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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인간은 잡식동물이다. 잡식동물의 혜택은 무진장한데, 우선 먹을 수 있는 것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여러 생물에게서 영양분을 얻을 수 있으니 칼로리 섭취도 높고, 환경변화에 강하다. 하지만 고민스럽기도 하다. 여러가지를 먹을 수 있다보니 무엇을 먹어야할지 고민이기도 한 것이다. 당장 우리가 숲에 떨어져서 무언가를 채집하고 사냥해서 연명해야 한다면, 정말 많은 고민이 들 것이다. 특히 여기저기 핀 버섯과 열매들을 보고 말이다. 또 만약 모르는 동물을 사냥했다면 이걸 어떻게 먹어야하지 어떤 부위를 먹어서는 안될지 정말 고민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잡식동물의 딜레마이다. 여러면에서 먹을 것은 많은데 그 안전을 위해 끊임 없이 고민하고 실험하고 방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안전한 음식섭취를 위해 인간문화권에서는 엄격한 요리 방법, 사냥이나 채집에 있어 상대 생물에 대한 윤리나 금기를 발달시켜 왔다고 책은 말한다.  잡식이 두뇌발달과 더불어 우리 본성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윤리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한평생 유칼리툽스 잎만 먹는 코알라는 먹을 것에 대해 일말의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하나에서 모든 것을 얻어야 하므로 긴 소화관이 필요하며 소화관만으로도 부족해 그 안에 다양한 종류의 미생물들과 공생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고기만을 먹는 육식동물도 마찬가지다. 먹을 것의 선정에 고민이 없지만 몸은 알아서 그 소정의 먹을 거리에서 모든걸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화가 발달하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 딜레마는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뜻하지 않게 현대판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불러왔다. 마트에 가면 먹을 것 천지이고 이 모든 것은 무척 안전해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심지어 그 원형이 무엇인지 혹은 어디서 왔는지 알수 없을 정도로 가공되거나 여러단계를 거친 것이다. 원산지란 사실상 오늘날 추적이 불가능하고 심지어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또한 최근에는 유전자 조작까지 벌어지고 있으며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각종 화학첨가물이 함께하기도 한다. 때문에 인간은 마트에서 다시금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어떤 것이 안전한지 무엇을 어떻게 먹는게 건강에 좋은지 고민인 것이다.  물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에 대한 무지와 막연한 믿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넘어가곤 한다.

 이런 종류의 무지에 대해 경각심을 보내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세가지 음식 사슬을 이야기한다. 산업적 음식사슬, 전원전 음식사슬, 수렵채집적 음식사슬이다. 음식 사슬이란 기본적으로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만들어낸 칼로리를 그걸 하지 못하는 다른 생물에게 칼로리를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저자는 책에서 산업적 음식사슬부터 시작하여 전원적 음식사슬,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렵채집적 음식사슬의 현장을 실제로 경험하고 성찰해나가면서 문제점을 짚어 냄과 동시에 인간이 음식사슬의 수혜자로서 다른 생물에게 가져야할 가치나 태도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고찰해나간다.

 책은 우선 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는 풀과 인간이 일종의 연합을 맺었다고 본다. 사람은 널리펼쳐진 풀밭을 보면 묘한 안정감과 평안을 느끼는데 이것은 인간과 풀의 오랜 연합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수렵채집사슬 시절 풀은 초식동물과 인간 양자에게 이점을 제공했다. 풀은 나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풀은 우선 초식동물에게 뛰어난 맛과 영양을 가진 풀잎을 제공했다. 풀밭에 초식동물이 자연스레 모여들자 인간은 이런 초식동물의 고기를 풀밭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풀밭이 잘 자라야 고기도 쉽게 얻게 되므로 인간은 풀이 잘 자라게끔 불을 지르고 이를 통해 나무를 제거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때문에 풀은 이런 조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초식동물의 강한 이빨과 불을 이겨내는 깊은 뿌리와 근두를 발달 시켜왔다. 그 덕에 풀은 불과 초식동물의 일차섭취에서 빠른 시간안에 회복한다.  

