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위안 - 어느 날 찾아온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게 되기까지, 개정판
론 마라스코 외 지음, 김설인 옮김 / 현암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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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든 떠나보낸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이 나랑 같이 오래도록 같이 살면서 누구나 납득할만한 나이에 고통없이 가는 것이며 비겁하고 생물학적 본성에도 반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내가 납득할만한 나이에 고통없이 그 사람 보다 먼저 가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바람과 계획대로 되던가? 사고로 죽기도 하고, 병으로 가기도 하고, 살해당하기도 하고, 말도 안되게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기 마련이다. 슬픔의 위안은 그런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에 대한 책이다. 

 책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되는데 1장은 슬픔의 무게로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의 흔적들에 대해서 2장은 이를 대면하는 방법, 3장은 슬픔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것들 마지막 4장은 그럼에도 남는 슬픔의 흔적들에 대해서다. 나의 성향자체가 공감보다는 합리형이고 아직 운이 좋고 나이가 덜해 큰 슬픔을 겪은 적이 크게 없는지라 책의 내용이 많이 다가오진 않았다. 하지만 진정 이런 일을 겪은 사람에겐 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리라. 인상 깊은 부분만 좀 발췌해본다.

 

P35

삶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런데 슬픔은 그 사소한 것들을 비틀어서 떼어내 버린다. 죽음은 사소한 것들을 떼어내 버리고 난 뒤 그자리에 공허감 대신 인식 가능한 고통의 무게를 채운다.


P45

힘내고 응원하는 방법으로는 이메일과 문자메시지가 더 좋다. 언제 읽을지 답장을 할지 안할 지 결정할 수 있다.


P56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매일 사용한 대수롭지 않으느 물건이 어떻게 강렬한 강한 반응을 일으키는지 보여준다.


무슨 까닭인지 사람들이 특별히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신발이다. 신발이 아무래도 잘 빨지 않아 체취가 강하게 남고 후각이 기억과 연결되기 때문일듯하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지만 그 사람이 어디로 가거나 올때 항상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선다. 떠남과 더 강하게 연결되는듯 하다. 


P219

일상은 저 깊은 곳에서 당신에게 슬픔이 아닌 다른 것이 있다고 속삭여준다.


그렇다. 슬픔을 잊으려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더 힘들 것이다. 


P255

무정한 침묵과 조심스러운 결단처럼 보이는 남자들의 때로는 무엇인가를 해야하고 고쳐야 하고 도와야 하고 보호해야 하고 안전하게 지켜야할 경우를 대비하여 버티는 것이다.


P271

여성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경우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면이 간직한 대대로의 본능을 세차게 드러낸다. 이는 사랑하는 이에게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면 내가 곁에 있겠다. 기꺼이 곁에 있겠다는 의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여성은 그렇지 않은 여성에 비해 자신의 부재에 대해 죄책감을 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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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싱 - 인간과 바다 그리고 물고기
브라이언 M. 페이건 지음, 정미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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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는 사람이 육식을 시작한 이후 가장 오랫동안 먹은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바다는 아니어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호수, 습지, 웅덩이, 강이 있고, 그곳엔 비교적 잡기 쉬운 물고기와 조개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매우 많았었고 어떤 경우엔 거의 줍다시피 잡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러 가축과 곡물류에 비해 인류 역사에서 물고기는 식량으로써 상대적으로 매우 소홀히 다뤄져왔다. 물고기가 주식인 집단이 적고, 물고기가 문명의 기반인 적도 없으며 이렇다할 고고학적 증거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싱'의 저자 브라이언 페이건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물고기가 인류 초기 문명의 발흥에 상당한 역할을 했고,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일을 담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물고기가 남획의 결과 위기에 이르렀고, 인류의 식량자원으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시점이 다가옴으로써 환경은 물론이고 인간자체도 위기에 빠졌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1.기회주의적 어업과 초기문명

 책은 제법 두꺼운데 절반 이상을 세계의 과거 문명들이 물고기 잡이를 했고, 물고기가 주요 식량이자 급여로서 문명을 지탱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할애한다. 인류의 초기 식량획득 방법은 수렵, 채집, 어로인데 이중 어로만이 아직까지 유의미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어로방법은 현대 문명의 이기에 따라 많이 현대화했지만 놀랍게도 초기의 여러 방법이 원시적 형태로 그대로 남아있다.(낚시나, 그물이 그렇다)

 인류는 초기 고기잡이는 기회주의적이다. 이는 큰 목표를 갖고 대량으로 잡아들이기보다는 강의 범람 후 말라가는 웅덩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녀석들을 잡거나 산란기에 강에 들끓을때 손쉽게 잡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초기 인류 문명은 고기잡이에 많이 의지했는데 물고기는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고, 샤냥이나 채집에 비해 어획량이 어느정도 예측가능해 안정성을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개 같은 연체류는 더욱 그런 성질이 강했는데 그래서 고대 인류 정착지엔 그토록 많은 조개무지가 남아있다. 물고기가 식량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주요 식량원으로 자리잡은 사회도 제법 있었는데 농경이 부족합한 북유럽사회나 앤초비에 의지한 페루지역 등 여러 곳이다. 물고기 잡이는 방하기가 끝나가며 더욱 중요해졌는데 기온이 상승하고, 빙하가 감소하고 따라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대형동물이 감소 및 멸종했고, 어장은 오히려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문명에 물고기 잡이는 단지 식량의 하나로써만 기여한 것이 아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문명에서는 정착사회가 커지면서 중심지에 군사나, 인부등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먹여살릴 식량이 당연히 필요한데 물고기가 지급식량으로 이용된 것이다. 식량으로 지급되기 위해서는 쉽게 상하지 않고, 정량화되어 있으며, 운반가능해야만 하는데 물고기는 이를 모두 충족시킨다. 물고기를 잡아, 머리를 쳐내고, 반으로 갈라 내장과 등뼈를 제거하고 나비모양으로 말리면 되는데 이  말린 물고기가 가볍고, 상하지 않고 오래가며 운반이 쉽고 규격화되어 있어 지급식량으로써의 조건이 매우 훌륭했던 것이다.  

 또한 물고기는 문명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정착사회가 초기 국가로 발전하려면 체계적인 사회구조가 필요하다. 보통 농경이나 가축을 통해 식량이 충분히 생산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렇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진 않다. 오히려 수렵, 채집을 통해 사회가 체계화 된 상태에서 정착사회가 더 체계적으로 촉진되기도 한다. 어로사회도 마찬가지. 물고기가 사회 주식일 경우 사회는 상당한 분업체계를 갖게 된다. 대량으로 잡은 물고기는 빨리 부패하여 먹을 수 없게 되기에 빠른 해체 및 처리와 건조 및 염장처리 유통이 필요하다. 즉, 물고기를 잡는 집단과, 잡은 물고기를 즉시 몽둥이로 머리를 쳐서 죽인 후 내장 및 머리와 뼈를 처리하는 집단, 처리한 물고기를 염장하거나 말리는 집단, 염장이나 말린 물고기를 다른 사회와 유통 및 교역하는 집단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리더도 마땅히 필요했을 것이나 물고기를 대량으로 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상당히 체계적이었을 것이고 이런 사회가 곡물이나 가축을 하게 되면서 초기문명 정착사회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게 저자의 설득력 있는 생각이다.  

