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 인류의 문화, 충돌, 연계의 빅 히스토리
타밈 안사리 지음, 박수철 옮김 / 커넥팅(Connecting)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인류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책은 적으면서도 많다. 그리고 하나 같이 재밌다. 이런 책들의 관점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데, 그 미묘한 차이를 보는 것도 재밌다.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의 세계가 서양이 만든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지배를 받는 만큼 이런 책들은 동서양의 운명을 가른 차이점도 반드시 살펴본다. 그 원인 역시 서로 매우 유사하면서도 약간 다르게 집어내는데, 지리적 차이, 그 지리적 차이가 만들어낸 철학과 사상의 차이, 종교적 차이, 지리에서 비롯된 농업과 생산형태의 차이,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사회문화적 구조의 차이등 다양하다.

 이런 류의 책들로 내가 본 것은 하라리의 '사피엔스 3부작 시리즈',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마빈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 시리즈', 이언 모리스의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루이스 다트넬의 '오리진'이 있다. 하나 같이 배울게 많은 책들이었다.

 이번 책은 '다시 보는 5만년의 역사'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보아서인지 특별한 것은 없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모르는 내용의 살을 채울만한 지식과 통찰이 돋보였다. 읽으면서 노트를 많이 한 것만 봐도 그랬다.

 책으로 들어가면 책 오리진 처럼 5500만년전 있었던 인도와 아시아의 충돌에서 시작한다. 이 충돌로 히말라야가 생성되었고, 인도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습기를 막아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많은 비가 내리게 해 이 지역에 울창한 열대우림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습기를 빠진 이 바람이 인도양을 돌아 동아프리카로 향하게 되어 정작 이 지역이 건조기후로 바뀌게 되었다. 이 환경변화는 인류의 진화를 이끌어낸다. 

 동아프리카 지역은 건조해져 울창한 숲에서 관목림으로 바뀌게 되고 인간의 조상은 나무에서 내려가 직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기후 변화가 잦아 환경변화에 따른 많은 진화와 지능의 발달을 촉발시켰다. 영장류는 도구를 사용하여 이런 환경변화에 적응하였고, 결정적으로 언어 사용으로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차별화되었다. 

 언어는 도구를 더욱 정교화시켰고, 도구 제작 발달을 가속화했다. 언어로 도구를 만드는 방법이 전수되고, 학습되어 기술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1. 강의 문명들

 문명은 강에서 발달했다. 나일강은 무려 6400km로 훌륭한 간선수로다. 강은 북으로 흐르지만 운이 좋게도 바람은 남으로 불어 양방향 통행이 가능했다. 여기서 발달한 이집트 문명은 방어에 매우 유리했는데 남쪽의 강상류는 지형이 험해 오기 힘들었고, 동쪽엔 위협 세력이 없었으며 지형도 거세고 메랄랐다. 서쪽은 알다시피 사하라다. 강에 의한 교류로 문명은 동질화했고, 강을 관리할 필요성으로 강력히 중앙집권화하였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는 나일처럼 지형에 따른 상하류의 구분이 없다. 때문에 하나의 연속적 문화가 형성되지 못했고, 개별적 관계망이 지금의 지도처럼 마구잡이로 나타났다. 거기에 사방이 탁트였다. 농경 및 유목 모두에 적합해 침략이 잦았으며 이에 따라 장벽으로 세운 도회지인 도시국가가 필연적이었다. 사방이 탁트였으니 인구대비 큰 규모의 군대도 필수다. 

 인더스 유역은 5천년전 무려 500만이 거주할정도로 탁월했다. 80km2 구역에 무려 1천개 이상의 도회지가 있을 정도였다. 유역이 물이 풍부해 관개가 매우 쉬웠고 농사도 잘되었다. 생산력이 높아 여가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초기문명인 하라파엔 예술, 공예, 공학이 발달한다. 하라파의 위쪽 히말라야 저편 고지대에는 유목민이 거주했다. 이들은 3500년전 하라파로 이주한다. 하라파가 세련된 도시민이자 벽돌로 큰 집과 창고를 건설했고, 대규모 농사와 풍요의 여신을 숭배했다면 유목이주민은 소농에 진흙, 대나무, 풀따위로 작은 오두막을 짓는 시골민이었다. 그들은 말을 탔고, 철제무기와 안장, 이륜전차를 갖고 있었으며 스테베엇 기원한 바람, 천둥, 태양, 불의 자연 남신을 섬겼다. 이들은 인더스에서 점차 동으로 이동해 갠지스에 이르렀으며 '베다인'이라 불렸다. 

 중국의 황하는 토양이 매우 건조하고 비옥했다. 관개가 필요했고 경사면이 가팔라 계단식 논밭이 필요했다. 황하는 교통 및 운송에 부적합해 동질적 문화가 생기지 않았으며 독자적 공동체가 강 유역을 따라 길게 형성되었다. 제방이 워낙 자주 범람해 재난 상황을 대비한 사전 권한 체계 구축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위계, 질서, 규율, 복종이 중시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하는 지혜를 알고 있는 연장자는 매우 중시되었고 이들은 심지어 죽어서도 숭배되었다. 이런 중국의 작은 공동체가 조금씩 합쳐져 마침내 하왕조를 형성한다.  


2. 유목세계

유럽동부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극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스텝 유목세계가 있다. 초원지대에 거의 평지라 중요한 발견, 발명, 기술이 스텝 유목 지대 양끝으로 빠르게 퍼질수 있었으며 이 전파에 속도를 붙인 것은 말이었다. 말의 가축화로 등자와 안장이 개발되었고, 말을 타기 위해 바지를 처음 입기 시작했다. 셔츠, 셔츠의 소매도 모두 말을 타기 위해 만든 복장이다. 말의 가축화로 유목민은 더욱 빠르고 멀리 퍼지게 되었는데 말의 기동력과 인근 지역의 풀을 남김없이 먹는 말의 습성때문이었다.

 스텝에선 말을 이용한 이륜전차도 발명했다. 제자리 회전이 가능했고, 기동력을 위해 가벼운 바큇살의 바퀴를 사용했다. 합성궁도 만들었는데 기존 활은 한 가닥의 나무로 활을 만들어 파괴력으 높이기 위해선 활이 장궁이어야 했다. 하지만 합성궁은 말발굽에서 만든 접착제로 여러가닥의 나무를 붙여 파괴력은 높이면서도 여전히 크기가 작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활이 작아져 말위에서의 기사가 가능해졌다. 

 유목민은 침략에도 능했지만 교역에도 능했다. 정보망이 널리 퍼진 그들은 어느 장소에 좋은 물건이 있고 어디에서 그것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다. 그들은 교역망을 형성하고 도로와 오솔길을 만들어냈으며 이들의 교역로가 교차하는 곳에 자연히 도시가 형성되었다. 유명한 곳이 페트라인데 농경에 부적합하지만 홍해와 레반트 해안, 페르시아 항구사이를 오갈때 지나야 하는 협곡의 암벽 사이에 위치한 곳이다. 

 고대의 가장 분주한 교역망은 소아시아-이란고원-아프간 지역을 잇는 곳으로 여기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등 고대 4대문명이 모두 접한다. 이 지역엔 거칠고 메마른 땅이 다수지만 수많은 개울이 흘러 이 개울을 따라 작은 자급자족형 촌락과 유목민이 거주했다. 이들은 4대 문명의 세련된 도심지를 교역으로 이었고, 아랄해, 카스피해, 흑해, 지중해, 에게해, 아무다리야강, 홍해, 페르시아만, 인더스강 등의 수역이 있어 원거리 교역에 더욱 유리했다. 


3. 다른 지역들

 지중해는 대양만큼 크지만 막혀서 잔잔하다. 흑해와 통하고, 홍해와 인접했고 폭풍이 없으며, 폭포와 습지가 없어 교역에 적합했다. 온대 기후여서 해안 풍경이 다양했고 환경의 차이로 지역마다 산물이 달라 교역이 활성화했다. 지중해의 문명은 크레타-페니키아-미케네로 이동한다.

 사하라 이남은 인구가 희박했다. 대륙중심부는 밀림으로 농사에 부적합했고, 모기와 체체파리등이 있어 인구손실이 많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사하라 이남의 서아프리카는 사정이 좀 달랐다. 노크문명이 발달해 들판을 경작하고 소떼를 돌보았다. 북쪽과 달리 독자적 구리 제련법을 알아냈고 기원전 1000년경 철기시대에 진입했다. 기원전 500년 이 노트인은 사라졌는데 아무래도 환경파괴로 아프리카 이남으로 이동하면 세력을 넓힌것 같다. 사하라 이남에선 반투어가 공통어인데 아무래도 반투어의 사용자가 노크인의 후손인듯 하다. 반투어 사용자들은 철제도구가 있어 나무를 자르고 관목지대를 뚫고 식물의 뿌리를 캐내어 적도의 숲을 통과하고 농경을 할 수 있었다. 철제 무기는 기존 수렵채집인을 물리치기에도 충분히 강력했다. 반투는 농경후 토질이 떨어지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관목을 태워 토질을 확보했는데 관목이 모두 사라지면 이동하는 식이었다. 동아프리카까지 이동한 그들은 중간세계의 교역망에 편입하였고, 그 결과 아랍어와 섞인 스와힐리어가 탄생한다. 


4. 서사의 등장

 인류의 원시적 거대 서사는 당연히 특정 환경이라는 지리적 조건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거대서사는 점차 커지면서 진실과, 거짓, 부적절한 것들을 흡수하고 걸러내며 더욱 그럴듯해져갔는데 이후에는 지리적 조건을 넘어서 진실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지리적 조건에 의한 상호의존성으로 모두가 서로 은혜를 입고 은혜를 베푸는 관계가 되었다. 삶은 하나의 사회적 부채망의 연결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를 집대성한 것은 공자로 그는 모든 사람이 개별 상황에서 도덕적 통찰력을 갖는게 가능하다 보았다. 그리고 사회적 과업에 발맞춤으로써 모든 사람이 의미와 목적 있는 삶을 영위하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이상사회를 위한 처방이었고, 이상사회는 제국과 가정에서의 삶이 쌍둥이 같았다. 