 전원적 음식사슬의 시대에서는 또 다른 풀들이 등장한다. 이 풀들은 영양분이 많은 씨를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과거 풀이 초식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칼로리를 전달하는 사슬에서 이젠 직접 전달하는 것으로 사슬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풀은 대개 여러해살이인데 영양분이 많은 씨를 제공하는 풀들은 모든 영양을 씨에만 투입하기 위해 아예 한해살이로 변모한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풀과 인간의 연합이 바로 농경의 시작이다. 전원적 음식사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산업적 음식사슬의 이야기는 이 한해살이 풀들중 아메리카에 서식하던 독특한 종에서 시작한다. 아메리카가 원산지인지라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늦어졌는데 이 녀석은 바로 옥수수다. 옥수수는 쌀이나 밀과는 다르게 씨앗들이 껍질에 여러겹으로 둘러쌓여 있어 아예 스스로 번식이 안되는 종이다. 껍질에 쌓인 옥수수를 땅헤 묻으면 동시에 알들이 발아하여 하나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모두 땅속에서 썩어버린다고 한다. 어찌보면 가장 인간에 의존하는 셈이다.

 옥수수는 다른 어떤 풀보다도 산업자본의 입맛에 알맞게 진화하여 선택받았다. 우선 옥수수가 곧고 단단한 줄기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는 단위면적에 가장 많은 개체를 재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옥수수는 화석연료로 만든 비료와 합성화학 약품에도 매우 잘 적응하여 산업적 농업에 알맞았다. 더욱 무서운 점은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부분이다. 농업회사들은 매번 옥수수 종자를 비싼 가격에 농가에 팔곤하는데, 이 씨앗을 심으면 옥수수로서 좋은 품질을 가진 잡종 1세대가 수확된다. 하지만 옥수수의 특성상 이 잡종1세대의 종자를 심어 수확한 잡종 2세대는 부모세대들이 갖고 있던 상품으로서의 장점을 모두 갖고 있지 못하면 모습도 다르고 생산량도 적다. 이런 옥수수의 형질은 자연스레 대규모 다국적 농업회사에 막대한 지적재산권수익을 보장해주었고, 다른 소작농들이 그들에 종속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이처럼 옥수수는 산업자본의 입맛에 매우 잘 맞게 진화한 작물로 이로 인해 산업적 음식사슬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의 먹는 양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공산품이나 사치품과는 달리 먹는 것을 파는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때문에 산업자본은 옥수수를 이용해 다른 여러가지를 행한다. 옥수수로 치즈와 기름, 감자프라이를 만들고 심지어 건전지의 재료로 사용하는 방법까지 알아낸다. 또한 단맛을 내는 액상과당으로 변모하여 각종 음료수에도 사용되게 된다. 과거 코카콜라는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작은 병에 적은 용량으로 주로 유통되었는데 상대적으로 단가가 낮은 액상과당이 설탕을 대체하게 되자 코카콜라는 가격을 내리는 멍청한 짓 대신 대용량으로 매출규모를 오히려 늘리는 선택을 한다. 이게 1984년인데 우리나라에도 이로부터 몇년정도 지나서 1.5L들이 콜라가 팔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처럼 현대의 가공식품중 옥수수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현대인의 머리카락을  성분조사 하면 무려 60%이상이 옥수수에서 비롯한 물질로 판명된다. 특히 이 증상이 심한 북미인들을 책은 '두발 달린 콘칩'이라고 까지 말한다. 참고로 책에서 언급한 식품별 옥수수 함유비율은 다음과 같다.

(소다수100%, 밀크셰이크 78%, 셀러드드레싱65%, 치킨 너겟56%, 치즈버거52%, 프렌치프라이23%)

