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판타지 - 포르노라는 신화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파헤치다
매트 프래드 지음, 임가영 옮김 / 시그마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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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는 포르노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 매매춘에 대해선 거의 모든 나라가 비교적 엄격하게 불법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포르노는 그렇지 못하다. 이는 포르노가 다른 예술품 및 표현물과 엄격하게 구분하기 어렵고 이미 상당히 큰 산업규모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포르노는 10년정도 전에 미국에서만 연간 130억 달러의 산업 규모를 형성했으며 세계적으로는 200억 달러에 달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아마 그 두배나 1.5배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업규모가 큰 만큼 소비층 및 생산자도 다양하고 많다. 밀레니얼 남성의 63%, 그리고 여성의 23%가 일주일에 적어도 여러차례 포르노를 시청한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트래픽이 가장 많은 100만개 사이트 중 42337개가 포르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포르노는 매매춘을 뜻하는 prone에 글이나 삽화를 의미하는 graphos가 합성된 것으로 매매춘을 표현하는 글이나 그림이 된다. 포르노는 다른 것과 구분이 어렵긴 하지만 성적 흥분을 일으켜 자위를 하게 만드느냐의 여부가 가장 결정적 차이다. 예술품이나 다른 표현물들은 수용자를 그런 상태로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저자는 포르노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생산자 이외에는 모든 이들에게 부정적 역할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포르노를 보는 남여 성인들 및 미성년자 그리고 포르노에 출현하는 여성들이 피해자가 된다. 

 우선 출연하는 여성들이다. 한때 사회 분위기가 동서양을 통틀어 가부장적이어서 여성의 성욕 및 성이 억압된 적이 있다. 때문에 여성의 과감한 포르노 출연과 포르노 소비가 이런 억압된 여성의 성의 해방구나 탈출구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다. 포르노에 출연하는 여성들은 대개 수동적 자세에 취하며, 공격적인 언어나 신체폭력에 노출되기 쉽상이다. 이런 매체에 대한 출연 및 소비를 성의 해방이나 탈출로 볼 수 있을까? 

 또 다른 긍정적 주장은 포르노를 통해 여성의 권력이 신장된다는 주장이다. 일부 여성 출연자들이 스타덤에 오르기에 이런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여성이 포르노에 출연하는 것은 대개 세 가지 이유 때문인데 명성과 수익, 성욕이다. 여성출연진은 남성출연진에 비해 두배가 넘는 급여를 받으며 일부 출연자들은 명성이 높아져 자기만의 브랜드나 프로그램알 갖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사례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수익은 착취하는 남성 생산자로 향한다. 또한 여성은 출연과정에서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이는 성공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은 포르노에 출연하며 많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언어적 신체적 폭력이 많다. 2007년 304건의 포르노 영상을 조사한 결과 3376건에서 언어 신체폭력이 나타났으며 이는 영상의 매 1분 30초마다 폭력이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장면의 88%에서 뺨때리기, 재갈물리가, 머리채 당기기, 엉덩이 때리기 등의 신체폭력이 등장했다. 언어폭력은 장면의 48.7%에서 나타났으며 폭력의 주제는 73% 당연히 남성이었다. 여성이 폭력의 주체로 나타난 경우도 상대 남성을 향하기 보다는 같은 출연 여성을 향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포르노에서 언어신체적으로 얻어맞는 여성은 긍정적 반응을 보여야한다. 무려 95%에서 여성은 폭력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포르노의 장면들이 이렇게 구성되기에 여성 출연진은 많은 폭력을 감내해야 하고 격렬한 정사장면등의 촬영으로 신체가 파괴되거나 상당한 고통을 겪기도 한다. 

 포르노의 소비자인 남성도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된다. 포르노에 자주 노출되는 남성들은 성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여자 친구 및 아내같은 자신의 성적 파트너와 정상적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여성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갖게 된다. 포르노를 거부하는 노팸이란 집단이 있는데 이들의 64%는 이전에 극단적 포르노 중독자였다. 이런 중독자들의 19%에서 조루증, 25%가 파트너와의 성관계에 흥미를 잃었고, 31%가 절정도달에 여러움을 34%가 발기부전을 겪었다. 하지만 노팸이 된 후 이들의 60%가 성기능이 개선되었다고 대답했다. 포르노는 강한 자극을 주어 중독과 비슷한 작용을 뇌에 일으키는데 그래서 포르노를 자주 접한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자극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때문에 이런 성기능장애가 발생하는 것이다. 

