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 에게해에서 만난 인류의 스승 클래식 클라우드 9
조대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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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아테네 하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떠오른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철학 중심이던 그리스 철학을 인간중심으로 되돌려 놓았으며 플라톤은 그런 스승을 죽인 아테네의 현실정치가 싫어 그 해결을 위해 이데아 세계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스승을 역시 존경하면서도 정반대로 물질세계로 되돌아갔다.

 이런 기초적 사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아테네 사람이고 그 지역의 중심인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변경인이었다. 그는 그리스 세계에서 아주 변방인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 워낙 변방인지라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이라는 큰 전화도 피해간 지역이었다. 물론 페르시아 전쟁때는 상대편이 그냥 비껴진군했고,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선 적당히 중립을 지킨 것이 덕이긴 했지만 역시 중요한 지역은 아니었기에 이런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집안은 마케도니아 왕가와 각별한 사이였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가 유서 깊은 의사 집안인데다 마케도니아의 왕인 아뮌타스 3세의 궁정의사이자 친구였다. 아뮌타스3세는 필립포스2세의 아버지로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할아버지다. 당시 그리스는 도시 국가의 황혼기였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끝났지만 전후에도 확실한 지배세력이 없어 서로 간의 갈등이 심했다. 이런 틈바구니를 마케도니아가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리스 인들은 처음 마케도니아를 미개지역으로 무시했지만 그들의 군사적 행보에 공포를 느끼며 아테네는 반마케도니아 정서를 갖게 된다. 물론 친마케도니아 파도 있긴 했다.

 이런 분위기이니 그리스 아테네 사람도 아니고, 중심이 되는 폴리스 출신은 더욱 아니며, 친마케도니아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서 변경인으로 살아갈수 밖에 없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학교인 리케이온도 그래서인지 아테네 바깥쪽에 위치했다.

 아테네인들은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중적 태도로 대했다. 마케도니아에 박살난 테베처럼 자신들이 망하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면서도 반마케도니아 정서로 인해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유언이나 여러 기록에서 아테네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원히 존재하는 천체와는 달리 식물과 동물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식물과 동물이 천체에 비해 고결함이 떨어지는 존재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저 양자를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았을 뿐이다. 이러한 자연적 실체의 복합성과 가변성은 대상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나타낸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그의 4원인설이 등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은 변화하는 동물이나 식물, 사람이 만들어낸 물체등에 해당한다. 질료와 형상, 작용인과 목적이 4원인이다. 질료는 물체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형상은 그 물체를 형상하는 원리이며, 작용인은 그 물체를 만든 것, 목적은 물체가 생겨난 이유나 원인이다. 집을 예로 든다면 집의 질료는 집의 건축 자재다. 목재, 콘크리트, 유리, 벽지등일 것이다. 형상은 집의 구조와 기능이다. 작용인은 집을 지은 건축가가 되며 목적은 집의 존재 원인인 편안한이나 거주, 안전등이 된다. 

 이 4원인설은 과거에 만든 그럴듯한 비과학적 설명으로만 여겨졌지만 책의 저자는 현대과학과 상당히 합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생명을 예로 든다면 생명의 질료는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된다. 형상은 물체를 발생시키고 분화시키는 설계도인 DNA가 되며 작용인은 부모가 된다. 그리고 목적인 생존과 번식이 된다. 어느 정도 현대생물학과 진화론을 설명할 수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경우 여성의 생리혈이 질료가 되며 남성의 정액에 드러있는 프네우마란게 로고스에 따라 인체를 발생시키는 작용인이 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인간과 물체가 생겨나는 원인에 대해서 파악했다면 살아가는 목적인 행복이 다음차례였다. 그리고 그 행복을 구현하는 방법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윤리학, 국가의 차원에서는 정치학의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이성에 의한 보편타당한 도덕 법칙을 찾는 것이 아닌 덕에 기초한 덕 윤리학이다. 인간으로써 적절히 살기 위한 여러 덕목이 있고 이런 덕목을 적절히 지켜나가는 것이 중용이다. 이 윤리학은 저절로 정치학과 연결되는데 개인의 중용이라는 것이 개인 스스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누가 무엇을 지배하는지에 따라 왕정과 참주정, 귀족정, 과두정, 혼합정과 민주정으로 분류하였고 어느 것을 특별히 옹호하지는 않았다. 다만 집단지성을 강조하였고 그러면서도 집단의 선택이 때론 파멸적 광기로 치달을 수 있음도 지적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혼합정치의 운영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그가 참고한 솔론처럼 모든 시민에게 민회와 재판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제한하는 견해를 옹호했다. 