 하지만 산업적 음식사슬에서는 이로도 모자랐는지 옥수수를 사료로 쓰기 시작한다. 사실 앞서 말한 가공보다 사료로서의 쓰임이 먼저다. 이 기술은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육식어종인 양식연어에게까지 유전자 조작을 통해 옥수수를 먹일정도라고 한다. 경악스런 사실이지만 일단 책에서 주로 문제삼는 동물은 소다. 소는 반추위를 갖고 있고 함께 공생하는 미생물들을 통해 풀에서 칼로리를 얻을 수 있게 진화한 놀라운 생물이다. 사람은 이런 소에게 비싼 풀대신 싸구려 옥수수를 먹이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소에게는 질병이 생겨난다. 우선 고창증이다. 옥수수에 전분이 많고 섬유질이 적다보니 소가 특유의 트림을 하지 못하게 된다. 가스배출이 일어나지 못해 더부룩하게 속에 가스게 차게되고 이게 폐를 압박하여 나타나는 질병이다. 다음은 산중독이다. 인간의 위와는 다르게 소의 위는 중성이다. 그런데 옥수수를 섭취하면 소의 위는 산성화한다. 이 때문에 소가 사료를 견딜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50일정도라고 한다. 소에게는 이외에도 옥수수로 사료를 바꾸어 빨리 덩치를 키우기 위해 젖을 빨리 떼는 고통이 주어지며, 좁은 사육환경등으로 갖가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로 인해 질병에 취약해지므로 소에게는 많은 종류의 약물과 항생제가 자연 처방된다. 인간이 최종소비자로서 이를 먹게 됨은 물론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본래 소고기에는 오메가 6지방산과 오메가 3지방산이 1:1로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옥수수를 먹고자란 소는 오메가 6지방산이 과다해지며 종국에는 10:1의 비정상적인 분포를 보이겐 된다. 원래 몸에 좋은 소고기가 심혈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식품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음식사슬의 폐해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인간이 화학적으로 질소고정에 성공한 이후 산업적 음식사슬의 농업에서는 대규모로 비료사용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농경은 과거 태양에너지에 의존하던 것에서 화석연료에 의존하는것으로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게 된다. 책에서는 농업의 발견이 인간이 최초로 경험한 자연상태로부터의 타락이라면 화학비료의 발견은 두번째 타락이라는 말로 이런 세태를 극적으로 잘 비유한다. 농부들은 비료를 필요이상으로 사용하곤 하는데 결국 생산량에 대한 압박과 불안때문이다. 여분의 질소는 기화하여 산성비로 변모하거나 질산암모늄이 아산화 질소로 바뀌어 지구 온실가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잔류비료는 물에 녹아 아질산염이 되고 이게 인체에 들어갈 경우 헤모글로빈과 결합하여 산소부족현상을 만들어낸다. 이로 인해 심장에 선천적 질환을 갖는 청색아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산업적 음식사슬은 농부도 가만두질 않았다. 앞서 말한 지적재산권으로 인한 산업자본에의 종속은 물론이고, 옥수수농업만을 자발적으로 강요당하는 형국에 놓여있다. 대개 상품의 가격이 떨어지면 생산자는 공급량을 줄이는 선택을 하기 마련인데, 농부들은 오히려 생산을 늘려나간다. 다른 상품의 경우 가격이 떨어지면 판매량도 어느정도 늘기마련이나 인간이 먹는 농산물은 수요가 비탄력적이라 그렇지 못하다. 거기다 농부들의 농장가족경제는 계속되는 경영난을 타계하기 위해 어려 중장비투자로 상당부문 빚을 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항상 일정현금이 필요하기에 가격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대규모 생산을 유지해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처럼 산업적 음식 사슬은 그 종사자인 농부에게는 빚을, 소비자인 인간에게는 현대판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자연생태계에는 환경오염을, 가축들에게는 강제적 유전자 변형과 인간과 공생관계를 맺긴 했지만 동물로서 최소한의 동물다움을 누리지 못하는 비극적 삶을 강요하고 있다. 이득을 보는 주체는 오직 산업자본 뿐이다. 이런 산업적 음식사슬에게데 내세울게 하나 있긴 한데, 바로 저렴한 공급이다. 지금처럼 싼 달걀과 닭고기 등의 육류, 곡식가격은 산업적 자본하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엔 숨겨진 가격이 있다. 파산하지 않고 계속해서 농부가 산업적 자본에 종속되게 만드는 국가의 보조금, 환경오염으로 인한 비용, 그리고 비만등 건강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들이다. 이런 엄청난 비용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전원적 음식사슬에서 산출되는 유기농 음식이 오히려 저렴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는 옥수수를 사료로 쓰는 것을 중단하고, 원래대로 풀을 사료로 쓰며 동물에게 풀을 뜯고 본능에 따라 노니는 동물다움의 자유를 허락한다. 때문에 열악한 환경과 질병을 막기 위한 항생제등의 남용도 없고 비료의 사용도 거의 없다. 이는 방목에 기반한다. 저자에 의하면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방목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소가 뜯은 풀은 영양균형 회복을 위해 먹힌 양의 잎만큼 뿌리부분을 포기한다. 이 포기한 뿌리 부분은 흙속의 박테리아, 균류, 지렁이가 이용하여 갈색의 부식토로 바뀌어 토양의 건강함을 유지한다. 또한 죽은 뿌리가 있던 자리는 벌레, 공기, 물의 통로가 되어 표층을 형성하기도 한다.