 

2. 중세유럽과 물고기잡이

고대로마인들 역시 물고기를 많이 먹었다. 로마의 유명한 소스인 가룸은 생선소스로 물고기를 잡고 남은 피와 내장을 소금물에 담가 발효시키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소스의 품질은 생선부위에 따라 달랐는데 참치를 쓴 경우가 최상, 잡어인 경우 하품이었다. 당시 기술이 열악해 해안가 사람이나 어부가 아니면 매우 고위층만 생물 생선을 즐길수 있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자기 과시를 위해 저택내에 대규모 양어지를 만들어 손님에게 진귀한 생물생선을 대접하기도 했다. 이런 생선사람은 로마의 멸망후에도 이어진다.

 중세엔 물고기 수요가 폭증하는데 여기엔 종교가 한몫을 한다. 교회는 예수의 고통을 함께하고자 육식을 금하는 시기를 늘렸는데 이 기간엔 곡물과 과일 물고기를 먹는 것만이 허용되었다. 이 금식 기간이 제법 길었기에(일년의 40%에 달하기도 했따) 물고기 수요가 당연히 많아졌다. 또한 중세엔 온난기가 찾아오면서 식량생산이 늘어 인구가 폭증한다. 먹는 입이 늘어나니 물고기에 대한 수요도 많아졌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식량수요가 더 늘어난 점도 한몫하게 된다. 이래저래 물고기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니 물고기를 잡는 사람도 많아질수 밖에 없었다. 민물고기 중 뱀장어를 많이 먹었는데 구하기가 무척 쉽고 높은 열로 훈제하면 딱딱한 막대기처럼 단단하게 변해 보관기관이 무척 길었기 때문이다. 보관과 이동이 어찌나 용이한지 지역화폐처럼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높은 수요로 연어나 철갑상어등 민물고기가 금방 동이났기에 사람들은 두가지 선택을 하게 된다. 하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양식과 바다물고기 잡이다. 우선 양식이 시작되었다. 물레방아 기술이 발달하면서 내륙사람들은 특권층을 노려 양식을 시작했다. 14세기 중반엔 잉어가 대량으로 양식되었는데, 좁은 데서도 잘 살고, 더러운 물에 강하며 번식력이 뛰어난 잉어의 특성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잉어는 매우 비쌌는데 1kg당 소고기9kg 빵 12덩이의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잉어양식장은 기술의 발달로 바다물고기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자 사양세로 접어든다. 거기에 종교적 금식기가 느슨해지기 시작하고 잉어의 질퍽한 맛이 바다물고기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문제도 있어 15세기 이후엔 프랑스에선 잉어양어장이 모두 사라지고 만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주목받은 바다물고기는 청어였다. 청어는 수가 많고 북해에 무척 많았다. 하지만 기름이 많은 생선이었기에 잡은 후 빨리 부패하는 치명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북해는 바람이 춥고 습시가 많이 청어의 건조가 불가능해 염장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해는 소금이 부족하고 질도 낮아 당연히 염장청어의 질도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보관기간도 2주에 불과했다. 하지만 13-14세기 들어 어부들이 청어의 대가리 뒷부분의 아가미를 제거한 후, 바로 그 부분에 소금을 뿌리는 염장방법을 터득하면서 상황이 개선된다. 소금이 피를 타고 내장부위까지 염장하게 되면서 보관기관이 크게 늘었던 것. 이후 통속절임법은 청어잡이를 산업의 길로 이끈다. 통속절임법은 내장을 제거한 청어를 목재의 큰통에 빈틈없이 채우고, 사이사이에 소금을 채우는 형태였다. 소금이 청어의 수분을 흡수하면 청어를 새소금물에 담아 염장했는데 보관기간이 무려 2년에 달했다. 소금한통으로 무려 117kg의 청어통 3개의 처리가 가능해 장거리 교역이 가능해졌고, 품질또한 상당히 균일했다. 통속절임 전반 해도 고기잡이가 주식인 지역을 제외하면 본업이라기보다는 농민들이 농한기에 부업으로 하는 수준이었는데 통속절임법 이후 수익성이 크게 개선되면서 이는 어업산업으로 본격 발전한다.

 하지만 청어가 산업화 되고 남획되면서 청어는 사양길로 접어든다. 또한 1520년경 소빙기가 찾아오자 찬물에 민감한 청어가 사라지게 된다. 이에 유럽인이 뒤늦게 주목한 생선은 대구였다. 대구는 자라면 큰 것은 무려 2m의 길이에 무게는 90kg대까지 나가는 거대한 생선이었다. 또한 살이 희고 단단하며 기름기가 적어 추운 북부에서도 쉽게 건조할수 있었고, 건조한 대구 역시 간단히 조리해 먹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은 매우 쉽게 잡을 수 있고 개체수 역시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다. 대구는 책 '대구'에도 나오듯 삼각무역을 가능케했다. 유럽인들은 북미의 뉴잉글랜드 어장에서 대구를 잡아들인 후, 상품의 대구는 유럽에 수출하고, 하품의 대구는 카리브해의 노예의 식량으로 팔아치웠다. 그리고 카리브해에서 번 돈으로 그 지역의 럼주와 설탕을 구매해 그것을 유럽에 팔고 그돈으로 남아프리카의 노예를 사서 북미에 판매하는 형태였다. 이처럼 대구는 세계사적 악명높은 삼각무역을 가능케했다. 북해의 대구 역시 금방 남획되고 유럽인들은 어장을 옮겨간다. 1412년엔 아이슬란드 수역이었고, 1497년엔 뉴펀들랜드 어장이었다. 대구 남획은 계속되어 18세기부터 그 영향이 가시화 된다.

 

3. 어업의 현대화와 어장 황폐화

대충 2차세계대전 이후 어업은 본격적으로 현대화의 길로 향한다. 여기엔 당연히 과학기술의 힘이 컸다. 먼저 증기어업선이 개발되었다. 증기어업선 이전까지 어업의 한계는 명확했는데 바람이 시속48km이상으로 부는 해역에선 위험으로 조업이 거의 없었고, 조업시간과 공간도 상당히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증기어업선은 거친 환경의 극복을 가능케했다. 수심400m이상의 바다에서도 조업이 가능했고 시간도 길어졌으며 어장도 넓어졌다. 물고기에게 지옥문이 열린 것이다.

 디젤엔진의 개발은 이를 더욱 가속화한다. 석유가 석탄보다 부피가 적기에 내연기관인 디젤엔진의 어업선은 진출범위가 더욱 넓어져 대서양 전역이 어장이 되고 만다. 거기에 배가 커져 잡은 물고기를 바로 처리하고 냉동하거나 어분으로 만드는 배마져 등장한다. 물고기를 에워싼 다음 그물 아래쪽 테두리의 줄을 당겨 자루 모양으로 어획하는 건착망도 이때 등장한다. 오랜 역사의 저인망 어업도 디젤엔진의 강력한 힘으로 더욱 본격화한다.

 이처럼 기술의 발달로 어업에 본격화 하자 어장은 더욱 황폐화된다. 사람들은 바다는 넓고 물고기는 무한하다는 착각에 빠져있었으며 기존 어장이 황폐화 되면 새로운 어장을 찾아 황폐화 시키는 일을 계속해나갔다. 인간이 조업을 한 일이 거의 없는 남극어장의 경우 발견 후 겨우 15년만에 어획량이 80%감소했다. 또한 유럽인들이 처음 발견하고 대구 밭이라고 까지 생각했던 뉴펀들랜드의 어장의 어획량은 1992년 전성기의 1%까지 추락해 폐쇠되고 만다. 2차대전후 전세계적으로물고기를 대량으로 잡아들인 나라는 일본이며, 한국을 포함한 다수의 인구를 지닌 아시아의 나라들이 경쟁적으로 다른 해역의 어획에 나서게 된다. 이에 1970년대 세계 각국은 자신들의 해안선에서 200해리를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선포해 자국의 어업자원 보호에 나서게 된다.

