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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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5월 9일인 어제는 날이 무척 좋았다. 어버이날 답지 않았던 8일과 7일의 날씨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도 원인과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둘 다 강한 바람이다. 어제는 인천 송도에 가야했다. 느즈막하게 결혼하게 된 동생의 상견례 때문이다. 반드시 가야하고 늦지 않아야 하는 만남이니 걱정이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이 강원도 원주라서다. 

 원주에 살게 되면서 이곳 저곳 가보았지만 인천은 처음이었다. 운전하면 막히지 않을까? 차는 있나? 몇 주전부터 걱정만 하고 좀처럼 계획을 수립하지 않던 내게 아내가 직접 고속버스편과 시간을 알아봐주었다. 가는 표는 현장구매만 가능했지만 돌아오는 표는 예매가 가능해 예매해주었다. 보통 서울을 운전해서 차로 갔던 경험해 비출때 원주에서 인천까지는 그래도 3시간은 걸릴거란 생각이 들었다. 인천은 먼 곳 아닌가. 거기에 송도는 더욱 끝이니까. 

 그래서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보통 지식으로 꽉 찬 책들은 노트 필기하면서 보는 편이니 제외되었다. 그래서 그럴 필요가 없는 집에 몇 안되는 소설을 출발을 앞두고 부랴부랴 골랐다.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가 보였다. 사놓고 무려 10년 가까이 안보고 있는 책이다.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빨리 나가지 못하고 책이나 고르고 있는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아내의 잔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차 싶어 얼릉 고르고 집을 나섰다. 당행히 인천가는 차엔 빈 자리가 많았고, 성공적으로 한적한 자리에 착석하여 벨트까지 멘후 주변에 누가 있는지를 잠시 살핀 뒤 책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웬 걸 시작이 이상하다. 에코 책이 전반적으로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너무 이상했다. 앞부분이 너무 비어있게 이야기기 시작되었다. 이건 뭘까 싶어 불길한 마음에 책의 앞부분을 보니 '프라하의 묘지 2'라고 적혀있었다. 1권이 아닌 2권을 가져온 것이었다. 이것도 색다른 경험이려니 하고 그냥 2권부터 볼까하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길이 열렸다. 나에겐 가상의 책장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를 것이다. 스마폰을 꺼내 전자책 서재를 열었다. 처음엔 계획대로 문학을 보려고 했는데 마구 넘기다 보니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가 보였다. 프라하의 묘지 만큼은 아니지만 이 역시 오랜기간 묵혀놓은 책이었다. 그래서 버스에서 이 책을 보기 시작했고, 오며 가며 완독하게 되었다.

 책은 2017년에 다시 나왔지만 사실 2009년에 나왔던 책이다. 2009년은 정치인 유시민이 노무현의 죽음을 목도하고, 보수정권의 등장으로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리고 유시민 개인적으로는 정치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시점이며 더욱 개인적으로는 그의 딸이 대학에 입학한 시점이었다. 유시민으로선 자신이 그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행한 많은 노력이 처절한 실패처럼 보이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영향을 강하게 준 방향타 같았던 책들을 다시 보며 흔들리는 마음을 재확인하고 싶은 심정과 사랑하는 딸이 대학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좋은 책들을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만들어진 듯 하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책들은 모두 저자 유시민이 어린 나이에 읽은 책들이다. 십대에 접한 책도 있고 늦어도 이십대에 접한 책들이다. 한창 이성과 감성, 정의감이 날카로운 시점이다보니 책에 대한 저자의 반응도 그러하다. 그러다 보니 젊은 유시민을 만나는 느낌도 들었고 그 오랜 세월에도 공감할수 밖에 없는 변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문제점도 한탄스러웠고, 과거 나에게도 비슷한 영향을 주었던 책들의 느낌과 감성도 재현되는 맛이 있었다. 

 청춘의 독서에 등장하는 책은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인구론, 대위의 딸, 맹자, 광장, 사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역사란 무엇인가 이다. 이렇게 목차를 종합해보니 경제학 관련 책(인구론,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이 많고, 문학도 제법 있는데 러시아 문학(대위의 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 좀 많았고, 역사관련(사기, 역사란 무엇인가) 책도 많았다. 그리고 가장 아픈 공통점은 이중 내가 읽은 책이 단 한권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전이 그렇듯 무슨 내용인지는 대충 알지만 막상 읽은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유시민이 언급한 모든 책이 인상적이었지만 우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생각난다. 이 책은 독일 책으로 당시 언론의 작태를 비판한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은 27살의 젊은 독일 여성으로 가난하지만 어머니와 감옥에 수감된 오빠를 부양하고 있다. 그녀는 지난 사랑에 실패해 외로워하던 중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문제는 그가 무기를 탈취한 탈영병이었다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두려울 그 사실은 의외로 그녀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녀는 그와 사랑을 나눈다. 죄값을 치루고 나면 본격적으로 사랑을 나눌 생각이기도 했다. 