 방목의 또 다른 이점은 환경의 건강함의 지표이기도 한 종 다양성을 증가시킨다는 점이다. 풀들사이의 경쟁과 종의 차이로 풀밭에는 다양한 길이의 풀들이 존재한다. 초식동물은 이중 당연히 눈에 띄는 긴풀을 우선적으로 먹기 마련이며 그 결과 작은 풀들이 햇빛에 노출되어 성장이 촉진되고 풀밭 전체에 닿는 햇빛의 총량도 증가한다. 풀들중 콩과 식물들은 토양에 질소를 고정하여 땅 아래로는 이웃풀에 영양을 공급하고 땅위로는 가축에 질소를 공급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전원적 음식사슬은 산업적 음식사슬에 비해 비용도 결국 더 저렴하고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순환적 자연생태계가 된다. 또한 단위면적당 곡물과 가축의 생산량 역시 산업적 음식사슬의 생산량을 넘어선다.

 하지만 이처럼 완벽해 보이는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도 저자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물을 죽이는 일이었다. 전원적 음식사슬에서는 동물은 비교적 마음껏 동물다움을 누리며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다. 옥수수 사료에 의한 질병도, 좁디 좁은 환경도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뒤편에서는 도축하는 날이면 하루에 수백마라의 동물이 도축된다.

 그래서 작가의 눈은 자연스레 채식주의로 향하며 마지막 음식사슬인 수렵채집사슬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채식주의자들의 육식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작가의 심기를 무척 어지럽힌다. 오랜 고민끝에 수렵채집사슬을 통한 직접 동물의 사냥과 그 동물의 해체 및 요리, 그리고 식물의 채집과정을 통해 작가는 이 답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간 도덕에 대한 성찰이기도 한데, 저자가 보기엔 인간의 도덕이 종이 아닌 개체의 권리에 기초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인간과는 다르게 개체하나하나 보다는 종으로서 다루는 것이 더 중요한 동물에게 이 도덕이 적용되기가 용이치 않다. 또한 인간 도덕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처리하기 위해 만든 인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법칙이 인간 사회에 제대로 된 지침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불완전한 도덕 체계는 자연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도덕에 기초한 채식 주장은 결국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인간이 동물을 인간처럼 다루어 그 개체로서의 권리를 챙기는 것 보다는 종전체로서 동물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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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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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무문관이란 책에 대한 책이다. 엉뚱하지만 무문관이란 이름을 접하자마자 고교윤리시간이 떠올랐다. 당시 시험문제에 대한 검토가 있었는데 흥분한 윤리선생님은 아이들의 주관식 답안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웃음을 참지못하며 몸소 답안에 상응하는 구타를 실행하고 계셨다. 당시 문제는 맹자가 말한 굽히지 않는 거대한 마음을 사자성어로 쓰는 것이었다. 답은 호연지기이다.

 윤리선생님이 흥분한 까닭은 당시 유행하던 중국영화와 무협지 제목이 답안으로 난무한 까닭이다. 쳡혈쌍웅에 영웅본색, 영운문등 같은 답안이 등장했다. 이런 멍청한 놈들. 윤리선생님과 웃으면서 난 친구들의 엉뚱한 답안에 조소를 보내고 있었다. 내 답에 대해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답은 바로 '대도무문'. 무협지 제목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나름 답이라 생각하고 적었다. 잠시 후 내 번호가 호명되고 어안이 벙벙한채 나가 나역시 구타와 함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사실 맹자라는 단서만 없었다면 엄밀히 그리 틀린 답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여튼......

 제목이 비슷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지만 책은 잠시 엉뚱한 추억으로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책은 무문 스님이 불교의 여러 화두를 48가지로 정리한 책이다. 거리의 철학자 강신주가 이 알쏭달쏭한 화두들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달았다.

 무문관은 제목부터가 역설이다. 글자 그대로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작부터가 참 난해하기 그지없지만 이런 말도 안되는 글들이 화두로 무문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강신주는 48가지 애매한 화두를 기존에 제시된 순서와는 다르게 자신의 의도대로 재구성하였는데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순서 재구성의 의미는 모르겠다.

  책의 전체적인 주제는 강신주가 여러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처럼 역시 주체로 당당히 서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이가 당당히 부처로 설 것을 요구하는 불교철학은 이러한 강신주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재료로 매우 유용하다. 사실 불교에 대해 관심을 꾸준히 갖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책한번 읽은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불교에 대해서 어느정도나마 이해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서는 '성불'하라는 말을 인사처럼 한다. 책을 읽기전에는 무식하게도 이를 기독교의 '신이 함께하시기를'이나 우리말의' 안녕하세요'나 '부자되세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글자그대로 성불은 '부처가 되라는 뜻'이다. 정말 심오한 인사가 아닐수 없다.

 어쨌든 이 같은 성불을 위해서 사람들은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한다. 석가모니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과 같은 부처가 되기를 원했지만,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한 말이나 사유들은 그 제자들에 의해 경전으로 이론적으로 정리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이를 벗어나야하지만 뭔가를 알아야 창조도 있는 만큼 경전에 의한 공부도 중시되는데 이를 강조하는 것이 다들 아는 교종이다.

