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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문화란 이름으로 만들어낸 여러 유흥거리가 있다. 음악, 영화, 예술, 문학 등등. 그런데 한가지가 더 있다. 이들보다 고상함은 웬지 떨어져보이고 문화임은 분명한데 그렇게 분류하기도 좀 애매한 것, 바로 스포츠다. 하지만 스포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인기와 영향력 측면에서 나머지들을 압도한다. 지상 최고의 축제가 스포츠 제전인 올림픽이나 월드컵이란 것만 봐도 그렇다. 나머지 유흥거리 문화 중 이정도 인기와 압도적 규모, 상업성을 자랑하는 것은 없다. 오히려 나머진 유흥거린 이 스포츠행사를 빛내기 위한 양념으로 주제가나 개회 또는 폐회 행사에 사용되기 마련이다.(그 대단한 비틀즈의 노래도 런던올림픽 기념행사곡으로 쓰였으며 흥행에 민감한 방송사들은 스포츠행사 때면 아무리 인기있어도 음악프로와 드라마를 중지한다) 

 스포츠가 이처럼 인기가 좋은 것은 바로 다른 유흥거리들에 비해 인간 본성에 가장 근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겐 사냥, 혹은 서로 다른 집단들 끼리의 전쟁, 또는 짝짓기나 자원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공격성이 본능적으로 내재한다.(공격성은 스스로 에너지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다른 것을 포식하거나 얻어야 하는 동물에겐 필연적이다) 이런 폭력성은 전시상황이나 대결구도에선 사회적으로 매우 필요한 것이지만 평시엔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매우 불필요한 것이 된다. 특히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협력의 필요성과 이로 인한 도덕의 발전으로 인해 더욱 그렇게 되었는데 스포츠는 바로 이런 인간의 공격성을 다른 방향으로 분출시켜 해소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스포츠가 처음부터 이런 의도로 시작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 갈등적 상황이 없는 상황에서 친한 인간들끼리 장난삼아 서로 돌던지기를 하고 놀거나, 막 잡아먹은 동물의 잘 굴러가는 머리뼈를 차고 놀거나, 아니면 보다 원초적으로 서로의 속도나 힘을 경쟁하는 식의 형태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전쟁 연습이나 집단 사냥연습을 하면서 게임비슷하게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인간의 뇌는 시뮬레이션을 하게끔 진화했으니.

 그리고 세계 각 지역은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를 가졌음에도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스포츠를 즐겼음이 분명해 보인다. 돌을 상대편에 던지거나 무언가를 맞추는 것, 혹은 집단적으로 전쟁연습을 하거나 사냥연습을 하는 일련의 행위들은 어디서든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거의 공통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로 여러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발생한 스포츠종목에도 쉽게 적응하고 배우며 즐길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물론 모두 그렇진 않다. 열대내륙국가의 사람이 동계스포츠나 수영을 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즐기는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은 인간의 공격성을 드러내는 서로간의 육체적 직접적 경쟁, 집단 혹은 개인간의 일대일 전쟁, 집단 사냥의 요소를 변형된 형태로 거의 그래도 반영하고 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형태인 육체적 대결이다. 강함을 나타내는 가장 직접적이고 원시적인 형태인 서로간의 힘과 속도, 지구력 등을 경쟁한다. 이런 종목으론 모든 육상종목, 수영종목, 태권도, 유도, 레슬링, 복싱, 펜싱 등의 투기종목이 들어간다. 

 집단간의 전쟁이나 사냥 형태를 반영하는 종목은 거의 모든 구기 종목이다. 농구, 축구, 핸드볼, 하키등의 구기 종목은 서로 협력하여 상대편의 본진인 골대에 공을 넣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상대편의 본진을 점령해야 승리하는 전쟁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이를 위해 많은 육체적 힘과 협력, 전략 싸움이 필요하다. 전쟁과 무엇이 다를까. 그리고 네트종목이 있다. 네트 종목은 상대진영의 틈을 노려 공을 때려 넣으면 이기는 것이다. 테니스나 탁구, 배구, 배드민턴 등이 그러하다. 역시 상대의 본진이나 약점을 공격하는 전쟁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돌팔매로 상대편을 맞추는 직접적인 형태에서 출발해 모두 변형된 것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스포츠이니 상대편을 보호하기 위해 네트란게 생겼을 것이고 돌대신 다른 대용품이 쓰였으며, 공격할 목표가 필요했기에 라인이 있는 코트가 생겼을 것이다.

