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로 맛보는 와삭바삭 프랑스 역사 이케가미 슌이치 유럽사 시리즈
이케가미 슌이치 지음, 김경원 옮김, 강혜영 그림 / 돌베개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는 과자와 음식, 패션 문화로 유명하다. 사실 이는 과다 포장된 것인데 프랑스가 국가차원에서 이 부분에서 독보적인 브랜드를 구축하도록 상당한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인근 국가인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는 오히려 프랑스보다 이 부분에서 나은 측면도 있어서 프랑스가 유럽에서 가장 났다고 외국인이 함부로 말하면 상당히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아시아도 마찬가지인데 서구인이 생각하기에 아시아의 간식과 음식, 패션, 문화 하면 일본을 가장 먼저 선두주자로 생각할 것이며 이렇게 된 데는 일본정부의 노력이 상당히 작용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들으면 한국인과 중국인은 납득을 할 수 없다는 듯 마찬가지로 무척 화를 낼 것이다.

 과자는 소금과 물과는 다른 측면을 갖고 있다. 소금과 물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재이기에 오래전 부터 국가권력이 강하게 수직적 지배를 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과자는 있으면 매우 좋고 없어도 죽지는 않기에 상대적으로 느슨한 문화적 지배 권력이 작용한다. 과자는 과거엔 그 재료를 수도사나 왕족, 귀족들만 구할 수 있어 무척 사치품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최고급 과자라할지도로 누구나 조금만 무리하면 구입할 수 있기에 과자는 민주적이다. 그리고 과자는 패션이나 사교모임처럼 지역 문화의 꽃이고 세련되고 섬세한 감각이 중요한 제품이다. 

 프랑스에선 과자가 태고적부터 주술과 종교적 제사에 사용된 듯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결혼식에 과자가 교환되었고 로마는 신혼부부가 과자를 봉헌하는 의식을 치뤘다. 프랑스 로렌지방에서는 층층히 올린 고프로 위에 공식적으로 첫 키스를 했고 브르뉴튜 지방에서는 청혼 때 과자를 보냈고 이혼할때도 보냈다. 과거엔 웨딩 케이크가 커야한다는 생각에 지름이 무려 1.5m에 달했다고 한다. 

 프랑스 인의 조상 프랑크 족과 게르만 족은 죽은 자에게 귀신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벌꿀이 들어간 과자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을 기독교 이후에도 유지되었는데 이는 기독교가 현지 문화와 관습과 어느 정도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대교황 그레고리우스 때 7대 악덕을 선정했다. 이는 오만, 탐욕, 음란, 분노, 대식, 질투, 나태로 과자를 이중 대식과 연관될 수 있어 어느 정도 견제를 받았지만 성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크게 제재되지 않았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에울로기아나 우블리라는 과자가 있었다. 이는 그리스 어로 축복을 의미하는데 공복에 먹었다. 수도사들이 식당에 모여 이것을 먹었는데 이는 그들의 종교적 인연을 의미했다. 우블리는 납작한 성체빵 오스티아와 유사했다. 오스티아는 이스트를 쓰지 않는 무발효 빵으로 화덕에서 얇게 구워 만들었다. 오스티아는 귀한 빵이었으므로 만드는 사람은 교회의 매서운 감시를 받았다. 사창가와 도박장 출입금지, 규정준수, 몸가짐이 조신하고 평판이 좋아야 했다. 우블리는 밀가루에 물과 와인을 더해 만들었다. 흰천으로 싸서 일부는 미사에 썼는데 영성체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먹는 한 단계 낮은 것이었다. 사제가 나눠주었으며 일시적 구원을 의미했다.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엔 아랍세계의 먹을 거리가 들어왔다. 설탕과 향신료, 오렌지, 레몬, 살구가 그것들이다. 콩피르와 잼, 설탕절임등도 들어왔는데 푀이타주도 전래되었다. 푀이타주는 밀가루에 올리브 유를 넣고 반죽해서 얇게 편 다름 셈세하게 여러 겹으로 겹쳐서 접는 것이었다. 펭페디스는 벌꿀과 밀가루로 만든 빵에 향신료를 듬뿍 넣어 만든 것으로 역시 아랍을 통해 들어왔다. 이 밀가루는 점차 호밀가루로 바뀌었다. 

 프랑스 과자는 아랍에 이어 이탈리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르네 상스 시기 이탈리아 식문화가 많이 유입되었는데 주요 인사들의 결혼과도 관련이 깊었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기 비약적으로 세련된 과자를 만들었다. 과일 파이, 잼, 과일 설탕 졸임, 누가등이 그들의 성과물이다. 이 때 들어온 것으로 파스티야주가 있는데 이는 잘게 부수어 전분을 첨가한 설탕에 콩과 식물에서 추출한 끈적한 분비물인 트래지켠스를 물에 녹여 섞은 반죽을 세공한 것이다. 마카롱은 달걀 흰자와 설탕, 아몬드 가루로 만든 것이고, 프랑니판은 우유, 설탕, 밀가루, 달걀, 버터를 가열해 만든 크림이다. 이들은 모두 카드린 드 메데시스가 프랑스로 시집오면 전파된 것들이다. 

 그녀는 스펀지 케이크도 전래시켰으며 이탈리아에서 젤라또도 가지고 왔다. 젤라또는 16세기 시작한 이탈리아 아이스크림이다. 당시 프랑스는 식사 시간에 고기도 맨 손으로 뜯었는데 그녀가 포크도 전수해줘 의례를 갖출 수 있었으며 향수와 양산도 전수되었다. 

 근대로 오며 카카오가 신대륙에서 전례되었다. 카카오 콩이 건조와 발효등을 거쳐 가공되면 코코아가 된다. 코코아를 뜨거운 물에 부어 녹인게 코코아차이며 코코아를 갈아서 코코아 매스로 만든 다음 그것을 압착 분리해 지방을 분리한게 코코아 버터다. 반죽한 코코아 매스에 설탕과 우유를 섞은 후 굳힌 것이 쵸콜릿이다. 

 종교전쟁은 유럽 국가들 간의 미식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구교인 대륙의 카톨릭 국가들은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애착을 갖는 것이 기독교 문명형성에 기여하는 훌륭한 행위라 생각하고 이를 장려하였다. 반면 영국이나 독일의 신교는 요리와 음식은 기아를 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식욕의 증진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는 훌륭한 식문화를 자랑하는 반면 독일과 영국이 상대적을 여기서 부진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양 지역이 지리적 차이와 기후로 인해 접할 수 있는 식재료에 상당한 차이가 나기도 한다. 

 근대 들어 설탕 소비량이 급증한다. 때문에 노예 무역이 필요했는데 설탕의 재배를 위해선 대규모의 사탕수수 농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근대 유럽의 노예 및 식민지 쟁탈전을 설탕 확보를 위한 각국의 치열한 경쟁으로 보기도 한다. 프랑스는 서인도 제도의 엔틸레스 제도에서 17세기부터 플랜테이션 농장을 가동했다. 18-19세기 프랑스의 설탕 소비량을 급증하는데 이는 커피의 소비량을 늘어났기 때문이다. 커피는 처음에 그냥 먹다가 폴란드의 게오르고 코시츠키가 퍼티에 우유 넣어 먹는 방법을 전파하였다. 그는 커피 가루를 거르고 우유는 넣은 카페 오레를 크루아상과 같이 먹는 법을 고안해 크게 유행시켰다. 그 결과 프랑스의 1인당 연간 설탕 소비량은 1845년 3.6kg에서 1871년 7.8kg으로 두 배 넘게 증가한다. 아이스크림 소비의 증가도 설탕 소비량을 급증시켰으며 바야흐로 설탕의 대중화 시대가 열리게 된다.

 크림은 버터를 만드는 용도다. 귀하고 비싸며 보관이 어렵다. 크림은 19세기에 큰 인기를 얻었는데 우유에서 유지방을 분리하여 만들었다. 1879년 크림 분리기가 발명되었다. 

