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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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로벌 컨설팅사 딜로이트사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회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나 관행에 대해서 침묵한다는 직장인이 무려 70%라고 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게 하여 조직의 생산성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기업이나 기관의 소비자인 일반 대중을 극히 위험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은 교통기관이나 병원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 안정감은 쉽게 말해 말이 자유로운 조직이다. 조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관행, 사건, 행동에 대해 직급 구분 없이 자신의 소신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으며, 업무관행이나 프로세스 개선을 위해 창의적이고 건설적인 아이디어를 개진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조직은 심리적 안정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 구성원은 항상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가 보복당하거나, 무시당하거나 실직할 위험에 노출된다. 2017년 갤럽조사에서는 직장에서 자신의 의견이 중요하며 받아들여진다고 응답한 비율이 30%에 불과했는데 이 수치가 60%로 높아지면 조직은 이직률이 27%낮아지고 안전사고는 40%감소하며, 생산성은 12%향상된다. 

 사람들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지 못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장기적 미래에 대한 회피성향과 대안관계위험때문이다. 장기적 미래에 대한 회피성향은 문제점에 대해 말을 하면 그 말을 함으로써 당장 자신이 질타를 받거나 상사 혹은 동료와의 관계불화로 이어질까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대인관계위험은 동료에게 무능하고 무지하고, 골칫덩어리로 보이기 싫어하며 누구나 자신이 유능하고 똑똑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성향이다. 그래서 조직의 구성원은 무지를 회피하기 위해 질문하지 않고, 무능을 회피하가 위해 실수나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회의시간에 입을 닫아 버린다.

 그래서 심리적 안정감이란 인간관계의 위험으로부터 근무 환경이 안전하다고 믿는 마음이며, 구성원이 자기 안위를 보호하는데 급급한 것이 아닌 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온힘을 싣는 동력이어야 한다. 

 실제로 조직내에서 심리적 안정감의 결여는 조직과 구성원의 생산성과 창의성, 업무효율을 저해한다. 두려움은 뇌의 편도체를 자극하는데, 신체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체내 자원을 자신의 보호와 그 대비를 위해 소진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습 및 분석적 사고와 창의력, 통찰력, 문제해결능력이 제대로 발휘할리 없다. 이에 리더는 조직내 각 계급에 무척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구성원의 직급이 낮을수록 위험에 자주 노출되어 심리적 안정감이 떨어지며 높은 계급일수록 하급자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할 소지가 높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조직에서 문제 제기 및 침묵을 지킬때는 암묵적 규칙이 있다. 첫째, 상사가 관여한 업무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둘째,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말하지 않는다. 셋째, 상사의 상사가 있을 때는 문제제기를 더욱 하지 않는다. 넷째, 상사의 체면이 깎이지 않도록 다 같이 있을 때는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다섯째 문제제기는 해고로 이어질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침묵은 철저히 본능적이며 자기 보호 뿐만 아니라 동료도 단기적으로 보호하기에 즉각적이고 확실한 혜택을 주어 보다 많은 선택을 받게 된다. 문제를 제기하면 조직과 고객은 혜택을 보겠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난후일 가능성이 높고 그것조차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침묵을 지키면 자기자신이 즉각 보호를 받고 보호라는 혜택이 즉각주어지며 확실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은 자연적이지 못한 것이기에 구축을 위해서는 리더의 확고한 신념과 더불어 조직내에서의 구체적 실천방안이 필요하다. 

 첫번째 단계는 토대만들기다. 업무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새로 구축한다. 그것은 실패와 불확실성, 상호의존에 관한 기대치 설정, 문제제기의 필요성을 명확히 리더가 제시하는 것이다. 목적의 강조 역시 토대에 속하는 것으로 무엇이 중요하고, 문제이며 누구를 위한 일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참여유도하기다. 참여의 유도를 위해서는 상황적 겸손함을 리더가 보여야한다. 자신이 결점이 있고 모른는 것이 많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적극적 질문하기는 좋은 질문을 하고 경청하는 문화의 조성이며 구조와 절차 만들기는 구성원의 제언을 위한 창을 만들고 토론을 위한 지침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생산적으로 반응하기다. 가치 인정하기는 구성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문제제기에 인정과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실패라는 오명 제거하기는 미래지향적 태도, 필요한 도움 제공, 다음 단계의 작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토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규칙을 위반할 때는 반드시 제재하는 것도 포함된다. 

 심리적 안정감 구축을 위해서는 위 프로토콜 외에도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리더는 직원이 두려움없이 창조적 실패를 하도록 돕기 위해 불확실성, 상호의존성, 문제의 핵심이라는 세 가지 요인을 구성원에게 알려야 한다. 리더는 방향을 설정할 뿐 답을 갖고 있지 않아야 하며 직원 의견을 수렴해 전략을 수립하고 학습하며 지속적인 학습환경을 조성해 목표를 성취해야 한다. 리더가 이렇게 하면 조직구성원은 중요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조직에 기여하게 된다. 흔히, 리더들은 자신의 겸손함을 미덕처럼 여기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겸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미덕이 아니라 조직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그래야 구성원들이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용적 리더는 상황적 겸손과 적극적 질문을 한다. 

 책을 읽어나가며 한국의 거의 모든 조직은 심리적 안정감이 매우 낮은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특유의 유교적 문화와 학벌에 따른 선후배 관계와 공채기수문화가 강하게 자리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심리적 안정감이 가능하기란 힘들 것이다. 작년 기사가 나온 것처럼 네이버 같은 신기업마저도 심리적 안정감이 매우 낮고 권위주의적인 부분이 드러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는 이런 심리적 안정감이 산업화를 넘어서 4차산업혁명시대에 기업 및 조직이 갖춰야할 필수요소로 언급한다는 점이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 시대일수록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과 창의성, 의사소통능력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꿔야할 게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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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12-06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장에서 과연 “자아 성찰”이나 “자아 발견” 혹은 “자아 실현” 이 가능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
다들 쓸데 없는 노력들 하고 있지 않은지 궁금해집니다. ㅠㅠ

닷슈 2022-12-07 17:04   좋아요 1 | URL
직장 너무 힘듭니다. 가능한 곳은 극소수라 생각합니다. 사람들 괴롭히는 사장이나 경영진들도 돈버는게 자아실현이 아니라면 그네들도 하는지 궁금합니다. 언젠가 미래에 만약 로봇 인공지능으로 인간이 직장이란걸 대부분 잃게된다면 지금의 직장이나마 의미 있었다고 생각할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12-07 20:29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전 매일 제게 셀프 “토닥토닥”해주고 있습니다. ^^
 
시험능력주의 - 한국형 능력주의는 어떻게 불평등을 강화하는가
김동춘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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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마이클 센델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능력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더욱 심화하면서 직업과 재산 소유에 따른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면서 부터다. 이전에도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있어왔지만 부작용이 더욱 커지며 비판도 날이 서는 느낌이다.

