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오쇼 라즈니쉬 지음, 이윤기 옮김 / 섬앤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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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는 독서량이지만 최근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독서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딜레마가 있다. 과연 독서는 개인의 인격을 수양시키고 인간적 덕목을 양성하여 그 독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가 바로 그 사적인 딜레마이다. 이는 실천의 문제와 직결되는 지행의 화두를 내게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생각한다.


책을 읽는 것은 과연 化를 이루어 사(私)적인 혁명(革命)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책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단순한 지식을 얻는데 필요한 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독서’라는 개념은 정신적 성장이라는 측면이 강한 성격을 가지는 용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책을 읽은 후의 어떤 모습은 매우 현학적인 어휘들을 구사하다 못해 그 현학적인 용어의 덩어리들을 상대방에게 던져주기 일쑤이다. 한마디의 말 안에 응집된 그 현학적인 용어들은 청자로 하여금 소통을 하는데 오히려 커다란 걸림돌이 되곤 한다. 좀 더 우스운 경우는 해독이 매우 어려운 용어의 덩어리들을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던져 곤경에 처하도록 하는 의도된 무기로 사용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자신은 수많은 양서들을 통해 어려운 용어들을 익히고 다졌으니 그리 알라는 식이다. 과연 독서는 소통의 의도된 장애물로도 사용될 수가 있구나 싶다.


심지어 학문을 무기로 사용한 예는 애써 예를 들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건들이 수없이 많지 않던가... 하여 때로는 독서와 깨달음의 관계가 너무 요원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혁명은 化를 통해서 이루어 낼 수 있다고 한다. 많은 독서와 연구는 과연 그 化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외적인 지식의 거리감

라즈니쉬는 지식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라즈니쉬는 반야심경의 강의를 통해 지식은 오히려 타자 혹은 자연과의 거리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라즈니쉬의 설명을 보완하는 예는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현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수상 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왓슨은 ‘이중나선’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하여 일약 과학계 고전을 집필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르는 인물이다. 이러한 수식어는 우리나라에서도 팽배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영국의 프랜시스 크릭과 모리스 윌킨스, 미국의 제임스 왓슨이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서 벌인 일련의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는데 이는 독자라면 망각해서는 안 될 인물이 그 영광스러운 수상의 배후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로잘린드 엘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이라는 이름의 과학자가 바로 그이다. 그녀는 결정체와 같은 미세한 구조물의 사진을 찍는데 X-ray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녀는 실제로 DNA의 분자의 구조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 사진은 DNA의 나선 구조를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가 DNA의 나선구조를 찍어내는데 성공한 촬영기법은 X-ray 회절법이라는 것으로 당시에 그 누구도 그러한 사진을 찍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이 X-ray 회절법을 연구하며 프랑스에서 3년 이라는 세월을 보냈고,  그 연구의 성과로 DNA의 나선구조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다른 프로젝트의 다른 연구를 하고 있던 모리스 윌킨스는 그러나 그녀의 독자적 성과물을 캠브리지 대학의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몰래 빼돌렸다. 프랭클린이 자신의 성과물을 발표하기도 전에 이 셋은 그녀의 연구 자료를 이용해 네이처지에 나선구조를 발표해버린다. 억울하게도 그녀의 논문 여러 개가 같은 호에 동시에 함께 실린다. 그 후 그녀는 다른 연구에 몰두하다가 난소암에 걸려 1958년 사망하게 된다.


이는 지식의 딜레마, 즉 외적인 지식이 진리와 어떻게 멀어질 수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매우 극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라즈니쉬는 지식과 진리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 말한다.

 지식은 자신의 밖, 즉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나무가 마치 꽃을 피워 내듯이 그렇게 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지식을 외부로부터 얻는다 하더라도 혁명을 이루어내는 깨달음과는 무관한 일이 될 수 있다. 지식의 양 만으로는 스스로를 화의 경지로 나아가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음의 무게를 내려놓다... 공(空)


불가에서 중생들에게 주는 가르침 중 하나는 마음을 비우라는 것이다. 아집과 번뇌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한다. 우리는 이 아집과 번뇌를 흔히 욕심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오온[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존재라고 한다. 오온이 인간 구성의 요소인 라는 것이다. 다섯 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현재의 ‘나’가 존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번뇌를 가지게 된다. 이는 욕심 때문이다. 하여 그 욕심을 내려놓으라는 뜻인 것이다.


 반야심경의 ‘공’은 언뜻 이해 할 듯도 하지만 대부분 이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데 머무르곤 하는 것 같다. 물론 내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식자가 아니더라도 불교의 가르침인 공(空)의 개념을 언뜻 이해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 그 개념만을 머리로 이해할 때의 경우이고, 딱 그 곳에서 그치기 때문에 절대로 어려워 보이지 않다. 한마디로 이성적으로 공을 바라볼 때 발생하는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이성의 작용은 인간으로서 매우 지고한 경지의 사유처럼 보인다. 플라톤은 오성(悟性)을 로고스라 했고, 칸트도 본능이나 감성적 욕망의 상대적 용어로 이론이성을 넘어선 실천이성을 주장했다. 어찌 보면 자율적인 의지를 결정하는 개념의 이성의 능력을 논지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불가의 깨달음으로 인한 ‘자유’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스승님과 라즈니쉬의 말씀...

 

하지만 서구의 실천적 측면을 좀 더 바라보면 나의 스승님께서 말씀해주신 방법론을 배제시키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스승님께서는 동서양의 접근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서양은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는 방법론을 고수해왔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분명히 성경의 한 구절이다. 현대의 역사를 결정지었던 과거 식민지 정책의 시대가 이를 잘 증명해준다. 그들은 구하는 일에 몰두했다. 얻으려는 욕망의 주체 가되어 세계 어느 한 곳을 그대로 내버려둔 곳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것의 결과는 정확하게 양분된다. 자신들의 이익 그리고 타자에 대한 철저한 파괴.