 책을 보면서 어설프게 알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삶에 대해 아주 조금 더 알게 된 느낌이다. 저자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그리스를 직접 방문해 주요 사진을 수록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부분도 좋았고, 설명과 삶이 적당이 실려 있어 가벼워 좋았다. 물론 저자가 진화생물학과 진화론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자꾸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불편한 부분이기도 했다. 

 지금의 그리스는 무척 힘든 시기라고 한다. 2001년 유럽연합에 가입한 이후 주력산업이 완전히 무너졌다. 관광산업과 일차산업에만 의지하고 있는데 국제무역질서에서 그렇듯 일차산업에 의존하는 국가는 싼 가격을 강요받고 이차산업이 강한 나라의 공산품을 비싼 가격에 사야 한다. 그리스의 상황이 딱 그러하다. 그래서 유럽연합 탈퇴를 원하는 국민들이 많은데 상위 소수의 기득권층이 연합유지상황에서 이득을 보고 있어 그 해결이 정치적으로 쉽지 않다고 한다. 과거 철학자들이 돌아와도 쉽게 해결되지 못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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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하듯이 쓴다 - 강원국의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법
강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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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국의 글쓰기'를 작년에 보았다. 무척 인상적이었다. 큰 기대 안한 책이었는데 글쓰기에 대한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말하기 책이다. 물론 쓰기에 대한 책인데 쓰기를 말하기처럼 해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때문에 제목이 '나는 말하듯이 쓴다'이다. 매일 출퇴근하며 듣는 KBS라디오프로그램 중간 자투리 시간에 강원국씨가 나와서 말하기에 대한 내용을 주제별로 짤막하게 설명하는데, 그때 들은 내용 중 일부가 이 책에 등장해 다시 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책에는 글쓰기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오랜 경험과 생각도 녹아들어 있어 재밌었다. 가령 부하는 다섯 수준이라는데 상사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대로 쓰는 사람, 상사가 말하는 것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사람, 상사가 말하는 것의 의중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 상사의 말과 겨루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 합의안을 도출하는 사람, 상사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이다. 이중 내가 어디에 들어갈까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상황에 딸 3-5의 스펙트럼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신을 인정받고 동의받고 싶어하지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존재라 3-5는 힘든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비판할 때도 조심해야 한다. 강원국은 비판하더라도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틀렸다가 아니라 나와 다르다로 접근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을 밝히고,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말한 후, 내 주장의 약점이나 단점을 고백하고, 상대의 주장을 소개하며, 상대의 주장을 평가하고, 나와 상대의 주장을 절충하여 결론을 내는 글쓰기가 좋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은 토론 상황에서도 중요하다. 토론은 우선 여러 이점이 있는데 다양한 생각이 섞여 창조가 발생하고 복합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위기의 징후를 포착하고 예방한다. 또한 내 생각을 여러 사람에게 검증받고 참여의식, 책임의식이 생겨나며 중지를 모으고 공감대를 형성하여 합의와 통합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토론이 긍정적이려면 무엇보다도 상대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강원국은 항상 상대방이 나보다 나은 의견을 가졌다고 생각할 때 토론은 보다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고 말한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회의에 대한 의견도 인상 깊었다. 한국의 모든 조직들은 아마도 회의를 할텐데 실제 회의의 정의에 걸맞는 행위가 이뤄지는지는 상당히 의심스럽다. 회의는 주재자 빼곤 거의 모두가 싫어할텐데 아마도 많은 시간 소모와 에너지 소모, 그에 비해 낮은 생산효과, 무엇보다도 수평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회의는 참가인원*업무단가(시간당 급여)*희의시간이라는 큰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회의는 효율적이어야하고 생산적이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회의의 요건은 이렇다.