 중국이 세상을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동심원처럼 보았다면 인도에서 세상은 다층세계였다. 인도의 신은 역동적이고 여러 차원에 존재했으며 사회에는 카스트가 있었다. 갠지스의 철학자들은 우파니샤드라는 성가를 통해 세상을 환상으로 여기고 실재를 단일하고 통합된 전체로 바라보는 시각을 완성했다. 우파니샤드엔 우주의 철학인 카르마가 담겨있다. 

 인도 하라파 문명의 전성기에 아리아인이 남하한다.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무리는 인더스로 향해 산스크리트어와 베다, 다층신, 데바(악)와 아수라(선)를 만들었다. 다른 무리는 이란으로 향해 아베스타어, 양극신, 다에바(선)와 아후라(악)을 만들었다. 인도에선 사라진 불의 신 아그니와 미트라가 이란에선 인가가 좋았고 아그니는 이후 생명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로 미트라는 계약의 신으로 자리한다. 이란 고원이 교역의 중심지이니 계약의 신은 당연히 중요했다. 

 이란의 신은 동심원과 다층성으 모두 버리고 직선으로 투쟁과 결말이 중요하는 세계관을 갖는다. 조로아스터는 30세에 아후르에게 계시를 받는다. 아후라는 자신만큼 강한 아리만과 투쟁관계의 신이다. 인간은 우주차원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대결사이에 존재하며 그로 인해 선과 악사이에서 자유의지를 갖고 도덕적 선택이 가능하며 이 선택이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조로아스터교의 성향은 향후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늘 잦은 권력 교체로 불변의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았다. 도시마다 신이 많았으며 점령당하거나 점령해도 그 신들은 부정되지 않았다. 다만 힘의 차이로 인해 어떤 신이 더 강하고 약한지 정도가 있었으며 자신이 잘못을 하면 신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즉, 한 도시가 다른 도시에 패배하면 자신들의 잘못으로 신에게 보호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메소포타미아의 남부에서 히브리가 생겨난다. 아브라함의 인도로 이들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를 거쳐 북으로 이동하다 다시 서로가서 지중해 해변으로 다시 남으로 가서 레반트의 가나안에 정착해 농사를 짓는다. 이후 이집트에 머무른다. 이는 성경에 잘 나와있는데 아무래도 유목민 차원에서의 이주인듯 하다. 

 히브리는 불과 풍요의 신 야훼를 섬겼다. 그들은 각 가정마다 신성한 돌을 갖고 있었는데, 성궤라는 휴대용 용기에 이 돌을 넣고 이동했다. 잦은 이동을 하는 유목민이니 성전따윈 없었다. 히브리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전락하고 십계 이후에 다시 레반트로 돌아간다. 거기서 처음으로 정착해 이스라엔, 유다왕국을 세워 번성하고 성전도 짓지만 바빌로니아에 정복되어 성전이 파괴되고 50년간 바빌론에 끌려가 비참하게 생활한다. 

 이시기 에스겔과 이사야 같은 선지자는 고통의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특유의, 우리가 잘못해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서사를 전개한다. 히브리는 이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 최초로 유일신 개념을 만들어낸다. 신은 물리적 형태가 없고, 신전이 아닌 모든 곳에 존재하며, 그로 인해 신상은 신성모독이 된다. 유대는 지역 특유의 부족사에서 벗어나 과거, 현재, 미래를 종합하는 종교적 서사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에 상당히 영향을 받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신보다 더 크고 무관한 자연의 세계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심사가 뒤틀리는 신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지만 잘 살아남으려면 자연도 잘 알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신에 의한 운명의 필연성도 받아들이지만 현실세계에서 잘 살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삶도 중시했다.  


5. 고대 제국의 통치수단

 고대에서 하나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속도는 하나의 권력이 통치할 수 있는 영역의 크기를 결정했다. 선사시대는 그래서 통치반경이 최대 48km였고, 말을 이용한 고대 국가는 최대 560km가 되었다. 그리고 메시지 내용의 정확한 전달을 위해 문자가 사용되었다. 

 페니키아는 인간이 낼 수 있는 몇 십가지에 불과한 소리를 표시하는 문자를 개발한다. 간략한 몇가지 음소로 거의 무한대 단어 생성이 가능했다. 중국은 한자를 개발한다. 상형문자에서 표의문자로 발달하여 문자 자체가 언어가 되었다. 한자는 매우 어렵고 페니키아것보다 뒤떨어지지만 특정한 입말에서 벗어난 문자이므로 권력자가 중국이라는 여려 언어를 쓰는 백성을 다스리기에 적합했다. 

 숫자는 상인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 사물에서 벗어나 고유의 기호로 표현 가능한 항목이었고 문자보다도 더욱 문화적 경계를 건널 수 있었다. 

 화폐도 생겨난다. 화폐는 물물교환의 대체수단이라기 보다는 신용과 부채의 계산에서 생겨났다. 왕이 백성에게 납세수단으로 받은 물품은 대개 화폐가 되었다. 

 이처럼 고대국가는 거대 서사, 문자, 화폐, 숫자로 연결되었다.


6. 고대국가들과 종교의 탄생

중국은 역사 신화에서 달과 해가 다니는 길 같은 초자연적 능력을 지난 삼황과 농사, 문화, 비단등 실생활을 만들어낸 오제를 중시한다. 그리고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이 삼황과 오제가 하나가 된 최초의 사람이다. 하지만 시황제의 진은 일찍 망하고 한이 그 뒤를 잇는다. 중국의 한은 유교질서의 회복이 목표였다. 그래서 고대 경전에서 학식을 입증한 남자들을 공무원을 사용한다. 한자는 익히기 어려워 관료들이 중국 특유의 지적, 정치적 지도층을 형성하게 된다.

 로마는 기원전 509년 왕을 축출하고 수백의 남자로 구성한 원로원이 나라를 다스린다. 원로원은 해마다 두명의 집정관을 선출해 독재를 막았다. 지주와 소작농, 귀족과 평민 갈등이 심해지자 평민대표인 호민관이 선출되었고 호민관은 원로원의 제안에 거부하는 단 하나의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12표법이 완성되어 귀족, 원로원보다 높은 최고의 개념이 생겨났다.

 중국 인근에선 월지가 다른 유목민은 흉노에 패한다. 월지는 이주하여 중앙아시아에 쿠샨제국을 세우는데 쿠샨은 인더스에서 아랄해에 이르렀다.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쿠샨은 그리스 일부 제국의 해체과정에서 그리스 유산과 인도의 힌두교, 불교를 모두 흡수한다. 본디 불교도는 부처의 신상을 거부하지만 쿠샨은 그리스 색채로 부처상을 조각해 그리스 조각같은 분위기로 만들어낸다. 이란의 미트라신은 본래 계약의 신이지만 쿠샨에선 인간 어머니와 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초자연적 존재로 변모한다. 그로 인해 미트라는 영원성과 일시성의 경계에 위치하며 중간이기에 인간을 죽음에서 영원으로 이끄를 존재가 된다. 그래서 미트라는 불교의 열반과 극락이 혼존하는 세계에서 극락세계로 넘어가기를 원하는 이를 경계선에서 돕는 고귀한 미륵보살이 된다. 

 그리고 대승불교가 탄생한다. 쿠샨제국은 교역의 중심지다. 원거리 교역과 불자들이 섞이다 보니 한층 더 상업적 불교가 되었고 현실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면서도 구원을 원하는 이들을 도울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모두가 열반을 위한 고된 생활과 명상이 없이도 소수의 경건한 승려가 미륵보살처럼 도우면 열반에 이를수 있따는 대승불교가 탄생한다. 상인과 일반인들은 승려를 지원하면 되었고 산이나 숲 혹은 돌아다니는 승려가 머물며 일반인을 위해 수련하는 사찰이 탄생하게 된다. 불교사찰은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재물을 받았고 이를 사적으로 쓰기보다는 교역에 투자한다. 즉, 평신도는 불교사찰을 통해 자신의 구제와 교역에 모두 공헌하는 셈이었다. 

 로마는 파르티아에서 이 미트라 밀교를 접한다. 미트라 밀교엔 동정녀 아나히타가, 미트라의 생일은 12월 25일, 미트라 옆엔 황도 12궁에 해당하는 12제자가 있다. 기독교가 그대로 베낀 셈이다. 한편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에 이어 로마에도 땅을 빼앗겼다. 전보다 더 초조해졌고 유일신을 넘어 이젠 해방의 길로 이끌 권능을 신에게 부여받은 구세주를 찾게 되었다. 구세주를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 두드러진 선각자가 요한이었고 그에게 세례를 받은 예수가 돋보였다. 사실 그는 처형당하기 전까지 세력이 그리 크지 않았지만 처형후 부활에 대한 소문이 돌면서 신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로써 예수의 추종자들은 정통 유대교에서 이탈하였고 두 가지가 수정되었다. 하나는 구원이 하느님과 유대인만이 아닌 하느님과 전 인류의 서약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세주인 예수가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라느니 것이다. 이는 로마제국에서 잘 수용할 만한 개념이었다. 기존 그리스 로마의 신과 세속세계의 공존, 그리고 구원의 대상을 넓혀 실제 주민의 삶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로마가 노예제, 불평등으로 비대해지며 국가기능을 상실해가지 일반 피지배층의 삶은 더욱 기독교 조직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를 본따 속주의 총독처럼 교구를 편성하고 주교를 임명했다. 그리고 자연히 로마주교가 가장 권위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의 황제가 이 기독교 조직을 제국통치에 활용하고자 공인하기에 이른다. 