 능력주의가 가장 심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 중국, 미국이다. 미국은 자본주의의 첨병이기에 능력주의가 강하고, 넓은 땅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겹치며 그런 경향이 시작되었다. 때문에 미국은 사회주의 및 복지가 취약하다. 중국과 일본, 한국의 능력주의는 과거제도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있다. 귀족들이 신분으로 세습하며 정치경제권력을 장악하는 부작용을 막고자 도입된 합리적 제도이지만 과거제 역시 문제가 많았다. 과거제 역시 다수를 떨어뜨리는 학력시험이다보니 실제 문제해결력이 뛰어난 사람이 관료로 선발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율곡이이는 과거 공부가 진정 선비가 해야하는 학문을 방해한다고 비판까지 하였다. 

 이런 과거에 전통으로 인해 한중일은 학력을 가진 자에 대한 신망이 강하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서구화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일본은 서구식 교육을 통해 나라를 이끌 사람들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이점이 능력주의를 강화시켰다. 서구유럽사회는 근대식 학교교육이전에도 의사나 법조인, 상인, 과학자 등 다양한 전문직이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나 양성되었다. 하지만 그런 전통이 전혀 없는 일본에서는 나라를 이끌어나갈 전문 인재를 막 도입한 서구식 교육과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로 충원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시험능력주의에 상당히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본을 통해 근대화한 한국도 일제시대와 해방이후에도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전후 근대화를 시도하는 한국사회에서 시험 능력주의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양반출신이 아니고 재산이 많지 않아도 공부해서 시험을 잘 보면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있었다. 국가가 시행하는 선발시험인 이것에는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작용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공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정으로 인해 충분한 역량이 있었음에도 학력을 획득하지 못해 직장과 사회에서 차별받은 사람들은 학력을 통한 능력주의를 더욱 몸에 뼈져리게 새기고 자식들에게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시험능력주의가 개인의 일이 아닌 가정에서의 총력전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던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고졸출신의 기능직 노동자도 충분한 재산 형성을 할 수 있었고 안정적인 정규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고도 숙련이 아니더라도 중반, 초급 숙련자에게도 이런 일자리가 주어졌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이 닥치면서 기업은 일을 외주화, 자동화, 정보화 하기 시작했고 경제도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많이 이동했다. 때문에 고졸출신을 위한 일자리는 크게 사라졌고, 성장한 대기업 사무직 및 전문직 종사자와의 급여차이는 상당해졌으며 중소기업이나 하청기업으로 전전하게 되어 고용도 크게 불안해졌다.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한국의 시험능력주의는 더욱 강력해졌다. 불안해진 사회경제적 입지로 90%가 넘는 시험능력주의의 패배자들은 이런 사회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연대하기보다는 개인으로 원자화되었고 오히려 자신보다 더한 처지에 몰린 패배자를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국의 시험 능력주의는 사실상 문제가 상당히 많으며 망국병의 근원에 가깝다. 우선 용어와는 다르게 시험능력주의가 정작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의 시험은 1단계와 2단계로 첫 번째는 대입시험이고 두 번째는 고시 및 입사 시험이다. 과거엔 1단계의 통과가 2단계의 통과를 보장하였기에 시험능력주의가 크게 강화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은 한국의 시험이 종합적인 실질 역량을 검증하는 것이 아닌 암기력 및 기초사고력 테스트에 가깝기에 시험을 통과해 해당직위에 이르렀을 때 반드시 뛰어난 역량을 보이진 못한다. 때문에 시험을 통한 선발은 오래 전부터 실질 인재를 획득하지 못하는 부작용을 나타냈고 이를 자각한 최근의 한국 기업들은 역량을 초점을 둔 블라인드 테스트를 확대해나가고 있다. 

 시험 능력주의의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행해지는 불공정 게임이라는 점이다. 시험능력주의 신화가 큰 힘을 얻는 것은 바로 공정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같은 학교에 입학해 같은 것을 배우고 같은 시험을 통해 그간의 노력과 능력을 검증받고 그에 걸맞는 지위와 보상을 얻는 것이 무척이나 객관적이고 타당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보이듯 현재의 시험성적은 부모가 가진 경제력과 상당히 연관성을 보인다. 실제 서울 25개 자치구중에서 서울대 합격 비율은 고소득층이 많이 자리한 강남지역이 압도적으로 높다. 한국의 상속 부자 및 전문직들은 본인들이 가진 재산 및 사회적 네트워크와 권력 정보를 이용하여 자녀를 어릴적부터 전략적으로 사교육을 시키고 해외 및 국내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실상 본인들이 가진 도구를 이용해 지위를 세습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고위 관료라 하더라도 자식을 과거에 합격시키는 것 만큼은 어찌 할수 없는 일이었는데 현대사회가 이런 면에서 오히려 퇴보한 셈이다. 

 시험 능력주의의 세 번째 문제는 시험 통과자에 대한 과도한 보상과 패배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이다. 시험에 통과한 이들은 대기업 사무직이나 고시를 통한 고위 관료, 법조인, 의사등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직종들은 하나 같이 소수의 자리만을 허용하며 상당히 많은 권한을 갖는다. 한국의 검사집단은 수사와 기소권을 독점하여 권력을 휘두르고 판사는 소수로 상당히 많은 일을 처리하는 고충을 감내하며 본인들의 권력을 지킨다. 의사 역시 상당한 고수익을 누리고 있으며 심지어 범죄를 저질러도 면허 박탈 및 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공익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며 시험 통과로 인해 자신의 보상과 지위가 과도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 중 상당수는 정치권에 진출하여 정치 및 경제권력을 모두 획득하는 길로 나아간다. 한국 국회의원의 평균재산은 보통사람들의 10배인 22억에 달하며, 대부분 고시를 통과한 고위 행정관료, 법조인, 교수, 언론인 들이다. 반면 대다수의 패배자들은 시험의 실패로 인해 학창시절부터 상당한 상처를 입고 이 트라우마를 평생 갖고 살아간다. 보다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 현실은 사회구조에서 찾기 보다는 자신의 무능으로 돌리며 오히려 시험 통과자들이 과도한 지위 및 정치권력을 얻는 것을 용인한다. 그리고 서로를 견제하고 자신보다 더 못한 패배자를 멸시 혐오하며 이런 체제에 협조한다. 이런 분위기이나 패배자들에게는 중소기업, 하청업체, 비정규직, 배달노동자 등의 자리가 제공되며 이런 직종들은 급여가 적고, 고숙련노동자로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 개인의 성장을 막고, 승진에 제한이 있으며 근무환경이 열악하고 과도하여 건강과 생명이 상당한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이런 직종들은 대개 소규모 사업장이거나 그것도 아니어서 단체교섭권도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며 중대기업처벌법에서도 유예 및 예외 대상이다.  

