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을 마시다
비올레타 그레그 지음, 김은지 옮김 / iwbook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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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청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고무줄로 잔뜩 헝크러진 머리를 묶고 흠뻑 젖은 운동화를 벗었다. 그리고는 맨발로 다시 헥타리를 향해 뛰었다." (p154)

작가 그레그가 질끈 머리를 묶는 모습을 상상한다. 늦은 밤이 아니라 아침이지 않았을까. 큰 라즈보스와 집을 나섰던 동도 트기 전의 그 새벽과도 같이. 아주 이른 시각이었을 거다. 작가는 맨발로 뛰어 되돌아갔던 그곳 헥타리를 원고로 옮길 각오를 하고서 책상에 앉는다. 컴퓨터를 앞에 둔 채 온 영혼을 달음박질 쳐 건져올린 22가지의 이야기. 하루에 한 가지씩 특별하지만 희미하기도 한 날들을 돌이켜 꼬박 한달에 걸쳐 원고를 완성하고 독자인 나는 그걸 읽고 있다. 뭐 그런 상상을 이유도 모른 채 하고 있다. 실상 작가 서문도 없고 작가 후기도 없어서 이것이 그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정보도 없으면서 자꾸만 작가를 상상하고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가 글을 썼던 시각을 추측하고 그것이 표지처럼 어렴풋한 새벽이었기를 바라게 된다. 
참 희한도 하지. 

인생은 초콜릿 상자라는 어느 영화의 비유와도 같이 비올카의 소년기는 달고 쓰고 떫고 슬프고 뜨악하고 풋풋하고 녹아내리는 비참함의 향연이었다. 80년대 폴란드 시골 마을 헥타리. 공산주의 국가였던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옛정취가 흠뻑 느껴지는 이곳에서 비올카가 태어난다. 아버지가 탈영으로 체포된지 꼬박 한 달하고도 2주 후에. 시멘트 공장 의무노동 중이던 어머니가 시멘트 혼합기 뒤에 숨어있다 그녀를 낳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날이 너무 추워서 그저 바람을 피한다는 게 어찌저찌 석회 가득한 양동이 안으로 양수를 흘려보내게 된 계기였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의 월드컵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돌아온다. 시작부터 비극인 줄 알고 초반 얼마나 놀랐던지. 그리고 이후에도 이렇게 놀라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한껏 비극처럼 흘러가던 이야기가 낙관적으로 우회할 때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비올카는 성장했다. 말벌의 날갯짓 소리에 벌들이 나를 납치하려 해요 엉엉 울던 아기가 동네 머스매와 농밀한 손장난을 칠만큼 커버린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타락해서가 아니라 비뚤어져서가 아니라 티비도 컴퓨터도 양지바른 놀이터도 없는 곳에서 말그대로 장난처럼 놀이처럼 그냥 그렇게. 고물을 주으러 이곳저곳 나다니다 드러누운 나무 밑에서 아이들은 터부없이 어울리고 섭슬려서 성장한다. 그 모습이 신기하리만치 천연덕스러워서 눈살이 찌푸려지기 보단 웃음이 났고 서글퍼도 졌다가 생각도 마음도 모호해지기를 반복했다. 손장난 이상의 무언가를 엿보았던 재봉사의 방, 벗은 가슴으로 거미처럼 비앙카를 옭아매던 낫카 로젠코와의 일화, 그녀로 하여금 수은을 마시게 한 의사 선생의 파렴치한 행위, 피를 많이 흘려 죽을까봐 겁이 나던 아침, 풀을 먹인 린넨 조각을 들려주던 할머니의 손, 사워 체리를 팔러 나간 시장에서 마주친 첫사랑, 우유 토피로 뽀뽀를 유혹하던 기에넥의 고백, 비올카의 그림을 쫓아 친히 학교로 왕림했던 낯선 남자, 끔찍하게 순수하고 잔인했던 어린 시절을 비올카에게 고백한 열차의 손님, 비올카의 아버지이며 50세의 소년이었던 라이지우의 죽음,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이야기들.

 파란 잉크에 잠긴 표지 속 모스크바의 풍경과도 같이 비올카가 바라본 헥타리의 전경이 푸르게 젖어 방울방울 터진다. 헥타리 속의 잔인함, 타락, 폭력, 퇴락까지도 푸르게 비춘 비올카의 순수. 순수로 말미암아 비올카는, 비올레타 그레그는 수은을 마셨다.

