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부제는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이다. 책의 제목과 부제만으로 판단 할 때는 저자가 매우 격한 감정을 쏟아 부을 것만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선비정신’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조선의 지배세력이었던 선비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역사적인 증거물들을 통하여 명쾌하게 시도하고자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평가의 기준설정이다. 

 

 




올바른 평가의 기준은 왜 중요한가? 

  

 이 책은 국민들의 ‘선비’라는 용어 인식을 역사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고 그 용어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바탕으로 서술함으로서 ‘선비’라는 용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실상을 독자들에게 알리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라는 대상을 평가해야하고 그 평가를 위해서는 평가의 객관적 근거를 장치해야 했다. 저자는 이 평가의 기준장치를 매우 명료하게 설정하고 있으며 그 근거는 지극히 개관적이고 합리적이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어느 내용보다 가장 값진 소득이 바로 ‘평가 기준’이라는 바로 이 대목이라 여겨진다. 




 바른 평가의 기준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편견은 평가의 오류를 낳는다. 오류는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본질이 숨어있다. 단순히 개인적 범주에서 판단과 정의가 감금된 상태라면 위험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개개의 인식이 타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고, 결과론적으로 그의 사고와 행동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동기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책을 저술하는 주체이다. 시중에 출시되어 읽히는 도서들을 저술한 주체가 역사이든 인물이든 그 어느 팩트에 대한 평가의 적절한 기준을 갖추고 있지 못할 때, 그 결과물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독자들은 그 영향으로 바르지 못한 인식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수많은 과정들이 세대를 거듭한다면 어떤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일까... 단순한 오류의 문제를 넘어 왜곡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이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나라 전체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선비’라는 용어에 대한 올바른 평가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물들을 저자는 이 책에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선비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느 정도 충실했으며, 보다 나은 가치의 창출을 위해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 물론 이는 해당 인물의 시대적 기준에 의거한다. 

2. 인물의 삶이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의의 보편적, 표본적 의미를 지니는가. 현재와 관계하는 역사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3. 인물의 직책, 지위에 부여된 기대에 얼마나 잘 부응했는가. 저자는 이를 인간 본연의 책임감과 해당 능력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상의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면서 이는 보편적인 평가의 기준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한 이 보편적인 세 가지 기준에 의거하여 역사의 인물을 바라보고 평가하여 저술한 관련도서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는 개인적으로 매우 회의적이다. 이 책이 수많은 교양 역사서들과 차별되어야 하며 별점 다섯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 평가의 기준을 명료하게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그를 근거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장치했다는 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높이 살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선비’라는 용어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이유 

최근 미국을 위시하여 경제 열강들이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만난 대한민국은 경제력의 한계에 봉착했고, 이를 수용하는 입장에 있다. 이는 마치 청나라에게 조선의 국왕이 한 겨울 얼어붙은 땅 바닦에 피를 흘리며 머리를 찧던 사건, 즉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적인 수치를 맞본 조선이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국민들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이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시대적 상황이 이러한 때에 대한민국의 출판계,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양서들의 저자들은 ‘선비정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정체성의 일환으로 삼고자 해왔다. 

 

 ‘선비정신’이라는 용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교의 부흥과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말이기도 하다. 유교는 조선을 지배해온 강력한 이념임을 부인 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의 전통 문화적 요소로서 배제할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교의 부흥’이라는 공식은 과연 현대의 우리에게 적합한 성질의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조선의 유교를 현대에 부흥시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역사적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타당성을 부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다. 왜냐면 선비에 대한 저자의 평가기준으로 볼 때 유교는 우리 역사에서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유교라는 조선의 지배이념을 새롭게 이해해야 할 필연성의 재조명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 연유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받들며 조선을 지배해왔던 조선의 선비를 보편적이면서도 엄정한 평가의 기준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현대의 대한민국이 유교를 어떻게 부활시킬 것 인가하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의미를 단순히 우리의 것이라는 미시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때 다시 한 번 국가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경계하고자 한다. 







저자 계승범, 재귀준거의 딜레마를 마주하면서도 조선 선비의 진면목을 드러내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좀 더 넓은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선비라는 인물을 조선이라는 영토 안에 가두어둔 채 미시적인 안목으로 서술한 수많은 교양서들과는 달리, 저자 계승범은 조선의 성리학을 거슬러 중국이라는 대륙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이 책을 읽은 후의 독자들은 분명히 조선에 한정된 미시적 역사인물로서의 선비가 아니라 조중관계 속에서 거시적 선비의 모습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의 공자, 맹자, 노자의 가르침이 중국에서의 유교와 사회와의 관계하는 방식과 대조적으로 조선에서 공맹노자의 가르침을 선비들이 이용하고 있는 방식이 얼마나 다르며 심지어 그 얼마나 통탄스러운 것이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연 공맹노자께서 자신들의 학문을 이용, 대중을 혹은 국왕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조선의 선비들에게 과연 무어라 말했을까...마치 이 상황은 변질된 막시즘에 저항하며 칼 막스 스스로가 막스주의자이기를 거부한 상황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아닐까... 

