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좋아하는 이 친구는 그 사이 시대의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시대는 흔히 저항 시인들이 이름을 드날리던 시절이었다. 이름도 거룩한 이육사님과 윤동주님도 저항 시인의 대표이지만, 나의 시대는 그 이름이 드높았던 김지하를 시작으로 신경림, 강은교, 황지우, 김남주, 박노해, 정호승, 최승호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인들이 '민중 문학' 이라는 장르에서 활약하며 '시대 정신'을 추구했던 것이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절친이 주저하듯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런데 말이다... 절친이 말끝을 흐리기길래, 말해보라이~ 했더니, 어느 선배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선배께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었다. 아....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 선배도 시를 쓰는 사람이었고, 조태일 시인처럼 늘 소주병을 나발불던 냥반이었다. 언제나 조마 조마한 불안감을 주던 선배.  얼굴은 시멘트 바닦에 긁혀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어쩌다 이리되었냐고 물으면 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제 밤에는 내 앞으로 전보대가 와락 쓰러지더니, 어제 밤에는 글쎄 아스팔트가 벌떡 일어서지 않겠니! 허 허 허!' 그랬다. 그 선배도 민주화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간 한 사람이었다. 시대가 그러했다는 얘기다. 이자리를 빌어 선배님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빈다. 부디 영면하소서...



수 많은 저항 시인 중에 시인 조태일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시인 조태일께서 글을 쓰며 시대정신을 발휘하고 있던 그 시대는 캠퍼스에 매케한 최루탄 냄내가 사라질 날이 없었고, 휴강은 밥먹듯이 이루어졌다. 과대표는 휴강 소식을 알리기 바빴다. 휴강한 학생들은 거리로 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뿌연 연기 속에서 직격을 당해 목숨을 잃는 열사가 있었다. 최루탄에 직격당한 학생은 머리에서 피를 흘르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쓰러진 그 학생과 그 학생을 부축하는 동료, 그 한 장의 사진은 너무나도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다. 최루탄으로 사람을 향해 직격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학생들에게 직격을 가했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 중에는 스스로의 몸에 인화물질을 끼얹고 분신을 한 끝에 사망하는 열사들도 있었다.


시대는 조태일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절실한 그 무엇을 갈망하게했다.
그 이름, 꽃보다 더 아름다운 그 이름, 민ㆍ주ㆍ화ㆍ!!!
민주화는 성은 민씨요 이름은 주화인, 사람의 이름 아니다. 그야말로 아름답고 눈물겨우며, 때로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마저 마다하지 않고 던진 민주화였던 것이다. 시인 조태일과 학생들은 독재를 향해 외쳤다, '자유를 자유케 하라!! 진리를 진리케 하라!!' 학생들은 자신들을 금남로의 정신으로 그렇게 무장했다. 특히 5월은 더욱 격렬했다.


당시 학생은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생각했다. 지식인은 비겁하지만 지성인은 '용기를 가진 자' 라고 생각했다. 용기있는 자 만이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처럼 비겁한 자는 결코 용기를 내지 못했다. 고로 행동도 하지 못했다. 행동하는 자의 용기는 너무나도 고결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절친이여, 고맙소, 그대를 사랑하오.........


수많은 저항 시인들의 처절한 시와 김대중이 남기 저서 '행동하는 양심으로'는 당시 학생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는 자신의 음흉한 야욕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홍위병들을 이용하고자 했던 모택동이 젊은 대학생들에게 뿌려댄 '모택동 어록'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택동은 올바른 양심을 자신에게서 도려낸 음모론자 였고 사기꾼이었다. 모택동이 가진 것은 오로지 탐욕, 그 자체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차원이 달랐다. 올바른 양심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것이다.