 시험능력주의의 마지막 문제점은 바로 교육의 파괴다. 한국의 교육은 입시위주의 교육정책의 많은 부작용을 깨닫고 여러 개혁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능력주의에 따른 노동 및 사회구조가 같이 변화하지 않으면서 자연히 모든 교육 개혁도 실패했다. 입시위주의 교육은 교육을 시험에 종속시켜 그 본연의 목적을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 교육의 목적인 개개인이 타고난 적성과 능력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올바른 지적능력과 인성을 가진 민주시민으로 자라나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험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이와 같은 것들을 실행되지 못한다. 또한 학생들은 입시경쟁으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스트레스는 학교의 다른 친구, 교사, 학부모에게 발산되며 이로 인해 학교폭력이 잦아진다. 

 저자는 이런 시험능력주의의 해결책도 제시한다. 해결책은 우선 좁은 병목 현상을 해결하는 것이다. 현재는 시험에 통과하여 명문대의 간판을 얻고 이를 통해 고시 및 전문직 시험과 대기업 입사시험을 통과하는 사람들만이 사회적 지위와 보상을 얻는다. 이를 다양화 하고 그 수를 늘리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의사라면 공공의대를 꾸준히 설립하여 그 수를 늘리고 판검사의 수를 늘리고 그들이 갖는 과도한 권력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또한 고소득 전문직종을 공채로 뽑아 문을 닫기보다는 아래쪽으로부터의 루트를 통해서도 접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가령 서울 중앙언론의 아나운서를 수천대 일의 공채로 선발하기 보다는 지역언론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능력과 경력을 발휘하는 사람에게도 열어주자는 것이다. 교사를 임용고시로만 뽑기보다는 기간제교사로 꾸준히 일하면서 수업 및 교육과정 역량과 인성을 갖춘 이들도 정규교사로 전환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다른 해결책은 아래쪽의 형편 개선이다. 시험능력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위에서 얻는 떡이 큰 것도 있지만 아래쪽에서 얻는 떡이 너무 형편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국가사회적으로 고졸출신의 기능직이 꾸준히 성장하고, 좋은 직종을 얻을 수 있도록 중소기업을 양성하고 소재부품기업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 또한 법적 보호장치 및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이들의 소득을 보존해주고 법적으로 보호해줄 필요도 있다. 

 시험능력주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험능력주의가 소수의 강자가 불공정한 상황을 이용하여 과도한 보상을 얻는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며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사회 문화적으로 이에 대한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은 물질적 보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대만은 사회를 그리고 나머지 조사대상국들은 모두 가족을 선택했다고 한다.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 교육도 필요하다. 한국은 주요 선진국들 중 거의 유일하게 시민 교육 및 노동 교육이 부족하다. 이를 교과로 편성하거나 교육과정에 강력하게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사실 능력주의는 개개인의 노력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선천적 능력 및 사회적 여건(태어난 가정이나 국가 및 지역)에 의해 좌우된다. 때문에 그것이 주는 보상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기 보다는 공유재적 측면이 있다. 이런 인식을 강화해야 한다.

 또 다른 해결책은 대학 서열의 완화다. 서울대를 포함한 모든 국공립대를 통합하여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는 방법이 있다. 또한 지방의 대학을 양성하여 산업체가 필요로 하는 역량을 갖춘 인재를 배출하고 이를 통해 지방의 대학과 산업체가 같이 지역을 발전시켜나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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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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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참여정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이 대선 참패 이후 이명박의 집권을 바라보며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 펴낸 첫 번째 책인듯하다. 이후 헌정질서 유린의 9년간 유시민은 참 좋은 책을 많이 펴냈다. 정말 야인 초기 시절이라고 느껴지는게 책에선 아직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고 살아있다. 가까운 시일내에 일어날 참극을 아직 모르는 저자를, 독자인 나는 그 사실은 안 채로 책에서 만나니 가슴이 좀 먹먹했다.

 책 제목인 후불제 민주주의를 보고서는 선분양 아파트, 후분양 아파트 같은 개념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린 늘 정치인을 선거때의 유세와 그 소임을 맡기전 이미지, 그리고 소속 정당만 보고 막연히 뽑았다 그 부실에 대한 대가를 혹독히 치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시민이 아마도 이런 선분양 정치인을 비난하고 후분양식의 어떤 정치나 선거체계를 제시하지 않을까나 싶었다.

 물론 예상은 늘 빗나간다. 책에선 말하는 후불제 민주주의는 사실 시민사회의 미성숙도와 그 궁극적 원인인 시민 개개인의 정치적 미숙과 자각, 앎의 부족에 대한 지적이다. 한국은 미군의 점령으로 인한 미국법의 도입, 그리고 독일의 첨단 법을 베낀 일본의 법 영향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역사적 기반도 없이 상당히 선진적인 법체계를 광복후 도입했다. 그래서 수십년이 흐른후 한국의 선진적인 노동법이 현실에서는 하나도 적용되지 않음을 깨달은 전태일은 분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명시적인 법이었다.

 이렇게 기형적으로 완성된 법상으로만의 선진적 민주주의 였기에 한국 시민은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치뤄냈다. 4.19 혁명과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1987년 6월항쟁, 2017년의 촛불혁명등이 그것이다.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불제 민주주의가 된다. 민주적 법의 실제 실천을 위해 시민사회가 뒤늦게 막대한 비용을 치루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지불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서구 사회에서 경제적 선진화와 상당 수준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한 나라로 꼽히지만 갈 길이 멀다. 이번 대선에서 대결했던 두 후보는 대장동 사건과 고발사주라는 큰 두 개의 아킬레스 건을 갖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양자는 비슷한 수준의 논란이 될만한 문제라고 본다. 하나는 시민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부패를 다른 하나역시 시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정치적 부패였다. 하지만 시민 사회의 반응은 일방적으로 전자에 집중되었다. 물론 여기엔 보수 언론과 지난 정권에 대한 실망, 그리고 목도한 집값폭등이란 절망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양자를 비슷한 수준으로 보지 못하는 오히려 정치적 부패를 더욱 심각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시민 개개인의 미성숙이 더 근본적으로 자리한다. 

 대선과 총선, 지선을 대하는 한국민의 자세에서도 지불이 끝나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한국인은 거의 동등한 세 가지 선거에 대해 대선과 총선, 지선의 순으로 관심을 가지며 실제 그 반영인 투표율도 딱 그 순서대로이다. 하지만 실제 나의 삶에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치자면 지선, 총선, 대선의 순이 맞다. 대통령은 막강하고 큰 것을 정하지만 그가 대단한 독재자라도 되지 않는한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거주하는 마을의 구청장, 시장, 지역의원이 미치는 영향은 나의 삶에 매우 직접적이다. 선진사회로 갈수록 시민 개개인의 자각수준이 높아질수록 관심사는 이렇게 가야한다.

 유시민은 책에서 후불제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한국의 헌법 가치 하나하나를 제시하며 그것의 완성을 위한 노력과 이를 파괴하는 보수세력을 비판한다.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허가제로 바꾼 것, 직무상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할 수 있게끔 정치적 중립을 보장받아야 할 공무원들에게 그것을 꺼꾸로 의무로 바꾸어 버린 것, 사실상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대통령이 마치 메시아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모든 것을 바꿀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바라는 사람들의 태도, 진정한 애국이 국가라는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고 이를 위해 헌법가치를 수호해야한 다는 것 등이다. 