 

 후대의 우리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조선의 거룩한 선비들이 과연 그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어떤 행동을 했고 그들의 언행이 조선 사회에 끼친 결과물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막연한 개념의 선비’가 아니라 ‘분명하고도 또렷한 조선 선비’의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이 지배했던 조선의 진면목을 조목조목 따져 간다. 저자의 일목요연한 글을 읽으면서 실망을 금치 못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슬픔을 느끼는, 혹은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수많은 역사관련 저자들이 밝혀내기를 꺼려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 가지, 혹은 단편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선비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왜곡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라더라도 말이다. 하여 이제 '선비'라는 명제를 그 누군가는 다루어주어야 하며, 어쩌면 치명적인 아킬레스건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의 치부를 공개하는 일에는 그만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니 말이다. 때론 욕먹을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은 우리의 과거, 즉 현재와 분리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역사를 바로보기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일종의 재귀준거이다. 한 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학자로서 재귀준거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저자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조선 선비들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평가함으로서 미래를 향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문제점과 개선점을 극명하게 제시해주고자 하는 저자의 뜻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한 마디가 있다, "그대가 걸어온 발자국을 되돌아보라, 그리하면 그대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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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02-22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자격지심은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준에 맞게 실천하는 것이죠.
 
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지은이 조셉 캠벨은 비교신화학자라 한다. 그의 저서 ‘신화의 힘’은 마치 대학시절 읽었던 ‘크리슈나 뮤르티와의 대화’처럼 대화의 형식 빌어 신화 및 종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교양서이다. 그런데 예수를 ‘예수=영웅’이라는 등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캠벨의 관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가지게 된 의문이었다. 기존의 기독교적 종교관으로 본다면 예수를 영웅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캠벨의 견해에 대한 이러한 의문과 의아함으로 독서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종교적 혹은 신화적이면서도 범신론적인 조셉 캠벨


그의 사고방식은 서구적인 것으로 출발하면서도 사고의 내용은 지극히 포용적이다. 그의 사고가 출발하는 신화의 거점은 일반적인 종교관을 뛰어넘는다.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분리시켜 인식하는 기존의 폐쇄적인 관점에서 탈피한 신화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바로 우주, 천구라는 거대한 가락과 함께 리듬을 탄다. 이를 증명해주는 그의 번역물이 있다. 바로 노자의 ‘도덕경’이 그것이다.


캠벨의 ‘신화’는 사전적인 의미의 차별성을 지닌 신화와는 다른 개념이다. 캠벨의 신화는 그 범위가 없으며 차별을 두지 않는다. 하나의 신화를 기타의 신화와 분리하지 않는다. 캠벨의 신화는 기타와의 경계를 허문 신화이다. 아니 허물었다기보다는 애초에 경계를 두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잘 알려진 기독교적 신화로부터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샤만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넘나든다. 그는 아프리카의 부시맨으로부터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통섭함을 보여준다. 일개의 샤만의 의식을 종교 혹은 신화와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 한마디로 캠벨은 범세계적인 종교로부터 한 사람의 무당까지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의 경계는 찾아볼 수 없다. 캠벨의 사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관, 결혼(사랑)관, 그리고 타자와의 인간관계 모두를 신화라는 모신(母神)을 통해 해석해낸다. 이것이 바로 캠벨이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캠벨은 현대인들의 삶이 정신문화와 괴리되어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캠벨의 신화는 공자, 노자, 석가, 괴테, 플라톤을 아우른다. 그렇다고 캠벨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문제로 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지극히 인간다운 것으로 간주하면서 독자들에게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며 정신문화와의 접촉을 권하고 있다. 지극히 범신론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리 어려운 이유이다.


그는 ‘정신’은 ‘삶의 향연’이라고 말한다. 정신이 삶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인간은 그 정신을 바르게 향유하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캠벨은 인간을 신의 세계와 분리하여 종속된 존재로 파악하지 않는다. 반대로 신의 세계로부터 인간이 출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신적 존재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일체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신과 자연의 품안에서 삶을 향유하는 존재인 것이다. 캠벨에 따르면 인간은 한 시도 그들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캠벨에게 ‘초자연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며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서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치 자사선생께서 남겼다는 중용(中庸)의 한 장구를 대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게 한다.

 

 이쯤하면 예수를 영웅이라 칭한 캠벨의 관점에 대한 의문은 스스로 풀리게 된다. 예수는 자기의 삶보다 큰 것에 자신을 바친 사람이고 그는 영웅이다. 그는 인간의 영적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했다. 이런 맥락에서 '어머니'도 영웅이다.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통섭하는 일에 자신을 바친 것이 아니라 프랑스를 위해, 어쩌면 자신을 위해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도자'는 될 수 있을지라도, '대단한' 사람이 될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영웅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위해 통섭하는 이, 그가 바로 영웅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렉산더도 더이상 위대한 사람은 아니다. 캠벨 덕분에 '위대'라는 말과 '대단'이라는 말을 구별하여 쓸 수 있을 것 같다.