 고급 디저트 문화는 사실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귀족이 대부분 몰락하여 전용 요리사들이 시중에 가게를 내게 되었고, 부르주들들이 성장하며 새로운 소비층을 이루었다. 프랑스 파이에는 근대에 저널리스트와 외국 스파이 및 사절, 의원 등 독신자들이 많이 머물렀는데 이들에게 요리사들이 차린 레스토랑이 매우 인기가 좋았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많은 과자가 개발되었다. 에클레르는 18세기 리옹에서 탄생했는데 슈반죽으로 만든 과자다. 처음엔 아몬드는 잘게 부수어 섞다가 나중에는 아몬드 대신 커피, 초코, 생크림을 채웠다. 파리 브레스트는 슈 반죽으로 자전거 바퀴 모양을 만들고 가운데 머랭과 프랄린을 넣었다. 밀푀유는 푀이타주와 크렘 파티시에르를 쌓아올린 과자다. 생도노레는 고급 상점가인 생도노레 거리의 과자점에서 탄생했다. 왕관 모양의 브리오슈에 크림 파티시에를 채운 과자다. 를지지 와스르는 수녀라는 뜻으로 커다란 슈 위에 작은 슈를 얹고 그 위에 녹인 초콜릿이나 커피를 부운 것이다. 타르트 타탱은 사과 타르트의 일종으로 반죽 위에 사과를 그대로 얹은 것이다. 퓌이 다무르는 파이 반죽을 이중으로 겹쳐 작고 둥근 우물처럼 만들고 바닐라 맛 또는 프랄린을 넣은 크렘 파티시에르나 잼으로 속을 채운 다음 표면에 설탕옷을 입한 과자다. 마들렌은 1755년 폴란드 국왕 스타니 솔라닌 레친스크의 연회에서 탄생했다. 원래 연회엔 타르트가 나오기로 했는데 망했다. 그래서 젊은 하인 마들렌 폴비에가 달걀 거품기를 사용해 할머니에게 배운 가리비 모양의 과자를 만든게 마들렌의 시초다. 무스는 과자를 굳히기 위한 방식이다. 가열 대신 냉각을 해 부드로운 식감을 자랑하는데 과일을 퓌레 상태로 만들어 크림과 섞어 먹으며 냉동을 시킬 수 있어 인기를 얻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줌 인 러시아 - 경제연구소의 인문학자가 들려주는 러시아의 역사.문화.경제 이야기 줌 인 러시아 1
이대식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줌인 러시아는 16년에 나온 책으로 그 때 구매하고 오래도록 묵혀두었다. 아마 이번에 본 러시아 지정학 아틀라스로 러시아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더 들지 않았다면 더 묵혔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러시아에 대한 이렇다할 지식이 없던 나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러시아에 대해 사회, 문화, 역사, 예술 등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어 백과사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찾아보니 후속작이 나왔던데 이 정도 쓰고도 더 쓸게 남았던 셈인지라 저자의 내공이 대단하단 생각이다.

 러시아는 글자도 어렵고 이름도 어렵다. 글자가 여타 유럽 국가와 매우 다른 것은 그리스 정교회를 수입하면서 글자도 같이 가져와 버렸기 때문이다. 로마가 아닌 그리스 알파벳에 기반하다보니 영어에 친숙한 우리가 보기엔 유독 이질적이다. 러시아인의 이름은 무척 길고도 어렵다. 이는 부칭의 흔적 때문인데 부칭은 성이 정착하기 이전 누구의 아들 누구라는 식으로 부르던 것이었다. 헌데 러시아는 성씨가 정착화했어도 여전히 부칭도 같이 사용한다. 아들은 경우 아버지 이름에 오비치를 딸인 경우 아버지 이름에 오브나를 붙인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대문호 토스토예프스키의 정식 이름은 표도로 미하일로비치 토스토예프스키다. 여기서 그의 이름은 표도르이고 미하일로는 그의 아버지도 그리고 성인 토스토예프스키는 가족들이 대대로 살던 영지의 이름이다. 즉, 토스토예프스키의 이름뜻은 토스토예프 지방이 본관인 미하일로의 아들 표도르인 셈이다.

 러시아에서는 보통 성은 빼고 이름과 부칭만을 부르는데 푸틴을 예로들면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비치만을 부르는게 정석이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은 대개 정교회 성인의 이름을 따른다. 그들은 영아세례에서 성자의 이름으로 세례명을 받고 이것을 평생 사용하는데 그래서 그들은 생일과 더불어 명명일도 같이 챙긴다. 

 러시아는 매우 종교적 국가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종교를 탄압하여 정교회 교회 5만 5천개 중 5만 4147개가 상실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70%정도의 국민이 정교회 신자다. 988년러시아 지도자 블라디미르 대공은 기존의 다신교보다는 제국의 통치에 유일신 종교가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서유럽 카톨릭과 유대교, 정교회, 이슬람교를 판단하기 위해 각각 사신을 보낸다. 서유럽은 러시아가 나무 조각 따위를 숭배한다고 비웃어 바로 패싱했고, 유대교는 그 민족의 처지가 보잘것 없음에 실망한다. 이슬람은 일부 다처제가 있어 제법 구미에 맞았는데 돼지고기와 술의 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성의 할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정교회 뿐으로 이것을 받아들인다. 여기에 정교회의 비잔틴은 인근 제국중 가장 강력한 나라로 러시아 입장에선 무척 중요한 국가였다.

 러시아 정교는 서유럽 카톨릭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정교는 신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인간 이성으로 직접 접근할 수 없기에 신이 아닌 것을 먼저 드러내어 신의 본질에 접근하자는 부정신학을 갖는다. 서유럽은 반대로 긍정신학이다. 그래서 러시아 성가는 무반주 아카펠라인데 불완전한 인간의 노래에 불완전한 인간의 악기 소리마저 더하는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요소에 대한 부정은 삼위일체론에도 나타난다. 서유럽 카톨릭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게서 성령이 나온다고 보는 반면 정교회는 성자는 인간적 요소가 있어 불완전하기에 성령은 나오지 못하고 성부와 성령의 매개 역할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로마카톨릭은 교황의 무오류설을 주장하며 그의 권위를 절대화하나 정교회는 총대주교가 상당한 영향력은 있으나 역시 인간으로 오류가 가능하다고 파악하여 절대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건물은 매우 아름답다. 바로 모스크 때문인데 이는 러시아의 독특한 건축양식과 문화의 결합이다. 고대 그리스는 넓은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많은 기둥이 있는 건물을 지었고 이로 인해 파르테논신전의 경우처럼 실내 공간이 비좁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로마의 판테온이 등장한다. 아래서부터 원형으로 비스듬히 벽돌을 쌓아올려 돔형건물을 만들어 넓은 실내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하지만 내부가 원형이기에 다신교의 만신전엔 적합하나 한 대상에 집중하는 유일신교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유럽은 장방형의 바실리카형 건물로 변모한다. 하지만 동로마는 돔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장방형의 건물 위해 돔을 얻는 펜텀티브 돔을 짓는다. 러시아는 여기서 더 나아가 건물 하단 본체에서 빠져나온 기동 위에 반구 대신 양파형 돔을 얻었다. 이는 러시아에서 숭상하는 촛불을 상징한다. 

 러시아는 원형구조를 중시한다. 추운 지역이다 보니 오래전부터 태양신을 섬겼는데 이집트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태양신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인데 반해 러시아에서 태양신은 몸을 녹이기 위해 바라보고 향해야 하는 존재다. 러시아는 그래서 태양이라는 중심과 그곳을 바라보는 주변이라는 일종의 원형구조 세계관이 전통적이다. 회화, 건축, 마을의 구조에 이 원형구조가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이 원형이 구심력이라는 점이다. 태양이 나로 향해 오기보다는 내가 태양을 향해 가는 구조이며 그래서 나보다는 태양을 중시한다. 그래서 독특한 명명법이 등장하는데 예로 모스크바에는 모스크바 역과 대로가 없으며 오히려 레닌그라드 역과 대로가 있다. 이는 모스크바에서 레닌그라드를 향하기 때문으로 오히려 향하는 쪽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지도자는 국민입장에서 향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쉽게 절대화되고 민주화가 어려운 부분은 이런 점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한 대표적인 바보짓 중 하나로 알래스카 미국 매각이 꼽힌다. 알래스카는 한반도의 8배 크기에 러시아 영토의 1/10이며 미국에서도 가장 넓은 주다. 여기에 그동안 채굴한 금이 1000톤이상이고 세계의 10%정도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 여기에 매년 광업으로 125억 달라, 농어업 2억 8900만 달러, 제조업 1200만달러, 관광 20억달러를 벌어들이고 미국의 대 러시아 전진기지 역할도 하는 곳이 알래스카다. 이런 금싸라기 땅을 러시아는 고작 금화 720만 달러에 판매한다. 이는 당시 러시아 재정의 2.9%수준에 불과하다.  

 당시 러시아는 머나먼 알래스카를 관리하기 위해 준국영기업인 러시아 아메리카 기업을 설립한다. 알래스카 모피를 중국에 독점 판매하고 중국의 차를 독점 수입하는 수익구조를 편성했는데 미국에서 중국으로 물개가죽이 들어오과, 러시아가 크림전쟁에서 패하며 재정이 악화하자 알래스카의 경기도 크게 악화한다. 러시아는 대규모 전쟁배상금과 인프라 구축 비용이 필요했고 알래스카는 적자기업에 관리가 힘들었다. 게다가 당시 영국은 캐나다를 바탕으로 알래스카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는 수익과 국방을 위해 알래스카를 미국에 판매한다. 더불어 미국과의 관계 개선도 도모했음을 물론이다. 결과적으로 무척 손해가 난 거래였으나 당대의 상황으로 보면 일면 타당한 면도 있는 거래였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오랜 기간 하나의 공동체였다. 키이우는 러시아 최초 왕조인 류리크 왕조의 수도였다. 하지만 12세기 들어 류리크 가문의 갈등이 심화하고 소공국들로 분열한다. 13세기 몽골의 침입 후 서로가 서로를 항몽반란으로 고발하여 골육상쟁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부상하고 중심지가 이동한다. 왕위도 기존 형제 계승에서 장자계승으로 바뀌며 14세기 부터 키이우 지역은 변방으로 취급된다. 우크라이나란 말 자체가 러시아어로 변방에 위치했다는 뜻이다. 