 게일다인스는 포르노를 자주 보는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우선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이다.  포르노는 남성우위의 시각에서 촬영되며 여성은 마치 남성의 성적 쾌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때문에 이런 시각이 정립된다. 둘째는 사용자가 성적판타지에 빠져 이를 현실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성적 파트너가 포르노에 등장하는 인물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들에게 비슷한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셋째는 성적 학대 메뉴얼의 제공이다. 실제 1962-1995년 12323명을 대상으로 46년간 진행한 연구결과 포르노를 자주 접한 사람들은 비정상적 성적 취향(31.5%), 성폭력을 저지를 가능성(22.5%), 강간에 대한 잘못된 통념 수용(31%)이 증가했다. 

 저자는 포르노는 너무 많은 성적 판타지와 가학적 장면을 보여주어 결국 시청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대하는 사람이 인간이며 존중받아야할 인격체라는 사실을 망각시키는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포르노인해 포르노 출연 여성과 자신의 성적 파트너는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는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때문에 이런 포르노를 사회적으로 금기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의 위험성을 파악하고 본질을 헤아리며 피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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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란 무엇인가 - 마스크 시대의 정치학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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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사회 시민에겐 권리와 의무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부여된다. 하지만 권리는 주로 나의 생존권과 행복추구와 직접적 관련이 있기에 누구나 환영하고 주장하는 반면 국가와 사회, 이웃을 위해 나의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는 의무는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 의무는 약간의 원죄까지 있다. 시민사회가 성립하기 이전 사람들이 신민이던 시절을 생각해보자. 그들에겐 이렇다할 권리는 없고, 일년 내내 수확한 작물을 절반 가량 지주에게 빼앗기고, 국가에도 바치며, 노역에 시달리는 의무만이 가득했다. 물론 국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의 기근이나 흉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지키긴 했다. 하지만 백성 자신은 물론 국가까지 그것을 백성의 권리라고 생각해본적은 감히 없었다.

 그러다 시민사회가 들어서며 신민은 시민이 되고 기본권을 바탕으로 한 권리가 생겨난다. 이 시기가 19세기 무렵이다. 19세기 이후엔 국가에게 시민의 행복을 증진시킬 의무가 생겨난다. 민주주의로 인해 공화정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행복 추구는 반드시 충돌하는 지점이 생겨나기에 국가에겐 이 시기부터 인권과 시민권 그리고 이것을 갖고 있는 개인간의 권리와 의무의 조화를 어떻게 실현시키는가가 지상과제가 되었다. 

 생체정치 개념도 등장한다. 생명정치 또는 생명관리 정치라고도 하는데 이는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노동력과 소비자로써 중요한 의미를 가지므로 그런 차원에서 국가가 체계적으로 국민의 몸과 건강, 수명, 인구를 관리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과거 국가도 중시했던 것이긴 하다. 국가에게 국민은 국방, 세금의 징수대상이었기 때문이며 호구가 많은 것은 곧 어느정도 국력이란 인식이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생체정치는 차원을 달리한다. 우선 국민의 생명과 건강, 최소한의 경제권이 기본권 달성의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추구권, 인권 등의 기본권은 당연히 육체적 안녕이 보장될때야 의미가 있다. 죽은 사람이나 뇌사자, 혹은 견딜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자에게 교육받을 권리,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권리 따윈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둘째는 국가가 근현대 사회에 이르러 이런 생체정치를 추구할만한 제도적 기술적 과학적 수단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같았으면 돌림병이 번져도 그 근원과 이렇다할 해결방법을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적극적 예방접종과 치료수단, 방역지침을 수행할만한 행정적 권력과 제도를 갖고 있다. 