 게르만족은 유목민처럼 느껴지지만 아니다. 그들이 거주한 로마 외곽은 넓은 초원지대가 아닌 울창한 삼림이며 그들은 이런 농경에 부적합 땅에서 옮겨다니며 농경을 하는 시골민에 가까웠다. (진짜 유목민이었으면 훈족에 그리 밀리진 않았을 것이다.) 게르만은 로마 국경에서 로마인과 교륙하고, 동화되고 때론 다투었다. 그렇게 게르만은 로마의 외부자에서 내부자가 되어갔다. 우리 생각처럼 로마의 멸망은 게르만의 대대적 침공이 아닌 서서히 이루어진 침투에 의해 자리를 내어준 것에 가깝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유사하다. 유일신에 기독교와는 달리 종교와 세속적 삶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슬람은 부족을 넘어선 초공동체주의로 핵심교리만 받아들이면 누구가 합류가 가능하며 세례같은 의식도 없다. 이런 확산으로 이합집산이던 아라비아부족은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정치, 사회적 틀을 갖게 되었다. 이슬람은 신의 사도인 무함마드 사후 그의 뜻에 따라 공동체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칭호인 칼리프가 다스리게 디었다. 물론 이 칼리프는 현재까지 이어진 것처럼 세 개로 쪼개진다. 

 이슬람의 핵심교리는 5가지로 신의 유일성을 증거하고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로 인정, 매일 5번의 기도, 수입의 일정 부분을 자선 목적으로 기부, 1년 중 특정 달에 금식, 평생 적어도 1회 이상 메카를 방문하는 것이다. 이슬람은 확장하였다. 재밌는게 종교에 강요가 없었다. 다만 개종시 면세를 비롯한 혜택을 주므로 웬만하면 개종이 이루어졌다. 북아프리마의 기독교는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파로 이슬람과 비슷했다. 그들은 비잔틴의 통제를 따를 경우 니케아 공의회의 결론을 따라야 했으므로 차라리 이슬람 치하에서의 자유를 선호했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노크가 있었던 지역에선 가나제국, 말리제국, 송가이제국이 차례로 부흥했다. 이들 역시 교류를 통해 이슬람을 받아들인다.

 이슬람은 사산 페르시아도 정복한다. 다만 페르시아의 오랜 역사에 아라비아의 문화는 거부되고 오직 이슬람만이 받아들여졌다. 이슬람의 선한 공동체,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을 대비한 인간의 행동은 조로아스터교와 유사했다.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것이니 당연했다. 이란에서는 무함마드의 사위와 그 아내인 페르시아의 공주 샤흐르바누의 아들은 후세인을 정통후계자로 여겼다. 그래서 시아파로 갈라져나왔으며 이들은 지금도 후세인의 순교일을 가장 중요한 날로 여긴다. 

 중국에선 수와 당이 들어섰다. 수는 대운하를 건설해 분열한 중국을 하나로 이루었다. 그는 교역망을 갖춘 불교세력을 이용하기 위해 불교와 그 사찰을 비호하였다. 그리고 수당시절 인도로의 행렬이 이어진다. 중국인은 인도에서 얻은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개념을 한자로 표현해야했다. 마침 좋은 도구가 있었으니 도교다. 중국인은 도교의 여러 개념을 불교에 사용한다. 이렇게 중국 불교는 도교의 영향을 받았고 선불교가 탄생한다. 열반으로의 여정이 이승에서 융화를 이루는 참선기법으로 이어지고 선불교는 자연을 음미하고 관조적 은거를 선호했다. 당은 이렇게 운하로 양쯔강 유역의 여러 문화를 흡수해 불교, 도교, 유교사상이 혼합된 중국 특유의 문화를 형성한다. 

 인도는 마우리아 왕조 이후 여러 왕국이 흥망을 거듭하지만 사회 조직에 큰 영향이 없다. 항상 하나여야 하는 동심원적 세계관의 중국과는 달리 다층적 세계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카스트가 지배적인 분위기에서 불교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거부된다. 불교는 힌두교에 흡수되지 않았다.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종교적 성향으로 오히려 부처를 수많은 신 중 하나로 여겼다. 불교는 그렇게 인도 남부로 밀련고 남부에선 대승 불교를 거부한 상좌부불교, 소승불교로 거듭나게 된다.

 

7. 중세시대

중세에 중간세계인 이슬람 세계는 융성한다. 무슬림은 상업지향적 태도를 가졌고 그래서 번역이 중요했다. 그들은 도서관을 아라비아어와 페르시아어로 번역한 동서고금의 주요사상과 저작으로 채운다. 그들은 여러 철학에 노출되 백과사전을 편찬하고 원대한 철학의 종합을 시도한다. 그들은 신이 유일무이하다면 세계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플라톤의 이데아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매료된다, 무슬림은 추상적 기본 원리를 탐색하고 완전하게 구현된 수학을 향한 관심을 보였다. 0을 숫자의 하나로 취급하고, 자릿값에 의한 계산법을 흡수했다. 그리고 특정한 미지수를 표기하는 방법을 추가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여러개의 가능한 값을 필요한 단일 값으로 압축하는 체계적 방법을 궁금해했다. 역서 대수학인 알자브라고 나왔고, 알고리즘을 뜻하는 왈콰리즘이나왔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문화가 특이하게도 온대가 아닌 열대지역에서 일어났다. 그들도 대규모 기반 시설 건조에 착수했고, 정교한 예술품을 만들고, 수학 천문학을 발달시켰다. 차이는 다른 지역에선 물을 대는 것에 관심이 이었던데 반해, 열대지역이라 물의 제거에 몰두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다른 문명은 범람에 대처했고 이는 통제가능했으며 문명의 발전을 가속화했지만 아메리카는 강우량에 의존했고 이는 대처 불가능해 잦은 흥망성쇠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중세 유럽은 매우 가난했다. 로마에 비해 기술수준은 떨어지고 유지 관리가 안되며 기반시설이 붕괴하고 책을 읽고 쓸수 있는 자는 줄어들었다. 중세유럽은 교역을 싫어했고 돈을 의심했다. 그들은 진정한 부는 토지와 용사들의 용맹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유럽에선 이시기 노르만이 출몰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서로 떠난 사람들은 바이킹으로 불리고 영국에 도착하면 데인인 그리고 동으로가서는 루스인이라 불렸다. 동으로 떠난 이들은 교역을 주로 했는데 토착민인 슬라브인을 잡아다 비잔틴이나 이슬람에 노예로 팔았다. 그래서 노예의 영어 어원인 슬레이브다. 일부 루스인은 슬라브와 결탁해 하나가 되었고 지방귀족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루스인에서 러시아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러시아인은 비잔틴 근위대에도 들어가고 기독교로 개종해 그리스 정교회에 속하게 된다. 러시아인은 장사꾼으로 흑해 ,카스피해, 무슬림 시장과 맞닿아 활동했다. 이들은 지역의 하자르족을 거의 전멸시키고 중앙아시아 초원 세력과 대결하며 성장해 키예프 왕국을 세운다. 러시아 이전 초원의 유목민은 중앙아시아에서 우랄산맥과 흑해사이의 빈틈으로 이동했는데 여기를 러시아가 막아버린 것이다.  

 가난한 유럽도 다소 변화가 시작된다. 9세기 들어 소작농은 연장과 농법을 개선하는데 땅을 깊이 가는 심경과 쟁기에 옆널을 달아 흙을 뒤집는 장치를 달아 한번에 두가지 일을 하였다. 또한 북쪽 지방의 축축한 토질도 개간이 가능해져 농업생산량이 급증했고 3년에 한번 휴경하기 시작해 경작지가 25%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로 여유시간이 생기고 다양한 물품이 생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시장과 도회지가 생겨난다. 반면 생산성의 증가로 추방되는 농노도 늘어나 이들이 유랑하여 유민화하고 로빈후드 같은 이야기도 생겨난다. 


8. 십자군 전쟁, 몽골제국

 유럽기독교 왕국은 종교적 광신자들과 토지는 없고 전쟁에 목마른 기사들, 큰 야심을 품은 공작과 국왕들로 들끓었다. 십자군 전쟁은 이들에게 하나의 분출구였다. 십자군 전쟁으로 동으로 향하는 항구도시가 형성되어 발칸반도는 육로 여행객에게 이탈리아 도시는 해로 여행객에게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가 가장 수혜를 보았는데 여기의 금세공업자들은 여행자의 주화및 귀금속을 교환한 후 나중에 그들이 돌아올때 다시 교환해주면 이득이 발생하는 것을 알아냈다. 은행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여행자의 귀금속을 보관해주고 증서를 발급한후 후에 수수료를 받고 귀금속을 다시 내주었다. 그리고 이 증서를 여러사람에게 유통되며 화폐역할을 한다. 유럽에 이슬람의 아라비아숫자, 자릿값, 십진법, 알고리즘, 대수학이 빠르게 도입되었다. 

 십자군은 레반트에 몇몇 왕국을 건설하였는데 이로 인해 유럽과 레반트간 거래가 늘어난다. 성전기사단은 중간에서 송금업무를 맡았으며 처음엔 직접 돈을 보내다 나중엔 돈을 보관하고 회계증서만 보내는 형태로 송금업무를 변화시켰다. 

 몽골제국은 유럽에 여러가지를 선사했다. 우선 여러 지역의 느슨한 교역망이 하나로 묶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히말라야의 토착병인 흑사병이 유럽에 퍼지게 된다. 1345년 몽골은 흑해도시 카파를 공격하며 흑사병에 걸린 시체를 성으로 던졌는데 카파는 살아남았지만 이 병이 이탈리아 시칠리아로 퍼져 유럽 전체 인구의 1/3을 죽이게 된다. 유럽의 영주는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고, 임금은 상승했고, 소작농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이주한다. 