장에서 흡수되지 않은 채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봐야 할 은색 구슬들이(p53)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떠올랐다 가라앉는 시간들. 한숨 한 번, 하늘 한 번, 책장 한 페이지를 오며가며

독자도 수은의 구슬들을 나눠가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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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씨는 진짜 사랑입니다
엘리자베스 버그 지음, 박미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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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만 보아도 어떤 느낌의 책일지 알 것 같았어요. 아저씨 아니죠, 아서 씨입니다. 몽글몽글 말랑말랑 따끈따끈 포솜포솜한 마음씨를 가진 여든다섯의 할아버지세요. 여섯 달 전 아내 놀라가 죽은 뒤 그는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녀의 무덤을 찾는 중입니다. 아내의 옆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약간의 수다를 떤 후에 아내 이웃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산책을 하는 게 요즘의 일과에요. 줄리언 반스 작가의 말처럼 첫사랑이 삶을 영원히 결정하는 거라면 여기 이 남자 아서는 20대부터 완벽하게 축복받은 인생이지요. 그의 첫사랑은 모범적이었고 뒤따르는 모든 사랑에 안정적인 반면교사가 되어주었거든요. 팡파르를 울리며 등장했던 캔디걸 놀라가 삶이라는 열차에서 하차한 후에도 그는 타인과의 교감, 애정의 손길, 함께하는 시간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모두 놀라와 함께 배운 것들이에요. 코뚜레를 하고 (그의 시각에서 말이죠)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무덤에서 놀고 있는 소녀에게 손을 흔들어 준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소녀가 겁을 먹지는 않았을까 뒤늦게야 생각이 미쳐 허겁지겁 자리를 비켜주었지만요. 그 자신의 인사에는 퍽 만족을 했죠. 소녀 매디는 그야 조금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한차례 손을 흔든 것에 마음을 주기에는 현재 삶이 너무 고달파서요.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시작된 왕따가 고등학교까지 따라온데다 아버지는 높은 고랑 안에서 자기만의 슬픔에 완벽하게 빠져 있는 상태거든요. 어쩌면 조금 서투른 성격일 뿐일 수도 있지만 그걸 십대 여자아이가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어요? 현재 진행형인 그의 첫사랑은 게중 가장 최악인데 완전히 개차반입니다. 외로운 소녀의 눈에는 완벽한 성인처럼 보이지만 아이고 말도 마세요. 이 녀석 내가 매디의 엄마였으면 너 죽고 나 죽자 양팔을 걷어 붙였을 만큼 잡놈입니다. 자존감 낮은 여자아이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 매디의 인생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또 한 명, 인생이 사랑으로 파탄나 집안을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있는 여성 루실도 빼먹으면 안되겠죠. 아서의 이웃사촌인데 전직 교사라 남 가르치길 좋아한다는 점만 빼면 나무랄데가 없는 옆집 사람입니다. 요리실력도 으뜸이구요. 그런 루실이 잠적을 합니다. 집안으로요. 오십년도 더 지나 재회를 한 첫사랑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거든요.

십대의 여자아이에게도 여든 셋의 할머니에게도 사랑은 이다지도 어렵습니다.

"이제야 깨달았어요. 행복이 뭔지...
혼자 여기 나와서 내 집을 바라봤어요.
현관에  놓인 낡은 의자가 눈에 띄더군요.
괜히 서글퍼지더라고요.
볼품없이 낡아 빠진 의자가 내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동안 겉으로만 좋은 척, 괜찮은 척하면서 살았어요.
남들뿐 아니라 나 자신도 속였어요.
그런데 여기서 몇 주 지내는데, 참 행복했어요.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왠지 행복이 나랑 같이 앉아 있는 것 같았어요." (p229)