 문제는 언론의 태도다. 그들은 이미 남자를 뒤쫓고 있었고, 누군가와 만나는지를 확인한후 같이 엮을 심산이었다. 카타리나의 신상은 낯낯이 공개되었고, 피의자로서 아직 남여 모두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언론은 피의사실을 검찰과 결탁하여 함부로 공표했다. 카타리나와 아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그녀에 대해 묻고 원하는 사실만 부풀려 말하는 것도 물론이었다. 마치 얼마전 조국사태를 보는 듯 했다. 유시민은 시기대로 고 노무현 대통령 사건을 떠올렸다.

 사마천의 사기도 인상적이었다. 사마천은 순서대로 역사서를 서술하는 편년체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기전체를 창안했다. 이는 제왕을 다룬 '본기'와 뛰어난 장군과 신하를 나타는 '표', 예법과 음악, 군사, 역법, 천문, 치수, 화폐등 사회경제제도와 행정, 문화를 다룬 '서', 주요 제후국의 역사를 상세히 다룬 '세가', 마지막으로 뛰어난 인물들의 전기를 다룬 '열전'이다. 유시민은 본기 부분에서 한고조와 그 주변인물에 대해서 많이 다룬다. 고조는 패업을 이룬후 왕권의 안정을 위해 개국공신들을 정리한다. 그들은 고조와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함께한 전우들이지만 개국이후 안정된 치세를 이루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한신이 제거되었다. 또한 고조는 후에들인 황비를 사랑했고 그 아들이 영민하여 후사로 삼고싶었지만 본처인 여후의 서슬이 시퍼랬다. 고조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마련했지만 사후 그들은 여후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다. 모든걸 이뤘지만 특히, 500년 이상을 전란에 시달린 중국의 민중을 평화로 이끌었지만 고조는 친구도, 자식도, 사랑도 이루지 못한다. 유시민은 기록에 의지해 고조가 치료를 거부하고 그만 살기를 원했던것이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한다. 권력의 허상과 무서움이다.

 헨지조지의 진보와 빈곤도 재밌었다. 요즘 정치권에선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토지공개념이 거론되고 있으며 그 반대급부로 반헌법적 발상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언행도 나오고 있다. 헨리 조지는 리카도의 후계자로 리카도가 농업지대론에 지중한 반면 헨리 조지는 도심에서의 지대론에 집중했다. 그의 책에 따르면 한 자연인이 어디든 비슷한 한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된다. 다만 그는 모든걸 할수 있는 상태지만 뭐든 제대로 할 수 없다. 분업이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소를 잡을 수도 있고 신발도 만들 수 있지만 잘 하기 어렵고 많은 시간이 투여되며 그로 인해 다른 일을 못하게 된다. 그러다 이웃이 찾아온다. 그의 선택은 첫번째 사람과 달리 간단하다. 바로 그의 첫번째 자연인의 이웃자리기 최상의 자리가 된다. 그렇게 하나 둘 사람이 찾아오고 마을이 되고 도시가 된다.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상승한다. 첫번째 자리 잡은 사람의 터가 자연히 중심지가 되고 지대가 급상승한다. 그 또는 그의 후손은 도시의 발전과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고도 그 생산력 향상과 발전의 대가를 혼자서 향유한다. 때문에 헨리 조지는 그러한 지대에 대한 세금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유재산 역시 인정했으며 자본주의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그저 그런 불합리한 이익에 대해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정치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안좋았다. 정치권에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주장을 몰라보고 가짜 이익과 불합리에 현혹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바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책은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다. 부끄럽게도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도 사놓고 김치도 아닌데 오래도록 묵혀두고 있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는 구 소련의 소설인 만큼 사상적 검증을 받았다. 죄와 벌은 러시아 차르의 검열을 받았는데 러시아는 쉽게 변하지 않는 듯 하다. 이 책은 소련, 특히 조금만 생각이 다르고 조금만 출신이나 사상이 의심스러우면 수용소행이었던 스탈린 시대를 비판한다. 솔제니친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시절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에서 이 책을 발간했기에 출판될 수 있었다. 솔제니친은 책에서 수용소의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몹시도 억울한 상황임에도 강제로 주어진 노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식량도 부족하고 먹을 것도 없는 편인데 한국의 남성들은 이와 몹시 비슷한 군대를 다녀오기에 공감대를 적지 않게 느낄수 있다. 한 장면에서 작업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에 즉각 응하지 않으면 형벌이 뒤따를 거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벽돌을 쌓을 때 접착제 역할을 하는 모르타르가 아직 남아 있었고 작업하는 수용인들은 이를 만들어나간다. 내일이면 그리고 작업을 이루면 모르타르가 얼어 붙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밥도 제대로 먹어가지 못하며 저녁까지 말도 안되는 지시와 조건에서 작업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이루었을때 성취감을 맛본적이 있을 것이다. 난 그 어쩔수 없는 성취감이 너무나도 싫었는데 유시민은 그런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본다.