 법치주의는 부패세력이 행하는 것처럼 나의 반대자나 지배하려고 하는 집단을 억누르기 위해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헌법은 이 같은 자의적인 권력행사와 공평하지 못한 법집행을 금지한다. 이것이 법치주의의 본질이다. 법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헌법 정신이 무너지면 법치주의가 설곳이 없어진다. 이 원리가 무너지면 법률은 큰 고기는 정작 모두 빠져나갈수 있음면서도 약자만 잡아내는 촘촘한 그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무려 13년전에 펴낸 책의 이 구절은 안타깝게도 지금도 유효하다. 역사는 앞서가나 뒤쳐지거나 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 같지만 때론 정말 뒤로만 가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유시민은 책에서 장기적으로 해당 국가의 경쟁력과 수준은 해당 국가 시민의 그것은 넘지 못하며 권력의 도덕과 능력도 장기적으로 대중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는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며 시민들은 자신들의 평균적 수준 정도의 정치집단과 정부를 소유할 수 있다. 더 나은 집단을 선택하여 이들을 도태시키는 안목과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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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우주와 환경에 대한 책 모두에 관심이 많다. 우주에 대한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한 없이 나를 작게하며 이 좁은 창백한 점에서 분투하는 모든 노력이 허사 같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워낙 스케일이 크서 압도적이고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우주의 시작과 끝, 그리고 허무한 질문인 '우주가 대체 왜 생겼고 그 전엔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인간이 알수 없는 부분이다. 너무나도 크긴 하지만 우리 은하도 태양계도 지구도 우주의 법칙을 적용받는 우주의 일부이기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환경 분야는 실존의 문제다. 2022년 4월 초는 무척 더웠다. 우리가 뿜어낸 열에너지 덕분인데 이 지경에도 에너지 위기로 서구를 포함한 선진사회는 다시금 온실가스 배출 정지에 합의에 실패했다. 다시 원전을 돌리고 가스 사용을 허가하는 쪽으로 회귀하는 분위기다. 

 하여튼 둘은 접점이 별로 없어보였는데 이번에 읽은 책 제러미 러프킨의 '엔트로피'는 나에게 양자를 연결시켜줬다. 책 내용을 간단히 언급하면 엔트로피라는 우주의 법칙 아래 인간이 생존을 위해 발달시켜온 자연 활용 및 분석능력인 과학과 기술이 결국 환경을 파괴하여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행위라는 설명이다. 우리가 이용가능한 지구의 유용한 환경은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이고 그것의 이용 후 나타나는 환경파괴는 무질서를 높이는 상황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한 상태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된 책 3권이 떠올랐다. 엔드 오브 타임은 우주의 역사를 엔트로피로 본 책이다. 우주가 에너지 덩어리인 매우 작은 점에서 끝없이 팽창하며 이 에너지와 그것으로 이뤄진 물질이 퍼져나가는 과정인 만큼 그 끝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책은 엔트로피를 자세히 서술하고 인간의 역사도 다루며 우주의 끝엔 사고조차 남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은 최근에 읽은 책으로 엔트로피와 시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시간은 엔트로피와 매우 관련하는데 우주의 시작과 끝이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에서 매우 높은 상태로 향하는 것이라면 시간은 그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트로피가 없는 우주의 시작 전과 끝은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그 구매가격은 매우 싸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임을 알려준 책이다. 음식의 가격이 싼 이유는 이것이 가격이 저렴한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대량생산된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 효용은 매우 낮다. 화석연료 기반으로 재배된 농산물이나 축산물을 내가 소비하여 얻는 칼로리는 그것을 키우는 과정, 그리고 추수, 도축, 수송과 유통, 판매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칼로리에 비해 현저히 적다. 거기에 이들은 생산과정에서 경제학에서 잘 측정하지 않는 상당한 환경오염 비용도 만들어낸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가격 경쟁력 유지를 위해 소비자가 내는 세금으로 구성된 정부의 보조금으로 낮은 가격을 유지한다. 결국 싸다고 생각한 식품이 사실은 매우 비싸다는 점을 지적한 것인데 책 엔트로피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다.

 본격적으로 책 '엔트로피'에 대해 언급하면 이 책은 우선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이 썼고 상당하긴 하지만 논의된지는 좀 오래된 저자라는 점이다. 그는 20년 정도 전에 상당히 유명했는데 책 엔트로피도 알고보니 그가 무려 1980년 초반에 저술한 책이었다. 그래서 책 뒷 부분에 경제와 인구, 식량, 에너지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에서 참고한 자료들이 대개 1960-70년대의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부분에 엔트로피의 증가와 인간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해 연결지어 서술한 부분은 시대를 관통하여 인류가 역사내내 새겨야할 부분을 관통했다는 느낌이다.

 엔트로피는 두 가지 법칙을 갖고 있다. 제 1법칙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한다는 것이다. 빅뱅 이후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모든 에너지 물질은 그 형태와 밀도를 달리할 뿐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주가 계속 무한히 팽창해나가면 모든 에너지와 물질의 밀도가 거의 제로에 가깝게 흩어져 버릴 것을 암시한다. 물질이 퍼져나갈 공간은 거의 무한히 팽창하는데 반해 물질과 에너지를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제 2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이다. 이 방향은 안타깝게도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 획득 가능한 상태에서 획득이 불가능한 상태로의 방향이다. 이는 어쩌면 우주가 계속 팽창하기에 매우 당연한 현상이다. 물질과 에너지는 모여 있어야 유용하지 공간의 팽창으로 흩어지면 유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마 우주가 쪼그라든다면 엔트로피는 그 방향이 바뀔 것이다. 이 법칙이 의미하는 것은 무서운데 결국 우주에 모든 생명체나 그들이 거주하고 진화하는 별들이 모두 사라져 흩어져 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엔트로피란 어떤 시스템 안에 존재하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형태로 바뀌는 정도를 재는 척도를 의미한다. 이 법칙이 온 우주에 적용된다면 사실 인간 같은 생명의 탄생이나 별이나 은하의 탄생 같은 고도의 질서는 엔트로피 법칙을 위배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국소적 질서의 탄생은 역으로 다른 바깥 부분의 엔트로피를 더욱 크게 증가시키기에 전체적으로는 법칙을 위배하지 않는다. 이게 책의 핵심인데 하나의 작은 질서인 인간이 과학 기술문명을 발전시켜 그 질서를 인간 생존을 위해 정교하게 하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큰 엔트로피 증가를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생존을 위해 발전해나갈수록 인간 자신 및 우주의 멸망을 앞당긴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런 명백한 엔트로피 법칙에도 인간은 우주가 무한할 것이고 인간이 영원히 제약 없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설적인 근대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이 이런 세계관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서구는 근대적 세계관 이전에 그리스 세계관 및 기독교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 두 세계관은 엔트로피 법칙에 부합한다. 