 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전 연락과 준비는 충분한가

 제 시각에 시작했는가

 제 시각에 끝났는가

 회의 시간은 적절했는가

 꼭 필요한 사람만 참석했는가

 전원이 발언했는가

 회의의 목적은 달성되었는가

 결정사항을 실행할 방법과 주체가 정해졌는가

 회의록을 공유했는가

 이 회의가 반드시 다음에도 꼭 필요한가


이 요건을 내 직장에서의 통상적 회의와 비교해보니 캄캄했다. 간신히 1-2개만 충족하는 수준이다. 아마도 한국 직장에서의 회의 대부분이 5개 미만 정도만 충족하지 않을까. 우린 정말 거대한 시간낭비를 하는게 아닐까.


 직장 생활의 절반은 상사다. 상사로 인한 괴롭힘은 군대에서 끝인줄 알았것만 직장은 더하다. 그래서 상사와의 관계가 무척 중요하다. 이는 나의 능력과는 별개인 듯 하다. 이유는 충분한데 관계가 좋아야만 상사의 의견이 나에게로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관계가 나쁘면 상사에게 내 생각을 전할 기회도 없어지게 되며 그런 기회가 없으면 상사는 내 생각에 익숙치 않으니 거부당하거나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상사 이외에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한데, 좋은 관계를 만드는 말하기 방법으로 장점을 말하기, 차이점보다 공통점에 주목하기, 원인을 추궁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제시하기, 빼기보다는 더하기, 모든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욕심부리지 않기, 유식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성격 좋은 사람이 되기이다. 이중에 몇 개나 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니 암담하다. 

 마지막으로 강원국이 모셨던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다. 김대중 대통령은 위기에 봉착할때 세 가지를 생각했다고 한다. 우선 이 시련은 영원하지도 않고 모든 것은 언젠간 지나간다이다. 그리고 그 끝이 왔을 때 스스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시련에서 자기 파괴적이거나 무너지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은 그 위기에서 기회를 찾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위기에 지도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를 말했다고 한다. 우선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고자 불을 끄는데 급급해 후일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문제를 만드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 위기를 부풀리지 않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권에서 이것들을 잘 지키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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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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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10년의 무게가 예전 같진 않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고 고작 80년 정도를 사는 한국인에게 10년은 무척 긴 시간이다. 그럼에도 처음으로 10년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 10년만에 다시 학교를 가게 되었을 때다. 내가 초중고를 다닐때와 별반 다를게 없는 것들을 그대로 배우고 있는 것에 상당히 놀란 적이 있었다. 많은 것이 짧은 시간안에 바뀌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있던 것이다. 그리고 엄기호를 유명하게 만든 이 책도 나온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간혹 나오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나 미니홈피 같은 용어만 제외한다면 책에서 세월을 거의 느낄수 없었다. 그만큼 책에서 저자가 문제 삼는 부분에 대한 개선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많은 문제는 대부분 자본에서 기인한다. 

 책은 대학, 정치, 사랑, 학교, 돈을 주제로 학생들과 함께 한 강의에서 그들의 글을 주제별로 실고 저자가 거기에 썰을 푸는 형식이다. 시작은 요즘 기성세대들의 현 세대에 대한 부정이다. 사실 현세대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이미 10년전 책이니 말이다. 하여튼 지금도 그러한데 기성세대는 우파같은 경우는 현세대를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다고 폄하하고, 좌파는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자각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는 각 세대가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하에 형성된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산업화세대라 할수 있는 보수우파는 배고프고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굳은 일을 해가며 가난해서 탈출하며 부를 쌓았고, 군사독재를 경험한 좌파는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상황에서도 독재를 타파하고 민주화를 이뤄낸 경험이 있다. 하지만 현세대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국민소득 1만불 이상인상태에서 자라났으며 민주화도 태어나면서 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반면 신자유주의의 본격화로 부모세대부터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꾸준히 겪어왔고, 빠른 세태변화로 뭐하나 안정적이고 보장된 것이 없는 상태로 성장했다. 때문에 그들에겐 불안함으로 개인이 우선시되고, 생존이 우선시되며 정치적 과제보단 자신의 경험과 재미가 우선한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그들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현세대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기성세대의 비판은 자신들만의 성장방식을 잣대로 들이댄 것으로 옳지 못한 일이 된다. 때문에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단순한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대한 조건에 대한 지식과 그들의 감수성과 나의 감수성 사이의 거리에 대한 성찰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교육에 대한 비판도 무척 뼈아프고 지금도 유효하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성장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교육은 가장 성장에 관심이 없다. 이는 한국의 학교가 성장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 아니라 대학을 가기 위한 도구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보니 한국의 학교는 우정은 사라지고 폭력만 난무하는 정글과 같은 공간이 되었는데 한국사회는 이점도 애써 눈을 감는다. 많은 기성세대들이 학교공간에서의 폭력과 경쟁을 잊고 애써 추억만을 기억하려 하는데 사실 동갑이고 같은 반에 일년여를 함께 있었다고 하여 모두를 친구라고 칭하는 것도 우습다. 입시를 위해 경쟁하고 서로간의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서 같이 있었다고 모두 친구였을까? 그냥 같은 반에 있었던 사람을 사회적으로 친구라고 부른다고 보는게 맞는듯하다. 거기에 학교는 인간이 매우 권력을 추구하는 동물이기에 자연스레 매우 권력적 공간이다. 그리고 그 권력은 공부를 잘 하는 사람과 주먹이 강한 사람이 차지한다. 그리고 서로 무척이나 대비되는 양 집단은 권력의 속성을 서로 잘 안다는 특성때문인지 서로를 인정하고 침범하지 않는다. 어디 일진이 일등 건드리는것을 보았는가? 심지어 보호도 한다. 그리고 공부만 잘하는 일등도 일진의 폭력과 비윤리성에 무관심한건 마찬가지다. 이처럼 조선시대 동반과 서반의 연합은 지금도 통한다.