 현재의 바다는 매우 참혹한 상황으로 해양 여기저기에 무차별적으로 그물이 처져 있으며 저인망 어업은 계속되고 있다. 길이 100km에 3만개의 낚시바늘이 달린 지옥의 주낙도 있다고 한다. 어획이 줄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저인망어업과 남획을 계속하는 악순환은 어획의 극적 감소를 낳아 1996년 8600만 톤으로 정점을 찍었던 어획량은 2010년 7100만톤으로 줄어들고 회복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다.

 재미로 하는 낚시도 문제다 산업적 어업은 어획량의 급적 감소후 점차 사양세로 접어들고 있으나 취미 낚시는 그렇지 않다. 생업을 위한 개발도상국들의 가내 어업이나 취미 낚시는 어획량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산업적 어업만큼은 아니지만 신경써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취미 낚시는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난데 인구만 세계적으로 무려 6000만에 달하고 연간 4000억 달러의 수익과 100만개의 일자리가 이와 관련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어획의 감소에 인간이 찾은 해결책 중 하나는 양식이다. 2014년엔 처음으로 양식의 비중이 자연산 어획의 비중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인간은 먹기만 했지 물고기의 생태에 무지한 편이라 양식은 아직 상당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편이다. 다른 해결책은 어장관리를 통한 회복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세계 각국이 주요 어장을 중심으로 해양보호구역을 지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참혹한 남획으로 어장을 잃은 유럽 각국은 20세기 후반부터 어장 관리에 들어가 어느정도 어획량의 회복을 보이고 있다. 실제 아시아의 어려나라들은 인구가 많은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물고기 소비량의 상당부분을 양식에 의존하는 반면 유럽은 양식비중이 18%에 불과하다.

 또한 기후변화라는 위가도 있다. 지구온난화로 각 수역의 온도와 산도가 급변하고 있는데 물고기는 물속에 사는 만큼 산도와 온도에 무척 민감하다. 어장에 닥치고 있고 닥칠 또 다른 위기 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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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의 배신 - 길들이기, 정착생활, 국가의 기원에 관한 대항서사
제임스 C. 스콧 지음, 전경훈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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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도 그렇게 했지만 단선적인 역사관이 지배적이다. 사용하는 도구라면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의 형태, 그리고 경제체제라면 수렵채집-농경-산업형태다. 실제로 이런 라인을 따르지 못하거나 늦었던 민족, 사회, 국가의 운명이 지난 백여년간 어떠했는가를 잘 알고 체험했기에 이 같은 단선적 역사관은 쉽게 옹호되고 받아들여지는 편이다.

 책은 이런 단선적 역사관 중 특히, 농경에 대해 시비를 건다. 사람들이 수렵채집 형태의 생활을 영위하다 가축과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정착하고 국가를 이루어 발전했다는 이야기에 대한 시비다. 물론 농경이 현대 문명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국가의 시초이긴 하지만 그 국가 소속 개별 인간에게 생각보다 많은 악영향을 준 것은 최근 잘 알려져있는 편이다.(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으로 영양실조와 굶주림, 작아진 체격,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구조로 여러가지 농경후유증, 충치와 전염병, 신분사회와 가혹한 착취 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렵채집의 더 나은 다음 단계가 농경이고, 발전과 생존을 위해 이렇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고가 지배적인데 책은 이를 하나하나 따져본다.

 

1. 착각들 

 우선 지적하는 점은 농경 및 가축의 시작과 도시국가의 탄생에는 생각보다 커다란 시간차가 난다는 것이다. 보통 농경 및 가축의 시작과 정착사회의 탄생을 거의 같은 시점으로 생각하지만 최초의 농경과 초기도시국가와는 무려 4천년의 시간차가 난다. 더 웃긴 것은 농경과 가축  이전에도 도시국가정도의 수준은 아니자민 유의미한 규모의 정착생활은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가축과 농경의 시작이 반드시 대규모 도시국가 형성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가축과 농경전에도 정착사회가 있었던 만큼 둘은 항상 병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두번째 편견은 초기국가문명이 매우 풍요로운 지역에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초기 국가에는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수만명의 사람이 몰렸고, 좁은 지역에 갇혀사는 이들을 부양하기 위해선 당연히 지역이 어느 정도 풍요로워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국가와 풍요로운 지역은 반비례관계라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초기 국가가 형성된 지역은 대개 지금은 건조지역인데 초기 정착이 시작되었을 무렵 이 지역은 지금보다 해수면이 높았고 대개 습지지역이었다. 해수면의 상승으로 유속이 느려져 강하구에 삼각주나 거대습지가 많이 형성되었고 사람들은 대개 이지역에 일부 정착했다. 습지지역은 동물과 식물식량이 풍부했고, 생태적 다양성으로 꾸준히 먹을거리가 교체되어 매우 안정적이었다. 문제는 국가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한군데 잡아놓고, 세금을 징수해야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먹이사슬이 매우 단순하고 영양적으로 빈곤해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양한 먹을 거리는 무엇을 징수해야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매우 어려운 문제가 되며, 영양적 풍부함은 굳이 국가사회에 개인이 속박되는데 상당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세번째는 농경을 하는 도시국가와 여러 제국 및 강력한 나라들이 등장했음에도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인류의 또 하나의 생활방식(사실 원래 생활방식이 맞다)으로 수렵채집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농경사회는 스스로를 문명사회로 칭하고 이들을 야만인으로 대접했다. 실제로 수많은 농경국가들은 이들 수렵채집, 유목사회와 오랜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우리로 생각하면 북방민족들이 그렇다고 할수 있다. 이들은 인구수는 적었지만 무력이 강했고, 하나로 세력이 통합될 경우 농경국가를 무너뜨릴만큼 충분히 강력했다. 흉노나 몽골 및 만주족, 게르만족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만 봐도 이는 쉽게 알 수 있는 면이다. 농경국가가 이들을 완전히 제압하고 세력권하에 두게 된 것은 1600년 경으로 화약제국의 완성으로 기마병을 제압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부터이다.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지금의 영토국가들이 세계의 나머지 부분들을 세력권하에 두기 시작한 시점과 대개 일치한다. 하지만 이들 수렵채집, 유목사회가 농경국가들과 항상 대치했던 것만은 아니다. 농경국가들은 강유역의 농경에 유리하며 부양력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곳에 대개 위치했으므로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목재나, 모피, 귀금속 등의 산물이 항상 부족했다. 농경국가들에 이런 천연자원들을 교역한 것이 수렵, 유목민족들이다. 이들은  식량 및 가축, 문화재 등의 물품을 받아가고 이런 천연자원들을 농경국가에 전달했다. 전쟁보다는 이런 교역의 역사가 훨씬 컸을 것이다. 실제로 수렵채집, 유목민족들도 한번에 모든 것을 털어가는 약탈과 파괴보다는 장기적으로 꾸준한 이득을 주는 교역을 선호했을 것이다.

 

2. 도무스의 탄생과 도시국가의 탄생

 도무스는 가구를 뜻하는 라틴어로 경작지, 씨앗과 곡식저장고, 사람들과 사육되는 동물들이 전례없이 좁은 한 곳에 집중된 득특한 장소다. 말이 어렵지 농사짓고, 가축치는 농가하나를 생각하면 된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주변 경관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인위적으로 불을 질러 다른 잡목을 제거한 후, 식량이 될만한 식물자원의 씨앗을 심어 수확하는 등의 행위다.

