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나는 내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그 결과 건강이 무척이나 나빠졌고, 한동안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집을 비우기도 했다. 집을 떠나 있다가 돌아 온 어느 날, 전에는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친구를 우연히 알게되었다. 지난 해의 일이다.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 친구는 사람이 아닌 고양이라는 것. 나는 식구 중 누군가가 집안에 개나 고양이를 키우자고 한다면 반대하는 입장이다. 짐승은 밖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둘째로는 짐승을 집안에 들이는 것 자체를 별로로 생각하는 일인이다. 애완동물을 집안에서 키우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겁나 재수없다, 생각할 만한 그런 일인 말이다.

 

 

우선, 이 노래를 스트릭 랜드와 록시, 그리고 이 글을 행여 읽으시는 분들께 바칩니다.

 

 

 

사실 이 친구와 처음 조우했을 때 만해도 나는 시큰둥했다. 너의 자유를 만끽하라고 말이다. 강아지도 별로지만 고양이도 역시나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일 동안 반복해서 이친구와 조우하는 순간, 아 이 넘은 다른 길고양이와는 뭔가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했다. 나의 출현을 어떻게 포착했는지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이 넘도 어김없이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나의 착각일 것이다. 여하튼 어디에 있다가 또 어떻게 알고 나타나는 것일까. 그리고는 또 어디론가 소리 없이 사라진다. 언제 봤다고 서로 눈이 마주치면 쪼르르 옆으로 다가와서는 좌로 딩굴 우로 딩굴. 마치 내게, 어이-, 거기! 나 좀 봐주면 안되겠니? 하는 식 인거다.

 

하여, 그래? 내가 너 좀 봐주까? 하고는 시험삼이 손을 내밀어 머리부터 등허리를 쓰다듬어 봤다. 아, 근데 이 넘이 나의 손길을 즐기는거라! 해서 나는, 엇쭈~! 하고 뒹굴거리기 시작하는 이 넘의 배를 간지럽혔다. 허걱~ 자신의 배를 허락하다니! 쉬운 놈 아녀 이거?? 했더니 슬금 슬금 일어나 여유를 부리며 유유히 사라진다. 분명 어딘가에 이 넘의 아지트가 있을 것이다.

 

 

 

 

 

멀리서 서로 눈이 마주치면 이렇게 여유만만 내게로 다가온다 겁도 없이..

 

 

 

 

그리고는 내 앞에서 길게 쫘악~ 스트레칭을 한 번 해주신다

 

 

 

마지막으로 내 앞에 딱 버티고 앉아서 제대로 쉴드해 주신다. 살짝 보이는 슬리퍼는 너무 드러버서...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그 특유의 야옹~! 소리와 함께 늦은 밤에 나를 반겨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가만? 너 혹시 배가 고픈 거니?? 잠시만 기다려봐라 하고는 집에 들어가 고양이가 먹을 만한 것을 뒤져 가지고 나왔다. 아, 이 넘이 진찌 배가 고팠네? 참치 캔 하나를 다 먹어치운다. 나는 집에 들어와 인터넷으로 고양이 전용 식사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제공해주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길고양이들의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깨끗한 식수란다. 물이 필요한 고양이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오염된 물을 먹고는 병나기 일쑤라는 것이다. 해서 이름도 성도 모르는 친구의 전용 물그릇과 밥그릇을 준비했다. 그리고는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다. 그 이름은 뇨자 고양이, 록시!

 

그렇게 우리가 서로 잘 지내는 사이 동네에 소문이 나고 계절도 바뀌어 겨울이 온 것이다. 록시는 현관문 앞에 누군가로부터 박스 하나를 선물받기도 했다. 그 안에는 따듯한 담요도 한 장 놓여있었다. 내 친구에게 이토록 잘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게다가 이 친구의 먹을 거리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우유를 제공해주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 친구를 소리 없이 돌봐주는 이들이 하나 둘 씩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친구의 이름, 록시는 더욱 널리 알려졌다. 하긴, 이 친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 배 째시오~, 스타일인 것이다. 뻑하면 다가와 옆에 누워 뒹굴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표현했다. 사랑 받는 법을 아는 넘이다 확실히! 이곳에는 록시의 프라이버시를 생각해 뒹구는 모습은 생략한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살도 부쩍 올랐다. 추운 겨울도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들 덕분인지 잘 견뎌냈다. 포동포동 오른 살이 그 증거였다. 여유를 부릴 줄도 알았다. 성급하지 않은 성격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차분한 넘이다. 이런 넘은 생전 첨이다 싶은, 친화력 좋은 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부터인가 이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영 소식이 없다. 쪼르르 달려오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 다 지나고 있었다. 이 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갑자가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인 스트릭 랜드가 떠올랐다. 그 어느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스트릭 랜드의 사라짐. 뭣 하나 부족할 것이 없었던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가족도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해 당황해 했다. 소문은 무성했다. 심지어 은행의 여직원과 눈이 맞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렸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스트릭 랜트를 찾아 나서는 ‘나’라는 인물 조차도 이유를 모르기는 마친가지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는 처음에 내 자존심에 상처를 준 소설이었다. 스트릭 랜드의 행동을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 라는 인물이 파리에 가있는 그를 만난다. 소설 속의 '나'라는 인물은 관찰과 대화를 통해 점점 그를 이해해기 시작하지만 정작 중요한 독자인 나는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이 다 끝이 나서도 나는 여전히 그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좌절했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는 하지 못했지만 대신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나는 암기해버렸다. 이는 아마도 나의 반항심이었을 것이다.

 

 

 

They have always a nostalgia for a home they know not. They are strangers in their birth place, and the leafy lanes they have known from childhood or populous streets in which they have played, remain but a place of passage. Perhaps it is this sense of strangeness that sends men far and wide in the search for something permanent to which they may attach themselves. Perhaps the deep-rooted atavism urges the wanderer back to land which his ancestors left in the dim beginnings of history. Sometimes a man hit upon a place to which he mysteriously feels that he belongs. Here is the home he sought, and he will settle amid scenes that he has never seen before, among men he has never known, as though they were familiar to him from his birth. Here at last he finds rest.