 

캠벨, 자연 친화적인 조화에의 영감


그는 거대한 우주의 에너지와 신화와의 개연성을 설파하기도하지만, 지극히 작은 식물의 세계를 놓치지 않는다. 작은 식물이 가지고 있는 의식의 세계를 인정한다. 이 대목에서는 마치 오쇼 라즈니쉬의 철학을 읽고 있는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캠벨은 작은 하나의 식물에게도,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도 의식을 부여한다. 캠벨은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끈다.”라고 설파한다. 캠벨의 사고가 가장 깊은 감동을 준 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이 대목이었다.

 

 우리는 인권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에 대부분 공감한다. 인권(人權)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물권(物權)’이다. 물권의 존재가 부정되는 사회에서 인권을 바로 정립하기란 용이한 것이 아니다. 물(物)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자연 환경을 일컫는 말이다. 인간 자신의 환경이 부정될 경우 인간 존재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 즉, 물권이 있을 때 인권도 그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을 캠벨은 식물의 의식세계를 통하여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캠벨이 의식의 세계를 식물에게 부여하고 있다. 하물며 인간임에랴... 인간적 존재가 타자의 종교, 타자의 인종, 타자의 문화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를 캠벨은 식물에 의식세계를 부여함으로서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싶어 한다. 물권과 인권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캠벨의 행간을 잘 읽어내야 하는 이유이다.


캠벨의 통찰력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서적 전승을 사회지향적인 신화로 규정하고 있다. 사회지형적인 신화는 신화와 의례를 자연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간주하는, 즉 인간의 영역에서 자연을 배제시키고 통제 혹은 정복하려는 성격을 가진 신화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 근본적인 요인으로 유목민족의 특성을 들고 있다.  반면, 자연지향적인 신화 혹은 종교는 사람을 돕고 나아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특성을 가진 신화로 간주하며 그 근간을 경작 민족, 즉 정착 농경민족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캠벨의 관점으로 바라 본 2가지 신화의 지향성은 서양과 동양이라는 프리즘에 투영시킬 때 매우 적합한 통찰력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전자의 경우 캠벨은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을 통하여 서로 다른 종교와 그 교도들에 대한 공격성의 증거를 든다.

 

 캠벨은 한마디로 사회지향적인 신화적 성격을 가진 신화를 종교의 실패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그 경계를 초월한 시대의 삶을 인류에게 적용시켜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캠벨은 신적 존재와 인간적 존재, 그리고 자연적 존재의 단절을 강제하는 사회지향적인 신화로부터 자연 지향적인 신화로의 귀환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와 그 역사를 인식하고 있는 독자라면 캠벨의 이러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가 서구인이라는 나의 편견으로 캠벨을 바라볼 때, 위와 같은 사고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서구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루소와 니체는 인류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서양 사상가들이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자연을 떠나려하지 말고 그 품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면서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한 사상가들이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이미 2500년 전에 자연에로의 귀환을 촉구한 바 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동양의 서적들은 자연지향적인 사고를 외쳤던 것이다. 캠벨은 자연 그 자체를 神의 현현(顯顯)으로 바라보고 있다. 서구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나에게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캠벨의 예증


 그렇다고 캠벨의 다양한 생각에 모두 동의를 표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캠벨의 주장과 마주친 적이 있다. 캠벨은 개인이 그가 속한 지역적 동아리와 동일시하지 말고 지구라는 행성과 동일시하도록 하는 신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좀 더 제한적인 시야를 버리고 넓은 시여를 확보하여 상생의 신화를 만들어가자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언 뜻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캠벨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예시는 바로 미합중국이다. 미합중국은 13개라는 별개의 주들이 통합,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 냈음을 매우 바람직하게 평가하고 있다. 캠벨은 미합중국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민족들이 상생을 위해 하나로 통합한 것은 지구라는 행성과 동일시한 예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드러난 피해와 폐단, 그리고 그 비인간성, 잔인성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캠벨의 주장대로라면 13개주는 원주민들과 매우 원만하면서도 그들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으로 그 일을 해냈어야 옳았다. 아니, 원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유도해 내는, 캠벨의 말을 빌자면 지극히 ‘이성적인’,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떳떳한 통합이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그 누구에게도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비극을 안겨주지 않는 그런 통합 말이다. 그러나 미합중국은 그런 통합을 결코 이루어내지 못했다.

 

  캠벨은 ‘인디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 부른다.’ 했다. 캠벨은 한 술 더 떠서 세상 만물을 ‘그대’라 부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 것’을 바라보는 자아와는 다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쟁은 상대방의 사람들을 ‘그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합중국은 13의 타자들이 서로를 ‘그대’로 본 반면, 원주민들을 ‘그 것’으로 보았다.

