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인생 - 저주가 아닌 선물
린다 그래튼.앤드루 스콧 지음, 안세민 옮김 / 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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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0년대에 주요 선진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104세까지 살 확률은 무려 50%에 달한다. 과학기술이 본격 발달한 19세기 중반부터 주요 선진국을 중심으로 인간의 수명은 매년 3개월씩 늘어났다. 수명이 상당히 길어진 지금 이 상승곡선은 그 기울기가 완만해졌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아직도 과거의 가파른 추세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100세 이야기는 그래서 가능하다. 물론 이후 인간의 수명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당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생물학적 한계가 있는 몸이니 이 가파른 곡선이 지금처럼 영원히 유지되진 않을 것이다.

 20세기에 산업혁명이 완성되고 인간의 수명이 상당히 늘어나면서 교육과 직업활동, 은퇴라는 3단계의 삶이 완성되었다. 기업이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와 정부의 지원정책 및 사회구조 역시 이것에 맞추어졌는데 3단계의 완성으로 인해 기존엔 없던 계층인 일로부터 자유롭고 인생을 즐기고 고민하며 공부하는 청소년 층과 은퇴이후의 남은 여생은 연금으로 누리는 은퇴층이 탄생했다. 하지만 100세시대가 열리고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4차산업혁명 신기술이 등장하면서 이 단계는 깨어졌다. 과거 나이대에 맞는 사회단계가 있었지만 이게 상당부분 이미 깨어졌으며 그에 걸맞는 개인의 대비와 기업 및 정부의 대처가 필요해지는 지점이 다가오고 있다. 100년을 살면 개인에겐 무척 많은 시간이 생겨나는데 1주일이 168시간이니 70년이면 613,200시간을 살며 100세면 876,000시간을 산다. 무려 26만시간 정도가 더 생겨나는 셈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70-80세까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2. 새로운 직업과 기술이 나올 것이다.

3. 재정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4. 3단계가 아닌 다단계의 삶이 될 것이다.

5. 과도기(다음단계로 넘어가는 단계, 가령 직업을 새로 구하기 위해 공부하거나, 은퇴후 다른 직장을 고민하는 단계 등)를 보내는 것이 표준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6. 새로운 단계가 나타날 것이다.

7. 기분전환 보다는 재창조가 중요하다.

(여가 시간을 레저나 취미등으로 보내기보다는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위해 자신의 지식과 기술, 인적네트워크등을 재구성하는 것이 재창조)

8. 밀집대형이 사라진다

(좀 요상한 표현인데 베이비붐세대처럼 같은 나이대의 세대가 같은 단계로 동시에 넘어가는 것, 과거 20세면 모두 대학에 가거나 취직하지만 앞으로의 미래엔 같은 나이데애 모두 다른 단계나 길로 같다는 뜻.)

9. 선택권이 중요해짐

10. 젊음을 오래 간직함

11. 일과 가정의 관계가 변화함

12. 세대간의 관계가 복잡해짐

13. 수많은 실험이 진행

14. 인사정책의 혼란

15. 정부의 과제가 많아짐.


 책에선 일단 개인의 대응을 살핀다. 100세시대를 대비해 개인은 자산을 마련해야 한다. 개인은 유형자산과 무형자산을 갖는데 유형자산은 수치로 표현되는 주택, 주식, 채권등 개인이 가진 경제적 자산이다. 반면 무형자산은 수치로 쉽게 표현하기 힘든 것으로 생산자산과 활력자산, 변형자산이 있다. 생산 자산은 개인이 가진 지식과 기술, 평판으로 기업을 운영하거나 고용되었을때 사회의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개인의 자질로 주로 교육을 받을때나 일을 하고 있을 때 향상된다. 활력자산은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다. 변형자산은 자기인식, 다양한 네트워크 접근 능력,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개방적 태도 등으로 현 단계에서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헤쳐나갈수 있는 능력이다. 즉, 100세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자산은 무형자산이 된다. 현재 대부분의 개인은 어느 정도의 생산자산과 활력자산을 갖는다. 문제는 생산자산은 대개 인생초기 교육과 직장에서 취득하는 것으로 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빠르게 가치를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평소 여가 시간이나 인생초기 및 과도기를 이용하여 자신의 변형자산을 꾸준히 향상시켜야 한다. 그래야 100세시대에 여러단계로 넘어가며 인생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일이며 많은 정서적 신체적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평소 활력자산에도 신경을 써야한다. 

 다음은 유형자산이다. 책에서는 65세정도 은퇴한다면 100세까지 안정적 삶을 영위하려면 마지막 소득(아마도 가장 잘 벌때일 것이다.)의 50%정도가 필요하다 본다. 문제는 세대별로 이걸 모으는게 너무나도 다른데 71년생이라면 매년 소득의 17%를 98년생이라면 5%를 저축해야한다고 한다. 사실 50%는 주택을 보유한 것을 가정한 수치로 주택이 없어 월세를 내야한다면 70-80%까지 모아놔야 한다. 많은 사람이 50%를 충분한 수치로 여기지만 노년기엔 의료비가 급증할 수 있으며, 늦게 결혼한 경우는 자식, 아니면 손주의 대학학자금이나 결혼자금이 필요할 수도 있다. 때문에 젋어서부터 금융에 관심을 갖고 상식을 갖고 투자하는 방법을 익힐 필요가 있으며 결혼을 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을 권장한다. 활력자산 측면에서도 상당한 도움이 되며 둘이 있는 경우 혼자보다 유지비가 감소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의외로 지금의 흐름과는 다소 다르게 결혼에 상당히 호의적이며 긍정적이다. 이런 효과외에도 결혼은 유리한 자산을 형성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앞으로도 유효한 선택중 하나로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집값이 많이 비싸지고 모일수록 경제적 효과가 높고 수명또한 길어져 미래엔 4대가 모여사는 대가족이 등장할 가능성도 점친다. 