                                                 

 

The Moon and Sixpence

 

 

 

 

그리고 내 입맛대로 우리말로 번역해보았다. 물론 엉터리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들도 잘 알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nostalgia)를 늘 가지고 있다. 그들은 태어난 곳에서 이방인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나뭇잎이 우거진 오솔길이나 그들이 뛰놀던 복작거리던 거리는 그저 스쳐가는 장소에 불과할 뿐이다. 어쩌면 그들이 애착을 가질 수 있는 영원한 그 무엇인가를 찾아 사람들을 아주 멀리 떠나도록 하는 것은 (태어난 곳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바로 그 낯선 느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뿌리 깊은 격세 유전이 방랑자에게 아주아주 먼 옛날 조상이 남기고 간 땅으로 돌아가도록 재촉 하는 것 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로 그 방랑자는 신비하게도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이라고 느끼는 곳에 우연히 들르게 된다. 이 곳이 그가 그토록 찾던 바로 그 고향이고, 그는 전에 와 본 적도 없는 곳에서, 전에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여장을 푼다. 그들이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 친숙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그는 마침내 그의 안식을 찾는다.

 

                                                                  달과 6펜스

 

 

 

 

스트릭 랜드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내 나이가 어린 학생으로 6펜스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거나 달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차라리 그보다 먼저 읽었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가 살인을 저지르던 그 심리를 더 이해하기 쉬웠는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위프랄라’ 라는 주문을 써서는 마법을 부리던 어린 주인공과 친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는 나이가 훨씬 더 들어 다시 읽었을 때는 스트릭 랜드라는 캐릭터를 어쩌면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어째거나 당시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처를 입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저 위에 있는 문장을 영문과 한글로 모두 기억하게 되었다.  

 

 

스트릭 랜드와는 전혀 이유가 달랐지만 어째든 소식을 하나 남기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 것은 서로 닮았다. 하여 수소문을 시작했다. 우선 식구들에게 록시의 소식을 탐문했다. 식구들도 록시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고 관심을 가져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친구를 알만한 동네 분들에게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이 친구에게 이성친구가 생겼다는 것이다. 한동안 이성 친구를 사귀느라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둘이 재미나게 지내더니 어느 날 그 둘이 함께 자취를 감추더라는 것이다. 식구들이 전해준 정보와 동네 분들의 정보가 일치하고 있었다.

 

아~, 이 소식을 들으니 좋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짝을 만났다 하니 좋은 일이고, 둘이서 딴 곳에 살림을 차렸다하니 서운하기도 했다. 그 곳이 어디인지 궁금할 정도로 말이다. 계절로 보아하니 소식을 남기지도 않고 이 친구가 떠난 것은 일 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어디서 잘 살고 있는 것이더냐? 록시, 나는 이제 스트릭 랜드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단다. 너도 잘 알다시피 이곳도 살기 좋은 곳인데 록시, 니네 부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면 안되겠니?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5-05-28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고양이는 아마 하늘나라로 가지 않았을까요?
요즘 도처에 고양이를 잡아다가 돈 벌이로 활용하는 넘들이 있다던데~--;

옛날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완전 초 긍정적인 마인드 배워갑니다~^^
`...그리하여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하는~...

차트랑 2015-05-28 15: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양철나무꾼님,
말씀을 들으니 뭐라고 답 글을 드려야할지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덕수리 오형제는 어디서 뭣하고 있나 모르겠네요
못된 짖 하는 넘들 잡아가지 않구요 ㅠ.ㅠ

날이 무덥습니다 건강에 늘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양철나무꾼님~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린이 2015-05-28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네 식당 뒷골목 쓰레기통위에 앉아있던 노란 고양이에게 퇴근시마다 눈인사를 건네곤 했는데,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되어도 보이질 않아서 행방이 궁금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곤 하는데요. 부디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근데 저 고양이 색깔 예쁘네요~ ㅎㅎ

차트랑 2015-05-28 15:4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린이님,
말씀해주신대로 저 역시도 어디에선가 부디 잘 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답례로 서재를 방문드렸는데
아직 게시하신 글이 없어 그냥 돌아왔습니다.
좋은 말씀으로 서재활동 해주시기를 바라며
찾아주신 고마움을 전해드립니다 그린이님

날이 덥습니다. 늘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알라딘의 메뉴 중, '새 로 나 올 책’을 우연히 클릭하게 되었다. 월별 혹은 분기별로 새로 출간 예정인 책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살펴본다. 관심을 가질 만한 예정 도서들이 적지 않다. 그 중 내 눈을 번쩍 하게하는 출간 예정작들이 레이다 망에 들어온다.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은 예정작에 기대감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은, 제목만 보고 책을 구입하던 과거의 순간들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 출간 이라고 해도 은근 기대감을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러 권의 책들 중 가장 인상적이고 구입할 확률 또한 가장 높은 몇 권의 책은 아래와 같다.    

 

 

 

 

1. 자성록(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부북스

 

 

 

명상록」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워낙 잘 알려진 책이므로 알라디너들이라면 수많은 분들께서 이미 읽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기대하고 싶은 이유는 기존의 「명상록 冥想錄」과는 달리 「자성록自省錄」이라는 약간의 다른 제목으로 출간되기 때문이다. 제목이 다르다고 내용이 바뀌는 것은 아닌데 ㅠ.ㅠ

 

명상록과 자성록, 이 두 용어가 주는 뉘앙스는 내게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좋은 느낌이기는 하지만 ‘명상록’이라는 말은 아우렐리우스가 우리에게 지우는 일종의 의무와도 같은 부담감이 살짝 든다. 그러나 ‘자성록’이라는 용어는 아우렐리우스가 일기의 형식을 빌려 쓴 그의 글을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생각하게 한다. 아,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랄까. 일종의 심리적 구속력을 벗어나는 느낌말이다. 훨씬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간발의 차이이겠지만, 어째 거나 나에겐 체감 온도가 적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 책 역시 낡아 새 책으로 바꾸어야겠다 싶은 때에 훨씬 더 마음에 드는 「자성록」이 출간된다니 사뭇 기대감이 크다.

