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인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백승헌 지음 / 하남출판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리뷰보다는 어느 순간 페이퍼를 더 선호하는 입장에서 이 책은 고민거리였다. 생각 끝에 리뷰를 쓰기로 한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오류 때문으로 말미에 언급하기로 한다.

 

최근 한의원에 들를 일이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자 ‘사상체질’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사상체질에 관계하시는 분이로구나 싶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선생님, 저의 체질은 어떻게 되나요?' 라고 여쭈었다.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전에는 체질과 관련하여 진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막상 진료를 해보니 단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는 환자들에게 체질에 관한 언급을 피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내심 기대를 했다가는 적잖은 실망을 했다.

 

이제마의 의학적 관점인 사상의학이 독보적이라고는 하지만 東의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활용성을 점한 것은 아닌 듯 보이고, 대체의학계가 이를 수용하고 있는 입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의학계의 인정을 받든 아니든 간에, 이제마의 의학적 관점이 흥미로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서의(西醫)와는 달리 동의(東醫)는 애초에 만병의 근원을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 보았다. 타에 의한 마음의 상처 혹은 내적 발로의 상심은 당사자의 면역력에 관계하여 외부에서 오는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내적 질환을 만들어 낸다고 본 것이다. 양의에도 이를 흔히 스트레스, 즉 심인성 질환이라고 명명하고 있고 현대의 다양한 질환들이 이에 해당하는 실정이다.

 

우리말에 ‘환장(換腸),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있다. 환(煥)이라는 말은 ‘불꽃, 불빛, 빛난다’는 뜻이고 장(腸)은 창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두어야 할 점은 장(腸)이다. 창자를 뜻하는 장(腸)은 사실은 정(情), 즉 마음인 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정신)의 상태가 크게 격동하여(煥)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또한 당대(唐代)의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야우문령장단성(夜雨聞鈴腸斷聲), 밤비에 울리는 풍경소리에 간장이 끊어지는 듯 하구나, 라고 읊었는데, 장단(腸斷) 즉,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마음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동의는 인간의 감정을 중시했고,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희노우사비경공, 즉 칠정(七情)의 불균형에서 병이 깃든다고 보았다. 칠정은 사정(四情)의 다른 표현으로 중용의 첫 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사람의 감정(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中 이라고 하고,

발이개중절 위지화(發而皆中節 謂之和)

“발현하여 그 절도에 잘 들어맞는 것을 和라한다”

 

이를 중용이 아닌 동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사람의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 있다가 발현하여 그 절도에 잘 들어맞으면 和를 이루어 내는 법이지만, 발현하되 절도에 들어맞지 않으면 즉, 양극단의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사람의 몸에 병이 깃든다, 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지 싶다.

 

인간은 몸을 움직이는 동물이듯, 그 마음도 늘 함께 움직이게 마련이다. 하여 중용에서 말하는 칠정이 中의 상태에 있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항상 발현하게 마련인데 몸(體)과 함께 각각의 정(情)들이 활발하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하여 칠정 중 어느 하나가 그 임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몸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이 지나쳐도 몸이 상하고, 노여움이나 슬픔이 지나쳐도 마찬가지다. 이제마가 중용의 사정(四情)에 착안하여 사상의학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사람의 체(體)와 질(質)을 4가지로 분류하여 임상 연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100 여년이라는 짧은 역사가 말해주듯 사상의학은 매우 초보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하여 항간에는 8체질론이 나오고, 더불어 이 책에서처럼 28체질론으로 확장 보완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제마는 체질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체(體)는 육체, 즉 몸이고, 질(質)은 정신, 즉 마음을 의미한다.” 106쪽

 

이제마는 몸과 마음(정신)을 하나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이 아프면 칠정도 상하게되고, 칠정이 상하면 몸도 따라 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뜻밖의 사고를 만나 몸을 심하게 다치게되면 어디 짜증 뿐이겠는가. 쉽게 화를 내거나 노여워하고 때로는 낙심하여 풀이 죽는다. 부상의 정도에 따라 그 당사자의 심리 상태는 천차만별이 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심적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의 경우 또한 병이 깃들게 마련이다. 욕심이 지나쳐도 마음의 병을 만든다. 이는 칠정이 그 임계치를 넘어선 결과이며 칠정이 양극단으로 치우친 결과물이다. 하며 예로부터 만병은 마음에서 온다했던 것이다.

 

체질론을 읽어본 바에 의하면, 간장의 상태가 좋은 사람은 자녀가 달려가다가 넘어졌을 때 웃어 넘길 수 있지만, 간장의 상태가 나빠진 사람의 경우 넘어진 어린 자녀에게 화를 낼 수가 있겠구나 싶다. 하여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어떤 때는 웃어 넘기다가도 다른 때에는 화를 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간(肝)은 기쁨(喜)을 관장하는 장기이기 때문이다.

사상체질론은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한다. 체질에 따라 장기의 크기와 그 기운이 다르다고 본다. 물론 사람의 성격도 그에 따라 다르게 된다. 하여 체질을 약물치료나 음식에 적용시켜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첨언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사람의 장기가 선천적으로 크고 작음으로 실과 허가 정해진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건강 상태에 따라 변화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태생적으로 간이 튼실하고 폐가 상대적으로 약한 태음인이라지만 간장의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간장이 허한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폐가 일시적으로 승증을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간이 실하고 폐가 허한 사람으로 단정하여 치료에 임한다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적인 생각을 하게되었다.

 

체질론에 따르면 맛에 매우 민감한 소음인의 경우 비위가 태생적으로 약하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냄새에 더욱 민간해지는 순간을 만난다. 냄새에 가장 민감한 체질은 태음인이다. 태음인은 상대적으로 폐가 약해 공기 중의 산소율이 다른 체질의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소음인이 맛 보다는 냄새에 더욱 민감해지는 순간을 맞는 것이다. 이는 비위보다는 폐가 매우 약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경우 비위보다는 폐를 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약재를 사용할 때, 단정적이기보다는 당사자의 몸 상태에 따라 적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보는 이유이다.