 다음은 기업의 변화다. 산업화시대가 완성되며 기업은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고 연금 및 보험혜택을 제공해왔지만 신자유주의와 신기술의 대두로 이 같은 혜택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다. 책은 우선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기업역시 변화해야 한다고 하는데 우선 무형자산과 유형자산의 균형에 대비해 입장을 재검토하고, 노동자의 과도기를 인정하고 그들의 변형 기술을 개발하고 보호하도록 지원하며, 경력 관리에 관한 관행과 절차를 기존 3단계가 아닌 다단계의 삶에 적용하고, 가정의 역할 변화에 대해 인식하고, 연령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어 고용 및 승진에 있어 연령차별을 없애고, 다양한 사회적 실험의 가치를 인식하라는 것이다. 당연한 것들인데 쉽지 않아 보인다.

 마지막은 정부로 정부의 정책 역시 기존의 3단계에 입각해 있으며 이로 인해 노년층에 복지 및 지원이 상당히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다단계의 삶에선 젋어서부터 과도기 및 취업난으로 지원이 필요하므로 지원을 다양한 연령과 상황에 맞춰 다변화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복지망을 확대해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과도기에 다양한 변형자산을 쌓을 수 있게 평생교육을 강화할 필요도 있다. 책엔 제시하지 않았지만 이런 경우 가장 좋은 해결방안은 역시 기본소득으로 보인다. 저자가 왜 이런말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100세시대를 앞에두고 많은 우려와 걱정이 쏟아지지만 하나하나 대응책을 제시한 책은 처음이다. 전례가 없으니 쉽지 않은 일이가 우리 역시 앞세대의 삶을 보고 삶을 계획하는 만큼 대비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좋은 책이지만 비슷한 내용을 계속 중언부언 풀었는 서술이 좀 지루했다. 그래도 볼만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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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만든 세계사
함규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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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 관련 이야기에선 벽의 유용성을 설명한다. 자연세계에선 맹수나 다른 인간 적이 많다. 때문에 인간은 정주이전부터 벽을 만들었는데 벽은 인간의 인지적 심리적 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탁트인 곳의 개방감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안감도 많이 느낀다. 실제 사람은 탁트인 곳보다는 여러 방향이 막힌 곳이나 높은 곳을 선호하며 엘리베이터만 타면 벽쪽에 붙는다. 그리고 이건 사실 인간만의 성향도 아니다. 다른 동물역시 그러하다.

 이처럼 벽은 나를 또는 우리집단을 타자 혹은 외부집단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짓는 경계가 되기도 했다. 사람은 아직까지도 기본적으로 이런 목적으로 벽을 짓는다. 이 책은 이런 벽의 역사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짚었는데 하나하나 재밌는 요소가 많았다. 흥미있는 몇개를 살펴본다. 


1. 방어하는 벽 테오도시우스 삼중성벽

출처 네이버 블로그


위 그림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그리고 오래전 비잔틴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지도다. 이슬람 세력이 확장하며 도시는 무수한 침략을 받았는데 제국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적을 무찌른 철옹성이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3중인데 우선 제1장벽은 2m의 높이이고 앞에 20m 정도의 해자가 있다. 제1장벽 뒤에 10m 공간이 있고 높이 8m의 외성이 나타난다. 이 외성엔 망루가 있어 침투한 적에 화력을 집중한다. 외성 뒤에는 무려 20m 높이의 내성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도 망루가 있고 이 망루는 앞 외성 망루의 사이사이에 있다. 적입장에선 첩첩산중인 것이다. 

 이 3중성벽을 피한다면 위 지도처럼 바다밖에 없다. 아래 마르마라해는 워낙 물살이 거세고 폭풍우가 잦다. 이를 피해 상륙한다해도 삼중성벽만큼은 아니지만 성벽이 기다린다. 그나마 나은 곳이 위쪽 금각만이다. 여기를 방어하기 위해 비잔틴은 반대쪽 해안에 갈라타 요새를 만들고 만집입로에 강력한 쇄사슬을 설치한다. 또한 해안에도 역시 성벽이 있어 들어와도 역시 침투가 어렵다. 