 때문에 공중위생은 19세기가 지나는 동안 점점 더 중요한 국가의 의무가 되었다. 생체정치는 사회정치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국가는 두 가지 책임이 있는데 하나는 개인의 행복추구이며 다른 하나는 공공의 이익이다. 양자는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며 기본권이 국가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의무로 인해 시민은 국가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민주시민사회에서 국가의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는 의무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국가의 생산성과 효율성, 창의성을 높여 국부를 최대로 증진시키기에 국가의 입맛에 딱 맞는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기본권과 공공의 이익을 침해한다. 불평등과 환경오염, 시민 개인간의 공공성을 흐트리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지배한 20세기 내내 불평등과 경쟁을 옹호하는 것과 평등과 연대의 옹호간의 기나긴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코로나 19사태다. 코로나 19를 맞아 실시한 대부분 민주 국가의 방역 정치는 연대적 생체정치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자유 혹은 기본권 침해 방지를 위해 적극적 방역 정치를 행하지 않는 것은 코로나에 가장 취약한 상대적 약자를 먼저 의도적으로 죽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가 코로나 정책을 행하지 않아도 부유층은 소득에 큰 지장이 없고 안전하고 쾌적한 곳에 격리될 수 있으면서 그러면서도 웬만한 생활을 다 누릴수 있다. 하지만 그런것이 모두 없는 빈자층은 죽음과 감염을 피하기 어렵다. 이처럼 국가가 사회의 전체적 효율을 중심으로 의무를 방기해 약자를 의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사회적 다윈주의로 파시즘정권이 행했던 일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민주국가는 약자 보호의 조치를 통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개입하고 기본권을 일시, 부분적으로 제한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생명권과 집회의 자유처럼 두 기본권이 충돌을 일으킬 때는 국가는 어느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당연히 생명권이 우선이 된다.  

 이렇게 국가의 방역이 당연하다고 해도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측면이 남아있다. 첫째는 국가의 위생조치가 팬데믹을 막을 만큼 효과적이었는가, 그리고 둘째는 이처럼 국민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코로나의 경우 방대한 방역을 벌였음에도 그와 유사한 피해는 주는 다른 상황에 대해 국가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옳은가라는 문제다. 전자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므로 언급하기가 어렵지만 한국의 경우가 가장 모범 사례로 꼽힌다. 적당한 개방과 자유를 추구해 시장과 인권을 지키면서도 방역수준을 높게 가져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적 방역을 우선한 중국이나 초기 많은 죽음을 불러온 이탈리아나, 미국의 사례는 좋지 못한 사례다. 두번째의 경우 사례로 들만한 것은 흡연이나 음주, 안전사고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이 불어오는 인명의 손실은 코로나 이상이다. 하지만 이들은 타인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죽음으로 몰고가지 않으며 개인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해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자본주의로 인해 흐트러진 공공성의 회복을 위해 그 해결방안으로 은퇴후 2년간 주당15시간의 사회적 봉사활동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되고 사회의 약자의 생활을 느껴보는게 하나의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독일사회의 반발이 많았는지 변명도 꽤 길게 써놓았다. 저자가 보기에 코로나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 혹은 국가에 대한 음모나 권리침해등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방역수칙을 위반하고 반대한 사람들은 결국 의무를 저버린 자들이 된다. 여러 그럴듯한 이유로 사회적 약자이자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간 직접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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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2-15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알라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닷슈 2022-12-15 22: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연말 잘 보내세요. 눈 조심하시구요.
 
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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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컨설팅사 딜로이트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회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나 관행에 대해서 침묵한다는 직장인이 무려 70%라고 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게 하여 조직의 생산성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기업이나 기관의 소비자인 일반 대중을 극히 위험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교통기관이나 병원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안정감은 쉽게 말해 말이 자유로운 조직이다. 조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행, 사건, 행동에 대해 직급 구분 없이 자신의 소신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으며, 업무관행이나 프로세스 개선을 위해 창의적이고 건설적인 아이디어를 개진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조직은 심리적 안정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 구성원은 항상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가 보복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실직할 위험에 노출된다. 2017년 갤럽조사에서는 직장에서 자신의 의견이 중요하며 받아들여진다고 응답한 비율이 30%에 불과했는데 이 수치가 60%로 높아지면 조직은 이직률이 27%낮아지고 안전사고는 40%감소하며, 생산성은 12%향상된다. 