첫사랑에 성공한 한 명의 남자와 첫사랑에 실패한 두 명의 여자의 동거동락, 우리 집에 그녀들이 살고 있다! <아서 씨는 진짜 사랑입니다>를 한 문장으로 팍팍 줄이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서가 좀 피곤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허무를 극복하고 행복해집니다. 미니애폴리스 스타 트리뷴의 추천사처럼 뻔뻔할 정도로 낙관적인 우정이 있으니까요. 놀라의 무덤가에서 아서의 집 앞에서 트루러브의 손길이 어떻게 두 여인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마음을 녹이고 애정을 믿게 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벌써부터 쓸쓸한 가을에 옆구리 꽉 차게 온기를 품고픈 분들께 추천합니다. 아서 씨와 함께하는 잠시 동안만큼은 미소와 행복이 나란하게 앉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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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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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 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p13)

    

일흔 줄의 작가가 쓰는 사랑 이야기는 어떨까. 더 많이 경험하고 깊게 사유하고 삶을 관조한 작가의 깨달음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홍보도 있으니만큼, 손에 잡힐 듯이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첫머리부터 이토록 가슴 두드리는 질문을 해오는 작가라면 말이다.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전작은 읽지도 못했고 그와는 아예 첫만남이지만 이 질문 앞에 고민하는 잠시 잠깐 사이 벌써 예감을 했던 것 같다. 이제껏 책으로 만나온 그 어떤 사랑과도 다를 것이며 때문에 전혀 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해피엔딩에만 열광하던 내가 끝없이 실패로만 다가가는 사랑에 흐느꼈다는 데서 예감은 완전한 YES. 사랑에 관해 여전히, 무엇도, 어떻게도 알 수가 없었다는 데서 예감은 완전한 NO. 번역가의 말처럼 "죽은 자는 말이 없고"(p383) 케이시 폴의 회고는 단편적이라 그들의 불미스런 사랑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들 관계의 완연한 실패와 혼란한 비극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에선 찾을 수 없었던 감흥이 일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19세 소년 케이시 폴 그리고 48세의 여인 수전 매클라우드가 사랑에 빠진다. 수전의 딸들이 그의 어린 연인보다 연상이었다. 그에겐 남편도 있었다. 누가 봐도 아들과 어머니로 보일 법한 이들이 우연히 테니스클럽의 파트너가 되어. 또 우연히 비슷한 높이에서 눈길을 마주해서. 또 우연히 그의 부모님은 절대 웃지 않는 포인트에 수전이 웃음을 터트리는 속에. 연정은 아무렇게나 싹을 틔운다. 둘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이 관계를 불꽃같은 놀음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면 다디단 관능의 기억, 순간의 치기, 성장통 정도의 이름을 붙여 넘겼을지도 모를 시간. 그러나 폴에게 수전은 첫사랑이었고 수전에게 폴은 이십년 가까이 남자를 몰랐던 몸에 찾아온 열정이자 비상구였다. 둘 중 어느 한 명도 사랑이라는 터널을 재빠르게 통과하지 못했다. 덕분에 가족과 이웃과 사회로 통하는 출구가 모두 막힌 채 수전과 폴은 암흑 속에서 표류하게 된다. 표류의 대가가 중년의 여성이었던 수전에게 더욱 가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남편의 주사와 폭행으로 술을 혐오했던 수전이 술을 찾아 원숭이처럼 장롱을 기어오르고 거리를 헤매고 술집을 전전한다. 경찰이 출동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우울증 약을 처방받는 시간이 폴과 사랑한 시간보다 길었다. 수전의 사랑이 썩고 문드러지는 동안 폴의 이십대도 멍이 들고 삭고 바스라진다. 사랑으로 무너지는 것인지 사랑 아닌 것으로 무너지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던 수전.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혹하게 깎여 꼬챙이가 되어버린 폴. 완연히 부서져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기까지 꼬박 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십 년에 다시 몇 십 년이 보태져 폴이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도록 수전의 잔상은 인생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수전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일흔에 가까운 노인이 되어버린 폴의 인생, 폴의 자조, 폴의 회환, 그렇게 <연애의 기억>이 쓰여진다.