 

또한 체질론은 체질에 따라 음식을 가려먹는 것의 이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분명 이점이 맞다. 그러나 건강이 매우 양호한 상태에서는 음식에 체질을 관여시키는 것이 꼭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몸이 대부분의 음식을 잘 소화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체질과 맞지 않으며 기운이 강한 음식은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체력이 약해진 상태이거나 심신이 지쳐있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병중이라면 체질론에 따른 섭생은 중요하다고 본다. 음인이 병중 일 때,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것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핵심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이다.

 

사상 체질론의 또 다른 어려움은 체질의 판단이다. 저자도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수학의 공식처럼 똑 떨어지는 정답을 가진 경우라면 문제는 없다. 체질의 판단에 오류가 날 경우 치료는 되려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정확한 체질의 판단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책에서는 다양한 체질의 판단을 소개하고 있다. 이점 또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체질론은 분명 흥미로운 의학적 접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역사가 짧은 만큼 연구의 깊이가 아직은 미약해 보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제마의 체질론이 인간의 성정을 다루며 철학과 의학을 만나게 했다는 점이다. 이는 실로 독보적인 관점의 접근이랄 수 있다. 서의는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애초에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 연구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플라톤은 정신세계를 너무 애정한 나머지 물질을 중시하지 않았다, 아니 경시했다. 물질은 변덕스러운 존재인지라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항구적이며 영원불변한 세계, 바로 정신의 지고한 세계를 애정한 결과 이데아론을 제창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데아론으로 동의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동의는 변화 자체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변화를 자연의 이치요 애초에 본질로 본 것이다. 심지어 사람의 장기 상태가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장기(臟器)는 그 장(臟)이 가지는 고유의 기(氣)을 담아 두는 그릇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다. 해당 장기의 균형이 깨면 그에 해당하는 정기(情氣)가 이상을 일으켜 격동하게 된다. 한마디로 칠정의 이상 움직임은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의 감정 상태가 몸의 건강 상태와 직결된다고 보는 사상의학은 분명 독보적인 관점임에는 틀림이 없다.

 

친구네는 얼마 전, 화장실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검사결과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돌아왔다. 사람은 죽겠는데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서의의 특징은 병이 겉으로 드러나야만 치료에 임할 수 있는 의학적 특성을 지닌 듯 하다. 물론 요즘은 서의에서도 심인성, 즉 심리적인 요인에서 병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질병과 마음(情)의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외적, 내적인 병인을 다스리는 의학의 발달을 기대해보는 이유이다.

 

조선의 동의학계에 걸출한 인물, 구암이 있지만 사상의학을 의학적 관점이 아닌 철학적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좋은 이제마도 있음을 기억하고 싶다 . 각기의 장점들을 찾아 적절한 접목을 이루어 내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본 도서에는 아쉬운 점이 있는데 다음의 내용이다.

 

 

처음에는 이 책이 28체질론, 즉 사상체질의 확장인고로 내용이 달라진 것인가?하고 의아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책의 나머지 부분들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여 저자의 집필의 실수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초판이 2002년임을 감안할때 그동안 전혀 수정을 거치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판본이 이어질 경우 교정이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알라디너들의 건강을 위해 한마디를 첨언하고 싶다.

반후행삼십보 불용개약포 飯後行三十步 不用開藥包

한마디로 식사후 삼십보를 걸으면 약지어 먹을 일이 없다, 라고 이해해면 되겠다.

직접 실험을 해본 결과 300―500보 정도를 걸었을 때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개인 차이가 있기마련이겠지만...

 

아파본 사람은 안다. 건강을 잃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 전 언젠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 친구는 서구의 사고가 동양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 어디 동양 뿐 이던가. 전 세계를 지배했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의 요지는 서구 사상의 강력한 위대성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한창 서구의 철학에 깊이 침잠해 있었고, 한마디로 노닐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 친구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 타자를 지배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와 그 논리, 한마디로 서구의 ‘이성’이야 말로 얼마나 위대한 것이던가. 과학을 일으키고 각종 분야의 학문을 일으켜 전 세계의 사고와 관념을, 즉 우리의 세상을 완전히 딴 세상으로 바꾸어 놓은 사상이 아니던가.

 

하여 나는 과거 칭기즈칸과 그의 후예들이 80여 개국을 점령했고, 해가 지지 않던 나라였던 영국이 과거 지배한 땅의 2배, 그토록 위대하다는 알렉산더가 지배했던 땅의 7배가 넘는 땅을 강점하면서 무자비하게 휩쓸어버렸던 그 위대함을 말해 준 적이 있다.

 

 

때마침 몽골의 칸이 죽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프랑스, 독일 등도 北方之强(북방지강)의 그 강력하고도 거친 위대함 앞에 결코 무사치 못했을 것이며 현재의 유럽은 존재치 않았을 것이다. 유럽을 한창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던 몽골군은 차기 칸을 선출하는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철군했던 것이다.

 

알고보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인도를 통해 몽골로 가고자 함이었다.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아 나선 것이지만 최종 목표는 몽골과의 무역 이권이었던 것이다. 몽골의 위대함을 실감할만한 대목이다.

 

 

 

 

목차를 비롯,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 기대감으로 가슴을 부풀게 하는 책을 만나곤 하는데 신영복의 『강의』가 그 중 하나이다. 구입해놓은 지는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저 머리를 식히는 용도로 간간히 읽어볼 요량으로 미루고 미루던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의 편견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저자의 글 전개방식이 눈에 띈다. 강의라는 제목이 말해주는가. 글은 논리정연하고 질서가 있다. 진도를 나가며 새롭게 되짚어 올라갈 필요가 없다. 명료하다. 교과서를 연상시키는 내용의 전개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책의 장점이다.

 

한마디로 글의 전개 방식이 명료하고 글은 유려하며 질서 정연한 문체가 돋보이는 책이다. 더구나 내재하고 있는 온고지신의 창의적 사고는 나의 편견이 그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자각하게 한다.