 가족에 대한 분석도 재밌다. 저자는 한국의 가족이 위기에 빠진 이유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노동을 하지 않고 그저 쉬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가족에 노동이라니 뭔가 이상해보이지만 저자는 가족이야말로 누군가의 화를 참아내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생각해주는 감정노동이 가장 필요한 곳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감정노동은 노동중 가장 많은 정신에너지를 요하는 것이다. 한국가정의 문제는 다른 모든 구성원이 가족의 유지를 위해 그 감정노동을 엄마에게만 기대하고 요구하고 그를 착취했다는 것이다. 흔히 가족의 문제를 소통의 부재에서 찾는다. 하지만 저자는 소통도 만사형통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정에서의 소통이란 것 자체가 마치 학교에서 권력지향적이고 그리 선하지 않은 개인들을 친구라는 용어로 미화및 이상화한 것처럼 화목하고 착하며 이상적인 가족구성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가정의 구성원은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의 어설픈 소통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거나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뭘까. 저자는 질문의 공유와 공감능력의 향상을 해결방법으로 꼽는다. 질문의 공유와 관련해서는 들릴 권리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흔히 말할 권리를 중요시하지만 말할 권리는 결국 누군가 듣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즉, 말할 권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들어줄 의무를 가진 누군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한국사회의 문제로는 서로 다른 답변만 주장한다는 것인데 그것보다는 같은 질문을 공유하는 것을 권한다. 질문을 공유하면 서로간의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더 많은 다양한 답을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감은 인간을 어쩌면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공감하지 않는 인간은 서로를 분류하고 서열화한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전쟁과 살상이 가능했던 것은 서로를 공감하지 않을 만한 대상으로 분류하고 서열화 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인의 공감능력은 자본에 의해 수동적이고 철저하게 위계화되어 있다. 어디서든 누구를 만나던 한국인은 그가 가진 사회적 자본이나 진짜 자본으로 그를 분류하고 위계화한후 대한다. 책에는 10년전 고대생이면서 학교를 포기한 이의 글이 나오는데 저자가 함께 공부한 '원세대'(연세대 원주캠퍼스)학생들은 그것을 보면서 사회의 충격적이고 경탄하는 시선과는 다르게 조소와 조롱, 자괴감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 고대생의 학벌포기선언이 이슈화되었던 것 자체가 학벌이란 강력한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며 그것을 갖지 못한 자신들의 같은 선언 따윈 전혀 주목받지 못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공감능력의 회복은 중요하며 우리에겐 판단과 심판의 언어보다는 공감하는 생활의 언어가 필요하다는게 저자의 생각이었다.

 미니홈피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로, 대통령은 이명박에서 문재인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10년은 많은 것을 바꾸었지만 그럼에도 책을 보며 시대가 많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사회의 문제의 근간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그런게 바뀌어야 좀더 사람사는 사회와 개혁이란 것이 이루어진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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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글감옥 (리커버 특별판)
조정래 지음 / 시사IN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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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 작가 조정래가 지난 수 십년간 우리에게 남긴 대하소설이다. 간혹 사람들은 이 소설들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부채성격을 가진 작품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럴만한 것은 이 소설들이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부분들을 관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8년, 한국전쟁, 광주민주화운동, 근대화 과정 등이다. 