 

수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19세였던 자신의 앞에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노라고 이제와 생각하는 폴. 그럼에도 결코 그녀와의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폴의 독백 앞에서 나는 그의 진심을 가늠해보려 애쓴다. 소년과 함께 집을 나와 가난한 아파트에 정착했던 수전이 때때로 예전 집을 방문해 살림을 돌보고 페인트 색깔을 결정하고 남편의 영수증을 처리하던 장면도 돌이켜본다. 우리에게는, 그러니까 닳고 닳아버린 여자 사람에게는, 사랑이 유희 이상의 의미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사랑이 삶이 되도록 방치하지 말라는 수전의 목소리가 문득 들려오는 듯 했지만 알 수 없다. 수전이 수전의 입으로 사랑을 논의하는 장면은 딱 한번 밖에 없었으니까. 자살하는 사람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소년과 사랑에 빠진 후 술로 인생의 기억을 자살시킨 여인과 사랑을 저 먼 뒤안길로 보내고 난 뒤에도 그 상흔 속에서 살아가는 노년의 남자를 생각한다. 사랑을 잘못 배우고 잘 배우고의 의미가 돌연 희미해져버렸다.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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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2 - 이게 사랑일까
안나 토드 지음, 강효준 옮김 / 콤마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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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사랑일까. 표지를 장식한 물음을 처음엔 아무렇게나 흘려 읽었다. 2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퍼뜩 표지의 질문이 떠올랐고 곰곰 생각해 보게 된다. 이게 사랑일까. 자기 파괴적이고 우정 파괴적이고 가족 파괴적이다 종내엔 모든 관계를 종말시키는 이런 핵폭탄급 감정이 정말 사랑일까.  

테사와 하딘은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믿고 서로가 자신을 덜 사랑한다고 의심하는 와중 끝없는 갈등과 분노와 다툼과 배척과 회피에 괴로워한다.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지긋지긋하게 키스하는 얼음과 불의 시간들에 테사의 마음과 육체는 얼었다 타오르기를 반복하며 무던히 소모된다. 오늘로 영영 그를 잊겠다거나 내일로 영영 그를 떠나겠다는 결심은 그러나 하딘의 손길 한번에 주춤, 육체의 뜨거운 갈망 앞에서 한줌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그러는 사이 테사는 어린 시절 모든 두려움에서 자신을 건져준 친구를 잃었고 아버지 없이 홀로 자신을 성장시킨 엄마를 상처입힌 채 떠나게 한다. 신입생으로 처음 둥지를 튼 기숙사를 나와 제 깜냥으로는 구할 수 없는 하딘의 집에서 동거까지 시작한다. 함께 산다는 것을 사랑의 완성으로 착각한 테사. 그러나 그 착각을 길게 가질 여유도 없이 하딘은 자신과의 관계를 친구들에게 숨기는 것으로 테사의 의심을 부추긴다. 테사가 싫어하는, 그리고 하딘과 열렬한 육체관계를 맺기도 한 여자친구 몰리와의 관계도 변함없이 유지한다. 방탕한 생활을 테사에게 숨기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이 테사를 만나기 전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유지하는 하딘. 이 불공평한 관계에 매번 고민하지만 그때마다 하딘은 테사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쾌락을 알게 하고 긴긴 밤 악몽 속에서 테사를 찾으며 그녀를 설레게, 긴장하게, 애절하게 만든다. 

그는 어째서 친구들에게 동거 사실을 숨기는가. 어째서 테사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가. 썩다 썩다 고름처럼 찢어발겨진 그의 비밀 앞에서 테사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독자인 나도 충격을 받았다. 그야 학창시절 읽은 할리퀸 로맨스에 이 비슷한 소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어떤 책도 비밀을 이렇게나 천박한 소재로 돌출시킨 적은 없다. 독자의 충격을 예상한 듯이 책은 끝이 났고 나도 미련없이 2권을 덮었다. 2권이 완결인 줄 알았는데 완결이 아니라는데서 1차 충격, 하딘의 그리고 그 친구들의 태도와 가치관에서 2차 충격을 받아 좀 얼떨떨한 상태기도 해서 곧장 리뷰 쓰기도 힘들더라.  하딘이 벌인 행동의 이면에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다 할지라도 로설의 남주가 보일 수 있는 류 중 최악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하딘의 이런 선택을 용서한다면 여자 주인공 테사를 더는 응원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이게 사랑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남주가 바뀌는 로맨스 소설 따위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2권 끝까지 읽은 지금에서는 테사와 하딘의 분명한 이별을 바라는 독자도 한명쯤은 있다는 걸 작가님께 알려드리고 싶다. 똥물에서 그만 구르고 제발 이성을 찾기를. 테사도 맘에 드는 여주는 아니지만 부디 3권에서는 조금은 성장한 그녀가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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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갑니다, 편의점 - 어쩌다 편의점 인간이 된 남자의 생활 밀착 에세이
봉달호 지음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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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갑니다, 편의점. 저는 손님으로 거의 매일. 이 책의 작가 봉달호씨는 점장으로 매일매일 편의점 출근 중이에요. 독립하기 전까지는 저의 편의점 이용률이 그렇게 높진 않았습니다. 엄마 이것 좀! 저것 좀! 하고서 나갔다 들어오면 엄마 요량껏 필요한 걸 준비해 주셨구요. 냉장고를 열 필요도 없이 엄마 밥! 하면 아침저녁 두끼도 뚝딱뚝딱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나 독립하고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제 손으로 모두 구입을 해야 해요. 생수에 커피, 라면, 도시락, 우유, 맥주, 안주거리, 스타킹, 생리대, 세재, 또 근래엔 택배를 부치기 위해 풀방구리처럼 편의점을 들락거립니다. 제 퇴근 타임의 단골 편의점 알바생이 바뀌지 않고 장기근무를 할 적엔 매일 같은 도시락에 맥주가 창피한가 싶어 오분 거리의 타사 편의점을 오가기도 해요. 편의점에 대한 의존도가 이렇게까지 높아지는 나날을 저는 정말 상상해 본 적이 없었죠.