도무스는 이처럼 주로 불등을 이용하여 주변 경관을 정리하여 생존에 적합한 동물과 식물을 자신의 주변 근거지에 배치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오랜작업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후기 신석기 사회에 등장한 도무스는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생태실험장이된다. 자연상태에서 동식물종은 도무스처럼 좁고 인위적으로 조성된 경관하에 집중된 적이 없다. 농경과 가축을 위해 땅을 정리한 결과 토양은 해가 더 많이 비치고 외부에 많이 노출되게 된다. 이로 인해 토양안에 새로운 생태질서가 자리잡게 되며 기존의 동식물과, 기생충, 곤충등은 일종의 교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생물종이 집중하면서 좁은 자리에 오물이 집중적으로 쌓이게 되며 이는 기생생물의 대량발생으로 이어진다. 질병의 주 매개체인 모기와 절지동물이 이 오물을 번식과 섭식에 용이한 장소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가축과 장시간 밀접접촉하게 되면서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19와 같은 인수공통감염병이 창궐하게 된다. 인간은 가금류와는 26가지, 쥐 및 생쥐와는 32가지, 말과는 35가지, 돼지와는 42가지, 염소 및 양과는 46가지, 소와는 50가지, 개와는 무려 60가지의 전염병을 공유한다. 유명한 홍역은 양과 염소의 우역바이러스에서 천연두는 낙타와 소의 설치류 조상에게서, 인플루엔자는 조류에게서 유래했다.

 이 같은 도무스는 동일작물재배의 취약성과 가축 및 인간에 대한 기생생물과 곤충, 전염병의 공격으로 취약하고 생산성이 높지 않았다. 때문에 인간은 앞서 말한 것처럼 도무스를 생성했음에도 오랜 기간 도무스의 자급능력부족으로 수렵채집사회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대규모 정주생활인 도시국가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마땅한 설명은 없지만 현재까지의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광역혁명이다. 말이 혁명이지, 쉽게 말해 영양의 하향평준화라 할 수 있다. 기후 변화와 아마도 남획으로 고영양의 동물식품이 줄어들었다. 이에 인간은 대안으로 하위 영양수준(그러니까 더 작고 영양가가 적은 동물)에서  더욱 다양한 생계자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된것이다. 이로 인해 수렵채집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고, 도무스에 보다 의존하게 되었으며 정착생활은 자연스레 더 높은 출산률로 이어지게 되었다. 즉, 정착과 도무스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광역혁명결과 인간은 땅을 일구어 농사짓고, 가축을 가르는 부단하고 반복되는 고역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영양은 취약해졌고,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률은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정착으로 인해 국가에 속박되기 시작한다.

 

3. 국가의 시작과 통제도구들

 국가는 보통 노동의 분업이 이루어진 상당히 복잡하고 계층화된 위계적 사회에서 행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가 중요한데 보통 그것이 국가의 영토다. 과거 초기 도시국가는 행정력이 미약했기에 그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았다. 최초의 도시 국가가 형성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기원전 3500-2500년 정도에 해수면이 빠르게 내려가면서 유프라테스 강의 유량이 줄어들었다. 기후가 건조해졌고 강물이 줄어 들면서 다양하고 풍부한 영양을 제공하던 습지가 사라지고 강의 본류만이 남게 된다. 줄어든 강물 탓에 토양이 염류호하여 경작 가능한 땅이 줄었고, 사람들을 부양할 만한 땅 역시 줄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맞이 한 광역혁명의 결과로 사람들은 더욱 좁은 땅에 노동집약적으로 일하게 되었고, 건조함으로 인해 관개사업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이렇게 곡물과 인력이 소수의 경작가능한 땅으로 집중하자 전유, 계층화 불평등이 발생한다. 국가의 본격 시작인 것이다.

 국가는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면도 있었지만 좁은 지역에서 사람들을 가둬놓고 착취하는 가혹한 것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에 얽메이면서도 벗어나기를 희망하며 역으로 국가는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들을 강하게 통제한다. 국가가 자신을 유지하고 사람들을 통제한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성벽과 세금징수, 글이다.

 보통 사람들은 성벽을 도시국가를 같은 외부의 도시국가나 수렵유목민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한다. 실제로 성벽의 존재는 외부로부터 보호해야 할 소중한 것들이 존재함을 의미하며 이는 주로 백성들로부터 징수한 것들이다. 즉 성벽은 영속적 경작과 식량저장을 의미한다. 하지만 역으로 성벽은 도시국가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들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성문은 주로 낮에만 개방되고 밤에는 차단되었으며 항상 문지기가 있어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또한 대개의 지역민은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이 통제되었다. 과연 성벽이 방어만을 위한 목적이었는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다음은 세금이다. 국가의 유지와 존속에 가장 필요한 것이며 형태를 달리할 뿐 오늘날까지 존속하는 것이다. 세금은 지금은 화폐로 징수하지만 인류역사상 대부분 곡물의 형태로 징수했다. 곡물과 국가사이에는 생각보다 단단한 결합이 있는데 이는 과거에는 오로지 곡물만이 조세의 형태로 이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곡물은 쉽게 눈으로 볼 수 있고, 낟알이 작아 아주 작은 단위로 균일하게 나눌수 있으며 가치 산정이 가능하다. 또한 운송이 쉽고, 배급도 용이하다. 게다가 땅위에서 자라나 눈에 보이는 형태로 거의 동시에 심어 동시에 수확하니 일시에 세금징수가 가능한 장점이 있다. 이 같은 장점이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한번 고구마를 생각해보자. 고구마는 땅속에서 자라나니 정확한 수량을 알 수 없고, 주인이 기습적으로 수확하거나 수확량을 얼마든지 속이기에 용이하다. 또한 지금처럼 저울이 일반화되지 않은 과거에는 이를 정확한 수량으로 나누어 주기가 어렵고 단위부피당 무게도 무거워 운송도 쉽지 않다. 도시국가들에서 곡물만을 선호한 이유이며 이런 이유로 카사바나 얌, 고구마 등이 주식인 지여게서 도시국가가 자라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은 글이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한글을 개발했다는 이유는 매우 낭만적이지만 실제 인류문명사회에서 글의 발명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글은 국가형성기에 등장한 것으로 정주 사회의 형성 및 국가의 기원, 운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앞서 말한 세금의 징수와 인력의 관리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초기 도시 국가들은 고유의 문자를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매우 소수의 집권층들만 이를 사용했기에 흔적이 얼마 남지 않았고 도시 국가의 명멸과 동시에 글도 대부분 사라졌다. 중국의 진의 경우 통일을 하고나서 지역마다 다른 독특한 측정관행을 없애고 모든 것을 통일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재산과 물산, 인력을 모두 통제하고 징수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국가 통치유지를 위한 징수와 착취의 도구로서의 글에 대한 정체성은 피지배민들의 가슴속에도 어렴풋이 이해되었던 것으로 보이다. 농민반란이나 노예들의 반란에서 일번으로 태워졌던 것이 바로 그들의 신분과 재산을 나타내는 문서였으니 말이다.

 

4.초기 국가의 약점들

역사상 농경을 바탕으로 한 왕조들은 그 수명이 그리 길지 못한다. 한국의 왕조들은 갑작스런 백두산 분출과 말갈의 대두라는 진퇴양난으로 200년만에 망한 발해를 제외한다면 세계사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들정도로 그 수명이 길다. 하지만 다른 국가들의 농경왕조들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하다. 길어야 2-3백여년 수준이다. 이는 농경국가가 가진 내재적 취약성 때문인데 책은 3가지를 제시한다. 우선 식량으로 1년에 1번 수확하는 1-2가지의 주요 곡물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런 단일작물재배는 언급한 것처럼 세금징수와 유통, 관리, 배급에 매우 유용하나 가뭄과 홍수, 병충해에 취약하다. 다음은 도무스 형성과 인구과밀로 인한 전염병 취약성, 마지막은 잉여생산물이 운송체계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런 미묘한 균형에 약간이나마 균열이 생길 경우 농경왕조는 크게 흔들렸다.