 생각해보면 서양의 철학은 철저히 그들의 현실과 괴리되어 온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라즈니쉬는 이쯤에서 말한다. ‘불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치렀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아마도 내 스승님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라는 라즈니쉬의 일갈일 것이다. 서구의 종교는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제 아무리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서양의 종교를 모르셔서 그리 말씀하시는 거에요’ 라고 말한다 한들, 역사는 이를 명백하게 증명해주고 있지 않던가... 과연 성경의 구절이 과거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누가 변호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반면 불교는 ‘비워라, 그리하면 채워질 것이다’라는 정 반대의 접근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셨다. 인간은 오온의 과정에서 번뇌를 자신의 내부에 축적시킨다. 욕망 혹은 욕심이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무던히도 괴롭힌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욕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에게 절실한 그 무엇을 얻고자 자신의 내부를 더욱 더 철저하게 채워 넣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것으로.... 그 욕망은 흔히 돈, 물질, 미움, 시기심 등에서 오는 것들이다. 이는 곧 질명과 마음의 상처 혹은 번뇌가 된다. 몸과 마음을 모두 나쁘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문제는 그 욕망으로 자신을 가득 채울 때 다른 그 무엇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욕망이라는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불가에서는 그 욕망을 비우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혁명은 바로 이 욕망을 내려놓아야만 발생 가능한 일이기에.... 마음을 비우는 깨달음은 바로 이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이미 가득 차있는 그릇에 깨달음이라는 것이 들어 설 자리가 없는 탓이다...


동과 서가 반대인 것은 많지만 사유의 방법론에서 조차 이토록 정 반대인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법이다. 물론 기독교와 유∙불교의 가르침은 사랑, 仁(사랑), 자비, 즉 사랑이 라는 공통된 테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표면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는 테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 테제를 해석하고 행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결과는 이미 인류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지 않던가...


 

라즈니쉬의 목소리를 들으니 무엇인가 잡히는 듯 하다. 그 심오한 뜻을 알아 들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있다는 느낌 일 뿐....물론 내 스스로도 이성에 집작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다보니 번뇌가 가득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 스승님의 말씀대로 지혜는 두드려서 얻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수많은 지식의 량으로 자신을 채운 다 한들 그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다. 본질적인 혁명으로 가기란 요원한 것이다. 혁명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발원하여 그 오리진이 자신 스스로의 내부여야 한다. 그것을 혁명(革命)이라고도 하고 화(化)라고도 한다. 화를 이루어야만 혁명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책을 읽어 수많은 정보를 가졌다 한들 현학적인 면모를 드러내기에 급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의 혁명을 일궈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자를 공격하고 제압하는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기지 않고 타자를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밖에 없다. 독서는 내게 이러한 지식의 딜레마를 던져주었던 것이다. 아무리 읽고 말해주고 듣는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스스로의 작용이 일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깨달음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마음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스스로에게 있다. 깨달음은 절대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한 자...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은 바로 자신 뿐이다.  그러나 깨달은 자... 타자의 존귀함을 안다. 자신 못지않은 타자를 인정 할 줄 안다. 타자가 있어 자신이 있고 타자가 있어 내가 살아 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저마다 보살이 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 보살은 절대로 혼자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타자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나서는 자이다...과연 세상은 지금과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중용에서도 化를 언급한 장구가 있다. 다음은 중용의 23장에 나오는 化의 뜻이다.

 

유천하지성 위능화(唯天下至誠 爲能化)


우리는 흔히 변화(變化)라는 말을 사용한다. 변(變)도 化도 분명 달라진 모습니다. 그러나 변은 물리적인 형태의 변형을 말한다. 그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化는 화학적인 변화를 뜻하는 말로서 본질적인 개인의 혁명을 뜻하는 말과도 같다. 그런데 중용은 유천하지성 위능화(唯天下至誠 爲能化)  라고 했다. 오로지 지성이라야만 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지성(至誠)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지극한 정성을 뜻한다. 중용에서도 마음의 중요성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한 정성을 곡(曲) 이라고도 한다. ‘곡진하다 간곡하다’라는 뜻은 바로 마음의 정성을 다한다는 뜻이다.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들이는 독서라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 스스로의 혁명을 이루어 내는 길을 여는 것은 아닐까...이성을 뛰어 넘어 정성을 다하는 독서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나의 스승님께...

스승은 저를 가르치는 분이요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고 저를 사랑하기를 지극히 하시고 그치지 않는 분이십니다. 스승님을 보고 있노라면 그 지행의 표본을 보는 듯 합니다. 스승님은 언과 행으로 가르치시니 중용에서 가르침 받은 바 있는 언고행 행고언의 뜻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참으로 따르기 어려운 중용의 말씀이지만 당신을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말씀을 그토록 쉽게 행하시니 어찌 스승님을 본받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가르쳐 주십니다. 스승님은 또한 지극히 겸양하시어 진정한 겸양의 덕목이 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일깨우십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요..지극히 아름답고 아름답습니다...그런 당신을 저의 스승님으로 두었으니 저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요..

 

  저는 스승님을 만나 배우게 되어 한없는 다행으로 여깁니다. 스승님...당신을 따르고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죽어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저를 가르치시고 사랑해주세요 스승님... 스승님을 만나 배우고 사랑을 또 한 배우게 되었으니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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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 역사학자 이덕일, 공자와 논어를 논하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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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이 공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책을 저술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동양의 역사학은 한문에 통달해야하고 더구나 사상가에 대한 저술활동은 상당한 깊이의 한학적 소양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분들에게는 통하는 분야기기도 하다. 공자를 언급하자면 중국의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논어, 대학, 역서(易書)는 물론 시경에까지 다다르는 사회문화와 문학적 필수 요소, 그리고 각각의 경서들에 대한 집주들에도 매우 밝아야 만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역사학자 이덕일 선생의 노력은 참으로 대단한 열정이 가미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작업을 해냈다 싶어 우선은 긍정적이다. 또한 저자의 공자에 대한 접근에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공자관련 참고자료들을 이용한 저자의 의도와 목적은 상당부문 잘 해냈다고 평가하고 싶은 책이다.



그렇다고 단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집어든 독자라면 저자가 가능한 한 공자에 대해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흔적들을 여러 곳에서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심원한 부분을 미처 다루지 않아 전반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지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이 이 책이 가지는 한계점이라 는 발견도 가능한 출간물이다. 어쩌면 강신주의 저술이 보여주는 치밀한 연구와 사유들을 이 책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각 저자의 의도가 서로 다른 저술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게감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과연 철학자들이 가지는 안목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의 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저자의 사상가에 대한 첫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지 싶다.