 14세기 후반부터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공세에 시달리던 우크라이나는 1654년 형제국 러시아에 도움을 청한다. 러시아는 적극적이지 않으 동부인 드네프르 지역만 탈환하느데 이 것이 오랜 우크라이나 동서 분열의 시작이다. 우크라이나는 이윽고 서폴란드령과 동러시아령으로 분열하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잠시 통합되었다가 1922년 다시 분열한다. 2차 대전 중 여러 민족에 시달리던 우크라이나 인들은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오인하여 환영했다고 피의 학살을 당하고 이후 스탈린에 의해 변절에 대한 대가로 역시 학살과 차별을 겪는다. 구소련은 서부는 농업지대로 동부는 공업지대로 육성하였는데 그 결과 지금까지 동서간의 경제력 차이가 크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동부는 오랜 기간 러시아의 영향을 받고 실제 러시아인도 다수 거주하다보니 우크라니아 서부와 다른 정체성을 갖고 분열의 조짐을 계속 보인다. 2014년 크름반도 합병과 2022년 전쟁에서 동부가 쉽게 넘어간 이유다. 

 러시아의 발레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세계 5대 발레단 중 2개가 러시아며 나머지들도 러시아인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발레는 1400년대 이탈리아 귀족들이 영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 앞에서 춤을 추며 시작되었다. 1549년 피렌테의 공주가 프랑스로 시집가서 전파되었으며 이후 프랑스가 발레의 중심지가 된다. 표트르 대제의 아버지 알렉세이는 발레를 보고 매료된다. 러시아는 이후 황실이 직접 발레를 육성한다. 무도회를 개최하고 귀족과 여식의 동참의 의무화했으며 심지어 육상의 정규과목에 발레를 편성할 정도였다. 

 1783년 러시아 왕실 발레 학교가 개교한다. 궁정하인의 자제 12명을 남여 동수로 선발하여 육성했고 이처럼 발레리노를 유지한 것이 러시아 발레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러시아는 최고 수준만을 고집하여 유럽 각국의 최고 전문가를 초빙했고 높은 개런티를 주어 인재를 빨아들였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드디어 최고 수준의 무용가, 안무가, 음악가, 화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다. 반면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발레는 오페라의 인기로 사장위기였다. 1909년 러시아 발레단이 파리에서 공연하자 유럽 관객들은 잊혀진 발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러시아는 발레를 크게 발전시켰는데 우선 군무다. 발레에서 원래 군무는 부차적인 것이었지만 러시아는 군무를 중요한 요소로 승격시킨다. 튜닉이나 타이즈등 몸매를 아름답게 드러내면서도 춤추기에 편한 복장도 군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는 발레에 막과 장을 도입하여 이야기의 전개를 알기쉽게 하였는데 이는 차이코프스키가 교향곡의 4막 구조를 과감히 발레에 도입한 덕분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3-05-22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러시아 책, 특히 미술사 책 단지 몇 권 읽고 러시아가 넘 좋아져 이번 전쟁 나기 바로 전에 러시아 다녀왔습니다. ^^
참, 동양도 서양도 아니며, 자본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닌, 상당히 낯설고 이상하고 재미있는 나라였습니다.
쓰신 글 읽고 그때 방문이 새롭게 기억나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닷슈 2023-05-22 19:52   좋아요 1 | URL
다녀오셨다니 부럽네요. 전쟁과 세계의 새로운 양극화로 러시아가 다시금 아주 머나먼 나라가 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무엇이 옳은가 -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
후안 엔리케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세계사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인간을 비롯한 여러 생물들은 지구에서 협력하며 살아왔다. DNA의 운반기계로서 생명체 하나하나는 그 본연의 목적 때문에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때문에 경쟁 만이 방법 같지만 협력은 DNA를 다음 세대로의 전이를 더욱 수월하게 하기에 생겨났고 경쟁 이상으로 성공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협력하는 개체 수가 많아질수록 그리고 그 개체들의 생활양식과 지능이 우수하고 복잡할수록 당연히 협력 방식과 규칙 역시 같이 복잡해지게 된다.

 때문에 인간의 윤리는 복잡하며 절대적이고도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협력이 주는 막강한 진화상의 이점, 그리고 이를 통해 강력한 문명을 갖춘 인간에게 있어 윤리는 앞으로도 없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윤리의 목적이 협력을 통해 인간 개체 하나하나의 적응도를 높이는 것이에 이런 본연의 기능은 절대적인 것으로 사라지기 어렵다. 즉, 목적이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사회문화적으로도 진화하기에 상당히 가변적인 면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윤리 또한 상대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이 환경이 매우 다른 지구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고 여기에 맞추어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하게 적응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간은 커다른 뇌의 발달로 또 다른 생존 도구로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다. 이 과학 기술은 인간 사회를 상당히 크게 변화시키는데 이 역시 인간의 윤리를 상대적으로 만든다. 

 책 '무엇이 옳은가'는 이런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의 윤리적 기준에 대한 논의다. 책은 이런 점을 불편해한다. 우선 우리가 과거 우리 조상들이 갖고 있던 윤리적 기준과 행위에 대해 과도하게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미국에서 200-300년전 노예 제도는 합법적이었고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모든 이가 평등해진 지금 과거 노예 제도를 옹호하고 이를 이용한 사람들에 대해 우린 매우 비판적인데 그들의 사회문화적 상황에서 그것을 볼 필요도 있다는 점이다. 사실 근세의 노예 제도가 주로 비판 받지만 인간은 농경 이후로 상당히 오랜 기간 노예 제도를 유지해왔다. 다음은 우리의 윤리적 자세다.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의 우리의 과학기술적 한계와 사회문화적 상황에 걸맞는 윤리를 갖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위한다.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이것이 미래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그리고 나만의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과 다른 생물에 큰 고통을 초래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일회용품 및 탄소친화적 행위를 하거나 육식을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우리는 자각할 수 있는데 적어도 이런 행위는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는 점이다. 과거 노예제가 당연시 되던 사회에서도 한계는 분명하지만 적어도 노예를 인간으로 여기고 대우하려 노력한 소수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책에서 다루는 구체적인 쟁점들을 살펴보면 우선 인간의 탄생과 종의 개선 문제다.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100년정도 전까지만 해도 피임은 불가능했고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로 여겨졌다. 그 흔적은 아직도 남아 일부 종교색이 강한 지역에서는 피임을 여전히 허용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시험관 아기도 등장했다. 최초의 시험관 아기를 시도했을 때만해도 가장 선진적인 서구권에서도 반대 여론이 더 높았다. 하지만 막상 이것이 성공하고 그 아기의 지극히 평범하고 귀여운 얼굴이 신문에 실리자 바로 며칠만에 찬성여론이 60%가 넘어갔다.

 향후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탄생과 개선은 시간문제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에 걸맞게 우리의 윤리적 기준도 위의 예시처럼 극적으로 변할 것이다. 인공자궁이 탄생하면 처음에 사람들은 이를 거부할 것이다. 뭐라 하긴 힘들지만 최초의 시험관 아기처럼 꺼림직 할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아기가 아무런 문제 없이 태어난 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시험관 아기처럼 다른 아이와 전혀 다르지 않게 성장한다면, 사실 인공자궁은 장점이 많다. 모체가 각종 약물이나 흡연, 음주를 해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생체 자궁보다 훨씬 안전하기까지 하다. 각종 사고나 모체의 운동, 사회활동으로부터도 안전하며 이로 인해 유산 가능성도 훨씬 낮을 것이며, 변덕이 심한 모체와 달리 필요한 영양분과 물질을 안정적으로 받기까지 할 것이다. 여기에 여성을 장기간의 임신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고 출산으로 인한 고통과 체형의 변형도 막을 것이다. 아마 이로 인해 출산율이 조금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이상적인 태교는 물론이다. 이런 인공자궁을 두고도 본인과 아이의 위험 및 온갖 단점에도을 무릎쓰고 자연출산을 감행하는 사람들을 미래 세대는 매우 야만적이라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개선도 마찬가지다. 인공자궁이 생겨나면 인간에 대한 조직이 심적으로 기술적으로 더욱 편해진다. 아이의 유전자를 개선해 지능이 우수하고 각종 질병으로부터 안전하며 위험한 취약 유전자를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을 거부하는게 윤리적인 행위일까? 지금은 치명적 손상을 안고 태어나는 장애아동이나 질병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게 되는 것을 누구의 잘못도 아닌 숙명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부모가 과거의 윤리적 기준이나 종교에 집착에 그런 행위를 한다면, 그리고 장애나 질병을 갖고 태어난 자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부모를 고소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세기의 말 혹은 적어도 다음 세기엔 인간은 강력한 인공지능과 로봇, 그리고 우주 식민화 세대를 맞게 될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인간 개조의 필요성을 매우 강력하게 그리고 당연하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윤리적 기준도 이에 맞게 변화할 것이다.

