀과 인간의 연합이 바로 농경의 시작이다. 전원적 음식사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산업적 음식사슬의 이야기는 이 한해살이 풀들중 아메리카에 서식하던 독특한 종에서 시작한다. 아메리카가 원산지인지라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늦어졌는데 이 녀석은 바로 옥수수다. 옥수수는 쌀이나 밀과는 다르게 씨앗들이 껍질에 여러겹으로 둘러쌓여 있어 아예 스스로 번식이 안되는 종이다. 껍질에 쌓인 옥수수를 땅헤 묻으면 동시에 알들이 발아하여 하나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모두 땅속에서 썩어버린다고 한다. 어찌보면 가장 인간에 의존하는 셈이다.
옥수수는 다른 어떤 풀보다도 산업자본의 입맛에 알맞게 진화하여 선택받았다. 우선 옥수수가 곧고 단단한 줄기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는 단위면적에 가장 많은 개체를 재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옥수수는 화석연료로 만든 비료와 합성화학 약품에도 매우 잘 적응하여 산업적 농업에 알맞았다. 더욱 무서운 점은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부분이다. 농업회사들은 매번 옥수수 종자를 비싼 가격에 농가에 팔곤하는데, 이 씨앗을 심으면 옥수수로서 좋은 품질을 가진 잡종 1세대가 수확된다. 하지만 옥수수의 특성상 이 잡종1세대의 종자를 심어 수확한 잡종 2세대는 부모세대들이 갖고 있던 상품으로서의 장점을 모두 갖고 있지 못하면 모습도 다르고 생산량도 적다. 이런 옥수수의 형질은 자연스레 대규모 다국적 농업회사에 막대한 지적재산권수익을 보장해주었고, 다른 소작농들이 그들에 종속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이처럼 옥수수는 산업자본의 입맛에 매우 잘 맞게 진화한 작물로 이로 인해 산업적 음식사슬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의 먹는 양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공산품이나 사치품과는 달리 먹는 것을 파는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때문에 산업자본은 옥수수를 이용해 다른 여러가지를 행한다. 옥수수로 치즈와 기름, 감자프라이를 만들고 심지어 건전지의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까지 알아낸다. 또한 단맛을 내는 액상과당으로 변모하여 각종 음료수에도 사용되게 된다. 과거 코카콜라는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작은 병에 적은 용량으로 주로 유통되었는데 상대적으로 단가가 낮은 액상과당이 설탕을 대체하게 되자 코카콜라는 가격을 내리는 멍청한 짓 대신 대용량으로 매출규모를 오히려 늘리는 선택을 한다. 이게 1984년인데 우리나라에도 이로부터 몇년정도 지나서 1.5L들이 콜라가 팔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처럼 현대의 가공식품중 옥수수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현대인의 머리카락을 성분조사 하면 무려 60%이상이 옥수수에서 비롯한 물질로 판명된다. 특히 이 증상이 심한 북미인들을 책은 '두발 달린 콘칩'이라고 까지 말한다. 참고로 책에서 언급한 식품별 옥수수 함유비율은 다음과 같다.
(소다수100%, 밀크셰이크 78%, 셀러드드레싱65%, 치킨 너겟56%, 치즈버거52%, 프렌치프라이23%)
하지만 산업적 음식사슬에서는 이로도 모자랐는지 옥수수를 사료로 쓰기 시작한다. 사실 앞서 말한 가공보다 사료로서의 쓰임이 먼저다. 이 기술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육식어종인 양식연어에게까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옥수수를 먹일정도라고 한다. 경악스런 사실이지만 일단 책에서 주로 문제삼는 동물은 소다. 소는 반추위를 갖고 있고 함께 공생하는 미생물들을 통해 풀에서 칼로리를 얻을 수 있게 진화한 놀라운 생물이다. 사람은 이런 소에게 비싼 풀대신 싸구려 옥수수를 먹이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소에게는 질병이 생겨난다. 우선 고창증이다. 옥수수에 전분이 많고 섬유질이 적다보니 소가 특유의 트림을 하지 못하게 된다. 가스배출이 일어나지 못해 더부룩하게 속에 가스게 차게되고 이게 폐를 압박하여 나타나는 질병이다. 다음은 산중독이다. 인간의 위와는 다르게 소의 위는 중성이다. 그런데 옥수수를 섭취하면 소의 위는 산성화한다. 이 때문에 소가 사료를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50일정도라고 한다. 소에게는 이외에도 옥수수로 사료를 바꾸어 빨리 덩치를 키우기 위해 젖을 빨리 떼는 고통이 주어지며, 좁은 사육환경등으로 갖가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로 인해 질병에 취약해지므로 소에게는 많은 종류의 약물과 항생제가 자연 처방된다. 인간이 최종소비자로서 이를 먹게 됨은 물론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본래 소고기에는 오메가 6지방산과 오메가 3지방산이 1:1로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옥수수를 먹고자란 소는 오메가 6지방산이 과다해지며 종국에는 10:1의 비정상적인 분포를 보이겐 된다. 원래 몸에 좋은 소고기가 심혈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식품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음식사슬의 폐해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간이 화학적으로 질소고정에 성공한 이후 산업적 음식사슬의 농업에서는 대규모로 비료사용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농경은 과거 태양에너지에 의존하던 것에서 화석연료에 의존하는것으로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게 된다. 책에서는 농업의 발견이 인간이 최초로 경험한 자연상태로부터의 타락이라면 화학비료의 발견은 두번째 타락이라는 말로 이런 세태를 극적으로 잘 비유한다. 농부들은 비료를 필요이상으로 사용하곤 하는데 결국 생산량에 대한 압박과 불안때문이다. 