탐욕의 도구로 이용당했던 홍위병들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올바른 시대 정신을 장착하고,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여기며 그 앞을 막아서는 경찰들과 대치했다. 곤봉으로 얻어 터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학생들은 그토록 아름다운 민주화를 쟁취하기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경찰은 쫒고 학생들은 쫒기었다. 학생들은 서로 연대하여 시위하고 숨고 숨겨줬다. 이때 김아무개는 홍길똥 이라는 별명을 가진 행동주의자 였다. 당시 경찰에 쫒기던 김아무개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그리하여 홍길똥이라는 닉네임을 얻은 것이다. 정작 본인이 홍길똥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다가 썬그라스 사건으로 욕을 바가지로 잡순 그 냥반이 바로 그 시대의 홍길똥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그러다 잡히면 모진 고문을 받다가 죽기도 하고, 대다수는 군에 강제 입대를 해야했다.


시인 조태일도 민주화를 외쳤다.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학생들과 함께했다. 조태일 시인은 강연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시대정신'을 알리고 피력하는 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절친도 조태일 시인의 집 전화 번호를 알고있었다. 통화는 저녁, 강연을 해주실 수 있으시냐는 문의 전화였다. 
절친 말로는
이 쪽에서 여보세요~!  하면
전화를 받은 시인이 저 쪽에서
'네, 조~오 테일 입니돠!' 라고 했다고 한다.


이때 옆에서 대화에 끼어든 누군가가
 '아냐 쉑갸~  내가 전화하면 시인이 그러셔, 조~오털입니돠~!! 라고 쉑갸ㅡ!' 라며 강한 어조로 조오테일을 반박했다. 조태일 시인의 성씨가 '디'씨가 아니길 천만 다행이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는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조오 테일이든, 조오털이든 그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시인은 저녁이 되면 늘 쐬주에 밥을 말아먹고 계셨다는 점이 중요했다.
밥에 취한 것인지 소주에 취한 것인지 전화를 받는 시인의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인의 정신은 '술권하는 사회'의 주인공과는 달리 정신이 온전했다. 사회가 시인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지만 그는 온전한 정신으로 시대 정신이 살아있는 작품들을 남겼다. 또 그러나 시대를 염려하며 자신의 삶을 불태운 시인은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환갑을 넘기지도 못하고 불록하셨다. 이것은 시대의 환경탓인가 아니면 조오테일 자신의 무능력 탓인가.




그렇게 나의 절친은 민주화의 주역으로 성장했고 나는 군역으로 시간을 보냈다.
병장 만기 제대 후 3학년으로 복학을 하고 절친을 다시 만났다. (어떤 유명한 국회의원이 전국민에게 송출되는 어떤 자리에서 손가락 꼽으며 일병, 이병, 삼병, 병장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순간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선배들이 목숨을 희생해서 얻어낸 민주화 안에서 군 면제를 받은 냥반이었다. 계급의 순서도 틀렸고 삼병은 또 뭐냐 대체?)


어째거나
그 친구는 4학년, 동기 여자들은 죄다 졸업을 하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절친은 입대 문제로 군대를 왔다갔다하면서 세월을 보내다보니 졸업이 늦어졌던 것이다.
학교생활을 그렇게 같이 하게 되었다.
인연이 질기군~!
그 친구는 입버릇 처럼 내게 말했다, '아놔~ 사람들은 왜 다들 내가 죽은줄 알지??? '
그만큼 허약한 친구였던 것이다. 그런 친구가 소위 운동은 대차게 했다. 결국 리스트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을 숨겨달라고 했다. 명예의 전당, 즉 블랙리스에 올랐으니 수배의 전당에는 자동 올랐던 것이다. 잡히면 친구가 끝장이고, 숨겨줬다 들키면 둘다 끝장이다. 한하운의 시집과 정현종의 '시의 이해'를 죽어가던 절친에게 넘겨주던 순간에는 손이 벌벌 떨렸지만, 이번에는 두 손이 아니라 심장이 벌벌 떨렸다. 


절친은 시대 저항이라는 죄를 지었고 나는 은닉죄를 지을 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친이 아니던가.
절친을 숨겨주고 두문 불출, 몆날 며칠을 함께 지냈다.
삼양 라면의 주주들은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덕분에 둘다 삐쩍 골았다.