때 마침, 이 책의 읽기를 마친 지금은 개인적으로 약간은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던 차였다. 최근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에 내 스스로 상처를 내는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된 것이다. 어쩌다가 내 자신이 이토록 옹졸한 생각들을 자주하게 되었는가. 최근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스스로를 넓게 그리고 멀리 보지 못하도록 하는 사건들의 연속선상에 있어왔다. 살다보면 누구나 주변의 인물들에게서 기쁨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을 얻기도 하며 가끔은 가슴까지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인가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조이는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정도가 심화되면 분노를 할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그동안 십 수 년을 함께 해온 주변인을 내 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러나 그 주변인의 지속적인 행위들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나는 점점 지난 날의 내 마음의 평정심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나의 각별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내 스스로가 무너지는 모습을 어떻게 내 보일 수 있을까...이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토록 각별하게 생각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던가... 이런 생각이 들자 이것 또한 커다란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나는 결국 심적으로 나를 견디지 못하게 하는 사람에 대한 나의 옹졸한 생각들을 멈추기로 했다. 인간은 애초에 완벽하기를 바랄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동양 고전에는 심지어 공자님마저도 제자를 돌려보내 놓고 뒷담화를 하는 장면이 여과 없이 기록되어 있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그토록 외치던 진정한 보수주의의 선봉인 공자님 마저도 부인과의 이혼이라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고 간 인물임에랴... 공자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해준 ‘자로’라는 제자를 두었던 공자는 자신의 허물들을 제자 자로로부터 지적받고 있는 장면들을 찾아 볼 수 있는 경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 자로도 공자가 유랑하던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한 인물 하나였다. 

 

 이렇듯 조선의 유림들에게 무결점의 인간으로 추앙을 받던 공자로 사실은 불완전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매한 공자의 사상은 2500년 이라는 세월이 흐른 현대에까지 살아 있지 않던가... 공자는 최근의 형편없는 나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어주면서 동시에 깊은 사유를 안내해준다. 하여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과거의 내 모습을 되찾기로 굳은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게 하는 그 지인에게서 나는 초월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괴로움이 사실은 적은 것은 아니라는 점도 고백하고 싶다. 그러나 그로인해 내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내게 각별한 사람은 그 얼마나 안타까워 할 것인가...하여 지금의 나는 나의 각별한 사람에게 내가 보여줄 예의(禮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주 만나며 지내는 가까운 사람에게 흔히 깜박 잊고 지내는 것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허물이 없는 사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하는 예의(禮儀)의 상실이다. 가까운 사이라면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한 태도이건만 그 반대로 쉽게 잊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해주겠지’ 라는 생각이 때로는 예의에 어긋나는 언행을 낳게 된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덩치 큰 스노볼이 되어 굴러간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논어의 학이편(學而篇)에는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 하겠는가’라고 해석한다. 이 때의 락(樂)은 각자 자신의 대인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 을 뜻하는 樂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인 해석에 공자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비가시적 의미를 첨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멀리에서 뜻이 맞는 친구가 찾아와도 그토록 즐거운데, 하물며 가까이에 있는 친구에게는 더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잘 대하라는 뜻을 부연할 수도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예의에 벗어나며 간혹 홀대할 수도 있는 부분을 우리에게 묵시적으로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 각별한 사람에게 내 자신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는 상대방을 유쾌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동시에 나 스스로의 작은 자긍심에도 상처를 내는 일이다. 결국 어느 모로 보나 그 폐해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나를 지속적으로 불편하게 하는 그 지인의 언행에 대해 새로운 자세로 임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결심은 곧 나 스스로의 자긍심을 지키는 일이기도하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또 다른 지인에 대한 예를 갖추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예의라는 것은 비단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는 이를 지켜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염려하게 하고 걱정하게 할 수가 있다. 이 또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순간 흔들린 자신을 가다듬고, 바로 하는 일 또한 나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지인(知人)이라는 용어가 있다. 매우 광의의 의미를 가진 이 용어는 사용하는 사람마다 그 범주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 관계 또한 천차만별이어서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知人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의는 매우 필요한 관계의 덕목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 관계의 의미가 비록 찬차 만별이라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예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상대방의 지인인 내가 그 상대방과 충분히 어울 릴 수 있는 예의를 갖춘 사람임을 보여주는 일이기도하다. 왜 나를 그렇게 생각하냐고 반문하기 전에 나는 그 각별한 나의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렇게 오늘은 내 자신을 돌아본 하루였다. 그 각별한 나의 지인은 ‘오늘의 나’ 보다 ‘내일의 나’가 훨씬 더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 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소중하고 각별한 나의 지인을 지켜가는 일은 나 자신을 스스로 지켜가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또한 나 자신에 대한 예의로부터 출발 할 수 있음을 깨달은 뜻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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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6-19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사람 사이에는 가능하면 예의와 배려를 지켜주는 면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한번씩 흔들리는 편이 좋다고도 생각합니다. 안 그려면 부러질거 같아서요.

2012-06-19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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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사유의 샐러드 보울


우선 이 책은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모티프로 하여 유수의 철학자들이 달려든 영화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게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그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가를 가늠케 하는 증거이지만 그 주체가 바로 철학자들이라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대 이토록 철학자들의 구미를 당긴 영화가 몇이나 되던가..


또한 이 책은 리뷰를 쓰는 것이 매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매트릭스’라는 한 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논의의 구심점으로 하여 출간한 책이라는 일관성을 가지지만, 참여한 모든 철학자들의 매트릭스를 바라보는 관점들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탁월한 철학적 분석과 그에 해당하는 사유의 결과물들을 내놓고 있다는 점이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면서도 이견(異見)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하여 이를 통섭하는 리뷰를 작성하기위한 개인적인 한계를 극복할 방법과 능력이 내게는 없다는 고백을 딜레마로 남기는 출간물이다.


 이 책을 가장 흥미롭게 해주는 요인은 여러 장면들에 대한 사유의 투영이기도 하지만 같은 장면에 대한 전혀 다른 각도의 접근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단 매트릭스에만 국한된 사유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저마다 자신의 사유를 투영시키는 프리즘의 성격과 특징들이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이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요구되는 사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하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의 리뷰를 쓰기가 어려운 것은 다양한 학자들의 각기 다른 관점들을 통섭하는 것의 어려움에 있다. 이들의 프리즘을 하나의 리뷰에 버무려 넣는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불성설일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성격이 뚜렷하면서 특정한 것들의 모임은 도가니탕(Melting Pot)이 아니라 샐러드 보울(Salad Bowl)의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의외일 수 도 있지만, 타자의 것과 만나는 과정과 결과를 일컽는 ‘혼종’이라는 용어를 떠올리게 되었고 이에 나의 사유를 투영시키게 되었다.


 

 


혼종의 속도와 태도..


현대는 문화의 혼종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역사는 늘 그래 왔다. 혼종의 시대가 아닌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혼종’은 서로 다른 문화가 서로에게 유입, 영향을 끼치며 섞이는 것을 뜻한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혼종의 속도는 점점 증가해, 개개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첨단 통신기기가 보편화된 현대에서는 말 그대로 광속인 것이다.