 

 

 

 

 

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메타포로 읽기 ― 최상욱, 서광사

 

 

 

 

니체는 인연이 깊다면 깊고 아니라면 아닌 사람이다. 알고 지낸 시간을 기준하여 보면 깊은 인연이지만, 상대방의 속사정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로 따진다면 깊은 인연은 분명 아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도 수십 년을 알고 지낸 사이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과거 학생 때 니체의 전집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소득은 별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니체는 출간 예정의 제목처럼 메.타.포.로. 읽어주어야 하는 사상가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차라투스트라’의 절친인 독.수.리. 와 뱀. 만이라도 사전에 제대로 알고 읽었더라면, 하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안타까운 시절이 떠오른다. 이제 메타포와 함께 니체를 전반적으로 다시 읽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책이 출간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설렘으로 나의 심장은 더욱 박동한다. 그러니 덩달아 나의 허파에도 바람이 한껏 들어갈 수밖에.... 내심 가장 기대가 큰 책이다. 설레는 나의 기다림이 부디 헛되지 않기를....

 

 

 

 

3. 주자평전 ― 슈징난, 역사비평사

 

 

 

 

나는 평전을 어쩌면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해당 인물에 대해 호의적 관점이 평전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단점이라면 단점이랄 수 있다. 평전(評傳)이라는 말을 우리말 사전은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필자의 논평을 겸한 전기(傳記)’라 설명하고 있는 반면, 영어는 ‘a critical biography’라 적고 있다. 우리말은 서양보다 평전의 저술가에게 훨씬 더 관대한 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영어의 critical은 ‘비평의, 평론의, 비판적인, 정밀한, 혹평적인, 결정적인, 중대한’ 등의 다양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방대한 평전을 내 놓으려면 대상 인물을 연구하는 노고가 매우 클 것이다. 작가의 자존심은 둘째 치고라도 연구를 거듭할수록 작가는 인물이 가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호의적일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싶다. 궁금한 것은 출간 예정도서의 쪽수다. 특히 평전은 책의 쪽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읽어보고 싶지만 평전이 500쪽 이하라면 구입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평전으로서의 무게감을 현저하게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쉬움 속에 망설이다 결국 구입하지 않은 평전이 더러 있다. 이 경우 진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특히 평전은 쪽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환영하는 편이다. 이 책 역시 기대가 크다. 어째 거나 주희의 평전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다.

 

 

4. 이병도의 식민사관을 해부한다 ― 황순종, 만권당

 

 

 

 

사실 이런 제목의 책은 오래전에 이미 나왔어야 했다. 아니, 이병도와 동시대에 나왔어야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끈임 없는 주목을 받아왔어야 했고 현재도 미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늦어도 한참 늦어버린 듯 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한사군의 위치 비정과 단군 조선에 대한 역사 인식은 심각한 문제의 수준이다. 이병도는 한반도의 역사 왜곡을 주도했던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의 일원이었다. 일제 역사가들을 보좌하며 모국의 역사를 왜곡, 말살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일제 패망 후 이병도는 서울대학교의 사학자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문교부 장관에 이르기도 했다. 이병도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사의 왜곡에 적극적인 저서활동으로 그 제자들마저 식민사관으로 물들게 한 장본인이다. 결국 그는 죽어가던 병원의 침상에서 양심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현재도 서울대 출신의 사학자들이 의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공적인 장소에서 말했다. "서울대에서 한명기와 같은 인물이 나오다니!" 라고. 어쩌면 이 발언을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물론 이는 서울대 국사학 출신이며 현재는 명지대 교수인 한명기의 역사 인식에 대한 찬사였다. 서울대 국사학과에 대한 이러한 말이 나오는 것은 우리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가 개정될 때 마다 한국사 왜곡 문제가 불거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는 것은 외국의 학자들이다. 이병도의 영향을 받은 외국의 학자들이 한국사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박노자이다. 우리는 박노자의 정체를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아마도 그의 일제 식민사관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박노자는 "이병도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역사학자"라고 칭할 정도로 이병도에 경도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이병도의 한국사의 관점, 즉 일제 식민사관으로 자신의 한국사를 무장했다.박노자가 한겨레에 기고한 「민족 ‘신화’ 넘어 국경 없는 ‘계급연대’로 가자」라는 논평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개탄을 금할 길이 없으며 박노자의 한국사 왜곡의 절정을 보여주는 글이다. 더구나 그는 일제 식민 사관을 탑재하고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박노자의 한국사에 대한 무지함을 이병도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지만 말이다.

 

이렇게 한국사는 안밖으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이병도의 그림자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진 탓이다. 우리 역사의 이 불행한 그림자를 걷어내는데 과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출간 예정도서들 중 기대가 가장 큰 이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침내 5월의 독서 계획을 결정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별로 한 것도 없이 앞 다투어 꽃피는 4월을 흐지부지 흘려보냈다. 아깝다. 고민을 하느라 4월의 절반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애초의 계획과는 전혀 무관한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계획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5월의 독서 계획만큼 결정하기 힘든 때도 없지 싶다. 피로감을 느낄 정도이다. 어째거나 「동학1, 2」와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3권이다.