 유럽에 선사한 또 다른 것은 경쟁자의 파괴다. 몽골은 유럽에 가진 않았지만 러시아 이슬람, 그리고 멀리는 중국을 파괴해 유럽의 경쟁자들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시가 연결로 많은 동양의 물품이 유럽에 전해지는데 화약, 소형화기, 인쇄 출판술, 의학지식, 화학실험장치, 증류기술, 기계식 시계, 자기나침반, 삼각돛, 육분의등이 그것이다. 

 한편 십자군 운동으로 유럽은 무슬림이라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기독교인은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며 유럽이라는 공동의식이 다소 생겨났다. 물론 이 정체성은 타자에 의해 생긴 것이기에 무슬림이라는 타자가 십자군 전쟁의 끝으로 사라지자 내부로 향해 종교재판으로 이어진다. 


9. 기울어진 추

 몽골제국으로 인한 파괴로 몽골 이후 중국과 이슬람에선 복원이라는 서사가 이루어진다. 이들은 과거 잘나가는 제국이었기에 복원은 당연한 것이었다. 한편 유럽의 포르투갈인들은 캐러벨이라는 쾌속 범선을 제족했고, 스페인은 아메리카로 향했다. 스페인은 무슬림과 유대인이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돼지를 승선시켰는데 이 돼지가 신대륙에 가서 급속도로 퍼지며 유행성 균을 퍼뜨렸다. 때문에 스페인 침략자들은 토착민을 보기도 전에 이미 텅비어버린 도시나 마을을 보기 일수였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광산을 개발하고 대규모 농장을 조성한다. 포르투갈은 동으로 향해 아시아의 거점에 요새를 구축하고, 진귀한 아시아 물건을 구입해 큰 이문을 남긴다. 스페인에는 아메리카의 막대한 은이 유입되었는데 그들을 이를 생산성 강화에 쓰지 않고 전함건조, 군대 양성, 물품구입에 탕진한다. 반면 스페인에서 유입되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등으로 향한 은은 생산성 향상에 쓰인다. 

 경제도 크게 발전하는데 합자회사가 처음 등장한다. 뜻을 모은 상인 여러명이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자본을 여럿이 함께 대어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는 형태다. 유한책임회사도 나타나는데 영국 엘리자베스는 동인도 회사를 유한책임회사로 선포한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식을 발행하는데 일부를 일반인에게 판매하고 그들에게 이익을 일부 나누고 주식의 판매도 허용한다. 

 유럽인은 당시 다양한 주화를 사용했는데 테두리를 깎아내거나 은 함량이 부족한 악화가 유행한다. 이에 네덜란드는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사업을 원하는 이는 누구나 중앙은행에 돈을 맡기고 계좌설립을 의무화 한다. 그후 그들의 주화가치를 중앙은행이 평가해 그 금액만큼 지폐를 발급하고 이로 인해 화폐는 불확실한 물질의 영역에서 벗어나 순수한 수학적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영국은 윌리엄 3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은행업자들에게 100만파운드의 빚을 진다. 채권을 발급하였는데 이 채권이 사실상 양도가 가능한 화폐로 사용된다. 그리고 윌리엄은 이 빚을 갚지 않는다. 이 채권이 영국의 화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유럽인은 중국과 교역하며 그들의 차와 비단, 자기를 선호했다. 중국은 상거래에 사람들이 많의 쓰는 은을 사용했는데 은이 조정은 은을 세금으로 납부하게 하였고, 많은 중국인들은 은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은의 공급처가 유럽이다. 정확히는 아메리카-유럽-중국으로 은이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차와 비단의 생산을 위해서는 경작지가 필요하였는데 쌀생산량이 부족한 중국에선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에 의해 신대륙에서 고구마, 감자, 옥수수등의 새작물이 들어오며 이들이 잘자라는 황무지가 새로운 경작지가 되어 식량 공급이 충분해졌다. 이에 차와 비단이 많이 공급되어 중국의 상인은 부를 축적한다. 

 한편 1600년이 되자 소빙하기로 중국에 흉작이 든다. 생계수단을 잃은 농민은 도시로 몰리지만 마침 이시기 스페인도 경제위기로 은 공급이 감소해 중국내 일자린 감소한 상황이었다. 이에 여기저가시 반란이 일어나고 이 틈을 타 청이 발흥해 중국을 차지한다. 영국은 인도 캘거타에 요새를 설치하고 인도인이 반발하자 플라시 전투로 벵골 지역을 차지한 후 인도 전체를 장악한다. 인도의 토양과 기후는 양귀비 재배에 무척 적합했는데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었다. 1800년 영국은 4500상자의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판매하고 1834년엔 4만 5천 상자를 판매한다. 마침내 아편 전쟁이 발발하고 영국은 승리하여 중국에 더 많은 항구의 개항과 치외 법권, 자유거래를 요구한다. 


10. 산업혁명의 기계가 바꾼 삶

 증기기관이 발명된다. 증기기관은 밀폐된 용기 내부에서의 연소작용으로 생기는 힘을 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여러 발명이 계속되는데 낱장 윤전 인쇄기는 시간당 무려 1만 8천장의 인쇄가 가능했다. 미국에서는 1833년 최고 유통물도 구독자가 4300에 불과했다. 당시 벤저민 데이는 뉴욕선을 창간하고 1부에 1페니라는 저가 정책으로 대박을 친다. 처음 신문은 살인이나 방화, 강도등의 사건을 실었지만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지라 뉴스를 찾아 돌아다니는 기자라는 직업이 생겨나게 된다. 

 전신기술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대서양 너머의 일도 알게 되었다. 대서양 횡단 통신은 당연히 매우 비쌌으므로 6개의 신문사가 전신비를 공동부담하는데 이것이 AP통신의 원조다. 한편 기계는 인간의 생물학적 기제를 교란하기 시작한다. 공장에서의 근무는 2교대, 3교대로 이루어졌고, 제트기로 시차적응문제가 생겨났으며 전기불로 밤낮의 정의가 바뀌었다. 

 기계는 가처분 소득을 보유한 유례없는 규모의 중산층 계급을 창출했다. 이들은 자신의 기능을 상품화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느정도의 풍요로움을 누릴수 있었다. 생산의 기계화로 인해 사람들은 대규모 혈족집단에서 핵가족, 개인으로 쪼개졌으며 사람들은 대규모로 직장을 찾아 이주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생산력은 엄청나서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사회나 개인의 생존에 직접 연관이 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기계는 성별에 따른 분업도 변화시켰다. 과거 여성은 가사 육아등 사적 영역을 남성은 전쟁, 정치, 사회등의 공적 영역을 맡았다. 하지만 기계가 등장하자 여자들과 가정을 결부시킬 필연성이 약해졌다. 여성의 공적사회진출을 활발해졌고 가사노동을 돕는 기계의 발명으로 가사노동의 필요성과 강도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국민국가도 등장한다. 과거 제국은 넓었고 깊이가 없었다면 국민국가는 응집력이라는 깊이가 있다. 과거 제국의 국경은 애매했던 반면 국민국가의 국경은 지리적으론 가깝지가 서로가 천양지차다. 국민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삶에 국가가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통제하며 영토안에서 동일한 법률, 언어, 화폐가 사용된다. 이런 국민 국가의 등장으로 모든 제국내에서 자치권을 주장하는 신흥 국민국가세력이 등장하였고 그 결과 지금의 국경은 과거 제국시절부터 무척이나 촘촘하다. 하지만 국민국가역시 일치한 국민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분쟁과 독립요구는 현재진행형이다. 

 현대에 들어선 다국적 기업도 들어섰다. 다국적 기업은 경제적 이익을 쫓아 여러 국가에 진출한다. 다국적 기업은 꾸준히 그 규모를 키워 1970년대에 이르자 몇몇 기업들은 웬만한 국민 국가의 국내총생산 규모를 넘어서게 되었다.


이 책은 과거부터 현재를 망라하지만 과거에 대한 비중이 더 큰 책이다. 현대 부분에 들어서면 압축한듯 빨리 진행되는 느낌이 있을 정도다. 특이점등을 제시하며 미래에 대한 부분도 다르지만 현대 부분과 미래 부분은 다소 아쉽다. 물론 그랬다면 책은 580쪽이 아닌 780쪽 정도로 마무리 되었을 것 같긴 하다. 하여튼 과거 고대와 중세 부분에서 아쉬운 퍼즐을 좀 채울 수 있는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년 5월 9일인 어제는 날이 무척 좋았다. 어버이날 답지 않았던 8일과 7일의 날씨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도 원인과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둘 다 강한 바람이다. 어제는 인천 송도에 가야했다. 느즈막하게 결혼하게 된 동생의 상견례 때문이다. 반드시 가야하고 늦지 않아야 하는 만남이니 걱정이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이 강원도 원주라서다. 

 원주에 살게 되면서 이곳 저곳 가보았지만 인천은 처음이었다. 운전하면 막히지 않을까? 차는 있나? 몇 주전부터 걱정만 하고 좀처럼 계획을 수립하지 않던 내게 아내가 직접 고속버스편과 시간을 알아봐주었다. 가는 표는 현장구매만 가능했지만 돌아오는 표는 예매가 가능해 예매해주었다. 보통 서울을 운전해서 차로 갔던 경험해 비출때 원주에서 인천까지는 그래도 3시간은 걸릴거란 생각이 들었다. 인천은 먼 곳 아닌가. 거기에 송도는 더욱 끝이니까. 