 감기 바이러스가 지구를 한 바퀴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교통의 발전 속도와 같았다고 한다. 감기 바이러스는 인간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인간이 도보로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20여일, 즉 1년하고도 두어 달은 족히 걸린다. 물론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전혀 없는 평지여야 하고 잠도 안자고 걸어야 하는 수치이다. 반면 시속 800km로 날아가는 비행기로는 약 50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감기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를 문화의 혼종 속도로 대신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과거나 현대의 혼종은 그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마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이 전혀 색다른 해석과 사고를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는 것 처럼, ‘혼종’ 이라는 각기 다른 것들의 만남을 대하는 태도가 왜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은 그러한 혼종의 장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타자의 견해를 수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흔히 ‘문화 충격’이라 일컽는 갈등의 과정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는 서구의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다. 더욱이 현대는 ‘글로벌’이라는 용어가 언론과 매체를 장악한지 오래되지 않던가... 구한말에도 전혀 새로운 문물들이 우리나라에 상륙했고, 여전히 그 물결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근래에 와서는 ‘다문화가정’이라는 용어가 생길만큼 외래의 물결은 거침이 없다. 국내의 상황과 국외의 조건들이 만나 결합하는 혼종의 결과물이므로 이를 피해갈 방법이 없다. 이러한 혼종의 상황을 그 어떤 나라이든지, 그 어떤 개인이든지 격을 수밖에는 없다. 독자적으로 홀로 살아가지 않는 다음에야 말이다.


 마치 매트릭스라는 한 편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많은 장면들을 다각도의 프리즘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다양성의 여지를 주는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절대적 공식이라는 것은 몇몇 자연적인 현상을 발견하는 ‘론, 혹는 법칙’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상대성 이론’이라든지 ‘에너지 보존의 법칙 또는 만유인력의 법칙’ 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렇게 절대적이라는 것들도 때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발견에 의하여 무너지곤 하는 경우들을 종종 목도해온 것도 사실이다. 한마디로 다양함을 함유하고 있을 가능성을 언제가 개방시켜 두는 것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문화적 혼종이라는 것은 결코 피해갈 수 있는 현상들이 아니다. 문제는 그 문화적 혼성을 어떠한 자세로 수용하느냐인 것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흔히 '융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융해는 무사고적 수용이라는 말과 상대적인 용어일 것이다.

 

 사실 타문화 혹은 타자의 이론(異論)들의 접근을 완벽하게 차단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융해라는 긍정적 과정을 거치게하여 새로운 우리의 것으로 창출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정적 반응은 필연적으로 흡수될 문화 혹은 이론(異論) 들과 부정적 결과물을 낳는 싸움을 하게 한다. 사람들의 모임은 언제나 이론이 제기되기 마련이듯 말이다. 이론은 타자를 곧잘 불쾌하게 만든다. 이는 타자와의 논쟁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논쟁은 매우 유익한 발전의 과정이다. 단, 사유가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조선의 경우...


 덕흥대원군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의 원인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역대 그 어느 임금보다도 신속하고 강력하게 바로잡은 역사적 인물이었지만 국외의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강력한 힘을 앞세워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서구의 세력의 유입에 대응하는데 서툴렀다. 결과적으로 이를 적절하게 수용한 일본에 의해 강점되는 빌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미국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보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차라리 나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가정법에 불과한 것이고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실제로 조선에 총기가 들어 왔던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폴투갈의 상선은 조총을 일본에 가져가 이를 은과 바꾸었다. 그것이 1543년의 일이다. 일본은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조선에 이 조총을 예물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조총의 위력에 대한 통찰력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이를 무기고에 처박아 두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일본에서는 조총으로 무장한 다이묘들이 칼을 든 다이묘의 사무라이들을 싹 쓸어버리고 나라를 평정하면서 일본 열도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그리하여 뎃뽀(철포-조총을 뜻함)도 없는 놈이 덤빈다는 말로 '무뎃뽀'라는 말의 유래가 된 것이다. 제 아무리 사무라이들이 검을 잘 쓴다 한 들 뎃뽀(조총)로 무장한 다이묘들을 어떻게 감당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때 일본의 무뎃뽀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철포의 위력 앞에서 죽어갔다.  

 

 

무뎃뽀의 대가를 톡톡하게 치룬 조선과 한국

 

철포의 위력을 알게 된 일본은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592년 일본은 조선에 병력을 투입한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임란을 맞은 조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조총 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병사들이 쓰러져 갔던 것이다. 혼종에 대한 바르지 못한 판단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조선에서는 어쩌면 폴투갈의 상선들이 일본이 아니라 조선과 먼저 거래를 텄을 사건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바로 순도 높은 은(銀)의 추출 기술이다. 당시 명나라는 은(銀) 본위제 화폐를 시행하고 있었고, 명나라 대부분의 거상들은 은을 상거래의 수단으로 했다. 당시 서구인들에게 명나라의 문물들을 가져다가 서양에 판매 할 경우 그 수입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5개의 선박 중 하나만 돌아와도 이익’이라는 말은 바로 이때 생긴 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상인들은 명나라의 결재수단인 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순도 높은 은의 추출 기술에 있었다. 명나라에서 원하는 순도 높은 은을 추출할 수 있는 기술이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추출기술을 자체 개발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명종 때의 쌍놈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순도 높은 은을 추출하는 능력을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 기술과 인력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다. 쌍놈이 개발한 기술이라고 천대했던 것이다. 마치 조총을 무기고에 가져다 썩히듯이 말이다. 이를 눈치 챈 일본은 이들을 일본으로 정중히 모셔갔다. 그리하여 일본의 은 추출능력이 세계 최고를 자랑하게 되었으며 일본의 은은 서구인들을 매료시키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폴투갈의 상선들은 양질의 은을 생산해내는 나라, 일본으로 그 뎃뽀를 가져간 것이다.


이는 사소한 문제 같지만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침공 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어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사건은 바로 새로운 것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의 중요한 교훈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랄 수 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자 바로 한국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휴전이 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엄청난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어왔다. 문화의 대 혼종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에 또 한 번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또 한 번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땅은 100여년 동안 서구의 물질, 사상, 학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가 되었다. 그 중 서구의 경쟁 시스템과 사고는 대한민국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친 것 중의 하나이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이에 자본주의가 함께 맞물려 갔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용어의 배후에는 사실은 강자의 피도 눈물도 없는 논리가 서려있다.


