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아이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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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 봐."

"어제 오후 조지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 무덤에 갔어. 여섯 번째 냉동고를 열고 가야의 시신을 확인했지. 시신은 그대로였어. 그런데 가야 손에 이상한 글씨가 씌어 있는 거야."

"인과응보......"

벨몽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녀석이 사라지기 직전 내게 했던 말이니까."

_ 242쪽 중에서

 

 

사건은 이렇게 시작한다. FBI 요원 사이먼에게 이미 십 년 전에 소인이 찍힌 우편물이 하나 도착한다. 신가야라는 이름의 한국인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에 의하면 이 편지가 배달된 날부터 5일 동안 한 명씩 사람이 죽어나가게 된다고 했다. 그들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인물이며 인류 평화를 위해 마땅히 죽어야 하는 인물이지만, 만약 살인을 막고 싶다면 엘리스라는 여자를 찾으라고 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모든 단서가 들어있다고 말이다. 장난이라 여기기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사이먼은 엘리스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신가야는 10년 전 죽은 자신의 딸 미셸의 아버지이니깐 말이다.

 

하루하루 죽어나가는 세계 산업을 지배하는 다섯 명의 거물들, 그리고 10년 전 이 살인을 구체적인 방법까지 정확하게 예고한 의문의 한국인 신가야. 알 수 없는 이들의 관계와 정체를 밝혀나가는 것이 이 책의 큰 줄거리이다. 신가야라는 한국인은 그저 가난한 좀도둑 한국인에 불과했지만 어느날 누군가에 의해 미국으로 들어온 뒤 영주권까지 주면서 거대 세력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엘리스라는 여자를 만나 5일 간의 사랑을 나누고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10년 후 벌어질 살인에 대한 예고와 함께 말이다.

 

 

"미래를 본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기억한다는 말은 처음이오."

"왜냐하면 말 그대로 기억하기 때문이오. 그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기억을 갖고 태어나오. 인생 전체를 뇌 속에 저장한 채 세상에 나오는 거지."

_ 304쪽

 

 

 

이 책의 주인공 신가야의 정체이자 소설의 제목인 '궁극의 아이'는 기원전 26세기 고대 이집트 왕 쿠푸의 무덤에서 발견된 또 다른 비밀의 방에서 시작된다. 이 방에서 발견된 건 열일곱 살의 소년 석관이었다. 석판에는 '아누비스의 사자'라는 말과 함께 아이의 놀라운 능력이 적혀 있었는데 바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쿠푸는 이 아이의 능력을 활용해 영토를 확장해 국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었는데 그가 죽으면서 이집트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훗날 이 석상을 도굴한 미국의 고고학자는 이 석상을 발견하고 돌아가던 중 똑같이 생긴 아이를 발견하는데, 그 아이에게도 똑같은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음을 발견한다. 궁극의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전 세대가 죽으면 얼마후 똑같은 모습을 하고 태어나는 아이. 모든 인종, 모든 국가를 초월해 무작위로 태어나지만 이들은 똑같은 얼굴은 물론 지문, 심지어 치열까지 똑같다. 미래를 기억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자신이 살아있는 기간 동안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기억한다. 문제는 이 기억을 활용해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국가를 초월해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주무르는 이들은 궁극의 아이의 기억을 활용해 전쟁을 일으키고 피가 뭍은 돈을 벌어들여 절대적인 권력가로 전세계를 지배한다. 그 사이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과 무기력하게 조종당하는 사람들. 이들의 악행을 멈추기 위해 궁극의 아이는 복수를 시작한다. 그 아이가 바로 신가야였다.

 