 

 

이 책들을 계획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얼마 전에 읽은 경전 7첩 반상」이다. 경전 7첩 반상」에는 동학의 경전이 등장한다. ‘동경대전’이 그것인데,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나는 ‘동경대전’에 너무나 무지했다. 사실은 그뿐만 아니라 동학과 그 운동에 너무나 무지했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경전 7첩 반상」을 기다리며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을 구입해서 읽고 있었다. 그리고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동학 1.2」와 함께 이 세권의 책을 5월의 독서 계획에 본격 영입시킨 것이다. 동학을 더 이상 외면하며 살아갈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동학1, 2」의 리뷰를 검색해보았다. 상대적으로 리뷰가 적거나 아예 없다. 동학 1에는 리뷰가 하나, 동학2에는 하나의 리뷰도 찾아 볼 수 없다. 동학 1에서 한 분의 알라디너가 쓴 리뷰가 인상적이다. 그분의 말씀대로라면 나의 정예 멤버가 되기에 충분한 책이다.       

 

 

 

한권의 책은 이렇게 애초의 계획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당초의 계획은 이

런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독서계획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어서 나름의 계획을 세운다. 그렇다고 대단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독가도 아니요 속독가도 아니다. 한 달에 겨우 몇 권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손가락 두 세 개가 부담스러운 지경이니 말이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앞세우고 나 자신은 그 뒤로 숨고 싶지만 사실은 원래 읽는 속도가 느린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나의 생각과 몸이 굼뜨니 독서의 속도 또한 굼뜨더라는 말이다.

 

 

 

나에게 독서 계획이란 특별할 것이 전혀 없다. 그저 관심 분야의 관련 도서를 몇 권 선택하여 특정 범위의 책들을 차례로 읽어가는 정도이다. 대략 그 기간은 짧게는 1개월에서 길게는 수개월, 그 범주는 2-3개 정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계획을 거의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데 있다. 나름 기분 좋은 계획이 얼마 안가서 어그러지기 일쑤인 것이다. 이번에도 당초 계획은 ‘니체’의 저술을 읽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만 틀어지고 만 것이다.

 

 

 

학생 때 책을 읽어가며 생긴 버릇이 있는데, 하나는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버릇이고 다른 하나는 읽을 도서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밑줄을 그으며 때로는 지저분하게 나의 생각도 여백에 적어가면서 말이다. 책이 얼마나 지저분해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름의 독서 계획인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읽을거리가 덤으로 발생 수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수첩에 제목과 저자를 적어 가지고 다녔다. 서점에 들러 개인용 전화번호부 정도의 크기인 이 수첩을 꺼내어 책을 찾곤 했다.

 

 

 

책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버릇은 책이 지저분해지는 커다란 단점이 있다. 하여 다른 누군가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마땅치 않다. 그럼에도 지금껏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이유는 반복하여 읽을 경우를 대비한 나름의 방편인 것이다. 같은 책을 다시 읽게 될 경우 그 부분을 중심으로 읽을 수 있다. 시간을 훨씬 더 절약할 수가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다. 물론 밑줄 친 부분만 읽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밑줄과 더불어 그 주변을 좀 더 읽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년마다 책장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첫째 이유는 공간의 부족이고, 둘째로는 정예 부대를 구축하는 나름의 목표이다. 밑줄을 그었으나 수년간 손을 대지 않은 책들은 정리의 대상이 된다. 최근 이러한 정리의 시간이 있었다. 책을 내다 버리고나서 후회를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소유’가 그랬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내다버린 것은 스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다. 돌아가시고 나니 매체에서는 난리도 아니다. 그때 나는 한탄했다. 아, 나의 이 지지리도 짧은 안목이여....

 

 

 

여하튼 정리에 들어가면 우선대상이 되는 책들을 일단 빼놓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거리낌이 없다. 나름 용감해지는 것이다. 물론 아깝다고 생각하는 책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시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책들이 우선대상이다. 그리고 정리의 대상들을 며칠 동안 관찰한다. 사실은 최종 결정을 내리느라 고민을 하는 것이다. 과연 지금 내다 버려도 나중에 후회를 하지 않을까... 이 며칠의 정리기간에는 다른 책을 거의 읽지 못한다. 정리 대상들을 재점검하는데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쌓아 놓은 100여권을 서로 의자 삼아 이리저리 걸터앉는다. 그리곤 한권씩 책장을 넘겨가며 점검한다. 이 순간 나는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여러 차례 손을 부르르 떨기도 한다. 이번 달에는 독서의 계획과 맞물려 더더욱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하나 둘씩 마음의 정리가 된다. 책을 정리할 때의 심정은 비장하다. 가장 큰 힘이 되어주는 것은 ‘정예 멤버 500’이라는 나름의 목표이다. 기존의 책들을 하나 둘씩 정리하고 정예 멤버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정리하며 책장에서 끌어내린 책 중 몇 권이 ‘니체’의 저술들이다. 니체는 정예 멤버로 나름의 가치부여를 했지만 책이 낡았다. 낡은 책도 정리의 대상이다. 물론 정예 멤버의 자격을 부여한 헌책은 새로운 선수로 교체한다. 헌책은 정리의 대상자와 함께 분리수거의 대상이다. 문제는 정예 멤버를 새 책으로 교체하면서 반드시 다시 읽는다는 것이 나름의 원칙이다. 하여 이번에 재도전의 기회로 삼으려 했고 니체는 이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헤세의 문장론」을 읽던 중 헤세도 책을 필터링했다는 내용과 마주했다. 헤세의 분야별 정예 멤버 선별방식에 해당하는 소제목은 <책 정리하기>에 잘 드러나 있다. 매우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최근에 나는 또 다른 책을 검사해야 했다. ...나는 서가 앞에 서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책의 열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곰곰 생각에 잠겼다. “이 책이 필요한가? 이 책을 사랑하는가? 이 책을 꼭 다시 읽을 것인가? 그것을 분실하면 정말 마음이 아플 것인가? ....