 사람들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지 못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장기적 미래에 대한 회피성향과 대안관계위험때문이다. 장기적 미래에 대한 회피성향은 문제점에 대해 말을 하면 그 말을 함으로써 당장 자신이 질타를 받거나 상사 혹은 동료와의 관계불화로 이어질까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대인관계위험은 동료에게 무능하고 무지하고, 골칫덩어리로 보이기 싫어하며 누구나 자신이 유능하고 똑똑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성향이다. 그래서 조직의 구성원은 무지를 회피하기 위해 질문하지 않고, 무능을 회피하가 위해 실수나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회의시간에 입을 닫아 버린다.

 그래서 심리적 안정감이란 인간관계의 위험으로부터 근무 환경이 안전하다고 믿는 마음이며, 구성원이 자기 안위를 보호하는데 급급한 것이 아닌 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온힘을 싣는 동력이어야 한다. 

 실제로 조직내에서 심리적 안정감의 결여는 조직과 구성원의 생산성과 창의성, 업무효율을 저해한다. 두려움은 뇌의 편도체를 자극하는데, 신체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체내 자원을 자신의 보호와 그 대비를 위해 소진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습 및 분석적 사고와 창의력, 통찰력, 문제해결능력이 제대로 발휘할리 없다. 이에 리더는 조직내 각 계급에 무척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구성원의 직급이 낮을수록 위험에 자주 노출되어 심리적 안정감이 떨어지며 높은 계급일수록 하급자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할 소지가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조직에서 문제 제기 및 침묵을 지킬때는 암묵적 규칙이 있다. 첫째, 상사가 관여한 업무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둘째,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말하지 않는다. 셋째, 상사의 상사가 있을 때는 문제제기를 더욱 하지 않는다. 넷째, 상사의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 다 같이 있을 때는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다섯째 문제제기는 해고로 이어질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침묵은 철저히 본능적이며 자기 보호 뿐만 아니라 동료도 단기적으로 보호하기에 즉각적이고 확실한 혜택을 주어 보다 많은 선택을 받게 된다. 문제를 제기하면 조직과 고객은 혜택을 보겠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난후일 가능성이 높고 그것조차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침묵을 지키면 자기자신이 즉각 보호를 받고 보호라는 혜택이 즉각주어지며 확실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은 자연적이지 못한 것이기에 구축을 위해서는 리더의 확고한 신념과 더불어 조직내에서의 구체적 실천방안이 필요하다. 

 첫번째 단계는 토대만들기다. 업무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새로 구축한다. 그것은 실패와 불확실성, 상호의존에 관한 기대치 설정, 문제제기의 필요성을 명확히 리더가 제시하는 것이다. 목적의 강조 역시 토대에 속하는 것으로 무엇이 중요하고, 문제이며 누구를 위한 일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참여유도하기다. 참여의 유도를 위해서는 상황적 겸손함을 리더가 보여야한다. 자신이 결점이 있고 모른는 것이 많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적극적 질문하기는 좋은 질문을 하고 경청하는 문화의 조성이며 구조와 절차 만들기는 구성원의 제언을 위한 창을 만들고 토론을 위한 지침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생산적으로 반응하기다. 가치 인정하기는 구성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문제제기에 인정과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실패라는 오명 제거하기는 미래지향적 태도, 필요한 도움 제공, 다음 단계의 작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규칙을 위반할 때는 반드시 제재하는 것도 포함된다. 

 심리적 안정감 구축을 위해서는 위 프로토콜 외에도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리더는 직원이 두려움없이 창조적 실패를 하도록 돕기 위해 불확실성, 상호의존성, 문제의 핵심이라는 세 가지 요인을 구성원에게 알려야 한다. 리더는 방향을 설정할 뿐 답을 갖고 있지 않아야 하며 직원 의견을 수렴해 전략을 수립하고 학습하며 지속적인 학습환경을 조성해 목표를 성취해야 한다. 리더가 이렇게 하면 조직구성원은 중요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조직에 기여하게 된다. 흔히, 리더들은 자신의 겸손함을 미덕처럼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겸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미덕이 아니라 조직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그래야 구성원들이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용적 리더는 상황적 겸손과 적극적 질문을 한다. 