천만 다행히도 경찰은 나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막 제대하고 복학한 내가 너의 절친인지 경찰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라며 친구에게 허세를 부렸다.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던가...


그렇게 치열한 시대를 지나온 절친은 졸업을 하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다. 시는 여전히 쓰고 있었고, 고향의 어느 촌스럽고 허름한 도회지 건물 한 켠을 세얻어 영어를 가르치며 먹고 살고있다. 아, 글쓰는 것도 가르친다고 했다. 절친에게 나는, 글쓰는 것도 가르치고 배우냐? 기냥 자기 멋대로 쓰면 되는거지,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때는 내가 맞았고 지금은 내가 틀렸다ㅠ.



그의 젊은 시대는 시인에게 소주에 밥을 말아먹게 했고, 학생들에게는 민주라는 이름을 목놓아 부르게 했다. 학생들은 그들의 아름다운 청춘을 보다 더 아름다운 '민주화'라는 이름을 위해 썼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이는 아마도 나의 절친과 그 동료들이 대신 싸워줬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나는 비겁한 놈이었으니까.....


그도 시인이 되었고, 이제는 저항할 상대가 없어져서인지 자신과 어린 시절 이웃집 순이를 바라보는 시를 썼다. 그리고 생각한다. 시대가 시인과 학생들이 저항하게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그런 이 친구가 정말 마음에 든다. 허파가 허름한 절친이여, 버얼써 죽었어도 별 이상할게 없는, 나의 사랑하는 절친이여!!! 부디 나를 앞세우고 내 뒤를 띠라 오시게나!!!


이 페이퍼는 '죽어가는 친구에게 준 책'과 관련하여 ' 댓글을 달아주신 어느 분께 다음 시리즈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라고 댓글로 일종의 약속을 해놓고는 그 약속을 저버린 일을 떠올리며 쓴 글이다.

본인께서는 어쩌면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분과는 서로를 아는 바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댓글을 드렸으니 이참에 이행함을 알려드리고 싶다. 또 물론 그 분께서는 이 글을 읽지 못할 수도 있다. 별스러운 스토리는 아니지만 그 약속을 지키는 뜻으로 그 알라디너님께 별스럽지 않은 이 글을 드린다. 저는 늘 비겁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올바른 양심이 아주 조금은 남아있습니다. 


어느 날 공영 방송인 KBS가 공영 방송으로서의 가치를 잃었다는 판단을 내리자, 그날로 테레비를 내다 버리고 수신료 납부를 거부한 것을 보니 비겁한 제게도 약간의, 아주 작은, 정말 작은 약간의 올바른 양심이 남아 있는게 분명합니다. 하오니 행여 읽어주신다면 깊은 고마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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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탈영병이 진입한 지역으로 접근해 갈수록 나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몸은 떨리고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사람을 향해 화기를 쓴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중대에 무전이 타전되었다. '중대 들어라!! 신속히 부대 복귀한다, 반복한다. 중대, 중대 신속하게 부대 복귀하라!!' 

부대에 신속하게 복귀한 대원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했다. 중대장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다행히 병사는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헌병들에게 자수했으니 대원들은 이제 쉬어라, 고.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던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이 무장 출동 만으로도 악몽을 꾼 대원이 있었다. 그는 탈영한 병사를 쏘았고 그 병사가 자신의 총에 맞아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대원들은 웃어넘겼지만 내심 나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에는 내가 무지해서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원은 무장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PTSD를 겪었던 것이었다. 서울이 근무지인 대원들은 계엄을 발동하는 순간 자동 계엄군이 되게 되어있었다. 모든 경찰들은 계엄군의 지휘 통제하에 편입되고, 계엄군은 영장없이 즉결 처분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계엄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든 가리지 않고 즉결 처분된다. 모든 사법권과 행정권은 계엄군이 가진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모든 국민의 기본권은 박탈된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이던가!!