 

 

 

철학자들이 다가왔다. 마우트너의 사전을 자니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아니다. 언젠가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을 다시 읽을 날이 오겠는가? 아, 아니다. 하지만 칸트는? 나는 망설였다.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칸트는 그냥 놓아두기로 했다. 니체는? 서간과 함께 꼭 필요하다. ...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벨기에와 영국의 회화를 다룬 바자리의 깔끔한 득별작품, 예술가 한 모음집, 이런 것은 없어도 그리 마음이 아프지 않다. 그런 것은 치워버리자! ....헤르더는 중요하게 대우해야 할 사람이다. 발자크는 어떨지 몰라 그냥 놓아두었다. 아나톨 프랑스는 생각해봐야 할 사안이었다. ....전쟁문학은 누가 수집하겠는가? 몇 백 파운드에 책을 싸게 넘겨줄 수 있다. 1915년과 1916년도에 무슨 질 좋은 종이가 있었겠는가!

 

 

괴테와 훨더린,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책은 남겨둔다. 뫼리케는 미소 짓고 있고, 아르님은 대담하게 빛을 발한다. 아이슬란드의 전설은 온갖 걱정을 견디고 살아남는다. ..... 그런 책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알단 살아남게 된다. 159-163 쪽

 

 

 

위 글은 헤세가 1919년에 쓴 글이다. 헤세는 장서가였다. 하여 서가 정리가 필요 했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장서가도 아니요 다독가도 아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필터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헤세와 다르게도 나만의 정예 멤버를 갖춘다는 것일 뿐이다. 헤세만큼 책을 보는 안목을 가진 독자도 아니요. 각각의 책에 가치를 부여할만한 능력자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내 맘대로 일 뿐이다. 그러나 책을 선별해내는 순간 찾아오는 벌벌 떨리는 수전증도 나름 기분이 그럴 듯 하고, 정말 마음에 꼭 드는 책으로 책장을 채운다는 것이 그저 좋을 뿐이다.

 

 

 

 

헤세가 그의 서간까지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니체의 저술들. 학생때 그의 저술들을 의미도 모르면서 전집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그후 여러 차례의 정리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니체의 저술들은 늘 목숨을 보전해왔다. 그의 사고는 거의 충격적으로 신선하게 다가오지만 난이도는 나를 진짜 충격에 빠트렸다. 당시 니체의 저술을 독해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물론 그 신선한 충격을 감당할 능력이 나에겐 여전히 없다. 그럼에도 다시 니체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싶은 충동을 늘 느낀다. 아마도 자존심, 나의 알량한 자존심 덕분일 것이다. 때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책들을 종종 만난 적이 있었고 포기의 수준이 아니면 반드시 재도전을 해왔다. 니체, 반가운 재도전의 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저자이다.

 

 

 

이렇게 니체를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었건만, 얼마 전 무료로 받아본 한 권의 책이 나를 한동안 부끄럽게 했고 고민하게 했다. 「경전 7첩 반상」이 소개하고 있는 낯선 경전 중에는 도마복음도 들어있었다. 도마복음을 읽어볼 기회가 없었던 것에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책이 도착하기 전에 도마복음을 찾아 읽는 것으로 족했다. 나름 도마복음에 대한 예의를 갖춘 행위이다. 그러나 동경대전은 찔러도 아주 깊이 나의 양심을 찔러왔다. 견뎌낼 재간이 없다.

 

결국 수운과 해월, 두 분과 동학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분들께 항복하고 말았다. 이번 일을 통해 다시한 번 독서의 계획을 세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절감한다. 그러나 한동안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만한 보람도 있는 것이라 믿으며 계획한 세권의 책과 더불어 나의 푸르디푸른 5월을 보내게 될 것이다. 헤세의 말처럼 중요하게 대우해야 할 「동학」을 읽으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발견들과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실재의 상에 대해서 느끼는 흥분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점차 더해가는 임박감을 느끼면서 나 자신이 연구해온 여러 영역들을 중심으로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물론 그 연구의 상세한 내용은 전문적인 것이지만, 나는 복잡한 수학공식 없이도 폭넓은 개념들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내 시도가 성공을 거두기를 바랍니다. 2001년 5월 2일 케임브리지에서, 스티븐 호킹

                       「호두껍질 속의 우주」

 

 

 

자신이 가진 지식을 누군가에게 전달한다거나 이해시키는 일을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매우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이고 상대방의 지식이 그 분야에 전무하다시피 하다면 더더욱 말할 나위가 없다.

 한 때, 매우 실력이 있는, 최상위 대학 출신의 새로운 과탐선생이 왔다. 학생들은 유능한 선생의 가르침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분을 능력자라고 자랑도 했다. 그런데 수업을 한동안 받던 학생들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소통이 잘 되는 학생을 불러 상황파악에 나섰다. 다수의 학생들이 수업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선생님이 너무 어렵게 가르쳐요, 였다.

 

하여 과학담당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은 학생들이 수업의 이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잘 몰랐다, 고 했다. 수업 시간에 대답들을 아주 잘 하길래 잘 알아듣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며 난이도를 낮추어 수업을 하겠노라 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응은 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이런~ 하고는 다시 담당을 다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진짜 놀란 사람은 과학 담당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저만치 마주오던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 둘 다 깜짝 놀란 꼴이었다. 아 이거, 누가 놀라워해야하는 것인지. 하여 어찌 그대가 놀라운 일이냐고 물었다. 과학담당의 말은, 이보다 어떻게 더 수준을 낮추어 가르쳐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였다. 자신은 난이도를 최대한, 최대한으로 낮추어 가르치고 있는 중이라며 말이다. 아 이거, 참으로, 참으로 난감했다.

 

고등학교의 과학은 첨단 물리학에 비하면 새 발의 피, 라고나 할까, 아니면 새 발의 피의 피? 어째 거나 그 첨단 물리학을 고등학생들 보다 못한 나와 같은 대중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알리고 싶어 한 이가 있었으니, 정말 야무져도 진짜 야무진 꿈을 꾼 냥반, 스티븐 호킹이 바로 그다.