 소설을 잘 보지 않고 독서편력도 짧은 난 이 세 작품을 보지 않았다. 사실 조정래 작가의 소설을 하나도 보지 않았기에 대표적을 못 본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겠다. 태백산맥을 오래전 영화로 접하긴 했지만 책에 따르면 영화 태백산맥은 감독이 무려 임권택임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중반이라는 한계 때문에 일그러진 영화였다. 

 그러면서 정작 조정래의 본 글이 아닌 그의 인생과 사상이 담긴 이 책을 보게 되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의 작품을 봐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분단국가이기에 작가라면 그것을 반드시 다뤄야 하는 상황, 그리고 작가라면 반드시 진실을 다뤄야한다점, 소설 쓰기의 어려움과 정신적 피폐함과 환희 그리고 조정래 개인의 삶에 대해 느낄수 있었다. 

 책은 대학생들과의 대담을 엮은 것인데 그들의 질문에 대해 작가가 답을 한 것을 각 장으로 구성했다. 먼저 소설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조정래는 소설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 탐구라고 한다. 그래서 소설엔 인간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형상화되는데 당연히 모국어를 쓰는 만큼 세상의 모든 작품들은 그 모국어의 자식이 된다. 그리고 언어는 그 민족의 색채가 가장 강한 것이기에 음악 미술보다도 더욱 강한 민족적 색채를 갖게 된다. 그래서 소설은 그 민족의 전통, 정서, 풍습, 습관등이 다채롭게 펼쳐지며 감동까지 주기에 다른 책보다 더 그 민족의 고육한 특성이나 문화전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처럼 문학은 민족적 색채가 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전세계적인 공감을 얻는다. 그것은 문학이 전 인류의 이상과 행복,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옹호하고 구현하는 보편적 미덕이라는 최소공배수와 최대공약수를 갖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글을 잘 쓰는 방법으로 조정래는 익히 알려진 다독, 다상량, 다작을 제시했다. 별다른 왕도가 없고 타고난 재능에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다독과 다상량, 다작을 4:4:2로 하라고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읽은 시간만큼 그 작품과 사상에 대해 꾸준히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써야한다는 것이다. 무턱대고 쓴다면 자신이 비어있기에 역시 좋은 작품은 나올수 없다는 것이다. 모방역시 좋은 글을 쓰는 좋은 방법인데 다만 한 작가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한다. 한 작가에게만 몰두하면 그 사람의 아류가 될 뿐 자신만의 문체가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쓰려면 적어도 500권의 책을 읽기 전에는 펜도 들지 말라고 한다. 500권은 세계문학전집 100권, 한국문학전집100권, 중단편소설 200권, 그외 기타 역사, 사회과학 등의 지식 도서 100권이다. 

 이 책들을 보면서 왜 그런 소재를 선택했고, 주제와 소재는 효과적으로 조화되는지, 주제의 형상화는 적절한지, 사건의 전개는 우연이나 조작적이지 않고 실감있고 필연적인지, 구성의 허술함은 없는지, 문체의 특성은 무엇인지, 인물들의 개성과 생동감은 있는지, 감각과 묘사는 특색있는지, 결말처리는 효과적인지, 소설로서의 성취도는 얼마인지를 모두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작가의 능력은 그 작가가 얼마나 많은 작품을 썼는지 보다는 얼마나 개성적인 인물을 창조했는지의 여부라고 말한다. 각 인물은 그 나름의 개성과 전형성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전형성은 그 역할, 그 사건, 그 상황, 그시대에 없어서는 안될 꼭 어울리는 인물로 전형성이 있어야 작품은 시대상을 반영하고 실제성을 부여하며 개성도 비로서 살아나게 된다. 또한 작품을 쓰면서 1인칭이 아닌 3인칭을 강조하는데 3인칭이 쓰기는 어렵지만 모든 인물들이 자율성과 개성, 전형성이 살아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조정래가 한국사를 관통하는 주제들을 소설로 다룬데는 우리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이 컸다. 그자신이 어려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목격했고, 그 아픔을 체화했다. 조정래는 무척 가난했고, 아버지가 신식 공부를 하기 위해 승려가 되었지만 일제가 우리 승려들을 일제식으로 결혼시켜 태어나게 되었다. 어려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을 목격해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친일청산의 실패와 독재, 빈부격차 등을 경험하며 그 사건들을 다루게 되었다. 그는 한국사의 민중을 괴롭히며 이득을 보는 무리들의 사건들에 대해 경악하고 분노했지만 소설 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의 담담한 어조를 보면서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로 사건을 다루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명백히 잘못된 사건에도 분노하지 않고 담담히 다루며 작가 자신이 진보적임에도 우익사건이나 우익인사에 대해서도 장점을 드러내고, 좌익에 대해서도 장점 뿐만 아니라 단점도 드러낸다. 영화 태백산맥에서도 지주의 친일파를 공격하는 장면도 많지만 좌익에 경도된 농민들에게 땅을 나눠주는게 좋아보이지만 자네가 열심히 일한 것을 모두 거둬들여 똑같이 나누는게 좌익이 하자는 이야기라고 농민에게 이야기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나오는 것도 그러한 일환이다. 