 이런 콘스탄티노플도 결국 제국의 쇠락기에 무너지는데 상대는 오스만제국의 메흐메드2세였다. 그는 함대로 해안을 포위하고 포신 8m에 구경 75cm의 대포로 성벽을 무너뜨려간다. 하지만 성민들은 무너진 성벽을 목책과 진흙으로 재축하였고, 상황은 어려워지나 비잔틴의 구원을 끝끝내 외면한 기독교세력의 미지원, 그리고 기독교 세력의 지원을 기대하며 그들과 교세를 통합하자는 세력과 이를 반대하는 세력간의 내분, 마지막으로 갈라타 요새를 소유한 제노바에 대한 불신과 그럼에도 죽음을 다해 콘스탄티노플을 사수한 주스티나아니에 대한 불신이 패배를 좌초했다. 이런 많은 불안요소와 겨우 8천의 수비병으로 당대 최강의 군대를 오래도록 막아냈음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방어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수 없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서구에선 사실상 방어수단으로서의 마지막 성벽으로 본다. 이후 화약이 발달하며 성벽을 한방에 날려보내는 작열탄이 등장하며 방어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2. 차별하는 방벽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방벽 

 유대인만 사는 지역을 의미하는 게토는 히틀러가 만든 것 같지만 사실 중세시대부터 연원을 찾을정도로 오래되었다. 2차대전 당시 폴란드에는 무려 40만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수는 독일 전체의 유대인 수를 상회할 정도로 많은 것이었다. 나치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처음부터 유대인을 학살할 생각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유대인이 유럽인이 아니고 유럽을 더럽히는 존재이니 다른 지역으로 추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르샤바 한복판에 거대 게토를 만들었는데 크기가 3.4km2였다. 그런데 유대인의 수가 무려 40만이니 1.46m2당 7명이 1명을 수용하는 격이었다. 즉, 한방크기에 7명이 들어가는 셈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이니 초기부터 탈출시도가 많았고 이에 나치는 장벽을 세울 생각을 한다. 전쟁이 길어지며 식량배급이 열악해졌는데 유대인에 대한 식량배급은 독일인의 1/3수준이었다. 게토내에서도 소수의 부유한 유대인과 여유있는 중산층, 그리고 빈민층이 나뉘어 처우가 달라졌다. 부유층은 자신의 재산및 인맥을 동원해 식량을 얻어냈고 빈민층은 굶어죽었다. 장벽마다 약간의 틈이있어 빈민층의 어린 아이들이 바깥에 식량을 얻으러 나가곤 했는데 발각되면 독일군의 구타로 인해 죽곤했다. 

 바르샤바 게토의 상황은 겨울에 최악이었다. 물이 얼어 사람들은 배변을 바깥 공간에 버리게 되었고 이에 장티푸스등의 전염병이 창궐했다. 굶주림과 추위도 엄청났고 식량은 더욱 부족했다. 이런 열악한 상황으로 1942년 말이 되자 불과 수용 2년만에 40만 중 8만이 사망한다. 또한 전쟁이 길어지며 유대인의 이주 및 관리비용이 증가하자 나치는 마침내 이주를 시킨다는 거짓말로 이들을 기차에 태워 집단학살장으로 보낸다. 수용소의 열악한 상황에서 탈출한다는 생각에 게토를 관리하던 유대인인 유덴라트들을 동족을 기꺼이 기차로 실어날랐다. 게토에 남은 유대인들과 유덴라트들이 그 참상을 알아챘을때는 이미 30만이 죽은 상황이었다.

 이에 남은 바르샤뱌 게토 유대인이 소수의 폴란드인들과 봉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워낙 소수였고, 연합군에 대한 지원요청도 묵살되었으며 내부에서도 좌파와 우파가 갈려 진압된다. 이 봉기로 남은 이중 1만3천이 죽고, 남은 이들중 3만은 가스실로 향한다. 이 지옥에서 굶어죽지 않고, 가스실로 가지 않고, 봉기에서도 살아남은 이는 매우 소수였다. 


3. 갈라놓은 장벽 휴전선

 휴전협상은 전후 1년인 1951년에 시작된다. 양측의 입장이 달랐는데 UN군은 현 시점영토로의 휴전을 북한군은 전쟁이전 38선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면서도 개성지역을 요청하는 형태였다. 협상은 당연히 결렬되는데 38선으로 회귀하면 황해도의 옹진반도 남단은 북측이 언제든 차지할수 있는 형국이었고 동부의 알짜배기 지역인 철원, 양양, 속초가 북의 수중에 들어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51년 UN군이 동부전선 양구지역을 점령하며 공산지역의 기가 꺽인다. 또한 휴전협상의 내용을 알게된 이승만정권과 한국군, 한국민이 분노하면서 시위가 일어났고, 이에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풀어줌으로써 협상자체가 엎어지게 된다. 그 결과 미국은 이승만이 원하는대로 현재의 영토로 휴전할 것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휴전선은 대단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렇다할 경계없이 말뚝을 몇개 박아 놓은 게 처음이었다. 이 군사분계선에서 양측은 서로 2km씩 물러나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을 설정한다. 이 총 4km의 구간이 비무장지대가 되는데 서로를 못믿어서인지 그 안에 GP를 설치했고 밖에는 GOP를 설치한다. 또한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비무장지대의 기지에 군이 들어갈수 없으니 일본 자위대마냥 북은 민경대란 이름으로 무려 1만의 병력을 남은 민정경찰이란 이름으로 2천의 병력을 배치하는 촌극을 벌였다. 거기에 남한의 경우 미군사령관이 일방적으로 남방한계선에서 5-20km를 민간인 통제구역인 민통선으로 설정해버린다. 