 하지만 경전을 중시하는 이런 교종은 당연히 많은 부작용을 안게 되는데, 우선은 경전 자체를 절대시하는 잘못된 풍토의 조성과 글자를 모르는 일반 평민들을 결국 성불할수 없게 되지 않느냐라는 문제였다. 실제로 초창기 우리나라의 유명 고승들은 모두 왕족이나 귀족출신알는 점은 이 같은 교종의 약점을 잘 드러낸다.

 이에 대응하는 것이 역사시간에 배웠던 선종으로 경전을 통해 부처가 되는 방법을 배격하고 사람 각자의 수행방법과 사유에 따른 성불을 강조한다. 선종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말이 '불립문자'로 글자 그대로 문자로 부처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강신주는 책에서 불립문자라고 하여 모든 문자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며 이때의 불립문자는 단순히 타인의 언어를 따르지 않는 것으로 봐야한다고 했는데 지극히 합당한 해석이라 생각한다. 또한 강신주는 책에서 시인과 부처가 매우 유사하다고 하였다. 양자의 공통점은 바로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불립문자는 문자자체의 배격보다는 주체로 선 자신만의 독창성의 결여를 배격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주체성을 갖춘 부처로의 이행 과정은 자칫 다른 사람과 세상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만의 고행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데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 역시 성불의 과정으로 이끌어나가는 방편이나 자비, 보시를 강조한다. 방편은 중생의 수준에 맞추어 깨달음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이고 보시는 재산이나 재물, 생각등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행위를 말한다. 인상적인 것은 자비였는데 자비는 우정과 연민의 결합어로 아래에 대한 단순한 연민이 아닌 함께 나아가는 수평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책을 일독하고나서 알면서도 모를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여러 생각이 몰려왔다.

우선 성불이 가능한가라는 점이다. 성불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각자 주체로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이루고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는데 모두가 주체로 서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라는 점이다. 주체로 살아가기 어려운 이유는 각자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간다면 서로간의 충돌이 있을 수 있고, 고대시대의 노예처럼 자신의 주어진 삶의 여건이 주인으로 일어서기 매우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둘다 가능한 것 같다. 주체로 서는 것 자체에는 앞서 말한 것 자비처럼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고려와 연민을 갖고 나아가는 과정이므로 자신만의 욕심을 갖고 다른 사람과 충돌하며 일어서는 것은 애초에 성불일수 없다. 또한 객관적 조건으로 인해 한계가 있을지라도 그안에서 주인이 될 수 있다. 불합리한 정권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돈과 직위를 보장하나 노예가 되는 길이며 반면 그에 항거하고 따르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잃더라도 주체로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되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다. 인간은 동물이고 근원적으로 결핍되고 타인과 다른 생물및 사물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처가 되는 것이 천상천하유아독족으로 표현되긴 하지만 다른 것들과의 연기를 강조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애초에 이런 관계를 인정하고 나아가니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주체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강신주는 동양과 서양의 철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의 주체로의 나감을 강조한다. 때문인지 주체성의 철학과 타자성의 철학의 기준으로 다양한 사상들을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답은 인간의 내부에서 찾느냐 외부에서 찾느냐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강신주의 친절한 설명을 읽고도 책 부록에 등장하는 무문관의 원전을 보면 도무지 해석과 이해가 어렵다. 정말이지 문이 없는 관문에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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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5-2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영삼대통령이 즐겨 사용했던 대도무문(大道無門) ..

고교 윤리시험에 대도무문을 쓰신걸 보면 92년도 즈음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신문도 열심히 읽고 뉴스도 잘 보는 성실한 학생 이였을듯..

닷슈 2017-05-23 22:48   좋아요 0 | URL
진짜그랬음 호연지기를 맞췄겠죠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 넘치는 생각 때문에 삶이 피곤한 사람들을 위한 심리 처방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크리스텔 프티콜랭 지음, 이세진 옮김 / 부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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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렸을때 생각이 너무 많거나 내가 공상이 심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을지 모른다. 어릴 때의 문제라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성인이 된 지금도 그렇다면 여러가지 생활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을 정신적 과잉활동인이라고 한다. 책은 그들에 관한 것이다.