 그는 사회 운동으로 시민단체에 적극 참여할 것도 주문한다. 프랑스와 독일은 시민단체가 무려 5만개인데 한국은 2천 5백개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저도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려 정부로부터 활동보조비를 받는 형국인데 돈을 받는 시민단체가 어떻게 올바르게 권력 감시를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때문에 마땅히 시민으로서 공부하고 시대에 대해 알게 되었으면 시민단체를 하나 정해 같이 활동도 하고 활동비도 기부해야 진정한 민주주의로 갈수 있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정치권력이든 자본권력이든 권력의 속성상 감시하지 않으면 부패하고 전횡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민주주의는 꾸준히 관리하며 감시해서 완성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300페이지 정도로 보이는 두께였지만 막상 열어보니 450쪽이었고, 내용도 알찼다. 대담이기에 쉽게 읽을 수 있고 작가 조정래에 대해 알아가는 기쁨이 있다. 그는 매일 30매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자신과의 약속이고 이를 지키기 위해 주색잡기를 멀리하고 꾸준히 건강관리를 했다고 한다. 대단할 따름이다. 그의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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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13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정래 선생님 작품을 좋아하는 저로선, 닷슈님의 리뷰 감사하네요 ^^ 저는 조정래의 대표 대하소설 3개중의 태맥산맥만과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작품들 ( 정글만리, 풀꽃도 꽃이다, 천년의 질문)들을 읽었는데, 역사적인 사건들을 소설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로 만들어내신 능력에 감탄하면서 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등단 50주년 행사 발언때문에 조정래 선생님에게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그분이 이루신 업적들에 대해서는 인정해드리고 싶습니다.

닷슈 2020-11-13 16:02   좋아요 1 | URL
조정래 작가의 책을 많이 읽으신걸 보니 대단합니다. 등단50주년 행사 발언은 물의를 일으키긴 했지만 저는 큰 문제 없는 소신발언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의 큰 문제에 대해서 누군가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죠. 항상 언론이 균형적 시각이랍시고 명백히 잘못된 쪽과 옳은 쪽이 다툼을 벌일때 억지로 가운데에 있으려는 것도 웃기고, 많은 언론들이 억지로 침소봉대하여 문제를 만들려는 것도 웃기다 생각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11-13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태백산맥> 읽고 훌륭한 작가라고 느꼈는데, 본인 며느리에게 시아버지 책을 읽고 전부 필서를 하라고 한 건 왜 그랬을까 하고 한 번 이유를 더 생각하게 만듭니다.

han22598 2020-11-17 05:04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얘기 듣고 생각했어요. 왜 그러셨을까? 혹시 며느리만 필사 시키신건 아니겠죠 ㅠ