 

서구인들은 대 항해시대 당시 7천만명에 달하는 남북미 아메리카의 원주민의 목숨을 90% 사망케 했다. 쉽게 6천만명이 넘는 인구를 사망케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통합을 이루어 낸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5천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원주민들을 강제로 끌고갔으며 '그대들'을 '그 것들'으로 대했다. 물론 5천만명이라는 수치는 서구인들의 통계이므로 그 수치를 축소했을 가능성이 높아 믿을 수가 없지만 말이다. 캠벨은 미합중국의 통합에서 장점만을 부각시키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그 이후에 발생했던 인간의 씻어낼 수 없는 비극에 대해서는 그만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이러한 캠벨의 시선을 나는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절대로 별점을 5개 찍을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다.

 

  

 

역자 이윤기선생...

이 책은 지극히 신화적 혹은 종교적이면서도 종교의 냄새가 나지 않는 캠벨만의 매력은 지닌 책이다. 읽기를 마치며 나는 역자 이윤기선생이 왜 이 책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윤기선생 역시 신화에는 일가견을 가진 분이다. 신화와 관련한 이윤기선생의 저술을 읽어보신 분들은 그만의 독특한 해석법을 잘 아실 것이다. 이윤기 선생은 전통적인 신화의 해석을 새롭고 매우 뛰어난 통찰력으로 재해석하여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간 분이다. 이윤기선생의 번역 혹은 저술들은 매우 일관성이 있어 좋다. 일관성은 그 자신의 사상을 전달하되 독자들을 혼란에 빠트리지 않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이윤기선생께서 이 책을 번역한 것은 캠벨의 입을 통한 책이지만 바로 이윤기선생께서 우리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전언을 담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애써주신 것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 깊은 고마움을 전해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신화의 힘'을 읽도록 줄기차게 뻠쁘해주신 알라디너들께 또한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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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15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공님, 조지프 캠벨과 조셉 캠벨은 다른 사람인건가요?
저는 신의가면 세트 네권을 사놓고 아직 못 읽었어요... <신화의 힘>은 종종 어디서 봐서, 제가 가진 책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요. 여하간... 차트랑공님의 무한한 지름신 인도 힘에 의해서 장바구니로 들어갑니다. 감사합니다.

차트랑 2012-02-15 13:32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신 조지프와 조셉이 아무래도 동일 인물인 듯 합니다^^
조지프를 조셉이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가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책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답니다.
저도 그런적이 있었는데
기억해보니 버렸더라구요 ㅠ.ㅠ
'무소유'가 제게는 대표적입니다.
법정스님께서 돌아가시자 무소요가 겁나게 뜨더군요.
나도 저 책 있는데...하고 책장을 뒤져보니 없는거에요.
가만 생각해보니 버렸지 뭡니까요 ㅠ.ㅠ
후회 막급, 때는 늦였죠 ㅠ.
버린 곳을 다시 찾아가보니 그게 가만 있을리가 있나요? ㅠ.ㅠ
조지프 캠벨...저도 어느 분의 강력한 뻠쁘로 읽게 되었는데. 좋으네요
책장을 넘길수록진 좋아지는 그런 책이더라구요.
사실 처음 몇장 읽어보고는 반품할까 생각했답니다 ㅠ.ㅠ
반품을 받아줄 분이 계시거든요.
뻠쁘해주신 알라디너입니다 쿠더덩^^
 
철학교사 안광복의 키워드 인문학
안광복 지음 / 한겨레에듀 / 201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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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사 안광복


안광복 선생님의 책을 접한 것은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였다. 고등학교 선생님께서 저술한 철학서적인지라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 것이었는데 서양 철학에 서툰 나에게 그동안 접해본 그 어느 철학 안내서보다 매력적인 책이었다. 우선 글 솜씨가 아주 맛깔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책을 써주었다. 서양 철학을 이토록 쉽고 재미있게 쓸 수도 있구나...싶을 만큼 읽는 내내 독서의 즐거움을 내게 주었다. 그리하여 안광복님의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키워드 인문학>은 그렇게하여 읽게 된 것이다. 더구나 ‘철학교사’ 라는 용어가 없는 우리의 현실에서 ‘철학교사 안광복’이라는 표현은 새로우면서도 내게는 아름다움마저 느끼도록 해준다.

 

 우리에게는 철학교사라는 말은 사실 낮선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광복님의 책을 읽은 후 에는 이 표현이 전혀 낮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느껴져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어쩌면 정말 잘 어울리는 말이로구나 생각되며 ‘철학교사’라는 표현이주는 정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나에게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독서를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배가 고파지는 나를 발견한다’. 특히, 안광복님이 써준 이 책은 그러하다. 독서를 부채질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고, 독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힘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키워드 인문학>을 읽으며 열심히 밑줄을 긋기도 하고 소개해준 책의 제목을 알라딘의 검색창에 올려놓고 엔터키를 누른다.


행여 이미 읽은 독서의 목록을 발견하기라도 할 때는 그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안광복님도 이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구나하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책은 우리에게 사고를 유도한다. 단지 읽고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 사고를 하도록 권고하기 때문인데, 이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발생하는 독서의 자연스러운 파급효과이다.