 미군의 짓거리는 이게 끝이 아니다. 휴전회담엔 남한군 대표가 참여하지 못했는데 그래서인지 육상의 한계는 잘 구분짓고도 해상의 경계를 설정하지 못하는 실수가 벌어졌다. 당시 북한군에 이렇다할 해군이 없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이후 서로 해군이 생겨나며 UN에서는 뒤늦게 북방한계선 MLL을 해상에 선포하고 북에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이후 NLL은 당연히 남과 북사이에 갈등거리가 되었으며 남한에서는 북한적대로 먹고사는 세력의 주 안주감이 되고 만다. 


 책에는 다양한 장벽의 세계사가 등장한다. 만리장성도 하드리아누스 장벽,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끼장벽, 이스라엘의 장벽, 트럼프의 장벽등이 말이다. 과거 방어와 구분의 역할을 하던 장벽이 방어역할을 상실하며 차별의 장벽으로 넘어갔고, 이후 구분과 차별의 역할로 최근 넘어가는 분위기다. 트럼프의 멕시코 장벽, 유럽연합의 난민 장벽들이 그렇다. 장벽은 결국 스스로를 가두는 행위임을 깨달을 날이 와야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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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7-04 08: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 색깔은 정말 단호하게 벽치는 느낌으로 잘 골랐네요...무슨 필터낀 줄 알고 한참 새로고침 누름..,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김성우.엄기호 지음 / 따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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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고를땐 아무래도 기사를 고를때처럼 헤드에 해당하는 책 제목과 표지가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물론 톱밥처럼 작게쓰인 저자도 간혹 보긴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제목이 좀더 절대적인 선택기준이다. 문제는 제목이 배신을 때릴 때가 간혹 있다는 것인데, 이 책 역시 그러했다. 책 제목만 보면 한창 인기가 좋은 유튜브와 책을 비교하고, 유튜브가 대세가 된다던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시대는 여전할 것이라든지 하는 뻔한 의견이 나온 책 같았다. 물론 다 읽어보니 이건 어느정도 맞는 말이었는데 내용이 훨씬 깊고 생각치 못했던 것들이 많아 얻는게 많았다. 나름 즐거운 배신이었던 셈인데,  자세히 보니 톱밥글씨중 하나는 좋은 책을 여러번 써주신 엄기호님이었다.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유튜브도 책도 아닌 '리터러시'다. 과거 문자의 해득능력 정도로 사용되던 리터러시는 전세계 많은 인구가 문자해득력이 생겨나며 그 의미가 많이 확장되었다. 리터러시는 문자언어의 습득과 이를 통한 지식과 정보에의 접근 그리고 이에 기반한 문제해결력을 의미한다. 상당히 복합적인 능력인 셈이다. 유네스코는 리터러시를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자료를 활용하여 정보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어내고, 소통하고, 계산하는 능력이라 하였다. 정리하면 리터러시는 문자해득력을 바탕으로 지식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실생활의 문제를 맥락을 고려하여 해결하는 역량이라 할 수 있겠다.

 

1. 한국 사회 리터러시의 문제점

 한국사회에 크게 리터러시와 관련해 3개의 집단이 있다. 하나는 60-70년대 이후 다양한 책을 접하며 자라난 텍스트 중심의 문해력을 지닌 집단, 하나는 그 이전 세대로 텍스트를 좀처럼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해 문해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집단, 나머지 하나는 최근 세대로 영상을 바탕으로 한 리터러시를 가진 집단이다. 이 중 기득권을 가진 것은 텍스트 중심의 리터러시를 가진 집단이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의 리터러시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의 리터러시를 모두 문제 삼는다는 점이다. 이들 입장에선 나이든 세대나 젊은 세대 모두 제대로 된 리터러시를 갖추지 못한 집단이 된다. 나이든 세대는 다양한 지식과 교양, 세태에 대한 식견을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영상 중심의 젊은 세대는 가볍기만 하고 깊은 사유가 없음을 지적한다. 

 책의 저자들은 자신의 리터러시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 진정한 리터러시는 서로에게 다가가 타인의 경험과 생각에 대한 이해가 있고, 시대에 대한 사유가 있는 삶에 대한 기록과 숙고가 목표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잘못된 접근이 된다. 

 한국사회에 최근 드러나는 또 다른 리터러시 문제는 '동질화'다. 최근 매우 다양한 리터러시가 드러나고 있으메도 역설적으로 동질적인 리터러시를 가진 사람과만 만나고 그들 끼리만 어울려 살아가는 모든 영역이 게토화된 사회가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내가 읽는 방식으로 읽지 않으면 '너는 문맹이야, 난독증이야.'라는 지적이 서슴없이 웹상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관계를 맺기는 커녕 상대를 모욕하고 비인간화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윤리의식이나 책임의식은 거의 없고 오히려 강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의 호응을 얻는다. 또한 상대의 의견이 듣기 싫으면 끊어버린다는 태도가 널리 퍼져있다. 자신의 리터러시만을 강조하며 가르치려는 태도도 문제지만 가르치려들지 말라는 것과 함게 가르치려는 사람에게 적대적이 되고 끊어버리려는 반지성주의적 태도가 만연해지는 것도 문제라 할수 있겠다. 


2. 영상 리터러시와 텍스트 리터러시

 텍스트는 생겨나며 문명과 역사를 이루는 기반이 되었지만 필연적으로 공동체적이었던 구술문화를 파괴하여 개인을 출현시켰다. 읽기 시작하며 오래전엔 모닥불앞에서 옛 선인의 이야기를 듣던 인류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 또한 그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자신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내면이 형성되고 개인이 탄생한다. 