 우리는 협력성을 갖고 집단의 힘을 통해 서로의 생존력을 높이며 진화했기에 이런 종목에서 전쟁이나 사냥에서의 강함을 드러낸 영웅에게 본능적으로 환호한다. 나의 생존에 직접,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스포츠스타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에 환호하며 한국인이면 특히 손흥민과 류현진에 환호한다. 최고의 무대에선 최고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포츠엔 이보다 더욱 사회적인 측면도 자리한다. 바로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분이며, 외집간과의 경쟁 및 갈등을 통한 내집단의 강화효과다. 인간은 같은 종목에 비슷한 수준의 스포츠 경기일지라도 내집단과 외집단간의 경기일 때 무척 흥분하고 환호하며 절망한다. 특히, 내집단과 외집단이 갈등상황이라면 그 효과는 더욱 극적이다. 때문에 한국이 축구경기를 하며 우호국인 미국과 경기하는 것과 역사적으로 적대국인 일본과 경기하는 것은 매우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이처럼 우린 스포츠를 통해 내가 속한 내집단에 더욱 소속감을 갖게 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협력을 통해 생존력을 높이며 진화한 만큼 내가 속한 내집단이 사냥이나 전쟁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나의 생존에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린 스포츠를 통해서도 항상 내집단의 승리를 기원하며 외집단의 패배를 바란다. 특히, 자원경쟁이나 전쟁을 하는 인접한 혹은 외집단이라면 더욱 그럴수 밖에 없다.

 그리고 스포츠에서 내집단은 바로 나의 팀이다. 작게는 우리 동네에서 내가 직접 소속되거나 응원하는 팀, 더 크게는 우리 지역의 프로팀,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국가의 대표팀이다. 그렇기에 모든 프로스포츠가 흥행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밀착한 풀뿌리 형태의 리그운영이 중요하다. 그래야 지역의 팬들이 자신의 팀을 내집단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하여 적극 참여하고 응원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축구가 국가차원에서는 매우 인기가 높으면서도 프로차원에서 흥행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역화가 미흡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흥행에 상대적으로 성공한 한국프로야구는 지역색이 매우 뚜렷한 반면 프로축구는 아직 지역화가 약하다. 성공적인 영국의 축구 프로리그를 보면 같은 런던만 해도 지역과 계층을 대표하는 네개의 팀이 있는데 반해 인구면에서 훨씬더 거대한 한국의 수도 서울은 그 지역적 다양성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고작 한 개의 팀이 서울 전체를 대표한다. 이래서야 사람들이 서울팀을 자신의 내집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재밌는 것은 현대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자신의 내집단, 즉 응원팀이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자신의 지역을 대표하는 프로축구팀을 응원하는 한 팬이있다. 이 팀에는 매우 기량이 뛰어난 최고의 공격수가 있는데 한국국가대표 선수이기도하다. 평소엔 이 녀석이 우리팀이니 내집단으로 받아들이고 응원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한국과 일본의 축구국가대항전이 일어나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 경우 이 팬은 자신의 일본팀을 괴롭히는 상대편의 공격수를 보면서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곤란해 질것이다. 이 공격수는 이 지금은 적이지만 이 경기만 끝나면 더욱 밀접한 자신의 지역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공격수가 일본의 골문을 향해 골을 몰아넣거나 혹은 우리 일본 팀 선수에 의해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대체 어떤 심경에 빠질까.

 하여튼 이게 서두인데 너무길었다. 이번에 읽은 책이 스포츠, 바로 아이스 하키를 소재로 한 책이어서 그렇다. 읽은 책은 바로 소설 '우리와 당신들'이다. 낭만적 제목 같지만 스포츠가 소재인 만큼 우리는 바로 우리팀을 응원하는 내집단, 그리고 당신들은 그 팀을 응원하지 않는 나머지 외집단들이다. 작가가 스웨덴 사람인 만큼 배경이 스웨덴이다.

 베어타운이라는 시골마을이 있다. 스웨덴은 추운데 여기서도 더 추운지역인지 짧은 2-3개월의 여름만 지나면 지역은 추워지고 바로 하키의 계절이 돌아오는 그런 지역이다. 외집단 역할을 맡은 인근 마을은 헤드다. 베어타운과 헤드는 서로 지역 라이벌 팀인데, 시골이고 인접하다보니 일자리와 학교등 많은 것을 공유한다. 본디 라이벌은 희소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하기에 인접지역이어야 하고 그러면을 충족하는 양팀의 사람들은 서로를 늘 죽일 듯이 대한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그저 말일 뿐이다.

 어쨌든 시골 지역임에도 헤드에 비해 승승장구하는 하키팀을 가진 베이타운에 위기가 찾아온다. 하키팀의 소년 에이스 케빈이 하키팀 단장의 딸 마야를 성폭행 한 것이다. 이 사건은 바로 지역사회에 알려졌지만 하키팀을 소중히 하는 사람들은 이를 부정한다. 케빈은 우리 내집단. 즉, 팀의 영웅이고 마야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 내집단, 즉 프로팀에 상당한 위기를 불러오기 올것이니 사람들의 반응은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결국 진실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진상은 밝혀지고 피해자의 아버지이자 팀의 책임자인 단장 페테르 안데르손은 가장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케빈을 팀에서 제외한다. 케빈이 떠나고 그를 옹호하는 선수들이 라이벌 헤드로 떠났다. 베어타운은 팀 해체위기에 빠지면 베어타운 지역의 공장도 위기에 빠진다. 한 때 문제는 많았지만 용맹했던 선수들은 문제생활에 빠진다. 그리고 이런 베이타운의 위기를 자신의 정치적 기회로 노리는 고향출신 정치인이 다가온다.