<키워드 인문학>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 안에는 키워드들이 들어있다. 2권의 책을 읽은 후 철학교사인 저자가 자신의 시선을 담은 키워드를 추출해냈다. 저자가 읽은 책을 모두 합하면 100권에 달하며 모두 50개의 키워드가 들어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1장 안에는 모두 18권의 책을 9개의 파트로 나누어 keyword의 번호를 매겨가며 내용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이리하여 독서와 키워드와의 관계 속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 것이다. 저술의 방식은 많은 독서와의 연계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발상이며 구성이 아주 좋다. 이는 기존의 철학서들에서 보여주는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하는 방식이 주는 일방적인 독서의 형태를 탈피하여 사고의 확장을 유도한다. 즉, 독자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진정한 독서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매우 유익한 책인 것이다. 

독자가 저자와 함께 책을 읽어가면서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각 장의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1장 생활 속의 ‘ism'

이곳에서는 파시즘, 유토피아니즘, 경제 프랜들리, 토지 공개념, 자본주의 정신, 자유주의, 유러피언 드림, 마키아벨리즘, 똘레랑스 등의 키워드가 들어있다. 이제 왜 키워드 인문학인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는 세계를 400여년 동안 영향력을 미쳐왔던 마키 아벨리의 군주론으로부터 파시즘과 자유 그리고 똘레랑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관용과 폭력, 그리고 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키워드의 성찰들이다. 


이상의 키워드들은 그 어떤 키워드들보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들이다. 자본주의 세계는 첨단 과학을 등에 업고 점점 더 발전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굶주림과 질명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만 가는 인류의 딜레마와 현대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과거 나치즘과 파시즘이 전 세계를 공포의 도나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적이 있었다. 대령 학살을 의미하는 홀로코스트라는 명칭은 나치즘의 산물이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다를 때 상대방을 국수주의니 파시즘이니 하는 과격한 언어들을 무기로 휘두르기 일쑤이지만,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히틀러의 국민은 알코올에 중독되기라도 하듯이 히틀러의 광기어린 통제와 배후 조종에 취해갔다. 그리고 당시 독일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무슨 짖을 저지르고 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나치 당원으로서 인정받고 있는 엘리트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고 약탈하면서 조선의 국민과 문화 그리고 조선의 재산을 말살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조국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들은 그렇게 조선을 죽여가면서 스스로 엘리트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조선의 비극이자 인류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경제라는 이름으로, 자유주의 정신의 이름으로, 국수주의라는 이름으로 그 누군가를 현혹시키려했거나 현혹당한 적은 없는지, 아니 그 어느 국가가 또 다른 국가를 상대로 그 ism들을 앞세워 상대방의 국가야 어떻게 되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데 몰두하지는 않았는지 깊이 성찰할 일이다. 대항해 시대의 그 참혹하고도 혹독했으며 잔인했던 식민지 정책처럼 말이다.

이러한 연유로 독자인 우리들은 그 -ism 이라는 껍질 속에 포장되어있는 그 유혹과 알맹이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매우 중요한 첫 번째 이유이다.


 2장 선전, 선동 그리고 진실

2장의 키워드는 넛지, 프로파간다, 스토리텔링, 레토릭, 인지오류, 스티커이미지, 쿼터비즘이다. 모두 인지의 오류를 유발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용어들이다. 넛지는 타자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기술이다. 그 타자들은 절대로 억지로 이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타자들 스스로 원해서 이끌리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파간다나 레토릭(수사학)과 별반 다른 성질이 아니다. 결국 여론은 이러한 넛지의 기술이나 프로파간다 혹은 수사학으로인하여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해가게 된다. 물론 대중들은 스스로가 어느 한 쪽 방향으로 유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는 파시즘이 독일의 국민들을 이용한 방법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대중들은 그렇게 타자의 힘에 이끌려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마치 스스로의 의지대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지기 오류를 범하게 만는다.

 

이러한 대표적 사례로 저자는 드레퓌시 사건을 들고 있다. 드레퓌시 사건의 전말을 알고있는 독자라면 매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키워드들을 우리의 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TV의 광고는 넛지 혹은 프로파간다와 레토릭 또는 스티커이미지를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될 것이다. 어느 유명 연예인을 등장시킨 광고는 그 효과가 대단히 크다. 여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집단의 각본과 사실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차이점이라면 상업성을 띈 광고라는 점 뿐이다. 그러나 대중의 대변인을 내세워 그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넛지나 프로파간다에서 여론 몰이를 위해서 유명인사의 대중 장악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결국 선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지력보다는 감정 호소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그 감정적 몰입은 유명인이라는 매개체를 통하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으로 먹혀든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판단을 스스로 잘 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키워드 넛지, 프로파간다, 레토릭등에 의하여 중심을 잃고 말 것이다. 저자는 말하고 있다. 말재주가 정신보다 화려해질 때 인간의 영혼은 썩어가기 시작한다고.... 우리가 곰곰이 사고하고 그 이면을 잘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인문학을 해야하는 두 번 째 이유이다.