 여기에 외부적 위기도 있다. 바로 환경파괴와 침략이다. 초기국가는 상당한 양의 목재를 소모했다. 작물경작과 가축방목을 위한 토지정리, 조리, 난방, 가마, 주거지 건축, 금속야금, 선박건조, 기념비 및 종교건축, 철제련, 벽돌제조 등. 이 모든 활동엔 열에너지가 필요하고 그것은 과거에 바로 목재를 의미했다. 때문에 초기 국가는 일단 주변의 목재를 빠르게 소모한 후, 자신들이 위치한 강 상류지역의 벌채를 시작한다. 목재는 무겁기에 운송이 간편한 강유역부터 빠르게 목재가 소모된다.

 하지만 대가는 크다. 강유역의 삼림파괴로 하천 유역의 비가 더 빨리 흘러내리고 토사가 빨리 운반되어 격렬한 홍수가 발생한다. 토사가 축적 및 퇴적하면 자연제방이 생기고 장벽이 생겨나 강의 흐름이 이전에 비해 막히고 역류하여 습지가 생기기 쉬운 여건이 된다. 그리고 이런 습지는 모기가 대량발생하기 쉬워 도시에 말라리아를 가져온다. 또한 물의 부족으로 관개농업을 지속할수록 토양엔 염류가 쌓이게 된다. 염류의 제거를 위해 계속 토양에 물을 공급하게 되면 결국 지하수면이 높아져 염분이 있는 물이 작물의 뿌리에 닿게 되어 생산성을 크게 떨어뜨린다. 식량부족이 발생하는 것이다.

 침략 역시 위기를 가져온다. 도시 국가는 아주 풍요로운 지역엔 적합하지 않아도 인구 부양을 위해 적절히 풍요로운 지역이 필요하다. 주로 강하구인데 문제는 이지역이 교통의 요지로 방어엔 그리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다. 때문에 방어를 위해 중심지를 풍요롭지 못한 곳에 두는 경우가 있다. 고구려 역시 초기 도읍이 졸본이었고, 발해 역시 그러했다. 양국 역시 힘을 키워 방어에 자신이 생긴후에야 풍요로운 곳으로 중심지를 이전했다. 이런 생산성의 부족은 국가의 태생부터 위기를 가져온다.

 또한 국가는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식량생산에 투입해야 할 인력의 상당부분을 항상 방어에 투입했다. 이는 생산력의 저하를 가져오며 초기 국가가 인적자원에 매달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도 인구는 매우 중요하지만 과거엔 인적자원의 확보가 국가의 성패에 매우 중요했다. 지금의 통념과는 다르게 전쟁 승리의 대가로 상대방의 영토를 취하기 보다는 그곳을 황폐화시키고 인적자원을 노예로 수탈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자신들의 인구로 편입하기 위해 아동이나 인구 생산이 가능한 여성노예를 선호했다. 남성노예는 체제 편입의 어려움과 호전성으로 주로 중심지 외곽에 노예로 생산활동에 이용했다.

 게다가 초기국가는 행정력이 미약하여 영향력이 잘 미치지 못하고 조세의 운송이 어려운 외곽지역에서 세금을 잘 징수하지 못했다.(과거 고려와 조선도 북방지역의 세금은 운송의 어려움으로 자체국방예산으로 사용하게 했다) 때문에 초기국가의 수취는 주로 중심지에 집중되었다. 이에 중심지의 사람들은 착취에 시달렸고, 항상 탈출을 염원하거나 체제에 불만을 갖게 된다. 도시 반란이 잦았던 이유다.

 

이처럼 책은 농경이 자연스레 정착과 도시문명으로 우리를 이끌었다는 통념을 뒤집는다. 농경과 정착간에는 전후로 생각보다 오랜 시간 간극이 있었으며 도시문명이 시작 된 이후에도 세계의 상당부분은 인류 본래적 생활방식인 수렵채집, 유목이 계속되었다. 이 생활은 농경에 비해 인구를 적정히 유지하고 풍족하고 생각보다 안정적이었기에 도무스의 발명이후에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도시문명은 기후변화가 없었다면 쉽사리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며 도시문명이후에도 1600년까지는 수렵채집, 유목사회가 이들과의 교역을 담당하고 보다 강력한 무력으로 우위를 점하기도 했었다.

 도시문명은 탄생 이후에도 전염병과, 식량위기 및 부족, 외부침략, 환경파괴, 내부갈등으로 상당히 자주 명멸했으며 도시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성벽과 세금징수, 인구자원의 수탈과 확보를 해나갔다. 때문에 인류역사를 농경에서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단선적 세계관과 도시문명에 대한 낭만적이고 당위적 서사를 지적하는게 이 책의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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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xing 2020-04-08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한권을 다 읽은 느낌이네요. 깔끔한 요약 감사드립니다!

닷슈 2020-04-08 17: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국인의 탄생 -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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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우리 사회가 반지성주의와 교육만능주의 그리고 서구에 대한 지적의존으로 인해 교육지옥과 힘의추구라는 폐해에 시달리고 있다고 본다. 한국사회는 지난 백여년간 사회 자체와 그 속의 개인이 엄청난 정체성 변화를 겪었음에도 자신들을 성찰하는 연구가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 독특한 한국인의 정체성의 변천에 대해 자신의 연구결과를 담은 것이 이 책이다. 다 읽어보니 총 두권인것 같은데 '한국인의 탄생' 편에서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를 다루고 다음편에서 현대편이 이어지는 것 같다.

 한국인의 정체성 변천을 연구하려다보니 저자는 곧 어려움에 봉착한다. 한국인의 사상과 철학을 담아놓은 체계적 저술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상당기간동안 부재했던 것이다. 이는 거대한 혼란기로 인함인데 자신들이 신봉하던 성리학이 부정당하고, 서구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며, 일제에 강점당한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그럴만하다. 그래서 저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소설이다. 소설에 담겨진 인물상과 저자의 의도 파악을 통해 당대 한국인의 변화를 살펴볼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먼저 근대 이전의 소설에 주목하는데 우선 홍길동전이다.

 

1. 근대이전(홍길동전)

 한국인이 언제나 마음편하게 자신들의 작은 문제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소환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홍길동일 것이다. 홍길동이 비교적 편한 해결책인덴 나름의 이유가 있다. 바로 아이같은 외모와 폭력없이 상대를 해치우는 강력한 도술이다.

 작가인 허균은 연산시절의 혼란함에서 소설의 모티브를 따왔음에도 홍길동전의 시대를 하필 세종대로 설정했다. 이는 홍길동이 시대가 불러낸 영웅이 아닌 그런 것과 상관없는 천상의 영웅임을 설정하기 위해서이고 영웅의 시대적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함이었다. 허균은 사실 역성혁명을 하기 위한 대리목적으로 홍길동을 만들어낸 것이지만 당시 역성혁명은 성리학에 반하는 것이고 이에 물든 백성들의 정서에도 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허균은 충분히 역성이 가능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홍길동이 단지 율도국 하나만을 세우게 함으로써 혁명의 가능성만을 보여준다. 더구나 홍길동은 도술이 무척 뛰어나 적들을 농락함으로써 그 과정에서 폭력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와 같은 폭력성과 혁명의 거칠음이 없기에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부담없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홍길동을 쉽게 소환할 수 있게 된다.