 

물리학과 수학계에는 수많은 학자들이 있고, 그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즐비할 것이다. 그 중에는 아인시타인보다 더 축적된 지식을 가졌고 능력이 더 뛰어난 인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대중들의 무관심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학자들의 무관심은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중들의 수준에 맞게 내용을 이해시킬 수 있다거나,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그럴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서로에게는 없다는 것이 더 타당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첨단 물리학을 대중들에게 직접 전달하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무모한 발상일 수도 있다. 그런 무모함을 알면서도 시도한 냥반이 바로 이 냥반인 것이다. 그는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대중들에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란 말인가? 그것은 학자의 태도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논어, 헌문, 41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자로숙어석문(子路宿於石門) 자로가 석문이라 지방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신문왈(晨門曰) 해자(奚自)? 신문이 묻기를, 어디에서 오는 길이오?

자로왈(子路曰) 자공씨(自孔氏) 자로가 답하기를, 공선생님 댁에서 오는 길이오, 하자

왈(曰) 시지기불가이위지자여(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 문지기가 말하기를, 안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걸 하는 사람 말이오?

 

石門(석문): 노나라의 지명으로 남쪽 외성문(外城門)이 있는 곳

 

현토 번역에는 ‘(신문晨門이라는 사람은) 현자로서 관문을 지키는 포관(抱關) 직업에 은둔한 자인 듯하다’ 라고 설명을 덧 붙이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주희의 짓일 것이다. 그런데 주를 읽는 사람으로서는, 문지기의 일을 직업으로 하는 은둔자가 있단 말인지... 하는 의문이 든다. 여하튼 당시의 은.둔.자.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객관적으로도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집주에서 호씨(胡氏)는 덧붙이기를, '신문(晨門)은 세상의 불가능한 일을 알고 하지 않는 자이다. 이 말로써 공자를 조롱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천하를 봄에는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라고 했다.

 

어째 거나 이 대목은 공자의 인물됨을 잘 알려주는 부분 중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올바른 일이라면 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사람,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중을 향한 호킹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지극히 사적인 일이지만 나는 과학자들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대중들이 과학 혁명의 수혜를 입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미지는 내게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물리학이 과거 인류에게 어떻게 기여해 왔던가. 중성자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채드윅이 원자의 질량문제를 해결해주자 페르미는 중성자와 양성자를 충돌시켜 방사성 원소를 개발해내고 이 공로로 또한 노벨상을 받는다. 이어 오토 한과 그 제자들은 아인시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원리(그 유명한 E=MC제곱)이용,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창안해 낸다. 오토 한 역시 이 공로로 노벨상을 받는다.

 

핵폭탄 제조의 가능성을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과학자 질라드라고 한다. 질라드는 오토 한과 그의 제자들이 히틀러와 영합하면 유럽은 독일의 지배하에 놓일 것이라 생각했다. 오토 한은 독일의 과학자였던 것이다. 질라드의 설득으로 아인시타인은 루스벨트에서 핵무기의 제조를 독일보다 먼저 해내야 할 것이라는 서한을 보낸다. 1939년 가을의 일이다. 하여 미국은 맨하탄 계획에 돌입한다. 맨하탄에 세계의 가장 유능한 과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질라드는 물론이고 페르미, 베테, 프랑크, 텔러, 보어 부자, 맥밀런, 파인만등 무려 4,500명의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이 총 집결, 지휘 총책임은 오펜하이머였다. 그렇지 않은 과학자들도 있었지만 줄줄이 노벨상 출신들이다. 물론 이 결과물을 일본에 두 번 사용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어째 거나 그 덕분에 우리는 물론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했다.

 

논점은 첨단 물리, 수학자들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엄청난 부작용을 가져 오는 것도 사실이라는 점이다. 살상용 무기는 적을 대상으로 사용할 수도 있지만 우리 자신에게 사용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 것이다. 당시 맨하탄 계획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학계의 최전선에 있던 인물들이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능력자들이었다. 일부 학자는 이러한 위험성과 반윤리적 도덕성에 괴로워했다. 맨하탄 계획의 총 책임지 오펜하이머는 물론이고 핵 폭탄을 제조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아인시탄도 끝내는 땅을 치며 후회했다. 

 

독일의 화학자 하버는 질소비료를 개발하여 농업생산량에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강력한 살상 무기인 염소가스를 개발, 사용함으로서 그야말로 셀 수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키는데 앞장섰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하버의 피는 유태계였다는 점이고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사실은 하버 스스로, 자.발.적.으로 독가스 개발에 나섰다는 점이다. 하버 덕분에 독일, 프랑스, 영국은 독가스를 만들어 서로에게 사용한 결과 10만여 이상의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또 다른 최악 중 최악은 그런 하버에게 노벨상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버에게 중요한 것은 윤리와 휴머니즘이 아니었다. 자신의 재능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던 부인은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는 그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시대의 첨단 과학은 늘 명암이 존재한다. 과학계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양 극단의 혁명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 첨단 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애증이 교차하는 첨단 과학계로 대중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사람이 스티븐 호킹이다. 대중은 비록 과학의 최전선을 직접 경험하지 못할지라도 과학의 방향과 그 목적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호킹은 자신의 연구 분야가 매우 전문적인 것으로 제대로 이해가기 위해서는 수학공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들이 첨단 물리학의 수학 공식을 적용시켜 해당분야를 접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폭넓은 개념’에 있다. 자신은 대중들이 첨단 물리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접근 이해를 소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동양 고문에 등장하는 한자들을 죄다 익혀서 직접 읽어가며 유불도의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틴어나 영어를 줄줄이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서구의 사상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비록 우리가 원서를 직접 읽을 수는 없지만 중간 역할을 해주는 매체를 통해 얼마든지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듯이, 호킹 자신은 그런 매체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불구하고 하려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이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한 때문이라고 본다. 호킹은 「시간의 역사」를 출간하고 무려 4년 동안이나 Sunday Times 베스트 목록에 올랐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고무된 듯하다.