패스파인더 2020-12-09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까지는 재밌게 읽었는데, 정글만리부터는 도저히 못읽겠더라고요.
작가가 변한건지 제 취향이 바뀐것인지, 20대시절 저에게 박완서 박경리 씨와 함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우리나라 작가입니다. 필사는 아들에게도 시킨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닷슈 2020-12-09 17:43   좋아요 0 | URL
앞시리즈를. 모두 보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스토리 전쟁 - 이야기 종결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조나 삭스 지음, 김효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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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지상파 방송국들은 대규모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 본사들도 그렇고 지방방송국들은 더해 존폐의 위기에 놓이고 있는데 이는 방송환경의 거대한 변화 때문이다. 저자는 1450년 구텐베르크의 활자성경 인쇄시대 후 라디어 tv에 이르는 시대를 방송전통시대라 부른다. 이 시대는 인쇄기나, tv 송신기, 방송카메라에 이르는 방송장비들이 매우 고가이다. 때문에 소수의 관리인이 어떤 정보를 내보내고 어떤 정보를 제거할지 결정하는 일방적 시대였다. 그래서 지도자, 인쇄업자, 방송국 피디, 경영자 등 관리인의 허락을 받는 것이 방송이 넘어야할 큰 장벽이었고, 이를 넘어서면 일방적인 다수의 청중 확보가 가능했다.

 하지만 모바일 시대인 지금 이는 완전히 무너졌다. 유튜브와 인터넷 방송, SNS 등으로 누구나 거의 비용없이 그리고 누구의 간섭도 없이 청중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해졌다. 저자는 이를 디지토럴시대라 부른다. 최신기술로 인해 메시지들의 경쟁은 매우 심해졌고 적자생존법칙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가장 강하게 어필하는 메시지만 살아남는 과거의 구전전통과 닮았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이 구전전통시대와 비슷한 경쟁환경을 가져오다니 재밌으면서도 아이러니한 측면이다.

 하여튼 디지토럴 시대는 과거의 구전전통시대와 비슷하니 과거의 스토리 경쟁력을 갖고 이야기해야한다는 것이 이 책의 골자다. 스토리를 매우 강조하는데 스토리는 이야기꾼이 자신의 세계관을 대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인간 의사소통의 한 유형이다. 실존 또는 허구의 인물을 무대에 올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인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방법이다. 

 기업이든 환경운동가든, 정치가든 그들은 각각의 고유의 브랜드를 갖는다. 오바마의 브랜드는 아마도  Yes We can 이었을 것이다. 트럼프는 America first 이고. 하여튼 각각의 브랜드는 해설과 의미, 스토리를 갖는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이 브랜드들이 갖는 해설과 의미, 스토리는  당연히 충돌하고 갈등을 발생시킨다. 한국의 양정당이 갖는 브랜드도 그러하다. 때문에 승리하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스토리를 매우 잘 짜야한다.

 스토리를 만듬에 있어 피해야할 5가지는 허영, 권위, 위선, 허풍, 속임수다. 자신만이 최고라고 여기고 대중을 훈계하려는 태도는 허영, 권위, 위선과 관계한다. 과도한 지식을 내세우며 설명하려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스토리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진실성과 그에 상응하는 실천이 없다면 이는 위선에 해당한다. 그러한 브랜드는 결국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파산한다. 

 그렇다면 성공하는 스토리의 조건은 무엇일까? 구체성, 관련성, 몰입성, 인상적, 정서성을 갖춘 스토리다. 구체성은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를 스토리에 부여해 현실성을 제공하는 것이며 관련성은 스토리가 이걸 보는 청중인 나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관심을 가질테니 말이다. 몰입성은 등장인물의 경험이 청중인 나의 삶에 명확한 가치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인상적인 헥심메시지 자체가 인상적이어야 함이고, 정서적인 메시지가 인지적으로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느끼게 해야한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훌륭한 스토리는 현실적이고 청중의 삶과 직접관련이 있으며 변화의 필요성이나 문제의식을 느끼게 할만큼 인상적이어야 하고 마음을 울려야한다는 것이다. 

 책에는 이런 스토리를 구성하는 사례와 구체적인 방법이 나온다. 물론 실패하는 스토리도 나오며 그로인한 교훈도 제공한다. 디지털 시대에 각종 메시지가 범람하는 상황에서 메시지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나 보는 사람에게 의미있는 책이다. 다만 책이 좀 체계적이지 못하고, 중언부언하는 전형적 미국책의 느낌을 많이 들게한다. 여러 개념을 저자가 쓸데 없이 만들어내는 것도 미국책의 특징이다. 미국 저자들은 왜 이런걸 좋아할까나. 하여튼 유튜버가 되고 싶다면 한번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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