 이야기는 그렇게 굴러간다. 소설은 여러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하키다. 아이스하키를 좋아하는 스웨덴에서 하키란 스웨덴 사람들과 지역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지를 작가는 많이 고민한듯 하다. 그래서 책은 하키는 그저 하키일뿐이라지만 하키로 인해 지정치적 술수에 휘말리고, 인생을 고민하고, 가족간에 갈등하는 그런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러다보니 나도 스포츠에 대해 고민하게 되 긴 서두를 썼지만 말이다.

 책은 생각할 문제과 고민거리를 많이 던져주어 소설임에도 긴 시간을 읽었다. 무려 일주일을 소모했다. 사실 작년의 마지막 책이 될줄 알았는데 이런 이유로 새해 첫 책이 되고 말았다. 주옥 같은 글귀도 많다. 작가가 사람과 인생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다. 재미도 충분하고 생각거리도 충분하며 글도 아름답다. 읽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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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kbs 다큐인사이트]

 

 지난주에 kbs다큐 인사이트 '부드러운 혁명'편을 보았다. 한국은 고령사회가 되고 초고령사회로 접근하면서 치매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데, 바로 그 치매환자를 다룬 내용이었다. 간호사 인력이 부족해 대부분의 요양환자를 간호사가 아닌 요양보호사가 보호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치매 노인에 대한 처치는 그다지 좋을 리가 없다.

 실제로 1부에서는 그런 모습이 나오는데 치매로 인해 인격이 붕괴하고, 기억 및 판단력이 감퇴한 노인의 폭력에 간호사들은 매우 고역을 치루고 있었다. 밤에는 돌보는 인력도 적어 문제 노인을 묶어놓곤 했는데 치매 노인이 아니더라도 통제가 어려운 환자에게 처하는 여느 병원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2부에서는 그런 간호사들이 프랑스의 이브 지네스트가 만든 휴머니튜드를 배워 적용하는 과정이었다. 지네스트는 본래 체육교사라 퇴임후 봉사차원에서 프랑스의 요양병원게 가게되었다. 당시 그는 병원의 간호사와 의사가 치매환자를 난폭하게 다루고 폭력적인 것에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우린 대개 반대로 보는데 말이다. 그래서 지네스트는 환자를 인간답게 대하기 시작했다. 휴머니튜드의시작인데 원리는 간단하다. 환자에게 접근하기 앞서 충분히 노크하고 기다려 준비의 시간을 준다. 그리고 아주 반갑게 인사한다. 그리고 아주 가깝게 얼굴을 들이대 눈을 길게 마주하며 반갑게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몸도 만진다. 이런 당연한 것들을 하는 것만으로도 놀랍게도 대부분의 치매환자가 반응을 보였다. 폭력성도 줄고, 간호사 및 요양보호사와의 관계도 좋아 진것이다.

 이브 지네스트는 외국인임에도 이걸 한국에서 간호사들 앞에서 시연해보였는데 통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성향의 치매환자들이 쉽게 말을 듣고 몸을 내주는 것이 놀라웠다. 이후 간호사들은  휴머니튜드를 60일간 시행하였는데 환자와의 관계 개선은 물론 대부분의 환자가 와병환자였음에도 간호사 및 물리치료사와의 훈련을 통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치매 증상의 완화와 심지어 복용약물량의 감소, 그리고 문제행동의 급감은 당연히 따라왔다.

 지네스트의 말중 인상깊었던 것은 자신은 공격적인 환자를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공격적으로 보이는 환자 대부분인 사실 수비적인 상태였고, 낯설고, 무서운 상황에서 그런 반응을 보인 다는 것이다. 휴머니튜드요법은 이런 이들은 안심시키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한것이 그들의 인간성을 회복시킨 것이다.

 이번에 본 책은 날마다 조금씩 자라는 아이들이다. 천경호 선생님이 쓴 책이다. 교사는 사실 매우 특별한 직업인데 다른 직업들과는 다르게 미성숙한 사람을 상대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점이다. 미성숙한 사람은 아이들인데 전두엽의 미 발달로 아직 자기 통제가 안되고, 자기 중심적이며, 쉽게 흥분하고, 이성적 사고도 부족하며, 이로 인해 또래간의 마찰도 심하고, 교사가 어찌 하기 힘든 여러 가정환경에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미성숙 사람이 어른이 되어서도 미성숙한 이유는 성장하면서 주변에 성숙한 사람이 없어서 그들과 관계를 맺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미숙한 체로 몸만 큰 수많은 성인들 주변에 제대로 된 성인이 있어다면 그들은 더욱 성숙했을 것이다. 결국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미성숙한 아이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저자는 8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1. 아이가 등교하면 눈을 맞추고 반갑게 인사하는 것이다. 지네스트의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2. 하루 심박수가 75-85%에 이르는 운동을 15분간 꾸준히 하는 것이다. 치매환자들이 걷기 시작하자 더 좋아진 것처럼 인간은 움직이는 동물이기에 운동은 사람을 안정시키고 두뇌를 활발히 한다.