우리의 교과서는 약육강식의 논리와 적자생존의 논리를 아무런 거침이 없이 가르쳤다. 이미 너무나도 친숙해져버려 이제는 의심조차도 하지 못하게 된 이 논리는 한국 사회를 100여년간 지배해온 것이다. 특히 학교에서의 경쟁 일변도 교육시스템은 은 대한민국의 주도세력일 수 밖에 없는 인력들의 핵심 동력이로 작용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혼종의 물결을 저항 하기란 거의 불가항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혼종에 대한 당사자들의 태도가 향후 엄청남 결과를 초래 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물론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에 알맞은 적절한 판단과 준비의 신중한 작업을 요망하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매트릭스를 소재로 서술해간 철학자들에게서 배우는 혼종에 대한 태도 역시 이와 일맥상통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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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6-03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에게 다 잘 해줄 수 없고 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될 수도 없으며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내가 얼만큼인지는, 평탄할 때 보다는 위기에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내가 얼만큼인지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고난을 만들어낼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는 말에 공감합니다. 저는 매트릭스를 여러 번 봤지만 여전히 철학하기 보다는 SF 오락물로 즐기는 수준 밖에 못됩니다. 물론 요즘 케이블에서 계속 나오는 주성치의 소림축구가 훨씬 웃을거리도 많고 여운도 많이 남는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만!!! ^^(모바일 댓글이라 엔터를 못찾겠네요ㅠㅠ)

차트랑 2012-06-0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리포핀스님 안녕하세요?
매리포핀스님의 말씀 적극 공감합니다.

그리고 주성치의 소림축구는 매트릭스를 뛰어넘는 철학이 담겨 있는
영화라고 저는 느꼈습니다.

얼마전 페이퍼에서 물의 이치와 스타워즈 에피소드 1에 등장하는
건간족의 방어막의 작동원리를 간단하게 쓴 적이 있는데요.

소림축구도 그와 같다고 보았답니다.
제 아무리 강한 것이라도
부드러움의 힘에 제압 당하고 말죠.

건간족의 망어막도 그러하답니다.
제 아무리 강력한 힙으로 공격한다 한들
그들의 방머막는 꿈쩍도 하지 않죠

그러나 부드럽게 다가가는 발 하나를 견디지 못하고
우리가 담글 수 있게하는 것이
물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소림축구도 부드러운 힘으로 제압하잖아요.
이만한 철학을 매트릭스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답니다.

왜 매리포핀스님의 견해에 공감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저의 서재를 찾아주시고
글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매리포핀스님~
즐거운 주말 되세요~ 아셨죠?^^



책읽는나무 2012-06-03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님이 학당에서 공부하시는분인줄 잘 몰랐습니다.
전 옆에 페이퍼를 보고서 첨엔 고등학생인줄 알았어요.ㅋㅋ
그러다 까먹고 있다 다시 보니 고등학생일 것이라 착각했었던 바로 그분이 맞았네요.

수양공부를 따로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음~
범상치 않군요.
저도 수양공부를 좀 해야하는데 말입니다.참 쉽지가 않습니다.ㅠ

2012-06-03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3 0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06-10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좋은 페이퍼입니다.
차트랑공님,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뒤의 말씀,
'적절한 판단과 준비의 신중한 작업'에 대해여 너무 생각이 없던 것이 아닐까
반성합니다. 저는 적절한 판단이라고 읽었는데, 원래 쓰신 절절한 판단이 맞을까요?
어쩐지 절절한 판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진정성의 문제니까요.. ^^

즐거운 한주되시기 바랍니다.

차트랑 2012-06-12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녀고양이님,
이렇게 찾아주시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알라디너분들이 많지 않은데
생각을 많이 하게하는 일들이 있어
그만 기력을 잃고 뜸했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녀고양이님께서 돌아와주시니
반가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아마도 마녀고양이님께서는 저의 기쁨을
모두 느끼실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어디 저의 것 뿐이겠습니까
많은 분들께서도 저와 같은 심정이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다시 와주셨으니
이제부터는...
마음 편히 하시기를요....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추신: 위의 제 글은 마녀고양이님께서 읽으신대로 '적절한' 이 맞습니다.
제가 저런 황당한 오타를 내버렸군요^^

차트랑 2012-06-1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 수정~
'절절한 판단'을 '적절한 판단'으로^^

북극곰 2012-06-1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은 제가 이해도 못할 어린? 시절에 사 가지고서는
역시나 읽다가 던져버리고 아직도 책장에 꽃혀만 있는 책이랍니다.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읽어보고 싶네요. ;)

차트랑 2012-06-19 13:28   좋아요 0 | URL
북-킄-콤님 께서 와주셨네요?
와~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저 역시 이해하지 못하고 재도전 한 책이 이었답니다.
고등학교 때 도전했던 '달과 6펜스'가 그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대학에 가서 재도전 했다가 또 실패했더랍니다 ㅠ.ㅠ

이거 자존심 무지 상했습지요 ㅠ.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는...
세번째 도전을 하게되었답니다^^
세번째 되어서야 달과 6펜스를 좀 이해하게 되었던거에요.

이런 고백은 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지만
북-킄-콤-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제가 어찌 솔직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요 ㅠ.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북큭콤님~^^
 
몽유도원 세트 - 전2권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읽었으니 간단하게나마 리뷰를 남기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는다...

 

소설은 몽유도원이라는 그림을 소재로 하고있지만 몽유도원이 소설을 지배해가는  구심력은 아니다. 몽유도원은 일제가 우리에게서 약탈해 간 문화재를 상징하는 언어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이 주고자 하는 상징성은 나름대로 마음에 든다.

 

소설은 일본에서 유학중인 역사학도의 눈을 통해서 일제가 우리 역사를 그 얼마나 왜곡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의식을 전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의식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역사의 뼈아픈 기억을 마음속에 담아두라는 뜻이 아니다. 역사가 한 국가 혹은 개인에게 그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의문의 죽음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는 이 소설은 우리의 역사해석에 지극히 중요한 호태왕비의 비문과 칠지도에 써있는 글자를 일제국주의가 왜곡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양국의 현대적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말이 치열하는 것이지 실제로 왜곡된 정도는 이미 현대의 우리 사학계에서도 차마 힘주어 언급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니 못하고 있는 것인지 안하고 있는 것인지 사실 판단이 서지 않는다.

  

  좋았던 점은 가즈오라는 인물을 통해서 작가가 전달하려고 하는 그 무엇이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이는 박상훈이라는 역사학도이다. 그런 역사인식의 중요성이 박상훈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표면적인 소설의 구성적 필요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캐릭터나 그에 상응하는 동력을 가진 인자가 필요했기 때문 일 것이다. 이 동력이 박상훈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지배라는 힘은 박상훈에게 있는 듯 보인다.

 

상대적으로 가즈오라는 인물은 매우 정적인 인물이다. 바깥 출입을 하지 않으며 정신 질환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조금 더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 가즈오라는 인물이야말로 이 소설을 지배라는 원동력이자 그림자이다. 