 책은 기후변화 문제도 이야기한다. 인간은 지난 100년간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300ppm에서 400ppm으로 향상시켰고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물론 이는 미래 세대에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지만 과거 우리에게 재생에너지는 너무나도 비쌌고, 탄소에너지는 저렴했으며 기후 변화는 이론상으로 이해했지만 체감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대부분의 재생에너지는 탄소에너지의 채산성을 넘어서고 있다. 또한 기후변화 역시 체감하고 있다. 때문에 아직까지는 탄소에너지의 사용이 혹독하게 비판받고 있지 않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는 향후 큰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미 그러한 변화가 서구권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다. 축산업도 문제다. 축산업은 그 자체가 큰 온실가스 배출요인이지만 동물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지구상엔 돼지가 10억 마리 소가 14억 마리 닭이 200억 마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인간의 식량으로 사용되며 이들을 먹이기 위해 생산곡물의 절반을 사용한다. 80억의 인간 중 소수가 자신의 입맛을 위해 건강에도 그리 좋지 못한 고기를, 그것도 그 동물의 행복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가난한 다른 인간을 먹일 만한 곡물을 사료로 낭비하며 고기를 탐하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매우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위일 것이 분명하다.  

 놀랍게도 전 세계 재소자의 절반이 중국과 러시아, 미국에 존재한다. 중국인 인구가 많고 국가사회주의 국가이니 그렇고 러시아도 비슷하니 그럴만 하나 민주주의의 총아인 미국은 상당히 이상하다. 더군다나 미국의 범죄건수는 1991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는데도 재소자 수가 줄지 않으니 더욱 그러하다. 이는 미국의 미국의 재소자가 하나의 경제를 이루기 때문이다. 

 미국은 법체계상 판사의 형량 선고에 대한 재량권이 매우 적다. 죄만을 바라 볼뿐 개인의 사정따윈 허용이 안된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사소한 범죄에도 10-20년형의 구형이 가능하다. 삼진 아웃제 같은게 있어 경범죄라도 세 번을 저지르면 중형에 처해진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주마다 법이 다른 문제도 있다. 어떤 이는 마리화나가 합법인 지역에서 그것을 팔고 불법인 지역에 건너갔다가 그로 인해 40년을 복역 중이다. 아마 삼진아웃에 걸린 듯하다. 하여튼 이처럼 죄인의 양산하고 오래 묶어두는 체계인데 이는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이다. 우선 지역 보안관은 주 정부로부터 재소자 1인당 매달 25달러를 받는다. 범죄자를 양산하기 위해 노력할만 하다. 거기에 몇몇 통신업체들은 재소자에게 30분 통화에 무려 20달러의 바가지 통화료를 부과하기도 한다. 이렇다보니 정부와 재소자 자신, 그리고 그 가족이 부담하는 비용이 무려 1829억달러에 달한다. 여기에 미국은 교도소 재소자를 노동시장에 투입시킨다. 주정부가 소유한 기업에서 임대되어 일을 하는데 시급이 고작 33센트에 불과하다. 이렇게 이득을 보는 집단이 많으니 이런 거대한 악이 허용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래 세대들이 이를 어떻게 평할지 안봐도 자명하다. 

 책에는 이것 이외에도 미국의 의료체계와 현대의 전자문신이나 마찬가지인 SNS, 휴대폰 문제, 교육문제, 환경 오염 등도 다루고 있다. 하나하나가 재밌고 다양한 사실과 논점으로 채워져 있다. 저자는 인간의 윤리는 과학시술의 변화에 따라 크게 변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몇 가지 변곡점이 될만한 것들이 있는데 우선 인공지능의 등장이다. 인간보다 훨씬 우수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공지능의 탄생은 인간의 윤리를 크게 흔들어 놓을 만한 것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다음은 외계생명체와의 만남이다. 언젠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은 이것을 통해 인간의 종교는 강하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또한 우리와 조우할 외계인은 역시 협력을 통한 과학기술 문명을 구축하고 역시 나름의 윤리를 갖고 있을 것인데 그것이 아무래도 인간의 윤리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마지막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패권국의 변경가능성이다. 지금의 우리 윤리 기준의 토대는 사실상 지금의 사회를 구축한 서구 중심의 것이다. 그들이 만든 개인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가 사회 윤리의 핵심토대로 작용한다. 이런 체제가 잘 굴러가게끔 윤리와 법체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패권국이 중국이나 러시아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중국인 개인보다는 공동체와 사회를 훨씬 더 중요시 한다. 그들의 체계가 승리하고 다른 세계가 이를 따라야하는 운명에 처한다면 윤리 역시 그에 걸맞게 바뀌게 될 가능성이 높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처받은 아이는 외로운 어른이 된다 -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 관계를 치유하는 시간
황즈잉 지음, 진실희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들은 어른에게 완벽함을 요구한다. 공정하며 일관적이고 완벽한 조건없는 사랑, 즉, 어른스러움이다. 그런데 완전한 어른은 사실 없다. 어른은 그저 다른 어른들이나 사회적 기대 혹은 자신이 어릴 때 본 것처럼 완전해보이는 어른을 흉내내는 것 뿐이다.(그 어른도 사실 뭔가를 매우 잘 흉내낸 것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전혀 잡히지 않는 어른스러움을 평생 갖고 있는 것처럼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실제 어른에 가깝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어른이 진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어른은 대부분 완벽하지 못한 어른을 만나며 어린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그렇게 불완전한 어른이 되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불안하게 아이를 대하게 된다. 일종의 악순환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이런 것에 대한 내용이며 대인과정이론이라는 것에 근거한다. 대인과정이론은 모두가 건강한 개인이라고 전제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한 것은 환경이나 상대방이 바뀌었음에도 전략을 적절하게 변경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해리 스택 설리반은 어린 시절 부모와 반복적으로 겪은 상호작용이 인격과 자아를 형성한다고 본다. 타고난 성격요인에 부모라는 초기 환경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이후 다른 대인과 환경이 개인의 성격을 형성한다는 것으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많은 부모는 언급한 것처럼 완벽한 부모를 만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불완전성은 더욱 커졌기에 자신의 생의 아픔을 감당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대부분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기가 버겁고 그로 인해 아이를 사랑해주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부모이고 어른스러운 척을 해야하기에 부모는 억지로라도 나는 부모다라는 설득을 통해 아이에게 사랑과 곁을 내주는게 가능해진다.  

 반면 건강한 사람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데 하는 일이나 장소,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며 이로 인해 유연하고 성공적인 관계를 맺는게 가능하다. 

 책에는 부모가 아이를 고통스러벡 하는 상황이 나오는데 유념할만 하다. 

 부모가 정서적 대응, 일분배, 가사분담 및 의사표현등에서 분명하게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경우, 부모가 지나치게 감정적, 변덕으로 아이에게 일관된 감정경험을 주지 못하는 경우, 부모가 권위를 내세워서 아이를 휘어잡고 붙잡으려 하지만 아이가 막상 곁에 머무르면 소홀리 대하거나 감정적으로 협박하고 아이를 소유물로 간주하는 경우, 부모가 미숙하여 아이를 물심양면으로 배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기가 부모의 욕구를 지나치게 배려하는 경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 인류의 문화, 충돌, 연계의 빅 히스토리
타밈 안사리 지음, 박수철 옮김 / 커넥팅(Connecting)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인류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책은 적으면서도 많다. 그리고 하나 같이 재밌다. 이런 책들의 관점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데, 그 미묘한 차이를 보는 것도 재밌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계가 서양이 만든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지배를 받는 만큼 이런 책들은 동서양의 운명을 가른 차이점도 반드시 살펴본다. 그 원인 역시 서로 매우 유사하면서도 약간 다르게 집어내는데, 지리적 차이, 그 지리적 차이가 만들어낸 철학과 사상의 차이, 종교적 차이, 지리에서 비롯된 농업과 생산형태의 차이,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사회문화적 구조의 차이등 다양하다.

 이런 류의 책들로 내가 본 것은 하라리의 '사피엔스 3부작 시리즈',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마빈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 시리즈',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루이스 다트넬의 '오리진'이 있다. 하나 같이 배울게 많은 책들이었다.

 이번 책은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보아서인지 특별한 것은 없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모르는 내용의 살을 채울만한 지식과 통찰이 돋보였다. 읽으면서 노트를 많이 한 것만 봐도 그랬다.