 근대이전엔 소설엔 개인이 없다. 있다해도 성리학적 사고방식에 갇혀있고 선인과 악인으로 뚜렷히 구분되며 이렇다할 내면 표현도 적다.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영웅이나 특별한 주인공으로 그래서 제목도 대부분 - - 전이다. 내용도 권선징악이나 교훈을 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2. 근대소설의 등장

 서구에서 근대소설이 등장한다. 서구근대소설은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라는 시대가 낳은 것이다. 자본주의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로 근대소설엔 개인에 등장하며 개인을 부각시키는 다양한 도구가 등장한다(내면묘사) 그래서 근대소설은 어떤 개인의 생애를 기술하기 위한 문학형식인 경우가 많으며 그 안에서 인물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세상과 공동체에 대항하여 맞서 갈등을 일으킨다. 근대소설은 아름다운 문체를 추구하지 않으며 천박한 문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실주의를 추구하는데 이는 진짜 사실이 아닌 없는 인물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사실성의 추구다. 대표적인 예로 돈키호테, 파우스트, 돈후앙, 로빈슨크루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개인주의의 신화적 영웅들이다.

 서구 역시 자본주의 등장 이전인 근대엔 서사시나 비극, 영웅담이 소설의 주류였으며 주인공은 개인이라기보단 우리의 경우처럼 공동체나 민족의 염원, 꿈을 대리만족 시켜주는 이였다. 그럼에도 근대 이전의 주인공들은 홍길동처럼 아이다운 경우가 많았으며 근대소설의 개인들은 성숙한 남성성을 표출한다. 그만큼 영웅에 아닌 개인으로서 세상에 부딪히는게 거칠고 힘들기 때문이다.

 

3. 구한말-대한제국까지(신소설-혈의 누, 치악산, 화세계)

  [피동적이고 주체성없는 약한 피해자 한국인]

 구한말에서 대한제국까지의 시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힘든시기중 하나였다. 사회의 시스템과 전통적인 공동체 질서는 완전히 붕괴했고, 외세의 침략이 눈앞에 있는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시기였다. 정계에선 매관매직이 판을 쳤고, 조정은 나라보단 자신의 살길을 찾았으니 일반백성들의 삶이야 어떠했을까. 

 이런 시기 서구 근대소설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 신소설이 등장한다. 이인직의 혈의누가 최초이고 귀와 성, 치악상등이 잇달아 등장한다. 작품엔 공통점이 있는데 주인공이 김옥련, 길순이, 이씨부인으로 모두 여성이며 각자 다른 처지지만 모두 끔찍한 운명에 처했고, 성격상 주체성이나 자의식 개성없이 끌려만 다닌다는 것이다. 이들은 피동적이고 내용이 없는 껍데기의 여성피해자로 우리나라 소설상 최초의 근대인이다. 강한 남성이 개인주의적 영웅으로 등장하는 서구와는 딴판으로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한다. 소설의 다른 인물들은 이유없이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한인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물질적 성공을 위해 전통적인 의를 무시하고 악행을 일삼는다. 하지만 이시기 소설은 아직 한국인의 금기인 비극으로 치닫진 못하고 끔찍한 운명에도 어떻게든 권선징악적인 해피엔드로 작품을 끝내는 경향을 보인다.

 1910년경에 이르러서는 주체성과 개성없이 피해만 입던 주인공들은 이 시기에 적응하여 영약하고 합리적인 근대적 인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쨌든 당시 사람들은 혼란한 홉스식의 자연상태에 높인 상황에서 강한 국가를 원했고, 그래서 이상스레 대원군의 인기가 오래도록 신화처럼 이어진다. 개화가 이어지며 언론을 통해 대한제국 정부의 무능은 더욱 드러났고, 반작용으로 오히려 일본과의 사회계약을 통해 강한 정부를 세우려는 일진회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일진회는 한일합방후 총독부의 명령으로 허망하게 사라질때까지 무려 100만에 달하는 회원을 가진 활발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을사늑약과 친일파들의 부역행위가 드러나며 일진회는 그 인기를 잃어간다. 반작용으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과는 구분되는 조선인의 차별성이 부각되었다. 조선인은 구시대적 표현이었으며 일본이 만들어낸 일본국민과도 대비되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채택되었다. 다음은 이 민족주의자의 탄생이다.

 

4. 1910년대까지(근대소설-무정)

[민족주의자의 탄생]

우리 민족이란 개념은 고통속에 탄생했다. 구한말 조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차 부정에 그 반작용으로 새로운 강한 권력을 찾았던 일진회를 포함한 친일행위에 대한 이차 부정이라는 이중의 부정속에서 탄생한 개념이었다. 국가가 없던 시기에 탄생했기에 대부분의 다른 국가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일치하는 반면 한국은 그렇지 못했고 이같은 성향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민족주의자들은 1880년대부터 백성의 교육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러일전쟁과 일진회의 행위에 대한 반작용, 민영황의 자결로 인한 고취는 개화민족주의를 형성했다. 이들은 교육을 통한 서구와 같은 사회건설이 목표였다. 반면 여기에 일제에 대한 강한 투쟁을 포함하는 것이 저항민족주의다.

 이 같은 분위기를 한국최초의 근대소설로 평가받는 이광수의 무정에 반영된다. 무정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형식은 한국 최초로 내면을 갖춘 근대적 인물이다. 내면을 가졌으므로 개인은 욕망을 가진 주체이자 그것을 자제하는 주체가 된다. 구한말의 주체없는 인물에서 진일보 한것이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민족개화를 위한 지식이 필요했으나 이는 조선자체가 아닌 유학이라는 밖에서부터 얻어지는 것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이것에 목말라 했으나 그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조선안에 있던 모든 지식과 문화가 부정되고 외세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던 당시 상황은 지식과 체계를 모두 서구에 의존하는 지식의존주를 낳았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강력하게 한국사회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본인들이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아직 민족을 강력하게 경험하지 못했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정엔 이형식이 사랑을 통해 민족주의자로 눈을 뜨고 유학길에 오르지만 그들에게 환호하는 조선사람들은 아직 민족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인들에게 민족이 강력하게 등장한 것은 3.1운동이다. 3.1운동으로 민족이 비로서 확실히 등장했고, 일진회나 여러 다른 잘못된 길로 들어선 모든 이가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하는 계기가 된다.

 

5. 1920년대(김동인의 소설들)

[강한 조선인의 추구]

구한말을 거쳐 일제시대초기까지 조선인은 피해자였고, 약자였다. 하지만 민족주의자가 등장하고 민족개념이 등장하며 비로소 강한 조선인 상이 요구되었다. 이 시기는 이런 강한 조선인을 소설상에 어떻게 상정할지를 고민한 시기로 평가된다.

 1920년대인 김동인이 있었다. 주로 연애소설을 쓴 것으로 평가되지만 저자가 보기엔 김동인은 약한 한국인과 강한 한국인을 대비시켜 강한 한국인을 꾸준히 발견하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김동인은 -다로 끝나는 현대 한국어 문어체를 확립했다. 기존엔 -더라, -라. 등의 표현이 많았는데 -다의 표현이 자리잡아 화자 스스로의 생각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주어가 확실히 주체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김동인은 또한 그 또는 그녀라는 3인칭 표현을 확립하여 화자의 사고 구조를 근대화하였다. 그리고 이광수가 만들어낸 내면을 서간체와 고백체, 일기체등의 도입으로 더욱 소설안에 확립하였다.