 텍스트는 독톡한 세 개의 성격을 갖는데 유연함과 검색 및 인용의 유연함, 고도의 추상성이다. 텍스트는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들의 거의 무한하게 어떤 식으로든 기호화 하여 표현이 가능하다. 이것이 유연함인데 소리나 영상은 이런 것에 상당한 제약을 갖는다. 스타워즈를 책으로 써내는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나 영화로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검색 및 인용도 마찬가지다. 정보를 찾거나 연구를 해나가며 다른 지식을 찾고 재구조화하고 붙이는 등의 인용을 텍스트가 편하다. 대부분의 연구나 학술논문이 이런 방식에 의존하는데 영상이나 다른 매체에서 이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영상검색도 결국 텍스트로 하지 않는가, 마지막은 추상성이다. 텍스트는 다양한 수준에서 세계를 이론화 하는게 가능하다. 세계의 추상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갖은 개념, 추상적 기호로 드러난다. 

 이처럼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로딩하고 편집하고 그걸 통해서 지식을 만들고 우리가 경험한 것을 성찰하고 나눈다. 아직 영상은 이것이 어렵다. 또한 영상은 기본적으로 지각의 매체다. 영상을 보며 사람은 언어와 소리와 이미지를 그대로 인지한다. 하지만 텍스트는 그자체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반으로 내 몸에 이걸 시뮬레이션 한다. 곱씹어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디오 북은 글자나 소리그대로 인지되는 쉬운 장르가 아니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곱씹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튼 지금은 영상의 시대다. 미디어가 바뀐다는 것은 미디어를 통해 세계를 만나는 감각과 방식, 그리고 의미를 구성하고 대하는 방식 자체가 바뀜을 의미한다. 매체가 달라지면 우리 뇌의 활성화 패턴이 달라지는데 뇌가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몸의 습속 자체가 바뀜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상 리터러시 시대에 우리는 보는 양은 많아졌지만 호흡은 무척 짧아졌다. 거기에 우리가 접하는 영상은 호흡의 짧음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편집된 영상이다. 때문에 나는 매우 빨리 알려주고 흥미 있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며 다른 것은 지루해진다. 이로 인해 미디어 편식이 이루어져 몸은 점점 특정 길이와 형식에 그리고 특정 내용에만 익숙해지게 된다. 다른 리터러시를 접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3. 올바른 리터러시로 가는 길

 한국은 리터러시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리터러시의 문제는 사회적 역량의 문제라고 말한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리터러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올바른 사회적 리터러시의 생성문제는 결국 교육의 문제로 향한다. 우리 학교교육은 지식을 얼마나 암기하느냐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진정한 리터러시를 배양하는 능력인 읽고 쓰고 이를 활용하고, 지식을 다루는 역량을 강조하지 않는다. 공정성이나 진정한 구인타당성보다는 공공성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상황인 것이다. 경쟁의 심화로 인한 공공성의 과도한 중시는 경쟁과 서열화를 위한 필연적으로 방대한 양의 어렵지만 가벼운 내용적 지식만을 다루게 되며 이는 짧은 호흡의 교육이 이루어지게 만든다.

 때문에 교육현장엔 긴 호흡의 교육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회에 필요한 진정한 리터러시가 길러지기 때문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리터러시는 사회와 연결되어야 하는데 지역 사회나 학교의 문제를 학생이 발굴하여 이를 연구하고, 관련 문서를 읽거나 보고, 사람을 찾아가는 등의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수업이 필요하다. 이처럼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검토하면 수업의 호흡은 길어지게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미디어 간의 교육도 중요하다.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것을 이야기로 바꾸어 보고 반대로 서사가 강한 이야기를 분석적으로 바꾸어 보는 것이다. 또한 텍스트를 영상으로 바꾸어보고 영상을 텍스트로 바꾸어 보는 것도 좋은 시도다. 이런 시대를 통해 학생은 다양한 리터러시의 장점와 특성을 알고 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리터러시를 익히게 된다. 영상시대를 무조건 비판하기 보다는 이처럼 영상과 텍스트간의 가교를 놓는 것이 좋은 교육적 시도가 될 것이다.

 저자들은 결론적으로 좋은 리터러시는 일상을 중심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한 세계에서 이 다양한 것들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조망하는 힘이 있고, 그것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긴 호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관계를 구축해낼수 있는 윤리적 주체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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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7-02 1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사람들의 리터러시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알라딘도 예외가 아니죠.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알라딘 서재 내의 리터러시 문화에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서로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댓글을 통해 교류를 하다 보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외면하거나 무시해요.

닷슈 2020-07-02 10:50   좋아요 2 | URL
저도 그런 생각이 좀 듭니다. 이전에도 누군가 지적하셨지만 그런의미에서 알라딘에 공감시스템만 있는건 좀 문제란 생각입니다. 그리고 알라딘 내에서도 대단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생각이 다르다 판단되면 돌아서는 친구분들도 많더군요. 갈길이 멀단 생각입니다. 책의 저자들은 외국에선 생각이 다르다고 무시하거나 싸우고, 남의 리터러시를 함부로 문제삼는 경우는 경험한 적이 없다더군요. 물론 한국은 말이 안되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긴 합니다만 문제란 생각입니다.
 