이런 상황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던 12.3 계엄 출동 군인들의 트라우마는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PTSD는 정도에 따라 사람에게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나의 고향에는 10년 동안 바깥 출입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 앓아 누워있던 한 사람이 있었다. 10 여 년이 흐른 뒤에야 조금씩 바깥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말없이 서로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나에게 엷고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지친 사람의 미소였고, 긴 어둠의 터널을 막 빠져나온 사람의  것이었다. 당시 어렸고 단순했던 나는 그가 그저 어떤 질병이 있는 줄로만 생각했다. 동네의 그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이 그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증상의 이름은 몰랐지만 그것이 커다란 마음의 병이라는 것을 동네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알고 보니 그는 베트남 전쟁의 참전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그토록 괴롭고 힘든 나날들을 보내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는  스스로 10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홀로 마음의 병마와 싸웠던 것이다. 국가도 무지했던지 그의 아픔을 외면했다.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과 형제들에게 이 얼마나 가슴 저미는 일이던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IBM 왓슨 연구소의 보고서 하나가 눈길을 끈다. 왓슨 연구소의 다음과 같은 데이터를 이미 접해본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한다. 왓슨 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라크, 아프칸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의 공식 사망자 수는 7,800명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01년~2021년까지 알카에다 해체, 탈레반 정권 축출을 목표로 미국과 나토가 저지른 전쟁이다. 이라크 전쟁은 2003년~2011년까지 미국이 벌인 사담 후세인 제거 전쟁이다)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본국으로 귀국한 군인들이 자살한 경우는 32,000 명이다. 이는 미국 왓슨 연구소의 2021년 공식 기준이다. 그 후로도 자살자는 늘어나 36,000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전쟁 당시 1명이 사망하면 귀국 후 4명의 인원이 사망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피해의 표면적인 수치에 불과한 것이다. 귀국 후 알콜 중독, 재정 파탄, 이혼 등의 문제를 감안한다면 전쟁 트라우마의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훨씬 더 커진다.


미국 정부가 재향군인들에게 지출하는 치료비로 추정해본다면,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가 그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재향군인들에게 치료비로 사용하는 금액은 년간 3.440억 달러, 한화 480조 원이다.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 재향군인들을 케어하는데 들어간 재정은 무려 1조 달러, 한화 1,400조 원 에 이른다. 이 금액은 2024년 대한민국의 명목 GDP의 절반을 훨씬 넘어서는 규모이다. 이른바 PTSD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것임을 고스란히 반증하는 것이다.



위의 자료들 만으로도 결코 전생이나 참사가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로 부족함이 없는 증거들이다. 전쟁이나 참사는 인간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은 아비규환, 지옥 그 자체이니 말이다. 이태원 참사를 바라보는 국민과 국가의 시각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어물쩡 넘어갈 일이 아니다. 철저한 조사와 그에 따른 법적인 조치를 반드시 해야 한다. 결코, 결단코 그처럼 꽃다운 생명을 잃은 일은 또다시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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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0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람보1에서 람보는 베트남전 퇴역군인으로 ptsd를 앓고 있었지만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지요.미국도 ptsd의 심각성을 인식한것은 이라크.아프간전쟁 이후라고 생각합니다.그런점에서 퇴역 군인들에게 무관심햏던 한국은 베트남 참전용사들의 ptsd는 일지도 못했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요.어떤 이유에서건 국가의 부름을받고 이역만리에서 전쟁의 고통을 겪은 참전 용사들을 지금이라도 제대로 대우햬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차트랑 2025-11-05 07:44   좋아요 0 | URL
참전 용사들의 고통이 너무나도 커다란 것임을 목격한 사람으로서
카스피님의 견해에 동감합니다. 과거에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고엽제 관련 후유증은 뚜렷한 물리적 현상을 드러내서인지 조명을 받았지만
말씀하신 PTSD는 국가도 잘 인지하지 못했던듯 합니다.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카스피님~

 