 이들의 특징은 우뇌형 인간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좌뇌가 발달한 일반인들처럼 순차적, 원인, 결과적 사고가 잘 안되는 편이며 마치 마인드 맵처럼 하나에 대해서 여러가지 관련 사고가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들은 간단하게 대처하는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고려하여 실행하기 때문에 행동이 둔하고 비효율적이고 강박적으로 보이며 답답해 보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예를 들어 스키 리프트를 탄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약간의 위험을 잠시 느끼다 곧 익숙해지겠지만 이들은 리프트가 멈춘다면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하면 살수 있을까, 그물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떨어지는 무게를 견딜만한가? 스키를 차고 있으면 떨어질때 위험하지 않을까? 등등의 별의별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윤리적 기준 또한 높고 우뇌 발달형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역시 지나치게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으며 거절을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속칭 호구가 되기 쉽상이다. 간단한 문제에 대해 아니요를 할줄 모르기에 대부분 무리하게 일을 하게 되며 어쩌다 간신히 거절을 할때도 온갖 것을 고려하여 힘들게 간신히 말한다.

 정신적 과잉활동인들은 셜록홈즈 갖기도 하다. 모든 감각이 예민하여 상당히 관찰력이 뛰어나고 그런 감각이 공감각적으로 작용한다. 당신의 목소리는 마치 노란색 같군요라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종합적이고 동시다발적 사고에 감각이 민감하니 관찰력과 이로 인한 종합적 판단력이 홈즈 수준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정신적 과잉활동인들이 좌뇌편향적인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특히, 거부하지 못하는 정신적 과잉활동인들에게 계속 자기의 일을 떠넘기고 윤리적임을 악용하는 악마들을 매우 증오한다.

 인간의 뇌는 영유아시절 발달초기에 뇌세포들의 네트워크들이 엄청나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것이 성장에 따른 경험을 통해 추려지고 효율적인 가지치기를 통해 적은 수의 네트워크들만이 남게되는데 정신적 과잉활동인들 같은 경우는 마치 이 가지치기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 같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일들이 어린아이들 경우처럼 민감하게 받아들여지고 아마도 시간도 이사람들에게 여전히 늦게갈것만 같다.

 저자는 정신적 과잉활동인들의 상당수가 영재이고 높은 감성지능과 종합적인 판단력을 지녔음을 높게 평가한다. 그리고 사회가 이들의 특성을 인지하고 잘 활용했음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프랑스책인 이 책에는 정신적과잉활동인이 15-20%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이들이 이런 특성을 잘 드러내지 않음을 감안해도 상당히 높은 수치라 생각된다. 한국에서 측정한다면 과연 얼마나 나올지 궁금하다. 반토막 수준이 아닐지. 우리 사회는 더욱 이러한 이들을 허용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다.

 책을 보며 자신이 정신적 과잉활동인인지 아닌지, 아니면 내가 어렸을때 그러했는지를 생각해보는것도 재밌는 것 같다. 나같은 경우는 어려서는 정신적 과잉활동인에 가까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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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5-15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책을 진득하게 못 읽고 여러 권을 수시로 번갈아 읽으며 또 책을 사고 있는 저를 생각하면 뜨끔하네요;;

닷슈 2017-05-15 08:41   좋아요 0 | URL
그건 장점인것같습니다

cyrus 2017-05-1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홈스 시리즈를 정주행 독서 중입니다. 어렸을 때 만났던 홈스에 대한 환상을 조금씩 벗기고 있습니다. 정말 닷슈님의 말씀처럼 홈스는 자신의 정신이 쉬게 하는 걸 참지 못해요. 정말 그런 사람과 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궁금해요. 왓슨은 가상 인물이니까 제외.. ^^;;

닷슈 2017-05-15 19:26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그걸감당할사람이있다면 그역시도 연구대상이죠
숙적인 모리어티도 홈즈처럼생각이 많았을지궁금하군요

cyrus 2017-05-15 19:28   좋아요 0 | URL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셨어요. 제가 홈스 시리즈를 다 읽고나서 쓰고 싶은 글의 주제가 홈스와 모리어티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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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시작으로 '강신주의 맨얼굴의 당당한 인문학'을 3년정도 전에 읽었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 후로 강신주의 책을 잡지 않고 있었는데 아내가 이 책을 사두었고, 최근 참여하게 된 독서토론회에서 이 책을 때마침 선정하여 보게되었다. 이러니 책을 보게된 이유가 상당히 타의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은 보게 될 인연이었단 생각도 든다.

