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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이름은
조진주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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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면서 마음에 오래 남는 문장이 정말 좋다 다음 작품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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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바람 소원우리숲그림책 7
박종진 지음, 송선옥 그림 / 소원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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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너무 귀여워요 우리 아이들이 참 좋아하는 책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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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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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은 술술 읽히는데 어려웠다. 생각지 못한 전개에 하하 웃었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에 부딪혀 읽었던 것을 다시 읽어보고 책장을 뒤적여야 했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 봤으면 좋았겠다 그랬으면 더 재밌었겠다 아쉬움이 들었지만 구약성서에 실려 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만 간간히 알아도 이야기 진행을 따라가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정작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울 수 밖에 없었던 건 주제 사라마구가 경쾌한 어조로 끈덕지게 어려운 질문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인간한테 신은 도대체 왜 필요한 건지. 신이라는 게 의미가 있는 건지. 의미가 있는 게 무슨 소용인지 뭐 이런 질문들 말이다.


그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아들도 죽이라고 명령할까요, 이삭이 물었다. 시간이 말해 줄 거다. 그러니까 여호와는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네요 좋은 일, 나쁜 일, 더 나쁜 일도. 그래, 할 수 있지. 아버지가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이삭이 물었다. 글쎄, 여호와는 보통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은 파멸시키거나 병들게 하지. 그러니까 여호와는 복수심이 강하군요. 그래, 내 생각에는 그렇다, 마치 누가 듣기를 두려워하듯이 아브라함이 조용히 말했다, 여호와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어. 오류와 범죄조차도요, 이삭이 물었다. 특히 오류와 범죄는. 아버지, 저는 이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하지만 이해해야 한다, 내 아들아  -98p


오, 아버지. 저는 저라는 존재도 이해하지 못하고 저의 아내도 이해하지 못하고 저를 낳아준 부모도 이해하지 못하고 또 형제 자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저를 시험에 빠뜨리지 말게 하실지언데 주라는 존재조차 저를 시험에 빠드리게 하시고 왜 인간을 자꾸 시험에 들게 하시는 지 말해주지 않으시고 복종하게 하시니 그런 종교를 제가 어찌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책을 읽는 내내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카인>에서 그려진 여호와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도 닮았고 폭력적이고 제멋대로고 속을 알 수 없고 장난기 넘치며 이기적인 그런 존재 같았다. 그리고 항상, 무조건적인 사랑보다 신과 인간의 사이엔 '계약'이 앞서 있고 그 계약을 인간이 어딘가면 벌을 받지만 신은 언제든 제멋대로 바꿀 수 있었다. (아, 이런 마음 붙일 데 없는 정 없는 신이시여!)