 

(시간의 역사가) 읽기 그다지 쉽지 않은 과학서라는 점에서 무척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시간의 역사보다 더 읽기 쉬운 다른 종류의 책을 쓸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두껍질 속의 우주

 

연구에 바빠 책을 쓸 시간이 허락되지 않음을 고백하면서도 그는 다시 「호두껍질 속의 우주」를 대중들 앞에 내 놓았다. 호킹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우리(대중)가 비록 달걀을 직접 낳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달걀이 싱싱한 것인지 아니면 상한 것인지 판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도로 이해해도 좋다고 본다.

 

지구상의 가장 획기적인 변화 혹은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는 과학이다. 흔히 말하는 패러다임의 혁명은 늘 과학에서 시작했다.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사람이 바로 토마스 쿤이다. 그는 패러다임이라는 기존의 용어를 일반화된 용어로 정착시킨 장본인으로 자신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를 현대인들사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저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쿤은 과학과 철학의 만남을 대중에게 그야말로 인식시키려 한다.  그는 과학적 본질의 왜곡을 염려하면서 과학철학을 탄생시켰다. 쿤은 ‘대화하는 공동체의 합의’라는 과정을 통해 대중들이 과학 혁명을 이해해주기를 바랐으며 사유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쿤에게 과학이란 단지 객관적인 지식의 탐구가 아닌, 사회가 공히 인정하는 합의, 즉 패러다임을 이끄는 활동이다. 과학이 절대로 대중과 분리될 수 없는 이유이다.

 

첨단 과학이 대중과 함께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중이 가지는 보편적인 윤리의 요청과 학자들의 윤리적 요청이 질적으로 다를 때,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사유를 과학자들에게만 미루어서 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과학에 관한 사유를 하지 않을 때, 인류는 과학의 눈부신 편리함에 일방적으로 도취되어버리고 만다. 과학의 발달이 인류에게 그 얼마나 많은 혜택을 주었으며 동시에 그 얼마나 많은 비극을 불러왔던가. 과학은 늘 우리와 함께해왔고 과학이 배타적일 때 참극은 늘 준비되어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물리학의 천재들이 다루는 분야라 할지라도 과학적 윤리와 보편적 도덕의 요청은 대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을 대중과 분리시킬 수 없고 분리해서도 안된다. 하여 대중과 과학자들의 소통은 중요한 것이다. 물론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본적은 없지만 자신의 책이 널리 읽히고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호킹의 설레는 마음을 「호두껍질 속의 우주」에서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과학을 이해하고 사유해야 하는 이유이고 호킹이 바라는 바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힘든 일인 줄 알면서도 그는 하고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페이퍼에서 어쩌다가는 호킹 지수에 대한 언급을 한 후에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국내의 문화일보가 호킹 지수에 대한 기사를 낸 적이 있고, 해외에서는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the guardian)’이 호킹 지수와 나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캐나다에도 the Guardian 이라는 언론 매체가 있어 혼란 스러울 수 있다).

 

영국의 가디언紙는 땅콩 회항에 대해 아주 자세히 언급하면서 북한의 고려항공보다 못한 대한항공이라며 납득할 수 없다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더불어 ‘절대로 대한항공을 이용하지 않겠다!’ 고 선언한 일간지다. 이러한 가디언의 표현은 내게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런 가디언이 호킹 지수에 대한 간단한 문답식 기사를 2014.9.15일자로 남기고 있다. 기사의 제목은 「호킹 지수는 사람들이 독서를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이다.

 

가디언의 기사에 따르면, 호킹 지수(HI, Hawking Index)는 독자가 책을 구입하고 읽기를 중도에 포기하여 끝까지 읽지 않은 백분율이라고 한다. 아마존의 킨들(e-book 리더기)은 그 사용 독자가 중도에 읽기를 포기했는지 아니면 끝까지 읽었는지를 알려준다고 한다. 그 근거는 킨들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다. 더 이상의 하이라이트가 없는 쪽(page)은 바로 독자가 읽기를 포기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하여 독자들이 구입한 책의 완독 비율과 중도 포기 비율,그리고 어느 쪽(page)에서 중단했는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가디언은 이러한 방식의 통계가 합당한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① 인쇄하여 책을 읽는 독자 ② 하이라이트 기능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독자 ③ 초장에 맛깔나게 쓰다가는 쪽수를 더해갈 수록 점점 재미없게 쓰는 작가, 는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지적하

면서 이는 통계의 오류라고 말한다.

 

물론 e-book을 인쇄하여 읽는 독자의 비율과 하이라이트를 사용하지 않는 독자의 비율 모두 포함한 분석 자료의 결과라면 호킹 지수를 더욱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어째 거나 가디언이 소개하고 있는 호킹 지수의 예 또한 흥미롭다. 가디언에 따르면「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Fifty Shades of Grey)」의 호킹 지수는 25.9%라고 한다. 책을 읽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예로 든 것을 보면 많이 팔린 책이리라 짐작하며 최근 한글 번역본이 출간된 책으로 알고 있다. 

 

 

더불어 가디언이 악명 높은 호킹 지수를 자랑하는 도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미국의 작가 David Foster Wallace 의 「Infinite Jest」라는 작품이라고 한다. 이 책은 호킹 지수 6.4를 기록했다고 전한다. 도서 구입 후 끝까지 읽은 사람의 백분율이 6.4%라는 이야기다. 비율만으로도 놀라운 수치이다. 이 책은 1996년 작으로, 타임지가 선정한 '1923년부터 2005년까지의 영어 소설 100선'에 뽑혔으며 작가는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소설가로 평가받았다'는 인터넷 검색 결과가 있었다. 물론 나는 이 저자와 책을 오늘 처음 알게되었는데 작가를 검색해보니 뉴욕 태생의 대학의 교수였고 많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써있었다. 호킹 지수와 그의 인생 역정은 알고보면 장.난.이 아닌 책이다.  