 그동안 강신주를 책이든 방송에서든 자주 봤던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 모습이 많이 사라졌던 느낌이 든다. 책은 한때 지나친게 아닌가 싶을 만큼 쏟아져 나왔었고 공중파든 케이블이든 종편이든 가리지 않고 여러 종류의 방송에 많이 출연했었다. 이렇게 사랑받던 한 사람이 어느 순간 희미해져가는걸 보면 연예계든 학계든 소비라는 것이 매우 유행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거 읽었던 책이나 강연을 곱씹어 보면 강신주는 항상 사람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것과 당당히 주체로 설 것을 주장했었다. 그래서 강연이든 책이든 혼란에 빠져있꺼나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게 만드는 역할을 많이 했으며 그 도구로 철학을 사용했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솔직해 지지 못하고 주체로서 서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지적했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인간은 행복하고자 하는 동물이고, 그 과정에서 감정을 반드시 드러낸다. 이 감정에 솔직해야만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감정을 우리는 반드시 확실히 구분하고 알아야하는데 여기서 도구로 제시하는 철학은 스피노자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의 동물임을 파악하고 감정을 중시한 철학자로 이 때문에 매우 혁명적인 사람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따라서 책은 스피노자가 제시한 48가지 감정을 제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스피노자의 이 감정에 대한 정의, 관련한 고전 소설, 그리고 역시 관련한 그림, 마지막으로 자신의 어드바이스로 1개 감정에 대한 장을 구성해 나간다. 제법 재미있는 구성이면서도 어찌보면 산만한 구성인데 이런 형태로 책이 만든 이유는 마지막 장에 나온다.

 어쨌든 책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관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윤리학을 제시함에 있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이성이란 것이 결국은 전체사회를 위한 것이며 개인의 욕망은 통제되고 검열된다. 즉, 살아있는 나의 윤리학이 아닌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욕망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결핍된 유한자인 만큼 반드시 욕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욕망의 윤리학이며 진정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

 도덕의 출발이라는 것이 결핍된 존재인 개인의 욕망을 넘어선 집단에서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함이라는 면에서 봤을때 윤리학의 출발을 개인의 욕망에 둔것은 매우 탁월해 보인다. 그런면에서 이성이라는 것은 집단의 욕망을 조절하기 위한 도구란 측면이 있고, 보다 추후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진화론과 연결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책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찾을수는 없었다.

 책에는 인상적인 구절도 무척 많았다. 반드시 맞다고 볼순 없지만 그래도 무릎을 탁하고 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p188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의 구분.

이루었을때 허무하다면 타인의 욕망,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욕망

예를 들어 부모의 사회의 욕망과 바람에 의해 명문대 좋은 학과를 갖지만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음을 알고 허무하고 방황한다면 타인의 욕망인 셈이고, 아니라면 자신의 욕망인 셈.


p238

아름 다운 사랑 이야기로 무장한 고급 포르노의 시절이 바로 우리의 젊은 시절.


p258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


p266

영광의 이면에는 멸시와 경멸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 영광에 집착하면 스스로 고독을 감내해야 함. 사랑과 유대의 가치를 망각하고 타인을 경쟁상대로만 생각함.


p356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과 과거의 실패경험에서 비롯한다.


p367

동정은 동등한 상대에게서 갖으며 연민은 한 수 아래의 상대에게 갖는다.

그래서 동정하는 말과 행동은 상대방은 때론 화를 내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동등함과 상대가 생각하는 동등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듯 하다.


p374

온건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는 짙은 그늘이 있다. 즉, 온건함이 자발적이 아니며 언제든지 약자에겐 폭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애시엔 온건해보인 남편이 결혼하니 폭력적이더란게 대표적인 예.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렇게 많이 세분화한 감정을 철학자의 도구를 빌려 고전소설과 그림에 드러난 부분을 인용하여 그리고 저자의 경험을 이용하여 보여준다는게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이에는 크게 공감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어 솔직하고 당당하게 주체로서 일어나는 것에 인상깊으면서도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다. 인간의 본성을 깊이 드러내어 보고 싶은 것도 우리의 본성이지만 감추고 싶은 것도 본성이 아닐런지. 저자는 인간은 결핍된 유한자이고 인생이 유한하기에 행복을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야 한다고 하지만 평생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 행복일 수 도 있다.

 그래서인지 강신주의 책과 강연은 시원하면서도 무언가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저자의 책과 강연이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식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언젠가 저자의 책에서 본적이 있기도 하지만 강신주는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적 성과들이 인문학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개인적으로는 강신주의 작업은 과학적 성과를 살짝 등에 업는다면 상당히 빛날수 있고 공통적인 부분도 적잖다는 생각에 무척 아쉽다.