 

고전 관련하여 출판되는 많은 도서들은 강의라는 형식을 빌어 짜깁기의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목차만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책들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밀도 있고 심원한 그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 말이다. 알고 보면 나의 편견은 이유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편견을 보기 좋게 깨트려주는 책을 만난 것이다.

 

이 책의 의도를 한마디로 약한다면 ‘동양 고전 독법’이다. 시대를 거슬러도 한참 거슬러 올라가는 동양 고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즉,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다. 고전이라는 매우 친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것는 당연하다. 역(易)을 비롯 유․도․묵․법가와 그들의 생각을 텍스트를 통해 조명하며 큰 줄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경우라면 일반적인 것 이겠지만 이 책의 특징은 한 발 더 나아가는데 있다. 독자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유도하는데 있다.

 

누군가로 하여금 사유토록 하기위해서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뛰어 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글쓴이의 창의적인 생각과 그 생각이 주는 여백, 그것이다. 나머지 여백은 독자 스스로 채워가야 한다. 물론 사유를 통해서다.

 

또 다른 장점은 서구의 역사를 지배해온 '생각'을 함께 사유토록 하는 점으로 그 의미가 크다. 저자가 대표적으로 던져주는 테제는 서구의 존재론, 동양의 관계론이다. 서구의 진리가 형이상학적 차원의 신학적 문제라면, 동양의 ‘道’는 ‘길’이다. 서구의 '도'는 사유 속에 있고, 동양의 '도'는 삶 속에 있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동서양 철학의 테제가 마무리되면 동양 고전의 주인공들을 목차에 따라 등장시킨다. 동양의 사유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가지는 사상의 특성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동안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사유를 유도하면서 말이다. 역(易)도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易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易에 대한 독자와의 간극을 상당히 좁혀주는 역할은 한다. 역을 상대적으로 친근하게 해준다. 더불어 남송대의 유자들이 유학을 연구 발전시킨 동기와 결과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뒤이어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이, 공맹순노장, 그리고 묵․법가이다. 이들의 철학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相(상)이다. 반면 서양의 그 것은 絶(절)이다. 부연하자면 동양의 相對(상대)와 서양의 絶對(절대)인 것이다. 하여 동양의 고전은 관계론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반면, 서구의 그것은 존재론으로 환원한다.

 

우리의 국민 정서는 종교의 다양성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반면, 서구의 명문법은 그 다양성을 인정을 하되 실질적으로는 이단을 용서치 않는 정서를 가지는 것은 이러한 사유의 차이다. 이러한 사유는 독선이 될 수가 있다. 존재론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절대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되버린다. 철학이 정치의 시녀, 혹은 부속품이 되기도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그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선은 좋은 예이니 말이다.

 

하여 동양의 관계론은 실천이 뒤따른다. 반면 서구의 그것은 사유 속에서 맴돈다. 사유의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틀을 깨는 순간 모든 것은 죄다 흩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서양은 그것을 한 곳으로 모아서 가두어두려 한다. 서구의 과학이 ‘중력자’를 그토록 애타게 찾는 이유도 그것이다.

 

 

 

독선이 불러오는 비극

 

동양이라고 해서 사유의 독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이 그러했다. 주희의 그것과 한 글자라도 다른 사유는 사문난적이며 처단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서인들은 주희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독선에 빠져 전체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당시 대 학자이자 실천을 중시했던 윤휴는 주자의 중용장구 주석을 다르게 고쳐 읽었다. 숙종실록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자사의 뜻을 주자 혼자만 알고 어찌 나는 모른단 말인가’라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斯文)의 반적(叛賊)이다. 「숙종실록」 3년 10월 17일

 

결과는 뻔했다. 윤휴는 전체주의 집단의 집요한 모략과 음모를 견디지 못하고 난적도 아닌 반적으로 몰려 결국 사사되었다. 같은 유학자끼리도 이러한 독선을 적용시킨 것이 조선이었으니 사상이 다를 경우에는 어떠했겠는가. 조선 후기에 유일하게 노자주(老子註)를 집필한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박세당이 바로 그 냥반이다. 유자(儒者)로서 박세당은 도가(道家)인 노자주를 집필한 그 죄가 크다하여 또한 사사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박세당은 유자였지만 주희를 중심으로 교조화된 유학의 획일화를 염려했다. 실천, 즉 후대들이 실학이라고 칭하는 백성을 위한 실사구시를 외치던 윤휴와 박세당은 그렇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목숨을 강제당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의 왕필은 새파란 20대에 노자주를 완성했고 현재 그의 역작은 명저라 불리고 있지 않던가. 조선이 동양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전체주의적 독선에 빠지면서 사유의 다양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가 도․묵․병가에 실로 어두울 뿐만 아니라 사유를 강제당함으로서 폭 넓고 자유로운 사고를 발전시키지 못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유가에 목을 매던 조선은 결국 제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타자의 생각을 수용하지 못하는 존재의 종말은 대개 이러하다.

 

서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언뜻 사유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서양인 듯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제 아무리 다양하다 한들 그 방향성에 문제가 있었다. 서구 사상의 특징은 지고한 사유의 최고점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과학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아인시타인을 비롯 서구의 과학자들은 『궁극의 이론』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을 죄다 포함하여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론, 그것이 바로 궁극의 이론인 것이다.

 

애초에는 불변이라고 믿었던 아인시타인이 특수상대론과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의심을 받았고 새로운 이론을 필요로 한다. 이론들은 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발전인지는 판단할 수 없으나 한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서구의 과학은 『초끈 이론』에 다다른다.

 

만약 이 궁극의 이론을 입증했다고 치자, 그 이론이 모든 이론의 종말이라는 것, 즉 진정한 궁극의 이론이라고 과연 누가 절대 확신 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그들의 사상은 어떻게 정치에 영향을 끼쳐왔던가. 물리적인 강제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을 빼앗아 왔다. 선의의 경쟁이란 그들만의 것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고,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미국 독립선언문) 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자신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고 타자들은 완벽하게 제외된 평등과 권리이며 자유와 행복의 추구였던 것이다.