 

 

 

가디언은 명성이 높은 책 일수록 지수가 더 낮다고 평하고 있다. 여기에 호킹의 「시간의 역사」가 등장한다. 지수는 6.6이라고 소개한다. 시간의 역사는 정말로 낮은 수치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의 역사보다 한 술 더 뜨는 책도 가디언은 소개한다. Thomas Piketty라는 냥반의 책「21세기 자본, 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은 그 지수가 무려 2.4라고 한다. 물론 나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700쪽 짜리 이 책을 독자들은 읽기 시작하여 평균 26쪽에서 포기했다는 기록이다(알리딘 검색을 해보니 국내 번역본은 820쪽이다). 정말 빨리도 포기했다. 하긴, 포기할거라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시간 절약, 에너지 절약일 수도 있다.

 

 

알라딘의 세일즈 포인트가 어떤 방식으로 매겨지는지 알수는 없지만 '21세기 자본'의 별점과 세일즈 포인트는 현재  (248) | 세일즈포인트 : 63,212 로 검색된다. 마이 리뷰는 모두 22편이다. 종합 별점이 5개인 것을 보니 정말 대단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유사한 세일즈 포인트를 가진 도서를 베스트 셀러 목록에서 재차 검색해보니 '대화의 신' 이었다.  대화의 신 별점과 세일즈 포인트는 현재 (58) | 세일즈포인트 : 62,700 이고 마이 리뷰는 총 53편이었다. 위의 두 책은 구입하지 않은 책이다. 물론 독자의 범주가 다른 두 책을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큰 의미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달리 비교할 만한 대상도 딱히 없었다 ㅠ.ㅠ

 

 

그런데 진짜 최악은 따로 있었다. 바로 힐러리 클린턴의 책이다. 가디언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And Hillary Clinton beats even Piketty. Her new book Hard Choices scores just 1.9%!  재밋는 표현은 위 두 문장 중 앞의 문장이다. 이 문장을 우리말로 옮길 때, ‘Hillary Clinton은 심지어 피게티 조차도 쩔쩔매게 한다.’ 라고 하면 어떨까... 긍정적인 쪽으로 피게티를 앞질렀더라면 평범한 표현이겠지만 부정적인 문맥에서 beat를 쓰다니, 기사를 읽다가 혼자서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마존 검색을 해보니 킨들 가격 14.29 달러였는데, 세계 최고의 여자, 힐러리 클린턴께서 정말로 이 책을 쓰기까지 어려워도 한참 어려운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호킹 지수는 물론 완전히 믿을 만한 지수는 아닌 듯하지만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모든 책의 지수를 다 알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사실인 듯하다.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읽는 책의 호킹 지수가 어느 정도일까를 안다면 남들이 구입하고는 완독하지 못한 책에 대한 나의 완독 동기부여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 싶다.   

 

호킹 지수와는 무관하게 구입해 놓고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을 독자들은 몇 권씩 있지 않을까 싶다. 읽고 싶은 마음에 구입한 책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들이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그야말로 쩔쩔매게 할 때 오는 현상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책들을 수권 가지고 있는데, 심리적으로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루 종일 책을 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다가 시간이 나도 딴 짖을 하다가는 이미 구입한 책을 미처 읽지 못한다. 책을 읽다 보면 이 책도 읽어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고, 그때 마다 알라딘의 장바구니에 쌓이는 책은 늘어만 간다. 읽는 속도가 장바구니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거다. 어쩌면 평생 이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럴 때마다 매번 욕심을 내려놓아야지 하는데,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

 

PS:

페이퍼의 제목에 약간은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처음에 페이퍼의 제목을 '사실은 내가 읽지 않은 책에 관한 페이퍼, 호킹지수(HI)' 라고  하고 싶었지만 너무 길어 축약했음을 밝혀둡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립간 2015-04-01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프라인 서점이 없어진 이후, 그리고 약간의 경제적 사정이 나아진 이후,

3권의 책을 사서 1권은 완독 (또는 반복 독서), 1권은 50%이상 독서, 1권은 거의 읽지 않거나 앞부분에서 포기 ; 를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저의 변명은 `서 있기 위해서는 발바닥의 땅 이상의 땅이 필요하다.`입니다.

그리고 글의 내용으로 보아 호킹 지수는 책을 읽은 비율로 정의해야 맞겠네요.

차트랑 2015-04-01 18:01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 안녕하세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목표를 빠른 시일내에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포기를 목표로 삼으신다는 부분는 쫌.. ㅠ.ㅠ
제 바램의 원뜻은 그런 것이 아닌거 아시지요 마립간님?)

저도 제 발바닥 이상의 땅이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랍니다^^
서재를 조만간 찾아뵙고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립간님, 늘 건강하세요~

마립간 2015-04-02 10:40   좋아요 0 | URL
구체적으로 읽은 책과 읽다가 만 책, 읽지 않은 책의 수를 비교 해보지 않았지만, 목표 이상으로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단지 제 글의 의미는 제 자신에게 구매한 책은 모두 완독해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를 풀어준 것입니다.

사 놓은 책을 다 읽고 구매를 하려하니, 오히려 독서가 줄어드는 현상을 느꼈습니다. 여자들은 입을 옷이 있어도 계절마다 옷을 구입한다고 하죠. 옷을 입게 될지는 그 다음 문제이고요. 저는 때가 되면 책을 구입합니다.^^ 제 자신에게 허락한 사치죠.

차트랑 2015-04-02 14:16   좋아요 0 | URL
계절마다 새로 옷을 구입하는 분들을 예로 들어주시니
이제서야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겠습니다^^

완독의 강박감, 어째거나 강박감은 일단 떨구어내는 것이 좋다고 보는데요
물론 가끔은 강박보다는 오기가 발동해서 읽기도 한답니다
물론 죽을 맛이기도하구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