 책에는 48가지 감정이 있는 만큼 사용한 48개의 고전소설과 48개의 그림이 있다. 당연히 책을 보다면 내가 몇개나 아는지 궁금할 것이다. 나의 경우 소설은 고작 3편 그림은 0편이었다. 인문학적으로 빈곤함을 느낀다. 그리고 48가지의 감정중 삼분의 이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인간은 보다 세부적으로 분류하여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강신주의 선택이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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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닷슈 2017-05-07 22:24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결국 그런것도 내면적인거나 성찰적 인것이아닌 실용적 차원의유행이어서인것같습니다

2017-05-07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07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까미 2017-05-1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몇년전 읽었을 때 인상 깊었는데 강신주 작가의 동영상까지 많이 보고 그랬는데
어떤 시원한 곳을 찌른 것 같아서 좋았던것 같아요
작가 자신도 이유는 있겠지만 새로운 발전을 가지고 더 활동하면 좋겠어요

닷슈 2017-05-14 17:58   좋아요 0 | URL
저도 강신주 작가님 활동이 갑작스레 뜸해짓서 좀 아쉽습니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서강대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하여튼 건명원이라는 곳에서 저자가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모음집이다. 그래서 매우 잘 읽힌다. 좀 시간이 있다면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다. 흔히 모음글들을 엮은 책은 주제의 일관성에서 좀 아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다행히 이책은 그런 면도 전혀 없다. 오히려 일관된 주제를 여러 용어로 약간의 차이나는 관점에서 계속 주장하는게 약간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다.

 여러 용어와 다양한 삶의 이야기, 과거의 사례를 들고 있지만 이 책이 말하는 것은 하나 인것 같다. 바로 우리 만의 철학을 갖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만의 철학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나 문화 등 세속의 삶에 매몰되지 않고 자존감과 자신의 속이 알찬 저자의 말에 따르면 장자가 말하는 '진'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만의 철학을 갖자는 주장이 새롭진 않다. 내가 아주 어린 나이였던 90년대부터, 혹은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이전부터 그러한 담론은 있었으며 어느 정도 실천하는 분들도 계셨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이 지금더 설득력을 얻는 것은 현재 한국사회가 경제, 사회, 문화 여러 측면에서 거의 지금의 시스템과 영토내에서의 한계점이 이르렀고, 과거의 독창적 철학자들 역시 주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철저히 철학의 수입국이라 말한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철학은 단순히 공자나, 맹자의 동양철학과 데카르트, 칸트, 플라톤 등의 서양철학의 내용이 아니다. 바로 시대를 앞서 나가기도 하고, 시대의 흐름을 날카롭게 꿰차서 설명하는 높은 시선에서의 전략적 차원의 것이다. 자신만의 철학을 갖지 못한 국가는 아무리 뛰어나도 전략가가 짜놓은 장기판에서 놀아나는 전술가가 될수 밖에 없다. 장기판의 룰은 모두 전략가가 정하며 전술가는 아무리 뛰어나도 그룰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의 강국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철학을 같고 있다. 중국의 동양철학, 일본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탈아입구, 영국은 언어철학과 논리실증주의, 프랑스는 실존주의, 독일은 관념론, 미국은 실용주의,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그것들이다. 

 반면 한국은 철학의 수입국으로 과거에는 중국의 동양철학, 최근에는 서양철학과 미국의 실용주의들을 수입해서 따라가는데 급급한 형편이다. 때문에 저자는 우리가 새로운 판을 짜고 시대를 앞서나가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따라가기만 해서는 지금처럼 중진국정도에 도달하는 것이 한계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는 평화상을 제외한다면 노벨상 수상자가 아직 없으며, 세계적으로 성공한 한국인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외국의 시스템상에서 자라난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저자는 남의 철학을 따라가기만 하는 자들을 그들의 세계에 종속된다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왕조들이 중국철학을 주체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사대적으로 흐른 부분들 오늘날 미국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는 모습들은 이러한 부분을 매우 잘 보여준다. 이런 종속들은 물론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할 수 없듯이 새로운 철학적 시선을통한 창의력의 발산은 뭔가로 꽉 채워진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우리나라 왕조들의 높은 수준의 문명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 그리고 지금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을 갖춘 현대국가로 거듭날수 있었던 것은 주변에 강력한 철학을 가진 문명국이 존재하고 이를 잘 수입하여 활용하였던 결과 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이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는 것 같다.

 책에서는 결국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진인 수준의 개인이 요구된다고 한다. 좀 돌려 말한다면 자본주의의 구조와, 여러 이념들, 사회 현상의 흐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눈으로 파악하고 판단 할 수 있는 진정한 시민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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