 그리스인은 역사를 지속적인 쇠락의 과정으로 보았는데 총 다섯단계로 역사를 나누었다. 황금 - 은- 청동 -영웅 - 철의 시대로 뒤로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지고 쇄락한다. 이 후퇴는 마지막 단계를 지나면 신에의해 다시 반복되는데 이에 따르면 역사는 발전이 아닌 질서와 혼돈을 반복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삶은 다음 생을 향해가는 중간과정으로 본다. 그리스와 다른 것은 인간 역사가 순환이 아닌 일직선으로 향한다고 파악한 것인데 이 과정은 발전이 아닌 힘의 충동과 해체의 씨앗을 지상에 뿌리는 것으로 인식된다. 때문에 사회에서 어떤 개인적 목표나 진보의지, 열망을 갖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되며 그저 인간과 사회는 신이 이끄는 일종의 도덕적 생물체로 그 안에서 신에 의해 주어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양 세계관은 지금 듣기엔 터무니 없는 면이 많지만 적어도 인간 사회의 발전이 쇠락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엔트로피 법칙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적 세계관은 1750년 튀르고가 역사의 순환과 지속적인 쇠락을 부정하며 바뀌기 시작한다. 튀르고는 역사는 일직선으로 진행하는 것이며 각 단계는 앞선 단계보다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며 근대적 세계관의 문을 열었다. 이후 등장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세명의 공동작품이다. 이들은 우주에는 정밀한 수학적 질서가 있고 이 질서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구상에 대부분의 것들은 원시 상태에 있고 그래서 충돌과 혼란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잘 배열하여 우주에서 우리가 볼수 있는 것과 같은 질서를 지구상에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연의 것들을 잘 배열하여 우주의 질서와 같은 질서를 창출하느냐였는데 그 답은 역학의 자연적 법칙을 이용하여 인간의 물질적 자기 이득이 증대되도록 가장 적합하게 자연을 배열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물질적 부가 축적될 수 있도록 세계는 더욱 질서화하며 진보는 물질적 풍요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이며 이 물질적 풍요는 결국 질서 있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과학과 기술은 바로 이를 실현하는 도구가 된다. 

 이런 기계론적 세계관은 지금도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 가장 큰 특징은 진보다. 덜 질서 있는 자연적 세계가 인간에 의해 이동되어 더 질서 있는 물질적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은 목적은 자연과정의 일부를 더 큰 가치, 더 큰 도구, 더 큰 질서의 형태로 바꾸어 당초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계관에 입각한 인간의 과학과 기술에 의한 발전은 결국 재생 재활용 가능한 유용한 에너지 원을 희생하고 전체 환경의 엔트로피 총량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에너지가 높은 수준의 집중도에서 낮은 수준의 집중도로 이동할 때이다. 자연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일정량의 에너지가 무용한 에너지로 전환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유용한 에너지는 결국 오염된다. 사람들은 오염이 생산활동의 부산물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오염은 흩어진 무용한 에너지의 증가, 즉 흩어진 에너지의 형태다. 그리고 지구는 하나의 폐쇄계이기에 지구의 엔트로피는 언젠간 극대점에 도달한다. 물론 태양에너지가 꾸준히 공급되긴 하지만 그것이 지구라는 폐쇄계의 엔트로피를 낮춰주는건 일정량이고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미 인간의 과학기술은 매년 태양에너지가 낮춰주는 마이너스 엔트로피 이상의 플러스 엔트로피를 발생시키고 있다. 곧 한계에 다다를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엔트로피는 시간과도 관련한다. 우주가 생긴 이래로 시간은 항상 앞으로만 흘렀는데 이는 엔트로피가 커지는 방향으로 항상 일정하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항상 총량은 일정하지만 우주가 팽창하기에 항상 쓸모있는 상태에서 쓸모없는 상태로만 움직인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극대화되어 에너지와 물질이 모두 고갈되면 더 이상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즉,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시간은 일을 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남아있을 때만 유용하며 뭔가가 일어난다는 것 역시 같은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생명체는 주변환경에서 자유 에너지를 흡수하여 엔트로피를 흡수하여 엔트로피 과정의 반대방향으로 움직여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지구에서 이런 자유 에너지의 원천은 태양이다. 모든 생물은 주변환경에서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지속적으로 흡수하여 살아간다. 생명체는 개방계로 폐쇄계와는 다르게 주변 환경과 물질 및 에너지를 교환한다. 그리고 주변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여 자기 몸에 흡수하여 살아가게 된다. 생명체가 자신의 엔트로피를 낮춰가며 주변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과정은 놀랍기 그지 없다. 1년에 인간은 생존을 위해 송어 300마리가 필요하다. 송어 300마리는 9만 마리의 개구리를, 9만 마리의 개구리는 2700만 마리의 메뚜기를, 그리고 이 메뚜기들은 1천톤의 풀을 요구한다. 

 생명체는 일종의 에너지 변환자인 셈인데 생물의 눈과 귀, 코, 입, 미뢰, 손등의 감각 기관과 머리, 입 사이의 긴밀한 관걔는 생명체가 에너지의 흡수자이자 변화자임을 보이는 명백한 증거다. 생명체의 생존은 이런 변환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렸는데 진화 초기 경쟁이 치열해지기전에는 주변의 물질과 에너지 흐름을 극대화, 즉, 마구잡이로 흡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지면 에너지 흐름의 극대화보다는 효율화가 유리해진다. 이런 에너지 흐름의 극대화를 저자는 식민화 단계, 그리고 효율을 중시하는 극소화를 절정 단계라 칭한다. 인간은 신체적으로는 당연히 절정 단계이지만 우리의 과학기술 문명은 식민화 단계라 볼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감각 기관 외에 에너지 변환을 위해 신체 외적 도구를 사용한다. 이는 단순한 도구에서 지금은 로봇, 인공지능 같은 걸로도 확장되어 상당히 많은 에너지를 변환한다. 인간의 삶, 문화, 사회는 결국 원재료에서 출발해 이런 외적 도구를 통해 무용한 폐기물을 양산한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상 기술 발전에 의한 잉여로 인해 계속 더 큰 잉여를 낳는 식으로 경제발전을 하고 인구를 증가시키며 발전해 왔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을 지구라는 한계를 명확히 갖고 있는 폐쇄계에 있는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소모한 과정에 불과하며 과거 태양에 의해 축적된 마이너스 엔트로피까지 써버리는 방법을 알아낸 것에 불과하다. 즉, 엄밀히 말해 한정된 에너지나 자원을 더 많이 써버리는 도구를 찾은 것인 셈이다.