여분의 질소는 기화하여 산성비로 변모하거나 질산암모늄이 아산화 질소로 바뀌어 지구 온실가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잔류비료는 물에 녹아 아질산염이 되고 이게 인체에 들어갈 경우 헤모글로빈과 결합하여 산소부족현상을 만들어낸다. 이로 인해 심장에 선천적 질환을 갖는 청색아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산업적 음식사슬은 농부도 가만두질 않았다. 앞서 말한 지적재산권으로 인한 산업자본에의 종속은 물론이고, 옥수수농업만을 자발적으로 강요당하는 형국에 놓여있다. 대개 상품의 가격이 떨어지면 생산자는 공급량을 줄이는 선택을 하기 마련인데, 농부들은 오히려 생산을 늘려나간다. 다른 상품의 경우 가격이 떨어지면 판매량도 어느정도 늘기마련이나 인간이 먹는 농산물은 수요가 비탄력적이라 그렇지 못하다. 거기다 농부들의 농장가족경제는 계속되는 경영난을 타계하기 위해 어려 중장비투자로 상당부문 빚을 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항상 일정현금이 필요하기에 가격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유지해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처럼 산업적 음식 사슬은 그 종사자인 농부에게는 빚을, 소비자인 인간에게는 현대판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자연생태계에는 환경오염을, 가축들에게는 강제적 유전자 변형과 인간과 공생관계를 맺긴 했지만 동물로서 최소한의 동물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비극적 삶을 강요하고 있다. 이득을 보는 주체는 오직 산업자본 뿐이다. 이런 산업적 음식사슬에게데 내세울게 하나 있긴 한데, 바로 저렴한 공급이다. 지금처럼 싼 달걀과 닭고기 등의 육류, 곡식가격은 산업적 자본하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엔 숨겨진 가격이 있다. 파산하지 않고 계속해서 농부가 산업적 자본에 종속되게 만드는 국가의 보조금, 환경오염으로 인한 비용, 그리고 비만등 건강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들이다. 이런 엄청난 비용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전원적 음식사슬에서 산출되는 유기농 음식이 오히려 저렴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는 옥수수를 사료로 쓰는 것을 중단하고, 원래대로 풀을 사료로 쓰며 동물에게 풀을 뜯고 본능에 따라 노니는 동물다움의 자유를 허락한다. 때문에 열악한 환경과 질병을 막기 위한 항생제등의 남용도 없고 비료의 사용도 거의 없다. 이는 방목에 기반한다. 저자에 의하면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방목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소가 뜯은 풀은 영양균형 회복을 위해 먹힌 양의 잎만큼 뿌리부분을 포기한다. 이 포기한 뿌리 부분은 흙속의 박테리아, 균류, 지렁이가 이용하여 갈색의 부식토로 바뀌어 토양의 건강함을 유지한다. 또한 죽은 뿌리가 있던 자리는 벌레, 공기, 물의 통로가 되어 표층을 형성하기도 한다.
방목의 또 다른 이점은 환경의 건강함의 지표이기도 한 종 다양성을 증가시킨다는 점이다. 풀들사이의 경쟁과 종의 차이로 풀밭에는 다양한 길이의 풀들이 존재한다. 초식동물은 이중 당연히 눈에 띄는 긴풀을 우선적으로 먹기 마련이며 그 결과 작은 풀들이 햇빛에 노출되어 성장이 촉진되고 풀밭 전체에 닿는 햇빛의 총량도 증가한다. 풀들중 콩과 식물들은 토양에 질소를 고정하여 땅 아래로는 이웃풀에 영양을 공급하고 땅위로는 가축에 질소를 공급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전원적 음식사슬은 산업적 음식사슬에 비해 비용도 결국 더 저렴하고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순환적 자연생태계가 된다. 또한 단위면적당 곡물과 가축의 생산량 역시 산업적 음식사슬의 생산량을 넘어선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해 보이는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도 저자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물을 죽이는 일이었다.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는 동물은 비교적 마음껏 동물다움을 누리며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다. 옥수수 사료에 의한 질병도, 좁디 좁은 환경도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뒤편에서는 도축하는 날이면 하루에 수백마라의 동물이 도축된다.
그래서 작가의 눈은 자연스레 채식주의로 향하며 마지막 음식사슬인 수렵채집사슬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채식주의자들의 육식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작가의 심기를 무척 어지럽힌다. 오랜 고민끝에 수렵채집사슬을 통한 직접 동물의 사냥과 그 동물의 해체 및 요리, 그리고 식물의 채집과정을 통해 작가는 이 답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간 도덕에 대한 성찰이기도 한데, 저자가 보기엔 인간의 도덕이 종이 아닌 개체의 권리에 기초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인간과는 다르게 개체하나하나 보다는 종으로서 다루는 것이 더 중요한 동물에게 이 도덕이 적용되기가 용이치 않다. 또한 인간 도덕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처리하기 위해 만든 인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법칙이 인간 사회에 제대로 된 지침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불완전한 도덕 체계는 자연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도덕에 기초한 채식 주장은 결국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인간이 동물을 인간처럼 다루어 그 개체로서의 권리를 챙기는 것 보다는 종전체로서 동물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