 그래서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보통 지식으로 꽉 찬 책들은 노트 필기하면서 보는 편이니 제외되었다. 그래서 그럴 필요가 없는 집에 몇 안되는 소설을 출발을 앞두고 부랴부랴 골랐다.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가 보였다. 사놓고 무려 10년 가까이 안보고 있는 책이다.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빨리 나가지 못하고 책이나 고르고 있는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아내의 잔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차 싶어 얼릉 고르고 집을 나섰다. 당행히 인천가는 차엔 빈 자리가 많았고, 성공적으로 한적한 자리에 착석하여 벨트까지 멘후 주변에 누가 있는지를 잠시 살핀 뒤 책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웬 걸 시작이 이상하다. 에코 책이 전반적으로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너무 이상했다. 앞부분이 너무 비어있게 이야기기 시작되었다. 이건 뭘까 싶어 불길한 마음에 책의 앞부분을 보니 '프라하의 묘지 2'라고 적혀있었다. 1권이 아닌 2권을 가져온 것이었다. 이것도 색다른 경험이려니 하고 그냥 2권부터 볼까하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길이 열렸다. 나에겐 가상의 책장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를 것이다. 스마폰을 꺼내 전자책 서재를 열었다. 처음엔 계획대로 문학을 보려고 했는데 마구 넘기다 보니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가 보였다. 프라하의 묘지 만큼은 아니지만 이 역시 오랜기간 묵혀놓은 책이었다. 그래서 버스에서 이 책을 보기 시작했고, 오며 가며 완독하게 되었다.

 책은 2017년에 다시 나왔지만 사실 2009년에 나왔던 책이다. 2009년은 정치인 유시민이 노무현의 죽음을 목도하고, 보수정권의 등장으로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리고 유시민 개인적으로는 정치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시점이며 더욱 개인적으로는 그의 딸이 대학에 입학한 시점이었다. 유시민으로선 자신이 그간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행한 많은 노력이 처절한 실패처럼 보이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영향을 강하게 준 방향타 같았던 책들을 다시 보며 흔들리는 마음을 재확인하고 싶은 심정과 사랑하는 딸이 대학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좋은 책들을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만들어진 듯 하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책들은 모두 저자 유시민이 어린 나이에 읽은 책들이다. 십대에 접한 책도 있고 늦어도 이십대에 접한 책들이다. 한창 이성과 감성, 정의감이 날카로운 시점이다보니 책에 대한 저자의 반응도 그러하다. 그러다 보니 젊은 유시민을 만나는 느낌도 들었고 그 오랜 세월에도 공감할수 밖에 없는 변하지 않는 한국사회의 문제점도 한탄스러웠고, 과거 나에게도 비슷한 영향을 주었던 책들의 느낌과 감성도 재현되는 맛이 있었다. 

 청춘의 독서에 등장하는 책은 죄와 벌, 전환시대의 논리, 공산당 선언, 인구론, 대위의 딸, 맹자, 광장, 사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종의 기원,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역사란 무엇인가 이다. 이렇게 목차를 종합해보니 경제학 관련 책(인구론, 유한계급론, 진보와 빈곤)이 많고, 문학도 제법 있는데 러시아 문학(대위의 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 좀 많았고, 역사관련(사기, 역사란 무엇인가) 책도 많았다. 그리고 가장 아픈 공통점은 이중 내가 읽은 책이 단 한권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전이 그렇듯 무슨 내용인지는 대충 알지만 막상 읽은 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유시민이 언급한 모든 책이 인상적이었지만 우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생각난다. 이 책은 독일 책으로 당시 언론의 작태를 비판한 것이다. 카타리나 블룸은 27살의 젊은 독일 여성으로 가난하지만 어머니와 감옥에 수감된 오빠를 부양하고 있다. 그녀는 지난 사랑에 실패해 외로워하던 중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눈다. 문제는 그가 무기를 탈취한 탈영병이었다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두려울 그 사실은 의외로 그녀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녀는 그와 사랑을 나눈다. 죄값을 치루고 나면 본격적으로 사랑을 나눌 생각이기도 했다. 

 문제는 언론의 태도다. 그들은 이미 남자를 뒤쫓고 있었고, 누군가와 만나는지를 확인한후 같이 엮을 심산이었다. 카타리나의 신상은 낯낯이 공개되었고, 피의자로서 아직 남여 모두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언론은 피의사실을 검찰과 결탁하여 함부로 공표했다. 카타리나와 아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그녀에 대해 묻고 원하는 사실만 부풀려 말하는 것도 물론이었다. 마치 얼마전 조국사태를 보는 듯 했다. 유시민은 시기대로 고 노무현 대통령 사건을 떠올렸다.

 사마천의 사기도 인상적이었다. 사마천은 순서대로 역사서를 서술하는 편년체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기전체를 창안했다. 이는 제왕을 다룬 '본기'와 뛰어난 장군과 신하를 나타는 '표', 예법과 음악, 군사, 역법, 천문, 치수, 화폐등 사회경제제도와 행정, 문화를 다룬 '서', 주요 제후국의 역사를 상세히 다룬 '세가', 마지막으로 뛰어난 인물들의 전기를 다룬 '열전'이다. 유시민은 본기 부분에서 한고조와 그 주변인물에 대해서 많이 다룬다. 고조는 패업을 이룬후 왕권의 안정을 위해 개국공신들을 정리한다. 그들은 고조와 나라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함께한 전우들이지만 개국이후 안정된 치세를 이루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한신이 제거되었다. 또한 고조는 후에들인 황비를 사랑했고 그 아들이 영민하여 후사로 삼고싶었지만 본처인 여후의 서슬이 시퍼랬다. 고조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마련했지만 사후 그들은 여후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다. 모든걸 이뤘지만 특히, 500년 이상을 전란에 시달린 중국의 민중을 평화로 이끌었지만 고조는 친구도, 자식도, 사랑도 이루지 못한다. 유시민은 기록에 의지해 고조가 치료를 거부하고 그만 살기를 원했던것이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한다. 권력의 허상과 무서움이다.

 헨지조지의 진보와 빈곤도 재밌었다. 요즘 정치권에선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토지공개념이 거론되고 있으며 그 반대급부로 반헌법적 발상이니 사회주의니 하는 언행도 나오고 있다. 헨리 조지는 리카도의 후계자로 리카도가 농업지대론에 지중한 반면 헨리 조지는 도심에서의 지대론에 집중했다. 그의 책에 따르면 한 자연인이 어디든 비슷한 한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된다. 다만 그는 모든걸 할수 있는 상태지만 뭐든 제대로 할 수 없다. 분업이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소를 잡을 수도 있고 신발도 만들 수 있지만 잘 하기 어렵고 많은 시간이 투여되며 그로 인해 다른 일을 못하게 된다. 그러다 이웃이 찾아온다. 그의 선택은 첫번째 사람과 달리 간단하다. 바로 그의 첫번째 자연인의 이웃자리기 최상의 자리가 된다. 그렇게 하나 둘 사람이 찾아오고 마을이 되고 도시가 된다.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상승한다. 첫번째 자리 잡은 사람의 터가 자연히 중심지가 되고 지대가 급상승한다. 그 또는 그의 후손은 도시의 발전과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고도 그 생산력 향상과 발전의 대가를 혼자서 향유한다. 때문에 헨리 조지는 그러한 지대에 대한 세금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유재산 역시 인정했으며 자본주의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그저 그런 불합리한 이익에 대해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정치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안좋았다. 정치권에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주장을 몰라보고 가짜 이익과 불합리에 현혹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바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책은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다. 부끄럽게도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도 사놓고 김치도 아닌데 오래도록 묵혀두고 있다.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는 구 소련의 소설인 만큼 사상적 검증을 받았다. 죄와 벌은 러시아 차르의 검열을 받았는데 러시아는 쉽게 변하지 않는 듯 하다. 이 책은 소련, 특히 조금만 생각이 다르고 조금만 출신이나 사상이 의심스러우면 수용소행이었던 스탈린 시대를 비판한다. 솔제니친은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시절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에서 이 책을 발간했기에 출판될 수 있었다. 솔제니친은 책에서 수용소의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몹시도 억울한 상황임에도 강제로 주어진 노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식량도 부족하고 먹을 것도 없는 편인데 한국의 남성들은 이와 몹시 비슷한 군대를 다녀오기에 공감대를 적지 않게 느낄수 있다. 한 장면에서 작업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에 즉각 응하지 않으면 형벌이 뒤따를 거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벽돌을 쌓을 때 접착제 역할을 하는 모르타르가 아직 남아 있었고 작업하는 수용인들은 이를 만들어나간다. 내일이면 그리고 작업을 이루면 모르타르가 얼어 붙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이라면 누구나 밥도 제대로 먹어가지 못하며 저녁까지 말도 안되는 지시와 조건에서 작업하면서도 끝내 그것을 이루었을때 성취감을 맛본적이 있을 것이다. 난 그 어쩔수 없는 성취감이 너무나도 싫었는데 유시민은 그런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본다.

 하여튼 책을 다 읽고 나니 대학초년때가 많이 생각났다. 유시민의 의도처럼 그 당시에도 이런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나는 '신문 읽기의 혁명'이나 '지식의 세계1&2',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같은 책을 읽고 영향을 많이 받았던 생각이 난다. '청춘의 독서'는 제목처럼 지금의 청춘들에게 그리고 청춘과 좋은 책의 맛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에게 좋은 책이란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감의 배신 - 아직도 공감이 선하다고 믿는 당신에게
폴 블룸 지음, 이은진 옮김 / 시공사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에서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을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버 도덕은 오랫동안 이성에 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덕목론도 있었고 신에 의한 강제도 있었지만 대체로 인간 이성에 바탕한 도덕론이 우위였고,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 가능케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이성에 의한 과학기술 문명이 세계를 파괴하였고, 인간은 야만을 드러냈으며,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결국 동물의 하나로써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지자 대안으로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성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의식, 감정, 직관등의 동물적 용어가 많은 학문 및 다른 분야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이고 뇌의 상당부분도 그러하니 이런 변화는 많은 인간행위와 인간존재에 대해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도덕도 예외가 아니었다. 배려의 도덕도 등장하기 시작했고, 덕목론도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무엇보다도 공감에 의한 도덕이 강조되었다. 