3.사탕이나 초콜릿대신 GI지수가 낮은 호두나 아몬드를 간식으로 주고

4.취침 30분전 TV나 휴대폰 대신 책을 읽고

5.눈감고 시간 맞추기활동을 하고

6.크게 소리내어 복식호흡을 익히고

7.조금은 슬픈 동요나 가요듣고 기분을 풀고

8.균형잡기를 해보는 것이다.

 

저자는 공감이 인지상정처럼 인간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타고난 면이 있되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은 후천적이라는 것이다. 즉, 공감은 철저히 훈련이 된다.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읽어주고 정서를 공유하며 타인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공감적 동기까지 이루어지려면 많은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훈련에서는 많은 교감과 상처가 발생할수 밖에 없으므로 성숙한 부모와 교사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저자는 학생을 대하며 학생 세가지 원칙을 기반한다고 한다. 하나는 자율성인데 학생으로 하여금 선생님과 부모가 늘 무엇을 하라고 시키기 보다는 어느 정도의 선택권을 준다는것이다. 이는 동기와 성장을 불러온다. 다음은 유능성이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하는 경험을 주는 것으로 책을 읽든 어떤 체험과 활동을 하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친구와 어른에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경험을 주는 것이다. 마지막은 관계성이다. 생각과 느낌을 쓰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것을 듣고 같이 나누고 피드백을 주는 대상이 필요하다. 주로 어른이 되는데 그것이 관계성이다.

 사람들 대하는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지만 두 매체에서 본 공통점은 결국 인간답게 대하는 게 정답이란 생각이다. 반갑게 인사하고,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신뢰를 얻고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 같이 운동하고성장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당연해 보이는게 사실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힘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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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가 유현준은 책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학교건축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소신을 밝힌 적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학교 건물은 너무 획일적이고 규제가 많으며 변화에 대한 심리적 저항도 강하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교사나 학교행정직원, 교장, 교육청등의 생각도 낡은 편인데, 그들 자체가 이런 획일적 학교만 경험한 탓도 있지만 구조적 문제도 많다. 일단 안전지상주의로 모든 안전을 학교에 떠넘긴다. 교육보다는 안전에 대한 책임이 앞서는 상황이니 창의적 설계가 나오기 어렵다. 또한 예산도 적다. 학교건물은 모든 공공기관 건물중 평당 건축비가 가장 낮았다. 거기에 규제도 많다. 안전이나 최소기준등에 대한 규제들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유현준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였고, 아이들의 창의성을 높이는 층고가 높은 건물, 학년에 진급할때마다 다양한 바깥 환경을 경험할 수 있는 분리된 학년 건물들. 그리고 언제든지 바로 짧은 쉬는 시간이라도 운동장이나 놀이터로 접근할 수 있는 건축 등을 제시했다.

 이번에 읽은 학교 건축 관련 책은 학교 공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다. 6명의 건축가와 교육정책관, 교직원의 학교건축 관련 경험을 담은 책이다. 우리나라는 학교건축이 정형화 되어 있듯 놀이터도 정형화되어 있다. 학교 건축이 일자형 복도에 같은 형태의 교실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놀이터는 미끄럼틀(slide), 그네(swing), 시소(seesaw)의 소위 3S 형태다. 그리고 역시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놀이터를 지배한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의 놀이터는 위험의 제거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자연히 크기도 형태도 수준도 7세이하에  적합한 놀이터가 되고 만다. 하지만 책에서 제시하는 일본이나 유럽의 놀이터는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여기엔 안전에 대한 다른 생각이 자리한다.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안전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위험을 제시해 살아 있는 위험을 경험하고 스스로 안전하게 행동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놀이터 안전교육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서 제시한 무려 8미터 높이의 미끄럼틀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놀랍게도 올라가는 계단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한국 놀이터의 또 다른 문제점은 놀이터 공간의 대부분과 중앙을 정형화된 조형놀이기구가 차지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양마저 무척이나 비슷해 문제인데, 그 기능과 놀이 용도가 정해져있다. 즉, 출발과 끝점. 놀이 방법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는 획일적 사고를 유도하며 놀이법이 정해진 매우 지시적인 기구다. 놀이터에는 조형놀이기구가 없는 경우가 적합하며, 형태를 다용도 활용형으로 만들어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고안해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게 고안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놀이터는 공공성이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다. 놀이에서는 놀이의 형평성이 중요한데, 현재 우리나라의 놀이터는 공공놀이터의 부족으로 그 형평성이 무너지고 있다. 상당수 놀이터는 아파트에 위치하거나 실내테마파트형태로 존재하며 이들은 폐쇄적이고 비용을 요구한다. 때문에 책은 공공영역인 시청이나 구청 주민센터의 빈공간을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어나가는 실내형 공공놀이터의 설립도 주장한다. 참신하다.

 학교건물은 상당히 획일적이다. 일자형이나 기억자 건물이며, 조회대가 있고, 운동장이 있으며 교실은 천편일률적인 모양이다. 복도는 길게 일자형이며, 중앙현관은 권위적이고 대개 학생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다. 최근 다양한 모양새의 건물도 짓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짓는 주체가 교육지원청으로 정해져 있고, 속도전으로 짓다보니 학교를 사용하는 주체인 학생, 학부모, 교사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다양한 주체가 학교건물을 짓는다면 좀 개선될 것으로 책은 주장한다.