 책을 읽어나가며 한국의 거의 모든 조직은 심리적 안정감이 매우 낮은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특유의 유교적 문화와 학벌에 따른 선후배 관계와 공채기수문화가 강하게 자리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심리적 안정감이 가능하기란 힘들 것이다. 작년 기사가 나온 것처럼 네이버 같은 신기업마저도 심리적 안정감이 매우 낮고 권위주의적인 부분이 드러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는 이런 심리적 안정감이 산업화를 넘어서 4차산업혁명시대에 기업 및 조직이 갖춰야할 필수요소로 언급한다는 점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 시대일수록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과 창의성, 의사소통능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꿔야할 게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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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12-06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장에서 과연 “자아 성찰”이나 “자아 발견” 혹은 “자아 실현” 이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
다들 쓸데 없는 노력들 하고 있지 않은지 궁금해집니다. ㅠㅠ

닷슈 2022-12-07 17:04   좋아요 1 | URL
직장 너무 힘듭니다. 가능한 곳은 극소수라 생각합니다. 사람들 괴롭히는 사장이나 경영진들도 돈버는게 자아실현이 아니라면 그네들도 하는지 궁금합니다. 언젠가 미래에 만약 로봇 인공지능으로 인간이 직장이란걸 대부분 잃게된다면 지금의 직장이나마 의미 있었다고 생각할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12-07 20:29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전 매일 제게 셀프 “토닥토닥”해주고 있습니다. ^^
 
시험능력주의 - 한국형 능력주의는 어떻게 불평등을 강화하는가
김동춘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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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마이클 센델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능력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더욱 심화하면서 직업과 재산 소유에 따른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면서 부터다. 이전에도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있어왔지만 부작용이 더욱 커지며 비판도 날이 서는 느낌이다.

 능력주의가 가장 심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 중국, 미국이다. 미국은 자본주의의 첨병이기에 능력주의가 강하고, 넓은 땅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겹치며 그런 경향이 시작되었다. 때문에 미국은 사회주의 및 복지가 취약하다. 중국과 일본, 한국의 능력주의는 과거제도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있다. 귀족들이 신분으로 세습하며 정치경제권력을 장악하는 부작용을 막고자 도입된 합리적 제도이지만 과거제 역시 문제가 많았다. 과거제 역시 다수를 떨어뜨리는 학력시험이다보니 실제 문제해결력이 뛰어난 사람이 관료로 선발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율곡이이는 과거 공부가 진정 선비가 해야하는 학문을 방해한다고 비판까지 하였다. 

 이런 과거에 전통으로 인해 한중일은 학력을 가진 자에 대한 신망이 강하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서구화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일본은 서구식 교육을 통해 나라를 이끌 사람들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이점이 능력주의를 강화시켰다. 서구유럽사회는 근대식 학교교육이전에도 의사나 법조인, 상인, 과학자 등 다양한 전문직이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나 양성되었다. 하지만 그런 전통이 전혀 없는 일본에서는 나라를 이끌어나갈 전문 인재를 막 도입한 서구식 교육과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로 충원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시험능력주의에 상당히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본을 통해 근대화한 한국도 일제시대와 해방이후에도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전후 근대화를 시도하는 한국사회에서 시험 능력주의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양반출신이 아니고 재산이 많지 않아도 공부해서 시험을 잘 보면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었다. 국가가 시행하는 선발시험인 이것에는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작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공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정으로 인해 충분한 역량이 있었음에도 학력을 획득하지 못해 직장과 사회에서 차별받은 사람들은 학력을 통한 능력주의를 더욱 몸에 뼈져리게 새기고 자식들에게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시험능력주의가 개인의 일이 아닌 가정에서의 총력전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던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고졸출신의 기능직 노동자도 충분한 재산 형성을 할 수 있었고 안정적인 정규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고도 숙련이 아니더라도 중반, 초급 숙련자에게도 이런 일자리가 주어졌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이 닥치면서 기업은 일을 외주화, 자동화, 정보화 하기 시작했고 경제도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많이 이동했다. 때문에 고졸출신을 위한 일자리는 크게 사라졌고, 성장한 대기업 사무직 및 전문직 종사자와의 급여차이는 상당해졌으며 중소기업이나 하청기업으로 전전하게 되어 고용도 크게 불안해졌다.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한국의 시험능력주의는 더욱 강력해졌다. 불안해진 사회경제적 입지로 90%가 넘는 시험능력주의의 패배자들은 이런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연대하기보다는 개인으로 원자화되었고 오히려 자신보다 더한 처지에 몰린 패배자를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국의 시험 능력주의는 사실상 문제가 상당히 많으며 망국병의 근원에 가깝다. 우선 용어와는 다르게 시험능력주의가 정작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의 시험은 1단계와 2단계로 첫 번째는 대입시험이고 두 번째는 고시 및 입사 시험이다. 과거엔 1단계의 통과가 2단계의 통과를 보장하였기에 시험능력주의가 크게 강화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은 한국의 시험이 종합적인 실질 역량을 검증하는 것이 아닌 암기력 및 기초사고력 테스트에 가깝기에 시험을 통과해 해당직위에 이르렀을 때 반드시 뛰어난 역량을 보이진 못한다. 때문에 시험을 통한 선발은 오래 전부터 실질 인재를 획득하지 못하는 부작용을 나타냈고 이를 자각한 최근의 한국 기업들은 역량을 초점을 둔 블라인드 테스트를 확대해나가고 있다. 