 거기에 인간의 유별난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의 연구가 등장하면서 공감은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초기 혈연중심의 이타성에서 소속집단 및 사회와 국가구성원으로까지의 이타성의 확대는 인간 도덕발달의 근원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대상에 대한 이타성의 확대에는 공감이라는 심리장치가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거기에 공감능력은 거울뉴런이라는 생물학적 장치에 의해 그 존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이쯤되니 공감은 동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서 이성보다도 오히려 더 과학적인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인간도덕에 있어서 공감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중요한 공감이 도덕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신박한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공감의 도덕으로 우리 인간이 대단히 잘못되고 편협되고 편향되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선 저자는 공감에 대해 분명히 정의한다. 왜냐하면 우린 공감이라는 용어를 대단히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겨도, 불쌍해서 내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도, 적당히 안타까운 것도, 불쌍해서 뭔가를 하는 것도 모두 공감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선 공감은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분류한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에 그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 둘의 구분은 단순히 인문학적 분류가 아니다. 양자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회로 및 활성화 부분이 다른데 인지적 공감을 하는 경우는 내측 전 전두피질 부분이 작동하고, 정서적 공감의 경우에는 전대상 피질이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둘은 비슷해보이지만 완전히 뇌의 다른 경로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진화적으로 다르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두 공감 중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으로 저자는 정서적 공감을 지목한다. 이 정서적 공감은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나 동정과도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은 인지적 공감에 정서가 더해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공유하는 정도까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이 도덕적 판단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인은 편향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당연히 혈연이나 내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이타성을 갖고 있으며 쉽게 공감한다. 그렇기에 공감에 기반한 도덕은 편향성을 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쉽게 경험한다. 내가 판사여서 흉악한 살인범에게 사형죄를 내려야할때 그 살인범이 나의 자식이라면 공정한 판결이 가능하겠는가? 최근 미국에서의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만 해도 알수 있다. 백인집단이나 흑인집단에게 외향이 다른 소수의 아시아인은 쉽게 같은 코로나의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다. 

 정서적 공감의 다른 문제점은 형편없는 수학적 계산을 유도해 우리로 하여금 매우 비공리주의적인 도덕적 판단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의 강력함 때문이다. 정서적 공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친숙한, 혹은 매우 가까운 대상, 내가 쉽게 접할 만한 대상에게만 도덕적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실제 우리는 나의 자식같은 혹은 우리 동네에 있을 법한 귀여운 아이가 살해당하면 분노를 금치 못하며 큰 관심을 일으켜 정치 사회를 흔든다. 하지만 같은 일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어났다면 그 반응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실제 정인이 사건에 주목해보자. 한 아이기 잔혹하게 살해당한 일로 아이외 생면부지인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납골당까지 찾아가 애도를 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중대기업처벌법이 여당과 야당에 의해 졸속처리되었다. 매일 7명정도의 노동자가 산업체에서 사망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인이 사건보다 중대기업처벌법에 분노와 감정, 노력을 쏟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하지만 강력한 정서적 공감은 이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 쉽지 않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정서적 공감으로 분노하기에 정치권은 대개 공감정치를 하게 된다. 때문에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보다는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는 단기적인 해결책으로 반응하게 되며 이는 역시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정서적 공감의 마지막 문제는 정서적 공감이 폭력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연구결과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크게 공감하는 상대가 피해를 당한 경우, 그 가해자를 폭력적으로 처벌하는 것에 훨씬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9.11사태다. 당시 분노한 미국인들은 아무런 합리적 증거없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그 결과 양 국가의 정치체제가 무너져 엄청난 민간인 희생이 발생하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피해자에 대한 지나친 정서적 공감은 폭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강력하게 작용해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통한 적절한 판단 및 해결을 방해한다. 이로 인해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 그리고 관련 3자도 새로운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정서적 공감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초점이 좁고, 특수 사례에만 잘 끌리며 간단한 수학적 계산마저도 못하게 한다. 거기에 정서적 공감은 공감을 잘 하는 개인을 매우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것은 정서적으로 매우 피곤한 일이다. 이럴 경우 공감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매우 소진된다. 실제로 정서적 공감을 잘 하는 사람들은 연민이나 동정, 인지적 공감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나 ,과잉보호, 균형잡힌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서적 공감이 강한 사람들은 신체적 정신적 능력도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인지 심장질환이나 당뇨, 암의 위험성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정서적 공감은 올바른 도덕적 판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망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감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케케묶은 이성을 다시금 꺼내든다. 이성에 의해 합리적인 도덕적 판단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연민을 더한다. 공감이 타인의 고통을 같이 느끼며 괴로워하는 것이라면 연민은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는것이다. 그리고 연민은 타인의 행복을 증진하려는 강한 동기와 더불어 따뜻함과 관심, 배려의 감정이다. 때문에 저자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심장이라는 오래된 용어처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을 통해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정서적 공감에 매몰된 잘못된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이성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공감이 온전한 도덕의 바탕이 되기 어려운 것처럼 이성 역시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도 인정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성의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이성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이성을 갖고 있는 인간의 문제라고 말한다. 즉, 이성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동물적이기에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으며 충분히 이성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인간자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도구보다는 사용자가 문제라는 거랄까나. 실제로 그러한 측면이 있다. 인간이 이성에 대한 의심의 눈을 갖게 된것은 근현대사의 아픔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실수에 이성이 자리한 부분은 없다. 양차대전과 대학살, 인종차별, 냉전등은 이성적 판단의 결과물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일어난 결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 이성에 대한 문제 의식의 시작은 인간 이성자체라기 보다는 충분히 인간이 이성적이지 못했기에 발생한 것이란 생각이다.

 이 책은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준 책이다. 책을 읽기 전엔 나 역시 공감의 신봉자에 가까웠다. 물론 공감은 중요하고, 사람을 선하게 만들며, 가까운 관계에서 매우 필요하며 적절한 거리두기만 된다면 매우 유용한 것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정서적 공감이 불러오는 도덕적 판단 잘못은 충분히 경계할만하다는 생각이다. 책은 뒷 부분에 좀 힘이 빠지는 편인데, 아무래도 과학적 근거가 좀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싸이코 패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재미난데 통상 사이코 패스는 공감능력이 크게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는 사이코 패스의 경우 오히려 정상인보다 공감능력이 높다고 말한다. 사이코 패스는 사람을 크게 괴롭게 할 수 있고, 대개 매력적으로 범죄대상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인을 괴롭게 하는 방법은 어떻게 하면 그가 괴로울지를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며,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역시 높은 공감능력을 요구한다. 즉, 사이코 패스는 인지적 공감능력이 높고 정서적 공감 능력이 낮다고 볼 수 있으며 공감능력보다는 절제력, 억제력이 매우 낮고 잔혹하며 대담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연구결과 인간의 공감능력과 공격성 사이엔 의외로 별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여튼 재미난 책이었다. 공감에 대해 신봉하는 분이나 의심하는 분 모두 추천한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an22598 2021-04-07 0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직접 읽지 않아서..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네요 ^^ 한가지만 얘기하면, 저자는 공감대신 이성을 추구하자고 주장하는데, 이성자체의 불완전성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문제라고 했는데, 같은 논리로 보면 공감 역시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공감을 사용하는 또는 그것을 발휘하는 인간의 한계를 언급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습니다.

닷슈 2021-04-07 14:31   좋아요 0 | URL
이성에 바탕한 차가운 도덕은 상당히 공리주의적 판단을 일으키기에 저자는 사실 인지적 공감과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에 의한 도덕적 판단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공감을 완전히 도덕에서 제거했다기보다는 도덕적 판단에 문제를 일으키는 정서적 공감의 배제를 주장한 듯 합니다. 즉, 공감전체보다는 일부분에 대한 비판이죠. 이성에 대한 부분은 책에서도 좀 아쉬웠습니다. 공감은 언급한 것처럼 최근 많이 주목을 받았고, 본성의 일부분으로 진화론에서 많이 다루지만 이성에 대한 부분은 연구가 오히려 별로없죠. 이성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별로 없고, 그에 대한 연구도 없는게 아쉽습니다. 그래서 책도 이 부분에 대해 언급이 약하죠.

북다이제스터 2021-04-07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과 비슷한 결론, 즉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는 책 <옳고 그름>을 읽으적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저자와 동일하게 이 책 저자도 분명 ‘공리주의자‘일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공리주의자들은 여전히 죽지도 않고 계속 살아남는 무서운 집단인 것 같습니다.ㅠ)

말씀하신 책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혹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이성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면, 적어도 이성과 감성(공감, 직관, 욕망, 무의식)이
동등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철학이나 뇌과학에서는 ‘이성이 감성의 시녀‘즉, 감성이 이성을 지배한다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지 감성을 억누르고 이성에 따라 판단할지 궁금해 집니다.
<옳고 그름>에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혹시 이 책에는 있는지요?

닷슈 2021-04-07 14:33   좋아요 1 | URL
이성에 대한 그런 부분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 뒷부분이 약하다고 말한겁니다. 이건 저자 자신의 한계라기보다는 최근 과학이 인간의 동물적 부분에 많이 주목에 감성에 집중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성에 대한 연구도 진화론적으로 신경과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도 저자는 직접 언급은 안하지만 공리주의자로 보입니다. 연민과 인지적 공감에 바탕을 둔 공리주의자라면 좀 이상할까요.

초딩 2021-05-08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5-08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닷슈 2021-05-08 19: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5-08 2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5-09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즐거운 날 되세요~

닷슈 2021-05-09 09: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05-09 09: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당선 축하새요.