 

가즈오는 자신을 키워주고 그토록 사랑을 주는 부모와 조부가 자신의 생물학적 조상을 배신하고 조국을 배신해 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정신적 딜레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다. 행여양부에게 알려질까 한글을 혼자서 배우며 할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읽어내야 했던 가즈오...  양부의 죄를 스스로 떠안고가야만 했던 가즈오의 내면이 어쩌면 이 소설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보이지 않지만 독자들에게 드러나는 인자가 아닌가 싶다. 더구나 이것이 우리들의 역사였으니 말이다..

 

표면적으로 박상훈은 자신의 분노를 자신의 연구와 실력으로 보여줄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그 현실을 직면한 능력이 없는 가즈오는 무력해보인다. 그러나 그런 가즈오의 무력함은 그의 심적 갈등과 인간적 고뇌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작가는 박상훈이라는 인물보다도 가즈오를 더 깊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른다. 가즈오에게 그토록 안타까움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아가 가즈오와 혼인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일본인 여성은 작가의 심적 투영의 매체일 것이며 어쩌면 일본인들의 양심을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소설은 나름대로 유익한 면이 있다. 아마도 고등학생들이 읽어준다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가해본다. 일제의 기억을 할 수 없는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소설이다.  

 

사실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알라딘의 리뷰에서 읽어보거나, 홍보성 평가에는 미치지 못하는 소설이 아닌가 생각한다. 잘 읽기는 했는데 사실 쓸 말은 많지 않은 그런 소설이라고나 할까....딱히 깊은 인상을 주는 대목이라면 주인공 박상훈이라는 인물이 하코네라는 일본인 여성을 만나는 장면이다. 이들에게는 미묘한 러브라인이 형성되어있고 키스신이 딱 한 번 등장한다. 그 어떤 장면보다 인상적인 이유는 작가의 소설가적 재능이 가장 잘 드러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지 않아 더욱 쓸 말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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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3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나 밖에 못 읽어본지라... ㅠㅠ
하지만 그때 정말 분개했던 기억은 나네요. 그리고 한동안 핵에 대해서 생각했구요.

김진명 씨의 소설을 몇권 가지고 있는데 아직도 못 읽었습니다.
네, 저 역시 고등학생들이 읽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교과서 외의 다른 부분을 볼 수 있게 하는 작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달랑 한 작품 읽고 이런 말 하면 안 되는거죠, 저? 에공... ^^

차트랑 2012-04-23 20:01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마녀고양이님과 차이가 없어요^^
'무궁화 꽃이피었습니다'를 읽어 보고 이번이 두번째이니까요.

아, 그리고
작품 하나를 읽은 것으로로 충분히 말씀하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도 충분히요..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리뷰잖아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관중과 공자 - 패자의 등장과 철학자의 탄생 제자백가의 귀환 2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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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에서 강신주는 1권을 읽은 독자에게 기대 그 이상의, 보다 훨씬 더 많은 제자백가의 그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아 읽는 내내 즐거웠다. 그래, 관중과 공자에 관하여 이 정도의 것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저자는 이 저서에서 관중과 공자에 관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들을 토해낸다. 어쩌면 많은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저자가 이러한 생각을 글로 출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왜냐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공자 이전에 민중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제나라를 패국으로 만든 관자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할 것이고 상대적으로 공자의 수고스러움이 안쓰럽게 느껴지며 때로는 시대가 소망하지 않는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관직에 오르기를 바라면서 천하를 주유하는 초라한 공자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공자가 누구던가...조선을 500여 년간 지배해온 이념의 창시자가 아니던가. 조선의 중심 이념에는 공자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조선은 공자를 모신 사당에 문묘 18현을 배향하기까지 그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정치적 싸움을 해왔던가... 공자 없는 조선은 상상 할 수 없으며 공자가 곧 조선을 지탱해온 힘이었다는 것을 과연 어느 누가 부정할 것인가. 공자의 힘은 조선의 국왕보다도 더 컸다.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 등장하는 왕들이 신하들에게 쩔쩔매는 장면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우리 역사가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자는 관자 앞에서 너무나 초췌한 모습 그 자체 일 수밖에 없으니 저자는 그 얼마나 고민스러웠으랴. 저자는 이 저술을 통하여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오던 공자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깨버린다. 이처럼 공자가 대중 앞에 벌거벗은 몸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동안 수많은 공자 관련 서적들은 공자를 보기 좋은 포장지로 감싸기에 급급했다는 것을 드디어 들켜버린 셈이다. 공자의 위상에 큰 손상일 입힌 저자 강신주에게 돌팔매질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 분명하다. 공자는 그들에게 왕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기에...


저자는 그렇게 강보에 꽁꽁 싸맸던 공자의 껍질들을 하나 씩 벗겨내어 마침내 그 본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포장하지 않은 공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쩌면 골수 유학자들에게는 심히 불쾌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조선이었다면 저자가 그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은 제로 퍼센트인 것이다. 독자들에게 공자를 관자보다 훨씬 못 미치는 인물로 각인시킬 수도 있는 저술에 분노했을 것이며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유학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노출 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자신들의 지배 이념을 그토록 통렬하게 드러내다니…….



관중과 공자가 선택한 키워드의 차이점


관중과 공자는 시대적인 차이는 있지만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관중은 자신의 힘으로 그 어떤 나라이든 패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고 공자는 주례를 바탕으로 나라를 바로 세워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관중은 환공이 이끄는 제나라를 패국으로 만들기 위해 전례 없는 생각을 해낸다. 바로 민중의 중요성 인식이 그것이다. 반면 공자는 관자보다 독자들에게 훨씬 더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관중과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주(周)나라의 예(禮)를 회복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일념, 즉 지극히 보수적인 경향을 보여준 것이다. 정치에 관한한 대 선배인 관자의 엄청난 성공 사례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관중을 벤치마킹하지 않고 정 반대의 길을 택한 셈이다.

  

사실 관중과 공자의 가장 큰 차이점은 패국을 완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을 어느 곳에 두느냐이다. 관중은 패국의 열쇠를 민(民)에게서 발견한 반면 공자는 흔히 인(人)이자 백성(百姓)에게서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2권을 읽기 전에 1권을 읽는 것이 바른 순서임에 틀림이 없는 것은 인민(人民)이라는 용어에 대한 올바른 개념의 이해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인민(人民), 백성(百姓), 군자君子, 소인小人 의 용어 인식

 

요즘이야 인민, 백성이 모두 같은 일반인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주나라 시절에는 그것이 아니었다. 주나라의 인(人)은 경대부등 지배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공자가 말하는 군자에 해당한다. 백성(百姓)이라는 용어 역시 당시에 성을 가진 경대부등의 지배세력을 뜻하는 용어였다. 人의 상대적 용어인 민(民)은 전쟁에 져 주나라에 끌려온 노예로서 한 쪽 눈을 찔러 보이지 않도록 했고 노동력에 동원되거나 필요에 따라 제사의 희생물이었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군자(君子)의 상대적 용어인 소인(小人)은 피 지배세력을 뜻하는 말이다.