 

이정도면 애교에 가깝다.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리면서 타자를 학살했던 독일을 보면 더더욱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핵심이 고전 독.법.인 이유

 

제 아무리 양서를 많이 읽고 사유한다 한들, 그 방향성이 바르지 않다면 오히려 독선이 되고 비극을 불러올 수 있음은 분명하다. 저자가 이 책을 易(역)의 이해로 시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양 사상의 출발점인 易은 애초부터 변화로 시작하여 변화로 끝을 맺는다. 세상은 무한한 변화의 연속이고 상호 관계한다. 절대(絶對)란 존재하지 않는다. 태초에 절대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스스로 변화를 해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동양의 생각이다. 변화는 바로 창조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존재가 우주를 가득 채울 만큼 확장한다하더라도 그 존재는 의미를 찾을 길이 없다. 다른 그 어떤 존재가 있어주어야만 자신의 존재가 '존재'하는 것이 바로 동양의 생각인 것이다. 상대가 없는 ‘나’는 의미가 없다. 혼자서 하는 운동이 재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속하기가 힘들다. 몇 일 혼자 하다가도 영 흥이 나지 않는다. 혼자서 할 수 밖에 없는 수영도 그 어느 상대와 어울릴 때 만이 흥미를 더하는 것이 아니던가. 여럿이 하는 축구도 마찬가지다. 한 팀만 있어가지고는 흥이 나지 않는다. 여러 팀이 우승을 놓고 대(對)를 할 때만이 신이 나는 것이다.

 

 

여기서 對(대)라는 말은 敵(적)이라기보다는 짝(對)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가 우리의 짝이 되어줄 필요가 있다. ‘그대’가 있음으로 ‘나’가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세상의 모든 생물은 그리하여 짝짖기를 한다. 짝짖기는 어찌보면 창조의 본능이다. 짝을 이루지 못하면 창조를 이루어 낼수가 없다. 상호 짝을 이룰 때 만이 창조는 가능한 것이다.

 

하여 相交(상교)라는 것은 동양 사상의 기본 개념이 되고 바탕이 된다.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서로 비긴 바둑을 화국(和局)이라고 할까. 서로는 同(동)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화(和)는 이루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이 독법인 이유이다.

 

하여 『강의』는 우리에게 고전을 관계라는 소통을 염두에 두고 읽도록 권유하고 있다.

 

문제는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이다. 저자가 주인공들을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소개하다보니 읽고 싶어지는 책이 한둘이 아이다. 흔히 말하는 四書는 물론이요 도가, 묵가, 법가등이 그러하다. 책에서 책으로의 전이를 불러일으키는 책이 바로 『강의』인 것이다. 책이란 자고로 이래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장에 즉, 머리말부터 임팩트가 강력한 책이 있으니, 바로 헤세의 문장론이다. 지성에 호소라도 하듯 거침없이, 자신감 있고, 도도하게 흐르는 문장, 이 책의 머리말이 그러하다.

 

초장에 대차게 나오는 넘치고 별볼 일 없는 넘들이 많은데, 헤세의 문장론은 예외이다. 알고보니 이유가 있었다. 초장부터 강력했던 것은 바로 헤세의 글에 있는 내용을 역자가 자신의 글과 버무려 버렸기 때문이다. 하여 독자의 가슴을 이토록 설레게 하는 머리말은 처음 만나보았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역서의 냄새를 지워내려 무던히도 노력했다는 점이다. 불가피한 몇몇 표현은 논외로 해야 할 것이다. 역서는 어쩔 수 없는 역서이니 말이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외국어의 한글화가 단연 돋보이는 역서이다.

 

 

문장론이라고는 하지만 부제가 이를 말해주고 있듯이 작가에게 뿐 아니라, 독자로서 알아두면 매우 유익한 조언들을 가득 담고 있다. 도서의 선택 방법, 책을 대하는 태도, 독서법 혹은 태도등 독서를 하되 흔히 우리 대부분이 간과할 수 있는 부분들을 헤세는 자신의 인문학적 견해를 통해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헤세가 독일인 이라는 점이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도 그러하지만, 그가 한국인 이었다면..하는 아쉬움 말이다. (이것은 지극히 미련한 생각이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또 다른 아쉬움은 같은 내용의 다른 글을 중복시켰다는 점인데, 9장(1910)과 29장(1930년)에 쓴 두 글이 바로 그러하다. 어떤 부분은 거의 토씨 한자도 틀리지 않으며, 전체적인 내용 또한 차이는 없다. 다른 글로 대체를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필경 그만한 사정 또한 있지 않았겠는가. 다른 한 편으로는 20년이 흐른 뒤에도 헤세가 자산의 기본 개념을 변함없이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 일종의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기본 개념에 무쌍한 변화를 가지는 것도 일변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과거 그의 작품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데미안’을 읽는 순간, 헤세가 나의 머리와 가슴 속을 속속들이 읽어내면서 헤집어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 오싹하는 전율을 느낀 적이 있다. 하여 당시 나는 헤세를 두려워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 냥반, 헤세의 생각과 마음 속에 내가 들어가 그의 것들을 하나씩 들추어내고는 기분이었다. 이 책을 읽는 희열이고 기쁨이며 행복이다. 수십 년 전 나처럼 당했던 일을 멋들어지게 헤세에게 되돌려주는 기쁨을 누리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읽으셔도 좋다.

 

 

그런데,

이 느낌은 책의 전반부를 읽어나가는 나의 생각이었을 뿐, 나는 페이지를 넘겨 갈수록 반전을 맞이한다. 읽어나가며 생각해보면 문득 깨닫게되는 한 가지가 있다. 그의 글을 통해, 다시 나는 나의 생각을 그에게 되려 스캔당하는 느낌이 불현듯 드는 것이다. 내가 그의 생각을 헤집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나의 등을 타고 앉아있다. 이는 마치 독자와 글쓴이가 쫒고 쫒기는 묘한 관계를 성립시키는 독특함을 준다.

 

내가 헤세의 등에 올라타 있구나 싶으면, 어느새 그가 내 등에 다시 올라타 있는 이 읽힘의 연속. 그의 정신을 관통하며 헤집고 있구나 싶으면 어느새 그의 칼날 같은 관조가 나의 정신을 뚫고 지난다.