닷슈 2021-05-09 11: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갈등 도시 -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시민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서울 선언 2
김시덕 지음 / 열린책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은 전체 5200만 인구 중 1000만 가량이 서울에 산다. 그리고 인접한 경기도에 1200만 정도가 살며 이들 중 대부분은 서울과 인접한 경기도 도시에 거주한다. 그렇다면 단순히 생각해도 서울과 관련한 사람의 수는 한국인구의 절반에 달한다. 여기엔 지극히 그 수가 적을 조부모세대부터 서울에 거주한 토박이도 있을테고,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서울로 올라온 2-3세대들, 그리고 지방에 살고있지만 과거엔 서울에 살았거나 아니면 지금 서울을 직장이나 학교등으로 생활권으로 둔 이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듯 서울은 상당히 많은 한국인의 삶의 터전이지만  사람들에게 서울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에게 서울은 분명 고향이겠지만 웬지 고향같지 않을 것 같고, 살아가는 우리 동네임이 분명한데 웬지 우리 동네 같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정체성없이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변화엔 사람도 주변 건물도 자연도 포함된다. 실제 서울은 메갈로폴리스이자 첨단도시로 매우 빠르게 바뀌고 있다. 서울을 고향으로 삼는 사람들 중 서울내 수십년전 그들이 자라고 태어난 지역의 경관이며 이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얼마나될까? 아마 산천을 제외하고 몇개의 건물이라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매우 반가울 것이다. 이러니 고향같지도 동네같지도 터전같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문헌학자인 김시덕이 쓴 '갈등 도시'는 서울에서 직접 살아가는 도시민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자본의 논리로만 모습을 변모해가는 서울의 모습을 잘 드러낸다. 김시덕이 보기에 서울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우선 행정의 연속성이다. 지금의 서울은 조선의 한양과 일제시대의 경성, 그리고 광복 이후의 현대 한국의 서울의 연속성상에서 생성된 곳이다. 그 과정에서 매우 크게 확대되었고, 지배주체도 바뀌었지만 놀랍게도 행정의 연속성이 발견된다. 우여 곡절끝에 완성된 경인 아라뱃길은 원래 일제가 기획했던 것이었고, 서울, 경기지역의 본래 군부대의 위치는 일본군-미군-한국군이 바통을 이어 주둔했을 뿐 그 위치가 같다.  

 또 다른 특성은 도시 곳곳에 갈등이 산재한다는 것이다. 김시덕은 시층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지질학의 지층과 비슷한 개념으로 땅에 오래된 지층이 순서대로 켜켜이 쌓이는 것처럼 도시도 과거의 모습을 여러형태로 간직하며 이것이 현대의 모습과 공존한다는 것이다. 실제 강북의 사대문안 원심을 제외한 서울의 상당수 지역은 과거 경기도의 농촌지역이었다.(이는 강남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서울에는 본래 그 지역을 터전으로 삼던 농민과 문중세력,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며 이후에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기 시작한 세력과 그 후손들, 그리고 개발이익을 위해 들어온 새로운 세력들이 재개발, 재건축을 두고 팽팽히 대립한다.

 세 번째특성은 보존의 편혐함이다. 서울은 아직 상당히 많은 과거의 흔적인 도시화석을 곳곳에 갖고 있지만 이는 개발 논리와 거주를 위해 빠르게 철거되고 있다. 상당한 거주 수요때문에 이런 개발은 피하기 어려운데 그럼에도 일부 유의미한 것을 역사적으로 보존하여 과거의 모습과 현대의 모습을 공존시켜가야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서울은 개발과정에서 보존하는 유산도 매우 적지만 그 보존의 대상을 조선시대 왕가와 양반들만의 흔적만으로 삼는 것이 또 문제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이나 근현대 노동자의 삶의 흔적이 담긴 곳에 전혀 보존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시대적으로도 오로지 조선에만 국한된다. 

 마지막 특성은 서울의 특권의식과 경계지역들이다. 서울은 현대 한국의 수도로서 특별시로 지정되고 상당히 많은 이권을 누려왔다. 주요 특권중 하나는 서울을 거주 및 상업지역으로만 개발해가면서 주요 필요시설들을 외곽으로 밀어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요양원이나 석유비축기지, 물재생센터, 고아원, 군사시설, 화장장 등이 해당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처사에 저항이라도 하는듯 경기도의 도시들은 이런 시설들이 자신들의 지역내에 위치함에도 하나같이 시설 이름 앞에 '서울'이라는 두글자를 붙였다. 서울이 아닌 경기도임에도 서울이름이 붙은 이런 류의 시설이 유독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 구체적 지역으로 들어가본다.


1. 봉천-신림동

이 지역은 내가 나고 자라 성장한 지역이라 좀 더 재밌게 본 부분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고 이사하면서 지역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전히 지역에 사는 친구들에게 동이름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신림동은 무려 10개가 넘는 동이 있었고 봉천동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들의 이름이 모조리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동은 법정동과 행정동이 있는데 법정동은 각종 법규로 규정한 동이고 행정동은 법정동을 쪼개거나 붙이는등 조정을 해서 실제 현실에 맞게 바꾼 것이다. 즉, 봉천동과 신림동 지역은 법정동의 이름을 유지하되 행정동의 이름만 바꾼 것이다. 

 봉천동과 신림동은 서울의 많은 지역이 그러하듯 초기 철거민이나 도시 이주민등 빈민들로 형성된 지역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남부순환도로라는 간선도로가 개통되고 지하철 2호선이 지나고 하천이 복개되고 서울대학이 들어서 고시촌이 생기며 그 이미지가 서서히 변화했다. 그리고 이름의 변경은 이런 지역의 계급적 변경과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 신림동이란 이름은 고시촌이 주는 좋은 이미지로 인해 남은 반면 봉천동의 이름은 빈곤 이미지로 인해 완전 사라졌다고 한다. 


2. 파주와 고양시의 미군위안부들

 파주와 고양시는 넓어서인지 도시의 중심이 하나가 아닌 여러 곳에 산재한 느낌이다. 하지만 과거 전체적인 무게중심이 동쪽에 있었다면 지금은 모두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파주와 고양은 원래 한반도의 중앙지역이었지만 분단으로 인해 남한의 최북단 변경지역이 되고 많다. 때문에 넓은 평야지대로 인해 개발이 용이했음에도 오랫동안 군사적 이유로 방치되어 왔다. 실제 일제는 인천과 서울을 잇는 서남라인의 개발을 중시했었다. 하지만 한국전 이후 한국정부는 군사적 방어의 이유로 개발이 쉬운 서쪽대신 고양-은평-강북-강남-성남을 잇는 서북동남라인을 개발했다. 지금은 이 지역이 모두 개발되어 편리해보이지만 경부고속로만 타고 이지역을 이동해봐도 얼마나 많은 터널과 산들이 존재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분단 이후 1966년까지 파주에는 미국부대가 주둔했고 기지촌만 38곳에 달했다. 당시 미군위안부 여성만 4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책에선 미군위안부란 용어를 쓰는데 일본군 위안부처럼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강제적이고 비인권처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시골에서 많은 여성들이 취업알선이나 다른 일자리인줄 알고, 혹은 인신매매등으로 미군위안부가 되었다. 이후 갇혀 있는 경우가 많았고, 정부의 입김도 상당히 작용해 어쩌다 탈출해 경찰서로 갔음에도 경찰자체가 한패라 다시 끌려가는게 다반사였다 한다. 특히, 기지촌 여성들은 매번 성병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았는데 감염이 확인되면 강제로 페니실린 주사를 투여받았다. 부작용이 매우 강해 건강에 치명적 손상을 입거나 이로인해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미군위안부란 용어가 충분히 사용된만한 것이다. 

 하여튼 1971년 미 7사단과 1군단이 철군하면서 기지촌은 그 기능이 사라져 크게 쇠퇴한다. 그 유명한 용주골도 이 때 쇠퇴하는데 영업대상을 한국인으로 바꾸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간다. 이후 일산신도시가 개발되고 서울지역에 성매매와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집창촌이 서울외곽으로 튕겨나가 용주골은 어처구니없게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3. 을지로

어릴적 지하철을 타며 을지로가 뭘까 무척 궁금한 적이 있다. 지금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책에 의하면 을지로는 글자 그대로 길의 이름이다. 이 길은 무척 유서가 깊어 저자는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까지도 그 유서가 이어질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을지로는 지금의 서울시청에서 시작해 동대문 디지털 플라자 근처 한양 공고에서 끝나는 길의 남북쪽 블록이며 서울의 구도심인 사대문 안 지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4개의 큰 길 가운데 북쪽으로는 종로, 남쪽으로는 마른 내로와 퇴계로 사이에 놓인 곳이다.

 이중 을지로3-4가는 매우 유서가 깊은데 이들이 현대적 면모를 같게 된 것은 일제시대다. 일본인들이 19세기 말부터 한국은 침탈해오며 청계천 남쪽에 거주하며 그 세를 확장하고 있었는데 이에 불안을 느낀 한국인들이 울타리를 치듯 개량한옥을 대거 지었다. 하지만 일제시대 이후 2차대전중 미군에 의한 경성폭격 가능성이 제기되자 대규모 화재를 피하기 위해 울지로3-4가를 중심으로 종로부터 충무로 사이의 좁고 긴 구간의 목조주택을 철거했다. 화재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렇게 마련된 공간에 광복후 세운상가, 청계상가, 삼풍상가, 진양상가들을 들어서게 된다. 


4.강남

 강남은 강남, 송파, 서초 3구를 말하지만 성남분당과 판교, 용인수지, 수원광교, 화성동탄까지를 확장 강남으로 보기도 한다. 강남지역은 본래 주거지로 개발되어서 서울에서 가구수가 가장 많고 인구서도 많으며 지역도 생각보다 넓다. 최근의 이미지로 고급 고층 아파트가 빽빽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 비율이 절반 이하이며 자연부락과 단독주택, 빌라가 더 많은 수를 차지한다. 