 학교건물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학생들과 수업을 통해 이를 이뤄나가는 것이었다. 학생은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의 주인이므로 마땅히 그것에 대해 주권을 가져야하는데, 이를 공간주권이라 한다. 그리고 이 공간주권에 대한 수업은 민주시민역량함양과 관련한다. 학생들은 이 프로젝트 수업을 거치며 먼저 자신들의 생활을 돌아본다. 어디서 놀았는지, 하루중 학교어디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어디를 이용하고 가고 싶은데 그렇게 하기 어려운지. 이런걸 토대로 공간에대해 연수도 받고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생각이 정리되면 재구성하고자 하는 공간을 정하고 이에 대한 공모전을 갖는데, 심사까지 전교생 앞에서 엄격하게 수행한다. 공모에 당선한 의견은 여러 현실 요건을 고려해 그대로 반영되거나 현실에 맞추어 다소 수정 반영되기도 한다.

 교문을 새로 구축하는 사례가 나오는데 위와 같은 학생들의 의견을 받아서 안을 정했음에도 갑작스런 소방법의 변경으로 새로 안을 구성해야 했고, 그 사이 정책 변화로 예산도 끊겨서 결국 실패하게 된 사례는 무척 안타까웠다. 이 작업을 학생들과 진행했던 교사는 레고로 교문을 만들 생각을 학생들과 하고 있다는데 정말 기대되는 모습이다. 레고교문을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중앙현관은 나무를 대어 미끄럼틀과 앉을 수 있는 계단 형태로 구축한 사례가 있었다. 권위적인 공간이 학생들이 얼마든지 쉬고 앉아서 놀며 책도 볼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중앙현관 내부가 바뀐 사례도 있다. 이 학교의 학교장은 학교의 부족한 유휴공간확보를 위해 교장실을 과감히 내주고 중앙현관에 통유리창으로 교장실을 새로이 만든다. 그리고 그 옆의 공간들은 학생들이 오가며 쉴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그리고 화초가 놓인 휴식공간으로 변화했다.

 도서관의 사례들도 많다. 기존 도서관은 딱딱한 테이블과 의자에 사방에 책을 많이 넣는 구조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wi-fi가 되기도하고, 만화 코너가 따로 있고, 간단한 음료도 먹을 수 있는 자유로운 형태의 도서관을 원한다. 책에 등장한 사례들은 책을 도서관 사방 벽에 붙박이 장으로 담아내고 주변 공간을 눕기도 하고 다양하게 활용할 수있는 형태로 구축한 사례가 나온다.

 최근 학교 현장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과정의 혁신에 초점을 두고 있다. 수업에서 교육과정혁신 그리고 평가로 옮겨지고 이들의 일체화에 신경쓰는 일련의 흐름을 보이고 있는데 아직까지 교육공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이런 공간의 재구조화가 이루어질때 학생들이 다니고 싶은 학교, 마음껏 노는 학교, 공부가 잘되는 학교, 그래서 창의적이고 역량을 갖출 미래 인재를 배양할수있는 학교가 완성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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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의 시대에 태어난, 불안한 사람이 쓴 '불안의 책'이다.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었는데 읽어보니 그는 포르투갈 사람이고 20세기 초반을 살았고, 수도인 리스본에 거주했다. 도라도레스 거리가 직장과 집이 있는 곳이며 집은 4층의 방이다. 그는 책의 500개에 가까운 단상 대부분을 여기서 썼다, 직업은 지금은 아마도 거의 모든 직장에서 엑셀이 하고 있을 회계사무원이었다. 사장은 바스케스란 사람이였고, 결혼은 안했으며 당연히 아이도 없었을 그의 이름은 '페르난두 페소아'다.

 그가 태어나고 살아간 시대는 1차대전도 있었지만 불안한 시대였다. 한 철학자가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고 과학은 물질적 증거로 신의 부재를 증명하고 있었으며 시대는 빠르게 변화했다. 이런 불안한 시대에 페소아는 심지어 가정도 불안했다. 어머니가 일찍 죽었고, 아버지도 그랬다. 어린 나이에 숙부에게 맡겨져 고아처럼 자랐다. 예술도 불안했는데 그래서인지 책에서 그는 여러차례 낭만주의를 비판한다.

 이런 시대적 가정적 배경도 있었지만 사실 그의 불안은 자신의 내면에서 기인하는 걸로 보인다. 바로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과 이에 반응하는 그의 지성과 감성이다. 그는 항상 자연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사상이든 무언가를 경험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에 대해 자신의 지성과 감성이 얽혀 무수한 단상을 만들어냈다. 그게 이 책으로 엮인 것인데 단상의 수는 무려 481개다.