서로는 그렇게 낭자히 흐르는, 서로의 상처에서 흐르는 그 무엇인가를, 끈끈한 것을 뚝뚝 떨어뜨리고 만다. 다만 붉은 색의 액체가 아니라는 점, 그것은 붉을 수도 있고 초록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일깨움이며 정신의 소통이 남겨주는 아름다운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그가 독일인인 것이 아쉬울 뿐이다.(미련하기는~)

 

때로는 나를 좌절시키는 대목을 만나기도 한다.

창작과 사고가 거의 같은 것이라는 견해, 세계관을 묘사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고 견해는 오류이다. 작가에게 추상적 사고는 위험 요소이며, 심지어 가장 커다란 위험 요소이다. ....중략.... 다만 추상적인 인식이 주된 핵심이 되는 순간 작가는 예술가이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학은 사유가의 체념이 창작자를 정화된 냄정한 삶의 관조로 이끌어서, 작가가 가치판단이나 철학적 근본문제를 포기하고 순수 관조로 들어갔을 때 생겨난 것이다. 101쪽

 

물론 내가 작가가 되려는 생각으로 이런 좌절을 언급 하는 것은 아니다. 나로서는, 독자로서 문학을 바라보는 태도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좌절스러운 내용이었던 것이다. 개인의 고뇌가 너무 클 때, 순수 관조에 이르지 못함을 헤세가 작가에게 고하는 말이지만 독자로서도 뜨끔하지 않은 수 없는 냉철함과 그의 관조를 느낄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헤세가 그토록 섬뜩하리만치 나를 관통하는 ‘데미안’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감동적인 대목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 중 인상적인 몇 가지를 적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책을 읽을 때 스스로 주의 깊게 함께 하고 함께 체험하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나쁜 독자이다.

119쪽

 

형편없는 시를 짖는 것이 심지어 최고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보다 훨씬 행복함을 알게 될 것이다.

158쪽

 

책의 주제와 멀어보이는 듯 보이지만, 사랑 앞에서는 아무 것도 신성한 것은 없다. 131쪽

 

칸트는? 나는 망설였다.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칸트는 그냥 놓아두기로 했다. 니체는? 서간과 함께 꼭 필요하다. 160쪽

 

괴테와 휠덜린, 도스토엡스키의 모든 책들은 남겨둔다. 162 쪽

 

 

눈에 띄는 대목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아래와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노자의 책에 적혀 있다. 그 지혜를 유럽어로 번역하는 일은 현재 우리의 유일한 정신적 과제이다. -170쪽

 

이 대목은 내게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저 서양의 어느 통찰력을 가진 이가 동양의 인문학적 정신에 매료되었구나 싶은 정도를 넘어, 그의 표현을 빌자면 ‘유럽의 언어’,‘우리의(유럽의) 유일한 정신적 과제’라는 두 표현이 주는 함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헤세는 유럽이라는 공통체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철학적 빈곤함을 함축적으로 반증하고 있다고 이해하도록 만드는 장면인 것이다. 이런 해석은 오해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아직까지 내게는 그렇게 들리며, 헤세의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생각 때문이다 ㅠ.ㅠ

 

헤세는 1931년 글에서 자신이 많은 은혜를 입은 동양서적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들 중 가령 여불위, 공자, 장자의 책은 언제든지 손에 잡을 수 있게 가까이 두고 있으며, 특히 역경 같은 경우는 마치 신탁을 묻듯 종종 펼쳐보곤 한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추어야 했다. 공자, 장자는 그렇다치더라도 여불위라니...그의 독서가 어디에 까지 닿아있는지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단어가 여불위인 것이다. 더구나 역경을 신탁이라고 표현한 헤세, 나는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신탁'이라는 말이 주는 언어의 함의와 무게감을 적절히 대신할 수 있는 대체물이 과연 있을 것인가...그것도 서양인의 글로 말이다.

 

 

역경을 언급한 부분이 나에게 그토록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서양의 관점에서 역경의 심오함과 그 과학적 위대함은 헤세보다 200여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 라이프니쯔가(1646-1716)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는 계산기를 발명하고 미분법을 창안하여 세상을 놀라게하기도 했지만, 0과 1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진법을 창안, 현대의 전산시스템의 근간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역을 연구했고, 그 역 안에 담긴 수리적 원리가 자신이 찾고 있던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를 전자의 시대로 변화시킨, 마법과도 같은 이진법을 창안해내는 결정적 계기는 바로 역경에 있었던 것이다. 역경을 바라보는 라이프니쯔의 시선은 그 얼마나 경이로움과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을까.

(읽은 책이 아니고 읽고 싶은 책임) 

 

마찬가지로 헤세도 역경을 언급하며 마치 ‘신탁을 묻듯’이라는 표현을 감히 쓰고있다. 그 함의가 가지는 그 육중한 무게감에서 서구의 철학적 사고를 벗어 던진 헤세의 사유를 들여다 볼 수 있고, 나아가 그가 보여주는 동양의 철학적 가치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이유는 무엇일지 동양인인 우리들도 되새길 필요가 있는 의미심장한 대목이겠다.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통찰을 보여주는 헤세, 그는 진정 아름답다.

 

이 두 인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한결 같다.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찰력, 바로 그것이다. 주역의 계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역을 설명한 말일 것이다. 易이란 生하고 生하는 것이다. 生한다는 말은 창조력을 뜻하는 것이다.

 

크게는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창조해나가는 우주의 능력, 작게는 개인의 끊임없는 창조력 말이다.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서 멈추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지식을 자신의 권력으로 인식한 결과,  타자에게 휘둘러 승리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과 인류를 위하는 올바른 창조력 말이다.

 

(역시 읽어볼 책)

 

아직 읽어보지도 않은 두권의 책을 페이퍼에 넣으려니 뻘줌하다. 헤세가 '헤세의 문장론'에서 언급한 책들은 수없이 많다. 그 중 인상적인 역경을 언젠가는 읽어보겠지 싶다. 라이프니쯔는 몰라도 말이다.