정치적 부족주의 - 집단 본능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
에이미 추아 지음, 김승진 옮김 / 부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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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어느새 협력과 그에 필요한 이타심, 그리고 이에 기반한 고도의 윤리체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여기엔 적용범위가 있다. 어디까지나 이들이 나의 내집단에 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와 같은 언어와 비슷한 복장과 생김새, 주거지역, 먹는 음식등이 비슷해야 비로서 나의 내집단으로 여기고 협력과 윤리성이 적용된다. 이에 벗어나면 금방 적개심을 갖거나 적이되는데 최근 미국을 뒤엎고 있는 플로이드 사건만 해도 그렇다. 백인과 흑인은 서로 모든게 매우 다르다.

 이런 인간의 미개해보이는 특성은 상당한 장점이 있다. 내집단의 협력성은 나의 적합도를 현저히 높인다. 짝짓기 기회도 높이고 먹이도 나눌 수 있으며 외부 침입에서 나를 보호한다. 또한 외부에서 온 녀석은 알수 없는 전염병 같은 것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여러모로 이런 특성은 과거 분명 유효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오래 지나며 이런 작은 규모의 내집단은 다른 내집단에 잡아 먹히거나 합세하기도 하여 점점 그 크기를 키웠나갔다. 그래서 이룩된게 현대 국가다. 한국처럼 과거 여러 다민족이 서로 한민족이라는 신화에 하나로 융합되어 스스로가 단일민족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면 그 융화가 상당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경우는 분명 아니며 한 국가에 억지로 상당한 정체성과 반목을 가진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경우도 잦다. 이는 역사적 우연에 의해서이기도 하고 일부 힘있는 나라들의 장난질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서로가 매우 이질적으로 생기고 문화와 종교가 다른 외집단들이 서로 같이 살고 있음에도 서로를 어느 정도 강한 내집단으로 여겨 같은 나라의 국민으로 스스로를 여기고 그 나라에 충성하는 국가가 하나 있으니 바로 미국이다. 저자는 그래서 미국이 세계 주요 강대국중 유일하게 수퍼집단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수퍼집단을 이룬 강대국은 많지 않다. 영국은 국호는 영국이나  사실상 그 좁은 나라안에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가 따로 논다. 캐나다 역시 프랑스계와 영국계가 아등바등하고 살며, 프랑스내에서도 기존 프랑스 인외에 이민자 집단과의 갈등이 심하며 프랑스는 강제 통합정책을 실시한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내 다양한 민족과 그들의 정체성을 허락한다. 그래도 미국이라는 하나의 수퍼집단으로의 통합을 자신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와 미국의 개척자 정신으로 하나가 되어온 오랜 역사적 전통에서 비롯된 자신감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게 미국에 항상 긍정적으로만 작용한 건 아니다. 우선 외교에서 그랬다. 우리한테 한 것만 봐도 미국은 전통적 지지를 얻던 민족주의 진영을 무시하고 친일파와 미국에 협력하는 우파 세력에만 손을 뻗었는데 이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결과였다. 미국은 한국에만 그런게 아니다. 베트남에서도 헛발질을 했는데 그들은 베트남이 중국에 오랜 저항을 해온 역사를 갖고 있고, 소규모 집단임에도 오랜 지배로 기득권을 얻어온 중국의 후예인 화교집단에 대한 적대감도 몰랐다. 단지 한국에 그랬던 것처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안경만 끼고 바라 봤을 뿐이며 결과는 참당함 실패였다. 물론 미국이 이러는데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들의 성공적 통합 경험이 있다. 서로 작은 별볼일 없는 집단이 아둥바둥해도 강한 힘과 민주주의라는 정의 앞에 결국 하나로 통합되어 국가를 이룰거라는 순진한 믿음 말이다. 또 거기에 미국은 다른 오래된 강대국들에 비해 식민지 운영 경험이 일천하다. 구 열강들은 원거리에 위치한 강대한 식민지 국가를 지배하기 위해 그들의 역사와 민족을 철저히 연구했고, 반목집단을 서로 이용함으로써 지배를 유지해왔다. 미국은 이런 경험이 없다.

 하여튼 이런 정치적 부족주의에 대한 몰이해로 베트남에서의 실패, 아프간에서의 실패, 이라크에서의 실패를 쪽 살펴본게 이 책이다. 다만 베네수엘라의 예는 미국과는 조금 덜 상관있고 더욱 재밌는 예이기에 자세히 살펴본다.

 베네수엘라 하면 죽은 우고 차베스와 미인대회, 석유, 파탄난 경제가 떠오른다. 아마도 대중적으로 미인대회가 가장 친숙할텐데 베네수엘라의 미인대회의 수준은 상당하며 실제로 세계 미인대회에서의 성적도 좋은 편이다. 베네수엘라 자체내에서도 미인대회의 시청률이 80%에 이를 정도로 대국민적 관심사다. 그런데 베네수엘라 미인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남미적 특성이 좀 섞여 더욱 매력적이긴 하지만 유럽인에 가까운 미인이 생각나지 않는가. 그래서 나도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대개 그런 스타일인 많은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대부분은 우고 차베스처럼 생겼다.