 단상의 주제는 다 다르고 장면도 다양하지만 크게 종합해보면 '자신을 알려는 일', '다른 사람들', '예술'인듯하다. 페소아는 평생 자기 자신을 알아내려는 시도를 하는데 사실 처음부터 그는 이게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각각 변화하고 이전의 나와 최종적으로 합치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라는 존재는 생물학적으로 설계된 무의식적인 부분이 있기에 의식이 이를 파악하기 어렵고, 사회나 문화, 그리고 같이 살아가는 타인들의 다양한 영향을 받아 끊임없이 변형된다. 그렇기에 진정한 나를 안다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며 진리조차 없다. 신이 없고, 과학이 있지만 그것조차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나라는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알려고하는데 무척이나 모순되면서도 맞는 방향으로의 충동이기에 부정하기 어렵다.

 나라는 존재가 이렇기에 타인을 알고 진정한 이해를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진정한 나를 아는 것이 어렵기에 이런 상황은 타인 역시 마찬가지고 결국 우리가 서로 맺는 교류나 관계라는 것들은 진정한 나를 포기한 상태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들이 된다. 특히, 페소아는 다른 사람들을 경명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알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한체 그저 동물처럼 주어진대로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찌보면 사회구조나 정치나 민족주의 같은 여러 허상속에세 그것이 진리인마냥 살아가는데 호모데우스에서 하라리가 말한 허구와 같은 개념이다. 페소아는 이런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하지만 정작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을 느낀다는 점에서 부러워하기도 한다.

  일전에 본 책 '행복의 기원'에서는 사람들이 행복감을 느낄수 있는 여러가지의 것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오는 행복이란 결론을 내렸다. 이는 의외로 내성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양자에게 모두 해당이 되었는데 적극성과 소극성에서의 차이만 있을 뿐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존재이며 여기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책의 골자였다.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측면이 있다. 생존과 번식이 생물의 목표라면 사회성을 갖는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을때 이것들에 성공할 확률이 현저히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같은 행위가 계속되어야 하기에 행복이란 감정은 유난히 휘발성이 강하기도 하다는 점이다. 즉 행복은 계속 될 수 없고 아무리 달려도 쉽게 잡히지 않는 눈눈앞에 매달려 나와 같이 움직이는 당근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페소아는 사람의 이런 측면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페소아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동물들과 같다고 보았는데 설계된 본능적 측면에 매달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에 의존해서 살고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는 행복이 행복 바깥에 있다고 말한 점은 이런 의미로생각된다.

 이렇게 알수 없는 나 자신과 이룰수 없는 타인들의 이해나 관계맺기에서 일종의 해방구처럼 느껴지는게 예술이다. 페소아는 예술의 역할이 우리가 느끼는 바를 타인들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을 통한 어느정도의 관계맺기는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페소아는 우리의 개별성을 제공하여 이를 통해 타인이 스스로에게서 해방되도록 한다고 말했는데 이 개별성은 또 역설적이게도 완전하 나 자신이나 진리도 아니다. 그것은 도달될수 없는 것이기에 당연하고 우리가 서로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도 불가능하기에 예술을 통한 전달에서는 내 느낌의 진정한 본질을 다소 왜곡하더라도 나의 감정을 전형적인 인간 감정으로 전환하는 일이 필요하다. 즉, 우리가 남들과 함께 느끼는 동일성을 만들어내 전달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페소아의 많은 생각에 동의가 들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사회적 운동이나 다른 사람과의 연대를 부정하는 부분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나 자신에 대한 이해나 타인과의 진정한 관계맺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주창하는 부분은 공감되지만 그래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이런 부분에서 의미를 찾고 자신도 더 잘 이해하는 부분이 있지않을까나. 물론 페소아 자신도 책에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꾸준히 타인을 갈구한다. 아예 관심이 없어다면 그리 많은 단상으로 다루지도 않았을 것이다.

 페소아는 책에서 다른 사람과의 공통적인 경험, 나와 그 사람과의 접점, 그리고 상상력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는데 아무래도 페소아와 나와는 그런 부분이 부족했던 것 같다. 솔직히 내겐 무척 어려운 책이었고, 단상들의 상당부분도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때그때 쓴 단상이기에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면도 많다. 시간을 두고 좀더 이해해봐야할 책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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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의 등장으로 케인즈 주의가 한계에 부딪힌 후 경제 패러다임은 신자유주의로 넘어갔다. 이후 세계 경제는 가난한 나라건 부자 나라 건 할 것 없이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게 되었다. 빈부격차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능력에 따른 정당한 차별의 결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기엔 굳이 사회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만 보더라도 자신의 태생적 능력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사회적 지위로 인한 출발점 차이, 거기에 생산수단을 갖추고 있느냐 아니냐등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작용한다. 그래서 어찌보면 빈부격차는 애초에 공정하지 못한 게임이면 결국 강자에 의한 '약탈'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생산성 증가로 이룬 공통의 부를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일부가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는 상대적 박탈감 등 여러가지 갈등을 일으키며 심해지면 사회의 정치 경제 체제가 붕괴하며 새로운 체제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던 일이다.