 

사적으로는 문장론에 관한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독서를 하되, 관조의 의미를 살려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관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자각하고 책을 대하는 여러가지 태도들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내게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 - 따뜻한 신념으로 일군 작은 기적, 천종호 판사의 소년재판 이야기
천종호 지음 / 우리학교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만에 글을 쓰려하니 그나마도 잊어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약속이었다.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 자신과의 약속이자 지금도 우리 사회 어디에선가 방황하는 젊은 영혼들에의 약속이다. ( 책이 나올 때 쯤은 근황에 변화가 있을 때였다. 하여 제 때 쓰지 못하고 이제서야 이 글을 쓴다.)

 

사람들의 병증은 특이하게도 깊이 침투하여 그 현상이 겉으로드러날 때까지는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이 그러하다보니 자각을 하고 난 후에는 사태를 수습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늦어진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건상 상태를 주기적으로 검진한다.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이겠다.

 

최근 크고 작은 사고들이 뜻밖에 발생하는 일이 잦아졌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안전 불감증이라고도하고, 또 누군가는 도덕 불감증이라고도 한다. 그 어느 것이 되었든 우리는 사회 제도와 구조에 대한 불감증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염려하게  하는 요인들은 다양하지만 이 책은 현직 판사로서 현재의 청소년들과 그 미래에 대한 깊은 우려와 애정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학업 중도탈락자 6만 여명, 가출 청소년 20여만, 소년원 출신 성인범죄율 67%, 소년범 재비행율 76%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아니 우리 사회의 현실인 것이다.

 

 

교과서는 청소년기를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고 발전시켜가는, 한 인간으로서 자아를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말한다. 독립성, 자신감, 긍정적 혹은 부정적 사고의 방향, 인격, 개성, 도덕성, 인간관계, 인지력, 정서등, 한 사람이 사회에 진출하여 발휘해야 할 모든 개인적 자질을 청소년기에 이루어 낸다는 뜻이겠다. 청소년기는 한 마디로 한 개인의 일생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시기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은 개인의 성품과 함께 가정을 이루고, 나아가 자녀를 낳아 성장시키며 사회를 구성해가는 일원으로서 가장 기본적 단위인 가정이라는 틀을 형성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하나의 나라를 국가(國家)라는 말로 표현 한다.  나라의 근본을 가(家), 즉 가족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 가족의 일원이자 미래  사회의 주인이 되는 청소년들의 문제는 장차 국가의 문제와 동일하다.  그런 우리의 청소년들의 상당수가 그야말로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있다.

 

소년의 죄는 과연 누구의 죄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범죄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영국의 엔클로저 운동과 토마스 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토머스모어는 개인의 문제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청소년의 문제를 그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의 문제로 인식할 필요성이있다. 사실 청소년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 바닦을 깔아 놓은 기성세대의 문제이다.

 

기성세대가 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먹으며 성정해왔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들에게 어른들이 내밀어 주는 것이 독성이 강한 음식물인지 아닌지 그들은 판단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회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청소년 범죄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과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만 물을 수 있는 것인가...그들은 기존 사회라는 환경을 벗어 날 수 없으며 그 환경은 바로 기성세대들이 제공한 그대로라는 점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무죄일지도 모른다. 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한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이니 기성세대야 말로 유죄인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직시 할 때, 청소년 범죄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다음은 저자의 견해를 요악한 것이다.

 

사회는 그들에게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며 인격과 자기 함양의 건전한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마땅하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책무가 아닌가 생각한다. 기왕에 죄를 범한 청소년들에게는 관용과 용서가 필요하다.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다. 법은 공정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죄를 묻기 이전에 왜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사회 스스로가 되물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도 존중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어야 한다.

 

 

저자는 용서를 위해서는 희생과 양보를 전제로 해야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그 용서는 사회가 짊어져야 할 책무라고 주장한다. 이 책무를 잘 이행하는 사회가 인간을 존중해주는 사회이고 건전한 사회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기존 환경에서 발생하는 그들의 분노, 적개심은 청소년을 벼랑 끝으로 내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얼마나 위태로운 사회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내가 아프고

 

내가 아프면 그대가 아프고

 

또 그 사회가 아프고

 

우리 모두가 아프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철나무꾼 2014-05-27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책은 잘 모르겠고...
오랫만에 돌아오셔서 글을 쓰려고 하시는데, 그나마 잊어버린 느낌이라고 하셔서,
그렇지 않다고...
잘 읽고 응원하는 저같은 사람이 이렇게 있다고 말씀드릴려고 몇 자 남깁니다.
계속 명징하고 좋은 글들 남겨주실거죠?
헤에~^________^
 
기철학 연구
이현수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리학의 본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태극도(太極圖)라는 것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태극도(太極圖)는 중국 송나라의 주돈희라는 인물이 우주의 근본과 만물이 발전하는 이치를 도해(圖解)로 밝힌 것으로, 태극에서 시작한 우주의 음(陰)과 양(陽),  그리고 오행(五行)을 만물의 원리로 삼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성리학의 우주관은 바로 그 태극도에서 출발하게 되었고 이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인간성 및 수신의 이치를 다룬 인문학으로 발전 전개된다. 성리학자들은 이론(理論)을 기론(氣論)의 상위 개념으로 인식∙확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성리학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혹은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논쟁을 거듭해왔지만(전자의 대표 주자는 퇴계 이황이고 후자의 대표 주자는 율곡 이이이다) 이론(理論)이 중심론(中心論)으로 자리를 잡아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거의 기론(氣論)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일련의 이기론을 둘러싼 논쟁의 과정은 조선의 붕당체제와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동인(東人)들은 퇴계 이황의 문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서인(西人)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율곡 이이의 문하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만물의 본질을 氣로 파악했던 화담 서경덕과 같은 인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는 성리학의 이기론이라는 쟁점이 정치, 즉 집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사상(철학)은 권력과 분리될 수 없음을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정치적 사안이었던 것이다.