 하여튼 책을 다 읽고 나니 대학초년때가 많이 생각났다. 유시민의 의도처럼 그 당시에도 이런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나는 '신문 읽기의 혁명'이나 '지식의 세계1&2',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같은 책을 읽고 영향을 많이 받았던 생각이 난다. '청춘의 독서'는 제목처럼 지금의 청춘들에게 그리고 청춘과 좋은 책의 맛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에게 좋은 책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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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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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을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버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은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벌법이 여당과 야당에 의해 졸속처리되었다. 매일 7명정도의 노동자가 산업체에서 사망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인이 사건보다 중대기업처벌법에 분노와 감정, 노력을 쏟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하지만 강력한 정서적 공감은 이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 쉽지 않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정서적 공감으로 분노하기에 정치권은 대개 공감정치를 하게 된다. 때문에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보다는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단기적인 해결책으로 반응하게 되며 이는 역시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정서적 공감의 마지막 문제는 정서적 공감이 폭력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크게 공감하는 상대가 피해를 당한 경우, 그 가해자를 폭력적으로 처벌하는 것에 훨씬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9.11사태다. 당시 분노한 미국인들은 아무런 합리적 증거없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그 결과 양 국가의 정치체제가 무너져 엄청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하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피해자에 대한 지나친 정서적 공감은 폭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강력하게 작용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통한 적절한 판단 및 해결을 방해한다. 이로 인해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 그리고 관련 3자도 새로운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정서적 공감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초점이 좁고, 특수 사례에만 잘 끌리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도 못하게 한다. 거기에 정서적 공감은 공감을 잘 하는 개인을 매우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정서적으로 매우 피곤한 일이다. 이럴 경우 공감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매우 소진된다. 실제로 정서적 공감을 잘 하는 사람들은 연민이나 동정, 인지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나 ,과잉보호, 균형잡힌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서적 공감이 강한 사람들은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인지 심장질환이나 당뇨, 암의 위험성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정서적 공감은 올바른 도덕적 판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망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케케묶은 이성을 다시금 꺼내든다. 이성에 의해 합리적인 도덕적 판단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연민을 더한다. 공감이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이라면 연민은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것이다. 그리고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뜻함과 관심, 배려의 감정이다. 때문에 저자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이라는 오래된 용어처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정서적 공감에 매몰된 잘못된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이성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공감이 온전한 도덕의 바탕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이성 역시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도 인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성의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이성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의 문제라고 말한다. 즉, 이성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동물적이기에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으며 충분히 이성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인간자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도구보다는 사용자가 문제라는 거랄까나.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있다. 인간이 이성에 대한 의심의 눈을 갖게 된것은 근현대사의 아픔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실수에 이성이 자리한 부분은 없다. 양차대전과 대학살, 인종차별, 냉전등은 이성적 판단의 결과물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일어난 결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 이성에 대한 문제 의식의 시작은 인간 이성자체라기 보다는 충분히 인간이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발생한 것이란 생각이다.

 이 책은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준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엔 나 역시 공감의 신봉자에 가까웠다. 물론 공감은 중요하고, 사람을 선하게 만들며, 가까운 관계에서 매우 필요하며 적절한 거리두기만 된다면 매우 유용한 것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정서적 공감이 불러오는 도덕적 판단 잘못은 충분히 경계할만하다는 생각이다. 책은 뒷 부분에 좀 힘이 빠지는 편인데, 아무래도 과학적 근거가 좀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싸이코 패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재미난데 통상 사이코 패스는 공감능력이 크게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는 사이코 패스의 경우 오히려 정상인보다 공감능력이 높다고 말한다. 사이코 패스는 사람을 크게 괴롭게 할 수 있고, 대개 매력적으로 범죄대상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인을 괴롭게 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 그가 괴로울지를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며,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역시 높은 공감능력을 요구한다. 즉, 사이코 패스는 인지적 공감능력이 높고 정서적 공감 능력이 낮다고 볼 수 있으며 공감능력보다는 절제력, 억제력이 매우 낮고 잔혹하며 대담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연구결과 인간의 공감능력과 공격성 사이엔 의외로 별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여튼 재미난 책이었다. 공감에 대해 신봉하는 분이나 의심하는 분 모두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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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4-07 0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직접 읽지 않아서..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네요 ^^ 한가지만 얘기하면, 저자는 공감대신 이성을 추구하자고 주장하는데, 이성자체의 불완전성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문제라고 했는데, 같은 논리로 보면 공감 역시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공감을 사용하는 또는 그것을 발휘하는 인간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닷슈 2021-04-07 14:31   좋아요 0 | URL
이성에 바탕한 차가운 도덕은 상당히 공리주의적 판단을 일으키기에 저자는 사실 인지적 공감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에 의한 도덕적 판단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공감을 완전히 도덕에서 제거했다기보다는 도덕적 판단에 문제를 일으키는 정서적 공감의 배제를 주장한 듯 합니다. 즉, 공감전체보다는 일부분에 대한 비판이죠. 이성에 대한 부분은 책에서도 좀 아쉬웠습니다. 공감은 언급한 것처럼 최근 많이 주목을 받았고, 본성의 일부분으로 진화론에서 많이 다루지만 이성에 대한 부분은 연구가 오히려 별로없죠. 이성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별로 없고, 그에 대한 연구도 없는게 아쉽습니다. 그래서 책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이 약하죠.