 과거엔 주요 생산수단이 땅이었으니 땅의 소유 여부가 곧 빈부격차였다. 남경태는 그의 책 '역사'에서 우리나라나 중국의 역사흐름을 이 땅의 소유여부와 수취체제의 건정성에 따라 살펴보았다. 그에 따라면 통일신라나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은 빈부격차의 심화로 인한 사회 붕괴와 재건의 연속에 불과하다. 일단 한 왕조가 새로 들어서면 비교적 우호적이고 공평하며 건전한 토지 체계가 확립되고 이에 수혜를 보는 새로운 계층이 들어선다. 그리고 이들은 초기에 진취적이고 비교적 합리적이다. 이로 인해 나라의 부가 증가하고 왕국은 곧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대를 지나며 수취체계에 틈을 노려 토지의 병합이나 약탈이 일어나고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와 욕심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진다. 견디지 못한 피지배층의 불만과 반란이 곧곧에서 일어나고 나라가 약해져 외침도 잦아진다. 그리고 반세력들을 규합하는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 정권을 무너뜨린다. 새로운 왕조의 탄생인 것이다. 그리고 이 왕조는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더 좋아진 새로운 토지체계를 세운다. 그리고 반란에 공을 세운 진취적이고 합리적인 새로운 지도층이 수혜를 보고 성장하며 백성도 좋아한다. 이후 시기가 지나면 쳇바퀴처럼 반복인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생산수단이 땅에서 자본이나 노동으로 이동한 이후 빈부격차는 통화로 인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다룬 책이 '인플레이션'과 '거대한 약탈'이다. 미국은 1971년 33달러당 1온스의 금으로 고정되어 있던 자신들의 태환화폐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자로 인해 하루아침에 불태환 지폐로 바꿔버렸다. 이는 공교롭게도 신자유주의 시점과 맞물려 각국의 중앙은행은 국채나 채권을 파는 형태로 돈을 마구잡이로 찍어낼수 있게 되었다.

 이 돈을 받아 각국의 상업은행들은 겨우 2%미만의 지급준비율로 담보대출을 마구잡이로 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실물의 가치는 엄청나게 올라가고 종이돈의 가치는 대거 하락했다. 지난 100년간 달러의 가치는 무려 96%나 상실되었다고 한다. 마구잡이 대출로 경제는 부동산 위기로 이어졌고, 파생상품등을 통해 묻지마 투자를 행한 금융기업들이 대거 무너졌다. 하지만 이들을 살린 것은 사람들의 세금인 공적자금이었으며 정부는 공적자금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 세금을 올리기 까지 한다. 이익은 사유화하되 손실은 사회화하는 것이다. 결국 일반 시민들은 부동산의 지나친 폭등이나 하락으로 재산의 직접적 혹은 상대적 손실은 입고, 세금을 뜯겼으며 생산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통화로 급여를 받아 저절로 약탈을 당한 셈인 것이다.

 

 

 

 

 

 

 

 

 

 

 하지만 약탈은 통화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땅과 집을 통해서도 약탈은 이루어졌다. 책 땅과 집값의 경제학은 그것을 다룬다.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는 아메리카 토착민 부족의 한 추장이 땅을 팔 것을 요구한 백인들에게 보낸 답서가 나온다. 내용은 땅이란게 나도 쓰고 다른 부족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동물과 자연이 공유하는 것인데 어찌 팔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내게 아닌데 어떻게 파냐는 말이다. 과거 인구가 적어 땅이 좀 널려 있긴 했지만 인류역사에서 오래도록 땅은 이처럼 공유지의 개념이었다. 물론 땅을 점유하거나 이용하는 등의 권리(경작권이나 수취권)등은 옛부터 있었지만 지금처럼 철저히 배타적인 소유권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경제학은 생긴 이래로 여러가지 이론을 만들고 발달을 해왔지만 유독 땅과 집에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책의 저자는 바로 이런 경제학의 패착이 지금의 약탈경제를 불러온 주 이유라고 보고 있다. 즉, 지금의 빈부격차를 강화해나가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성이 꾸준히 올라감에도 경제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집과 땅에서 비롯된다라고 보는 것이다.

 책은 이를 논증하기 위해 우선 땅과 집의 과거를 살핀다. 그리고 책에서 다루는 사례는 유럽이며 그 중에서도 영국이다. (읽다보니 한국과 너무나 비슷해 놀랐다) 다른 유럽국가처럼 영국역시 봉건사회에서는 땅의 대부분을 왕과 귀족, 교회가 소유했다. 그러던 것이 르네상스와 민주주의 혁명, 산업혁명등이 어우러지며 땅의 소유권이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중상류층이로 이전되게 된다. 토지에 대한 소유개념은 토지에 대한 안정적인 확보가 필요했던 이들 계층의 요구에 맞게 발생했다.

 초기의 토지소유권은 이처럼 긍정적으로 작용해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고 이들이 경제를 발전시켜나가며 인권의 개념이 태동하는데도 일조하는등 긍정적인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곧 이들은 새로운 가진자로 등장하여 토지를 대규모로 병합하거나 소유하는등 부작용을 발생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고전경제학에서는 경제의 3가지 요소로 노동, 자본, 토지를 포함시키며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와 개발로 인한 토지의 가치상승에 주목했다.