하여 흥미로운 것은 이기론이 흔히 말하는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매우 원초적인 싸움과 다를 바가 없는 형태를 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론(理論)은 승자가 되었고 기론(氣論)은 패자가 된 셈이다. 결국 이론(理論)은 밝은 양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반면, 기론(氣論)은 어두운 음지에서 여전히 서성이고 있는 실정이다. 만물의 시작을 理로 파악하고 개념을 정립한 성리학의 승리는 상대적으로 못지않게 중요한 氣論을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학문에서 멀어지게 한 셈이다.


이 책의 제목이 ‘기철학 연구’라는 표제를 가지고는 있지만 이기론이 그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지 매우 명료하게 정리해둔 출간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 기철학 연구의 개념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거 중국의 학자들의 이기론에 대한 주장과 상대론, 조선의 학자들의 주장과 그 상대론을 매우 일목요연하게 정리했고 그러므로 이론과 기론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갈라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학문 혹은 사상과 정치 혹은 권력과의 역학관계


 이 책은 결국 성리학의 본질에서 기론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성리학을 이기론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理論 중심의 학문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때, 태극도 라고 하는 같은 뿌리를 둔 학문이 서로 분리되고 상∙하위(上∙下位) 개념을 가지게 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같은 뿌리를 둔 원류의 사유가 시대가 흐르고 변화하면서 주체와 객체로 분류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나마 氣論을 아예 성리학에서 도려내지 못한 것은 氣가 理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理를 상위 개념으로 사유하기를 바라는 성리학자들의 주장에서 실제로 氣 없는 理는 존재 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론을 철저히 따돌리는데 성공한다.


자신들이 가진 사상의 우위 선점은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인 토대가 되어준다. 따라서 자신들의 학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유자는 제거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언론의 통제와도 그 맥을 함께한다. 그렇다면 과연 조선의 언론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백성 전용 언론 창구, 신문고와 격쟁


 조선은 왕이 통치하던 국가였다는 점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한다. 흔히 말하는 전제 군주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반정이라는 쿠데타의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 조선이기도 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참주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회였다. 어쨌든 불구하고 혹자의 역사가들은 조선이 백성들과 매우 원활한 소통을 한 것으로 가르친다. 심지어 오늘 날의 언론 제도와 비교 손색이 없을 정도 였다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실제로 있다. 과연 그랬을까...

 백성과 소통하는 창구로서 신문고와 격쟁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신문고는 중국 송나라의 ‘등문고’를 모방한 것으로 백성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기 위한 제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일반 백성들이 사용한 사례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비록 대궐 밖 문루에 달아 놓았다고는 하나 주관 부서는 다름아닌 의금부였던 것이다. 의금부는 바로 왕의 직속 기관이다. 과연 그 어떤 백성이 의금부의 힘을 넘어 북을 울릴 수 있었겠는가...

 

 신문고를 울리기까지는 매우 복잡한 절차를 필요로 했다. 예를 들어 서울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지역 담당 관청을 거쳐 사헌부에 먼저 호소해야 했다. 한마디로 사헌부의 허가를 받고 나서도 다시 의금부 담당 관리의 조사를 받은 후 신문고를 울려야 하는 것이다. 

 

 지방의 백성들은 더 어려웠다. 지방 거주지의 원에 가서 억울함의 절차를 밟았다는 확인서를 먼저 받아야한다. 다시 도의 관찰사에게 같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리고 한양의 사헌부를 거쳐 다시 의금부로...과연 그 어떤 백성이 이와 같은 절차를 밟아 신문고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글을 못 배운 백성들이 과연 서류하나 제대로 작성 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북을 울린 대부분은 서울의 관리들로 토지나 노비의 소유권 다툼이 대부분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알고 보면 지방 관리들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던 신문고였다. 하물며 힘없는 백성들임에랴.... 사실상 조선의 신문고는 백성들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전시행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신문고는 폼이나 다름이 없었던 장신구였던 것이다.


신문고가 폐지되고 격쟁이라는 것이 신설되었다. 격쟁은 왕이 궐 밖으로 외출을 하는 찬스를 이용해 징이나 꽹과리로 큰 소리가 나도록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였다. 왕이 매일 궐 밖로 나가는 것도 아닌 다음에야 정말 이것을 진정한 소통의 창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억울하다고 모두 격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격쟁의 내용에도 제약이 따랐다. 그 효과가 미미했다는 점에서 신문고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위해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형식에 불과했던 제도로서 그 실용적인 가치를 찾아보기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오죽했으면 고등부의 교과서에서 조차도 신문고와 격쟁을 일컬어 ‘일반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라고 고백하고 있을까...




식자들과의 소통 창구, 상소


다른 소통의 창구로 조선은 상소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일반 백성이 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 관직에 있는 관료나 혹은 과거에 합격한 선비들 전용으로서 그 형식이 구별되는 제도이다. 상소는 그 내용이 왕에게 바로 전달되는 방식이다. 하여 그 절차 역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각 고을의 수령이 상소를 받고, 해당 도(道)의 감사에 이를 올린다. 감사는 접수한 상소를 다시 사헌부에 올린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에 불리한 내용들은 흔히 걸러지기 일쑤였다. 실질적인 상소들은 권력자들이 배후에서 조종한 하급 관리나 선비들에 의해 작성된 것들이 대부분이고 알려진 바대로 고급 관리들의 직접적인 상소의 비율은 크게 낮았다. 간혹 ‘도부상소’라 하여 도끼를 메고 상소를 올린 장면을 목격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의 소(訴)가 못마땅하면 그 도끼로 자신의 목을 쳐 달라는 결의에 찬 상소였다. 그러나 실제로 상소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상의 여론, 삼사

 

흔히 조선의 여론이라 하면 삼사의 중론을 말한다. 즉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라는 삼사의 의견인 것이다. 삼사는 각각 부정 부패등 부정한 관료들을 탄핵하는 기능과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공론을 중시한다는 것이지만 이는 실제로 백성을 위한 여론이라기보다는 권력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집권층의 공론일 뿐이었다. 백성들을 위한 대동법을 시행하는데 100 여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해준다. 여론은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가.. 바로 백성으로부터 나와야 진정한 여론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여론은 사실은 권력의 내부에서 돌고 돌았던 것이다.