 책으로 들어가면 책 오리진 처럼 5500만년전 있었던 인도와 아시아의 충돌에서 시작한다. 이 충돌로 히말라야가 생성되었고,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습기를 막아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많은 비가 내리게 해 이 지역에 울창한 열대우림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습기를 빠진 이 바람이 인도양을 돌아 동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어 정작 이 지역이 건조기후로 바뀌게 되었다. 이 환경변화는 인류의 진화를 이끌어낸다. 

 동아프리카 지역은 건조해져 울창한 숲에서 관목림으로 바뀌게 되고 인간의 조상은 나무에서 내려가 직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기후 변화가 잦아 환경변화에 따른 많은 진화와 지능의 발달을 촉발시켰다. 영장류는 도구를 사용하여 이런 환경변화에 적응하였고, 결정적으로 언어 사용으로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차별화되었다. 

 언어는 도구를 더욱 정교화시켰고, 도구 제작 발달을 가속화했다. 언어로 도구를 만드는 방법이 전수되고, 학습되어 기술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1. 강의 문명들

 문명은 강에서 발달했다. 나일강은 무려 6400km로 훌륭한 간선수로다. 강은 북으로 흐르지만 운이 좋게도 바람은 남으로 불어 양방향 통행이 가능했다. 여기서 발달한 이집트 문명은 방어에 매우 유리했는데 남쪽의 강상류는 지형이 험해 오기 힘들었고, 동쪽엔 위협 세력이 없었으며 지형도 거세고 메랄랐다. 서쪽은 알다시피 사하라다. 강에 의한 교류로 문명은 동질화했고, 강을 관리할 필요성으로 강력히 중앙집권화하였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는 나일처럼 지형에 따른 상하류의 구분이 없다. 때문에 하나의 연속적 문화가 형성되지 못했고, 개별적 관계망이 지금의 지도처럼 마구잡이로 나타났다. 거기에 사방이 탁트였다. 농경 및 유목 모두에 적합해 침략이 잦았으며 이에 따라 장벽으로 세운 도회지인 도시국가가 필연적이었다. 사방이 탁트였으니 인구대비 큰 규모의 군대도 필수다. 

 인더스 유역은 5천년전 무려 500만이 거주할정도로 탁월했다. 80km2 구역에 무려 1천개 이상의 도회지가 있을 정도였다. 유역이 물이 풍부해 관개가 매우 쉬웠고 농사도 잘되었다. 생산력이 높아 여가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초기문명인 하라파엔 예술, 공예, 공학이 발달한다. 하라파의 위쪽 히말라야 저편 고지대에는 유목민이 거주했다. 이들은 3500년전 하라파로 이주한다. 하라파가 세련된 도시민이자 벽돌로 큰 집과 창고를 건설했고, 대규모 농사와 풍요의 여신을 숭배했다면 유목이주민은 소농에 진흙, 대나무, 풀따위로 작은 오두막을 짓는 시골민이었다. 그들은 말을 탔고, 철제무기와 안장, 이륜전차를 갖고 있었으며 스테베엇 기원한 바람, 천둥, 태양, 불의 자연 남신을 섬겼다. 이들은 인더스에서 점차 동으로 이동해 갠지스에 이르렀으며 '베다인'이라 불렸다. 

 중국의 황하는 토양이 매우 건조하고 비옥했다. 관개가 필요했고 경사면이 가팔라 계단식 논밭이 필요했다. 황하는 교통 및 운송에 부적합해 동질적 문화가 생기지 않았으며 독자적 공동체가 강 유역을 따라 길게 형성되었다. 제방이 워낙 자주 범람해 재난 상황을 대비한 사전 권한 체계 구축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위계, 질서, 규율, 복종이 중시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하는 지혜를 알고 있는 연장자는 매우 중시되었고 이들은 심지어 죽어서도 숭배되었다. 이런 중국의 작은 공동체가 조금씩 합쳐져 마침내 하왕조를 형성한다.  


2. 유목세계

유럽동부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극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스텝 유목세계가 있다. 초원지대에 거의 평지라 중요한 발견, 발명, 기술이 스텝 유목 지대 양끝으로 빠르게 퍼질수 있었으며 이 전파에 속도를 붙인 것은 말이었다. 말의 가축화로 등자와 안장이 개발되었고, 말을 타기 위해 바지를 처음 입기 시작했다. 셔츠, 셔츠의 소매도 모두 말을 타기 위해 만든 복장이다. 말의 가축화로 유목민은 더욱 빠르고 멀리 퍼지게 되었는데 말의 기동력과 인근 지역의 풀을 남김없이 먹는 말의 습성때문이었다.

 스텝에선 말을 이용한 이륜전차도 발명했다. 제자리 회전이 가능했고, 기동력을 위해 가벼운 바큇살의 바퀴를 사용했다. 합성궁도 만들었는데 기존 활은 한 가닥의 나무로 활을 만들어 파괴력으 높이기 위해선 활이 장궁이어야 했다. 하지만 합성궁은 말발굽에서 만든 접착제로 여러가닥의 나무를 붙여 파괴력은 높이면서도 여전히 크기가 작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활이 작아져 말위에서의 기사가 가능해졌다. 

 유목민은 침략에도 능했지만 교역에도 능했다. 정보망이 널리 퍼진 그들은 어느 장소에 좋은 물건이 있고 어디에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다. 그들은 교역망을 형성하고 도로와 오솔길을 만들어냈으며 이들의 교역로가 교차하는 곳에 자연히 도시가 형성되었다. 유명한 곳이 페트라인데 농경에 부적합하지만 홍해와 레반트 해안, 페르시아 항구사이를 오갈때 지나야 하는 협곡의 암벽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고대의 가장 분주한 교역망은 소아시아-이란고원-아프간 지역을 잇는 곳으로 여기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등 고대 4대문명이 모두 접한다. 이 지역엔 거칠고 메마른 땅이 다수지만 수많은 개울이 흘러 이 개울을 따라 작은 자급자족형 촌락과 유목민이 거주했다. 이들은 4대 문명의 세련된 도심지를 교역으로 이었고, 아랄해, 카스피해, 흑해, 지중해, 에게해, 아무다리야강, 홍해, 페르시아만, 인더스강 등의 수역이 있어 원거리 교역에 더욱 유리했다. 


3. 다른 지역들

 지중해는 대양만큼 크지만 막혀서 잔잔하다. 흑해와 통하고, 홍해와 인접했고 폭풍이 없으며, 폭포와 습지가 없어 교역에 적합했다. 온대 기후여서 해안 풍경이 다양했고 환경의 차이로 지역마다 산물이 달라 교역이 활성화했다. 지중해의 문명은 크레타-페니키아-미케네로 이동한다.

 사하라 이남은 인구가 희박했다. 대륙중심부는 밀림으로 농사에 부적합했고, 모기와 체체파리등이 있어 인구손실이 많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의 서아프리카는 사정이 좀 달랐다. 노크문명이 발달해 들판을 경작하고 소떼를 돌보았다. 북쪽과 달리 독자적 구리 제련법을 알아냈고 기원전 1000년경 철기시대에 진입했다. 기원전 500년 이 노트인은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환경파괴로 아프리카 이남으로 이동하면 세력을 넓힌것 같다. 사하라 이남에선 반투어가 공통어인데 아무래도 반투어의 사용자가 노크인의 후손인듯 하다. 반투어 사용자들은 철제도구가 있어 나무를 자르고 관목지대를 뚫고 식물의 뿌리를 캐내어 적도의 숲을 통과하고 농경을 할 수 있었다. 철제 무기는 기존 수렵채집인을 물리치기에도 충분히 강력했다. 반투는 농경후 토질이 떨어지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관목을 태워 토질을 확보했는데 관목이 모두 사라지면 이동하는 식이었다. 동아프리카까지 이동한 그들은 중간세계의 교역망에 편입하였고, 그 결과 아랍어와 섞인 스와힐리어가 탄생한다. 


4. 서사의 등장

 인류의 원시적 거대 서사는 당연히 특정 환경이라는 지리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거대서사는 점차 커지면서 진실과, 거짓, 부적절한 것들을 흡수하고 걸러내며 더욱 그럴듯해져갔는데 이후에는 지리적 조건을 넘어서 진실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지리적 조건에 의한 상호의존성으로 모두가 서로 은혜를 입고 은혜를 베푸는 관계가 되었다. 삶은 하나의 사회적 부채망의 연결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를 집대성한 것은 공자로 그는 모든 사람이 개별 상황에서 도덕적 통찰력을 갖는게 가능하다 보았다. 그리고 사회적 과업에 발맞춤으로써 모든 사람이 의미와 목적 있는 삶을 영위하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이상사회를 위한 처방이었고, 이상사회는 제국과 가정에서의 삶이 쌍둥이 같았다. 

 중국이 세상을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동심원처럼 보았다면 인도에서 세상은 다층세계였다. 인도의 신은 역동적이고 여러 차원에 존재했으며 사회에는 카스트가 있었다. 갠지스의 철학자들은 우파니샤드라는 성가를 통해 세상을 환상으로 여기고 실재를 단일하고 통합된 전체로 바라보는 시각을 완성했다. 우파니샤드엔 우주의 철학인 카르마가 담겨있다. 