우리는 동쪽에서 이곳에 정착하러 왔지요,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했어요. 그 언어는 뭐라고 불렀나요, 카인이 물었다. 그거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이름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언어였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누군가 벽돌을 만들어 가마에 넣고 굽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만들었는데요, 카인은 진흙을 밟던 사람이었기에 자신과 동류인 사람들 사이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어 물었다. 늘 하던 대로요, 흙, 모래, 왕모래로요, 그리고 반죽으로는 진흙을 사용했고요. 그런데요. 그러다 우리는 커다란 탑이 있는 도시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저기 저거 말입니다, 하늘에 닿을 탑이죠. 무엇 때문에요, 카인이 물었다. 그러면 유명해지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왜 쌓는 걸 멈춘 거예요. 여호와가 보러 왔다가 기분이 상했거든요. 하늘에 이르는 것은 모든 선량한 사람들이 바라는 바잖아요, 당연히 여호와는 도와주었어야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죠. 그래서 여호와가 어쨌나요. 여호와는, 너희가 탑을 지었으니 이제 뭐든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였어요, 그래서 언어를 모두 섞어놓고, 그때부터, 보시다시피, 우리는 이제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된 겁니다. -103p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형벌은 사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담과 이브는 서로의 입장이 달라져 버렸고 여호와 앞에 각자의 입장을 설명해야 했다. 그 입장이라는 게 언어로 설명하기가 얼마나 껄끄러운가. 그리고 마음은 그렇지 않아도 입밖으로 말을 내뱉기 시작하면 말이 어찌나 제멋대로 움직이는지. 그 말은 어찌나 자기 변론을 좋아하는지. '인간 본성이라고 부르는 불가해한 그림자극'에 관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러니 인간이 삶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쉽게 논할 수 없는 문제다.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자들의 도시>에서도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흥미롭게 던졌는데, 사실 이 이야기에사도 남는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신과 세상이 본래 폭력적이라면, 인간의 본성은 또 어떤 것인지. 세상의 폭력이 '신'이라는 이름을 앞세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폭력은 어디에서 탄생되는 것인지.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 지독한 삶을 견디도록 만들어졌는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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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낙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한 낙원
헤닝 만켈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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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북쪽(이라 기억한다), 작은 마을에 봉사(?) 활동을 다녀온 적이 있다. 당시 봉사 일정 중에 '홈스테이'가 있었는데, 이것에 대한 봉사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홈스테이가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이고 다소 위험할 수 있다는 입장과 인도인들의 실상을 진짜로 이해하려면 함께 지내봐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눠었다. 나는 후자에 손을 들었지만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고 느껴진다. 내가 묵었던 집은 방이 단 한 칸이었다. 벽으로 나뉘어진 다른 한 칸은 부엌이었고, 우리에게 잘곳을 제공하기 위해 아이 셋과 서른쯤 됐을 부부는 작디작은 부엌에서 불편하게 잘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 집 안주인의 권유에 따라 사리를 입었는데, 잘 때 사리를 벗으려고 하자 안주인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불편한 바지 따위 입지 말고 편안한 사리를 입고 자라고 손짓 발짓으로 말했다. 사리를 입고 자리에 누웠지만 피부에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통증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나는 빈대에 엄청나게 물려 빨갛게 부어 오른 피부 덕에 열이 났고 몸져누웠다. 사리를 입고 자라고 강요하는 안주인의 얼굴을 마주하고 난 뒤 나는 그들의 삶 중 무엇도 쉽게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한나는 스웨덴의 아주 추운 지방에 살다가 한순간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령 땅에 떨어진다. 한나는 흑인을 함부로 대하는 백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고 또 흑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아프리카 땅의 법도 이해할 수 없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아무리 친해지려고 노력해도 흑인 스스로가 백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다. 한나는 처음부터 이 소설이 끝날때까지 여행자다. 무엇을 욕망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책을 펼치면, 플라톤의 경구가 가장 먼저 보이는 데 그 경구 덕에 언제나 항해하는 한나를 상상하게 된다.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죽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이다."

-플라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나라는 인물이 좋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인물. 아프리카에 있지는 않지만 그게 실제 우리의 모습이기에. 한나는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말했던 '꼬질꼬질한 천사'라는 말을 기억한다. 한나는 늘 조언을 구하려고 한다. 한나가 조언을 구하는 대상들은 한나에게 자신의 입장을 얘기할 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결국 스스로에게 갇혀 있고 그것을 상대에게 발화한다. 한나는 그것을 알고 있고, 아프리카 땅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이를테면, 백인 남편을 칼로 찍어 죽인 흑인 여자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또 그 여자의 오빠와 사랑에 빠지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에선 등장인물들이 너무 쉽게 죽고, 아프리카 땅에 자리 잡은 백인들은 이기적이며 또 악하며, 살기 위해선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입장을 냉정하게 펼치고 있다. 한나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쓴다.

"이 불가해한 가난의 한가운데서 나는 풍요의 섬들을 볼 수 있다. 존재할 수 없었을 행복, 살아남을 수 없었을 온기. 이것을 통해 온갖 부와 안락에 파묻혀 사는 백인들의 또 다른 종류의 가난을 나는 볼 수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보았다. 경험한 것을 정확히 옮겨 적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흑인들과 그들의 삶의 현실을 제대로 발견한 느낌이었다. 지금까지의 시각은 왜곡된 것이었다.

  스웨덴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자란 그녀로서는 어쩌면 흑인들과의 공통점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을지도 몰랐다. -454p