 시험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행해지는 불공정 게임이라는 점이다. 시험능력주의 신화가 큰 힘을 얻는 것은 바로 공정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같은 학교에 입학해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통해 그간의 노력과 능력을 검증받고 그에 걸맞는 지위와 보상을 얻는 것이 무척이나 객관적이고 타당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보이듯 현재의 시험성적은 부모가 가진 경제력과 상당히 연관성을 보인다. 실제 서울 25개 자치구중에서 서울대 합격 비율은 고소득층이 많이 자리한 강남지역이 압도적으로 높다. 한국의 상속 부자 및 전문직들은 본인들이 가진 재산 및 사회적 네트워크와 권력 정보를 이용하여 자녀를 어릴적부터 전략적으로 사교육을 시키고 해외 및 국내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실상 본인들이 가진 도구를 이용해 지위를 세습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고위 관료라 하더라도 자식을 과거에 합격시키는 것 만큼은 어찌 할수 없는 일이었는데 현대사회가 이런 면에서 오히려 퇴보한 셈이다. 

 시험 능력주의의 세 번째 문제는 시험 통과자에 대한 과도한 보상과 패배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이다. 시험에 통과한 이들은 대기업 사무직이나 고시를 통한 고위 관료, 법조인, 의사등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직종들은 하나 같이 소수의 자리만을 허용하며 상당히 많은 권한을 갖는다. 한국의 검사집단은 수사와 기소권을 독점하여 권력을 휘두르고 판사는 소수로 상당히 많은 일을 처리하는 고충을 감내하며 본인들의 권력을 지킨다. 의사 역시 상당한 고수익을 누리고 있으며 심지어 범죄를 저질러도 면허 박탈 및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공익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며 시험 통과로 인해 자신의 보상과 지위가 과도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 중 상당수는 정치권에 진출하여 정치 및 경제권력을 모두 획득하는 길로 나아간다. 한국 국회의원의 평균재산은 보통사람들의 10배인 22억에 달하며, 대부분 고시를 통과한 고위 행정관료, 법조인, 교수, 언론인 들이다. 반면 대다수의 패배자들은 시험의 실패로 인해 학창시절부터 상당한 상처를 입고 이 트라우마를 평생 갖고 살아간다. 보다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 현실은 사회구조에서 찾기 보다는 자신의 무능으로 돌리며 오히려 시험 통과자들이 과도한 지위 및 정치권력을 얻는 것을 용인한다. 그리고 서로를 견제하고 자신보다 더 못한 패배자를 멸시 혐오하며 이런 체제에 협조한다. 이런 분위기이나 패배자들에게는 중소기업, 하청업체, 비정규직, 배달노동자 등의 자리가 제공되며 이런 직종들은 급여가 적고, 고숙련노동자로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 개인의 성장을 막고, 승진에 제한이 있으며 근무환경이 열악하고 과도하여 건강과 생명이 상당한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이런 직종들은 대개 소규모 사업장이거나 그것도 아니어서 단체교섭권도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며 중대기업처벌법에서도 유예 및 예외 대상이다.  