북다이제스터 2021-04-07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과 비슷한 결론, 즉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는 책 <옳고 그름>을 읽으적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저자와 동일하게 이 책 저자도 분명 ‘공리주의자‘일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공리주의자들은 여전히 죽지도 않고 계속 살아남는 무서운 집단인 것 같습니다.ㅠ)

말씀하신 책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혹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성과 감성(공감, 직관, 욕망, 무의식)이
동등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철학이나 뇌과학에서는 ‘이성이 감성의 시녀‘즉, 감성이 이성을 지배한다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지 감성을 억누르고 이성에 따라 판단할지 궁금해 집니다.
<옳고 그름>에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혹시 이 책에는 있는지요?

닷슈 2021-04-07 14:33   좋아요 1 | URL
이성에 대한 그런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 뒷부분이 약하다고 말한겁니다. 이건 저자 자신의 한계라기보다는 최근 과학이 인간의 동물적 부분에 많이 주목에 감성에 집중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성에 대한 연구도 진화론적으로 신경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저자는 직접 언급은 안하지만 공리주의자로 보입니다. 연민과 인지적 공감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자라면 좀 이상할까요.

초딩 2021-05-08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08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5-08 2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5-09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즐거운 날 되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05-09 0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당선 축하새요.

닷슈 2021-05-09 11: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갈등 도시 -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시민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서울 선언 2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1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은 전체 5200만 인구 중 1000만 가량이 서울에 산다. 그리고 인접한 경기도에 1200만 정도가 살며 이들 중 대부분은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 도시에 거주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생각해도 서울과 관련한 사람의 수는 한국인구의 절반에 달한다. 여기엔 지극히 그 수가 적을 조부모세대부터 서울에 거주한 토박이도 있을테고,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서울로 올라온 2-3세대들, 그리고 지방에 살고있지만 과거엔 서울에 살았거나 아니면 지금 서울을 직장이나 학교등으로 생활권으로 둔 이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듯 서울은 상당히 많은 한국인의 삶의 터전이지만  사람들에게 서울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은 분명 고향이겠지만 웬지 고향같지 않을 것 같고, 살아가는 우리 동네임이 분명한데 웬지 우리 동네 같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정체성없이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변화엔 사람도 주변 건물도 자연도 포함된다. 실제 서울은 메갈로폴리스이자 첨단도시로 매우 빠르게 바뀌고 있다. 서울을 고향으로 삼는 사람들 중 서울내 수십년전 그들이 자라고 태어난 지역의 경관이며 이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얼마나될까? 아마 산천을 제외하고 몇개의 건물이라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매우 반가울 것이다. 이러니 고향같지도 동네같지도 터전같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문헌학자인 김시덕이 쓴 '갈등 도시'는 서울에서 직접 살아가는 도시민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자본의 논리로만 모습을 변모해가는 서울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김시덕이 보기에 서울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우선 행정의 연속성이다. 지금의 서울은 조선의 한양과 일제시대의 경성, 그리고 광복 이후의 현대 한국의 서울의 연속성상에서 생성된 곳이다. 그 과정에서 매우 크게 확대되었고, 지배주체도 바뀌었지만 놀랍게도 행정의 연속성이 발견된다. 우여 곡절끝에 완성된 경인 아라뱃길은 원래 일제가 기획했던 것이었고, 서울, 경기지역의 본래 군부대의 위치는 일본군-미군-한국군이 바통을 이어 주둔했을 뿐 그 위치가 같다.  

 또 다른 특성은 도시 곳곳에 갈등이 산재한다는 것이다. 김시덕은 시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지질학의 지층과 비슷한 개념으로 땅에 오래된 지층이 순서대로 켜켜이 쌓이는 것처럼 도시도 과거의 모습을 여러형태로 간직하며 이것이 현대의 모습과 공존한다는 것이다. 실제 강북의 사대문안 원심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은 과거 경기도의 농촌지역이었다.(이는 강남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서울에는 본래 그 지역을 터전으로 삼던 농민과 문중세력,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며 이후에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세력과 그 후손들, 그리고 개발이익을 위해 들어온 새로운 세력들이 재개발, 재건축을 두고 팽팽히 대립한다.

 세 번째특성은 보존의 편혐함이다. 서울은 아직 상당히 많은 과거의 흔적인 도시화석을 곳곳에 갖고 있지만 이는 개발 논리와 거주를 위해 빠르게 철거되고 있다. 상당한 거주 수요때문에 이런 개발은 피하기 어려운데 그럼에도 일부 유의미한 것을 역사적으로 보존하여 과거의 모습과 현대의 모습을 공존시켜가야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서울은 개발과정에서 보존하는 유산도 매우 적지만 그 보존의 대상을 조선시대 왕가와 양반들만의 흔적만으로 삼는 것이 또 문제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이나 근현대 노동자의 삶의 흔적이 담긴 곳에 전혀 보존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시대적으로도 오로지 조선에만 국한된다. 

 마지막 특성은 서울의 특권의식과 경계지역들이다. 서울은 현대 한국의 수도로서 특별시로 지정되고 상당히 많은 이권을 누려왔다. 주요 특권중 하나는 서울을 거주 및 상업지역으로만 개발해가면서 주요 필요시설들을 외곽으로 밀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요양원이나 석유비축기지, 물재생센터, 고아원, 군사시설, 화장장 등이 해당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처사에 저항이라도 하는듯 경기도의 도시들은 이런 시설들이 자신들의 지역내에 위치함에도 하나같이 시설 이름 앞에 '서울'이라는 두글자를 붙였다. 서울이 아닌 경기도임에도 서울이름이 붙은 이런 류의 시설이 유독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 구체적 지역으로 들어가본다.