생각지도 못했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어느 알라디너의 댓글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 PTSD를 떠올리게 했다. 그것이 어쩌면 나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참사 현장에서 생사의 기로에 있었거나 불행하게도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에 비하면 나의 경험은 아주 사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알라디너의 댓글은 점포의 사장과 나의 경우를 되돌아 보게되었다. 유가족들과는 비교 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너무나도 사소한 개인적 경험을 무시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심각하지는 않지만 일종의 PTSD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갑자기 나의 머릿속은 온갖 경우의 생각들로 가득차오르기 시작했다. 현재 쓰고 있는 이 글이 무질서한 만큼이나 고요히 잠겨있던 사건들이 한꺼번에 그리고 무질서하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혼란 그 자체다.



이태원 참사의 현장에 있던 사업장의 사장은 한 달 간 점포의 문을 닫았다. 조의 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내 생각에 한 달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는 결국 사업장을 내놓고 다른 곳으로 갔다. 현장에 함께 있던 나도 일 주일을 넋놓고 지냈다. 비추어볼 때, 현장에서 함께 참사를 겪다가 살아난 사람들과 자녀 또는 형제 자매를 잃은 유가족들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쉽지 않다.



이태원 참사에서 생존 했던 어느 고등 학생은 43일 후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겨우 열 일곱 살의 나이였다. 그의 심경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당시 구조 활동을 했던 어느 소방관도 최근 같은 선택을 했다.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짐작컨대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장에 있던 수 많은 젊은 이들은 바람이 차가워지는 10월이 되면 그 날의 악몽이 되살아 난다. 물론 유가족들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유가족 PTSD 심리 상담 정부지원 현황은 다음과 같다.
22년 602건
23년 488건
24년 19건
25년은 아예 없다.


위와 같은 상황으로 짐작컨데, "정부의 부재였다"는 유가족들의 주장은 진실로 타당하다. 더욱 분통이 터지는 것은 분향소 설치에 정부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마련한 분향소에는 고인들의 이름 조차 없었다. 유가족들은 어렵게 분향소를 따로이 마련했다. 서울시는 그 분향소를 철거하라며 압박을 가했다. 서울시는 심지어 유가족들에게 2억원이라는 과태료 부과했다. 이는 2차 가해와 같은 잔인한, 결코 해서는 안될 짓이었다. 아니, 이건 미친 짓이다. 당시 정부는 책임을 서로 전가하고, 참사를 축소 은폐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는 전 국민들이 목격한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정부는 믿을 수 없는 정부였다. 있으나 마나 한, 무능력한 정부였다. 국민들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정부였던 것이다. 당시의 정부는 그렇다 치자. 서울 시장, 도대체 너의 정체는 무엇이더냐!! 유가족에게 어찌 그리도 잔인하게 굴었단 말이냐!! 너의 자식이 그런 변을 당했어도 그리했을 것이냐!!



12.3  계엄군과 관련한  PTSD 지원 현황은 아래와 같다.
12.3 계엄군으로 출동 했던 군인들 중 1,040명이 PTSD 치료를 받고 있다.
그 중 70명은 심각한 상황이며, 

그 중 3명은 비상 조치를 받고 있다.