3장 의식주

키워드는 옷의 철학, 한식의 세계화, 공장식 농장, 행정 복합도시, 가족 해체, 소셜 네크워크, 아파트이다. 의식주는 인간 생활의 근간이다. 그러므로 이 키워드들은 인간 생활에서 그 어나 하나라도 제외될 수 없는 것들이다. 패션은 국가의 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먹거리는 세계를 돌도 돌아 새로운 먹거리로 변모한다. 패션은 옷을 입는 사람의 생각을 좌우할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사고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값싸고 대량 생산 공장 체제에서 만들어지는 음식물들을 매우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우리가 매일 입고 매일 먹는 의식의 이면에 감추어진 사고들을 이 책을 통해서 고찰 해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아파트의 천국이다. 대한민국의 성인들은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서 평생 일을 해야 한다. 좋은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이 대한민국 다수의 꿈이 되어버렸다.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야 결혼을 하기에도 유리하다. 어느 동네에 어떤 아파트를 가지고 사느냐가 개인의 성공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버렸다. 아파트는 그렇게 대한밈국 국민들의 꿈이자 보금자리이다.

 

 그러나 아파트라는 공동체는 지극히 단절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그 어느 대보다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듯 보이지만 우리는 더더욱 고독하고 이웃과 단절하여 살고 있다. 범죄율은 더욱 늘었고, 이웃에 누가 살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누군가와 소통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단절을 경험하는 사회는 인터넷으로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디와의 소통이 시작된 것이다. 인간적 신뢰의 바탕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의 온라인 소통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이다. 쉽게 상처받고 쉽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사회는 상처 투성이다. 이제 온라인 소통의 방식에도 변질이 오고 있다. 최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신상털이는 부정적 측면의 좋은 예이다. 아는 아파트라는 단절된 주거형태가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의 사회는 건전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가기 위해서 먼저 깨달아야 할 것들이 있다. 올바른 문제 인식이 그것이다. 정크 푸드에 를 먹고 단절된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의식주에 대한 올바른 문제의식, 이것은 우리가 또 인문학을 해야하는 세 번 째 이유이다.


4장 과학 종교 교육

키워드는 사회진화론, 통섭, 시민종교, 자유, 학교붕괴, 교정, 입시지옥, 1만시간의 법칙이다. 과학에 대한 오해는 때론 엉뚱한 괴물을 낳기도한다. 다윈의 이론 ‘진화’를 ‘진보’ 하는 말로 왜곡하면서 다윈의 의도는 사라지고 ‘경쟁과 진보’라는 엉뚱한 해석으로 재탄생한다. 정치가들은 그렇게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을 만들어 냈다. 결과물은 히틀러였다.

 

이에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은 통섭이다. 과학, 정치, 경제, 사회를 통섭론으로 접근하는 것을 요구하는 시대인 것이다. 학문을 어느 특정 분야로 분금시킬 때 발생할 수 있는 학문의 ‘왜곡’은 원래의 의도가 변질되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복잡한 세상의 이치들을 특정 학문이라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설명은 되려 위험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붉은 악마는 과연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독일인들은  나치 전당대회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올바르지 않은 열정은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올바른 시민 종교를 잃어버린 열정의 위험함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의 ‘대한민국’이 진정 올바른 시민 정신이 되기위해서 정체성이 올바르게 정립되어야하며 건전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올바른 ‘대한민국’을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학교의 붕괴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닌 듯하다. 통섭의 이유가 분명한 것 처럼 교육에서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고의 균형을 요구하고 있다. 단편 일률적은 교육의 방식은 참다운 스승을 양산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악순환은 반복되고 새로이 커가는 시민들은 참다운 스승이 되어주지 못한다. 결과는 인간 소외이다. 과학 기술만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은 아니다. 학교 군대, 교도소는 공통점이 있다. 규칙은 정해져있고,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진다. 인간의 개성은 무시되고,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특히 학교는 입시 지옥과 가름이 없다. 경쟁만 부추기는 사회 집단이 학교인 셈이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그에 필요한 인제의 다양성도 함께 필요한 사회이다. 이제 교육은 경쟁과 성과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목적을 잃은 인간의 자화상이 아닌 인간과 사회를 위한 진정한 교육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우리가 인문학을 해야하는 4번째 이유이다.


 

5장 왕따, 갈등 그리고 전쟁

키워드는 상무정신, 전략 전술, 십자군 전쟁, 아힘사, 왕따, 우분투, 지정학이다. 크고 작은 전쟁은 늘 인류와 함께했다. 갈등은 인류의 키워드이다. 문제는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상무정신에서 독자들은 전쟁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군인은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군인은 절대로 전쟁 범죄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병법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십자군 전쟁은 이런 점에서 되돌아보고 반성을 해야하는 전쟁이다. 살생을 최대한 줄이는 전쟁, 전쟁을 하기보다는 전쟁을 하지 않고 이기는 전쟁, 간디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를 일궈냈다. 그래야 국가간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관계로 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왕따가 존재한다. 서로 연결 고리를 찾아내면 그 고리에 속하지 않는 타자는 왕따가 된다. 올바르지 않은 의식이 자리 잡은 지역이기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에는 ‘우분투’라는 사상이 있다. ‘우분투’란 ‘인간은 다른 사람 덕분에 인간이 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국가간에도, 지역 사회간에도, 개인간에도 상대방이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우분투 사상을 본받을 때이다. 인문학을 해야하는 5번째 이유이다.