 인간 사회는 사실 발전이라기 보다는 결핍, 위기, 실험의 과정을 거친다. 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일정한 에너지가 무용화한다. 이런 축적된 엔트로피로 인해 사회가 에너지 원에 대한 질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이 역사적 분수령이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이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방식의 기술이 태어나며 이것이 사회, 경제, 정치 체제 전반으로 퍼져 새로운 체제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는 엔트로피 측면에서 볼 때 새로운 사회가 이전 사회보다 에너지 환경면에서 더 열악해 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이 새로운 분수령을 맞이 했을 때 이전보다 에너지 획득을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하는 것을 의미하며 고전적으로는 더 힘든 육체적 노동을 해야함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과거 수렵사회에서 인간은 채취와 사냥으로 주변에서 쉽게 식물,동물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구증가와 역사의 지속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주변 자원이 부족해지자 농경과 축산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역시 오래 지속되어 한계를 맞이하자 오래전에 축적된 마이너스 엔트로피인 화석 연료의 사용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역시 최근 한계를 향해 치닫고 있다. 각각의 단계는 인류역사상 큰 발전처럼 보이지만 같은 에너지를 획득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을 해야하므로 엔트로피 측면에서 명백한 퇴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일전에 읽은 책 '문명과 식량' 도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를 이와 매우 비슷하게 서술한다. 인간이 발전을 통해 새로운 자원을 얻으면 그 한계에 가깝게 인구가 성장하고 위기가 오면 다시 새로운 자원을 얻는 방법을 개발해 내어 다시 성장하고 위기를 맞는다는 식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과학 기술이라는 것은 자연의 창고에서 꺼낸 에너지의 형태를 바꾸는 변환자 역할 이외의 것이 아니게 된다. 기술은 결코 새로운 에너지를 창조하지 못한다. 열역학 1법칙 때문이다. 다만 쉽게 쓸수 있던 유용한 에너지의 고갈로 기존엔 쓸수 없었던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이 기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계를 거칠수록 갈수록 어렵고 고난이도가 될 수 밖에 없다. 즉, 인간 과학기술의 발전은 엔트로피 증가라는 근원적 문제의 해결책은 영원히 될 수 없으다. 그저 엔트로피 증가와 쌍으로 그 난이도와 수준을 꾸준히 높여나갈수 밖에 없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행위가 계속될 수록 엔트로피의 증가는 지수함수적으로 커진다. 인간이 수렵사회에서 증가시킨 엔트로피와 농경사회의 엔트로피, 그리고 산업사회의 엔트로피의 증가폭은 그 수준이 다르다.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 경제 기구등도 인간의 신체외적도구 기계처럼 에너지 변환자다. 이들의 일은 문명 전체를 통과하는 에너지 흐름을 원활히 하는 것이다. 역사의 분수령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기술이 등장하면 초기엔 이 기구들이 매우 융통성이 있다. 초기에는 새로운 에너지를 사용하는 기술 창조와 확보에 집중하기에 이 기구들은 조정자와 설계자의 역할을 한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에너지원의 흐름에서 박탈당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그 변환을 위한 기반 건설에 주로 투입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지난 단계에서의 에너지 결핍으로 인한 고통의 기억으로 초기의 박탈을 희망을 갖고 잘 참아낸다. 

 다음 단계는 보다 많은 에너지가 사회 전반으로 흘러드는 단계다. 그리고 이 시기 엔트로피가 급격히 증가한다. 에너지는 다양한 제품이나 서비스로 변환하며 엔트로피가 증가하고, 개인과 집단간 에너지 교환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그리고 에너지 폐기물이 대량으로 발생해 엔트로피가 증가하게 된다. 이렇게 2단계에서는 무질서가 크게 증가해 급기야는 이것이 에너지 흐름의 진행을 방해하게 된다. 기구들은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무질서를 청소해야하며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유지보수를 하기 시작한다. 위기 때마다 관료제라는 것이 비대화하는 것이다. 기구들은 더욱 중앙집권화하며 국소적으로는 한 질서가 무너질때마다 새로운 중앙집권 기구가 나타나 이를 정리하여 질서를 잡는 순환이 이뤄진다. 농경사회에서 생산력이 무너질때마다 왕조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나타나 질서를 잡는 식의 순환이 이뤄졌던 것을 상기하면 된다. 하여튼 동시에 국가는 고갈되는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영토확장을추구하며 정복을 위해 국가 기구들은 더욱 비대해진다. 이 때 제도가 와해되고 외부침략이나 내부반란에 매우 취약한 시기가 도래한다. 엔트로피의 분수령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후 단계의 해결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에너지원을 사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의 개발로 다시 한번 쳇바퀴를 돌리는 것이다. 다만 새로운 고도의 기술이 엔트로피 증가를 더욱 가속화하기에 쳇바퀴가 도는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다른 해결책은 에너지 흐름을 극대화하는 식민화상태대신 절정상태로 돌아가 복잡성과 중앙집중화를 늦춰 쳇바퀴가 도는 속도 자체를 느리게 하는 것이다. 즉, 저엔트로피 사회로 전환하는 것이다.

 저자는 1980년의 상황에서도 태양에너지 같은 재생에너지의 사용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법으로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태양에너지는 연료의 채취, 유통, 발전, 사용, 소비의 모든 단계가 중앙집권적인 화석연료와는 다르게 분산형 시스템이다. 태양에너지를 태양전지판에서 얻고 이것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 설치되어 소유와 사용이 분산될 수 밖에 없는 만큼 분산시스템이 될수 밖에 없다. 저자는 그로인해 지금의 시스템과 태양에너지에 의존한 체계가 충돌하수 밖에 없다고 본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의 고엔트로피 지향의 정치, 사회, 문화체계를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엔트로피 문명에서는 최소한의 통치 정부가 좋은 정부가 된다. 대중 민주제, 직장과 공동체에서의 평등한 투표권과 의사발언권이 그것이다. 세계관도 변화가 필요한데 기존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자연을 착취의 대상이 아닌 총체적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된다. 인간이 자연과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모든 인간활동에 적합성 여부를 판단하는 새로운 윤리적 기반도 마련된다. 저엔트로피 사회는 다음과 같은 생산 기준을 갖는다. 우선 탈집중화와 지역화다.그리고 기업은 노동자가 관리하는 민주적 조직이 되며, 생산과정에서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소비를 최소화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저엔트로피 사회의 건설을 통해 사회의 에너지 흐름을 최소화 하여 자연적으로 잘생하는 에너지 흐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인간과 다른 생물 및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주장하지만 모든 부분에 동의가 되진 않는다. 이 책에 나온 시점은 1980년대 초반으로 당시는 산유국의 담합으로 서방사회가 오일쇼크를 여러차례 겪고 이를 통한 경제위기와 물가상승으로 매우 높은 수준의 금리를 유지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곧 재생불가능한 자원은 한계를 맞이할 것처럼 보이는 반면 이를 대체할 재생에너지를 활용할 과학기술은 매우 미흡하였고, 자원 부족으로 인플레이션은 지속될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낳은 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이 주장하는 논리는 그러한 시점에서 상당히 상황이 달라진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유효하다. 자원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인간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자원을 소모하여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은 영원한 굴레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이 지구라는 하나의 폐쇄계를 벗어날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았다. 인간이 태양계, 그리고 다른 천체에 접근하여 마이너스 엔트로피를 사용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저자가 말한 것처럼 새로운 문명단계에 접어들어 굳이 저엔트로피 사회로의 전환 없이도 새로운 고 엔트로피 사회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 시점에서는 상당히 가능해 보인다. 