 인도 하라파 문명의 전성기에 아리아인이 남하한다.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무리는 인더스로 향해 산스크리트어와 베다, 다층신, 데바(악)와 아수라(선)를 만들었다. 다른 무리는 이란으로 향해 아베스타어, 양극신, 다에바(선)와 아후라(악)을 만들었다. 인도에선 사라진 불의 신 아그니와 미트라가 이란에선 인가가 좋았고 아그니는 이후 생명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로 미트라는 계약의 신으로 자리한다. 이란 고원이 교역의 중심지이니 계약의 신은 당연히 중요했다. 

 이란의 신은 동심원과 다층성으 모두 버리고 직선으로 투쟁과 결말이 중요하는 세계관을 갖는다. 조로아스터는 30세에 아후르에게 계시를 받는다. 아후라는 자신만큼 강한 아리만과 투쟁관계의 신이다. 인간은 우주차원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대결사이에 존재하며 그로 인해 선과 악사이에서 자유의지를 갖고 도덕적 선택이 가능하며 이 선택이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조로아스터교의 성향은 향후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늘 잦은 권력 교체로 불변의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았다. 도시마다 신이 많았으며 점령당하거나 점령해도 그 신들은 부정되지 않았다. 다만 힘의 차이로 인해 어떤 신이 더 강하고 약한지 정도가 있었으며 자신이 잘못을 하면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즉, 한 도시가 다른 도시에 패배하면 자신들의 잘못으로 신에게 보호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에서 히브리가 생겨난다. 아브라함의 인도로 이들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를 거쳐 북으로 이동하다 다시 서로가서 지중해 해변으로 다시 남으로 가서 레반트의 가나안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다. 이후 이집트에 머무른다. 이는 성경에 잘 나와있는데 아무래도 유목민 차원에서의 이주인듯 하다. 

 히브리는 불과 풍요의 신 야훼를 섬겼다. 그들은 각 가정마다 신성한 돌을 갖고 있었는데, 성궤라는 휴대용 용기에 이 돌을 넣고 이동했다. 잦은 이동을 하는 유목민이니 성전따윈 없었다. 히브리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전락하고 십계 이후에 다시 레반트로 돌아간다. 거기서 처음으로 정착해 이스라엔, 유다왕국을 세워 번성하고 성전도 짓지만 바빌로니아에 정복되어 성전이 파괴되고 50년간 바빌론에 끌려가 비참하게 생활한다. 

 이시기 에스겔과 이사야 같은 선지자는 고통의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특유의, 우리가 잘못해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서사를 전개한다. 히브리는 이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 최초로 유일신 개념을 만들어낸다. 신은 물리적 형태가 없고, 신전이 아닌 모든 곳에 존재하며, 그로 인해 신상은 신성모독이 된다. 유대는 지역 특유의 부족사에서 벗어나 과거, 현재, 미래를 종합하는 종교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신보다 더 크고 무관한 자연의 세계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심사가 뒤틀리는 신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지만 잘 살아남으려면 자연도 잘 알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에 의한 운명의 필연성도 받아들이지만 현실세계에서 잘 살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삶도 중시했다.  


5. 고대 제국의 통치수단

 고대에서 하나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속도는 하나의 권력이 통치할 수 있는 영역의 크기를 결정했다. 선사시대는 그래서 통치반경이 최대 48km였고, 말을 이용한 고대 국가는 최대 560km가 되었다. 그리고 메시지 내용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문자가 사용되었다. 

 페니키아는 인간이 낼 수 있는 몇 십가지에 불과한 소리를 표시하는 문자를 개발한다. 간략한 몇가지 음소로 거의 무한대 단어 생성이 가능했다. 중국은 한자를 개발한다. 상형문자에서 표의문자로 발달하여 문자 자체가 언어가 되었다. 한자는 매우 어렵고 페니키아것보다 뒤떨어지지만 특정한 입말에서 벗어난 문자이므로 권력자가 중국이라는 여려 언어를 쓰는 백성을 다스리기에 적합했다. 

 숫자는 상인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 사물에서 벗어나 고유의 기호로 표현 가능한 항목이었고 문자보다도 더욱 문화적 경계를 건널 수 있었다. 

 화폐도 생겨난다. 화폐는 물물교환의 대체수단이라기 보다는 신용과 부채의 계산에서 생겨났다. 왕이 백성에게 납세수단으로 받은 물품은 대개 화폐가 되었다. 

 이처럼 고대국가는 거대 서사, 문자, 화폐, 숫자로 연결되었다.


6. 고대국가들과 종교의 탄생

중국은 역사 신화에서 달과 해가 다니는 길 같은 초자연적 능력을 지난 삼황과 농사, 문화, 비단등 실생활을 만들어낸 오제를 중시한다. 그리고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이 삼황과 오제가 하나가 된 최초의 사람이다. 하지만 시황제의 진은 일찍 망하고 한이 그 뒤를 잇는다. 중국의 한은 유교질서의 회복이 목표였다. 그래서 고대 경전에서 학식을 입증한 남자들을 공무원을 사용한다. 한자는 익히기 어려워 관료들이 중국 특유의 지적, 정치적 지도층을 형성하게 된다.

 로마는 기원전 509년 왕을 축출하고 수백의 남자로 구성한 원로원이 나라를 다스린다. 원로원은 해마다 두명의 집정관을 선출해 독재를 막았다. 지주와 소작농, 귀족과 평민 갈등이 심해지자 평민대표인 호민관이 선출되었고 호민관은 원로원의 제안에 거부하는 단 하나의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12표법이 완성되어 귀족, 원로원보다 높은 최고의 개념이 생겨났다.

 중국 인근에선 월지가 다른 유목민은 흉노에 패한다. 월지는 이주하여 중앙아시아에 쿠샨제국을 세우는데 쿠샨은 인더스에서 아랄해에 이르렀다.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쿠샨은 그리스 일부 제국의 해체과정에서 그리스 유산과 인도의 힌두교, 불교를 모두 흡수한다. 본디 불교도는 부처의 신상을 거부하지만 쿠샨은 그리스 색채로 부처상을 조각해 그리스 조각같은 분위기로 만들어낸다. 이란의 미트라신은 본래 계약의 신이지만 쿠샨에선 인간 어머니와 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초자연적 존재로 변모한다. 그로 인해 미트라는 영원성과 일시성의 경계에 위치하며 중간이기에 인간을 죽음에서 영원으로 이끄를 존재가 된다. 그래서 미트라는 불교의 열반과 극락이 혼존하는 세계에서 극락세계로 넘어가기를 원하는 이를 경계선에서 돕는 고귀한 미륵보살이 된다. 

 그리고 대승불교가 탄생한다. 쿠샨제국은 교역의 중심지다. 원거리 교역과 불자들이 섞이다 보니 한층 더 상업적 불교가 되었고 현실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면서도 구원을 원하는 이들을 도울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모두가 열반을 위한 고된 생활과 명상이 없이도 소수의 경건한 승려가 미륵보살처럼 도우면 열반에 이를수 있따는 대승불교가 탄생한다. 상인과 일반인들은 승려를 지원하면 되었고 산이나 숲 혹은 돌아다니는 승려가 머물며 일반인을 위해 수련하는 사찰이 탄생하게 된다. 불교사찰은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재물을 받았고 이를 사적으로 쓰기보다는 교역에 투자한다. 즉, 평신도는 불교사찰을 통해 자신의 구제와 교역에 모두 공헌하는 셈이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에서 이 미트라 밀교를 접한다. 미트라 밀교엔 동정녀 아나히타가, 미트라의 생일은 12월 25일, 미트라 옆엔 황도 12궁에 해당하는 12제자가 있다. 기독교가 그대로 베낀 셈이다. 한편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에 이어 로마에도 땅을 빼앗겼다. 전보다 더 초조해졌고 유일신을 넘어 이젠 해방의 길로 이끌 권능을 신에게 부여받은 구세주를 찾게 되었다. 구세주를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두드러진 선각자가 요한이었고 그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가 돋보였다. 사실 그는 처형당하기 전까지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처형후 부활에 대한 소문이 돌면서 신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로써 예수의 추종자들은 정통 유대교에서 이탈하였고 두 가지가 수정되었다. 하나는 구원이 하느님과 유대인만이 아닌 하느님과 전 인류의 서약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세주인 예수가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라느니 것이다. 이는 로마제국에서 잘 수용할 만한 개념이었다. 기존 그리스 로마의 신과 세속세계의 공존, 그리고 구원의 대상을 넓혀 실제 주민의 삶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로마가 노예제, 불평등으로 비대해지며 국가기능을 상실해가지 일반 피지배층의 삶은 더욱 기독교 조직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를 본따 속주의 총독처럼 교구를 편성하고 주교를 임명했다. 그리고 자연히 로마주교가 가장 권위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의 황제가 이 기독교 조직을 제국통치에 활용하고자 공인하기에 이른다. 