 그래서 등장한게 토지가치세란 개념이다. 토지가치세는 주변의 개발로 토지의 가격이 상승하는 경우 이에 대해 과세하는 개념이다. 이는 매우 도덕적이면서 합당했는데 사실 개발이라는 것이 토지주인의 노력이라기 보다는 사회기반시설이 들어서는 등 국가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토지가치세는 실현되지 못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산업혁명 이후 토지의 사용이 농업생산에서 산업자본의 생산현장으로 용도가 변경되고, 토지가치세를 주장하던 경제학파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과 연합에 정략적으로 실패하였다. 거기에 신고전경제학이 대두하면서 땅을 자본에 포함시키는등 경제의 주요 생산과 분배이론에서 땅과 지대의 역할이 과소평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각국의 정부는 땅과 부동산에 과세하기 보다는 소득과 지출에 과세를 하기 시작했으며 이 같은 흐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 영국정부는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이 끝나며 참전군인들과 공습으로 대규모로 파괴된 국토와 엉망이 된 민간경제사정으로 인해 대규모의 공영주택을 건설하게 된다. 이 때만해도 나라의 주택 정책은 국가위주의 공급형태였다. 이때부터 1970년대까지 집과 땅의 가격은 사회의 생산성 증가로 거의 동일한 정도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후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은행 금융이 다양화하면서 사태는 급변한다.

 영국의 대처는 부동산을 공급하는 것에서 수요를 창출하는 것으로 정책을 급 선회한다. 저가주택이나 임대주택을 공급하기 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집을 사게 도와주는 정책이다. 이를 통해 민영주택이 대규모로 개발되었고 사람들에게는 주택보유를 위한 대출의 편의성을 돕는 정책과 주택 보유시의 각종 감면정책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30%정도에 불과하던 영국의 자가보유율은 21세기 초반 60%까지 치솟았으며 쉬운 대출로 자금을 풀리자 집과 땅의 가격도 급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너도나도 사용가치보다는 재산의 증식수단으로 주택을 보유하기를 원하였고 이로 인해 가격은 더욱 오르게된다.

 이렇게 되면 집을 갖지 못한 상당수의 사람들을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집이 없으므로 집을 통한 담보가 어려우며 이미 집값이 상당히높아져 결국 주택을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들에게 남은 선택은 임대뿐인데 높아진 집값으로 인해 임대료도 상당히 비싸진다. 이래저래 갈곳이 없게 되는 셈이며 이들이 사회의 생산성을 높여 얻어진 부가 집과 땅값의 증가로 약탈되는 셈이다.

 책은 21세기 들어 오래도록 생산성은 계속 증가하여 경제가 성장함에도 일반 시민들의 부가 증가하지 않고 오래도록 선진국 경제가 저성장의 국면에 빠진 원인도 집과 땅값의 급증에서 찾고 있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면 은행은 사회의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기업에 대출하기보다는 주택담보대출에 열을 올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기업의 혁신과 생산성이 하락하며 고용역시 줄어든다. 또한 가계에서도 자신들의 자산중 상당수를 부동산에 몰아넣음으로써 가처분소득이 크게 줄어 소비여력이 감소한다. 즉, 기업과 가계가 모두 어려움에 처해 기술혁신과 과학의 발달로 생산성이 증가하여 경제가 꾸준히 성장함에도 고용과 소비가 모두 부진한 불황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부동산 가격의 급증이 사회생산성의 증가로 이룩한 부를 약탈해가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런 암울한 진단을 마친 후 책은 몇 가지 해결책도 제시한다. 토지를 사적으로 놔두기보다는 싱가포르처럼 공유화하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땅의 90%가 국유지로 기업과 가계는 국가로부터 토지를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대여한다. 때문에 공적자금을 투입한 사회기반 시설로 토지의 가치가 증가하더라도 이는 고스란히 국유화되어 다른 곳에 투자된다.

 토지의 국유화나 공유화가 어려운 곳에는 랜드풀링 같은 기법도 추천한다. 이는 기반시설을 구축한뒤 남은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방식인데 이 때 땅주인은 본래 자기토지보다 적은 땅을 돌려받게 된다. 하지만 개발효과로 이미 땅값이 크게 오른만큼 그는 이득을 보았기에 별 불만이 없이 이와 같은 방식을 수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회적 주택이다. 공영주택, 임대주택의 건설 역시 추천하며 개발이익 환수제 같은 방식 역시 다룬다.

 마지막으로 독톡한 방식은 금융의 변화였다. 현재의 금융은 트랜잭션 뱅킹 모형인데 이는 대출결정이 중앙집권적으로 이루어지고 자동화된 신용평가 방식을 갖춰져있다. 분기별로 높은 자기자본 수익을 요구하기에 담보가 확실한 대출을 선호한다. 즉, 지금의 주택담보형태에 적합한 금융방식이다. 책은 여기서 관계형 금융으로의 전환을 추천한다. 이 방식은 지역주민이나 기업이 소유한 협동조합이나 공영저축은행이다. 이들은 기업대출에 주력하고 담보요건이 까다롭지 않아 대출의 의사결정이 지점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즉, 대출시 담보보다는 관계에 주력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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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닷슈님 명절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맛난거 많이 드시고 늘 평온한 나날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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