 이는 남미내에 깊이 뿌리 박힌 인종차별에서 비롯하는 정치적 부족주의를 강하게 상징한다. 헌데 이는 우리의 상식과 부합하지 않는다. 북미와는 다르게 중남미는 가족이민을 하지 않아 강하게 혼혈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인종차별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지역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리고 현지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결정적 증거는 빈부격차인데 중남미 국가는 하나 같이 혼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백인 지주의 후예들이 대부분의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 중남미에서 혼혈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역사는 매우 길다. 메시코에서는 백인과 아메리카 토착민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땅을 소유하거나 성직자가 되는걸 오래도록 금지했다. 그리고 칠레는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했을때 이를 칠레의 백인적 특성때문으로 여겼다. 중남미에서는 백인과 아메리카토착민, 흑인노예,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의 혼혈들의 마구잡이 뒤섞임을 무려 20여종으로 분리해놓았는데 차별할 필요가 없었다면 대체 이런 짓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차별의 반증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중남미에서 코스모폴리탄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부유한 백인계층이다. 여유에서 나온 사치랄까.

 이런  틈새를 파고든게 우고차베스다. 그는 이미 존재하던 인종차별에서 비롯되던 정치적 부족주의를 날카로운 정치적 감각으로 파고들었고 대중에게 이를 일깨웠다. 백인이 차지하던 요직과 권력은 자신과 닮은 혼혈인과 토착민에게 부여했다. 차베스의 집권은 베네수엘라가 고유가로 호황을 누리던 시기와 함께 지속되었고 나라가 저유가로 흔들리는 낌새를 보이는 시기 그의 죽음으로 끝났다. 남미의 반목과 백인에 의해 만들어진 코스모폴리탄의 정체를 잘 파헤쳐준 사건이다.

 수퍼국가를 만든 미국도 사실 정치적 부족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적 부족주의는 소수이면서도 정치, 경제, 사회의 권력을 잡은 시장지배적 소수가 있을때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데 오늘날 미국엔 이런 소수가 없어 위협을 모두가 느끼는 모순이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미국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정치적 부족이 위협을 느낀다. 권력을 장악한 백인도, 흑인도, 무슬림미국인도, 멕시코계 미국인도, 아시아계도, 미국의 여성도 모두 위협을 느낀다. 경제적 어려움과 중산층의 붕괴가 사회의 안정성과 통합을 해쳐 모두가 위협을 느끼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는 확실한 주도적 세력이 없기 때문엔데 주도적 세력의 경제, 사회, 정치 권력의 상실은 어이없게도 모두에게 위협적인 상황이 된다. 확실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은 관용을 베풀 여유를 갖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오랜 추구로 세계 여러 부유한 나라의 중산층은 붕괴하였고, 강함을 잃었다. 때문에 정치적 부족주의는 강하게 각국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새로운 정치적 부족주의라고 할수 있거나 그것을 넘어서는 틀이었던 민주주의는 각국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인간이 이를 넘어 서기는 어려워 보인다. 위기에 몰릴수록 내집단에 더욱 기대는 것이 우리의 오랜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발달할 수록 내집단은 새로운 이념과 정체성, 신화를 내세우는 더큰 하나의 집단으로 통합되어 갔다. 한국만 봐도 고구려,백제, 신라의 정체성은 통일신라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고려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을 고려인이라고 칭하기 보다는 백제, 신라인으로 자신을 칭했다.거기서 벗어난건 조선에 이르러서였다. 새로운 정치적 부족주의로 갈아타는데 오백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계 각국도 언젠간 하나의 지구라는 신화로 통합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아닐수도 있지만. 어릴적 좋아하던 일본 만화 '마크로스'를 보면 지구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외계 거대 모함이 지구의 한 섬에 불시착한다. 이 거대모함의 불시착은 전 지구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글 결과는 지구 통합전쟁이었다. 강한 외부의 적을 인식해 지구인 전체는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로 인해 수년간의 전쟁이 수행되어 통합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그리고 이 통합정부는 결국 외부의 적을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진정한 코스모폴리탄 시각을 가지려면 둘중 하나겠다. 외부의 적의 등장과 인간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신화의 등장이다.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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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취도시, 서울 - 당신이 모르는 도시의 미궁에 대한 탐색
이혜미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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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고란 말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지옥고는 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을 말한다. 모두 우리사회에서 주거의 질이 가장 낮은 곳이라 볼 수 있는데 희안하게도 이들의 단위면적당 주거비용은 그 품질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지옥고보다도 더 위에서 노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쪽방'이다.

 쪽방은 방을 여러 개로 나누어 작은 크기로 만든 방으로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크기의 방이다. 보통 3제곱미터 전후인데 보증금 없이 월세 혹은 일세로만도 살 수 있어 홈리스나 홈리스전단계의 빈민들이 선호한다. 이처럼 쪽방은 홈리스로 전락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증없는 낮은 문턱으로 주거공간을 제공한다는 순기능이 있다. 실제로 외국에선 쪽방같은 것을 없애버렸다가 오히려 홈리스가 늘어나는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 드러난 우리나라의 쪽방 실태를 보면 순기능보다는 부정적기능이 압도적으로 보인다.