 강남엔 세 가지 시층이 있는데 농촌시절의 강남 모습을 드러내는 구마을과 서울의 경계지로 강남에 형성된 과거 빈민촌, 그리고 영등포의 동쪽인 영동이라 불리며 영동개발시기 지어진 단독주택과 주공, 시영아파트, 시영주택들이 두 번째 모습, 마지막은 지금의 모습으로 주류가 된 고급 고층 아파트와 주상복합, 고층건물들이다. 

 강남은 본래 농촌지역인데 뽕나무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실 배나무가 훨씬 많다. 이는 강남지역에서 뽕나무는 조선시대에 재배되었고, 현대에들어서는 배나무가 재배되었기 때문이다. 송파구 풍납동에는 의의로 삼표 레미콘 공장이 있는데 이 업체는 레미콘 1-2위를 다투는 업체다. 이는 서울근접성에서 얻는 경쟁력으로 가능한데 강남지역 주민의 반대로 업체의 이전이 논의되고 있다고 한다. 강남은 애초 사대문 안 원도심과 일제시대 개발한 영등포와 더불어 서울의 3대 도심으로 기획되었다. 때문에 공업, 광업기능보다는 거주 상업기능을 우선시하였는데 이런 강남에 레미콘 공장이 있다는게 무척 의외였다.

 강남은 박정희 정권때 개발되었느데 그 이유는 안보였다. 북의 공격시 강북에 집중된 서울인구의 방어가 어려웠기에 방어가 손쉬운 한강 이남 지역에 강북의 인구를 이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때문에 강남엔 과거에 만들어진 안보시설이 상당히 있는 편인데 비싸기로 유명한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내부 곳곳에 군사용 벙커시설이 설치되었다는 것이 일례다. 

 성남은 과거 이름처럼 넓었던 광주의 일부로 광주대단지로 인해 형성된 도시다. 원래 도시빈민들은 대개 일용직으로 일하고, 그들의 일은 대개 도심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들은 쪽방같은 곳을 감수하면서도 도시에 거주한다. 서울은 개발과정에서 철거민이나 수재민, 빈민들을 외곽으로 쳐냈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대단지가 생겨난다. 하지만 위와 같으 이유로 빈민들은 다시 도심으로 돌아갔고, 이들이 떠나면서 남긴 토지에 대해 복잡한 부동산 거래가 일어나며 정부가 이를 규제한다. 그과정에서 시민 봉기가 1971년 일어났고 이를 정리하고 주민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탄생한 것이 성남이다. 

 용인은 더 재밌다. 놀랍게도 용인은 일제시대 일본제국의 수도 후보였다. 물론 다른 두 곳이 일본본토이고 한 곳이 용인이라 가능성은 높아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용인이 국토 중앙부에 위치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지역의 문화수준이 높고, 기성도시와 적당한 거리에 있기에 새로운 후보로 삼았다고 한다. 


이 책은 정리한 지역 외에도 서울의 다른 전 지역과 서울권으로 분류되는 경기도의 주요 도시들을 다뤘다. 서울이 확장하면서 철거민이나 빈민, 수재민등 기존 주민과 혐오시설을 경기도로 밀어내며 확장한 것, 그로 인해 애매한 경계지역에 혐오시설이 서울의 이름을 붙이고 어색하게 남아있는 것들, 개발의 논리만으로 서민의 모습이 남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잘 되어야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 그리고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이 지역을 자신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일수 있지 않을까?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부동산 폭등에만 정치권이 집중하며 이런 문제는 모두 뒷전인게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 수업 (양장) - 글 잘 쓰는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
도러시아 브랜디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우리 집엔 대충 1000권 책이 있다. 결혼하고 집이 생기고 서가도 하나 둘 들여놓으면서 마구 채워넣었다. 그 땐 빈 서가를 채울 욕심에 책 구매에 돈도 많이 썼지만, 막상 책을 고르는 눈은 사실 별로 없었다. 그저 신간이라면 마구 샀던 것 같다. 그러다 서가가 다 들어차고, 마누라 눈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심지어 이삿짐 센터 눈치도 보이기 시작했다. 짐도 별로 없는 집인데 책 땜에 이사 단가가 높아지곤 했다. 사실 내가 들어보아도 책은 제법 무겁다. 특히, 한국책은. 그래서 전자책으로 눈을 돌렸다. 크레마란 것도 사고 가상의 서가에 책을 채워넣었다. 이것도 첨엔 꽤 재밌었다. 근데 불만족스러웠다. 보고 싶은 책이 다 전자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가격이란것도 생각보다 싸지 않았다. 초기엔 반값도 많이했고 쿠폰도 많았는데 다 사라졌다. 거기에 무엇보다 인간동물의 소유욕을 제대로 채워줄 물성이 부족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욕심인게 냉정하게 마음 먹고 헤아려보니 천 권의 책 중 막상 내가 읽은 책이 겨우 60-70%에 불과했다는 것이다.(물론 중고로 처분한 것도 제법 되지 그것까지 넣으면 비굴하게 수치를 3-4%는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장르를 구분하지 않는지라 다행히 장르에 따른 차별은 없었다. 전자책도 비슷했다. 전자책은 한번 보면 집중적으로 보지만 안보기 시작하면 계속 종이책만 보다보니 이런일이 생겼다. 있던걸 소비해야한다는 마음이 드는데 그래도 신상이 계속 나오니 유혹을 떨쳐내기 쉽지 않다. 마누라가 서가 수를 제한하지 않았다면, 집이 저택마냥 컸다면 이 소유욕을 계속되었을 것 같다.

 하여튼 이 책 작가수업도 오래묶은 책을 꺼낸 것이다. 이유는 재고를 처리해야하는데 일단 쉬워보여서랄까. 책은 무려 2010년 출간이다. 그것도 오래되었다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사실 이 책은 아득히 오래전체 출간된 것이었다. 타자기가 나오는데 타자기 욕을 한다. 글을 원고지에 조용히 써나가야하는데 타자기의 기계소리와 당기는 소리 그 기계음이 글쓰기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컨디션과 기분전환, 여러 가지 이유로 타자기가 두 대는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 책은 기계라는 요소만 고려한다면 1980년대까지만 유효한 것이다. 

 물론 글쓰기엔 시대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을테니 제법 쓸만한 소리도 있었다. 진정한 독창성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에서만 나온다는 것. 봉준호 감독이 가장 세계적인게 가장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다. 그래서 모든 소설은 결국 자전적일 수 밖에 없는데 거기서 자신의 경험을 끊임없이 형상화하고 재결합해 꽤 긴 분량의 훌륭한 책을 이야기로 객관화해내는게 좋은 작가가 된다.

 작가에겐 네 가지 어려움이 있는데 글쓰기 자체의 어려움과 한 책 작가, 가뭄에 콩 나듯 쓰는 작가, 기복이 심한 작가다. 이건 현대에도 완전히 유효한듯 하다. 작가들은 한 번의 등단이 너무 어려우니 첫 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기화해버리는 듯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있다. 한 책 작가나 가뭄에 콩 나듯 쓰는 작가가 그러할 것이다. 장강민 작가도 당선합격계급에서 첫 작이 매우 훌륭하더라도 다음 작이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진정한 작가로 보기 어렵다고 말한 적이 있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무의식과 의식을 잘 활용하는 이중적 삶이 필요하다고 한다. 무의식은 작가의 감수성과 창작의 원천, 천진함의 근원이고 이를 시대와 사회에 맞추어 어른스럽고, 분별력 있으며 절제와 공정함으로 밀어넣는 것이 의식의 역할이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 감정, 사건, 장면, 성격과 관계의 의미를 모두 불러내서 글로 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식은 그런 무의식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자료를 관리하고 통합 추려내는 역할을 해야한다. 예를 들어 무의식이 작가에게 전형적인 인물, 전형적인 장면, 전형적인 감정반응등 모든 종류의 전형을 제시하면 의식이 그 가운데 예술 소재로 삼기에 너무 개인적이거나 너무 보편적인 것을 쳐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단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내면 의식을 이를 철저히 분석하고 곁가지를 쳐내고, 다듬고, 내용을 보강하고, 눈길을 끄는 요소를 덧붙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의식이 이야기를 최종통합한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글을 만들고 싶은 욕망에 많은 글을 보고 읽고 쓰고 들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책은 그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 말한다.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많은 말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자기만의 호흡은 무엇이고 자신에게 진정한 흡입력을 갖는 주제가 무엇인지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 대부분에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한다면 솔직하고 독창적이며 독특한 이야기를 구성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힘들게 이야기를 구성했어도 자신은 아직 글을 객관적으로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글을 완성한 후 당분간은 글을 한 쪽으로 밀쳐두고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야하며, 기력이 회복되고 긴장이 풀린 후에 마음이 초연해지만 다시 자신의 글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전엔 보지 못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작가의 재능이 다소 노력과는 관계 없어 보이는 무의식에만 의존한다면 작가는 타고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책은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되기엔 충분한 재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차이는 이러한 재능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른 다는 것이다. 즉, 재능은 느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활용법이 늘어나는 것이며, 보통의 사람이 가진 재능의 양이 평생을 다 쓰더라도 쓰지 못할 만큼 양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되거나 글을 써보려고 제대로 마음먹어 본적이 없기에 이런 류의 책은 사실 개인적으로 크게 다가오진 않는다. 하지만 막상 그런 마음을 언젠가 먹게 될지도 모른다면 참 어려운 일일듯하다. 강원국은 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막힘없이 열 시간은 떠들 준비가 되어야 책을 쓸수 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한텐 그런 주제가 없다. 그리고 그럴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작가가 된다는건 참 힘든 일인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3-20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20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20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