  한나의 일기는 오랫동안 아프리카 호텔의 마룻바닥에 감춰져 있다가 2002년 한 청년에 의해 발견된다. 호텔은 이미 쇠락한지 오래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청년은 한나의 일기를 전혀 읽기 못한다. 독해되지 못하는 한나의 일기가 2002년의 아프리카 청년에게 가 닿은 까닭은 무엇일까?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대부분 지역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자력적인 기업도 없고 백인들에게 자원을 빼앗긴다. 어쩌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한나의 생각이 이러한 현실에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가난해도 그들만의 삶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도에서 홈스테이를 했을 때 불편하고 피곤했던 기억이 대부분이었지만, 아침의 인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대여섯 살 쯤 된 그 집 아이가 아침부터 병뚜껑 같은 것을 갖고 놀았다. 집 앞에 더러운 도랑이 흘렀는데, 그곳에 병뚜껑을 흘려보내기도 하고 잡기도 하고 무엇이 재밌는지 까르르 웃으며 자신만의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삶이 늘 지옥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면 불행할 것이라는 게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편견일지도 모른다. 가난과 편견에 시달리더라도 우리 모두에겐 일상적인 삶이 있다. 매일 흘러가는 삶 속엔 슬픔도 있지만 기쁨도 있고 세상 더러운 일도 있지만 또 선물처럼 나타난 반짝이는 순간도 있고 그렇기에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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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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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의 리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 어떤 내용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싶을 땐 그 책이 재미있든 없든 다시 보고 판단해야지 생각만 하고 끝끝내 다시 보지 않는 게 나의 나쁜 습성이다. 어떻게 보면 스토리라인이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인데, <파묻힌 거인>에서의 상징성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고대 잉글랜드의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들을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들이 지나오는 길은 모두 안개로 뒤덮여 있고, 그 안개는 안개 속에 사는 사람들의 기억마저 모두 흐릿하게 만든다. 색슨족과 브리튼족은 각자의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는데, 브리튼족인 그들은 여정 길에 색슨족 기사와 소년을 만나 여러 가지 사건에 휩쓸린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들의 아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굳히며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상징을 떠나 비어트리스가 앞에 서고 액슬이 뒤에 가며 주고받는 말, '지금도 거기 있나요?', '지금도 여기 있어요.' 가 좋았다. 그들은 도깨비가 나타날지 모르는 대평원에서, 어떤 괴물이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깜깜한 동굴에서 서로를 확인한다.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느냐고. 둘 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더듬는 어떤 말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말들보다 지금도 그 자리에, 곁에 있느냐고 묻는 그 말이 마음을 울렸다. 

 

사랑했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면 그 사랑은 어떻게 되는 걸까? 물론 사랑에는 기쁨만 있지는 않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를 증오해야만 했던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미래판 설정으로 본다면 영화 <이터널선샤인>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터널선샤인>에서는 서로에 대한 기억이 없어도 사랑했던 흔적과 습관이 남아 사랑했던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니 어쩌면 삶은 '몇 번이라도 다시!' 살아볼 만 할지 모른다. 그런데 <파묻힌 거인>에서는 그 사랑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어쨌든 '헤어짐'이어야 했기에. 서로를 어떻게 사랑했든 삶의 유한성의 숙명을 타고난 인간인 이상 영원한 헤어짐을 피할 수 없다. 

 

"섬에 가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해요, 공주." 그가 말한다.

"그렇게 해요, 액슬. 이제 안개도 사라졌으니 할 이야기가 많을 거예요. 뱃사공은 아직 물속에 서 있어요."

"그래요, 공주. 이제 내가 가서 그와 화해할게요."

"그럼 잘 가요, 액슬."

"잘 가요, 내 하나의 진정한 사랑."

그가 물속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내게 말을 걸어올까? 그는 우리의 우정을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돌아섰을 때 그는 내 쪽을 보지 않고 다만 육지 쪽을, 작은 만에 지고 있는 석양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 역시 그의 눈을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 그는 내 곁을 지나 계속 물속을 헤치고 가며 뒤돌아보지 않는다. 바닷가에서 날 기다려요, 선생. 내가 조용히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 말이 들리지 않고 그는 계속 물속을 헤치며 간다. -475p

 

공유하지 못할 사랑했던 기억을 끌어안고 다시 땅으로 되돌아가 발붙이고 혼자 남은 여정을 계속하는 것. 온힘을 다해 안아주고 잘가라고 인사해 주는 것. 그 자체가 기억을 뛰어 넘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러니까 인간의 삶이라는 게, 관계라는 게 거머리처럼 들러 붙는 꼬마 악당들을 끝없이 물리쳐야 하는 진창일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도 결국 우리의 몫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작가는 현실적으로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덧, 색슨 족 전사인 위스턴이 자신을 쫓아다니며 목숨을 노리는 브레누스 경에 대해선 이런 말을 한다.

 

그 후 나는 그를 떠났고, 에드윈, 너도 알다시피 우리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모든 일이 일어났지. -328p

 

 아무 일도 없었지만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 색슨 족과 브리튼 족의 관계이면서 서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총을 겨누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색슨 족과 브리튼 족의 이야기는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IS와 서구 문명 사이 전쟁의 핵심을 담고 있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역시 가즈오 이시구로는 만만한 작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IS는 이라크전에서 미군에 맞서며 조직화됐다. 끔찍했던 학살의 기억-아무리 덮고 또 덮고 묻어보려 해도-은 사라지지 않고 더 큰 폭력을 낳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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