 人과 民이라는 말을 사용하다보니 중국을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라고 하던데 혹시나 춘주 전국시대의 인민이 가지는 의미를 행여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덜컥 인다.

 

위의 용어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관중은 피지배 세력인民을 패국으로 가는 키워드라고 생각했고 공자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民을 다스리는 지배세력인 人을 키워드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신념에 따라 관중은 민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성의를 보여준다. 물론 꿍꿍이는 제나라를 패국으로 이끌기 위한 사전 포석이지만 말이다. 백성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들을 마련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관중은 현대의 복지정책으로 민중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한 셈이다. 민중이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만 국가에 충성하는 존재라는 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백제의 민중이냐 신라의 민중이냐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가족과 더불어 굶주리지 않고 인생을 노력 한 대로 살아갈 수 있고 필요하다면 국가가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상황에서 민중의 나라가 신라인가 백제인가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지 않은가. 관중이 민중을 그토록 보살피는 전략을 사용한 것이 춘추 전국시대, 즉 피지배 세력은 인명으로서의 가치가 존중되지 않던 시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관중은 이러한 민중의 심리를 잘 파악했고 민중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힘썼으며 결국 패국을 이루었다.


관중이 당대의 정치력으로 저 거칠고도 사납기만 하던 춘추 진국시대에 제나라를 최초로 패국으로 이끈 그의 생각보다 사실 내게 더 관심이 가는 인물이 공자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저자가 공자를 포장한 껍데기들을 홀홀히 털어내어서가 아니다. 정이 정호 형제와 송대의 주희를 거쳐 조선에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 공자는 과연 당대에 어떤 사유로 인생을 보냈는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정리한 중용을 읽고 논어와 맹자를 읽으면서 느꼈던 지고한 정신세계는 과연 어떤 근원에서 발원하였기에 조선의 민중들을 그토록 힘들게 만들었는가...나는 이것이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조선 선비의 자제들이 태어나 5세에 천자문을 깨우치고 나면 흔히 동양의 고전이라 이름하는 동몽선습, 사자소학, 명심보감을 달달 암송한 후,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거쳐 역경 시경 서경을 기본으로 익혔는데 이를 4서 3경이라 했다. 조선 선비의 자제는 4서 3경 외에 다양한 경전들을 읽고 암송했으며 시서화(詩書畵)에 능해야 했다. 그래서 각 고을마다 성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던 것이다.


물론 과거를 보아야 했으며 과거 시험은 동양의 고전에서 출제했다. 하여 과거를 치루는 선비의 자제들은 주희가 해독한 주석까지도 달달 암기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주희는 공자를 능가하는 교주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입식 교육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듯 조선의 정치적 이념의 발원지인 공자는 그동안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人과 民이라는 용어의 개념정리가 안된 탓에 상당히 오해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어떤 오해야 하면 공자가 말하는 애인(愛人)이란 사실인 즉 민중을 제외한 경대부(사대부)를 뜻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공자의 애인(愛人)을 마치 요즘의 민중을 뜻한다 생각하고 공자가 참 일반인들을 무던히도 사랑했구나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仁의 대상은 일반인인 대중을 제외한, 조선으로 치면 농공상(農工商)을 제외한 사(士)들 만을 칭하는 매우 제한적인 용어이며 지극히 정치적인 용어인 것이다. 현대로 말하면 정치인들과 관료들 그리고 많은 재력을 가진 기업인들인 것이다. 민중 곧 대중은 공자의 愛와 仁에서 열외자였던 것이다. 공자는 더욱이 민중이 문자를 알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말이 아닌가? 그렇다. 바로 조선의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려하자 이를 극렬히 반대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그러했다. 공자의 그러한 생각은 중국의 정이 정호형제와 주희를 통해 조선에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이다.


그러한 공자의 이론은 사실상 강력한 패국을 꿈꾸는 군주들에게 어필하지 못했다. 왜냐면 공자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배세력들은 실상 군주들에게는 언제든 위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폭발력을 가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틈만 보이면 스스로 군주가 되겠다고 덤비며 하룻밤 사이에 아군이 적군으로 돌변하던 춘추 전국시대의 혼란기였으니 복례를 외쳐대는 공자의 말이 먹혀들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14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정치를 해보겠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결국 공자가 자신의 신념이 세상에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노나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때는 그동안 자신을 믿어주던 제자들마저 상당히 떠나가버리는 이탈 현상이 생긴 후였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켜냈다. 이탈 현상을 막기위해 유학의 본질을 교조적으로 탈바꿈하는데 공자는 극적으로 성공을 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공자의 유학은 종교적인 차원에 다다르게 되어 조선에까지 상륙한다.


공자의 생각은 춘추전국시대의 패국을 꿈꾸는 군주들에게 어필하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현재까지 유학의 발원지로 인정받고 있으며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선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은 공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낸 사람의 주장임이 강신주라는 걸출한 사람의 분석으로 명확하게 드러난 셈이다.

 

 


현대의 정치이념에 드리워진 관중과 공자의 생각


현대의 정치사에도 관중과 공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정치인들의 이전투구 양상은 사실상 대중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들이 강하다. 그나마 관중의 생각은 현대의 정치 시스템에도 잘 들어맞는다. 곤궁한 대중들을 위해 관중이 노력했던 것처럼 정부도 국민을 위해 노력한다. 이는 대중의 지지를 얻어 패국을 이루려 했던 관중의 뜻과 일맥상통한다.

 공자 역시 자신의 생각으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출하고자 했고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의 사유도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다. 공자에게 모여든 수많은 제자들도 공자라는 인물을 통해 출사하여 명성을 얻고 귀족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적인 판단과 목적을 가지고 공자의 문하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사유는 그의 시대가 요구하는 사유방식이 아니었고 현대의 정치 시스템에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지배자와 피지배가가 명확하게 구별되는 사유 방식의 정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분모를 가지는 부분이다.



발견, 아나키스트 강신주님


이 책을 읽으며 매우 인상 깊었던 요인은 꼭 관중과 공자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 강신주의 사유가 빛나는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을 저술하기위해서 그가 연구해온 뜨거운 정렬과 그 성과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빛나는 대목은 이 책을 통하여 저자 강신주님은 자신의 신념인 무정부주의를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절절하게 말이다. 이는 놀라운 발견이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다. 그동안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읽어온 독자로서 이처럼 무정부주의임을 피력한 저술가가 몇이나 되던가...아마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 싶다. 번역서는 물론 논외로 해야 할 것이다.