1. 봉천-신림동

이 지역은 내가 나고 자라 성장한 지역이라 좀 더 재밌게 본 부분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고 이사하면서 지역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전히 지역에 사는 친구들에게 동이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신림동은 무려 10개가 넘는 동이 있었고 봉천동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들의 이름이 모조리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동은 법정동과 행정동이 있는데 법정동은 각종 법규로 규정한 동이고 행정동은 법정동을 쪼개거나 붙이는등 조정을 해서 실제 현실에 맞게 바꾼 것이다. 즉, 봉천동과 신림동 지역은 법정동의 이름을 유지하되 행정동의 이름만 바꾼 것이다. 

 봉천동과 신림동은 서울의 많은 지역이 그러하듯 초기 철거민이나 도시 이주민등 빈민들로 형성된 지역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남부순환도로라는 간선도로가 개통되고 지하철 2호선이 지나고 하천이 복개되고 서울대학이 들어서 고시촌이 생기며 그 이미지가 서서히 변화했다. 그리고 이름의 변경은 이런 지역의 계급적 변경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 신림동이란 이름은 고시촌이 주는 좋은 이미지로 인해 남은 반면 봉천동의 이름은 빈곤 이미지로 인해 완전 사라졌다고 한다. 


2. 파주와 고양시의 미군위안부들

 파주와 고양시는 넓어서인지 도시의 중심이 하나가 아닌 여러 곳에 산재한 느낌이다. 하지만 과거 전체적인 무게중심이 동쪽에 있었다면 지금은 모두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파주와 고양은 원래 한반도의 중앙지역이었지만 분단으로 인해 남한의 최북단 변경지역이 되고 많다. 때문에 넓은 평야지대로 인해 개발이 용이했음에도 오랫동안 군사적 이유로 방치되어 왔다. 실제 일제는 인천과 서울을 잇는 서남라인의 개발을 중시했었다. 하지만 한국전 이후 한국정부는 군사적 방어의 이유로 개발이 쉬운 서쪽대신 고양-은평-강북-강남-성남을 잇는 서북동남라인을 개발했다. 지금은 이 지역이 모두 개발되어 편리해보이지만 경부고속로만 타고 이지역을 이동해봐도 얼마나 많은 터널과 산들이 존재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분단 이후 1966년까지 파주에는 미국부대가 주둔했고 기지촌만 38곳에 달했다. 당시 미군위안부 여성만 4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책에선 미군위안부란 용어를 쓰는데 일본군 위안부처럼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강제적이고 비인권처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시골에서 많은 여성들이 취업알선이나 다른 일자리인줄 알고, 혹은 인신매매등으로 미군위안부가 되었다. 이후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았고, 정부의 입김도 상당히 작용해 어쩌다 탈출해 경찰서로 갔음에도 경찰자체가 한패라 다시 끌려가는게 다반사였다 한다. 특히, 기지촌 여성들은 매번 성병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았는데 감염이 확인되면 강제로 페니실린 주사를 투여받았다. 부작용이 매우 강해 건강에 치명적 손상을 입거나 이로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미군위안부란 용어가 충분히 사용된만한 것이다. 

 하여튼 1971년 미 7사단과 1군단이 철군하면서 기지촌은 그 기능이 사라져 크게 쇠퇴한다. 그 유명한 용주골도 이 때 쇠퇴하는데 영업대상을 한국인으로 바꾸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간다. 이후 일산신도시가 개발되고 서울지역에 성매매와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집창촌이 서울외곽으로 튕겨나가 용주골은 어처구니없게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3. 을지로

어릴적 지하철을 타며 을지로가 뭘까 무척 궁금한 적이 있다.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책에 의하면 을지로는 글자 그대로 길의 이름이다. 이 길은 무척 유서가 깊어 저자는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까지도 그 유서가 이어질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을지로는 지금의 서울시청에서 시작해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 근처 한양 공고에서 끝나는 길의 남북쪽 블록이며 서울의 구도심인 사대문 안 지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4개의 큰 길 가운데 북쪽으로는 종로, 남쪽으로는 마른 내로와 퇴계로 사이에 놓인 곳이다.

 이중 을지로3-4가는 매우 유서가 깊은데 이들이 현대적 면모를 같게 된 것은 일제시대다. 일본인들이 19세기 말부터 한국은 침탈해오며 청계천 남쪽에 거주하며 그 세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안을 느낀 한국인들이 울타리를 치듯 개량한옥을 대거 지었다. 하지만 일제시대 이후 2차대전중 미군에 의한 경성폭격 가능성이 제기되자 대규모 화재를 피하기 위해 울지로3-4가를 중심으로 종로부터 충무로 사이의 좁고 긴 구간의 목조주택을 철거했다. 화재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련된 공간에 광복후 세운상가, 청계상가, 삼풍상가, 진양상가들을 들어서게 된다. 