 나는 비교적 저자가 책에서 싫어하고 비판한 낙관론자나 실용주의자에 가까워 인간이 엔트로피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새로운 해법을 찾아낼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실제 부침은 있지만 역사적 경험도 그러하다. 하지만 저엔트로피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고엔트로피의 문제점과 그것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인간이 새로운 역사적 분수령을 지나기 위한 충분한 간격을 벌어줄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엔트로피 위기란 저자의 논의는 지구수준에서는 충분하지만 언급한것 처럼 인간이 지구를 넘어설 능력이 생긴다면 아직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여전히 인간이 우주의 엔트로피를 높여 우주의 마지막을 가속화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아주 먼 미래에 윤리적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본다. 우주에 다른 여러 생명체들이 있고 서로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속도가 매우 다르다면 한 생명체종의 행위는 다른 생명체종에게 매우 비윤리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게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여튼 많은 깨달음과 시각을 넓혀준 책이었다. 발간 후 40년이 지나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를 알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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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5-07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2-05-07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2-05-07 21: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님.

얄라알라 2022-05-08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축하드립니다

닷슈 2022-05-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얄라님.
 
언론 혐오 사회 - 팩트도 정의도 기자도 없다
정상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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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언론은 많이 망가졌다. 기레기라는 용어가 난무하고, 이번 대선에선 명백히 잘못된 사태에 대해 기계적 중립을 취해 잘못된 쪽을 사실상 옹호하는 행태를 하는가 하면, 그 기계적 중립마저 지키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사람들은 언론에 대한 신뢰를 잃어 더 이상 신문이나 뉴스를 보지 않으며 SNS와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얻는다. 물론 그 결과는 확증편향뿐이다. 그리고 신문기사나 뉴스를 굳이 보는 경우에도 그 홈페이지를 방문하기보다는 대부분 포털을 통해서 소비한다. 언론은 선정성경쟁과 자극적 기사로 속도경쟁을 하며 기본적인 크로스체크도 하지 않고 그를 통한 수익만 얻을 뿐 양산한 피해자에 대해서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에 여당은 작년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법을 발의했다. 물론 언론은 전가의 보도 '언론의 자유'를 압세워 야당과 합세해 저항했다. 그리고 상당수 국민들은 이 법에 찬성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한국언론이 망가진 첫 번째 이유로는 우선 수익구조의 붕괴를 들 수 있다. 인터넷 포털이 등장하기전 신문이나 방송사는 일종의 독점을 하고 있었고 확실한 소비처를 얻을 수 있었다. 때문에 신문은 실제로 판매될 수 있었고, 지상파와 신문 모두 고액의 광고를 독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체 환경이 변화했다. 인터넷이 등장했고 포털이 생겨났다. SNS에 유튜브 그리고 포털이 뉴스진입장벽을 크게 낮추어 매우 많은 인터넷 언론이 등장했다. 그 전엔 언론사하려면 상당한 자본이 필요했다. 

 이로 인해 지금의 대부분 언론사들은 수익구조가 사실상 포털 이외에는 없다. 광고 수익은 모두 쪼개져서 나눠가졌고, 공짜 언론 콘텐츠에 익숙한 한국의 독자들은 더 이상 뉴스를 돈을 주고 소비하지 않는다. 주요 포털들이 뉴스 제공의 대가로 수익을 제공하는데 대부분의 언론사가 이에 의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부작용을 낳았다. 포털에 종속된 언론사는 페이지뷰 경쟁을 들어갔다. 대부분의 언론사 사주들은 긴 안목과 리더십을 부재하며 수익구조도 창출할 역량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에 기자들은 페이지 뷰를 올리기 위해 자극적 제목과, 선정성 경쟁, 제목만 바꾸어 다른 기사 베끼기, 연예인 인스타그램 뒤지기, 예능 프로그램 내용 요약하기 등으로 기사를 공장식으로 양산한다. 

 한국 언론이 망가진 두 번째 이유는 기자들이 시간이 없다는 점이다. 한 사건은 상당히 입체적인 측면을 갖고 있으며 여러 이해당사자가 사회문화, 경제, 정치적 배경을 각각 앉고 얽혀있다. 이를 모두 이해하고 기자가 방향을 정하여 분석하고 기사화하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포털에서 자본과 시간에 종속된 기자들은 이런 시간을 들여 기사를 작성할 시간이 없다. 기자들은 속도경쟁을 통해 1-2시간만에 하나의 기사를 써내기 일쑤며, 심한 경우 하루 10개의 기사를 작성하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사는 데스크가 있는 언론에서도 게이티 키핑에 의한 검증이 불가능하다. 데스크들이 어느 정도 소화하려면 하루 50개 미만의 기사가 적당하다. 이렇다 보니 조선일보 같은데서도 조국과 관련해 잘못된 성적 이미지를 넣는 실수가 벌어진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한국과 일본에만 거의 남아 있는 출입처제도다. 출입처란 정부, 법원, 국회등 권력 3부와 여타 중요 대기업들에 대한 취재를 위해 해당기관이 기자들에게 제공한 공식 출입장소다. 이곳을 통해 과거 많은 언론들이 해당기관 관계자를 직접 만나 쉽게 접할 수 없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만 해도 상당히 유용한 정보 통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대부분의 주요 공직자에게 접근하는 전화 번호 및 SNS가 모두 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출입처 제도는 다른 문제를 낳는다. 바로 기사의 동질화 현상이다. 각 언론사의 기자들은 자신이 출입하는 기관의 관계자들과 비슷한 입장을 갖기 시작한다. 여당이면 여당, 야당이면 야당의 시각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만 한 것이 매일 출근하며 이들과 이야기하고 부딪히고 밥을 같이 먹고 서로 경조사를 챙겨나가는 과정을 통해 동질화 되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또한 출입처 기자들 간에는 묘한 동질감이 형성된다. A라는 사건이 발생한다면 한 기자는 '가'의 관점으로 기사를 쓸 수 있으며, 다른 기자는 '나'의 관점으로 기사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하지만 향후 '가'의 관점이 비교적 옳은 것으로 밝혀진다면 '나'로 작성한 기자와 언론사는 타격을 입게된다. 때문에 기자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같은 출입처기자끼리 같은 정보과 같은 시각마저 공유하며 상당히 비슷한 류의 차별성없는 기사를 작성하게 된다. 