6장 자본주의 생존학

키워드는 공짜, 과시적 소비, 쇼핑 중독, 욕망, 감정 노동, 일중독, 사추기, 노예노동이다. 인간은 욕망한다. 물질에 대한 욕구는 자기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 하다.  나아가 스스로 타자와 구별되고 싶은 욕망이 일조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과소비가 생겨나고 흔히 말하는 된장녀도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라캉의 말처럼 인간은 인간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는 것인가. 사회는 이를 더욱 부추기기라도 하듯이 차별화를 외치며 상품을 쏟아 낸다. 소비자는 그 차별화를 구가하고자하는 욕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 지본주의에 매우 부합하는 인간의 한 면모이다. 기계 문명을 발달하고 첨단 과학이 이를 뒷받침한다. 차별화되고 물질을 더욱 많이 소유하면서 사회는 행복을 느낀다. 인간의 행복을 물질에서 찾을 수 밖에 없는 사회에 다다랐는가...

 

인간의 수명은 점점 늘어만 간다. 나이가 들수록 연륜은 높아지고 가능한 일들은 줄어들기보다는 실제로 더 많아진다. 그러나 인간이 이러한 욕구에 굴복하는 한 한평생 노동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노동의 노예는 인간을 소외시킨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 늙어서도 욕망에 사로잡힌채 철저히 소외감을 느끼며 고뇌할 수 밖에 없는가.... 우리의 욕망을 되돌아 볼 때이다...이것이 인문학을 해야하는 6번째 이유이다.   


7장 기타 생각거리들

키워드는 호모 루덴스, 시뮬라르크, 괴물, 영어 공용화등이다. 이 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키워드는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이다. 우리는 스포츠에 열광하고, 음악에 열광하며 온갖 놀이를 즐기고 싶어하는 인간이다. 공정한 스포츠는 종교와 인종, 그리고 이즘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생존하기 위해 인간인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자신들이 가진 진짜 모습을 위장하거나 보여주기 위해 시뮬라르크를 사용한다. 시뮬라르크는 실제의 이미지보다 훨씬 더 좋은 이미지로 변모한 것이다. 그리하여 타자들에게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된다. 오히려 진짜보다 복제가 더 훌륭해 보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대중들은 이러한 시뮬라르크에 너무 익숙해있다. 진짜가 아닌 가짜에 더 높은 평가를 내리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서양의 어떤 예술가는 복제와 오리지날 중 어느 것이 진짜냐하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복제 작품으로 서울에서 전시를 한 적이 있다. 수많은 인파들이 그 전시회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 예술가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분명 시뮬라르크와 오리지날은 구별되어야 한다. 자신의 시뮬라르크를 진정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과연 정녕 나는 누구인가... 나 자신인가 나의 시뮬라르크인가... 그렇다면 자신의 진짜 모습과 위장된 이미지 중 어느 것이 진짜냐를 가릴 필요는 없어질 것이다. 진정한 자아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것으로부터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영어의 공용화를 주장하는 사태에 이르른 시점이다.  과연 진정한 자신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면서 우리의 말과 글을 잊고 사는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의 언어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인문학을 해야하는 7번째 이유이다. 이렇게 키워드 인문학은 인문학 존재의 이유를 깨닫게 해준다.


<키워드 인문학>은 이렇게 다양한 키워드들을 독서를 통하여 발견하게 해준다. 또한 다양한 책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한다. 인간과 여타의 동물을 구별 짖는 것으로 다양한 것들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인간적 감정, 인간의 이성, 도구의 사용, 과학의 발견과 진보, 직립 보행, 술을 마시는 인간, 넥타이를 맨 인간 등등...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유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녕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독서이다. 왜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독서가 존재하는가...우리가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짖는 가장 분명한 이유이다.  

 

 독서는 인간에게 끊임없는 사고를 권고한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한 우리는 사고의 동물일 것이다. 사고는 우리에게 보다 합리적이고 보다 도덕적이며 보다 타자를 이해하도록 하는 매체가 되어 준다. 타자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독서를 해야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인문학을 해야하는 이유이며 인류를 위해 보다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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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2-02-0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게 쓰느라 애쓰셨다고 일단은 추천부터 한 방^^;

차트랑 2012-02-08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언젠가부터 독서 노트를 작성하는 버릇이 되었답니다.
아마도...'세한도'라는 책일 것입니다.
세한도를 읽고 그 감동을 어찌할바 모르고
노트를 작성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독서 노트를 하는 버릇이 생긴 것입니다.
위의 리뷰도 저의 노트에서 가져온 것이랍니다.