마찬가지로 작가였고 학교에서 근무했고 해외에서 사업도 여러차례 벌렸던 봉달호씨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편의점을 열게 될 줄은 그 자신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하물며 다른 건물 편의점에 손님을 뺏기지 않겠다! 우리 손님이 다른 편의점을 맛보는 거 질투나!! 라는 생각으로 토요일에도 문을 열게끔 가맹계약을 맺는 자신을 그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봉달호씨는 어떻게 보면 무지무지 독한 점장이구요. 어떻게 보면 무지무지 재미난 점장이구요. 또 어떻게 보면 무지무지 낭만적인 점장이에요. 손님은 무조건 내꺼라는 생각으로 문 여는 게 더 적자인 그런 날에도 장사하는 사장님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런데 봉달호씨는 합니다. 동업자도 보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서비스 정신까지 투철나요. 물론 그 서비스 정신 때문에 동업자분은 현재 따로 매장입지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합니다ㅠㅠ 매대의 음료와 과자, 상품들을 줄 맞춰 세우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그렇게 생긴 정리벽 때문에 지하철을 타면 승객들을 가지런히 정돈하고픈 욕구가 생긴다는 얘기는 너무 웃겨 혼이 났습니다. 중간중간 삽화가 있는데 지하철의 나란하게 앉은 승객들이란. 색깔별로 크기별로 승객을 줄 세운 지하철을 상상하니 연신 웃음이 나더군요. 손님 한명한명에 그렇게나 애닳아 하는 사람이 남의 편의점 염탐가서는 또 그 편의점 잘 되라고 빌어주고 옵니다. 이유가 뭐게요? 점장이 또는 알바생이 친절해서? 매장이 너무 근사해서?아님 동정심이 일 정도로 매장이 후져서? 동종업계 동업자라는 의식 때문에?? 아니아니요. 이유는 단지 그쪽 매장 사장님이 황현산 교수님의 수필을 읽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카운터에 커피 한잔을 두고 독서를 즐기는 편의점에 눈독 들이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나요?? 꽤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저만 그렇게 느꼈을까요? ㅎㅎ

편의점이라는 크지 않은 공간에 뭐가 그리 재미난 일이 많을까 싶지만 의외로 참 다사다난하게 벌어지는 일이 많구요. 재미있는 손님들도 많구요. 재미있는 고민도 많아요. 마트였다가 문구점이었다가 식당이었다가 이제는  택배사이기까지 한 만능 쩜빵 편의점! 7시에 시작해 11시에 문을 닫아 이름이 세븐일레븐이 되었다는 인류의 첫 편의점이 무색하게 24시간 안열리면 이상할 그곳에서 5년째 근무 중인 봉달호씨. 그가 들려주는 편의점 24시의 이야기를 많이들 궁금해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가 도움받은 책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달려라, 아비>, <율포의 기억>, <목숨을 걸고> 등의 이야기도 함께 말이지요.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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