제목에 끌려 집게 된 이 책 <궁극의 아이>는 놀랍도록 잘 쓰여진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난 스릴러일거라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사건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며 그 안에 추악한 인간의 탐욕과 돈에 대한 성찰까지 담아내고자했다. 실제 역사적인 사건들에서 상상의 날개를 덧붙여 팩션의 느낌을 자아냈고, 궁극의 아이 신가야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은 그 어느 추리소설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하게 그렸다. 사건을 쫓는 사이먼의 개인사가 사건과 결합되며 한 인간으로서의 겪는 고뇌도 잘 표현되어 있고, 돈이 권력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담겨 있다. SF적인 요소가 있지만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그 덕분에 인간사회의 비극성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다. 10년 전 기억과 현재가 교차하며 사건의 조각들이 맞춰지고 역사적 사건과 함께 정체가 밝혀질 때면 쾌감마저 느껴진다. 500쪽이 넘는 책이지만 한번 잡은 순간 내려 놓을 수가 없었다. 배경이 미국이어서 그런지 국내작가의 소설이라기 보다는 잘 쓴 외국 작가의 번역서를 읽는 것 같았고, 감히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에 견줄만큼 국내작가이지만 내로라 하는 해외 소설가들에도 버금가는 작품이었다. 놀라운 작가였고, 놀라운 소설이었다. 강력 추천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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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드 라이프 - 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목록에만 적어 두는가
조니 펜 외 지음, 박아람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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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른이 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라며 리스트를 작성해 하나씩 하나씩 해보던 때가 있었다. 리스트를 지워나가는 쾌감과,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내며 겪는 쾌감은 2년이란 시간을 꽤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그러다 서른이 넘었고, 그 핑계로 나머지 리스트를 팽겨쳐두고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묘하게도 '뭐 재미난거 없어?'라는 말을 달고 다녔던 시점이 바로 그 리스트를 잊고 나서부터였다.

 

<버리드 라이프>를 읽다가 다시금 버킷리스트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이 책은 미국판 남자의 자격이라 불리는 Mtv 티비쇼 '버리드 라이프'의 책 버전이다. 이 프로젝트는 지극히 평범한 4명의 대학생이 모여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목록을 써내려가며 시작되었다.

 

처음 그들이 의기투합하기까지는 저마다 참담한 인생의 맛을 보고 있었다. 조니와 덩컨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충격과 더불어 준비되지 않은 독립을 준비해야했고, 벤은 럭비와 공부 모두에서 슬럼프를 겪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우울증을 겪고 있었고, 데이브는 마리화나를 피우며 놀던 방황기를 접으려다 체중이 25킬로그램이나 불어나 웃음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한 이 네 남자는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버킷리스트를 써내려가기 시작했고, 혼자라면 불가능하지만 함께라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일들을 추려 100개의 리스트로 만들어냈다. 다음엔 시간을 맞춰 넷이서 2주간 휴가를 냈다. 리스트를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버킷리스트에만 집중해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름은 '버리드 라이프'로 정했다. 매슈 아널드라는 시인의 의 시에서 그들이 원하는 표현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세상이 가장 붐비는 거리에서도, 시끌벅적한 다툼 속에서도, 우리의 매몰된 삶에 대해 알아내고픈 형언하기 힘든 욕망이 솟구친다." 이미 묻혀버린, 매몰된 버린, 성장 가능성에서도 너무나 멀어진 삶이지만 한번 사는 내 삶, 제대로 알고 도전해보고 후회없이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의 리스트를 보면 참 재밌다. 베스트셀러 책 내기, 병 속에 편지 담아 보내기, 성공적인 사업 경험하기, 마라톤 하기, 백만 달러 벌기 등 의미 있고 누구나 한번쯤 해보고 싶어하는 것들도 있지만 시체 보기, 플레이보이 맨션 파티에 참석하기, "기네스북"에 오르기, 착륙하는 비행기 밑에 서 있기, 경기장에서 옷 벗고 달린 후 잡히지 않고 도망가기, 일주일 동안 말하지 않기 등등 대체 그걸 왜 하고 싶어? 하는 의문이 드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걸 이루어내고 이루는 과정을 보면 이들의 삶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과정 자체가 보람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인 것이다.

 

신기한 것도 많다. 오바마와 농구하기, 유명 코미디언과 콩트 해보기, 주요 개막 행사에서 리본 자르기, TV프로그램 만들기 등 '우와 대체 어떻게 이 괴짜들이 그들을 구워 삶았기에 허락해줬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도 있다.