 시험능력주의의 마지막 문제점은 바로 교육의 파괴다. 한국의 교육은 입시위주의 교육정책의 많은 부작용을 깨닫고 여러 개혁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능력주의에 따른 노동 및 사회구조가 같이 변화하지 않으면서 자연히 모든 교육 개혁도 실패했다. 입시위주의 교육은 교육을 시험에 종속시켜 그 본연의 목적을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 교육의 목적인 개개인이 타고난 적성과 능력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올바른 지적능력과 인성을 가진 민주시민으로 자라나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험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이와 같은 것들을 실행되지 못한다. 또한 학생들은 입시경쟁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스트레스는 학교의 다른 친구, 교사, 학부모에게 발산되며 이로 인해 학교폭력이 잦아진다. 

 저자는 이런 시험능력주의의 해결책도 제시한다. 해결책은 우선 좁은 병목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다. 현재는 시험에 통과하여 명문대의 간판을 얻고 이를 통해 고시 및 전문직 시험과 대기업 입사시험을 통과하는 사람들만이 사회적 지위와 보상을 얻는다. 이를 다양화 하고 그 수를 늘리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의사라면 공공의대를 꾸준히 설립하여 그 수를 늘리고 판검사의 수를 늘리고 그들이 갖는 과도한 권력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또한 고소득 전문직종을 공채로 뽑아 문을 닫기보다는 아래쪽으로부터의 루트를 통해서도 접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가령 서울 중앙언론의 아나운서를 수천대 일의 공채로 선발하기 보다는 지역언론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능력과 경력을 발휘하는 사람에게도 열어주자는 것이다. 교사를 임용고시로만 뽑기보다는 기간제교사로 꾸준히 일하면서 수업 및 교육과정 역량과 인성을 갖춘 이들도 정규교사로 전환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다른 해결책은 아래쪽의 형편 개선이다. 시험능력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위에서 얻는 떡이 큰 것도 있지만 아래쪽에서 얻는 떡이 너무 형편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국가사회적으로 고졸출신의 기능직이 꾸준히 성장하고, 좋은 직종을 얻을 수 있도록 중소기업을 양성하고 소재부품기업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법적 보호장치 및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이들의 소득을 보존해주고 법적으로 보호해줄 필요도 있다. 

 시험능력주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험능력주의가 소수의 강자가 불공정한 상황을 이용하여 과도한 보상을 얻는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며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사회 문화적으로 이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은 물질적 보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대만은 사회를 그리고 나머지 조사대상국들은 모두 가족을 선택했다고 한다.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 교육도 필요하다. 한국은 주요 선진국들 중 거의 유일하게 시민 교육 및 노동 교육이 부족하다. 이를 교과로 편성하거나 교육과정에 강력하게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사실 능력주의는 개개인의 노력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선천적 능력 및 사회적 여건(태어난 가정이나 국가 및 지역)에 의해 좌우된다. 때문에 그것이 주는 보상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기 보다는 공유재적 측면이 있다. 이런 인식을 강화해야 한다.

 또 다른 해결책은 대학 서열의 완화다. 서울대를 포함한 모든 국공립대를 통합하여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방법이 있다. 또한 지방의 대학을 양성하여 산업체가 필요로 하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배출하고 이를 통해 지방의 대학과 산업체가 같이 지역을 발전시켜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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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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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참여정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이 대선 참패 이후 이명박의 집권을 바라보며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 펴낸 첫 번째 책인듯하다. 이후 헌정질서 유린의 9년간 유시민은 참 좋은 책을 많이 펴냈다. 정말 야인 초기 시절이라고 느껴지는게 책에선 아직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고 살아있다. 가까운 시일내에 일어날 참극을 아직 모르는 저자를, 독자인 나는 그 사실은 안 채로 책에서 만나니 가슴이 좀 먹먹했다.

 책 제목인 후불제 민주주의를 보고서는 선분양 아파트, 후분양 아파트 같은 개념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린 늘 정치인을 선거때의 유세와 그 소임을 맡기전 이미지, 그리고 소속 정당만 보고 막연히 뽑았다 그 부실에 대한 대가를 혹독히 치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시민이 아마도 이런 선분양 정치인을 비난하고 후분양식의 어떤 정치나 선거체계를 제시하지 않을까나 싶었다.