4.강남

 강남은 강남, 송파, 서초 3구를 말하지만 성남분당과 판교, 용인수지, 수원광교, 화성동탄까지를 확장 강남으로 보기도 한다. 강남지역은 본래 주거지로 개발되어서 서울에서 가구수가 가장 많고 인구서도 많으며 지역도 생각보다 넓다. 최근의 이미지로 고급 고층 아파트가 빽빽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 비율이 절반 이하이며 자연부락과 단독주택, 빌라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한다. 

 강남엔 세 가지 시층이 있는데 농촌시절의 강남 모습을 드러내는 구마을과 서울의 경계지로 강남에 형성된 과거 빈민촌, 그리고 영등포의 동쪽인 영동이라 불리며 영동개발시기 지어진 단독주택과 주공, 시영아파트, 시영주택들이 두 번째 모습, 마지막은 지금의 모습으로 주류가 된 고급 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 고층건물들이다. 

 강남은 본래 농촌지역인데 뽕나무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실 배나무가 훨씬 많다. 이는 강남지역에서 뽕나무는 조선시대에 재배되었고, 현대에들어서는 배나무가 재배되었기 때문이다. 송파구 풍납동에는 의의로 삼표 레미콘 공장이 있는데 이 업체는 레미콘 1-2위를 다투는 업체다. 이는 서울근접성에서 얻는 경쟁력으로 가능한데 강남지역 주민의 반대로 업체의 이전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강남은 애초 사대문 안 원도심과 일제시대 개발한 영등포와 더불어 서울의 3대 도심으로 기획되었다. 때문에 공업, 광업기능보다는 거주 상업기능을 우선시하였는데 이런 강남에 레미콘 공장이 있다는게 무척 의외였다.

 강남은 박정희 정권때 개발되었느데 그 이유는 안보였다. 북의 공격시 강북에 집중된 서울인구의 방어가 어려웠기에 방어가 손쉬운 한강 이남 지역에 강북의 인구를 이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때문에 강남엔 과거에 만들어진 안보시설이 상당히 있는 편인데 비싸기로 유명한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내부 곳곳에 군사용 벙커시설이 설치되었다는 것이 일례다. 

 성남은 과거 이름처럼 넓었던 광주의 일부로 광주대단지로 인해 형성된 도시다. 원래 도시빈민들은 대개 일용직으로 일하고, 그들의 일은 대개 도심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들은 쪽방같은 곳을 감수하면서도 도시에 거주한다. 서울은 개발과정에서 철거민이나 수재민, 빈민들을 외곽으로 쳐냈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대단지가 생겨난다. 하지만 위와 같으 이유로 빈민들은 다시 도심으로 돌아갔고, 이들이 떠나면서 남긴 토지에 대해 복잡한 부동산 거래가 일어나며 정부가 이를 규제한다. 그과정에서 시민 봉기가 1971년 일어났고 이를 정리하고 주민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탄생한 것이 성남이다. 

 용인은 더 재밌다. 놀랍게도 용인은 일제시대 일본제국의 수도 후보였다. 물론 다른 두 곳이 일본본토이고 한 곳이 용인이라 가능성은 높아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용인이 국토 중앙부에 위치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지역의 문화수준이 높고, 기성도시와 적당한 거리에 있기에 새로운 후보로 삼았다고 한다. 


이 책은 정리한 지역 외에도 서울의 다른 전 지역과 서울권으로 분류되는 경기도의 주요 도시들을 다뤘다. 서울이 확장하면서 철거민이나 빈민, 수재민등 기존 주민과 혐오시설을 경기도로 밀어내며 확장한 것, 그로 인해 애매한 경계지역에 혐오시설이 서울의 이름을 붙이고 어색하게 남아있는 것들, 개발의 논리만으로 서민의 모습이 남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잘 되어야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 그리고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이 지역을 자신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일수 있지 않을까?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부동산 폭등에만 정치권이 집중하며 이런 문제는 모두 뒷전인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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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수업 (양장)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우리 집엔 대충 1000권 책이 있다. 결혼하고 집이 생기고 서가도 하나 둘 들여놓으면서 마구 채워넣었다. 그 땐 빈 서가를 채울 욕심에 책 구매에 돈도 많이 썼지만, 막상 책을 고르는 눈은 사실 별로 없었다. 그저 신간이라면 마구 샀던 것 같다. 그러다 서가가 다 들어차고, 마누라 눈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심지어 이삿짐 센터 눈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짐도 별로 없는 집인데 책 땜에 이사 단가가 높아지곤 했다. 사실 내가 들어보아도 책은 제법 무겁다. 특히, 한국책은. 그래서 전자책으로 눈을 돌렸다. 크레마란 것도 사고 가상의 서가에 책을 채워넣었다. 이것도 첨엔 꽤 재밌었다. 근데 불만족스러웠다. 보고 싶은 책이 다 전자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격이란것도 생각보다 싸지 않았다. 초기엔 반값도 많이했고 쿠폰도 많았는데 다 사라졌다. 거기에 무엇보다 인간동물의 소유욕을 제대로 채워줄 물성이 부족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욕심인게 냉정하게 마음 먹고 헤아려보니 천 권의 책 중 막상 내가 읽은 책이 겨우 60-70%에 불과했다는 것이다.(물론 중고로 처분한 것도 제법 되지 그것까지 넣으면 비굴하게 수치를 3-4%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지라 다행히 장르에 따른 차별은 없었다. 전자책도 비슷했다. 전자책은 한번 보면 집중적으로 보지만 안보기 시작하면 계속 종이책만 보다보니 이런일이 생겼다. 있던걸 소비해야한다는 마음이 드는데 그래도 신상이 계속 나오니 유혹을 떨쳐내기 쉽지 않다. 마누라가 서가 수를 제한하지 않았다면, 집이 저택마냥 컸다면 이 소유욕을 계속되었을 것 같다.