 

책에는 이들의 100개 리스트와 더불어 이들 청년들에게 보내온 일반인들의 버킷리스트가 담겨 있다. 장난끼 넘치는 글들도 있지만 진지한 이야기들도 많아 그 아래 숨겨진 개개인의 꿈이 느껴져 나도 괜히 마음이 짠해졌다. 이 책에 그런 말이 있다. "오늘은 당신의 남은 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정말 그렇다. 삶에 늦은 순간은 없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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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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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전날이면 늘 고민에 빠진다. 과연 어떤 책을 들고가야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그 오랜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고심해서 들고 간 한 권의 책이 10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재미없고, 흔들리는 기차의 미세한 진동까지 느껴질 정도로 머리가 지끈거리게 어렵고, 스마트폰에 검색어만 넣어도 줄줄이 그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며 심지어 그 내용이 책보다 더 재미있을만큼 깊이가 없는 컨텐츠를 담고 있다면 그 여행은 최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책을 고르는 시간은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 못지 않게 길다.

 

지난 금요일 쏟아붓는 눈보라를 뚫고 광주에 내려갈 일이 있었다. 왕복 6시간의 기찻길. 그래서 더더욱 중요했고, 전전날부터 대체 무슨 책을 가져가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이 책 <체스 이야기, 낯선 여인의 편지>를 넣어갔다. 무난하게 고전을 가져가자, 거기에 두 단편의 주제 모두 관심있는 주제라 골랐던 것인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눈으로 덮힌 세상을 바라보며,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읽는 츠바이크의 이야기 세계. 놀랍고도 경이로웠다.

 

 

<체스 이야기>는 뉴욕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배 위에서 벌어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체스 챔피언 첸토비치와 무명의 신사 B박사가 벌이는 체스 게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첸토비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인 뒤, 목사의 집에서 자라난 교양과 지식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두게 된 체스에서 천재성을 발휘하고 이후 전 세계 최고의 체스 챔피언이 된다. 그런데 그에게도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블라인드 체스를 두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즉 단 한판의 경기도(심지어 자신이 둔 체스도) 암기해서 두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 앞에 B박사가 나타난다. B박사는 첸토비치와는 반대로 블라인드 체스에 강한 이였다. B박사는 체스 경기 뒤에서 수를 알려주어 챔피언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첸토비치와 일대일로 두게 되는 체스에서는 초조함을 내비친다. 이 두 사람이 왜 서로 다른 체스 두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는지,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두는 팽팽한 경기의 승자는 과연 누가되는지 그 심리묘사를 읽어내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이다.

 

 

두번째 단편 <낯선 여인의 편지>는 말 그대로 어느 낯선 여인에게 온 편지를 편지 내용 그대로 옮겨 적은 소설이다. "결코 저를 모르는 당신께"라는 제목으로 어느 신사에게 도착한 두툼한 편지. 호기심에 편지를 연 신사는 편지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 그 안에는 한 여자가 어린 시절 이웃집에 이사온 신사를 보고 첫 눈에 반해 평생 그 남자를 사랑한 내용이 담겨있다. 알고보니 바람둥이었던 이 남자는 스무살 무렵, 그리고 서른살 무렵 두 번이나 여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지만 여전히 이 여자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여인은 남자를 원망하기 보다는 그렇게 보내는 하루, 그렇게 가지게 된 아이에 감사한다.

 

 

철저하게 여인의 순애보를 외면했던 한 남자에게 바치는 이 여자의 편지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 다음에는 안타까움으로, 그 다음에는 절절함으로 읽힌다. 나를 알아봐달라며 상대방에게 보내는 수많은 시그널과 우연을 가장한 만남들은 읽는 이가 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알려주고 싶을만큼 절절하고 아프다. 한 남자를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한 남자에게 이 여자는 그저 스쳐지나간 수많은 여인들 중 하나, 아니 두 번을 만났어도 처음으로 느꼈을만큼 존재 가치도 희미했다. 그리고 참았던 수십년의 사랑의 감정을 한번에 토하듯 편지로 쏟아낸다.

 

 