 출입처의 마지막 문제는 언론의 자유를 방해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보호나 국가의 이익, 혹은 민감한 사안때문에 출입처에선 사전에 언론에 정보를 제공하고 엠바고를 거는 경우가 있다. 이는 대부분 지켜지지만 간혹 엠바고가 깨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출입처의 다른 기자단이 해당 언론에 대해 출입처 접근을 제한하는 징계를 내린다. 이는 매우 어처구니 없는 경우인데 해당 기관도 아닌 언론사가 다른 언론사의 취재할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의 네 번째 문제점은 폐쇄적 편향적 의사결정 구조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게이트 키퍼 구조를 갖는다. 일선 기자 - 팀장 - 부장 - 국장으로 올라가며 기사를 검증받는 식이다. 이는 기사의 크로스 체크 기능 및 각종 오탈자 검증, 논리 보완을 통해 어느 정도 기사의 질을 보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구조가 수직적이고 윗선 일인에 의해 검증되다 보니 상당한 편향성을 가질 역할도 한다. 실제 언론사는 위로 갈수록 나이가 고령화 하고 소득이 매우 높으며 오랜 기자 생활로 정재계 주요 유력 인사들과 친분 관계를 쌓고 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 서민 계층과 약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사를 공감하고 옹호할 수 있을가. 그리고 반대로 유력 계층을 공격하는 기사를 과감히 기재하는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또한 언론사의 구조는 남여 편향적이기도 하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전 세계 언론들은 상당히 남성 중심의 문화를 갖고 있으며 미국조차도 2021년에 로이터 통신이 170년만에 처음으로 여성 국장이 생겼을 정도다. 한국은 2020년 언론인 중 남성 기자가 69.4%, 여성 기자가 30.6%로 상당한 수적 차이를 보였다. 이는 언론사 상층으로 갈수록 심해져 게이트 키퍼 층은 주요 보직으로 올라가면 104명중 여성은 겨우 6명에 불과할 정도로 적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시각이나 여성 중심의 기사가 나올리 만무하다. 

 한국 언론이 마지막 문제는 무책임하게 기사를 양산할 뿐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생겨난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2008년 SBS의 '긴급출동SOS24' 라는 프로그램은 한 휴게소에서 찐빵을 파는 소녀에 대한 보도를 한다. 프로그램은 악의적으로 동영상을 촬영 및 편집하여 휴게소 사장이 강제로 소녀를 착취하고 폭행까지 당하는 것처럼 꾸며졌다.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어찌된 일인지 휴게소 사장은 6개월 가량 수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영상이 제작진에 의해 촬영되고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소녀의 상처 역시 대상포진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SBS가 배상한 금액은 고작 3억원이 전부이며 놀랍게도 이는 한국 언론이 배상한 역사상 최고 금액이다. 300억도 아니고 겨우 3억이다. 거기에 제작진 중 누구 하나 형사처벌을 받지 않았다. 법원이 언론의 자유를 상당히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반면 피해자인 휴게소 사장은 억울한 감옥살이에 생계인 휴게소를 폐업해야 했다. 이뿐 아니다 2013년 당시 이명박 국정원에 의한 유우성 간첩 조작사건도 있다. 동아일보가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이 사건이 조작으로 밝혀지자 동아일보는 고작 1000만원 손해배상에 무려 12명 최하단에 7줄의 정정기사만을 게재했을 뿐이다. 유우성 사건은 아마 일면 보도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적어도 정정이라면 잘못된 보도 만큼 같은 비중으로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책은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언론이 나가야 할 길도 제시한다. 미국엔 프로퍼블리카라는 언론이 있다. 독립언론인데 월스트리트 저널의 전설적 편집장 폴 스타이거와 뉴욕타임즈의 전문기사 스티븐 엔젤버그의 합작품이다. 그들의 시도에 감동해 캘리포니아의 거부 샌들러 부부가 무슨 짓이든 해보라고 연간 무려 천만달러의 자금 지원을 한다. 그래서 독립이 가능한 셈이다. 이들은 창간 이후 허리케인 카트리나때 뉴올리언스의 한 병원이 환자를 안락사 시킨 사건과, 금융회사가 부동산 거품을 키워 투자자에게 거액의 손해를 입힌 사건을 보도했다. 결과는 두 차례의 퓰리처 상 수상이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뉴스 타파다. 뉴스타파는 출입처를 사용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타사 기자와 정보 교환 및 의견조율이 없다. 뉴스타파는 구조적으로 기자에게 상당한 재량권과 양질의 기사를 생성할 충분한 시간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상당히 양질의 기사를 한국 사회에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역시 재정적 독립에서 가능했다. 뉴스 타파는 후원 제도를 통해 운영되고 있는데 미국처럼 갑부가 아니고 언론 자유를 바라는 여러 사람의 후원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이런 후원은 한계가 있다. 후원을 하는 사람은 한국에서는 매우 소수로 대개 정치 고관여 층이다. 때문에 충분한 숫자를 확보하기 힘들다. 거기에 이들은 정치에 고관여하기에 후원하는 언론사가 자신의 정치적 방향과 일치 하지 않는 기사를 작성할 경우 후원을 끊거나 마찰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정답은 과거처럼 뉴스를 팔아 생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포털을 통해 뉴스는 공짜란 인식을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은 필요하다면 양질의 콘텐츠에 돈을 사용한다. 넷플릭스가 대표적 예인데 한달 일정의 구독료를 내는 넷플릭스 회원이 국내에 무려 380만이나 된다. 언론사도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있다면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물론 오락거리와 고도의 정치사회문화적 상품이 사람들의 지갑을 똑같이 열수 있는지 개인적 의문이 있긴 하지만 마땅한 대안도 없고 의외로 한국인의 뉴스 소비는 상당히 많다는 걸 감안한다면 설득력이 없지도 않다. 다만 책은 언론 컨텐츠가 유료화할 경우 이중 시장과 이중 여론이 조성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일본의 경우 중장년층의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갖고 오랜 시간의 습관을 통해 일본 언론이 판매하는 양질의 컨텐츠를 소비한다. 하지만 젊은 층은 일본 야후를 중심으로 제공되는 저렴하고 저열한 뉴스를 소비하는 형태를 보인다. 때문에 일본은 같은 사안에 대해 이중, 혹은 삼중의 여론이 형성되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한국도 그럴 우려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책은 오늘날 한국 언론의 문제점을 저자가 기자이기에 누구보다 잘 짚어내고 지적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포털에만 의존하지 말고 개개인의 뉴스 소비자도 직접 언론사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언론사엔 후원도 해나가며 눈높이를 키워나가는게 개인이 할 수 있는 언론 개혁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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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4-15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공감 합니다. 그래서 장강명 작가에게 왜 그만두었는지 묻고 싶어요. 저는 장작가의 작품은 르포밖에 안 읽었지만 이 사람이 엄청 기자가 되고 싶어했더라구요. 결국 관두고 소설을 썼는데.. 지금 작가로서 언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묻고 싶더라구요

닷슈 2022-04-15 20:32   좋아요 0 | URL
장강명 작가가 동아일보 기자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장작가의 작품을 볼 때 그 정도 인식을 가진 사람이 동아일보에서 동화되긴 힘들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추측합니다. 어렸을적 지인 중 언론인이 된 사람이 몇 있습니다. 다들 생업인지 날카롭던 사람들이 정말 현실 기자처럼 되더군요. 안타깝고 애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