 김동인은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위를 남의 행위를 의식함으로 인해 하게되는 사람들을 그려낸다. 김동인은 인간을 나누는 기준으로 약함과 강함을 독창적으로 제시하였고 약함의 이유로 당시 등장한 모더니즘 도시사회의 남을 의식하는 허영에서 찾아냈다. 그는 1920년대 말부터 소설에서 꾸준히 강한자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강한 조선인은 약한자에 비해 내면도 없고 말과 생각없이 그저 강하게만 행동하는 괴물같은 존재였다.

 

6. 1930-40년대

[강한 조선인의 등장]

 1930년대에서 40년대를 거치며 서울은 대도시로 성장한다. 인구는 40만에서 100만에 달했고, 대중문화가 발달하고 익명의 대중사회가 되었다. 1910년대에서 민족개화의 의무를 띄었던 지식인들은 이젠 넘쳐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민족개화는 커녕 직장을 구하지 못해 실업에 시달렸다. 이런 모습은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와 이상의 날개에 잘 등장한다. 

 이 시기에 등장한 이광수의 유정은 한국에서 최초로 결말이 비극인 소설이다. 주인공인 최석은 지식인이자 부유하고 경성학교의 교장으로 지인의 딸을 키우게 된다. 문제는 주인공과 지인의 딸이 사랑에 빠진다는 점이다. 교장인 최석은 실제론 사랑을 자제했음에도 모함을 받고 모든 것을 잃게된다. 가족에게서도 제자들에게도 비난받는다. 만주와 시베리아 여행을 통해 그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런 사랑안에서의 갈등이 강한 조선인을 탄생시킨 비결이었다. 사랑해서는 안될 사랑을 상정해 갈등과 고뇌를 겪게 하고 이성과 욕망사이에서 두 힘의 갈등이 최대화해 강한 조선인이 탄생하는 식이었다.

 보다 제대로된 강한 민족주의자로서 강한 조선인은 임꺽정에서 등장한다. 임꺽정은 홍길동과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라 한국인의 필요에 따라 현재도 소환된다. 차이가 있다면 홍길동은 무해함과 비전복성으로 주로 생활문제의 해결을 맞는다면 임꺽정은 체제를 전복시키는 거친인물로 필요로 하게 된다는 점이다. 실제 임꺽정은 홍길동과는 다르게 거친 외모에 백정출신이고, 홍길동의 말도안되는 도술정도는 아니고 현실적인 힘을 갖는 편이다. 또한 왠지 현실적이지 않은 홍길동과는 다르게 소설에서 강하게 현실에 뿌리박고 있다. 임꺽정 자체는 다소 비현실적인 인물이지만 그의 가족과 그의 동료들이 처한 비참한 조선의 현실은 매우 현실적이기에 꺽정도 자연스레 현실성을 얻는다.

  임꺽정에 등장하는 또 다른 두개의 독특함은 반지성주의와 민중이다. 민중은 오래전에 등장한 말로 서구의 개념이 아니고 동북아 삼국의 지식인이 만들어낸 말이다. 그러나 특유의 아나키스트적인 뜻으로 말이 탄생한 중국과 일본에선 이미 오래전에 좌우파의 공격으로 사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한국에선 임꺽정이란 소설에서 살아남아 오랜 세월을 묶다 민주화의 시기에 폭발하여 자리잡게 된다. 반지성주의는 역설적으로 당대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것이었다. 지식을 통해 개화가 되고 무언가 이루어질줄 알았지만 상황은 무기력하게만 흘러갔다. 민중은 개화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은 해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일본은 더욱 강대해져만 갔다. 일부 지식인들은 친일로 돌아서기까지 한다. 그런 무력감에 반지성주의가 작품에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소설 임꺽정에서 꺽정은 글을 모른다. 심지어 언문조차 모르며 글을 배우려는 시도자체를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알것을 다 알고 일을 처리해내가며 두목이다. 힘이 가장 센자가 두목이 되는 것은 좀 이례적인 것으로 로빈훗이나 양산박에서도 두목은 무력순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정치력과 두뇌가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임꺽정에선 무력순이다. 반지성주의가 더욱 드러나는 점은 무리중 글을 유일하게 아는 서림이 잔학하고, 세속적이며 악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하여튼 강한 조선인은 해방을 앞두고 마침내 등장한다. 전통문화에서 개인이 부재하고 영웅만있던 시점에서 구한말의 시대적 혼란으로 주체성 없는 피해자 개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각자도생에 성공해 영악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조선의 부정과 일본이라는 강한 권력의 부정이라는 이중 부정을 통해 민족주의가 탄생한다. 민족주의자는 지식인이었으며 3.1운동을 통해 민족도 탄생한다. 그리고 민족을 이끌 강한 조선인 상이 요구되며 약함과 강함의 대비과정에서 강한 조선인이 탄생하고 이는 임꺽정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강한 조선인의 등장과 그 강함이 해방으로 연결되지 못한 상황과 반지성주의는 해방후 시대적 혼란속에서 반지성주의적 상황에서 힘을 추구하는 문제상황으로 연결된다. 저자는 반지성주의가 지식과 지식인에 불신과 의혹, 증오와 질투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큰 장애를 미쳤다고 생각한다, 나아가서 개화주의자들의 교육만능주의는 이와 결합해 현재의 최악의 교육지옥을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럴듯한 분석이다.

 책을 읽으며 근대의 역사적 상황과 소설을 통한 민족적 과제 해결을 위한 한국인 상의 변천을 느낄수 있었다. 재밌고 흥미로웠다. 다음권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다소 작위적인 면도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훌륭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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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2-01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개화기에 서양책을 번역하면서 번역하기 가장 어려웠던 단어 중 하나가 individual 이라고 하더라구요. ㅎㅎ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동체 중시의 동양에게 개인주의 개념은 전혀 없었을 것 같습니다. ^^

닷슈 2021-02-01 22:42   좋아요 0 | URL
전체를 강조하는 동양에서 개인은 지금도 사실 어색하고 비판 받는 개념이죠. 이 책 다음작은 한국인의 발견에서는 아무래도 개인에 대한 부분이 자본주의 및 민족주의와 관련해서 나올 법한데 아직 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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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사장 책을 모두 다 읽었다. 처음 나온 지대넓얕 시리즈 1-2권과 시민의 교양, 열한계단,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까지. 그리고 이번에 더 뭐가 나올게 있나 싶었는데 영화시리즈의 스핀오프처럼 과거로 돌아가 지대넓얕 제로 편이 나왔다. 다루는 시기도 앞으로 당겨져서 축의 시대다.

 채사장의 책은 쉽고 가독성이 무척 높은 편이다. 그래서 책의 주제가 무려 철학과 종교, 경제학, 사회과학, 과학 등 상당히 많은 학문을 총체적으로 다룸에도 대중적이고 판매량이 높다. 무려 200만권을 넘게 팔았다니 대단할 뿐이다. 이번 책에서도 그의 종합적인 식견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깊이를 놓치지 않고 이번에도 쉽게 썼다.

 책은 우주와 인간에서 시작한다. 나도 우주 관련 책을 가끔 보는 편인데, 볼때 마다 느끼는 점은 한결 같다. 신비롭고 광활하며 경이로운 우주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규모를 갖는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 성과는 그 광활한 우주가 심지어 여러 개일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놓고 있다.(다중우주론이다. 책에서도 상세히 다룬다.) 이렇게 우주는 스케일이 압도적인데 인간은 고작 우주의 천억개이상의 은하 중 하나의 은하에 속해있다. 그것도 아주 변두리에. 그리고 그것도 항성이 고작 하나뿐인 태양계에 속하고 태양계에서도 크기가 제법 작은 지구라는 행성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많이 향상되었긴 하지만 이 지구에 대해서도 완전히 알지 못하고, 역시 다루지도 못한다. 이 작은 행성에서 서로간에 아둥바둥거리고 산다.

