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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9월
평점 :
"이 시대의 백성들조차 모르는 의로운 현자들의 의로운 싸움을 후세 사람들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후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염려하지 않는다. 지금의 백성들이 나의 뜻을 알아주지 않음 또한 서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할 일은 지금 나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염려하는 것일 뿐....."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자신을 도왔던 겸사복 강채윤과 상궁 소이를 떠나보내면서 나누는 마지막 대화입니다. 백성을 바라보는 대왕의 성심이 실로 이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설을 읽으며 감정이입을 크게 한 탓인지 눈가가 시큰했습니다. 한글 창제라는 것이 지금 우리 시각에서도 참 대단하고 놀라운 일이지만요. 시간조차도 중국의 것을 빌어쓰던 조선의 사회상을 생각하면 그 시절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한반도에 거대한 벼락 백 여덟 개가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과 같았을 겁니다. 전하, 중국의 허가도 없이 우리 글을 만들다니요. 이는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전하, 한 소리에 하나의 글자가 조응하는 한문만이 유일하게 바른 글자이옵니다. 고작해야 28개의 글자로 세상의 이치를 표현하려 하시다니 이것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부제학 최만리의 쩌렁쩌렁한 곡성이 들리는 것도 같은데요. 호주제 폐지 당시 거리로 나와 대한민국 망한다고 대성통곡 하시던 유생들의 모습과 별 반 다를 바가 없었겠지요. 시대의 간극이 이만큼이나 큰데도 상상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상상하기가 싫어 그렇지. 게다가 그 시절 권력층이 원하는 세상이란 얼마나 숨 막히게 가슴 답답한 것이던지요. 경학을 받들어 나라의 이치를 바로 세우겠다 하면서 속내로는 제 주머니 채울 욕구, 제 자리 지킬 욕구로만 가득한 소설 속 양반님네들의 행태에 분이 일었습니다. 분리된 계층은 절대로 섞일 일이 없고, 아랫놈들의 들고 일어남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야만 하는 세상. 명나라를 받들고, 천년 전의 이치로만 사람과 세상을 보아야만 하는 세상. 공자와 맹자의 뜻을 연구하는 것으로 학사와 벼슬아치의 의무가 다할 수 있는 세상. 백성이야 굶든 말든 나의 부와 지위만큼은 세세손손 보장되는 세상. 결코 오늘과는 달라서는 안되는 세상을 바라는 이들에게 있어 세종대왕과 한글은 얼마나 눈의 가시 같았을까? 로 상상력을 키워간 것이 이 소설, 뿌리 깊은 나무였습니다.
역사추리물이지만 동시에 세종대왕의 업적물입니다. 장영실 같이 미천한 신분들이 벼슬길에 올랐고, 과학과 수학, 농법을 탐구했으며, 시전상인의 독점을 허락하지 않아 난전이 활개를 치고, 금속화폐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급기야는 우리 땅의 우리 얼이 담긴 한글이 만들어졌습니다. 대왕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셨지요. 작은 중국이 되어 그들의 영향력 아래 살지 않고 꿋꿋한 자주 조선 속에서 백성들이 배부르고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니 최만리를 수장으로 한 성리학계의 수구보수파로서는 아주 속이 터질 지경이 된 것이죠. 이들 보수파와 대왕의 숨은 갈등은 약 이십 년 가까이 지속되는데요. 그러다 완성된 한글이 반포되기 직전 그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자들이 줄줄이 살해되며 갈등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겸사복에 오른 강채윤이 이 미스터리를 뒤쫓는 며칠 간의 과정은 가슴 아픈 사건의 연속이며 조선 전기의 정치와 경제, 문화를 속속들이 엿볼 수 있는 장이었습니다. 태자 시절 대왕이 썼던 고군통서, 사대를 반대하는 주체성 가득한 명문이 명나라 사신에게 발각됐을 적에는 심장이 쫄깃해지기도 했고 또 그만큼 화도 났습니다. 명의 사신 따위에게 겁박 당하는 대왕의 모습이라니요. 그러나 그것이 결코 허구만은 아니었음을, 세종대왕이 명의 사신들을 극진히 떠받들었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역사에 남아 있어 솔직히 속이 좀 상했습니다. 흥행한 드라마로 먼저 만나 미루어 짐작 가능한 일들이 많았지만 역사의 일부를 소설 속에서 되짚어 보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입니다. 작약시계라는 비밀 결사단, 마방진과 문신, 오행에 얽힌 수수께끼가 여러 추천글에서 다빈치코드를 거론한 까닭도 알게 하구요. 경세치용의 실리를 추구하는 젊은 학자들의 이야기에는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그 시절 이들이 세력을 잡아 실학과 수학, 과학에 온전히 더 힘을 쏟았다면 여기 조선은 또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요. 그들의 염원이 고스란이 이 땅에 뿌리 내렸다면요. 새시대를 바라는 그 시절의 꿈이 세대를 초월해 이루어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랏말씀의 근원을 되새기며 세종대왕을 생각하는 것이 꽤나 뿌듯한 밤, 부디 우리 달도 아주 밝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