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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을 마시다
비올레타 그레그 지음, 김은지 옮김 / iwbook / 2018년 5월
평점 :
"나는 늘 청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고무줄로 잔뜩 헝크러진 머리를 묶고 흠뻑 젖은 운동화를 벗었다. 그리고는 맨발로 다시 헥타리를 향해 뛰었다." (p154)
작가 그레그가 질끈 머리를 묶는 모습을 상상한다. 늦은 밤이 아니라 아침이지 않았을까. 큰 라즈보스와 집을 나섰던 동도 트기 전의 그 새벽과도 같이. 아주 이른 시각이었을 거다. 작가는 맨발로 뛰어 되돌아갔던 그곳 헥타리를 원고로 옮길 각오를 하고서 책상에 앉는다. 컴퓨터를 앞에 둔 채 온 영혼을 달음박질 쳐 건져올린 22가지의 이야기. 하루에 한 가지씩 특별하지만 희미하기도 한 날들을 돌이켜 꼬박 한달에 걸쳐 원고를 완성하고 독자인 나는 그걸 읽고 있다. 뭐 그런 상상을 이유도 모른 채 하고 있다. 실상 작가 서문도 없고 작가 후기도 없어서 이것이 그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정보도 없으면서 자꾸만 작가를 상상하고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가 글을 썼던 시각을 추측하고 그것이 표지처럼 어렴풋한 새벽이었기를 바라게 된다.
참 희한도 하지.
인생은 초콜릿 상자라는 어느 영화의 비유와도 같이 비올카의 소년기는 달고 쓰고 떫고 슬프고 뜨악하고 풋풋하고 녹아내리는 비참함의 향연이었다. 80년대 폴란드 시골 마을 헥타리. 공산주의 국가였던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옛정취가 흠뻑 느껴지는 이곳에서 비올카가 태어난다. 아버지가 탈영으로 체포된지 꼬박 한 달하고도 2주 후에. 시멘트 공장 의무노동 중이던 어머니가 시멘트 혼합기 뒤에 숨어있다 그녀를 낳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날이 너무 추워서 그저 바람을 피한다는 게 어찌저찌 석회 가득한 양동이 안으로 양수를 흘려보내게 된 계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의 월드컵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돌아온다. 시작부터 비극인 줄 알고 초반 얼마나 놀랐던지. 그리고 이후에도 이렇게 놀라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한껏 비극처럼 흘러가던 이야기가 낙관적으로 우회할 때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비올카는 성장했다. 말벌의 날갯짓 소리에 벌들이 나를 납치하려 해요 엉엉 울던 아기가 동네 머스매와 농밀한 손장난을 칠만큼 커버린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타락해서가 아니라 비뚤어져서가 아니라 티비도 컴퓨터도 양지바른 놀이터도 없는 곳에서 말그대로 장난처럼 놀이처럼 그냥 그렇게. 고물을 주으러 이곳저곳 나다니다 드러누운 나무 밑에서 아이들은 터부없이 어울리고 섭슬려서 성장한다. 그 모습이 신기하리만치 천연덕스러워서 눈살이 찌푸려지기 보단 웃음이 났고 서글퍼도 졌다가 생각도 마음도 모호해지기를 반복했다. 손장난 이상의 무언가를 엿보았던 재봉사의 방, 벗은 가슴으로 거미처럼 비앙카를 옭아매던 낫카 로젠코와의 일화, 그녀로 하여금 수은을 마시게 한 의사 선생의 파렴치한 행위, 피를 많이 흘려 죽을까봐 겁이 나던 아침, 풀을 먹인 린넨 조각을 들려주던 할머니의 손, 사워 체리를 팔러 나간 시장에서 마주친 첫사랑, 우유 토피로 뽀뽀를 유혹하던 기에넥의 고백, 비올카의 그림을 쫓아 친히 학교로 왕림했던 낯선 남자, 끔찍하게 순수하고 잔인했던 어린 시절을 비올카에게 고백한 열차의 손님, 비올카의 아버지이며 50세의 소년이었던 라이지우의 죽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이야기들.
파란 잉크에 잠긴 표지 속 모스크바의 풍경과도 같이 비올카가 바라본 헥타리의 전경이 푸르게 젖어 방울방울 터진다. 헥타리 속의 잔인함, 타락, 폭력, 퇴락까지도 푸르게 비춘 비올카의 순수. 순수로 말미암아 비올카는, 비올레타 그레그는 수은을 마셨다.
장에서 흡수되지 않은 채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봐야 할 은색 구슬들이(p53)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떠올랐다 가라앉는 시간들. 한숨 한 번, 하늘 한 번, 책장 한 페이지를 오며가며
독자도 수은의 구슬들을 나눠가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