계엄군 출동자의 가족도 정신적 충격으로 용인에 소재하고 있는 국가 정신 건강 상담 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는 정확하게 12.3 계엄 후, 국가에서 지원하고 있는 현황이다. 계엄군으로 출동했던 대원들은 물론 나의 남편 혹은 나의 자녀 또는 나의 아빠가 살상 무기를 들고 12.3 계엄군으로 출동했다는 사실이 본인들과 그 가족들을 크나큰 충격에 빠트렸던 것이다. 군대에 자식을 보낸 어느 엄마는 자신의 아들이 계엄군이 되어 시민들에게 총이라도 겨누게 되는 날에는 이를 어찌할 것이냐며 울먹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나는 누군가에게 말해주었다. 그는 12.3 계엄이 가져온 수 많은 PTSD 결과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답했다. 군필한 그도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군필자도 이러한데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 대개의 반응들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군 복무 시절, 나에게는 가벼운 충격의 순간이 있었다.
어느 날, 긴급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다. 평소와 다른 내용이 하나 있었다. 모두 무장을 하고 탄약통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실탄을 장전하라구?? 이 번에는 단순 출동이 아닌 무장출동 명령이 하달된 것이다. 모든 대원들은 순간,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이 뜻밖의 명령에 할 말을 잃은 대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놀란 침묵의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무 반장이 장교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상황입니까 중대장님!!'
중대장이 답했다, '무장한 탈영병이 우리 섹타에 진입했다. 그는 수류탄과 소총을 휴대했다. 조우하면 먼저 설득해야겠지만 만약 저항한다면 응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알았나 하사!!!'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제발.... 우리와 조우하지 않기를.... 내가 어떻게 그 병사에게 이토록 강력한 화기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무장을 한 채 신속히 차량에 올라 출동하는 대원들은 긴장한 채 그 누구도 한마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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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알라디너께서 페이퍼를 통해 이태원 참사 3주기를 애도함과 동시에 철저한 진상 규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평소 시대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던 나는 알고 보면 비겁하게도 그 순간을 잊고 싶어했다. 그 알라디너의 글은 그렇게 비겁해진 나의 정신을 강타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감사의 뜻과 공감의 뜻을 표하고자 댓글을 시도했으나 댓글 기능을 사용할 수 없는 서재였다. 


아쉬움과 함께 내 자신이 심히 부끄러웠다. 하여 댓글을 달지 못하고 예정에 없던 글을 쓰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조사와 더불어 책임자를 모조리 강력 처벌하는 것이 공정이고 민심이다!!!



이태원 참사가 있던 그 날, 그 시간에 나는 현장에 있었다. 본업의 업무량은 조절이 가능하므로 할로윈 행사가 있는 이틀 동안 지인의 점포에 나와 아르바를 했다. 지인과의 인간 관계 그리고 본업 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외딴 업무의 색다른 느낌, 그리고 젊음이 가득한 시공은 나를 매번 즐겁게 했다. 그 해는 년 2일 짜리 아르바를 시작한지 정확히 5년 째가 되는 해였다. 


그렇게 아르바를 하다가 점포의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젊은이들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누워있고, 구급 대원들은 그들의 목숨을 살리기위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순간, 날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그 상황!! 도저히 믿기 어려운 상황! 원인도 모른 채 나는 그들을 향해 제발 숨을 쉬어야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절망이 엄습해왔다.
점점 희망도 사라져갔다.
자신의 땅에서 그리고 머나 먼 이국 땅에서 그 얼마나 두렵고 또 두려웠으랴!!


그 날의 참사가 있고, 집안에 틀어밖혀 나는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사흘 째 되던 날 늦은 밤, 소주를 사서는 버스에 올랐다. 421번 버스는 강남역을 지나 이태원 역 해밀턴 호텔 앞에 정차 했다. 가족, 친지와 친구들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이태원 역을 가득 메웠다. 산 자가 차마 마주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전해왔다.


그들의 젊은 넋 앞에 술을 따르고 애도했다.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다. 집으로 가는 421번 막차가 반대 편에서 오고 있었지만 차마 나는 그 차에 오를 수 가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앞에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식을 앞세우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그 커다란 아픔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그 슬픔을 말이다.


조조의 세째 아들이었던 조식도 어린 여식을 앞세운 사람 중 하나 였다. 그래서 였던지 조식은 겨우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났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들은 아프다 못해 스스로 자신들의 수명도 힘께 앗아가는 것이다. 스스로의 생명마저 서서히 앗아가는 산 자의 그 아픔을 본인이 아니고서 과연 누가 알수 있으랴!  조식은 여식을 잃은 아픔을 다음과 같이 썼다.