노트를 하다보니 쓸데없이 길어졌더라구요.
그러나 기왕에 쓴거..하면서 포스팅을 했답니다.

아래의 애절양(19금)과 과거에 쓴 몇 개의 페이퍼는
저의 독서노트에서 가져온 것이구요..
쓸데없이 길게 쓴 글치고 볼거 별로 없답니다 ㅠ.ㅠ
그저 자기만족적인 일종의 표현이라 여겨주셔요~

나중에 세한도에 대한 페이퍼를 새로이 작성한 계획입니다.
제가 세한도에 반해서 고생좀 했거든요 ㅠ.ㅠ
추천을 날려주시고...고맙습니다 진주님~

라로 2012-02-0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차트랑공님 어떻게 설정하셨는지 모르지만 TTB2광고 부분이 하나도 안 나와요,,^^;;
설정에 다시 가셔서 잘 되었는지 확인해 보시거나
아니면 책을 담으실때 끝까지 그 과정을 하지 않으시면 지금처럼 광고 부분이 안떠요,,
어제 댓글을 달때도 그래서 말씀을 드릴까 하다가 뭐 하고 계시는 중인지 알고 말씀을 안 드렸는데 오늘도 안보여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추천해주신 세한도는 꼭 읽도록 하겠습니다.^^

차트랑 2012-02-08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해주신 광고에 관해서..
제가 무엇인가를 잘못한 것이 분명한데요..저렇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해보려고(보기가 않좋습니다요 ㅠ.ㅠ)
했지만 도대체가 안되더라구요
알라딘에 문의를 해볼까하다가..
사실은 문의를 했었습니다 ㅠ.ㅠ

영상물을 포스팅하고 싶어서 알라딘에 문의를 했었는데
전에 말씀드린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답변이와서
에구, 안하고 말지...^^
그렇게 지내다가 나비님께서 방법을 잘 알려주셔서
지금은 포스팅하는 방법을 제가 알게되었잖아요?^^

마찬가지로 서재의 관리도 그러하답니다.
문의를 해봤지만 영 알아들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역시, 에구 안하고 말지 ㅠ.ㅠ
그러고 있는 중이랍니다.

아, IT의 세계는 정말 사람을 어렵게 한다니깐요^^
그래도 이런 저의 아픔을^^
털어 놓으니 속은 좀 시원하네요.
고맙습니다 나비님~

라로 2012-02-08 10:44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책을 담으실때 한권 담으실때마다 과정이 있잖아요,,그 과정을 다 안 마치신것 같아요,,수고스러우시겠지만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해 보세요,,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이에요,,^^;;

잘잘라 2012-02-0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는 주거 문제 해결이라 할지 현대인의 비애라 할지 자기 손으로 판 무덤이라 할지.. 저는 아파트, 허공을 탈출(?)하여 땅에 발을 딛고 살겠다는 원대한(또는 소박한) 목표를 갖고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 지금도 몇 십억씩 주고 아파트를 사는 사람들.. 아무리 수백억 부자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차트랑 2012-02-08 23:51   좋아요 0 | URL
땅에 발 디디고 사는 것,
역시 저의 꿈입니다요 메리포핀스님~
꿈이 이루어질 날이 꼭 올 것입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메리포핀스님~

잘잘라 2012-02-12 15:58   좋아요 0 | URL
댓글은 잘 안쓰지만 매일 한번씩 다녀가는 메리포핀스입니다^^ 항상 관심 가지고 님의 글을 읽고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요요~^^

마녀고양이 2012-02-08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를 할수록 더욱 배고파지는" 에서 완전 공감입니다.

세상의 생각을 조금 알게 되면, 모르는게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요즘입니다.
잘 된거 같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저는 앞으로 왕창 더 숙이게 될거 같아서요. ^^

그런데, 차트랑공님두 컴터랑 별루 안 친하시군요?
위의 TTB 광고가 텅~ 비었는걸 보니,, ^^.

차트랑 2012-02-08 23:5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공감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제가 고개를 많이 숙여야 ㅠ.ㅠ

TTB광고를 어떻게 해보려다가 그만 망쳐버리고 말았지 뭡니까요 ㅠ.ㅠ
도저히 안되더라구요 그래서 그만 두기로 했는데...
다시 한 번 해볼 생각입니다^^
텅 비어있으니 쩜^^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님~

차트랑 2012-02-0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님 조언 고맙습니다
찬찬히 다시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재의 머리가 허전해서...
대머리가 된 기분 ㅠ.ㅠ
아직 대머리가 될 나이 아닌뎅 ㅠ.ㅠ

차트랑 2012-02-12 0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메리 포핀스님~
 
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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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의 탄생은 진정한 세계 인문학의 탄생이다. 동양의 철학이 서양의 철학과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르며 소중한 것이고 그 가치는 무엇인지 통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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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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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의 영화 매트릭스를 지젝의 눈으로 관찰하고 철학한다. 이 책은 지젝이 독자들에게 매트릭스에서 함께 철학하기를 권유하는 매력적인 책이다. 매트릭스를 뛰어넘는 철학을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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