 

 

조선 학문의 폐쇠성


이러한 조선의 언론 시스템으로 본다면 조선의 언론은 매우 폐쇄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학문과 사상 역시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선비 혹은 관료 출신들의 자제가 아니면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공직자의 가문이 아니면 관리로 나가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공부를 할 수 있는 일반 백성이라도 먹고 사는 일이 더 시급했다. 그러므로 성리학의 논쟁도 그들만의 것이었다. 권력자들의 학문과 사상이었고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목숨을 내어 놔야 하는 위험천만한 짖 이었다. 


이는 성리학의 理論이 그리 쉽게 우위를 선점 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결국 理는 氣를 누르고 기득권을 지켜가는 매우 유용한 도구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氣를 중시했던 학자들은 대부분 실학적 성격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실학파이며 경세치용 학파라 부르는 여유당 정약용의 사상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담 서경덕과 율곡 이이를 만날 수 있고 잠곡 김육 그리고 하곡 정제두를 만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부국을 꿈꾸던 실학파들은 백성의 경제활동을 중시했다. 백성의 경제력은 곧 국력이라는 인식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실학이 실질적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조선의 국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조선이 마지막 회생의 찬스를 놓친 것은 바로 정조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이 현대 학계에 끼친 영향


학문과 사상의 상대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던 정조 사후, 조선의 학문과 사상은 유일하게 성리학의 것이 되어버렸다. 공자와 주희는 조선 성리학의 교주나 다름이 없었다. 조선 땅에서 성리학이 교조주의적으로 흐른 탓이다. 마치 이단을 배척하듯이 조선의 유학자들은 여타의 이론(異論)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백성들의 삶에 훨씬 더 접근해있던 양명학은 아예 뿌리조차 내리지 못했다. 그 결과 양명학에 대한 현대의 연구가 시원치 못한 상태이다. 신유사옥은 이러한 탄압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정조는 천주교에 관대한 입장이었으나 정조 사후 노론은 정순왕후를 앞세워 신서파의 숙청을 단행했다. 천주교의 탄압이 곧 신서파를 제거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이러한 사상적 환경에서 다양한 학문적 논의는 불가했다. 국지적으로 존재했던 학문적 논쟁은 그마저도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니 氣論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기득권을 버리며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팔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문제는 시대가 바뀐 현대에도 조선의 폐쇄적인 학문적 환경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자신의 견해나 주장과 다른 것들은 무차별 공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계의 환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학계의 환경은 국민의 사유와도 밀접하게 관계한다. 식자들이 출간하는 도서는 곧 국민의 독서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의 발전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지금껏 理와 분리될 수 없다는 氣에 대해서 제대로 연구된 것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비록 연구가 있다 하더라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죽했으면 氣에 대한 올바른 개념도 아직 자리 잡지 못했을까..



사상의 독점이 부르는 비극


氣에 대한 개념의 부재와 인식의 부족은 물리학적 연구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氣論은 서양의 물리학과 깊은 관련이 있고 이는 물질과 현상에 대한 연구 분야이기도 하다. 물리학 연구에서 동양을 압도한 서구는 과학의 힘을 사용해 세계에 커다란 수난을 안겨주었다. 아메리카를 비롯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서구 열강의 강력함 힘 앞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다른 데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사상, 즉 생각의 방법론에서의 차이 때문이다. 조선과는 달리 서구는 다양한 학문적 사고를 해왔지만 사상적 배경은 매우 편협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사유를 해왔던 것이다. 결과는 자신에 대한 이익만을 추구함과 동시에 타자에게는 초유의 비극을 불러왔다. 비록 학문의 다양성을 확보한 서구였지만 사상이 한 곳으로 쏠리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했다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제각기 사상의 독점적 현상은 서로 동상이몽을 꿈꾸도록 했다. 이렇듯 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사상은 심각한 문제점과 그 폐해를 낳을 수 밖에 없다. 일단 타자를 제압하려는 강제력을 행사하게되고 그 우위를 선점하고 나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 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는 주로 부정적인 것이 권력의 법칙이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왔다.

 

어찌 옳은 것이 하나 만 있을 수 있겠는가.. 학문과 사상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이치가 어디 학문과 사상 뿐 이겠는가.. 균형 있는 발전의 중요성은 또한 지역 발전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빈과 부의 차이를 좁혀내는 것도 바람직한 사회상일 것이다. 결국 학문과 사상의 균형 있는 연구와 발전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 모든 영역에 깊이 관계하고 있기에 그 중요성이 더욱 크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다양한 학문과 사상의 올바른 개념을 다수가 공유하고 인식하는 힘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국민의 주체인 우리가 인식해야 할 과제는 아닐런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2-07-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문과 사상의 상대성,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시에 타자에게는 초유의 비극을 불러오는,

저는 이 두 문장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win-win이라는 개념, 저는 참 좋아요.
게임 중에, 가위바위보를 내서 같이 주먹을 내면 별점 네개, 한 사람만 보를 내면 별점 여덟개, 두사람 모두 보를 내면 별점 0개인 게임있잖아요. 언뜻 생각해서는 둘 다 주먹을 낼거 같은데 잘 그러지 못 하는, 상대에 대한 신뢰 게임이요... 저는 그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신문고나 격쟁의 의도는 좋았으나, 역시나 행하는 제도 상에는 문제가 있었군요.
빛좋은 개살구 같은 느낌이네요. 음... 요즘 검찰을 보는거 같기도 하구요. ^^

구구절절 와닿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차트랑 2012-07-05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녀고양이님의 글에 답을 드리지 않았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게되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요 ㅠ.ㅠ

요즘 독서의 의미를 많이 생각하게되었습니다.
다양한 조건들 덕분이지요.
저의 화두는 '독서가 인성에 과연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입니다.
중요한 것은 독서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독서를 이유있는 깨달음의 수단으로 삼는 다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구요.
과연 그럴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들구요..
단지 지식을 얻는 수단으로만 본다면 그럴 수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여전히 저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