                      行女哀辭  행려애사  
                                              ㅡ조식

 

             伊上帝之降命, 何修短之難裁
             이것이 정녕 하늘의 뜻이련가
             이토록 짧은 만남을 짐작이나 했더란 말인가

 
            感前哀之未闋, 復新殃之重來
            슬픔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큰 재앙으로 닥쳐오는구나


            方朝華而晩敷, 比晨露而先晞.
            무궁화는 이른 아침에 피어 늦은 저녁이면 지고
            새벽 이슬은 볕에 스르르 사라져 버린다

 
            天蓋高而無階, 懷此恨其誰訴
            하늘은 높고 오를 길은 따로이 없으니
           이 가슴의 한을 그 누구에게 하소연 하랴!


문심조룡은 弔(조)와 哀(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弔는 나이가 들어 돌아가신 분께 드리는 말이라고 쓰고 있다.  문심조룡이 哀에 대해서 말 하기를, '短折曰哀 단절왈애, 必施夭昏 필시요혼' 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젊어서 세상을 하직 한 사람에게 주는 말이 哀인데, 반드시 젊어 세상을 등진 사람에게 해준다, 라는 뜻이다. 시호법에 그렇게 규정이 되어있다는 설명을 덧붙인 문심조룡의 이 문구는 오늘 너무나도 나의 가슴을 시리고 저미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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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30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태원 참사를 직접 목격하셨다니 얼마나 놀라셨고 PTSD가 얼마나 심하실지 감히 전혀 오질 않네요.시간이 약이라지만 그런 큰 사건을 직접 목도하셨다면 아마 쉽게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으실 겁니다.그래도 시간의 흐름속에서 안 좋은 기억들은 흘려 보내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25-10-30 09:02   좋아요 0 | URL
제가 아르바를 하던 점포는 세계음식 거리인데 참사 현장과 연결되어있습니다.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점포의 사장은 한 달 가량 문을 닫더니
결국 점포를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가서 사업장을 새로 열었습니다.
함께 참사를 목격했는데 그도 역시 견디지 못하더군요. 그러나 유가족과 비할 수 없겠습니다.
유가족에 비하면 저와 점포 사장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부디 영면하시길.....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카스피님!



호시우행 2025-10-31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심조룡이란 도서를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차트랑 2025-10-31 15: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호시우행님,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문심조룡 13장은 弔와 哀에 관련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요.
이태원 참사와 관련하다고니 문심조룡이 평범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늘 평안하시고 건강하십시요 호시우행님.

 
[수입] Abba - Gold: Greatest Hits [180g 2LP]
아바 (Abba) 노래 / Polar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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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반을 가지고 있고 많은 시간 동안 애청해 왔지만, 사실 나는 감히 이 음반을 평가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페이퍼가 더 적절하겠으나 리뷰의 창을 빌어 대신한다)   


중학교 절친이 있었다. 교실 청소도 같이하고,
유리창도 함께 닦았다. 교실 바닦에 들기름도 함께 발라 걸레질을 해서는 마루를 빛나게 닦았다. 친구는 노래를 아주 좋아했다. 청소를 할 때면 그는 늘 노래를 불렀다. 나의 입장에서, 그는 모르는 노래가 없었다. 신곡이 나오면 언제 섭렵했는지 그 노래를 바로 부르고 다녔다. 그의 별명은 '노래 부르는 사나이' 였다. 피리를 부는 사나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는 국내 노래만 통달한 것이 아니었다. 외국 노래, 즉 팝송도 아주 잘 알았고, 잘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집에 방문하고서 나는 깜짝 놀랐다. '노래 부르는 사나이' 인 나의 친구는 카세트 뿐만 아니라, 그 귀하고도 귀한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축음기 만이 다가 아니었다. 어마 어마한 음반들을 죄다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나는 깜짝 놀라면서도 의문을 품었다. 친구는 말했다. 나이 차이가 있는 형님이 있는데, 도회지로 나가면서 죄다 물려주고 갔다는 것이다. 그 날, 날이 어두워지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그 신기한 턴 테이블을 돌리고 또 돌렸다. 나는 그 날 처음 보았던 턴 테이블을 잊지 못했다. 첫 눈에 그만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편이 녹록치 않은 관계로 가슴을 앓으며 시간이 흘렀다. 그때, 나는 말로만 듣던 상사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고등학교가 서로 갈리게 되었다. 친구는 나에게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내밀었다. 이별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준 카세트 테이프는 바로 'ABBA'였다. 그는 아바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게 놀랍도록 많은 아바의 정보를 말해줬다. 물론 지금은 모두 잊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가 해준 말 중에 아직도 기억에 한 조각이 남아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바가 그 얼마나 부자였던지 예금한 은행에가서 돈 모두 돌려주세요, 하면 그 순간에 그 은행이 파산한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은행에 가 본 적이 없던 나는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말이 진짜였는지는 알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상상이 불가한 일을 내게 말해주는 친구의 해박함에 나는 나의 친구가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