 관중이 제나라를 패국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강신주는 자신의 무정부주의를 피력하고 있다. 관중의 정치력이 빛나는 것은 민중을 패자로 가는 키워드로 사유했다는 점이고 민중을 위한 정치를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저자 강신주는 관중의 정치력을 날카롭게 꿰뚫어본다. 이 책이 그야말로 빛을 발하는 대목은 관중의 정치력이나 공자의 진정한 모습을 독자들에게 드러내는 대목이 아니다. 바로 관중의 정치력을 통해 투사시킨 자신의 신념, 바로 그것이다.


국가란 패자로 나서기 위해 국민의 협조가 필요하다. 말이 협조이지 자발적인 복종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강제력보다는 물론 대단히 좋은 방법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자발적 복종에서 발견해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국가라는 강력한 시스템이 내미는 손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자발적 복종은 강제된 복종보다 더 치명적이라는 통찰력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강자가 보내는 러브콜은 약자가 스스로 강자가 되려는 노력을 망각하게 한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빼앗아 가기위해서 시행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민중에게는 그들이 처해진 삶의 조건에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제공하여 자발적 참여와 복종을 유도해내는 것이다.

국가의 군주는 땅에서 자라는 풀로 소나 양을 키우는 목동과도 같은 존재이다. 군주는 충분한 먹이를 제공한다. 이럴 경우 소나 양은 주인을 잘 따르면 먹을 것을 충분히 얻는다는 신뢰를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가축의 주인은 필요에 따라 그 가축을 자신들의 먹을거리로 삼거나 거래의 도구로 미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처럼 국가가 민중을 가장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은 민중들이 자신이 지배당하고나 그러한 방식으로 억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할 때 가능한 일이다. 목동처럼 말이다. 관중의 정치 철학이 현대의 모든 국가, 특히 복지 정책을 통하여 체제의 안정을 영속화하는 작동의 원리인 국가주의 이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통찰한 강신주의 사유가 빛나는 대목이다.


반면 인문주의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원초적 불평등을 인식하고 있다. 강신주가 그러하다. 목축은 동물을 학대하는 가장 잔혹한 방법이라 말한다. 인간에 의해 길러지는 동물은 근본적인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살육당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목축은 좋은 때를 기다려 살육을 잠지 뒤로 미루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동물은 이를 착각한다. 당장 죽이지도 않고 풍부한 먹을거리를 제공하지 있지 않은가…….때가 되면 자신을 사육하는 인간이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엄연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 때 가축은 인간에게 은혜로운 존재로 둔갑하는 것이다.


진정한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가축의 야성은 사라지고 인간의 집요한 목축행위로 인하여 가축은 예정된 파괴의 길을 갈 수 밖에는 없다. 이것이 목민의 발상인 것이다. 피지배층은 그렇게 길들여져 필요할 때마다 약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축은 목동이 자신을 돌보아주며 보호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민중은 사실상 그러한 가축에 감정 이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훈육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거부하는 자는 제거의 대상이다. 결국 길들여지는 자 만이 살아남는 법이다. 민중의 삶도 그러한 것은 아닐까 회의하는 강신 주는 이 저술을 통하여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국가 지배 체제로 편입하려는 의지와 노력은 공자의 제자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들이다. 목축의 대상이 아니라 목동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하는 지배욕을 공자와 그 제자들은 은밀하게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신분 상승의 욕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들의 학문 속에서는 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왜나면 허락된 자유는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철회될 수 있음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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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4-04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의 자발적 복종은 더 잔인하다는 말이 왠지 더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제주 강정 마을에 기지가 들어서는 것을 국책사업, 국가 안보를 위한 일이니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 속에서 자발적 복종의 단면을 보게 됩니다.

차트랑 2012-04-05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int님의 리뷰 덕분에
저도 이 책을 읽게되었습니다.
이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국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좋은 계기가
되어줄 수 있는 매우 뜻 깊은 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서제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인트님

2012-04-05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4-09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 님은 이쪽으로 좀 독특하신 것 같아요.
좀 좋아하기 힘든, 알튀세르 이론을 좋아하셔서 메일 아이디를 알튀세르@로 사용하신다는 분이기도 하죠.
제자백가에서도, 관중에게 자신을 투사하시는~^^

좋은 리뷰 잘 봤습니다~!

차트랑 2012-04-09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철학의 탈주를 우선 읽어보아야 할 듯 합니다 ㅠ.ㅠ
푸코, 들뢰즈, 라캉, 데리다 그리고 알튀세르...
이런~ ㅠ.ㅠ
특히, 비철학적 철학을 요주의해야 할 것 만 같다는...
정말 마음에 안드는 프로이트와
마음에 쏙~드는 맑스를 통과하는 골치아픈 동굴탐험^^도 병행.
역시 마음에 안드는 헤겔선수도 끼워드려야...
스노볼이 따로 없군요 ㅠ.ㅠ

서양철학은 정말 머리를 지근거리게 한단 말씀이에요ㅋ
그러나 흥미를 결코 잃지않게 한다는 강점도 있습죠 ㅠ.ㅠ

그나저나 투사능력이 탁월한 강신주님~^^
이분 역시 요주의 인물이시라는...

양철나무꾼님께서 방문해주신 결과 이거 이거...
읽을거리 엄청 던져주시는걸요^^
고미숙선수가 들뢰즈를 언급할때면
멀쩡하던 머리가 갑자기 빙빙@@~

한동안 아짤아찔한 현기증을 경험하게 되나봅니다..
이런걸 두고 베리굿~ 현상이라고요^^
고맙습니다 양철나무꾼님~^^

마녀고양이 2012-04-09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였습니다.....
한줄마다 생각에 잠기게 하고, 강신주님을 만날 생각이 없던 저에게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자발적으로(!) 들게하시는 리뷰였답니다. 실은 중간 부분에 백제 민중이나 신라 민중이나~에서부터 아, 그렇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나키스트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차트랑 2012-04-10 00:2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께서 좋은 리뷰라고 칭찬을 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ㅠ.ㅠ

저도 강신주덕분에 아나키스트 관련 서적을 뒤지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뒤질 것도 없이 강신주께서 열거해준 저자를 찾으면 되는 일입니다만^^
제게 강신주께서 새로운 관심 분야를 알려준 것 같아서
매우 만족스러운 저술가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앞으로 강신주라는 사람의 책을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