 하여튼 이 책 작가수업도 오래묶은 책을 꺼낸 것이다. 이유는 재고를 처리해야하는데 일단 쉬워보여서랄까. 책은 무려 2010년 출간이다. 그것도 오래되었다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사실 이 책은 아득히 오래전체 출간된 것이었다. 타자기가 나오는데 타자기 욕을 한다. 글을 원고지에 조용히 써나가야하는데 타자기의 기계소리와 당기는 소리 그 기계음이 글쓰기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컨디션과 기분전환, 여러 가지 이유로 타자기가 두 대는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 책은 기계라는 요소만 고려한다면 1980년대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물론 글쓰기엔 시대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을테니 제법 쓸만한 소리도 있었다. 진정한 독창성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에서만 나온다는 것. 봉준호 감독이 가장 세계적인게 가장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다. 그래서 모든 소설은 결국 자전적일 수 밖에 없는데 거기서 자신의 경험을 끊임없이 형상화하고 재결합해 꽤 긴 분량의 훌륭한 책을 이야기로 객관화해내는게 좋은 작가가 된다.

 작가에겐 네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글쓰기 자체의 어려움과 한 책 작가, 가뭄에 콩 나듯 쓰는 작가, 기복이 심한 작가다. 이건 현대에도 완전히 유효한듯 하다. 작가들은 한 번의 등단이 너무 어려우니 첫 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기화해버리는 듯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있다. 한 책 작가나 가뭄에 콩 나듯 쓰는 작가가 그러할 것이다. 장강민 작가도 당선합격계급에서 첫 작이 매우 훌륭하더라도 다음 작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진정한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무의식과 의식을 잘 활용하는 이중적 삶이 필요하다고 한다. 무의식은 작가의 감수성과 창작의 원천, 천진함의 근원이고 이를 시대와 사회에 맞추어 어른스럽고, 분별력 있으며 절제와 공정함으로 밀어넣는 것이 의식의 역할이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 감정, 사건, 장면, 성격과 관계의 의미를 모두 불러내서 글로 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식은 그런 무의식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자료를 관리하고 통합 추려내는 역할을 해야한다. 예를 들어 무의식이 작가에게 전형적인 인물, 전형적인 장면, 전형적인 감정반응등 모든 종류의 전형을 제시하면 의식이 그 가운데 예술 소재로 삼기에 너무 개인적이거나 너무 보편적인 것을 쳐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단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내면 의식을 이를 철저히 분석하고 곁가지를 쳐내고, 다듬고, 내용을 보강하고, 눈길을 끄는 요소를 덧붙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의식이 이야기를 최종통합한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글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많은 글을 보고 읽고 쓰고 들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책은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 말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많은 말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자기만의 호흡은 무엇이고 자신에게 진정한 흡입력을 갖는 주제가 무엇인지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 대부분에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한다면 솔직하고 독창적이며 독특한 이야기를 구성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힘들게 이야기를 구성했어도 자신은 아직 글을 객관적으로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글을 완성한 후 당분간은 글을 한 쪽으로 밀쳐두고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야하며, 기력이 회복되고 긴장이 풀린 후에 마음이 초연해지만 다시 자신의 글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전엔 보지 못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작가의 재능이 다소 노력과는 관계 없어 보이는 무의식에만 의존한다면 작가는 타고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책은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되기엔 충분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차이는 이러한 재능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른 다는 것이다. 즉, 재능은 느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활용법이 늘어나는 것이며, 보통의 사람이 가진 재능의 양이 평생을 다 쓰더라도 쓰지 못할 만큼 양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되거나 글을 써보려고 제대로 마음먹어 본적이 없기에 이런 류의 책은 사실 개인적으로 크게 다가오진 않는다. 하지만 막상 그런 마음을 언젠가 먹게 될지도 모른다면 참 어려운 일일듯하다. 강원국은 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막힘없이 열 시간은 떠들 준비가 되어야 책을 쓸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한텐 그런 주제가 없다. 그리고 그럴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작가가 된다는건 참 힘든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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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0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20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20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 에게해에서 만난 인류의 스승 클래식 클라우드 9
조대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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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아테네 하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떠오른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철학 중심이던 그리스 철학을 인간중심으로 되돌려 놓았으며 플라톤은 그런 스승을 죽인 아테네의 현실정치가 싫어 그 해결을 위해 이데아 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스승을 역시 존경하면서도 정반대로 물질세계로 되돌아갔다.