 이런 인간은 우주에서 정말이지 티끌만한 존재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생각도,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란 생각도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다. 한마디로 이런 생각으론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찾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채사장은 이 책에서 기발한 생각을 제시한다. 우주라는 존재가 생겨나서 최초로 우주이자 우주의 일부인 인간이란 존재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고민하며, 더불어 그 과정에서 우주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노력하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우주의 자기반성과정이 되는게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인간이 지구상의 생물과 다른 가치를 지닌 점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는 식으로 자신에게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우주에게 그런 비슷한 과정을 해준다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우주자체로서 우주를 고민함으로써 우주를 가치롭게 하고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우주에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주 자체인 인간도 존재론적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은 이런 존재론적 의미 부여과정을 하는 것이 인간만이라는 가정을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영화에 나오는 다른 외계인들이 이미 그것을 했거나 하고 있거나 앞으로 한다고 해서 인간만의 값어치가 떨어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시대에 아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유용한 학문적 발견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등한 값어치를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물론 역사는 일등만 기억하긴 한다.) 하여튼.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이 올바르려면 적어도 인간은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그냥 우주에 속하는 부속으로서의 일부가 아니라 우주와 자신은 하나라는 생각을 마땅히 가질 필요가 있다. 이 같은 생각은 매우 신비롭기도 하고 우리에게 익숙치 않으며 뭔가 잘못되거나 무속적인 생각마저 들게한다. 이는 우리가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오랫동안 길들여져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사장은 사고중지란걸 하고 우리와 우주가 사실은 하나라는 생각을 해볼 것을 이 책으로 제안한다.

 이런 우주와 인간이 하나라는 일원론적 생각은 사실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최근 현대과학의 성과가 이런 일원론적 생각을 뒷받침 한다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최신예 성과이면서 인류를 머리아프게 만드는 양자역학이 그렇다. 양자역학에서는 입자의 속도와 위치를 둘다 정확히 잴수 없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다. 관찰자의 행위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자는 파동이면서도 어떤경우는 입자처럼 느껴지는데 유명한 이중슬릿실험은 광자가 두 가지 성질을 모두 보여주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파동같던 녀석이 관찰 행위가 영향을 미치자 입자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최근의 멀리 떨어진 양자가 동시에 서로의 상태에 영향을 주고 받는 양자얽힘 현상은 의식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이런 일원론적 생각을 뒷받침한다. 즉, 겉으론 크게 무관해 보이는 나의 나의 의식은 자아, 그리고 세계로서의 우주가 의식수준에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인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자아와 세계가 하나라는 일원론적 생각의 과학적 근거가 된다.

 이런 신박한 생각으로 채사장은 과거 축의 시대에 드러난 인류의 일원론적 생각들을 고찰한다.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사실 우린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축의 시대는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 개체간의 물리적 거리가 매우 가까워지고 경쟁이 심화되던 시기다. 약탈과 경쟁, 전쟁이 난무했고, 서로간에 속이는 생존경쟁이 과거와 다르게 만연해졌다. 이런 시기 인간종에겐 당연히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그리고 등장한 것이 축의 시대의 베다와 우파니샤드, 불교, 유교와 도교, 기독교, 서양철학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베다와 우파니샤드다. 인도 아리아인에서 비롯한 것으로 베다가 세계의 생성에 관해 신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라면 우파니샤드는 정반대로 세계에 대해 철학적 설명을 하는 책이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자아에는 세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순수한 상태인 아트만이 있다. 그리고 이 아트만은 우주의 원리인 다르마에 의해 끝없이 윤회하는 존재이다. 윤회의 모습과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카르마인데 우리가 아는 업보다. 윤회와 업은 우리가 아는 선악 개념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안에서 거스름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즉, 자아로서의 나의 행위와 의지가 우주의 그것과 합치할때 윤회를 끊고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범아아일여라 한다.

 불교는 우파니샤드의 영향을 많이 받아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띤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으니 불교에서는 아트만과 같은 고정 불변의 자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물론 자아는 있지만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즉, 뭐라고 언어로 표현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우해서는 고성제와 집성제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상태인 멸성제에 도달해야하며 이를 위해서 도성제의 8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팔정도인데 팔정도의 정도는 단순히 바른 것이 아니라 중도의 상태를 말한다. 이 중도는 단순히 가운데에 있는 것은 아니며 역시 자아와 세계가 서로 하나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체유심조에 이르게 된다.

 중국의 도가에서는 도덕경이 등장한다. 도덕경의 도는 우주의 진리이며 덕은 개인의 내면으로 자아다. 도가 우주의 법칙과 질서라면 덕은 그러한 도의 본질이 반영된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이처럼 노자는 인간의 근본 심성이 우주의 이치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으며 그런 면에서 범아일여를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다.

 유교는 도교의 이런 탈세속적 측면과는 다르게 보다 급하게 느껴지는 세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유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인인데 이는 인간사이의 실천덕목이다. 이처럼 유교의 가르침은 현실 가르침으로 실천적 학문으로서 우주와 세계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측면이 상당히 빈약했다. 더군다나 중국에서는 도교 이외에도 불교라는 강력한 철학이 퍼진다. 유교의 학자들은 이런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사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데 그래서 등장한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성리학이다. 성리학의 태극도설은 음양론과 오행론을 접목하여 인간과 세계의 존재원리를 설명하고 역시 이는 범아일여의 일맥과 상통한다.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생각의 서양에서도 일원론적 생각이 마침내 등장한다. 그것은 칸트에 이르러서였는데 칸트는 이성을 신봉하는 합리론과 경험을 신봉하는 경험론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합리론은 완전한 도구로서의 이성에 대한 증거를 댈수 없었고, 지식의 확장도 설명할수 없었다. 경험론은 완벽한 경험이란 없기에 결국 진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둘다 외부와 내부의 세계를 분리하는 이분법을 전제한다. 때문에 칸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세계를 내부로 옮겨다 놓는다. 즉, 눈앞의 외부세계는 내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삭과정을 통해 내면에 그려진 현상세계라는 것이다. 범아일여와 상통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나의 감각기관과 의식의 제약하에 완벽하게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칸트는 외부 세계를 기존의 물체와 구분해 물자체로 부른다.     

 이처럼 인류는 현대 양자물리학의 성과와 부합하는 일원론적 생각들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어왔다.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에 막혀 우리가 이를 오래도록 잊은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현대 과학의 성과는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서양에 의해 촉발되었고, 일원론적 사고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도 이로 인함이다. 일종의 모순이랄까나. 앞으로 과학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우주에 대해 더욱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할 수록 일원론적 생각을 더욱 강해질 것이란 생각이든다. 우리가 복잡해하는 양자현상이나 양자얽힘등의 여러 문제는 몇차원 위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아무것도 아닐수 있다. 3차원의 존재인 우리가 이차원 및 일차원을 거기 그려진 존재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잘 조종할수 있는 것처럼말이다.(소설 플랫랜드에 이런 장면이 많이 나온다. 종이 위의 양쪽끝에 그려진 졸라맨 둘은 서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린 종이를 구부려 그들을 겹치게 함으로써 순식간에 만나게 할수 있다.)  이렇게 인간이 우주와 일체로서 우리가 속하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 우주자체를 이해하고 깨닫는 날이 올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 도구와 눈은 책이 말하는 것처럼 일원론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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