슈테판 츠바이크라는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었는데 두 단편 모두 읽고 난 뒤 오랜 여운을 남겼다. 이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는 모두가 소름끼치게 놀라운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놀라운 이야기가 하나하나 밝혀질 때마다 그 인물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소설을 다 읽고나면 그 인물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된다. 놀라운 작가, 놀라운 이야기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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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자동차 - 자동차 저널리스트 신동헌의 낭만 자동차 리포트
신동헌 지음 / 세미콜론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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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생애 첫 '차'가 로망이라면, 여자에겐(적어도 나에겐) 나를 데릴러 온 그 '남자의 차'가 로망이다. (부모님을 제외하고) 난생 처음 누군가가 차를 몰고 와 나를 기다리고, 나를 태우고, 둘만의 공간 속에서 같은 음악을 들으며 도로를 질주해,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는 그 첫 경험. 그 기억은 그 차가 무엇이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데릴러 온 그 자체'가 주는 자동차에 대한 여자의 첫 기억이 된다. 그래서 내게 자동차에 대한 추억이란 여고 시절 교문 앞에서 차를 대고 나를 기다리던 동네 오빠의 그 차가, 대학 시절 드라이브를 시켜주겠다며 남산에 올라갔던 선배 오빠의 그 차가, 그리고 지금 나를 매일 같이 집 앞에 내려다 주는 S의 차가 된다.

 

어차피 내겐 차가 무엇이냐가 중요하기보다는 누구의 차인지가 중요했기에 작년 이맘즈음 S가 차를 사겠다며 이 차가 어떻고 저 차가 어떻고를 얘기했을 땐 난 솔직한 심정으로 '어떤 차라도 상관없어. 잘 굴러가기만 하면 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자동차는 달랐다. SUV냐 세단이냐, 국산차냐 외제차냐, 어떤 브랜드냐에 어떤 색상이냐 따질 것도 고려해야 할 것도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한 달여의 고민 끝에 차를 산 S는 매일같이 차에 무언가를 장착하기 시작했다. 또 주말이면 세차를 해야 한다며 한 시간은 차를 닦고 한 시간은 광을 냈으며, 내가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은 문짝을 보며 흠이 났다고 속상해했다.

 

<그 남자의 자동차>를 읽었다는 한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자동자를 사랑하는 우리 S에게 선물하면 좋겠다고 책을 샀다. 그리고 S에게 책 이야기를 했더니 대번에 ‘조이라이드’의 까진 남자(필명)를 알고 있다고 했다. 아니 대체 얼마나 남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길래 모두가 알고 있는지 궁금해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저자 소개의 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여자가 읽어도 재미있는 자동차 이야기"를 모토로 하고 있다. '어쭈'하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어라' 하며 계속해 책장을 넘겼고 마지막 챕터에서는 '우아'하며 함성을 질렀다.

 

우리가 자동차를 좀 더 이해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즐거움’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포츠카를 타야만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출퇴근용 패밀리 세단이라도 충분하다. 자동차를 단순히 ‘집과 직장을 오가는 데 쓰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이용하는 만큼의 시간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출근길에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스티어링휠을 꺾는 동작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고,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회사로 가는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바꿀 수도 있다. 퇴근길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카페가 되기도 하며,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게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_ 9-10쪽

 

솔직히 이 책에 등장했던 수많은 자동차 용어나, 차 이름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이 들려준 수많은 자동차에 얽힌 스토리, 자동차가 그냥 탈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나의 추억을 품고 있는 공간이 된다는 것만 가슴 속 깊이 남아있을 뿐이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의 90퍼센트가 검정, 흰색 아니면 은색차를 선택하는지, 왜 사람들은 국내차가 아닌 외국차를 걸어 놓고 꿈을 꿀 수 밖에 없는지, 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컨버터블을 탈 수 밖에 없는지 그것을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인간’을 중심으로 욕망과 연결해 풀어 놓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저 '설'만 풀어 놓는 건 아니다. 저자가 경험한 차종에 대한 자세한 설명, 차의 특성 등에 대한 비교분석도 꽤 자세히 썼다. 해치백이 뭔지, 2기통이 어쩌구, 사륜 구동이 어쩌구 용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나와 같은 독자를 위해서는 더 읽을거리를 통해 친절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거기에 중간중간 등장하는 화보같은 자동차 사진은 자동차에 대한 로망을 더욱 크게 만들어준다. 남자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책이고, 여자들에게도 자동차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여자가 읽어도 재미있는 자동차에 관한 책이다.