나는 사실 테이프 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친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고 했다. 온종일 턴 테이블을 돌리며 함께 즐기자는 얘기였다. 그렇게 나는 뻔질나게 친구의 집으로 가서 신세를 지곤 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카세트를 살 수 있었다. 영어 공부를 한다는 핑계를 대었다. 아버지께서는 정말로 그런 줄 아시고 큰 돈을 들여 장비를 사주셨다. 비로소 나는 친구가 이별의 선물로 준 카세트 테이프를 개봉할 수 있었다.

손 끝이 떨려왔다. 테이프를 감싸고 있는 얇은 비닐막을 벗겨내는 나의 호흡도 가빠졌다. 새로운 음반을 개봉할 때면, 나의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숨은 가빠진다. 그리고 테이프를 입구에 잘 넣고 버튼을 누른다. 드디어 나의 노래를 온전히 듣는 순간이다. 아바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난생 처음 서울에 오게되었다. 학교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다. 수업 중에  졸다가 교수님께 지적 받았다. 동료들은 모두 까르르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그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염원은 나에게 그 부끄러움마저 잊게 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중고점으로 가서는 그동안 몇 번이고 찾아가 잘 봐둔 놈을 집어 들었다. 아르바로 번 돈의 최초 용처는 턴 테이블이었다. 나의 가슴을 하염없이 사무치게 했던 바로 그 턴 테이블!
그리고 남는 돈으로는 중고 카메라를 샀다.
카메라 역시 나의 염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드디어 나도 턴 테이블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총만 있으면 뭣하나, 총알이 없는데!!  딱 이런 경우였다. 또 열심히 아르바를  했다. 그렇게 나의 음반들은 턴 테이블과 함께 돌고 또 돌아갔다.


나이가 들었다. 친구는 자신이 나에게 주었던 ABBA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나는 알라딘에 접속했다. 그리고 아바 LP를 검색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받았던 그 아바를 친구에게 되돌려 줬다. 알라딘의 이 기능, 마음에 든다. 여전히 턴 테이블을 쓰는 친구는 아바를 무척 반가워했다. 같은 음반을 가지고는 있지만 커버가 다르고, 년식이 다르다. 소장의 기쁨을 준다. 신 버전으로 리마스터링의 예술을 거친 새로운 년식의 음반은 친구의 얼굴을 환하게 했다. 나도 무척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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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0-2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학교비닥이 지금처럼시멘트가 아니라 나무여서 학생들이 왁스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시골이여서 들기름을 바르신 모양입니다.지금은 사라진 테이프로 음악을 들으셨다니 세월이 참 빨리 흐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차트랑 2025-10-30 06:29   좋아요 0 | URL
학교의 재정이 부실하다보니, 들기름은 각자 자기 집에서 가져오고, 광내는 천도 각자 준비했죠. 교실 유리창은 신문지로 닦았구요. 빈곤했지만 행복한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늘 아름답게 포장이 된다고들 하지만요...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답방하여 쓰신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카스피님, 편안한 하루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