 게르만족은 유목민처럼 느껴지지만 아니다. 그들이 거주한 로마 외곽은 넓은 초원지대가 아닌 울창한 삼림이며 그들은 이런 농경에 부적합 땅에서 옮겨다니며 농경을 하는 시골민에 가까웠다. (진짜 유목민이었으면 훈족에 그리 밀리진 않았을 것이다.) 게르만은 로마 국경에서 로마인과 교륙하고, 동화되고 때론 다투었다. 그렇게 게르만은 로마의 외부자에서 내부자가 되어갔다. 우리 생각처럼 로마의 멸망은 게르만의 대대적 침공이 아닌 서서히 이루어진 침투에 의해 자리를 내어준 것에 가깝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유사하다. 유일신에 기독교와는 달리 종교와 세속적 삶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슬람은 부족을 넘어선 초공동체주의로 핵심교리만 받아들이면 누구가 합류가 가능하며 세례같은 의식도 없다. 이런 확산으로 이합집산이던 아라비아부족은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정치, 사회적 틀을 갖게 되었다. 이슬람은 신의 사도인 무함마드 사후 그의 뜻에 따라 공동체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칭호인 칼리프가 다스리게 디었다. 물론 이 칼리프는 현재까지 이어진 것처럼 세 개로 쪼개진다. 

 이슬람의 핵심교리는 5가지로 신의 유일성을 증거하고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로 인정, 매일 5번의 기도, 수입의 일정 부분을 자선 목적으로 기부, 1년 중 특정 달에 금식, 평생 적어도 1회 이상 메카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확장하였다. 재밌는게 종교에 강요가 없었다. 다만 개종시 면세를 비롯한 혜택을 주므로 웬만하면 개종이 이루어졌다. 북아프리마의 기독교는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파로 이슬람과 비슷했다. 그들은 비잔틴의 통제를 따를 경우 니케아 공의회의 결론을 따라야 했으므로 차라리 이슬람 치하에서의 자유를 선호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노크가 있었던 지역에선 가나제국, 말리제국, 송가이제국이 차례로 부흥했다. 이들 역시 교류를 통해 이슬람을 받아들인다.

 이슬람은 사산 페르시아도 정복한다. 다만 페르시아의 오랜 역사에 아라비아의 문화는 거부되고 오직 이슬람만이 받아들여졌다. 이슬람의 선한 공동체,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을 대비한 인간의 행동은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했다.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것이니 당연했다. 이란에서는 무함마드의 사위와 그 아내인 페르시아의 공주 샤흐르바누의 아들은 후세인을 정통후계자로 여겼다. 그래서 시아파로 갈라져나왔으며 이들은 지금도 후세인의 순교일을 가장 중요한 날로 여긴다. 

 중국에선 수와 당이 들어섰다. 수는 대운하를 건설해 분열한 중국을 하나로 이루었다. 그는 교역망을 갖춘 불교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불교와 그 사찰을 비호하였다. 그리고 수당시절 인도로의 행렬이 이어진다. 중국인은 인도에서 얻은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개념을 한자로 표현해야했다. 마침 좋은 도구가 있었으니 도교다. 중국인은 도교의 여러 개념을 불교에 사용한다. 이렇게 중국 불교는 도교의 영향을 받았고 선불교가 탄생한다. 열반으로의 여정이 이승에서 융화를 이루는 참선기법으로 이어지고 선불교는 자연을 음미하고 관조적 은거를 선호했다. 당은 이렇게 운하로 양쯔강 유역의 여러 문화를 흡수해 불교, 도교, 유교사상이 혼합된 중국 특유의 문화를 형성한다.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 이후 여러 왕국이 흥망을 거듭하지만 사회 조직에 큰 영향이 없다. 항상 하나여야 하는 동심원적 세계관의 중국과는 달리 다층적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카스트가 지배적인 분위기에서 불교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거부된다. 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지 않았다.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종교적 성향으로 오히려 부처를 수많은 신 중 하나로 여겼다. 불교는 그렇게 인도 남부로 밀련고 남부에선 대승 불교를 거부한 상좌부불교, 소승불교로 거듭나게 된다.

 

7. 중세시대

중세에 중간세계인 이슬람 세계는 융성한다. 무슬림은 상업지향적 태도를 가졌고 그래서 번역이 중요했다. 그들은 도서관을 아라비아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동서고금의 주요사상과 저작으로 채운다. 그들은 여러 철학에 노출되 백과사전을 편찬하고 원대한 철학의 종합을 시도한다. 그들은 신이 유일무이하다면 세계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플라톤의 이데아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매료된다, 무슬림은 추상적 기본 원리를 탐색하고 완전하게 구현된 수학을 향한 관심을 보였다. 0을 숫자의 하나로 취급하고, 자릿값에 의한 계산법을 흡수했다. 그리고 특정한 미지수를 표기하는 방법을 추가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여러개의 가능한 값을 필요한 단일 값으로 압축하는 체계적 방법을 궁금해했다. 역서 대수학인 알자브라고 나왔고, 알고리즘을 뜻하는 왈콰리즘이나왔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문화가 특이하게도 온대가 아닌 열대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들도 대규모 기반 시설 건조에 착수했고, 정교한 예술품을 만들고, 수학 천문학을 발달시켰다. 차이는 다른 지역에선 물을 대는 것에 관심이 이었던데 반해, 열대지역이라 물의 제거에 몰두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다른 문명은 범람에 대처했고 이는 통제가능했으며 문명의 발전을 가속화했지만 아메리카는 강우량에 의존했고 이는 대처 불가능해 잦은 흥망성쇠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중세 유럽은 매우 가난했다. 로마에 비해 기술수준은 떨어지고 유지 관리가 안되며 기반시설이 붕괴하고 책을 읽고 쓸수 있는 자는 줄어들었다. 중세유럽은 교역을 싫어했고 돈을 의심했다. 그들은 진정한 부는 토지와 용사들의 용맹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유럽에선 이시기 노르만이 출몰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서로 떠난 사람들은 바이킹으로 불리고 영국에 도착하면 데인인 그리고 동으로가서는 루스인이라 불렸다. 동으로 떠난 이들은 교역을 주로 했는데 토착민인 슬라브인을 잡아다 비잔틴이나 이슬람에 노예로 팔았다. 그래서 노예의 영어 어원인 슬레이브다. 일부 루스인은 슬라브와 결탁해 하나가 되었고 지방귀족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루스인에서 러시아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러시아인은 비잔틴 근위대에도 들어가고 기독교로 개종해 그리스 정교회에 속하게 된다. 러시아인은 장사꾼으로 흑해 ,카스피해, 무슬림 시장과 맞닿아 활동했다. 이들은 지역의 하자르족을 거의 전멸시키고 중앙아시아 초원 세력과 대결하며 성장해 키예프 왕국을 세운다. 러시아 이전 초원의 유목민은 중앙아시아에서 우랄산맥과 흑해사이의 빈틈으로 이동했는데 여기를 러시아가 막아버린 것이다.  

 가난한 유럽도 다소 변화가 시작된다. 9세기 들어 소작농은 연장과 농법을 개선하는데 땅을 깊이 가는 심경과 쟁기에 옆널을 달아 흙을 뒤집는 장치를 달아 한번에 두가지 일을 하였다. 또한 북쪽 지방의 축축한 토질도 개간이 가능해져 농업생산량이 급증했고 3년에 한번 휴경하기 시작해 경작지가 25%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로 여유시간이 생기고 다양한 물품이 생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시장과 도회지가 생겨난다. 반면 생산성의 증가로 추방되는 농노도 늘어나 이들이 유랑하여 유민화하고 로빈후드 같은 이야기도 생겨난다. 


8. 십자군 전쟁, 몽골제국

 유럽기독교 왕국은 종교적 광신자들과 토지는 없고 전쟁에 목마른 기사들, 큰 야심을 품은 공작과 국왕들로 들끓었다. 십자군 전쟁은 이들에게 하나의 분출구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으로 향하는 항구도시가 형성되어 발칸반도는 육로 여행객에게 이탈리아 도시는 해로 여행객에게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가 가장 수혜를 보았는데 여기의 금세공업자들은 여행자의 주화및 귀금속을 교환한 후 나중에 그들이 돌아올때 다시 교환해주면 이득이 발생하는 것을 알아냈다. 은행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여행자의 귀금속을 보관해주고 증서를 발급한후 후에 수수료를 받고 귀금속을 다시 내주었다. 그리고 이 증서를 여러사람에게 유통되며 화폐역할을 한다. 유럽에 이슬람의 아라비아숫자, 자릿값, 십진법, 알고리즘, 대수학이 빠르게 도입되었다. 

 십자군은 레반트에 몇몇 왕국을 건설하였는데 이로 인해 유럽과 레반트간 거래가 늘어난다. 성전기사단은 중간에서 송금업무를 맡았으며 처음엔 직접 돈을 보내다 나중엔 돈을 보관하고 회계증서만 보내는 형태로 송금업무를 변화시켰다. 