 

선물해 주려고 산 책이었는데 내가 먼저 다 읽어버렸다. 거기에 (잘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나도 자동차를 꿈꾸게 만들었다. 10년 뒤에는 자신의 삶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인생의 목표를 찾게 된다는 포르쉐 스포츠카를, 20년 뒤에는 버튼 하나로 지붕을 걷고 거대한 하늘을 만나며 흰머리 휘날리며 타는 BMW 3시리즈 컨버터블을, 30년 뒤에는 너무 비싸서 살 수 없어 '드림 카'로 불린다는 아우디 R8나 BMW 650Ci를 타고 싶어졌다. 그와 함께라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책을 읽고나니 내게도 드림 카가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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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배신 - 화이트칼라의 꿈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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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에서 긍정의 산업화와 긍정을 통해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의 모습을, <노동의 배신>에서는 뼈빠지게 일해도 여전히 워킹푸어로 밖에 남을 수 없는 블루컬러의 현실을 보여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신작 <희망의 배신>이 나왔다. 전작 두 권을 읽으며 팬이 되었던 터라 이 책의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고, 책이 나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특히 이번 주제는 나와 관심사와 닿아 있어 기대가 컸었다. 바로 몸 바쳐 충성하고 책상 앞에 앉아 죽도록 일하다 버려지는 화이트칼라의 실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7개월 가까이 구직 활동을 하고, 이미지 변신을 꾀하고, 비싼 돈을 들여 이력서를 거듭 수정하고, 4개 도시에서 네트워킹을 위해 애쓴 결과 내게는 Aflac과 메리케이, 2개의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규정한 '일자리'의 기준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급료도, 복지 혜택도, 작업 공간도 제공되지 않았다.

_ 269쪽 중에서

 

 

 

전작 <노동의 배신>에서 웨이트리스, 마트 점원, 청소부 등 직접 노동의 현장에 위장취업해 그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살아보고 그들의 실상을 고발한 저자는 이번에도 역시 실제 취업시장에 뛰어들어 구직활동을 펼친다. 이번에는 고등교육 이상의, 사무직인, 몸이 아닌 머리를 써 일을 한다는 나름 고급인력이라 불린다는 화이트컬라 시장에 포커싱했다. 과연 여기는 블루칼라 노동계보다 나은가, 그들의 꿈은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하지만 시작부터 쉽지가 않다. 저자는 가상의 이력서를 만들고(기본적으로는 실제 해 온 일이지만 저자 본인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 이력서로), 리쿠르팅 회사에 들어가 이력서를 등록하지만 그 누구에도 답변을 받지 못한다. 커리어코치라 불리는 사람들을 찾아가 수십만원의 돈을 내고 강연을 듣고, 적성검사를 받고, 자소서 쓰는 법에 대해 배우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더욱더 밝고, 긍적적이고, 적극적이 되라고 강요만 당할 뿐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갈 수록 그녀만의 언어로 채워졌던 이력서는 열정, 긍정, 비전 등의 기업형 언어로 바뀌어가고,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쌓아뒀던 통장 잔고는 각종 취업 관련 세미나 참가비로 줄어만 간다. 네트워킹이 중요하다는 말에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는 모임에 쫓아다니지만 네트워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대부분의 구직자인 모임 속에서 패배감과 좌절의 쓴 맛만을 엿볼 뿐이었다.

 

 

결국 저자는 취업에 실패한다. 회사에 들어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착취의 현장을 보여주길 바랐지만 사실 그녀의 취업 실패 일기 그 자체가 대부분의 화이트칼라 구직자들이 경험한 일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이트칼라들은 원대한 꿈을 갖고 취업시장에 뛰어들지만, 종이 쪼가리에 적힌 숫자들로 평가받고, 그들이 원하는 언어로 말해야하고, '나'는 버리고 오로지 '조직'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이용만 당하고 씁씁하게 버려지는 것이었다.

 

 

저자는 자신이 경험한 화이트칼라의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몸을 써서 일하다 부상을 입고 녹초가 되지만,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똑같이 고통스러운 결과를 맞는다. 어찌보면 화이트칼라가 되기 위한 보편적 필수 요건인 대학 교육의 요체는 가만히 앉아서 눈을 뜨고 있는 훈련인지도 모른다(206쪽 중에서)" 고.

 

 

다시 한번 구직 사이트를 뒤지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보면서 없는 열정을 과대 포장하고, 일이 돈 벌이의 수단이 아닌 거창한 꿈인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더 밝은 척, 즐거운 척, 긍정적인 척을 해야해 힘이 들었다. 그리고 에런라이크의 이 책을 읽으며 비참하지만 비단 그것이 나만의 문제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고 위로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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