 이런 기초적 사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테네 사람이고 그 지역의 중심인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변경인이었다. 그는 그리스 세계에서 아주 변방인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워낙 변방인지라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이라는 큰 전화도 피해간 지역이었다. 물론 페르시아 전쟁때는 상대편이 그냥 비껴진군했고,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선 적당히 중립을 지킨 것이 덕이긴 했지만 역시 중요한 지역은 아니었기에 이런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집안은 마케도니아 왕가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가 유서 깊은 의사 집안인데다 마케도니아의 왕인 아뮌타스 3세의 궁정의사이자 친구였다. 아뮌타스3세는 필립포스2세의 아버지로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할아버지다. 당시 그리스는 도시 국가의 황혼기였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끝났지만 전후에도 확실한 지배세력이 없어 서로 간의 갈등이 심했다. 이런 틈바구니를 마케도니아가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스 인들은 처음 마케도니아를 미개지역으로 무시했지만 그들의 군사적 행보에 공포를 느끼며 아테네는 반마케도니아 정서를 갖게 된다. 물론 친마케도니아 파도 있긴 했다.

 이런 분위기이니 그리스 아테네 사람도 아니고, 중심이 되는 폴리스 출신은 더욱 아니며, 친마케도니아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변경인으로 살아갈수 밖에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학교인 리케이온도 그래서인지 아테네 바깥쪽에 위치했다.

 아테네인들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중적 태도로 대했다. 마케도니아에 박살난 테베처럼 자신들이 망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면서도 반마케도니아 정서로 인해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유언이나 여러 기록에서 아테네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원히 존재하는 천체와는 달리 식물과 동물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식물과 동물이 천체에 비해 고결함이 떨어지는 존재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저 양자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았을 뿐이다. 이러한 자연적 실체의 복합성과 가변성은 대상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나타낸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그의 4원인설이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은 변화하는 동물이나 식물, 사람이 만들어낸 물체등에 해당한다. 질료와 형상, 작용인과 목적이 4원인이다. 질료는 물체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형상은 그 물체를 형상하는 원리이며, 작용인은 그 물체를 만든 것, 목적은 물체가 생겨난 이유나 원인이다. 집을 예로 든다면 집의 질료는 집의 건축 자재다. 목재, 콘크리트, 유리, 벽지등일 것이다. 형상은 집의 구조와 기능이다. 작용인은 집을 지은 건축가가 되며 목적은 집의 존재 원인인 편안한이나 거주, 안전등이 된다. 

 이 4원인설은 과거에 만든 그럴듯한 비과학적 설명으로만 여겨졌지만 책의 저자는 현대과학과 상당히 합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생명을 예로 든다면 생명의 질료는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된다. 형상은 물체를 발생시키고 분화시키는 설계도인 DNA가 되며 작용인은 부모가 된다. 그리고 목적인 생존과 번식이 된다. 어느 정도 현대생물학과 진화론을 설명할 수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경우 여성의 생리혈이 질료가 되며 남성의 정액에 드러있는 프네우마란게 로고스에 따라 인체를 발생시키는 작용인이 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인간과 물체가 생겨나는 원인에 대해서 파악했다면 살아가는 목적인 행복이 다음차례였다. 그리고 그 행복을 구현하는 방법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윤리학, 국가의 차원에서는 정치학의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이성에 의한 보편타당한 도덕 법칙을 찾는 것이 아닌 덕에 기초한 덕 윤리학이다. 인간으로써 적절히 살기 위한 여러 덕목이 있고 이런 덕목을 적절히 지켜나가는 것이 중용이다. 이 윤리학은 저절로 정치학과 연결되는데 개인의 중용이라는 것이 개인 스스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누가 무엇을 지배하는지에 따라 왕정과 참주정, 귀족정, 과두정, 혼합정과 민주정으로 분류하였고 어느 것을 특별히 옹호하지는 않았다. 다만 집단지성을 강조하였고 그러면서도 집단의 선택이 때론 파멸적 광기로 치달을 수 있음도 지적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혼합정치의 운영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가 참고한 솔론처럼 모든 시민에게 민회와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제한하는 견해를 옹호했다. 

 책을 보면서 어설프게 알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삶에 대해 아주 조금 더 알게 된 느낌이다. 저자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그리스를 직접 방문해 주요 사진을 수록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부분도 좋았고, 설명과 삶이 적당이 실려 있어 가벼워 좋았다. 물론 저자가 진화생물학과 진화론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자꾸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부분이기도 했다. 

 지금의 그리스는 무척 힘든 시기라고 한다. 2001년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주력산업이 완전히 무너졌다. 관광산업과 일차산업에만 의지하고 있는데 국제무역질서에서 그렇듯 일차산업에 의존하는 국가는 싼 가격을 강요받고 이차산업이 강한 나라의 공산품을 비싼 가격에 사야 한다. 그리스의 상황이 딱 그러하다. 그래서 유럽연합 탈퇴를 원하는 국민들이 많은데 상위 소수의 기득권층이 연합유지상황에서 이득을 보고 있어 그 해결이 정치적으로 쉽지 않다고 한다. 과거 철학자들이 돌아와도 쉽게 해결되지 못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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