 물론 예상은 늘 빗나간다. 책에선 말하는 후불제 민주주의는 사실 시민사회의 미성숙도와 그 궁극적 원인인 시민 개개인의 정치적 미숙과 자각, 앎의 부족에 대한 지적이다. 한국은 미군의 점령으로 인한 미국법의 도입, 그리고 독일의 첨단 법을 베낀 일본의 법 영향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역사적 기반도 없이 상당히 선진적인 법체계를 광복후 도입했다. 그래서 수십년이 흐른후 한국의 선진적인 노동법이 현실에서는 하나도 적용되지 않음을 깨달은 전태일은 분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명시적인 법이었다.

 이렇게 기형적으로 완성된 법상으로만의 선진적 민주주의 였기에 한국 시민은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치뤄냈다. 4.19 혁명과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 2017년의 촛불혁명등이 그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불제 민주주의가 된다. 민주적 법의 실제 실천을 위해 시민사회가 뒤늦게 막대한 비용을 치루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지불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서구 사회에서 경제적 선진화와 상당 수준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나라로 꼽히지만 갈 길이 멀다. 이번 대선에서 대결했던 두 후보는 대장동 사건과 고발사주라는 큰 두 개의 아킬레스 건을 갖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양자는 비슷한 수준의 논란이 될만한 문제라고 본다. 하나는 시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부패를 다른 하나역시 시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정치적 부패였다. 하지만 시민 사회의 반응은 일방적으로 전자에 집중되었다. 물론 여기엔 보수 언론과 지난 정권에 대한 실망, 그리고 목도한 집값폭등이란 절망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양자를 비슷한 수준으로 보지 못하는 오히려 정치적 부패를 더욱 심각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시민 개개인의 미성숙이 더 근본적으로 자리한다. 

 대선과 총선, 지선을 대하는 한국민의 자세에서도 지불이 끝나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한국인은 거의 동등한 세 가지 선거에 대해 대선과 총선, 지선의 순으로 관심을 가지며 실제 그 반영인 투표율도 딱 그 순서대로이다. 하지만 실제 나의 삶에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치자면 지선, 총선, 대선의 순이 맞다. 대통령은 막강하고 큰 것을 정하지만 그가 대단한 독재자라도 되지 않는한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거주하는 마을의 구청장, 시장, 지역의원이 미치는 영향은 나의 삶에 매우 직접적이다. 선진사회로 갈수록 시민 개개인의 자각수준이 높아질수록 관심사는 이렇게 가야한다.

 유시민은 책에서 후불제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한국의 헌법 가치 하나하나를 제시하며 그것의 완성을 위한 노력과 이를 파괴하는 보수세력을 비판한다.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허가제로 바꾼 것, 직무상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할 수 있게끔 정치적 중립을 보장받아야 할 공무원들에게 그것을 꺼꾸로 의무로 바꾸어 버린 것, 사실상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대통령이 마치 메시아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모든 것을 바꿀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바라는 사람들의 태도, 진정한 애국이 국가라는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고 이를 위해 헌법가치를 수호해야한 다는 것 등이다. 

 법치주의는 부패세력이 행하는 것처럼 나의 반대자나 지배하려고 하는 집단을 억누르기 위해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헌법은 이 같은 자의적인 권력행사와 공평하지 못한 법집행을 금지한다. 이것이 법치주의의 본질이다. 법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헌법 정신이 무너지면 법치주의가 설곳이 없어진다. 이 원리가 무너지면 법률은 큰 고기는 정작 모두 빠져나갈수 있음면서도 약자만 잡아내는 촘촘한 그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무려 13년전에 펴낸 책의 이 구절은 안타깝게도 지금도 유효하다. 역사는 앞서가나 뒤쳐지거나 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 같지만 때론 정말 뒤로만 가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유시민은 책에서 장기적으로 해당 국가의 경쟁력과 수준은 해당 국가 시민의 그것은 넘지 못하며 권력의 도덕과 능력도 장기적으로 대중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며 시민들은 자신들의 평균적 수준 정도의 정치집단과 정부를 소유할 수 있다. 더 나은 집단을 선택하여 이들을 도태시키는 안목과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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