 지옥고나 쪽방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한국엔 놀랍게도 최저주거기준이란게 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인데 14제곱미터, 즉 4.3평정도의 면적에 부엌과 전용목욕시설, 화장실을 갖춰야한다는 것이다. 지옥고와 쪽방은 물론 이것이 갖춰져 있지 않은데 이는 이들이 비주택으로 분류되는 법망의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쪽방은 그 어느법의 적용도 받지 않는듯하다. 실체가 불분명하다보니 숙박업도 아니고 임대업도 아니어서(물론 사실상 임대업이다.) 공중위생관리법이나 주택임대차보호법의 보호 및 적용대상이 아니다. 이 애매한 공간에 사는 이들이 서울만 3296명이며 다른 지역 및 통계에 잡히지 않는 수를 더한다면 배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쪽방은 놀랍게도 난방 및 냉방기능이 없다. 힘없는 쪽방의 사람들은 쪽방의 대기수요도 많기에 세입자로서 당연한 요구를 감히 하지 못한다. 목욕시설도 당연히 바깥에 있으며 화장실도 공용이다. 창문은 언감생심이다. 이런 쪽방의 주인들은 대부분 타지인인데 놀랍게도 임대투자목적으로 대개 쪽방건물을 구입하고 운영한다. 운영은 주인이 직접하는경우는 매우 드물고 대개 쪽방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근처 중개사를 이용한다. 때문에 쪽방주민들은 대개 이 관리자들을 주인으로 착각하며 살며, 정식 부동산 임대차 계약이 아니기에 서류상 주인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당연히 이들의 임대수익은 정식으로 잡히는 돈이 아니며 탈세로 이어진다. 삼층짜리 쪽방건물에 방이 10개라면 쪽방의 평균임대수입이 22만원이므로 한달에 220만원의 임대수익이 주어진다. 일년이면 2600만원 가량되는 셈이다. 이 금액은 면접대비로 친다면 강남 타워펠리스의 수배에 달한다. 질은 수십배 낮음에도 말이다.

 더 기가막힌 것은 이 쪽방의 수리를 행정당국이 맞고 있다는 것이다. 마땅히 주인이 해야하나 타지인인 주인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관리자도 주인이 아니다. 그렇다보니 주거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행정당국이 매년 국민의 세금으로 땜질식 수리를 한다고 한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거기에 쪽방은 위험관리도 되지 않는다. 돈만되면 마구잡이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받다보니 전과자나 위험성향을 가진 인물이 입주하는 경우가 많고 이들의 주변 쪽방 이웃들에게 위해를 가해도 특별히 방법이 없다. 쪽방엔 장애인들도 무척 많이 사는데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한다. 또한 쪽방은 성차별적이기도 하다. 남성의 경우 홈리스 신세를 면하고나 면해가는 과정에서 임대주택의 전단계로 쪽방에 거주하기도 하는데 여성의 경우 쪽방촌의 거주민이 대부분 남성이고 사생활 보호가 전혀되지 않아서 거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쪽방의 가장 안좋은 점은 주민들의 발목잡기다. 쪽방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잠시 이곳을 스쳐지나가는 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지만 막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 쪽방에 거주하는 평균 기간은 무려 11.7년에 달한다. 한번 들어가면 장기간 여기에 묶이는 것이다. 이는 쪽방에 사는 사람들이 경제적 능력이 취약하다는 점과도 관계하지만 아무래도 과도한 임대료도 한몫하지 않는다고 하기 어렵다.

 이런 쪽방이 대학가에도 있다고 하니 바로 대학가 신쪽방촌이다. 언젠부턴가 대학가에서는 기존 주택을 불법개조하건나 신축하여 쪽방크기의 원룸임대가 성행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대학이 학생 10명당 거의 1명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기숙사시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가 신쪽방촌은 대개 노후한 다가가 주택을 리모델링하여 원래 존재하지 않던 방을 둘이나 셋 만들어 호수를 부여한다. 신축하는 경우는 법에 맞게 사용승인을 일단 받은후, 이후 더 많은 가구로 나눠 방을 쪼개는 경우다. 101호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102호와 103호가 나오는 형국이다.

 이들은 주로 대학가에 당연히 위치하는데 몇년전 한양대가 기숙사 건립을 추진하자 쪽방주인들이 나서 대거 항의한 적이 있다. 당연히 이 지역 정치인도 합세하여 더욱 문제가 된 사건인데 한양대는 이들과의 갈등으로 아직도 기숙사 첫 삽을 뜨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들과 주변 직장인들이 이 쪽방의 주 고객인데 이들은 사회초년생이라 자신들의 권리에 미숙한 면도 있고, 워낙 주거비용이 비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이런 방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곤 한다. 이런 쪽방은 당국의 행정지도에도 불응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적발되어도 시정비율이 불과 5%에 못미친다고 한다. 이는 이행강제금보다 월세수익이 이를 상회하기 때문이다.

 이런 쪽방 사업은 투자대비 상당한 수익을 올리는 고수익 비즈니스 사업이다. 빈곤 비즈니스라 할 수 있는데 정상적인 임대업에 비해 자신들은 어떠한 책임과 임차인에 대한 기본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매우 악랄하다 할 수 있다. 결국 해결은 당국에 있는듯하다. 법의 개정으로 쪽방과 대학가 신쪽방에 대한 관리. 또한 결국 임대주택의 많은 보급 그리고 대학의 책임있는 자세가 문제의 해결책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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