 몽골제국은 유럽에 여러가지를 선사했다. 우선 여러 지역의 느슨한 교역망이 하나로 묶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히말라야의 토착병인 흑사병이 유럽에 퍼지게 된다. 1345년 몽골은 흑해도시 카파를 공격하며 흑사병에 걸린 시체를 성으로 던졌는데 카파는 살아남았지만 이 병이 이탈리아 시칠리아로 퍼져 유럽 전체 인구의 1/3을 죽이게 된다. 유럽의 영주는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고, 임금은 상승했고, 소작농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이주한다. 

 유럽에 선사한 또 다른 것은 경쟁자의 파괴다. 몽골은 유럽에 가진 않았지만 러시아 이슬람, 그리고 멀리는 중국을 파괴해 유럽의 경쟁자들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시가 연결로 많은 동양의 물품이 유럽에 전해지는데 화약, 소형화기, 인쇄 출판술, 의학지식, 화학실험장치, 증류기술, 기계식 시계, 자기나침반, 삼각돛, 육분의등이 그것이다. 

 한편 십자군 운동으로 유럽은 무슬림이라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기독교인은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며 유럽이라는 공동의식이 다소 생겨났다. 물론 이 정체성은 타자에 의해 생긴 것이기에 무슬림이라는 타자가 십자군 전쟁의 끝으로 사라지자 내부로 향해 종교재판으로 이어진다. 


9. 기울어진 추

 몽골제국으로 인한 파괴로 몽골 이후 중국과 이슬람에선 복원이라는 서사가 이루어진다. 이들은 과거 잘나가는 제국이었기에 복원은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유럽의 포르투갈인들은 캐러벨이라는 쾌속 범선을 제족했고, 스페인은 아메리카로 향했다. 스페인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돼지를 승선시켰는데 이 돼지가 신대륙에 가서 급속도로 퍼지며 유행성 균을 퍼뜨렸다. 때문에 스페인 침략자들은 토착민을 보기도 전에 이미 텅비어버린 도시나 마을을 보기 일수였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광산을 개발하고 대규모 농장을 조성한다. 포르투갈은 동으로 향해 아시아의 거점에 요새를 구축하고, 진귀한 아시아 물건을 구입해 큰 이문을 남긴다. 스페인에는 아메리카의 막대한 은이 유입되었는데 그들을 이를 생산성 강화에 쓰지 않고 전함건조, 군대 양성, 물품구입에 탕진한다. 반면 스페인에서 유입되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등으로 향한 은은 생산성 향상에 쓰인다. 

 경제도 크게 발전하는데 합자회사가 처음 등장한다. 뜻을 모은 상인 여러명이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자본을 여럿이 함께 대어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는 형태다. 유한책임회사도 나타나는데 영국 엘리자베스는 동인도 회사를 유한책임회사로 선포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식을 발행하는데 일부를 일반인에게 판매하고 그들에게 이익을 일부 나누고 주식의 판매도 허용한다. 

 유럽인은 당시 다양한 주화를 사용했는데 테두리를 깎아내거나 은 함량이 부족한 악화가 유행한다. 이에 네덜란드는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사업을 원하는 이는 누구나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고 계좌설립을 의무화 한다. 그후 그들의 주화가치를 중앙은행이 평가해 그 금액만큼 지폐를 발급하고 이로 인해 화폐는 불확실한 물질의 영역에서 벗어나 순수한 수학적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국은 윌리엄 3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은행업자들에게 100만파운드의 빚을 진다. 채권을 발급하였는데 이 채권이 사실상 양도가 가능한 화폐로 사용된다. 그리고 윌리엄은 이 빚을 갚지 않는다. 이 채권이 영국의 화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유럽인은 중국과 교역하며 그들의 차와 비단, 자기를 선호했다. 중국은 상거래에 사람들이 많의 쓰는 은을 사용했는데 은이 조정은 은을 세금으로 납부하게 하였고, 많은 중국인들은 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은의 공급처가 유럽이다. 정확히는 아메리카-유럽-중국으로 은이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차와 비단의 생산을 위해서는 경작지가 필요하였는데 쌀생산량이 부족한 중국에선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에 의해 신대륙에서 고구마, 감자, 옥수수등의 새작물이 들어오며 이들이 잘자라는 황무지가 새로운 경작지가 되어 식량 공급이 충분해졌다. 이에 차와 비단이 많이 공급되어 중국의 상인은 부를 축적한다. 

 한편 1600년이 되자 소빙하기로 중국에 흉작이 든다. 생계수단을 잃은 농민은 도시로 몰리지만 마침 이시기 스페인도 경제위기로 은 공급이 감소해 중국내 일자린 감소한 상황이었다. 이에 여기저가시 반란이 일어나고 이 틈을 타 청이 발흥해 중국을 차지한다. 영국은 인도 캘거타에 요새를 설치하고 인도인이 반발하자 플라시 전투로 벵골 지역을 차지한 후 인도 전체를 장악한다. 인도의 토양과 기후는 양귀비 재배에 무척 적합했는데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었다. 1800년 영국은 4500상자의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판매하고 1834년엔 4만 5천 상자를 판매한다. 마침내 아편 전쟁이 발발하고 영국은 승리하여 중국에 더 많은 항구의 개항과 치외 법권, 자유거래를 요구한다. 


10. 산업혁명의 기계가 바꾼 삶

 증기기관이 발명된다. 증기기관은 밀폐된 용기 내부에서의 연소작용으로 생기는 힘을 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여러 발명이 계속되는데 낱장 윤전 인쇄기는 시간당 무려 1만 8천장의 인쇄가 가능했다. 미국에서는 1833년 최고 유통물도 구독자가 4300에 불과했다. 당시 벤저민 데이는 뉴욕선을 창간하고 1부에 1페니라는 저가 정책으로 대박을 친다. 처음 신문은 살인이나 방화, 강도등의 사건을 실었지만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지라 뉴스를 찾아 돌아다니는 기자라는 직업이 생겨나게 된다. 

 전신기술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대서양 너머의 일도 알게 되었다. 대서양 횡단 통신은 당연히 매우 비쌌으므로 6개의 신문사가 전신비를 공동부담하는데 이것이 AP통신의 원조다. 한편 기계는 인간의 생물학적 기제를 교란하기 시작한다. 공장에서의 근무는 2교대, 3교대로 이루어졌고, 제트기로 시차적응문제가 생겨났으며 전기불로 밤낮의 정의가 바뀌었다. 

 기계는 가처분 소득을 보유한 유례없는 규모의 중산층 계급을 창출했다. 이들은 자신의 기능을 상품화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느정도의 풍요로움을 누릴수 있었다. 생산의 기계화로 인해 사람들은 대규모 혈족집단에서 핵가족, 개인으로 쪼개졌으며 사람들은 대규모로 직장을 찾아 이주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생산력은 엄청나서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사회나 개인의 생존에 직접 연관이 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기계는 성별에 따른 분업도 변화시켰다. 과거 여성은 가사 육아등 사적 영역을 남성은 전쟁, 정치, 사회등의 공적 영역을 맡았다. 하지만 기계가 등장하자 여자들과 가정을 결부시킬 필연성이 약해졌다. 여성의 공적사회진출을 활발해졌고 가사노동을 돕는 기계의 발명으로 가사노동의 필요성과 강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국민국가도 등장한다. 과거 제국은 넓었고 깊이가 없었다면 국민국가는 응집력이라는 깊이가 있다. 과거 제국의 국경은 애매했던 반면 국민국가의 국경은 지리적으론 가깝지가 서로가 천양지차다. 국민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삶에 국가가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통제하며 영토안에서 동일한 법률, 언어, 화폐가 사용된다. 이런 국민 국가의 등장으로 모든 제국내에서 자치권을 주장하는 신흥 국민국가세력이 등장하였고 그 결과 지금의 국경은 과거 제국시절부터 무척이나 촘촘하다. 하지만 국민국가역시 일치한 국민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분쟁과 독립요구는 현재진행형이다. 

 현대에 들어선 다국적 기업도 들어섰다. 다국적 기업은 경제적 이익을 쫓아 여러 국가에 진출한다. 다국적 기업은 꾸준히 그 규모를 키워 1970년대에 이르자 몇몇 기업들은 웬만한 국민 국가의 국내총생산 규모를 넘어서게 되었다.


이 책은 과거부터 현재를 망라하지만 과거에 대한 비중이 더 큰 책이다. 현대 부분에 들어서면 압축한듯 빨리 진행되는 느낌이 있을 정도다. 특이점등을 제시하며 미래에 대한 부분도 다르지만 현대 부분과 미래 부분은 다소 아쉽다. 물론 그랬다면 책은 580쪽이 아닌 780쪽 정도로 마무리 되었을 것 같긴 하다. 하여튼 과거 고대와 중세 부분에서 아쉬운 퍼즐을 좀 채울 수 있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